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뿌리는 소녀
니시 카나코 지음, 고향옥 옮김 / 케미스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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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렇다. 성장의 종착점은 죽음이다. 료처럼 바보같이 우쭐대고, 아버지처럼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그리고 미라이처럼 비참해지고,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죽는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

우리는 죽기 위해 성장하는 것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어째서 성장해야 하는가.

 

자그마한 온천 마을에 사는 11살 소년 사토시. 주민의 대부분이 온천 여관을 운영하는데, 사토시의 부모 역시 중하 정도의 규모인 아카쓰키칸이라는 여관을 운영 중이다.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 집의 딸 마나는 가장 먼저 생리를 시작하는 등 여성적인 면모로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왔는데, 어느 날 전학온 고즈에 덕분에 대번에 판도가 달라진다. 고즈에는 엄마와 함께 아카쓰키칸에 왔는데, 입주 종업원이 지내는 기숙사에서 지내게 된다. 고즈에는 마치 중학생 모델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빼어난 미인이었기에, 순식간에 마나의 인기를 뛰어 넘는다. 사토시는 눈에 띄지 않는 걸 좋아하는 성격으로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는데, 고즈에가 사토시네 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의 주목을 받아 그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이제 막 사춘기에 발을 들이게 된 사토시는 매일 우울하다. 자신의 몸이 조금씩 변화해가는 것도 징그럽게 느껴지고, 어른 남자가 된다는 것을 야만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싫어한다. 여러 번 바람을 피우다 엄마에게 걸리고도 여전히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아빠의 모습도 불결하고 저질로 느껴졌고, 마을에 자신이 되고 싶을 만큼 동경하는 어른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의사와는 별개로 몸이 점점 변해 어른 남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체 왜 죽기 위해 성장 당해야 하느냐고, 그냥 앞으로 지금 이 모습으로 계속 있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 사토시의 삶에 아름답지만 이상하고도 독특한 고즈에라는 소녀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

 

"사토시, 고마워."

그러고 나서 고즈에가 한 말을, 나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나 있지, 눈이 있어서 좋아. 코가, 입이 있어서 좋아.

우리 별에서는 그런 거 필요 없었거든. 이미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 바로 그 순간에 뭔가를 볼 필요가 없던 거지. 뭔가를 느끼지 않아도 됐던 거야."

고즈에라는 캐릭터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4차원 소녀이다. 빼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고, 뿌릴 수 있는 것은 뭐든 닥치는 대로 뿌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는데, 거기다 자신이 어떤 별에서 우주선을 타고 왔다고 말한다. 그녀의 함께 지내는 엄마는 생물학적 엄마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별에서 살던 생명체이며, 그 별에서는 누구나 나이가 들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황당한 소리인가 싶다가도, 그녀의 말을 조금씩 듣고 있자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우리 모두 고즈에처럼 11살이었던 순수한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우주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녀가 겪게 되는 모든 일들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행동들이 그녀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신기한 일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보여진다. 그런 그녀였기에 사토시가 거부하는 신체적인 성장과 낯선 어른의 세계 조차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너를 이루는 알갱이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이루고 있는 알갱이는 언젠가 모두 새롭게 교체되는 거지."

"교체돼?"

"지금의 너는, 완전히 새로운 너로 다시 태어나.

 

고즈에는 말한다. 자신이 뿌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전부 떨어지기 때문에 멋진 거라고. 뭐든 영원히 계속된다면 멋지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니까 멋진 거라는 그녀의 말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매 순간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무심코 흘려 보내는 이 시간도 역시 생애 단 한 번뿐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거고, 소중한 거라는 말이다. 사토시는 깨닫는다. 고즈에 덕분에 매일 일기를 써 나가면서, 하루하루를 살아 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에 조용히 감동하게 된 것이다. 어제, 오늘, 내일.. 하루도 놓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날마다 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나로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1살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다, UFO, 우주인까지 등장하며 엉뚱한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뭉클한 순간들이 많았다.

특히나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누구나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루이의 말을 곧 대로 믿은 건 바보처럼 보였던 도노 뿐이라는 것을 사토시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도노는 누군가가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비난하거나, 어차피 거짓말일거라고 단정 짓지 않고, 그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는다고 말한다. 사실 같은 건 전혀 상관 없다고, 그저 상대가 믿어 주길 바라면 믿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믿은 것이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대로 상처입으면 된다는 거다. 믿은 게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될까 봐 처음부터 믿지 않는 건 싫다고, 전부 믿고 나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 상처 입을 거라고 말하는 그의 어눌한 말이 심장에 콕 박히는 느낌이었다.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 왜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무조건 믿어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아마 다들 했을 것이다. 니시 가나코는 나오키 상을 수상했던 작품 <사라바>에서도 믿음에 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믿을 걸 누군가한테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스스로를 믿으라고 말이다. <우주를 뿌리는 소녀> <사라바>에 비해서 분량도, 분위기도 가벼운 느낌이지만 조금 더 마음을 울리는 잔상을 남겨주는 것 같다. 아름답고, 뭉클하고, 따뜻한 이 작품은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에게도, 그리고 아직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운 소년, 소녀들에게도 멋진 선물이 되어 줄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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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 유병재 농담집
유병재 지음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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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근심, 게으름, 시기, 질투, 나태, 친일파, 자격지심, 악성댓글, 독재자, 뻔뻔함, 교만, 식탐, 성욕, 의심, 위선, 이기심, 군부세력, 불평등, 폭력, 성범죄자, 혐오, 피해의식, 적폐, 질투, 차별, 꼰대, 자기혐오를 내 통장에 넣어두고 싶다. 거기는 뭐 넣기만 하면 씨팔 다 없어지던데.

 

 

워낙 티비 쇼프로그램은 잘 보질 않아서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가끔 뼈있는 발언을 마치 농담처럼 툭툭 던져 화제가 되곤 하는 유병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가 책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블랙코미디> 라는 농담집이다. 이 책에는 지난 3년 동안 저축하듯 모은 에세이, 우화, 아이디어 노트, 미공개 글 138편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두를 "개나 소나 책을 쓴다. 이 땅의 백만 저자들에겐 면목없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 같은 놈까지 책을 냈으니 말이다"라는 말로 열고 있다. 사실 연예인이 책을 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한다. 좀 뜨니 책도 내는 구나. 이제 개나 소나 책을 쓴다고 나서네. 라고 말이다. 정말 아무나 글이 아닌 이름으로 책을 낼 수도 있는 시대이지만, 이 책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독설, 위트를 빙자한 그의 쓴소리들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의 짧은 글들은, 길지 않아서 오히려 더 와 닿고, 뜨끔하고, 공감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운명이 말했다. 작작 맡기라고." 단 두 문장으로 이렇게 가슴을 콕 찌를 수 있는 작가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말에 가시가 돋아서 기분이 안 좋은 줄 알고 걱정했어. 성격이 안 좋은 거였구나." 이런 문구들은 너무 웃기면서도, 괜히 내 얘기 같아서, 혹은 내가 아는 그 누구의 얘기 같아서 뜨끔했다. "대한민국에서 아들딸로 살기 힘든 이유: 딸 같아서 성희롱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함" 이라는 문구를 보는데, 요즘 한참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몇몇 뉴스들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렇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찌 보면 마치 자학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자기반성'이라는 테마와 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바라보며 눈치보지 않고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할말 다 하는 '세상' 그 자체를 읽어내는 테마가 공존하고 있다.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 짧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건강한 코미디란 바로 이런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내용 자체와 수위는 그리 건전하다고만은 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핫.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는,

대부분 담배꽁초 바닥에 버리고, 알바한테 반말하고, 엄마한테 짜증부리고,

이런 기억에도 남지 않을 미세먼지 같은 작은 순간들이 모여 결정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영화나 만화, 혹은 소설을 보면 주인공에게 항상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 드라마틱한 갈등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순간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인생에서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란 아예 없거나, 모르고 지나가거나 그러지 않을까.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일상에서 매일 짓는 표정, 자주 내뱉는 말투, 누군가에게 짜증내는 상황, 나도 모르게 하는 습관들이 모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된다는 말은 그래서 참 서글프다. 애초에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말 미세먼지 같은 순간들이 쌓여 나란 존재를 구성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내 인생도 정확하게 기,,,결로 흘러가서 중요한 순간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고, 장대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일상의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는 순간들은 좀 더 대충, 편하게 흘려 보낼 수도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 책은 페이지마다 글보다 여백이 더 많고, 전체 두께도 얇은 편인데 이상하게 여러 번 들춰서 계속 읽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미 며칠 전에 다 읽어놓고, 오늘 또 뒤적거리다 눈에 들어온 페이지는 '우리 형'이라는 에피소드였다. 뭐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일로 형이랑 다투고 난 뒤 형이 정말 너무 미워서 뒤통수만 봐도 짜증이 치밀고 소리만 들려도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화가 나서 머릿속으로 상상한 형의 행동 중에 실제로 형이 한 행동은 단 한가지도 없더란 말이다. 그는 생각한다. "내가 미워하는 누군가는 실재하는 누군가인지, 내 상상이 만들어낸 누군가인지" 말이다. 미움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은 상대 그 자체보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 자체에 빠져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 구나 착각할 때가 있고, 가끔은 상대가 너무 미워서 그에 대한 감정을 자꾸만 키워나가 점점 더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본래 화가 많은 편이라, 용기가 부족해 삼켰던 분노들을 글로 써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기백은 없고 불만만 많은 인간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피해의식과 때때로 술기운까지 곁들여진 부끄러운 글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정의롭고 도덕적인 판단으로 언제나 멋지게 자신의 소신껏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처럼 크레딧 오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인생은 계속 되니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 또한 고스란히 스스로 책임져야 하니 말이다. "오해들 하는데, 내가 겁이 많아서 참는 거지 착해서 참는 게 아니야." 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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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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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커는 쉬지 않고 양동이째 들이붓는 것 같은 빗줄기 속에서 지지목에 기대선 채 어둠을 응시했다. 데커는 기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쁜 짓을 하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쁜 짓을 저질렀다.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그 나쁜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멜빈 마스. 189센티미터, 104킬로그램, 지방이라고는 없는 단단한 바윗덩이 같은 몸을 지닌 남자. 내셔널 풋볼 리그 최고의 유망주였으나,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20년 째 수감 중이다. 그리고 마흔두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이제 단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나타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그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을 하고, 그의 형 집행이 연기된다. 에이머스 데커, 195센티키터, 몸무게는 135킬로그램에서 180킬로그램 사이를 오가는 거한. 대학 4년 내내 미식축구 선수였고 내셔널 풋볼 리그에 진출했으나, 첫 번째 출전한 경기에서 사고로 선수로서의 경력은 끝났다. 경찰로서 20년 근무했지만, 어느 날 오랜 잠복근무 끝에 귀가했다가 아내, 처남, 그리고 딸이 잔혹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15개월 동안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그의 삶은 처참히 무너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들어와 자백을 한다. 전작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그와 관련된 사건 해결에 활약한 것을 계기로, 이번 작품에서 데커는 FBI에서 특수한 직책을 맡게 된다. 그리고 FBI 미제 수사 팀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죽기 직전 드라마처럼 목숨을 건진 사형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데커는 순간, 과거 대학 시절 미식 축구 경기에서 멜빈 마스와 맞붙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감옥에서 20년이라니, 그것도 어쩌면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범죄 때문에. 게다가 진짜 살인범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세부 사항들을 알고 있는 다른 남자가 갑작스럽게 자백을 한 것은 데커의 가족 살인 사건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한때 풋볼 선수였으며, 가족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한참 뒤에 누군가 나타나 범죄를 고백하는 것까지 너무나 비슷한 운명의 두 사람. 데커는 운명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자백한 그 남자가 살인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마스의 경우가 완전히 같은 일을 직접 당해봤으니 말이다. 그는 FBI 미제 수사 팀에게 마스의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겠다고 한다.

"놈들이 당신을 죽이겠다고 했잖아요."

"덕분에 희망을 얻었죠."

"빌어먹을, 제정신이에요?"

"그자들이 겁을 먹지 않았다면 왜 날 위협했겠어요?"

"당신은 겁을 먹어야 해요."

"이미 겁먹고 있어요. 미식축구 구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겁을 먹었죠. 경찰이 된 후 순찰을 나갈 때도 그랬고요. 그렇다고 내가 내 일을 하는 걸 그 누구도 막을 순 없었어요."

매년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고한데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극중 데커의 말을 빌리자면 단 한 명이라도 너무 많다. 그리고 분명히 한 명은 넘을 테고 말이다. 이것은 분명 실제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범죄 소설, 영화의 플롯으로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 '억울함'이라는 테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하지만 데이비드 발다치의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소재자체보다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다. 전작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데커는 미식축구 경기 중에 사고를 당했고, 잠깐 동안 죽었다 살아난 댓가로 가지게 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됐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뭘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기억을 찾으려고 할 때 머릿속의 영상 저장 장치를 켜면, 눈 앞에서 그 형상들이 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마치 녹화된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보기라도 하듯이. 그런 능력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도록 만든다. 거기에 더해 데커는 그것에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공감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색깔들이 불쑬 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들고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그러니 당연히, 일반적인 범죄 수사의 패턴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사형 직전의 순간에 목숨을 건진 마스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인 것일까. 여전히 살해당한 가족과 그 장면을 잊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불운을 가진 데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숨겨진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데이비드 발다치의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속도감있는 전개로 이 두툼한 페이지의 끝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초반부터 꽤 많은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가 진행될수록 숨겨진 이야기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지루할 틈이 없다. 거듭되는 반전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나 비슷한 운명을 가졌지만 완전히 다른 성향의 흑인과 백인, 두 남자가 굉장히 어렵게, 천천히 우정을 나누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더욱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선사한다. 데커와 마스가 결국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그 장면은 정말 뭉클했다.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다니, 진정 완벽한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마자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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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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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둘이면 모든 것이 더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장보기, 목욕시키기, 병원 가기, 집안일 하기 같은 것들. 고지서가 쌓여갔다. 미리암은 침울해졌다. 공원에 나가는 일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겨울날 긴 하루하루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밀라의 투정에 진절머리가 났고 아당이 첫 옹알이를 해도 무관심했다. 혼자 걷고 싶은 욕구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커가는 것이 느껴졌고, 거리로 나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때로 그녀는 속으로 '얘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 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리 10구 오트빌 가의 근사한 아파트. 구급대원들과 경찰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건물 아래 모여 있다. 아기는 몇 초 만에 죽었고, 여자 아이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몸부림치다 죽는다. 그렇게 이 작품은 제목과는 달리 그다지 달콤하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모에 의해 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가 쇼크 상태로 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완벽해 보였던 보모의 손에 죽은 두 아이, 그녀는 왜 그토록 아꼈던 아이들을 죽인 것일까. 이들 가족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리암은 밀라를 임신했을 때 법학 공부를 끝내가고 있었다. 약하고 짜증 많고 끊임없이 울어대는 아기였던 밀라가 겨우 한 살 반이 되었을 때, 그녀는 또 임신했다. 남편인 폴은 유명한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아티스트들의 변덕과 그들의 스케줄에 붙들려 밤낮을 보내고 있었다. 둘째 아당이 태어나자 그녀는 점점 집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힘겨워졌다. 저녁이면 문가에서 애타게 남편을 기다렸고, 그에게 한 시간씩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밤이면 폴은 하루 종일 일한 뒤 마땅히 푹 쉬어야 할 자의 깊은 잠을 잤고, 원망과 서운함이 미리암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전업주부로서의 삶에 지쳐갈 무렵, 그녀는 우연히 법학과 동창을 만나게 되고, 다시 변호사로서 일을 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아이들을 맡길 보모를 구하는 거였고, 그들은 루이즈라는 믿음직스러운 보모를 구하게 된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

루이즈가 길을 걸을 때면 음산한 이 후렴구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이제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심장에 담긴 모든 애정을 다 소진했고,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스치지 않는다.

'이러니 벌을 받을 거야.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벌을 받을 거야.' 라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소리를 듣는다.

루이즈의 남편은 죽었고, 스무 살이 된 딸은 독립해서 그녀는 현재 혼자 지내고 있다. 그녀는 예전 고용인들의 평가 또한 완벽한 보모였다. 미리암과 폴의 일상 속에 루이즈가 함께 하고부터 숨 막히고 비좁던 아파트는 평온하고 밝은 공간으로 바뀐다. 그녀가 오고 나서 몇 주 후, 뒤죽박죽이엇던 아파트는 완벽한 중산층 실내 공간으로 바뀐다. 루이즈가 오고 몇 주 후 아당은 걸음마를 배우고, 밤마다 울어대던 아이가 아침까지 새근새근 평온한 잠을 잔다. 조금 사납고 약은 아이인 밀라 또한 루이즈는 서서히 길들인다. 아이들에겐 친절하고, 요리부터 청소까지 모든 일에 철두철미한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보모였다.

 

이야기는 루이즈가 미리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과 그녀가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는 고독의 시간이 교차 진행된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루이즈가 밀라와 아당의 보모로 지내는 시간이다. 그녀는 부모인 미리암과 폴을 대신해 진짜 아이들의 부모처럼, 그들 집안을 지탱해주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녀의 많은 행동과 생각들이 보여지지만, 사실 루이즈라는 캐릭터는 안개처럼 모호하게 보여진다. 극중 누구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말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살인의 과정 자체를 그리지는 않는다. 그저 그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그저 조용히 들여다볼 뿐이다. 강요 받는 모성, 경력 단절 여성, 산후 우울증을 겪는 어머니, 계급적 소외를 겪는 빈곤층의 이야기는 한국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더욱 공감되고, 이해되는 대목들이 많았던 것 같다. 여성이라면, 특히나 어머니라면 이 작품이 다가오게 되는 의미가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2016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다. 여성 작가로는 113년 공쿠르상 역사상 12번째 수상이라고 하는데, 그럴 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난 것 같다는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두렵지만 현실적인 이야기, 혼자라는 고독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만큼 내 곁의 가족을 돌아보게 만드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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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이 마노를 준 사람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게 아니기를 바라기도 했다.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내가 이토록 불행한 이유가, 이렇게 애써 적응하려고 몸부림쳐야만 하는 원인이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하기도 했다. 이 바깥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에게 그걸 가르쳤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야생 열매로 만든 잼과 젤리를 팔며 살아가는 헬레나는 어느 날 뉴스에서 죄수가 교도소 이송 중 두 명의 교도관을 죽이고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아동 유괴, 강간 및 살인죄로 가석방이 불허된 무기징역 죄수로, 바로 헬레나의 아버지였다. 탈옥수 제이콥은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14년 동안 감금했던 악명 높은 일급 범죄자였는데, 그 어린 소녀가 헬레나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살인범이자 납치범인 아버지와 유괴 피해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2년 동안 외딴 늪지대에 고립된 채 자랐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탈출한 뒤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되고 13년 동안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이름을 바꾸고 지금의 남편인 스티븐을 만나 결혼해, 현재 두 딸과 함께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의 탈옥과 함께 그녀가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새로운 삶이 무너져 버리게 된 것이다.

 

경찰들은 헬레나를 찾아와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묻고, 그녀는 남편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탈옥한 죄수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게 만들어서 너무나 미안하다. 그녀는 우선 남편과 딸들을 그의 부모님 댁으로 보내고 다짐한다. 이 상황을 고칠 방법, 자신의 가족을 돌려받을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잡겠다고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다르게 행동했을까? 물론이다. 하지만 한 번 내린 결정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게 원하던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난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기차가 탈선하며, 홍수와 지진과 태풍으로 사람들은 죽는다. 스노모빌 운전자는 길을 잃고, 개들은 총에 맞는다. 그리고 어린 소녀들은 유괴를 당한다.

사실 범죄자 부모를 둔 자식들의 이야기라는 플롯은 스릴러 장르에서 자주 등장해왔다. 하지만 대부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등의 무시무시한 부모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딸 혹은 아들이 등장하고, 매우 현대적인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범죄자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편견과 오해 등의 불합리한 상황에서 꿋꿋하게 현실을 이겨내는 자식들의 모습에 꽤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그런데 카렌 디온느의 이 작품은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다. 우선, 아버지를 쫓는 딸인 헬레나라는 캐릭터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녀는 마쉬왕, 즉 늪을 다스리는 왕이라 불린 아버지에게 사냥, 추적, 가죽 손질법 등을 배웠다. 그녀의 다섯 살 생일로 20센티미터짜리 양날형 보위 나이트를 선물했을 정도이니 뭐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될 것이다. 가스도, 전기도 없는 늪지대 오두막에서 태어난 헬레나는 또래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 토끼나 사슴, 곰 따위를 사냥하며, 칼과 총이라는 도구에 매료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연히 헬레나는 자연과 어우러져 의식주를 해결했던 인디언의 생활방식대로 생활했던 모습 그대로 인디언 전사처럼 자랐던 것이다.

 

이야기는 현재 탈옥한 아버지를 쫓는 헬레나의 여정과 과거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아버지가 납치범인 줄 모르고 함께 살던 기억이 교차 진행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동경하며 자랐다. 12년 동안 부모님 외에는 다른 사람을 본 적도, 다른 사람과 말을 해 본 적도 없었으니, 아버지의 명령이 곧 진리였고, 아버지의 행동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처럼 보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냥, 추적 능력으로 탈옥한 아버지를 쫓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이 작품은 안데르센이 쓴 동명의 동화 <마쉬왕의 딸>을 모티브로 쓰인 이야기라 중간 중간 동화의 한 대목을 삽입해놓고 있다. 동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집트 공주와 마쉬왕이라고 부르는 끔찍한 괴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헬가라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헬가가 이 작품 속 헬레나라는 캐릭터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래서 동화적인 색채가 뚜렷한 심리 스릴러라는 점에 있어서도 여타의 작품과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헬레나는 애증 어린 아버지와의 사냥을 겪으며, 무력했던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점차 이해하게 되고, 두 딸과 남편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여성 영웅 캐릭터를 구축한다.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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