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있어서 이익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냉철하다. 아주 차갑단 뜻이다. 상호 간이 이익이 교집합을 이룰 때에만이 공존이 가능하지만 이게 아니라면 가차가 없다. 어떤 선택이 덜 손해가 나고 더 이익이 발생하느냐에 따라 가부가 결정된다. 회사라는 이익집단도 마찬가지다. 직원도 회사의 이익 추구와 별반 다르지 않는다. 직원이 더 많은 이익이 나는 회사로 옮기는 것도, 역으로 회사가 직원을 해고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어느 것이 이익을 더 발생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고용과 해고가, 고용유지와 사직이 판가름의 기준이 된다.
특히 회사는 이런 이익적인 측면에서 회사의 이익에 대한 고려 대상일 뿐이지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회사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해고 통보를 피고용자에게 던질 수 있고, 반대로 지금의 회사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는 회사가 있다면 지금의 회사는 바로 사직할 수 있다. 회사가 어렵다고 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제할 수도 없다. 반대로 개인이 어렵다고 해서 회사가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이렇게 회사와 개인은 어디까지나 이익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상존할 따름이고 여기에서 각각의 상호의 여건에 온정적인 것들은 기본적으로 상호 배치가 어렵다. 이게 냉혹은 상수이고 온정이 변수이다. 바로 이익이었던 것이다. 일부 각각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변수가 있긴 하다만, 결정적인 것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문제는 인력을 요구하는 회사와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 간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불공정함을 낳는 원인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앞으로 이 불균형은 더 심각해진다는 불길함이다. 사람이 남아돈다는 이야기는 손창섭의 소설, "잉여인간"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요즘은 이 질문의 농도가 더 심각하다. 사람이 남아돌고 회사가 늘어나도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즉 수요와 요구의 불균형이다. 일례로 올해 초, 은행원들이 한창 일 할 40이란 나이인데도 벌써 명예란 이름을 붙여 퇴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점점 더 확대되고 보편화되고 지속적일 것이 뻔하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익의 극대화는 상용 경비의 축소와도 맞물려 있다. 제일 큰 범주가 인건비가 아닐까. 그러니 계속 인건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돌릴 것이고 사람은 필요 없어져만 갈 것이다. 따라서 출산율의 저하도 이런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서 보자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 한다. 필요 없는, 그래서 잉여인간은 계속 낳기를 원한다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모순적이다. 자연계는 먹고살기 힘들수록 자연적으로 적게 낳는 게 맞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어 갈수록 먹고살기는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는데 낳기를 강요급으로 요청하는 이유는 이런 잉여인간이라 할지라도 소비력이 곧 이익으로 연결돼 있는 까닭이다. 소비할 사람은 더 만들기를 원하고, 고용은 줄이길 원한다면 과연 소비력 있는 사람이 줄어들 때 전체적으로도 이익은 줄어든 것이다. 문제는 소비력의 불균형과 이익 창출의 불균형으로 각기 개별적인 경우에로 국한시키고 만다. 역시 이에 대한 영향은 쮜불도 없이 회사에 목을 매달아야 할 사람에게 먼저 미친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이 양산된다. 파견직, 일용직, 파트타임직, 기간제직 등등 형태는 다르나 그 속성은 비슷하다. 해고에 따른 비용조차도 최대한 줄이는 수법은 앞으로도 여전히 확대되고 증폭될 것이 뻔하다.
중세의 신성을 통한 종교적 사회에서 산업혁명을 거침으로써 인간 중심으로 옮겨 왔다면, 이제는 인간 중심에서 자본 중심으로 옮겨갔다. 사람은 그저 필요한 생산적 구성 요소로 전락하고 나아가 산업 정보사회에서 소비자로서의 사람이 필요할 뿐 생산에 참가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다만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소비자만 필요한 것일 테다. 소비자는 그럼 하늘에서 자본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어떻게 소비만 할 수는 없을 것인데 자본주의는 딱 이런 인간 구성요소의 모순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개개인의 저소득은 끝까지 소비력을 뽑히게 될 것이고 이익집단은 점점 이익을 축적하는 것. 이게 자본주의 시장에서 제일 큰 단점이다. 물론 공적인 세금이나 각종 조세 부담금으로 일정 부분 국가의 역할이 대두되지만 자본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한계에 다다른 느낌도 든다.
고전적인 견해에서 우리들은 항상 일과 보람을 결부시켰다. 성경에서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고 했다. 그럼 대체 일이란 무엇인가? 단순노동도 있을 것이고 고도로 머리를 굴려서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도 있다. 일의 성격도 다르고 일의 내용도 다르고 일의 양상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천태만상이다. 직업의 분화가 곧 일의 분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일에서(어떤 일인지는 상관없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에 의문스럽다. 물론 생존을 위한 일과 보람된 가치를 여기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회사에서 하는 일만 일인가?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자급적 생존이 이제 사라진 지금의 현실에서 이익집단에서의 일이란 어디까지나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력을 말하는 것이겠으나 이게 보람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가? 따져 묻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당연히 열심히 일한다는 것과 보람찬 일을 한다는 것은 이젠 별개의 문제가 된 현실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다 할 수도 없는, 이 생존의 일에 대해 교육으로 주입된 보람찬 일이라 착각을 하게 만든다. 혼동시키므로써 열심히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회사를 잘 다녀야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니 회사의 이익 수단에 대한 논리는 대부분 이런 거다. 주는 만큼 일하고 받는 만큼 일하는 계약적인 균등 관계에서 어느 일방의 희생과 헌신을 강제해야 할 만한 회사는 사실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수의 근로자, 또는 노동자가 어느 정도는 손해를 감수하고 회사의 갑이란 입장에 동조하기 마련이다. 훈련된 자의 자기 체면에 빠진 노력과 성취라는 것이 곧 개인의 삶에 대한 성취처럼 여길 뿐이다. 회사가 돈을 많이 벌고 성장하는 것이 일하는 자의 성취로 연결해 버린다. 회사는 속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회사의 성장이 곧 일하는 자들의 성취감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회사의 성장이 곧 개개인의 성취와 보람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이유도 뭐든 열심히 하는 노력 강조 사회의 폐단이다. 왜 균등하지 못할까. 곧 이는 수급의 불균형에서 온다. 사람의 공급은 넘치는데 인력의 수요는 적다. 수요자의 갑질은 여기서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냉철한 것까지 이해는 하나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 까지라는 갑질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 책의 문구 중에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 문장 하나. 우리는 여기에 일하러 태어났는가?라고 묻는다. 일을 함으로 인생이 보람과 성취를 만들어나간다는 사상에 상당한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평생토록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며 굴러 가는 인생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아직도 회사의 성취가 곧 개개인의 보람찬 가치를 이룬다는 사상은 살아가는데 치를 떨게 만든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솝우화에서 보듯이 개미의 겨울철 안락함과 배짱이의 겨울철에 춥고 배고픈 경고를 과연 곧이곧대로 믿어야 했는가 생각한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겨울에 춥지 않고 안락했을 테고 배짱이는 오갈 곳이 얼어 죽을 거라는 결론은 이솝의 의도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진짜 자본가는 여왕개미도 아니란 점이다. 그 개미집을 소유한 누군가라는 것이 아닐까. 배짱이의 공연을 보려면 개미는 줄을 서시 오라는 거다.
4차 혁명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에 있어서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기계의 보조가 되는, 그러니까 극소수의 사람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이 보조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가장 빨리 없어질 직업이 은행원이란 말도 있듯이, 은행 지점에 가지 않고 금융거래를 온라인으로 다 처리하게 되면 창구에 있는 직원들은 당연히 필요 없어지는 것일 테고 판사나 변호사도 판결문을 직접 쓰지 않고 정보처리 기계가 무수한 판례를 짜깁기해서 내놓으면 이걸 집행하는 역할만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변수의 데이터만 입력해주면 결과를 도출해주면 이 결과의 도출이 사람이 필요 없을 때, 그야말로 사람은 필요 없단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반드시 고민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들이 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버렸는지, 일하기 위해 태어나도록 설계된 것인지, 근본적으로 따져야 한다. 다산이 축복인 시대는 머리 쪽수가 곧 세력이고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정보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지 결코 일에 매달려서는 안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기초 설계를 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른 역할 사회가 아니라 이제는 자본이 곧 신분사회가 아닌가!~
자 그럼 짧게나마 결론을 내기로 하고 참고로 아래 영상을 하나 보자.
음악이 신나게 보인다. 연주자들의 악기를 연주하는 몸의 표정도 흥겨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 연주자들의 연주가 일인가, 놀이를 하는가. 일도 될 수 있고 놀이도 될 수 있다. 즉 일과 놀이가 겹친다. 악기를 연주하듯이 우리의 삶을 연주할 수는 없을까. 일도 되고 생의 시간을 연주하듯 놀이처럼 신나는 일을 할 수는 없을까. 물론 벌이가 신통찮을 수도 있지만 일하는 동안은 흥겹고 신나고 재미있고 옆에서 보는 사람도 등달아 즐거워 보이는 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자기를 긍정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작 해봐야 맛나는 거 먹는게 긍정성은 아닐 것이고 쾌락에 빠진다 한들 결과는 피폐와 허무이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 것을 자신이 즐거워할 수 있고 긍정의 가치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 긍정으로 삶이 좀 윤택함과 밥벌이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찾아내도록 발견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사회는 자신에게는 묻지도 못하면서 남들의 눈치를 살핀다. 어떤 직장에 다니고 무슨 일을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을 판가름하려 들고 수준을 평가하려 한다.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차를 차며 연봉이 얼마인지, 몇 평의 아파트에 사는지에 관한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 남의 시선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닐 텐데 진정 혼자만의 스스로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