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거라고.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서로의 소울 메이트를
힘겹게 찾아 헤매다 마침내 상대방을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생에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상대와 함께 하길 바란다. 하지만 서로에게 반해 온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던 마법의 시간이 지나고, 결혼이라는 현실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만다. 어떤 문제는 같이 살아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자주 했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연애가 멋진 신발을
신은 사람과 같이 걷는 거라면 결혼생활은 양말도 벗은 맨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런 부분이 편안함과 친밀함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참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을
공유하고, 그러니까 일상의
민낯을 고스란히 만나게 되는 결혼이란 대체 뭘까.
‘홀딩, 턴’은 스윙 댄스 용어로 ‘홀딩’은 파트너와 만나 손을 잡는
동작, ‘턴’은 돌면서
춤을 도는 동작이라고 한다. 춤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스윙 댄스의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이 되진 않는다. 다만, 나도 학창시절에 남학생들과 어색하게 포크댄스를
췄던 기억은 가지고 있어 조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춤을 추는 두 사람,
'홀딩,
잠깐 정지하며 서로를 붙잡았다가 턴, 회전하는 동작.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를 잡았다가 빙그르 도는 순간, 그저 공중에 사라져 버리는 그 짧은 시간의 틈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은
소소하게 쌓인 감정들이 결국 폭발해 파국을 앞두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들 두 사람이 갈등을 극복하고 홀딩,하며 살아갈지,
혹은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턴, 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지의 과정이 소설의 내용 전부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결혼 후 그들이
파국에 이르게 된 과정이나 이혼 후의 삶보다는,
현재는 그런 상태이지만 그들에게도 서로에게 오직 상대만 보이던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이별이나
이혼 이야기라기 보다, 연애의
과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지나온 어떤 순간, 인상적인 장면을 꺼내 후후 불어 맛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이 베푼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이 필요하다. 청춘이라 명명할 수 있는 장면과 따뜻했던 눈 맞춤,
짜릿했던 키스,
온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티백이어야 한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 그것들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고 이 삶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으며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 기운을 얻을
수 있다.
지원과 영진은 다투게 되면 일주일 동안 말을 섞지 않은 채 지내곤 했다. 그들 사이엔 아이도 없었고, 각자 거실과 서재에서 낯선 타인처럼 각방을 쓰며 지내는 것이 이제는 그들 사이의
관례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지난번 싸움에선 냉전 상태가 열흘 넘게 이어졌고,
이번에는 아직 일주일째지만 보름을 가뿐히 넘기며 장기전에 돌입할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지원은 결정을
내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그들은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영진은 공무원이었고,
닉네임조차 자기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이 호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을 거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둘만의 춤을 추며 사랑의 마지막 단계라고 불리는 결혼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진행되지 만은 않는 법, 애써
고른 테이블에 생활의 얼룩이 지듯 사랑은 쉽게 변형되고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관계에 대한 회의가 점차 얼룩처럼 커진다.
결혼생활은 사랑 위에 세워지지만 어떤 문제로 감정이 상해서
대립할 때 사랑은 저 너머로 날아가버리거나 훼손 방지를 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한다.
나도 이제
결혼 3년차인데 남편과 연애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부분들과 다른 점들이 어쩔 수 없이 생기기 시작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극복할 수 있는 것과 넘어가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는 것을
경험해봤기에, 더욱 서유미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극중 지원은 결혼생활 내내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언제나 자신과 맞지 않은 그 부분을 고치고 싶어 하고,
자신이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단언컨대 착각이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수십 년의 시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지 않나. 상대에게 맞춰주고, 포기할 수 있는 건 포기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낯선 타인이 부부라는
테두리 아래 가족 관계를 유지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 버린 시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결혼을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결혼을 인생의 완성이나 삶의 해피엔딩으로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 더 와 닿는 부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삶의 서사 속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어,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거나,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았거나, 이혼을 고민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