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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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항상 처음이 있는 법이지요, 페퍼 씨. 저의 제안을 기억해주세요.”

아서는 작별 인사를 하고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에도 메라 씨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다음 행선지…… 참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추적해본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1년 전 오늘, 아서 페퍼의 아내 미리엄이 죽었다. 40여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이제 집에는 예순아홉의 아서 페퍼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딸인 루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살고 있었고, 아들인 댄은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다. 아서는 열쇠 수리공으로 자물쇠 영업을 하느라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만 하느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고, 덕분에 자식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삐걱거렸다. 아서는 일주일 넘게 그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은 채, 집에서 규칙적인 일상을 지키려고 애쓰며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웃집 여자 버나뎃만이 지난 몇 달간 집에서 만든 음식을 들고 찾아왔지만, 그는 대체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집에 가둔 채 칩거하며 시간을 보내다, 오늘 아내의 기일에야 겨우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러다 아내의 부츠 속에 들어 있는 조그만 상자 속에서 여러가지 모양의 참이 달려 있는 금팔찌를 발견한다. 코끼리, , ,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그리고 반지 여덟 개의 참들이 달려 있는 팔찌는 아무리 기억해봐도 생각나지 않는 물건이었다. 아서는 미리엄이 그 팔찌를 끼고 있는 걸 본 기억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없었던 것이다. 아서는 코끼리 참에 새겨진 글자와 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어 보기로 하고,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아서는 상실감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한 걸음으로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려고 했던 건데, 그녀의 옷장에서 발견한 낯선 팔찌 하나로 인해 당혹스럽기만 하다. 고민 끝에 그는 참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추적하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집 밖으로 외출 조차 안 하던 그가 말이다. 어쩌면 아내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서. '나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런던과 파리, 인도를 누비며 아내의 남자들을 찾아나선 아서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아내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40년을 그녀와 함께했던 아서의 삶과 추억이 모두 와르르 무너져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팔찌에 달린 참에 대한 사연 추적이 그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휘저어놓기 시작해서, 이 여정은 더 이상 미리엄이라는 존재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서 자신의 문제가 되어 가기 시작한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서가 한숨을 쉬었다. "팔찌를 찾기 전엔 꼭 그렇게 살고 있었고 미리엄도 내가 그렇게 살길 바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아내를 잘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것들, 내가 아는 걸 원치 않았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이런 것들을 비밀로 간직했다면, 또 뭘 감췄을까? 나한테 신의는 지켰을까? 나 때문에 아내가 따분하게 살진 않았을까? 아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내가 못하게 했을까?"

아서는 아내 미리암이 자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었는지 그녀의 시간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참에 담긴 사연들을 추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여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변하고 성장하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었던 것이다. 아서는 그 동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는데, 이 여행을 통해서 아내가 자신한테 말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 너무도 역동적이고, 화려한 그녀의 과거 삶에 대해서 알아 가며 아서는 생각한다. '나 때문에 아내가 따분하게 살진 않았을까? 아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내가 못하게 했을까? 이런 것들을 비밀로 간직했다면, 또 뭘 감췄을까? 나한테 신의는 지켰을까' 의문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자신의 삶 전체가, 아내와 함께 해왔던 시간 전체가 부정되는 듯한 기분 마저 느끼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많은 것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김새, 생일, 연락처, 취향, 습관 등등이 그 사람의 전부는 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어 상처를 받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온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타인이 서로의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리는 알 수 없는 상대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나를 만나기 전, 내가 그를 알게 되기 전에 그가 살아온 삶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그리고 지나간 과거보다 함께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만 하니까. 극중 아서는 의심과 질투에서 비롯된 여정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진실들을 통해 허탈감과 공허감으로 무너져 내리는 대신,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나가기로 결정한다.

 

이 작품은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특별한 여행의 여정을 통해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보여주기도 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들과 딸, 아버지, 그리고 아내와 남편의 모습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나 주인공 아서 페퍼가 대단한 모험가도, 괴팍하고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동네의 유명한 할아버지도 아닌, 튀는 데도, 모난 데도 없이 자신이 그어놓은 삶의 범주 안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살아온 대체로 평범한 할아버지라는 점이 투박하지만 정겹고, 뭉클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아서 페퍼의 황당무계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힐링이 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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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시 - 힘 빼고, 가볍게 해내는 끝내기의 기술
존 에이커프 지음, 임가영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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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중요하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처음 내딛은 몇 걸음은 확실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시작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 시작하는 것쯤은 유치하고 쉽다는 생각이 들며, 심지어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고?

바로 '끝까지 해내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새해 계획의 92퍼센트는 실패로 돌아간다고 한다. 매년 1월이 되면 희망에 들뜬 사람들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힘차게 시작하지만, 100명 중 겨우 8명만이 계획을 끝까지 실천한다는 얘기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책장에 꽂힌 책 중에 다 읽은 책은 10퍼센트 밖에 되지 않고, 사무실에는 반쯤 쓰다 만 몰스킨 노트가 32권이나 있고.. 창고에는 끝내지 못한 것들의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들로 가득하다고 고백한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시작하는 것부터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생겼겠지만.. 문제는 시작은 하지만 그걸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지름길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문구만으로도 뜨끔해서는 나한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 동안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은 무수히 많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시작'보다 '끝내기'에 더 많이 어려움을 겪어 왔다. 끝까지 해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의 라이프코치, 존 에이커프가 당신의 완주를 도와줄끝내기의 기술을 전수해주겠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끝내기의 기술'은 크게 3가지이다.

 

 

1.목표를 절반으로 줄이자.

2.뒤로 미루어도 되는 일을 정하자.

3.끝까지 해내고 싶다면 목표에 재미를 더해라.

 

 

저자는 이 방법들이 너무 쉬워서 의심이 든다면 안심하라고 말한다. 통계적으로 입증된 방식이라고. 이것은 완벽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목표 설정 방법이기도 하고, 우리를 결승선까지 단숨에 데려다 줄 방법이기도 하다고.

 

 

결승선은 자석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반대 극성을 띤 자석이라는 데 있다. 결승선은 당신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낸다.

끝을 앞둔 막판 스퍼트 영역에 들어서면 완벽주의는 더 시끄럽게 군다. 경고만 주고 소탕은 하지 않은 채 놔두었던 어느 악당이 세력을 키워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그 악당은 '두려움'을 다발로 발사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우리가 결승선에 가까이 갈수록 갑자기 목표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더욱 흥미로워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계획을 망치는 장애물과 방해꾼의 실체를 제대로 까발리면서, 우리를 다시 한번 목표 달성의 트랙으로 이끌어 준다. 일을 망치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숨을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해꾼이며, 우리가 그 난관을 넘어서면 완벽주의는 숭고한 장애물이라는 항목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해내기 전까지는 목표를 쫓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목표를 향해 다가가봤자 결국에는 결과가 나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만일 그렇게 되어버리면'에 속지 말자고. 사전에 철저히 모든 준비를 한다면, 각자의 숭고한 장애물 앞에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이 책에 실려있는 전략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너무도 쉬워 보이긴 한다. 하지만 2016년 멤피스대학교의 연구를 통해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다. 저자가 온라인에 개설한도전의 30일 프로젝트에 참가한 수만 명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 그가 제시한 방법으로 도전한 사람들의 목표 달성률이 43%나 더 높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제시하는 방법대로 한번 도전해본다면, 당신도만성 시작 환자도 마침내꾸준한 성취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후반부에 가면 목표 달성에 추진력을 더하는 24가지 데이터 사례와 자신이 과거의 경험으로 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목록 10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과거의 경험이란 우리가 의지하고 걸을 수 있는 목발과도 같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살펴보며 교훈을 얻어, 목표를 수정하고 변경하는 일 역시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은 목표를 세워 놓고 힘겨운 과정을 절뚝거리며 헤쳐 나가는 것보다, 현재 목표를 다듬거나 더 나은 목표를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가 알려주는 힘 빼고, 가볍게 해내는 끝내기의 기술은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현실적으로 바로 따라 해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스킬 들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건 재미있다.

하지만 미래는 끝까지 해내는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바로 당신의 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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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
김보현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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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가 생각하기에 괴물이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마법에서 풀려나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되거나 모두를 똑같이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동화는 전자를 선호하지만 어쩌면 괴물의 입장에서는 후자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훨씬 쉽고, 간단하고 게다가 통쾌하니까.

 

원나는 6년 전 화재로 아빠를 잃고,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아빠는 원나를 화염에 휩싸인 집에서 구해내고 죽었고, 원나는 화상 흉터가 심하게 남아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성격 마저 의기소침해졌다. 고개를 푹 숙여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다녔고, 학교에선 자발적 왕따로 지내고 있다.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거라곤 우연히 재능을 발견하게 된 펜싱이었는데, 고교대표로 전국체전에서 매달도 따지만, 그 이상의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시상대에 올라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일부러 매달 권밖인 4위를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차량 전복사고로 원나의 유일한 가족인 엄마 마저 식물인간으로 병원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우울해할 겨를도 없이 엄마 병수발에 마을 어른들의 이런 저런 심부름들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갈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현재 원나의 나이 스무 살, 화재로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학교를 1년 휴학해서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이다. 한 살 어린 동급생들 사이에서 원나는 괴물 취급을 받았고, 원나는 펜싱을 통해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JFK공항에 좀비 출현. 이상 바이러스 감염자로 추정"이라는 제목을 단 뉴스 소식이 들려온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공항 내부, 바보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좀비들의 영상이 잇달아 업데이트되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가 아니라 우스갯 소리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좀비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국내로 들어와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버리고 원나가 살고 있는 주민 10여명의 작은 마을까지 초토화시킨다. 결국 원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버리고, 정부에서는 백신이 개발 중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며 자살하지 말고, 죽이지 말고,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무책임한 선포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세상에 홀로 남겨진 원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나로 죽기 싫었어."

"?"

"내가 싫었으니까."

원나는 헛헛한 마음에 술을 한 잔 더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솔직히, 처음 읍내 나갔을 때, 며칠 만에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다 망할 수 있지? 싶어서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되고 좋기도 했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싶어 하는 소녀의 성장 소설은 뜬금없이 좀비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갑작스럽게 재난 소설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그 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바로 좀비를 대하는 원나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좀비물에서는 남은 자들이 좀비와 싸우거나 그들을 없애려고 하거나,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고 살아 남기 위한 고군분투가 벌어지는 것이 플롯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원나는 좀비로 변해버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좀비이기 이전에 자신의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노인들이라 이빨도 없고 근력도 약하고, 좀비들이 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불을 켜놓으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단다. 좀비로부터 물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것도 사실이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대개는 이빨이 없으니 물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잉런 원나의 생각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설득력을 부여하는 장치 중에 그녀가 펜싱 선수라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게 사용되고 있다. 펜싱복 소재가 케블라라고 방탄복 소재인데, 그걸 입고 있으면 혹시 좀비한테 물린다고 하더라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상 흉터로 인한 열등감,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아온 원나에게 좀비로 변한 마을 어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다. 열등감에 짓눌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던 원나에게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을 치료해줄 백신이 분명히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다 생존자인 7년차 아이돌 영군이 찾아오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원나는 든든해지지만, 좀비들을 사냥하는 다른 생존자 무리들이 마을로 찾아와 그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과연 원나는 좀비로 변한 마을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연 정부는 백신을 개발해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무너진 세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밖에 안 남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두려워 가끔은 세상이 망해버리고,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던 소녀가 정말로 무너져 버린 세상을 마주한다면 어떨까. 소녀의 재앙 극복 프로젝트는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따뜻하고도 놀랍게 이어진다. 좀비와 싸우는 이야기가 아닌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상상도 못했기에 이 작품이 더욱 흥미로웠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좀비들을 삶으로 끌어 안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소녀의 생의 의지가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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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리커버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 - 돌아오는 게 상처뿐이라면 굳이 그 인연을 끌고 갈 필요가 없다
유은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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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가끔은 상대의 기대를 외면해도 괜찮다. 한 번쯤은 거절해도 괜찮다. 때로는 욕을 먹어도 괜찮다. 지금껏 한없이 친절했던 당신이 조금 변했다고 외면할 사람이라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떠날 사람이다.

더는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배려를 베풀고 되돌아오지 않는 친절을 기대하지 말자. 당신은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지금보다 더욱 사랑 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이 책은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라는 제목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거나, 항상 모두를 배려하고,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못해 늘 상처받는 사람들 말이다. 요즘은 너무도 개인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게 나쁘다고 볼 수도 없는 사회인데다, 개중에는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적인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주변에 신경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이들의 희생과 배려를, 점점 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무심해지기 시작하다 보면, 당연히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시작부터 '혼자 상처받는 일은 그만할 때도 됐다'고 말문을 연다. 내 주변의 소심하고, 착하기만 한 그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었던 말인데, 저자가 너무도 시원하게 그것도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나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우선, 스스로에게 향하는 비난과 부정의 화살을 멈추는 것이 시작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또는 불편한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아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쉽게 타협하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좋은 게 나쁜 거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상황이란 참 서글프다. 사실 모두에게 사랑 받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자존감 심리치료센터를 운영하며 가족과 연인, 친구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온 저자라서 그런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타인에게 기대하거나 의존하지 말고, 그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주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특히나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얘기는 뜨끔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으니 타인 역시 그대로 돌려주리라는기대가 만든 상처라는 말에 반박할 만한 무엇도 없을 테니까. 이렇게 직설적인 말로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고, 돌아오는 게 상처뿐이라면 굳이 그 인연을 끌고 갈 필요 없다며 쿨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어 준다.

 

 

 

열정을 지니고 도전하지 않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직업을 얻고 나서 '확인하는 시간'을 갖고, 조정이 필요하다면 그때 하면 된다. 뭐 하러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누구에게나 시행착오를 통해 내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저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선택한 직업이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차곡차곡 실력을 쌓는다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주체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제대로 저지르고 용감하게 실수하자. 젊음이라는 자본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모두 그럴 때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말로 상처 받고, 반대로 사소한 행동 하나로 위로 받고, 지나고 나면 별 것 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절대 아닌 그런 일들 말이다.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산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그 어떤 관계도 쉽게 진행되지 않으며, 내 마음대로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 속에서 상처받고, 위로 받고, 내 편을 찾게 되고, 나의 적도 알아보게 되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 하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라고 해서 상처받는 것조차 당연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우리들에게 등을 토닥여주면서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준다.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라고 해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들에 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심리 처방전이다. 내 마음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또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조금 더 주체적인 삶을 위해 한 걸음 내딛게 될 것이다. 시작은, 언제나 옳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번에 리커버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너무 산뜻하고 예쁜 표지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 양장 제본과 업그레이드된 리커버도 멋지지만, 내지가 핑크색이라 더욱 따뜻한 느낌이 든다. 몸도 마음도 추운 이 계절, 어디선가 상처 받을 일을 겪었다면,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이 따뜻한 핑크색이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말이라 이런저런 선물할 일이 많은 시기이기도 한데, 선물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책선물은 받는 사람의 취향까지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은 누구한테 선물하더라도 마음에 들어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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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 정호승의 하루 한 장
정호승 지음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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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똑같은 해가 오늘도 뜨고, 어제와 똑같은 바람이 오늘도 불어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릅니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바람이 불어올 뿐입니다.

 

올해도 어느 새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 초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과연 나는 한 해 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정호승 시인은 매년 12 31일을 '실패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실패를 기념하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성공으로 가는 한 과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실패를 기념한다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았던 터라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분히 수긍이 되었다. 올해는 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내가 한 해 동안 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들,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어 졌다.

 

정호승 시인의 책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와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 수록된 문장들을 365가지 한마디를 발췌해 하루 한 장씩 읽는 일력으로 만들었다. 탁상달력으로 사용하기에도 딱 좋은 크기고, 매일 매일 아침마다 하루의 마음을 다잡는 목적으로 한 장씩 넘겨보아도 참 좋을 것 같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마시고, 비타민을 챙겨 먹고.. 하루에 늘 하는 일들처럼, 하루 한 장 일력을 넘기는 것도 습관으로 만든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한마디 말로 지옥과 천국을 경험할 수도 있고,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한마디 말이 내 일생을 바꾸어놓을 수도, 절망에 빠진 나를 구원해줄 수도, 하루를 또 버티고 살아낼 힘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일력이라 나에게도 훌륭한 선물이 되지만, 누군가에게 연말 선물로 건네기에도 부담 없이 너무 좋을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전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해왔던 것을 하면 항상 얻어왔던 것을 얻게 됩니다. 익숙한 것이 편하다고 해서 마냥 그것에 머물러 있다면, 바로 그 익숙한 것들이 독이 되고 쇠사슬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11일에 해당되는 일력을 넘겨 보았다. 새해의 시작을 하는 한마디는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았다면 일생을 성실히 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가 바로 일생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하루가 일생이라는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의미가 고스란히 와 닿아서 순간 멈칫했다. 무심코 지나치는 매일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종종 잊어 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 사소한 일상들이 쌓여,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 나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제와 똑같은 해가 오늘도 뜨고, 어제와 똑같은 바람이 오늘도 불어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다. 그 모든 것은 어제와 달랐다."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시간을 스쳐 지나갔을 뿐.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니 그 얼마나 소중한가. 나의 하루라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것이 말이다.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배부를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밑줄 친 그 한 구절이 저를 행복하게 해줄 때가 있습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허무한 날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그 일상들 속에 따뜻함도, 뭉클함도, 서글픔도, 쓸쓸함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그렇게 하나뿐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력을 쓱쓱 넘겨보면서 해당 날짜에 쓰여 있는 한마디들을 읽어 본다. 마치 책처럼 한번에 365가지 한마디들을 전부 다 읽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글들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진리도 있고,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도 있고, 글을 읽고 서야 깨닫게 되는 말들도 있었다. "오늘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준비"라는 문구에 눈길이 멈췄다.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사는 생은 가짜 보석과도 같다"는 그 한마디가 어쩐지 비수처럼 가슴에 콕 박히는 느낌이다. 나는 과연, 그렇게 치열하게 생을 살아내고 있었던 걸까. 싶어서 말이다.

일력에 쓰여 있는 한마디들은 지친 나에게 토닥토닥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두려움에 의연하도록 용기를 주기도 하고,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려 먹먹하게 만들기도 하고, 내일 또 반복되는 그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기왕이면 두 개를 사서, 자신에게도 선물하면 더 좋을 테고 말이다. 당신의 내년을 응원한다. 올해보다 더 빛나기를, 올해보다 더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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