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범인들이 그러듯이. 그들의 특권이자 유일하게 합리적인 전략이라는 듯이.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어떻게 이미 해결된 사건을 수사해서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진실을
거부하면서 진실과 싸운다? 강력반 형사로 일하면서 보았던 여느 범인들의 가족처럼 애처롭게 부정하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어!" 해리는 자신이 왜 수사를 하고 싶은지
알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가
해줄 게 그것뿐이라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고집하는 주부처럼,
친구 장례식에 악기를 가져가는 연주자처럼.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든 위로를 얻기 위해서든, 뭐든 해야 하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 그 아홉 번째 작품이다.
<스노우맨>,
<레오파드>
바로 다음 이야기이다.
《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소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 ‘올레그’였다. 라켈의
아들이자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그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레오파드> 이후
3년,
마침내 돌아온 오슬로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 이제는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되어버린 올레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해리는 더 이상 강력반 형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에게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올레그를 지켜야
한다.
해리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
라켈, 그녀가 아들인 올레그를
데리고 오슬로로 왔을 때 소년은 겨우 서너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 라켈과 해리가 만났고, 올레그는 해리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하지만 스노우맨이라는 소름끼치는
기억에서,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해리의 세계에서 라켈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오슬로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된 올레그가 교도소에 있다. 올레그가 죽인 소년 구스토는 레그를 마약의 길로
인도한, 올레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바로 죽은 구스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을 입양해준 한
가정을 무참히 박살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약 중독자 소년.
팬텀.
유령의 목소리.
올레그는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리는 확실해지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일 수 없다며
나름의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모든 증거들이 올레그가 살인을 했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과연 올레그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유죄일까?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폭력과
마약에 찌든 ‘어두운’ 오슬로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이 작품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해리 홀레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끝을 낸다. <팬텀> 뒤에
두 작품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시리즈의 마지막을 슬퍼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해리는 벙커 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터널은 벽에 끼어 있는 철판 앞에서 끝났다.
루돌프 아사예프는 말하자면 나가는 길만 만들어놓은 것이다. 터널. 그리고 해리는 왜 다른 출구를 먼저 다 열어봤는지
알았다. 그 꿈
때문이었다.
그는 좁은 터널을
응시했다. 폐소공포는
비생산적이고 위험에 대한 거짓 신호이며 극복해야 할 증상이었다.
해리는 탄창이
MP5에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유령들은 우리가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 중에 해리 홀레 시리즈만 모아 보았다.
아마 대부분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와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내가 해리 홀레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의 남자, 그리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이지만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으로
뛰어난 수사 능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남자!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인
<팬텀>을 만나면서, 그 동안의 작품들을 돌아보니 이렇게 모아놓고 책등만 보아도 지나간 시간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였다.
2월에는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리디머>가 출간될 예정이다. 곧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요 네스뵈는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해리 홀레를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다. '해리 홀레의 끝, 시리즈의 정점!'이라는 홍보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말이다.
원래 이 시리즈는 전체 열
권으로 마무리가 되었었다. 마지막 작품
<Police>가 나온 것이 2013년이다.
국내 출간작 외의 작품들은 원서로 구매했지만, 더 이상 해리 홀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새로운 해리 홀레
이야기가 <The Thirst>라는 작품으로 2017년 봄 다시 시작되었다!! 앞으로 스무 편, 서른 편..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