마인드헌터
존 더글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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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의 그림을 보라." 나는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해왔다.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피카소를 이해했다거나 잘 알고 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간특한 연쇄 살인범은 화가가 캔버스를 구성하듯이 자신들의 살인행각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직한다. 그들은 자신의 살인행위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회가 거듭될수록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 켐퍼를 직접 만나서 면담한 것은 연쇄 살인범을 평가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그의 작품(범죄행위)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나와야 한다.

세상에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이란 없다. 당연히 동기가 없는 범죄도 없다. 혹은 정말 이유가 없는 무차별 살인일 경우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동기 혹은 그 징조를 미리 알아낸다면 벌어질 수도 있었던 사건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바로 프로파일링의 시작일 것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모든 끔찍한 범죄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절박한 질문이 제기된다. 도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이기에,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범죄 현장 분석과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는 노력이다. 행동이란 인성의 반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살인범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또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살인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되풀이 해 온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일을 평생 해온 이 책의 저자 같은 범죄 수사를 하는 이들의 일상이 그렇다. 이 작품은 미국 FBI '살아 있는 전설'이자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의 제이슨 기디언의 실제 모델이자 영화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수사관들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이다. 현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NETFLIX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CSI 같은 인기 드라마나 숱한 스릴러 영화들을 통해 누구나 과학수사, 프로파일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인 존 더글러스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도, ‘연쇄 살인범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FBI에 입사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신입요원과 경찰관 교육을 담당했고, 수감 중인 살인범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를 해 수많은 범죄 사례들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수사에 적용하게 만든다. 최초의 프로파일러인 셈이다. 물론 처음에는 사회와 FBI 모두 범죄심리학과 프로파일링 기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2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을 비롯해 끔찍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프로파일링 기법이 하나의 수사 및 검거 기법으로 인정받게 되고,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이 나온 지 100, 그리고 셜록 홈즈가 명성을 떨친 지 50년이 지나서야 행동 프로파일링이 소설책에서 뛰쳐나와 현실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사건을 맡으면 관련 증거와 사건 보고서, 현장 사진과 설명, 피해자 진술서, 부검 소견서 등을 모두 수집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숙독한 다음,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범인처럼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구체적 과정을 설명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나도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양들의 침묵>을 쓴 토머스 해리스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범죄 사실과 관련해 나에게 많은 자문을 받았다. 물론 그런 자문이 소설을 쓰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해리스 자신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소설 속의 인물들을 창조해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하면, 그도 우물쭈물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쓰다 보니 작중 인물이 떠올랐다고 대답할 것이다.

워낙 추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많이 읽다 보니, 실제 범죄 심리학이나 법의학, 수사 기법 등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관련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어 많이 찾아 읽었는데, 대부분 개론서 느낌이 강해 조금 가볍거나, 반대로 전문 용어가 난무해서 일반인들이 다가가긴 조금 어렵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지난해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가 집필한 프로파일링에 관련된 책이 흥미로웠는데, 그 책 마저도 <마인드헌터>에 비하면 굉장히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이 작품은 프로파일링에 관한 압도적으로 완벽한 책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 분량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담고 있는 내용 때문에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범죄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묘사와 범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만 페이지가 계속 지속된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그것도 거의 육백 페이지에 가까운 두툼한 분량으로 말이다. 거의 쉼표 없이 미국 최악의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사례들이 계속 이어져서 잠시도 한 눈을 팔 겨를이 없는 빡빡한 책이지만, 그만큼 몰입도가 뛰어나 웬만한 스릴러 작품들만큼이나 굉장히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25년 동안 살인범의 마음속을 넘나들며 축적한 거의 모든 경험과 수사기법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온갖 잔혹한 살인사건의 면면과 검거에 실패한 범죄자들에 대한 기록, 최악의 흉악범들이 털어놓는 엄청난 살인 행각과 연쇄 살인과 강간 수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기까지의 전 과정과 수사관들의 활약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이 상세하고 리얼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범죄심리학, 수사기법, 프로파일링에 관련된 내용으로는 앞으로도 이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 어떤 책도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살인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혹은 범죄 소설을 즐겨 읽어 이제는 웬만한 작품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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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2. 에티켓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2
윤태호 지음, 김현경 교양 글, 더미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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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오리진' 시리즈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권 보온에 이어 2권은 에티켓 편이다. 전작에서 우리는 열을 지키는 '보온'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36.5도에서 1~2도만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존재이니, 외부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봉투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

'당신 역시 나를 존중해줘야 한다.'

‘나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 너무 다가오지 말아달라.’

‘나와의 거리를 유지해달라.’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회에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생존 기술이자 본능이라는 에티켓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윤태호 작가는 말한다. 상대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미션과도 같다고. 매우 어려운 일이나 꼭 해내야 하고 유지해야 하는 감수성이라고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아가게 된다. 상대를 매우 싫어하거나 매우 좋아한다면 자신의 행동 노선을 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진짜 어려운 것은 평범한 관계이다. 적절한 거리 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무례하고 무심한 사람이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상대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서로를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로봇은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로봇이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을 베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친절은 로봇이 모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형식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문 열어주기..상대방이 말할 때 마주보며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활짝 웃기,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기 등. 친절한 로봇을 만들려는 사람은 친절의 이런 형식적인 요소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요소들을 우리는에티켓또는매너라고 부르고, 이미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가르치고 있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들은 그들에게 매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같은 건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춘기만 되어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거나 허락없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부모들은 또 당연히 뭐가 그리 까탈스럽냐고, 부모가 한 집에 사는 자식 방에 들어가는 게 뭐 굳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냐고 되묻기 마련이고 말이다.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에 한 번이라도 타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타인들과의 비좁은 거리. 그 시간대에는 그 누구도 적절한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출퇴근하는 현대인들은 그걸 또 당연히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불편으로 여긴다.

 

봉원이네 집에서 하숙하는 과학자 친구들은 아침부터 화장실 전쟁을 치른다. 1층에 달랑 하나 있는 화장실을 분식집 가족이랑 집주인네 딸하고 아들 등... 엄청난 인원이 함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투가 한밤중에 콘센트 옆에서 드륵소리를 내면서 충전을 하는 바람에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 주인집 할머니는 아침부터 봉원이네 집에 처들어 와서는 소란을 피운다. 봉투는 별 생각없이 봉원을 따라간 분식집 가게에서 냉장고 전원을 빼고 충전을 했다가, 음식물을 죄다 상하게 만드는 대형사고를 쳐서 나선녀 아줌마에게 된통 혼이 난다. 화가 나서 떨어지라고 소리치는 아줌마의 모습에 놀란 봉투는 사람들 간에 서로의 적절한 거리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마다 가까워지기 위해선, 지켜야 하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윤태호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에티켓'은 일종의 생존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사물화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해서건 강요해서건. 그래서 때로 우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나 보다.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만큼 약속도 많아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에티켓을 지키는 일이고 에티켓을 지킨다는 건 나에게도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우리가 서로 허용한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보호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 거리를 유지해주세요.

 

 

 

1부 오리진 만화가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연결되는 2부 오리진 교양에서는 에티켓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에티켓과 예의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에티켓의 역사와 문화상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들로 에티켓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조절하는 현상처럼, 일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문화가 마치 제2의 본능처럼 작동하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 적인 예로 텅 빈 전철을 탔을 때 사람들이 팔걸이가 있는 양쪽 가장자리에 먼저 앉는 경향을 들 수 있겠다. 전철에 자리가 차는 순서를 보면, 정말 나도 그렇게 앉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지면서 각자 자기 위치를 방어적으로 고수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 속 순간에서 조차 말이다.

 

에티켓은 '체면'과 관계가 깊은데, 체면 차리기는 매우 인간적이면서 사회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대부분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에티켓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마련이다. 이미 누군가 체면을 잃고, 그 결과 다른 사람까지 민망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복구 의례 네 단계도 매우 흥미로웠다.

 

윤태호 작가의 '오리진' 시리즈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누구나 살면서 생각해보거나 고민해봤을 만한 부분들을 그저 일상 속 스케치로 쓱쓱 그려 보여줄 뿐이다. 게다가 테마부터 무려 '교양 만화'이다. 뻔하거나 지루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짧은 만화 속에 감정을 건드리는 대목들이 매번 존재한다. 5~6세 정도의 지능을 가진 AI 로봇 '봉투'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게 되고, 이해하고, 배우게 되는 그 과정들이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뭔가를 두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부분들이지만, 그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혹은 사는 게 너무 바쁘고 고되어서 잊고 있었던 그것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그 순간들이 참 감동적이었다.

 

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오리진' 시리즈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권 보온에 이어 2권은 에티켓 편이다. 전작에서 우리는 열을 지키는 '보온'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36.5도에서 1~2도만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존재이니, 외부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봉투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꼭 아이들을 위한 만화로 된 과학, 역사 동화 종류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어른인 내가 읽기에도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운 대목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정말 전체 100권을 다 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내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꼭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리즈이다. 다음 시리즈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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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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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 세계에서 이보다 큰 스포츠 대회는 없다. 브라보 대원들은 그 거품 낀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그들은 이틀 후면 이라크에 재배치되어 남은 11개월의 복무를 마쳐야 하지만, 지금은 온갖 미국적인 것이 자궁처럼 안전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다. 풋볼, 추수감사절, 텔레비전, 여덟 종류는 되는 경찰과 보안요원, 그리고 3억 명의 호의적인 국민. 클리블랜드에서는 한 노인이 몸을 떨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이 바로 미국이야.”

플러시천을 씌운 리무진 좌석에는 모두 열 명이 앉아 있었다. 브라보 분대의 남은 병사 여덟 명과 공보부에서 나온 호송관, 그리고 영화 제작자. 빌리와 브라보 분대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적들이 아군을 쏘고, 그래서 무작정 싸워야만 했던 이라크 전투 영상으로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어 승전 여행 중이다. 그들은 곧 전설적인 텍사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 하프타임 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무려 데스티니스 차일드와 함께 말이다. 이야기는 그들이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전쟁터를 향해 스타디움을 떠나는 데서 끝이 난다. 그렇게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이야기들과 이 주라는 기간 동안 승전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각자의 고향집 방문과 전쟁이 벌어지던 순간의 과거가 교차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댈러스 카우보이스와 시카고 베어스의 풋볼 경기일에 데스티니스 차일드가 공연하고 군복 차림의 미군들이 행진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작가인 벤 파운틴은 그것을 보고는 그때 등장한 마르고 검게 그을린 군복 차림의 군인들과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현장에 있던 그들이 광란의 한복판에 떨어진 그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쟁을 한낱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행태와 군인들이 느꼈을 혼란과 절망이 고스란히 담기게 된 것이다. "전쟁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끔은 전쟁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나 알지." 라는 극중 대사처럼 이것이 바로 미국의 실상이다. 이 작품은 여전히 전쟁의 광기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전쟁 강박을 여과없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영웅 대접을 받는 건 고달픈 일이며, 시민들과의 접점인 통로 쪽 좌석에 앉으면 그 고달픔은 배가된다. , 감사합니다. , 부인,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빌리는 브라보 대원들의 사인을 원하는 시민들이 내미는 팸플릿을 대원들에게 돌리고, 사인이 끝날 때까지 대화에 응해야 한다... 빌리는 단 한 번이라도 누가 자신을 아기 살인자라고 불러주길 바라지만, 사람들은 아기들이 살해되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듯하다.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 대량살상무기 이야기만 한다. 그들은 너무도 간절히 믿고 싶어하고, 빌리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그들은 산타클로스가 정말로 있다고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까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우기는 아이들처럼 열렬하다.

브라보 대원들은 이 주 동안의 승전 여행 동안 비행기와 자동차, 호텔방에서만 지내다 보니 운동할 시간이 없었고 몸도 마음도 풀어졌다. 따라서 그들은 나약해져서는 지치고 신경질적인 상태로, 그만큼 효율성이 떨어진 상태로 전쟁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틀 후면 이 모든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 세우며, 그들에게 열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말이다. 빌리는 대원 누구라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그야말로 기적처럼 느껴진다. 모든 대원들이 간발의 차로 죽음을 피해온 것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전쟁이 진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바로 염병할 무작위성이다. 화장실에서 넷째 칸이 아닌 셋째 칸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돌리는 것 따위의 사소한 일에서 생과 사, 끔찍한 부상이 판가름 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전쟁터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전투를 재개해야만 한다.

그들의 현실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목숨까지 구해주지는 못한다. 폭탄도 총알도 막아주지 못한다. 그들의 꿈을 산산조각 낼 전사자 수의 포화점이 존재할까, 빌리는 생각한다. 비현실이 얼마나 많은 현실을 취할 수 있을까?

미국인들은 날마다 정신적으로 힘겨운 전쟁을 겪는다. 빌리는 이곳에서 매일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전쟁의 열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는 영웅적인 행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 행위가 그에게 왔을 뿐. 그리고 그는 그 행위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두렵다. 빌리는 누나의 사고 이후 파혼한 비겁한 약혼자의 차를 파손시킨 일로 간신히 졸업장만 겨우 받고, 군에 입대했기에 열여덟 이라는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었다. 졸병 중의 졸병 보병대 이등병. 그런 그가 전쟁을 겪고, 승전 여행이라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바라보는 미국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에게는 미국인들이 나이와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 어린애로 보였다. 모두들 전쟁의 완전한 죄악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극중 빌리의 입을 빌어 '미국인들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고 가끔 죽기도 해야 하는 어린애'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안 감독의 연출로 작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로는 크게 성공을 하진 못한 것 같다. 국내에는 개봉하지도 못했고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보니 왜 영화로는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벤 파운틴이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머러스한 대화와 농담, 웃음 아래에는 자괴감과 비애를 보여주고, 전쟁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정작 자신은 참전을 기피하는 모습을 천역덕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전쟁과 엔터테인먼트가 뒤섞여 충돌하는 블랙코미디라니, 그 어떤 작가가 이런 글을 써낼까 싶을 정도로 '글의 힘'이 뚜렷한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당연히 '소설'로 읽어야만 한다. 미국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미국적인 작품인데다,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지점이 분명이 있었는데, 실제 작품은 분명 그것을 넘어 선다. 문장은 아름답고, 예리하며, 어조는 거침없고, 신랄하다. 블랙 코미디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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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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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의 첫 번째(그리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도시 아르테미스에 산다. 아르테미스는버블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버블의 절반은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아르테미스는 옛날 SF 소설에서 묘사했던 달 도시의 모습을 정확히 닮아 있다.

....이곳에 오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고, 이곳에서 살려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라면 부자 관광객과 괴짜 갑부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노동자 계급의 사람도 필요하다. ‘J. 돈많아 넘쳐흘러 3께서 스스로 변기를 닦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화성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은 물론, 영화계까지 제대로 접수했던 앤디 위어의 신작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번에는 달을 배경으로 색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목인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달의 여신이고, 1960년대 나사에서 추진된 인간의 달 여행 계획인아폴로의 쌍둥이 남매이기도 하다. <마션>의 주인공이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인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였다면, 이번 <아르테미스>의 주인공은 최하층 짐꾼으로 일하는 수학 천재 범죄자 재즈 바샤라이다. 재즈는 금지 물품을 지구로부터 아르테미스로 밀반입해서 배달하는 밀수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엄밀하게 말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민이지만, 여섯 살 이후로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스스로는 아르테미스인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어느 날, 아르테미스에서 가장 돈 많은 떼부자들 중 하나인 트론이 그녀에게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루미늄 산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기존에 이곳에 산소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를 무료로 사용하고 있는 산체스 알루미늄과 맞붙어 경쟁해볼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의 목적은 산체스의 산소 공급을 중단시켜 그들이 얻고 있는 혜택을 자신이 가로채겠다는 것. 트론은 재즈에게 산체스의 산소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수확기들을 못 쓰게 만들어주는 댓가로 100만 슬러그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트론이 알루미늄 산업에 진출하는 이유도 뭔가 수상쩍었고, 만약 붙잡히기라도 하면 지구로 추방될 게 뻔했다. 지구로 가게 되면 혼자 살아가는 건 둘째치고 아마 일어서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달의 중력에서 살아왔으니까. 어쩐지 내키지 않았지만 돈이 필요했던 재즈는 그 일을 하겠다고 수락해버리고 만다.

 

 

"넌 아주 재수 없는 년이야." 밥이 말했다.

"밥이 옳아요, 아빠. 난 재수 없는 년이에요. 하지만 지금 아르테미스에는 재수 없는 년이 필요하고, 그래서 내가 나선 거죠."

 

재즈는 산체스의 수확기를 몇 개 망가뜨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전부터 그녀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던 루디는 대놓고 그녀가 그 일에 관여했다고 의심하고, 살인 사건까지 벌어지고 그 살인자에 의해 그녀 또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살인자를 피해 도망 다니면서 노숙자처럼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공간에 숨어서 그녀는 생각한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뒤 10년 동안 혼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애썼는데, 지금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일의 내막을 스스로 파헤쳐보기로 한다. 알고 봤더니 산체스 알루미늄의 주인이 브라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폭력조직이었고, 트론의 목적도 단순히 알루미늄 사업을 인수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점점 더 엄청난 음모 속으로 뛰어 들어가게 되고, 아르테미스 전체의 안위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에 맞서기 위해 그 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아버지를 비롯해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런, 나 좆된 거지?!" 나는 수확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작품 역시 전작인 <마션> 처럼 각종 과학적 지식들이 달의 도시 아르테미스를 허구가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지게 하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앤디 위어는 물리학, 화학, 경제학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달의 도시가 활성화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그리고 달의 표준 시간이나 화폐, 지구인을 위한 여러 다양한 관광 상품, 통신 수단 등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들이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아르테미스의 커피는 맛이 거지 같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기압이 낮을수록 물의 끓는점이 낮아지기 때문에, 이곳에선 물이 섭씨 61도에서 끓기 때문에 차와 커피가 아무리 뜨거워도 섭씨 61도에 그친다. 당연히 엄청나게 차가울 수밖에 없다. 어쩐지 먹어보지 않아도 상상이 되는 맛이라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르테미스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교도소도, 벌금도 없고,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지구로 추방된다. 그 외의 일들은 모두 아르테미스의 보안책임자인 루디가 해결한다. 예를 들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남자는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폭행을 당한 뒤 의사에게 보내지는 식이다. 이런 소소한 설정들이 아르테미스라는 도시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서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영화 <마션>의 제작사에서 <아르테미스>역시 영화화를 확정했다고 하는데, 영화로도 너무 기대가 되는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끝내주는 도시 '아르테미스'로의 여행을 즐겨보시길! 향후 70년 후,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꿈의 여행지가 어쩌면 실제가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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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제 그의 집은 어디에도 없고알파마의 아파트는 수도사의 방처럼 을씨년스럽다어느 집이든 발을 디디면 그의 집이 없다는 사실만 상기될 뿐이다.

1904년 리스본, 고미술 학예사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일주일 만에 연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분노와 절망에 그는 뒤로 걷기 시작한다.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반발하면서 걷는다. 달리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그렇게 기이한 애도의 시간을 1년 보내다 어느 날 기록보관소에서 우연히 17세기 고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신부의 일기장이었고, 사랑하는 이들이 죽은 뒤 토마스는 오직 신부가 만든 물건의 흔적을 쫓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일기 속 내용을 따라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게 된다.

1939년 포르투갈, 시신을 다루는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에게 늦은 밤 아내 마리아가 찾아 온다. 두 사람은 에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 함께 크리스티의 책을 읽고 토론해왔다. 그날 밤 마리아는 크리스티의 소설과 복음서의 유사성에 대해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가 돌아간 뒤 또 다른 마리아가 찾아온다. 그녀는 검은 상복 차림의 노부인으로 가방에 담아온 남편의 시신을 부검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부검을 통해서 남편이 왜 죽었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고.

1981년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는 40여 년을 함께했던 아내가 죽고 나서 엄청난 상실감에 마치 유령처럼 지낸다. 동료들의 권유로 며칠 가벼운 휴가 겸 출장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한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침팬지 오도에게 자석 같은 끌림을 느끼고, 오도 역시 계속 피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피터는 어쩐지 목구멍이 뻐근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거액을 들려 침팬지를 사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포르투갈로 건너가 침팬지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다. 3주 동안아니 한평생일까? ─ 쉼 없이 움직였는데, 이제 할 일이 없다. 무수한 종속절과 수십 개의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가고, 기발한 접속사들이 문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와중에예기치 못한 막간의 촌극까지 끼어들고하이픈 없는 명사들이 난무하는 장문이 마침내, 놀랍도록 고요한 마침표와 함께 끝이 난다. 한 시간쯤, 꼭대기 층 계단참에 나가 앉아서, 지치고 조금 긴장이 풀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 마침표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문장은 무엇을 가져오려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리고 남겨진 이들에게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상실감으로 세상이 끝난 것 같더라도 살아남은 사람은 어찌 되었든 계속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삶의 이치이다. 각기 다른 시대의 세 사람은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잃고 혼자 남겨 졌다. 토마스는 연인과 아들, 아버지를 잃었고, 에우제비우는 의문의 사고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피터 역시 40년 동안 함께 했던 아내를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가혹한 삶을 살아 낸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세 남자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장소를 통해 이어진다. 토마스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그를 기다리는 교회가 있다고 믿고 거기 도착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고, 에우제비우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에 살고 있으며, 피터는 자신의 고향이지만 두 살 때 떠나와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포르투갈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자연사는 없다는 점이에요. 모든 죽음은 살해로, 사랑하는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죠.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삶의 전부였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체 왜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얀 마텔의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죽음이란 이 세상에 없다. 모든 개별적인 죽음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죽음 앞에서 남겨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근거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세 남자의 각기 다른 여정은 이야기 자체로서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고뇌와 사유를 따라다니면서 어쩐지 내가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특히나 병리학자 에우제비우가 노부인의 남편 시신을 부검을 끝내고 나서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굉장히 기묘하고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드는 그 장면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통해 노부인의 다소 이상한 행동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 부부가 함께한 시간과 사랑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체감할 수 있었다. 토마스가 포르투갈에서 겪게 되는 종교적인 그것도, 피터가 챔팬지 오도와 함께 교감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도 우아하면서도 아름답게 상실을 겪어내는 인간의 이야기들이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산이 없다. 그저 언덕들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상실을 겪고 슬픔을 견뎌내는 것에 대해 얀 마텔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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