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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평점 :
<위 사진 참조>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입니다. 1932년 파리의 생 라자르 역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후 20년이 지나서 브레송의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할 때 이 사진은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였고,(아마 사진 제목을 바꾼 사람은 전시회 큐레이터일 가능성이 높음.) 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지금도 브레송이라고 하면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공식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적절하게 명명되었던지요.
( 추가 정정 글입니다. 아래 댓글에 보시면 나오는 글 인용하겠습니다.
1952년 파리에서 낸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집 제목이 <재빠르게 잡은 이미지>인데요. 거기서 브레송이 쓴 인상적인 서문에서 ˝결정적 순간˝이 등장합니다.
˝결정적 순간˝의 사진은 ˝눈 깜짝할 찰나에, 어떤 사실의 의미작용과 형태의 엄격한 조직화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1952년 미국판 사진집에는 <결정적 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고 전시에도 그 제목이 붙은 겁니다. 생 라자르ㅡ역 사진이 <결정적 순간> 사진집 중 가장 대표하는 이미지라 뉴욕 전시장에서는 그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큐레이터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추측이 여지 없이 빗나갔는데요. 결정적인 순간의 의미를 브레송 작가 본인의 설명도 있었습니다.
agalma님의 덧글 첨부 합니다.)
빗물이 고인 마당 위로 한 사람의 뛰어가는 이 순간의 찰나, 그리고 수면에 반사된 대비. 앞에 있는 사람의 정지된 동작과 반영. 뒤편에 벽보 혹은 광고판인가요, 여기에도 자세히 보면 무용수가 뛰는 장면이 전면과 후면에 대한 대비를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벽보 그림의 무용수조차 바닥에 고인 빗물에도 반영이 되어 있는 것도 보입니다. 이 화각에 피사체에서 투영은 두 개의 몸짓으로 뻗어 나가므로 마치 공중부양이라도 된 마냥, 그야말로 순간 포착이라는 순간의 정지된 시간의 단면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사진가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순발력의 찰나입니다. 이 순간에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는 결정. 그리고 결심. 이 순간이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되기에 충분했겠지요. 순발력이 늦어서 보고도 찍지를 못했던가, 찍고는 싶어도 카메라가 없었다 하던가, 찍을 수 없는 상황이 무수히도 많은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찍었다는 사실이었죠.
저도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보게 된 브레송의 사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사진 한 장의 깊은 각인은 사진의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사진 한 장이 "사진이란 무엇을 말해주는지 단적이고도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본능처럼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만이 아니라면 안 되는, 이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그 순간에 대한 농밀한 응집력이 사진 한 장으로 나타낸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력했던 이유입니다. 이때까지 무수한 사진을 봐왔어도 아직까지도 이 사진을 뛰어넘을 만큼 충격적인 감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연이 필연처럼 담겼다고나 할까요. 이 사진은 설정해서 연출된 사진이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장소에 카메라를 들고 결심이 서 있고 셔터를 눌렀다는 이 짧은 시간의 스피드는 사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고민하는 거대한 담론이 되기에 차고 넘치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이렇게 찰나의 순간에 결정적이라는 것. 사진 한 장이 삶의 결정으로까지 확장되는 의미와 느낌을 전이시켜 존재의 담론을 위대하게 제시를 했던 것이니까요.
이 책의 저자, <조던 매터>는 우연히 뉴욕의 전시회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브레송의 사진을 만났다고 기술합니다. 즉, 사진을 찍겠다는 결정을 이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입시켰고 사진을 찍겠다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사진 전시회가 결국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이었으며 모티브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으로 결정적인 삶의 방향이 인도했다고나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이라는 이 사진 책에 나오는 사진을 보고 브레송의 이 사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확실한 심증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은 무용수를 대동하고 각기 이야기하는 주제에 걸맞은 사진을 설정하여 연출했더군요. 이른바 자연스럽게 우연히 포착된 사진이 아니라 연출하였고 연출로써 주제를 상황 맞게 설정했던 사진이었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듯이 무용수의 몸짓이라는 무용 동작으로 각색하였습니다. 흔히 사진에 있어서 누군가 먼저 사진을 처음 찍었던 것에 비해 두 번째부터는 비슷한 사진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인식 매우 강합니다. 사진 이론의 일반론에서 보자면 누군가 먼저 찍은 사진을 베끼듯이 따라 하는 사진은 처음의 사진보다 가치 절하시키는 듯이 생각하거든요. 사진은 최초, 또는 처음이라는 처음이 굉장히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진이라도 비슷하게 찍는 것은 처음에 비해 빛바랜 사진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의 사진이 평가 절하하는 관례가 있기도 하거든요. 매터의 사진도 마찬가지로 브레송의 사진이 계기가 되었기에 처음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진이 우연으로 가장하는 설정이 자칫 절하시켜 볼 수도 있으나, 책의 저자인 작가의 주장하는 주제와 이야기의 설정에 절묘하게 각색하여 사진 한 장으로 수 편의 드라마를 압축시켜 놓은 해석의 재창조적인 연출 방법이었다는 것이 작가의 사진에 대한 창조적 가치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기야 무슨 예술이던지 간에 독단적으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없을 것이며 모방은 곧 새로운 가치 창조의 바탕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마도 이 사진 책에 나오는 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 가장 잘 담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수많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되풀이해서 죄적화한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도출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이 선택되었겠지요.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한 그의 표현에 대한 집념을 읽을 수 있는 사진들로 이 책의 지면은 전부를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절묘한 동작과 사진적인 구성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배경을 뒤로하고 무용수와 배경의 조화가 너무나도 기발하고도 선명하게 부각돼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진의 주 피사체가 무용수입니다.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의 몸짓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무대가 아니라 일상의 장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무용수를 투입하고 무용수의 전문적인 몸동작을 표현하였던 것이죠. 그런데 왜 하필 무용수 일까요? 무용수는 춤으로 몸짓을 표현하고 이 표현이 곧 몸의 언어입니다. 몸짓은 언어가 나오기 이전에서부터 원초적인 언어였습니다. 그 몸동작의 의미들이 모여서 춤이 되었던 까닭이겠지요. 기쁠 때뿐만 아니라 슬픔조차도 몸짓은 춤으로 나타냅니다. 경건할 때는 재사의 몸짓으로, 기쁠 때는 환희는 몸짓으로 슬플 때는 위혼의 몸짓으로 나타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짓은 시각적으로 명확 단언하게 직접적인 몸으로 말을 합니다. 이 몸짓의 춤을 예술로 승화시켜내는 사람들이 무용가거든요. 춤의 전문성에서 비추어 보자면 무용가들은 몸짓의 전문가입니다. 이 몸짓의 춤을 무용가들이 연출을 전문적으로 했습니다. 즉 사진의 설정에 전문가의 몸짓을 세련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사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진은 설정상 전문가들에게 말을 하도록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이즈음에서 사진의 세계적 흐름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의 사진작가들은 설정성에 상당히 사진의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예술적 창조성의 굉장히 강합니다. 특히 사진적인 독창성에 있어서 이 독창적인 설정으로 사진의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진의 큰 흐름이 독특한 시각적인 연출의 미가 돋보이는 영상 아트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진의 조류는 꾸미지 않는 자연적인 면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국 작가의 창의적인 설정 주제는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닮은 경향이 있는 이유도 가르치는 교수들이 외국의 사진학으로 학위를 받아오는 등 이런 경향과 토대로 사진학의 커리큘럼이 짜여 있는 탓도 클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작가들 경우는 주류가 산천초목 철철마다 따라가서 보이는 자연적인 풍경 사진이 주류를 이룬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진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진작가의 경우는 대부분 사진의 취미로 시작해서 사진작가로 데뷔하는 추세이다 보니 사진 취미의 시작이 풍경 사진에서 나왔던 이유겠지요. 자연의 모방성에서부터 점차 탈 자연적 설정이나 주제로 넘어가던가, 아니면 그대로 풍경 사진만 지속적이든가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연출된 사진은 자연미 대신에 인공적인 형태적인 미학을 추구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춤판이 아니라 무대가 우리가 삶의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무용가들에게 춤의 동작을 단면화시켜 냈던 것에서 해학적이면서도 은유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이 무용가들에게 예술적인 포즈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사진의 전체적인 포트폴리오 구성이 우리 존재의 무대라는 공간의 전경과 배경의 교집합이었던 것이죠. 그 교집합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으니까요. 몸짓의 언어는 공간 속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이를 사진으로 동작을 중지 시켜 냄으로써 느낌의 극대화하려는 그 의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 모든 행동은 곧 누군가에게는 예술이고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현장입니다. 결국 이 책의 사진은 생존의 현장이 곧 예술의 현장임을 즐겁고 신나는 무용가들의 동작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진도 아주 흐뭇하게 감상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보내주신 이웃분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