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을 책 한
권, 문장
하나, 단어 몇 개에 전부
담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한 단어들에. 하지만 이
작품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도 유려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말이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도리고 에번스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전쟁영웅으로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지난 주에
일흔일곱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무려 오십 년의 세월 동안이나 기억의 망령에 사로잡혀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젊은 시절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노역하다 살아남았다.
이야기는 도리고가 참전 전 젊은 숙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기억과 전쟁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비참한 기억과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계속 교차되다 보니 글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형식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바섬 고지대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수용된 전쟁포로수용소에서 대령이었던 도리고 에번스는 포로 천 명의 부사령관 역할이었다.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 고성능 폭약의 시큼한 악취,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 받던 기억, 폐허와 먼지로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
비처럼 쏟아지던 포탄들,
총알로 벌집이 된 자동차...
전쟁의 풍경들이 그에게 남긴 선연한 기억들은 그렇게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지배한다. 끊임없는 굶주림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이질
등의 질병에 시달리던 동료들의 모습, 오래된 토사물, 배설물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부분들을 리처드 플래너건은 고스란히 페이지
속으로 불러 들인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버마 철도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어린 시절 참담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체험을 듣고 자란 그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12년간
집필에 매달리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섯 개의 다른 판본을 썼다고 한다.
그 모든 판본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 작품은 전쟁 소설인 동시에 한 남자의 평생을 좌우하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도리고 에번스는 부대에 배치되기 전 훈련 중 휴가
때,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그에게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머리에 붉은 꽃을 꽂은 대담한 모습으로, 함께 온 남자들의 선망의 눈길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온 그녀에게 도리고가 한
눈에 반하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마디 대화를 했고,
그가 그녀에게 책 속 몇 구절을 읽어 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이 만남을
작가는 무려 열 페이지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한 사소한 행동들과 그 순간 했던 생각들은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은 서사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단어 하나하나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현재의 노인이 된 도리고는 여전히 전쟁포로
막사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꾸고, 당시의 여자친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독한 고독함에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도리고가 우연히
고모부의 아내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가까워지는 과정과 일본군 포로로 지내던 끔찍했던 기억 사이를 오간다.
일본군 대령들이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을 종종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과 같다고
한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바쇼의 책이 일본
문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면, 내 아버지와 전쟁포로들은 그 문화의 최저에 있던 셈”이라고 말하며,
작품의 소제목들도 모두 바쇼와 잇사의 시 구절에서 따오고 있다. 하이쿠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그들이 철로
건설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하며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어떤 은유로
보여지는 지 또한 굉장히 흥미롭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소문만큼이나 굉장했다.
장편소설이라기 보다 거대한 호흡의 서사시같다는 느낌이랄까.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한 유려한 서사도
훌륭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묘사와 표현들도 멋졌다. 무엇보다 산문이 안겨주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쟁 소설을 읽으면서 잘 쓰였다고
감탄한 적은 있어도, 공감이라는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평생에 걸쳐도 절대 체험해볼 수 없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작가라는 존재가 인물의 심장과 영혼 사이의 어두운
주름 속으로 다가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면,
리처드 플래너건은 바로 그런 마법을 내게 보여주었다. 전쟁의 서사를 가지고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아름다운 단어들로 삶과
사랑을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현대판 오디세우스',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평이 절대 과찬이 아님을, 모두 직접 읽고 느껴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