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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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온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이곳 퐅랜 사람들은 정말이지 느리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유롭다. 내 눈에는 생활 속의 모든 것들이 너무 굼떠서 슬로모션을 보는 것만 같다. 우체국에서도, 마켓에서도, 식당에서도, 내 기준으로는 너무 느려 터졌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아이폰 같은 걸 만들었을까, 어떻게 세계 최고의 대국이 되었을까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의 느림에는 이유가 있다. 그건 순서를 지키는 것이고 정확하게 일하는 것이리라. 차례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능률적이고 바른 방법이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모 회사의 캠페인 슬로건처럼 이제 여행은 꽉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이곳 저곳을 단기간에 누비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진짜 그곳의 삶을 살아보고, 그 도시의 진짜 삶을 맛보는 것이 요즘 여행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이 책은 2015년 어느 가을 날,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로 날아간 이우일과 그의 가족들이 겪은 현지의 일상들을 그리고 있다. 세상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인 현지인처럼 그곳에서 눌러앉아 직접 살아보기를 실천한 여행산문집인 셈이다.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낯선 도시 '포틀랜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킨포크> 밖에 없었다. 포틀랜드 교외에서 상업 광고를 배제하고 현재 일상을 투영하되 심플 라이프를 지향하는 잡지를 만들자는 목표로 조그맣게 시작한 <킨포크>, ‘단순한 삶, 함께 나누는 식사의 의미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발견하여 감성적으로 보이며 세계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이끌었고, 국내에서도 한동안 큰 인기를 끌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킨포크>가 만든 푸드 스타일링 북인 <킨포크 테이블>을 좋아하는데, 단출하고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하고, 현대적이지만 전통이 깃들어 있으며, 만든 이의 개성이 풍겨는 식탁에 대한 이미지가 음식은 나누어야 제 맛이며 함께 밥 먹는 기쁨이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느끼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킨포크의 도시라면, 포틀랜드라는 곳이 대충 어떤 곳일지 짐작은 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졌다. 게다가 이 책은 단순히 몇 주나, 몇 달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쓴 것이 아니고, 아예 그곳에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눌러 앉아 살아본 것이라 여타의 여행 에세이들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하다 도착한 낯선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긴장을 풀게 될 때가 있다. 항상 듣던 음악을 다시 들을 때처럼. 이를테면 카페 앞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 무심코 낙서를 끼적이다가. 책방에서 아는 작가의 책을 어루만지다가.

어느 낯선 도시에서건 잉크와 종이 냄새가 폴폴 나는 책방에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종이로 만들어진 미로 같은 그곳에서 문자와 그림이 가득 인쇄된 책을 꺼내 펼쳐보고 냄새를 맡으면 '아아, 이곳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틀랜드(퐅랜)은 일 년 중 절반이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우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보통 10월 말부터 서서히 비 오는 날이 많아져서 이듬해 5월 초순까지 좀 지겹다 싶게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비가 자주, 많이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가 멸종위기종 같은, 우산 쓴 사람을 가끔 보지만, 십중팔구 외지인이라고. 왜 퐅랜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퐅랜은 타투 가게가 유독 많은 곳이기도 하단다. 이우일의 아내와 딸이 타투를 하고 싶어 했다는 에피소드는 굉장히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이우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그림을 고르기가 너무 힘들어 타투를 계속 미뤘다는데, 그가 결국 고른 그림이란... 직접 책에서 확인하시길.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우일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들 덕분인데, 41편의 에피소드에 200여 컷의 일러스트가 담겨 있으니 거의 글반, 그림반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퐅랜에서 유행하는 수염, 타투, 삼선 슬리퍼등을 총 집합해서 그린 이미지는 정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퐅랜의 사람들과 풍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짐작이 되었다고나 할까. 퐅랜의 사람들은 독특하고 괴상하고, 유별한 개성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 특이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그들의 과잉 친절에 대한 에피소드도 너무 재미있었다.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넉넉한 여유로움과 소박한 평화로움이 가득한 그곳, 퐅랜의 매력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여행지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직접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키와 눈썰매를 즐기러 후드 산에도 가보고 싶고, 퐅랜 재즈 페스티벌에도 가보고 싶다. 다운타운 얌힐 거리에 있는 기부 요가원에서 여유있게 요가도 해보고 싶고, 플로팅 월드 코믹스라는 만화 책방에도 직접 가보고 싶다. 세상 모든 여행에 관련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책은 정말 제대로 여행 가보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그냥 잠시 다녀오는 여행이 아닌, 그곳에 눌러앉아 살아보는 여행 말이다. 아웅, 나도 여행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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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잡학사전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김대웅 지음 / 노마드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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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사와 프랑스 궁정생활에서 연상되는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매너(manners)이다. 이 매너의 어원은 라틴어 manus()이다. 처음에는손을 움직이는 방법의 뜻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방법’ ‘태도로 쓰이고 복수형은예의범절’ ‘풍습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라틴어 manus를 어원으로 하는 손과 관련되 다양한 영어를 살펴보자. manufacture손으로 만들어진 것, 수공업 제품을 뜻하며 동사로제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기호체계이다. 그러니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영어권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어휘력과 문장 독해력이 필요한데, 무작정 단어를 외우는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단어의 어원을 통해서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뜻을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된 단어들을 거미줄 치듯이 연상 작용을 통해 엮어서 이해하라는 거다. 이건 비단 언어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학창 시절 세계사나 지리, 역사 등 주로 암기가 필요한 과목들을 공부할 때는 항상 이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암기력이 뛰어나다면 모를까 무작정 외우는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 차츰 잊어 버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어의 어원을 익히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 작용이 가능한 방법으로 이해를 한다면, 암기라는 것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알아두면 정말로 쓸모 있는' 이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붙은 <영어잡학사전>은 단어의 어원을 밝히고 그 단어가 문화사적으로 어떻게 변모하고 파생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 책만 제대로 읽는다면, 모르는 단어를 만나더라도 어원을 통해 대강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단어의 뿌리는 물론이고 그 줄기와 가지, 어원 속에 숨겨진 에피소드까지 재미있고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어, 교양상식사전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Quiet(still, silent 조용한) quit(give up, stop 그만두다) 그리고 quite(completely, wholly, entirely, thoroughly 완전히)는 어감이 비슷하다. 물론 어감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어원도 같다. 모두 라틴어 quies(평온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고 치자. 사람들은 그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quit). 그러면 그곳은 조용해지고(quiet), 사람도 동물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완전히(quite) 폐허가 되고 만다. 이렇게 연상을 하면 이해하기가 좀 쉬울 것이다.

 

매너의 어원은 라틴어 manus()이다. 처음에는손을 움직이는 방법의 뜻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방법’ ‘태도로 쓰이고 복수형은예의범절’ ‘풍습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오른손잡이들과 달리 왼손잡이들은 왼손으로 무기를 썼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못 믿을 상대로 생각했으며, ‘불길한(inauspicious)’이라는 뜻의 라틴어 sinister왼손잡이(a left-handed person, a left hander)’라 불렀다. No.1은 어린이의 소변을 가리키며, No.2는 대변을 가리킨다. 우리 식으로는대소변이지만 서양식으로는소대변인 셈이다. 그러면 No.3는 무엇일까? 미국에서는 코카인(cocain)을 가리키는데, 이니셜 c가 알파벳 순서로 세 번째라는 이유에서다. 코카인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삼류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은행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환전상이었다. 은행을 뜻하는 bank는 처음에는환전상의 작업대를 가리켰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온갖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작업대를 놓고 환전과 고리대금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대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금융업자의 점포를 가리키게 되었다. 일찍이 이집트인과 로마인은 기름을 바른 동물의 방광과 내장을 페니스의 덮개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50년대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 가브리엘 팔로피우스가 약을 바른 아마포를 귀두에 씌우는 덮개, 즉 지금의 콘돔을 남성용 성병 예방기구로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clitoris(음핵)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해부학자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자연과학과 민족,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정치, 경제와 군사, 외교, 문화, 예술과 종교 등의 카테고리로 나뉘어서 흥미로운 언어의 어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하다.

 

 

이 책은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고, 굳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수많은 기원과 문화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나서 지식의 보고로서도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해줄 것 같다.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은 보통 한 페이지를 넘지 않도록 길지 않아 부담이 없고, 설명이 끝나면 활용할 수 있는 숙어나 유사어 등이 수록되어 있어 도움이 된다. 언어 공부와 전혀 상관없는 인문학 에세이처럼 읽히는데, 마지막 정리는 영어 공부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인 셈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실려 있는 '자주 쓰는 라틴어 관용구'라는 부분도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라틴어라는 언어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관용구는 현재에서 대단히 많이 활용되고 있어 재미있었고, 이런 자료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거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억지로 암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연상 작용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살아 있는 영어교과서가 필요한 학생들, 그리고 직장인들을 비롯해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언어의 기원과 그 역사적 배경과 의미 등을 그저 읽으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재미있게 읽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영어 공부가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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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40일 - 손으로 쓰고 그린
밥장 지음 / 시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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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켜잡는다. 동틀 때는 또 어떨지.

벌써부터 설렌다. 평생 우려먹을 이야기 하나를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다니기도 하고, 관련 에세이들도 많이 읽어본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 없이, 글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여행기는 난생 처음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여행일기이자관찰일기로서 손으로 쓰고 그린 호주의 구석구석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장에서 손으로 쓰고 그린 페이지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어, 더욱 현장감 넘치고 생생한 일기같은 느낌이다. 여행 에세이이자, 함께 여행하는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르포르타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 탄생했다.

밥장은 올해 초 허영만 화백과 저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호주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메신저로 왕복 항공권을 받는다. 알고 보니 허영만 화백과 일행들은 오래 전부터 '집단 가출'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었단다. 요트로 우리나라 해안을 한 바퀴 돌기도 했고,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기도 했고, 뉴질랜드와 캐나다도 다녀왔다고 한다. 올해는 캠퍼밴을 타고 멜버른에서 사막을 가로지른 뒤 다윈을 거쳐 퍼스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멤버로 밥장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멤버는 총 여섯 명, 형님(허영만), 봉주르(형님의 오랜 친구 김봉주), 총무(아웃도어 브랜드에서 갓 퇴사한 정상욱), 용권 형(사진과 동영상을 맡은 정용권), 태훈 작가(일정 챙기고 글 쓰려고 뉴질랜드에서 온 김태훈) 그리고 막내 밥장까지. 이들은 40일 동안 24시간 내내 차 안에서 먹고 자야 한다. 얼결에 합류하게 된 여행에서 사십 대 후반에 막내 역할을 맡게 된 밥장은, 이 참에 허영만과 형님들을 관찰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캠퍼밴 생활은 결혼 생활과 몹시 닮았다.

좋아도 같은 공간, 싫어도 같은 공간에서 버텨야 한다.

문제가 생겨도 외부 전문가를 모시거나, 충고를 하거나, 투정을 들어줄 이도 없다.

마치 달 기지에 남은 우주인처럼 같은 물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이들의 여행에 관한 스토리는 허영만 화백의 블로그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 책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밥장의 책보다 한 달 먼저 나왔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여정은 사진으로 기록된 스토리가 메인이고 중간중간 허영만 화백의 만화 일러스트가 추가되어 있는 스토리라.. 밥장의 책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호주는 자연이 잘 보존된 아웃백(오지)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여행지이기도 한데, 이곳에서는 빛나는 밤하늘의 은하수, 그랜드캐니언 마운틴,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룰루와 붉은 사막에서의 석양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캠퍼밴을 통한 여행이라니...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지게만 느껴진다. 물론 밥장의 기록을 통해 만나게 되는 정말 리얼하고 상세한 여행기를 보면, 여행이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현실적인 부분들이 더욱 여행에 대한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서 흥미진진했다.

이들의 여행은 멜버른,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피링스, 다윈, 퍼스를 거치는 약 9,000km의 대장정으로 호주 남부에서 중심을 거쳐 북부, 그리고 다시 서부로 내려오는 긴 여정이었다. 밥장이 막내인 덕에 본의 아니게 요리를 거의 담당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너무 재미있었다. 여행이란 진짜 자잘한 허드렛일이 모인 것뿐이라는 그의 멘트가 고스란히 공감되는 에피소드들이었다. 그리고 밥장의 일기 중간 중간에 '영만짤'이라고 허영만 화백이 그날 던진 명대사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우스갯소리처럼 보이지만 너무도 예리하고 은유적인 부분들이 많아 그것만 따로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나도 여행을 꽤 다녀봤지만, 항상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어.'라면서 어디를 가든, 어느 순간이든 사진 찍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더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더 멋진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 앵글 너머로만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 정말 사진으로만 확인되는 순간이 생기게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다 보면, 그 순간을 눈에 담고, 마음에 기록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다음 번 여행지에서는, 밥장처럼 손으로 쓰고,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들을 눈에도 담아 보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을 가슴으로도 기억해 보는 거다. 손으로 쓰고 그린 이 여행 에세이는, 내가 그 동안 만나왔던 그 어떤 여행에 관련된 책과도 달랐던 것 같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다음 번 여행도 조금 달라지길, 그리고 이렇게 특별해지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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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미중전쟁 1~2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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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파싸움이란 게 조선시대에만 있는 걸로 생각했어요. 어쩌면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한 신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파싸움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생각한 적도 있고요. 그러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요즘 한국을 보면 모든 면에서 다 찢어져 있어요. 친미와 친중으로, 보수와 진보로, 영남과 호남으로, 노임과 청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사회에 가치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이 다 돈에 얽매여 있어요. 돈이 제일이다, 돈 없으면 죽는다. 대통령도 결국 돈 때문에 탄핵됐잖아요. 그래서 한국은 돈을 많이 벌수록 더 황폐하고 위험해지기만 해요."

육사 출신으로 워싱턴 세계은행 본부에서 특별조사요원으로 일하는 변호사 김인철은 세계은행의 공적자금이 초단기 투기자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비엔나로 급파돼 비밀리에 자금세탁 관련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그는 지원금 유용과 자금세탁의 현황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스타 펀드매니저 페터 요한슨을 소개 받아 다음 날 관련 정보와 증거를 전달받기로 한다. 약속 시간에 요한슨의 회사로 가지만 그는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고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고, 방에는 아무도 들어간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자살로 추정된다. 혼자 사무실에 있다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살했다는 건 틀림없이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그 결과로 자살을 선택한 걸로 보여 인철은 의문의 자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다 조세회피처로 유명한 카리브해의 케이맨 제도에서 거액의 검은 돈을 쫓게 되고, 그곳에서 트럼프의 선거 캠프에서 발생한 회계 부정 사건을 조사하는 FBI 요원 아이린을 만나 함께 추적을 하게 된다.

 

한편, 북한은 풍계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해 세계를 놀라게 하고, 트럼프는 김정은의 도발에 맞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전쟁 시나리오를 계획해간다. 그때 북한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건 전쟁 불가를 외치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들은 공격 초기에 한국 대통령이 작전을 막지만 않는다면, 겁낼 일이 없는 거였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대형 블록버스터 계획은 그렇게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지만, 사실 트럼프가 진짜로 노리는 것은 김정은과 북한의 핵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중력이고 미국은 양자역학이야. 두 나라는 섞일 수 없고, 따라서 우리로서도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어. 사드도 보게.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니 중국이 반발하고, 또다시 중국이 원하는 대로 약속해주니 그게 고스란히 미국의 불만이 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중국을 만족시켰다가 다음에는 미국이 좋아하는 걸 내놓는 식으로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되고, 결국 두 나라 모두 우리에게 등을 돌리게 되어 있어."

25년 전 한반도의 핵개발을 소재로 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진명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중러일 4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을 그려낸다. 트럼프의 패권주의, 시진핑의 팽창주의, 푸틴의 열강 복귀, 아베의 군국주의 부활 등이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고 있는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팩트 소설이라는 독보적인 장르를 구축한 작가인 만큼 이번에도 거침없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특히나 이 작품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싸드>의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그 종결판으로, 30년 작가 인생을 건 소설이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싸드THAAD'가 주요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 전 싸드 도입으로 인해 벌어질 정치적 역학관계를 예측한 작가의 감각으로 북핵을 둘러싼 동북아 패권의 향방을 소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확고부동한 입장 없이 중국과 미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이대로 가면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될 지를 예측하고, 그에 대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으로 미래를 그려내는 건 오직 김진명 작가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미중러일의 이해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김진명 작가의 말처럼 사드 보복으로 인해 뒤틀려 있는 한중관계도, 북핵 도발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명한 시각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본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로 인해 우리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이 작품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모든 정치적인 배경을 무대로 펼쳐지는 극중 스토리 또한 매력적인 미스터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고 있으니,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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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워터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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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일곱 살에 나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동생을 구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아니다.

세상에는 물에 끌리는 사람들, 물이 흘러가는 곳을 알아채는 퇴화한 원시 감각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물에 가까이 있을 때, 이 강물에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생기가 넘친다. 이곳에서 수영을 배웠고, 이곳에서 가장 즐겁고 기분 좋은 방식으로 자연이 내 육체에 깃드는 법을 배웠다.

벡퍼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 일명 드라우닝 풀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드라우닝 풀(Drowning Pool)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오래 전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것은 15살짜리 딸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이자 성공한 사진작가인 넬 애벗이다. 그녀의 여동생 줄스는 언니의 소식을 듣고 오랜 만에 백퍼드에 돌아온다. 잊고 싶은 기억만이 가득한 옛 고향으로. 넬은 죽기 며칠 전까지도 줄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전화해달라는 언니의 요청도 무시해 왔다.

한편, 넬 애벗이 죽기 얼마 전에 그녀의 딸인 리나와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티가 그곳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조용했던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넬은 어린 시절부터 드라우닝 풀에 집착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 거기서 죽은 사람들 전부에 대해서 취재하고, 그곳의 이미지들을 찍는 일을 해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작업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나 케이티의 엄마는 딸의 죽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곤 했었다. 형사들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넬이 사고로 떨어진 게 아닌가 질문을 하자, 딸인 리나는 말한다. "엄마는 떨어진 게 아니에요. 뛰어내린 거예요." 사이가 소원해져서 연락 안 한 지 몇년 된 상태였던 동생 줄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언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거예요. 미스터리를 좋아했으니까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고 싶었겠죠. 라고. 과연 그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은 무엇일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마을에서 발견된 모든 시신들을 어떻게 전부 추적하겠는가? 마치 <미드소머 머더스> 같다. 다른 점이라면, 사람들이 농장의 분뇨 처리장에 빠지거나 서로 머리를 후려치는 대신, 사고들과 자살 사건들이 일어나고 옛날에는 여자들이 기괴한 익사를 당했다는 것.

<걸 온 더 트레인>이라는 엄청난 데뷔작으로 인상적이었던 작가 폴라 호킨스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서는 세 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레이첼의 현재 이야기가 진행되다, 일년 전 메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으로 각각의 날짜와 시간대를 다르게 한 점 때문에 초반에 굉장히 집중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의 시간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미스터의 해답에 가까워지는데, 누굴 믿어야 할 지 의문스러운 화자들에다, 시점과 시간이 왔다갔다하면서 굉장한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만들어졌던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화자가 굉장히 많다. 넬의 여동생, 넬의 딸, 케이티의 엄마, 케이티의 동생,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전직 형사와 그의 가족들 등등... 화자도 많고, 각각 숨기고 있는 비밀들도 많은데다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다 보니, 중반 정도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열 명이 넘는 화자들의 다양한 시점들 덕분에 분명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현재 벌어진 사건이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좀처럼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호기심은 극대화되고, 지루할 틈 없이 극에 몰입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끊임없이 서로를 오해했던 어머니와 딸,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던 드라우닝풀에 대한 미스터리까지 복잡해 보였던 이야기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로 모아져 굉장한 반전으로 연결된다. 과거가 현재에 미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영향과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해석하고 느끼는 감정과 기억의 기만성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00년 전 사악한 마녀로 몰려 강으로 끌려가 죽은 여인, 전쟁을 겪고 완전히 변해 버린 남편을 죽이고 강에 뛰어내려 자살한 여인, 엄마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소년.. 그리고 넬 애벗도 17살 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13살의 동생 줄스를 구해 준 적이 있다. 거울처럼 잔잔하고 거뭇한 강물 밑으로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엇일까. 수면 위로 솟아 있는 절벽은 모험을 부추기고 도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던 치명적인 장소, 그곳의 미스터리에 매혹된 한 여자와 그들의 삶과 죽음에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입막음하고 침묵시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폭력적인 남성에게 희생되는 여성과 불안정한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폴라 호킨스의 이번 작품은 전작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스릴 넘치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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