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지 대부분이 김기식 금감원장 임명에 대해 잘못된 인사라고 깐다.

 

외유이든 출장이든 피감기관 예산으로 가는 게

그들의 일반적 관행. 관례였는데(잘 했다는 게 아니라)

유독 내로남불이 심한 이유는 뭘까?

 

감히 일말의 미량의 감각을 동원해서 추측해보자면,

혹시 삼성이 있는게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홍위병은 내로남불놈들이 나서고

언론이야 주구역할일테고..응?

 

물론 삼성생명도 금감원에 감독을 받아야 하는 보험금융사이고,

뭐 조또 모리는 놈들이야

삼성생명의 지배구조에 대해 아는 바도 없겠지만서도....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님 말고....

 

-------------------

1. 현재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시장가" 기준 7.6% 정도 보유중.(취득원가 기준으로는 3% 이하)

2. 보험업법은 보험회사가 계열사의 채권이나 주식을 총 자산의 3% 이하만 소유할 수 있게 함.(금산분리)

3. 3%의 기준을 지금까지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삼아서 삼성 특혜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왔음.

4. 삼성전자 주식의 취득원가는 약 5만원. 시장가는 240만원이 넘음.

5.시장가를 기준 잡으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약 6~7조만 가지고 있을수 있지만 지금은 약 26조어치를 보유.

6. 현재까지는 보험업법 감독규정을 개정할 수 있는 소관부처가 금융위원회지만, 향후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통해 금감원이 감독규정의 소관부처가 되면 김기식이 감독규정 개정에 직접 나서 "시장가" 기준으로 바꿀 수 있음.

7. 규정 개정을 통해 기준이 바뀔 경우 삼성생명은 최단 1년부터 최장 7년 이내에 법적 주식 보유 허용한도를 초과하는 약 17~20조원가량의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야함.

8. 삼성물산이 인수 대상으로 꼽히지만 문제는 총알.

9. 매각시 삼성 지배구조에 큰 문제가 발생할수 있음.


이거 아니면 설명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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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3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론에서 사실 분석보다는 여론 선동에 치중하지만, 예전 같지 않음을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yureka01 2018-04-13 10:43   좋아요 0 | URL
언론은 이제 분석하지 않고 대신 데스크의 지시를 받아 기사 쓰겠죠..
sns에서 유저들이 분석하거든요...
아무리 언론이라 한들, 여론의 집단지성은 못이깁니다..
이젠 정보를 검색하면 언론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정보의 독점시대는 지났죠..그래서 아직 언론이 정신을 못차리고 오조준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계속 언론사의 수익 구조와 재무재표는 악화일로일 겁니다.
즉 망하고 있단 소리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4-13 10:48   좋아요 0 | URL
핀란드였나요. 정치투명성 신뢰도 1위 국가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정보투명성이라고 하더군요. 모든 것이 다 국민에게 정치인의 정보 공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정치인이 몇 시에 밥을 먹었나.. 뭐, 이런 것도 다 정보로 공개되고 있는 실정..
그리고 이 정보 공개는 외국인이 정보 요청을 해도 무조건 공개됩니다...
그러니 이 정보 투명성과 쉬운 접근성 때문에 정치인이 수작을 부릴 엄두가 안나는 겁니다...

모든 이에게 여린 정보 공개는 곧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나 (기자가 아닌 시민이어도) 팩트 체크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조중동의 끝발이 서지 않는 것도 일반 시민의 펙트 체크가 어느 부분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yureka01 2018-04-13 10:55   좋아요 1 | URL
조중동 개털 되는 날까지.....^^..

雨香 2018-04-13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진우기자의 SNS를 보면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깔때, 조력자가 김상조, 김기식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김상조, 김기식이 삼성의 승계에 핵심을 건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요즘 윤석열을 때리는 이유도 윤석열이 삼성차명계좌를 찾아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yureka01 2018-04-13 10:55   좋아요 2 | URL
그래서 김상조 김기식을 낙마시킬려고 작업 열씸히 하겠지요..
하여간 삼썽 지배구조를 확 바꿔서라도 그 세가리 존마난 일가에서 분리시켜야 됩니다.

2018-04-16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7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전에 한번 건성으로 읽었다. 요점정리가 안되서 두번째 읽는데 문득 책을 읽다가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되묻게 되는 책이었다. 사실 이거 몰라도 현재의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별것도 없다. 고고인류학자가 아니니 연구의 가치를 따지는 것도 아닐 테고 현실적인 교훈이나 가르침도 아니다. 선사시대를 거처 오늘날까지 인간이 지구에서 문명과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이어가는 과정의 모든 해답을 풀어낸 책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왔던 과정을 조금이라도 담아 냄으로써 인간이 가지는 속성에 다가 서려는 시도를 비추고자 한 것은 아니겠는가 싶었다. 본질이란 실체를 만나기 전에는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록도 없는 지구가 품은 인간이 저지른 미량의 흔적을 발견하고 유추하고 추측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일 뿐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문득 저런 연구라도 할 요량으로 카메라를 들고 지구의 방방곡곡을 쫓아다녔더라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움을 느낄까 생각했다. 본질성이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인류가 시작한 그 행동의 반추하는 의미로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내가 당면한 현실은 억지스럽게도 출근하면서 법원으로 달렸다. 서류를 발급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이 내 삶이 무슨 상관이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이 산다는 이 과정의 반복이 사사롭거나 중대하거나 다 관계가 있는 행위들이다. 돌도끼로 다듬은 나무에 뾰쪽한 석촉을 달고 사냥을 나가는 원시 석기인들처럼 나도 자동차를 몰고 법원의 서류 발급기에 서 있던 걸 문득 비슷한 동류적 의식이 느껴졌다. 짐승을 사냥해서 먹이를 찾았듯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는 사냥이란 대신에 일이란 걸로 치환한다. 오늘은 어디 들판으로 나가 지나는 가젤 영양 한 마리 잡거나 혹은 늑대 한 마리와 조우해서 도망을 쳐야 하는 야생생활과 전혀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산다는 것의 행위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 지금의 시대는 야생의 시대가 야만의 시대가 된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어느 지역의 모녀가 자살로 추정된다는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자본에 소외된 사람들의 소식이 그래서 야만적이다. 야생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본의 야만에 저항도 못하고 지긋지긋하게 산다. 오늘도 야만에 굴복된 채로 마치 선사시대 원시인이 야생의 늑대를 만난 것과 닮았다. 야생이야 도망이라도 치면 살 수가 있지만 자본의 야만은 도망도 칠 수도 없이 끈질기고 악착같다. 과연 오늘날의 문명의 법이란 것과 자본이라는 시스템은 야생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라는 두려움에 불안한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오래전에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 근력이라고 하는 힘이었다면 오늘날의 생존에 대한 필수 조건은 관심과 연합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소외당하면 살 수가 없는 이치이다.

야생의 수렵과 사냥했던 인류는 늘 기아에 허덕였다. 포식하는 것은 순간이고 지속적인 배고픔의 상태에 빠진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를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본의 기아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 차이를 찾지는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허기와 기아는 항상 공존의 수레바퀴처럼 이어나갔던 그들처럼 오늘 우리도 늘 갈증의 자본이란 사막에 걷는 유랑자가 된 거다. 오늘날 수렵이라고는 없다. 사냥도 야생 동물도 없이 사냥이 있을리가 없을 것이고 모든 것들에서 법과 제도에 따른 소유자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지금은 야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느 강가에 물고기라도 잡을려고 한다면 어업허가가 필요한 것처럼 누구 것의 소유가 있는 시대와 누군가의 소유권이 없던 시대와는 삶의 방식이 처절하게 다를 뿐이었다. 농업의 기술적인 발전이 하이테크 트리를 타면서 생산량이 부족해서 기근에 빠지고 기아로 죽는 경우보다 자본적인 불균등한 소외로 죽는 경우에 직면한 인류가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이라는 점이다. 하물며 질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거나 자살 당하기도 하고 혹은 온갖 오염물질에 노출되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암이라는 자기 복제의 오류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끝없이 발전을 이야기하며 나왔지만 늘 새로운 위기는 상존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지금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저출산에 직면한 것도 이때까지 인구 숫자는 늘어 왔던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인구감소로 야기되는 경제적인 자본의 축소는 항상 팽창하던 물질세계의 소비 축소를 의미하고 소비 축소는 순서대로 경제적인 이익에 위기가 진행되고 심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인구가 불어나는 문제도 식량 토지 소비재의 공급 부족에 대한 문제에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키는 정조준이었다면 인구감소에 대한 오조준은 지금도 우리 시대가 앞으로 부닥쳐야 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이 제일 큰 위기는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반 본능적 행태가 나타나고 자멸화의 과정에 빠지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살아가도록 진화된 인간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 죽으려는 것이 제일 큰 위기라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발전한다고 믿어 왔다. 그리고 계속 대를 이어 살기 위해 발달시켜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처럼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자폭장치가 가동되는 사회는 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발전이 꼭 살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과거의 연구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단순한 화승총에서부터 출발한 화약 산업이 이젠 핵폭탄으로 옮겨가는 것이 과연 발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루어낸 업적과 문명에서 식량(먹거리)와 무기, 그리고 질병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토로한다. 마침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서 화학무기 살포로 수백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어쩌면 여전히 인간은 이 책에서 서술한 이야기의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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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0 16: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명의 발달로 우리 삶이 풍족해져도, 한 구석의 부족함은 인류와 함께 계속 갈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8-04-10 17:12   좋아요 2 | URL
어느 사회이든 그 수준을 보자면, 약자들도 골고루 소외되지 않는 사회겠지요....
그게 복지선진국 아닌가 싶어서요..
한편에선 넘치는데 구석진 곳은 결핍된다는 게 정말 고민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강옥 2018-04-12 0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상에서 가장 독한 종족이 인간 아닐까요?
먹이사슬의 상위에서 온갖 횡포를 일삼는 종족
그러나 결국 자멸하고 말지도 모르죠.
지혜가 자승자박이 되는 날이 올 겁니다.

yureka01 2018-04-12 08:55   좋아요 0 | URL
인간도 지구의 일개 부속품.....
지구가 부속품 교체를 요구할 때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말이죠..

2018-04-16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7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의 캡처된 게시물은 모모 일보 자유게시판에서 어느 유저가 자신의 신세를 간략하게 털어 놓은 글이다.다시 인용, 복기해 보자.

"차도 안사고 대중교통 이용하며 새벽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고, 내 생활도 거의 없이 그렇게 거의 일개미처럼만 살았는데 그렇게 모은 돈이라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이렇게 모아 언제 집이나 하나 살 수 있을까 싶고, 진짜 체력에 한계가 와서 당장 내일이라도 일 때려치우고 싶은데, 다달이 나갈 집세에 부모님 용돈에 이것저것 온갖 돈 나갈 것들... 때려치울 수가 없으니 너무 우울하고 힘드네요.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것보다 더 빡세게 벌어야 될 텐데 이렇게 남은 평생도(을) 출근하고 퇴근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일개미처럼 살아야 하나. 꼼짝없이 그렇게 살다 죽을 팔자인 건가 생각이 들어서 그냥 뭔가 깜깜하네요. 맨날 회사 때려치우는 꿈꿔요. 한 달 만이라도 좀 쉬어보고 싶어요. 잠만 자도 행복할 텐데"

자본주의 시대에 생존이란 프레임(환경, 체제, 삶의 개인적인 조건)에 갖혀 있는 삶을 산다. 물론 나도 이하 동문으로 살았고, 또 살아갈 마찬가지 프레임 속에 있다. 개개인 누구나 다 이렇게 자신의 환경이라는 조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삶이란 대부분이 반자 유적 구속된 삶이다. 한편으로 보자면 일종의 프레임에 걸려든 흡사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곤충 마냥과 다를 바 없다. 태어난다는 것은 감방에 갇히거나, 혹은 거미가 쳐놓은 거미집에 걸려든 것과 비슷하게 비유도 할 수 있다. 이걸 철학에서는 피투성이라고도 한다.

모든 존재는 처절하다. 개개인마다, 처한 절실함이 다 있다. 우리 엄마 아부지는 처절히 살도록 강요한 것이 절대 아닐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따지자면 이런 삶의 프레임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이게 사는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한다. 태어나게 했어도 과정이라는 처치 곤란함이 밀어닥친다. 물론, 뭣도 모르고 태어나게 한 삶의 프레임이란 것이 의도하지 못한 감옥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겠지만 매일 같이 힘들게 벌어서 용돈에 집값에 허덕거리는 삶이 대체 왜, 무슨 의미로 이어져야 할 것인지는 누구도 답을 낼 수 없다. 처절함이란 각각의 개개인마다 가진 처절한 프레임이니까.

누구처럼 어느 사람과 비교할 무게의 량은 다르겠으나 중력은 똑같이 작용하는 게 또 삶이 아닐까. 저마다 자기가 가진 멍에가 제일 무거운 현실이다. 누구도 대신해서  존재의 중량을 덜어내거나 대리할 수도 없다는 것. 삶이란 과정의 시간은 지루하고 무겁고 지치고 딱 하루 만이이라도 잠이라도 실컷 자보는 게 소박한 꿈이 될 것이라고는 예정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존재론적인 원죄론을 이야기했다. 태어남 이란 것부터가 이미 죄를 업고 시작하며 자식 된 자는 부여받은 존재론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남을 말한다. 이 지긋지긋한 삶의 감방 같은 거미줄에 쳐져 있는 올가미의 존재적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들어가게 만든 그 욕정과 욕망과 욕심들.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는 것의 논리가 결국 태어날 사람이 만든 게 아니었기도 하다. 자식을 낳아서 효도 받기를 원하는가? 자식이 죽도록 고생해서 돈 많이 벌어서 부양하도록 보험 인간을 만들고 싶었는가? 내 존재의 무게로 자식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태어난 자의 질문 앞에서 누구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불경한 짓이 된 세상에서는, 더욱이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부자유는 또 무엇일까? 가끔 그런 소리를 듣는다. 딸아이에게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 나는 전혀 고마움이지 못하다는 미안함과 상당히 대립된다. 살아갈수록 덜어내는 부담보다, 살아내면서 더하는 부담이란 완벽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한 삶이 또 아니었던가.

실컷 자는 것의 꿈조차 소박한데 현실은 늘 치인다. 피로는 날로 더하고 덜어 내려 해도 가시질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실체이다. 물론 이런 생존이 삶의 본질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가는 데까지 가도록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며 오늘을 산다. 여기서 멈춘다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싫어한다. 꼼짝 없는 그야말로 요지부동의 시간 속에서 추구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지금까지 살아도 모르겠다. 그런데 더 산다 한들 알아지기나 할는지도 더욱 모른다. 사는 게 그래서 더 헛헛한 시답잖은 웃음으로 퉁치고 "그런 거지"라며 지시대명사로 다만 가름할 뿐이다.

작년에 십수 년을 다녔던 회사가 오너의 투자 실폐로 (너무나도 섣부른 투자) 인하여 자금 사정의 경색, 동맥경화로 현재는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또다시 건설업 면허를 어렵게 내고 그 업을 이어받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났고 겨울을 보냈다.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과 다르다. 한마디로 무기력증에 빠진듯한 봄이다. 회사 대표를 모시는 일개의 참모로써 아무리 뜯어말려도 기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아가는 불나방 같은 오너를 말리지 못했다.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말렸어야 하는데 기름 두른 거까지는 알았는데 뛰어드는 그 순간을 알지 못했던 자괴감. 넌 대체 뭘 하고 말리지도 못했나라는 자책감이 크다.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굴러가던 회사가 급락하게 빈사상태가 된 마당에 새로 시작하는 회사는 신생이니 당연히 쪼들리고.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물리적으로도 흘러간 직장의 시간은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루비콘 강처럼 흐르고야 말았다. 회사를 더 이상 다니길 싫다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었어도 아직은 아니라는 사람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이 감옥에서 과연 나는 언제까지 결박당한 자유에 목을 매며 기다려야 할까. 기약이 없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은 그야말로 당장이 달콤은 욕망의 사탕발림이다. 삶이란 중독의 감미로운 음료수와도 같다. 자본이란 갈증에 마셔도 마셔도 풀리지 않는 그 갈증. 편리한 도시생활의 도취는 내가 원하던 자유와 맞바꾼 부도 날 수표와 같고, 환금 불가능의 요청하지 못한 예금증서나 다름고 보장없는 보험증서와도 같다. 한마디로 사기당한 거다. 이 존재 자체의 사기당함이 억울할 뿐이다.

매일 저녁이면 퍼질러져 버린 무력한 환자가 된 듯이 꾸벅꾸벅 초저녁을 못 버틴 병든 닭처럼 졸기 바쁘다. 몸이 시간의 변화에 압류당하여 늙어가는데 무기력과 비례한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저지선이 없다는 것의 무기력함. 책을 읽겠다고 한 권을 독서대에 펴 놓은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어도 페이지는 좀처럼 잘 넘어가지지가 않는다. 집중력도 거의 바닥이니 책의 활자는 핀트 나간 맥 빠진 레코드판처럼 올려진 오디오의 바늘의 무딤을 느낀다. 촉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홈을 읽어야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에 책의 활자가 들어와야 이해가 되는데 현실은 자동 스크린 마냥 눈이 감겨 버린다. 육체의 무게는 피로를 만들고 삶의 피곤을 만든다. 그 무게의 지탱하는 지기의 힘이란 화수분 마냥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닐 텐데, 우리 삶은 계속 강요당하는 프레임이다. 자유는 이 프레임을 파괴 시키지 못하는 한, 이대로 여기서 부동자세의 차렷이 힘이 풀리는 그 지점이 바로 내 무덤이 아니기만을 하늘에다 비는 무책임. 참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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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04-03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사가 그렇네요..
작년에 힘들게 준비하신 시험도 합격하시고 따님 합격소식도 들었는데.. 또 살다보면 이런 굴곡이..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상태가 얼마나 힘든건지 알 수 있어요
잘 견뎌내시고 지나기기를 바랍니다

yureka01 2018-04-03 13:35   좋아요 2 | URL
무기력증을 떨쳐 내고자하는 발버둥이죠..올해 무시기 또 기능사 시험 있습니다.ㅎㅎㅎㅎ
또, 버둥버둥 거립니다....흐.....
사는게 다 늪에 발을 디딘 것처럼 빠져 발을 빼지 못하는 거 같아서 점점 침몰하는 시간에 잠시 숨쉬기중인가 ..비유하자면 그렇더군요.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이 곧 삶의 지푸라기와 닮았던 것은 아닐까 뭐 버둥거려도 지푸리기가 무슨 버틸 힘을 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요..^^.
네 가는데까지 착각하며 가보는 거죠 뭐^^.ㅋ

2018-04-03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4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8-04-04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남의 일이 아니네요
한때는 저도 그랬고..... 지금 제 아들이 비슷한 입장에 놓인 것 같네요.
그룹 지분 관계로 회사 인수 합병이 실시되는 모양인데
본의 아니게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나 싶네요.
입사한지 5년, 이제 딱 자리 잡았는데 하루아침에 어디론가 튕겨나가야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참..... 을의 삶은 이렇게 구차하네요

yureka01 2018-04-04 09:16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여기저기서 불안불안한 회사 자금사정에 대한 이야기는
남이야기가 아니더군요..
옮기더라도 아드님이 더 나은 자리로 옮겨지길 기원드립니다....

2018-04-05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5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6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6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창문 너머로

나뭇가지가 눈을 가득 붙잡고 있더니만,

밖으로 나와 보니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봄볕만이 잔뜩 걸렸다.


계절은 늘상 제 갈 길로 시간 속을

걸어가건만은,

사람은 가야 할 길조차 모른다.


본질의 길은 늘 창문 너머에만 있더라.

 

 

 

 

2.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시간의 끝으로 넘어가는

잡지 못한 우리네 이상향.

 

늘 끝은 저 멀리서

두터운 존재의 끝을

바라보며 속수무책의 변화를

감지할 뿐이다.

 

인생의 질곡이란

이렇게 저렇게 저마다의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 끝에 저 끝까지

지나온 여정이

다만 작은 울림이라면

족하고야 말아야겠지.

 

자 또 지난 봄을 그리운 듯이

오늘의 봄을 만나러 나가자.


 --------------------

 

PS : 네이버 사진블로그에서도 동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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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1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계절이 바뀌고 차창 밖이 바뀌어도 바라보는 내 자신은 같은 사람인데, 바뀐 배경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때론 인생의 겨울에 봄빛을 담아둘 수 있다면 힘들 때에도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yureka01 2018-04-01 02:09   좋아요 2 | URL
네....계절이 비뀌고 ...나도 그만큼 변했(늙기도 하고)지요....
시간의 흐름을 연동하는 것....이게 참 어렵더군요..
난 변하지 않았다라는 일관성이 과연 나에게도 적용될까....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오늘 봄을 만나러 갔었는지요..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4-01 08:28   좋아요 2 | URL
네^^:) 봄볕에 연의와 축구 했습니다 ㅋ 오늘은 비가 올 듯하네요. 유레카님 상쾌한 하루 되세요^^:)

yureka01 2018-04-01 23:27   좋아요 2 | URL
축구하기 좋은 날씨였어요..ㅎㅎㅎㅎ

서니데이 2018-04-01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같은 창문, 같은 나무네요. 이번주 들어서 따뜻해서 그런지, 금요일에는 아침과 저녁의 나무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유레카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yureka01 2018-04-01 23:28   좋아요 2 | URL
한달만에 겨울에서 봄..오늘은 거의 초여름이더라구요...

강옥 2018-04-01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해 여좌천, 언양 작천정 등등
벚꽃으로 난리 법석인 모양이네요.
이따 해그름에 서생포왜성이나 한번 가볼까
아님 그마저도 부담스러우니 내일 조용할 때 나가볼까
그카고 있네요. 별로 설레지도 들떠지도 않는 걸 보니 마음이 늙은 모양 ㅎㅎ
대구는 오늘 마라톤 행사가 있는 모양이던데, 미세먼지가 어떨지???

yureka01 2018-04-01 23:29   좋아요 1 | URL
아무리 좋아도 사람 분비는 곳은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동네 골목에 틈틈히 날씨에 벚꽃이 만개했더라구요.
멀리 안가도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보이더라구요..
밤에는 라일락 꽃 냄세가 자욱하네요..

몇해 전에 대구마라톤 대회 매년마다 출전했는데 저도 늙었나 봅니다.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8-04-01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질의 길은 늘 창문 너머에만 있더라. - 캬악... 좋군요.

yureka01 2018-04-01 23:30   좋아요 1 | URL
이상향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2018-04-02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재학 중인 대학 홈페이지를 간혹 검색하는 경우가 있다. 학부형으로써 학교의 행사 등에 관한 관심은 곧 딸아이의 학업에 대한 앞으로의 관심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눈에 띄는 항목이 대학에서 실시하는 독서인증제라는 제도였다. 신입생이라서 엠티며 동아리 등등 뭐 잡다한 행사가 연속이고 게다가 무슨 술꾼이 나셨나 싶을 정도로 월요일부터 모임 술자리가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슨 음주가 많은 지도 웃기기도 한다. 술도 유전인가 싶었다.

 

기억을 복기해보면, 나 또한 대학에 처음 입학하고 나서 특별히 감동했던 것이 대학에 소장된 도서들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탓도 있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서 벅찬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전공이 공학 계열이었어도 전공과 관련 없는 주로 문학서 이를테면 소설류들, 문학 관련 책들이 많았던 것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고 문학으로 이어지는 인문학 관련 사회과학 관련 서적들은 고등학교 때는 접해 보지 못한 책 들이었다. 1학년 여름 방학 때 도서관 열람실에서 에어콘 바람에 시원스럽게 읽어 댓던 추리 소설책은 아직도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한창 읽어 댔던 소설들의 작가들, 이외수 이문열 김성동 등등. 그런 추억이 있었던 던 탓에 딸아이의 독서에 대한 재미를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요즘 들어 대학 생활이라는 게 고학년이 되기도 전부터 사회가 먹고 사나이즘에 매몰되어서 일반교양 책은 거들떠보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독서의 열기는 싸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인증제라는 것이 학교에서 오죽했으면 독서에 대한 열의가 희박하니 어쨌든 독서의 동기부여나 의무를 지워서 읽게 하고 싶었을까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도 책을 읽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이런 독서인증제가 나오나 싶었기 때문이다. 학점에 치이고 나아가 취직 준비에 오로지 매진하는 세태에 있어서 과연 교양서적의 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책이란 무릇 지식을 밟아 지혜를 찾는 첫 단추이자 출발이 아닐까. 통계에서도 나타났듯이 문자의 문맹률은 낮다고 해도 문장의 문맹률은 의외로 높다. 기본 바탕의 지식이 부실한 가운데 지혜의 탑을 쌓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솔까, 4년제 대학이라고 나와서 취직의 스킬은 저마다의 노~오력 덕분에 높아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학 정도 다닐 수준이라면 한 번쯤은 읽고 넘어갈 지식의 징검다리는 건너야 하지 않을까 하는 까닭이다. 문장에서부터 말귀를 못 알아듣는 수준이나 이해력이 바닥나는 수준이라면 결국은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가 없고 가짜 뉴스라도 검정할 수 있는 찾기도 못하고 진실을 찾아가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사람이란 자고로 사람다운 것이 무엇일까를 따지는 것도 책에서 나오는 점액질 같은 삶의 분비물이다. 지식의 끈적함으로 지혜로 접착력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바로 책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선택의 판단과 기로이다. 어느 선택에 대한 판단이 개별적 운명을 만든다. 그런데 이 선택에 대한 판단력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지식의 축적됨과 배움의 체적으로써 선택하는 삶이다. 인생에 있어서 산다는 것이 곧 선택과 다를 바 없다. 불가역적인 운명도 있지만 가역적인 숙명도 부지기수다. 하다못해 오늘 점심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건강이 야금야금 결정된다. 따라서 이런 선택의 판단력은 개개인들의 경험과 지식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 배운 것과 배우지 못한 것의 차이는 천차만별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지식과 학습의 과정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본능과는 그래서 전혀 다르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부 빠짐없이 학교를 다니고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사람이 본능으로만 산다면 그건 짐승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지식이 이성으로 점차 전이될 때 삶의 바탕에서 책이 그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매일 빡빡한 시간을 수업에 열중하지만 대학은 몇 학점 이수로 제한하고 수업시간이 고등학교 때와는 상당히 적다. 이렇게 비는 시간에 술 마시고 놀라고 비워둔 게 아니었다. 전공과 관련한 수업에 자료를 찾고 개론의 폭넓은 학문의 기초를 다지라는 시간적 배려였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 독서의 량과 깊이는 대학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이다. 하기야 놀려면 한도 끝도 없이 놀 수 있는 시간이지만 스스로 학문의 맛베기라도 만날려는 공부는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서 파헤쳐도 못다 볼 것들이 차고 넘친다.

 

인생을 살면서 제일 좋은 시기라는 때가 있다. 이를 우리는 적기라고 한다. 책 읽기의 적기는 바로 학교 다닐 때가 아닐까 한다. 기회와 적기가 만날 때, 하지 못한 후회도 반드시 따라 오기 마련이다. 책 읽을 수 있는 제일 좋은 적기가 대학 다닐 때라고 확신한다. 졸업하고 나서 직장이나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는 삶이 도래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책은 특별한 취미의 이상을 가진 것처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 우리 사회가 쉽게 책과 접하도록 기회가 박한 것도 사실이다. 회사 다니면서 책을 자주 읽게 되거나 집에서 서재라도 개인 공간을 가진 가장이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쉽게 농담 건네듯이 책을 읽으면  당장에 " 어쭈, 요즘 한가하구나. 책이나 읽고? "라고 빈정대는 소리 듣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가하니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은 기본 인식일지라도 가끔 그런 소리를 들게 되면 화가 난다. 한가해서가 아니라 절박해서라고 왜 말도 못 꺼낼까 싶었다. 따라서 학교 다닐 때만한 적기를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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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8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예전에 우리 때는 놀고 먹고 대학이란 말이 있지만
요즘은 다를 줄 알았더니 열심히 공부하는 건 좀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그 방향이 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여타 선진국의 대학처럼 들어가기도 어렵고
졸업하기는 더 어려운 이런 시스템이 되야할텐데
여전히 대학은 기업화해서 제 잇속만 챙기지 진정한 학문의 전당이
되지 못하고 있어요. 여전히 스펙 따지는 구조로만 가려고 하고 있구요.
다 장삿속이죠.
이제 대학에서 술 먹는 문화는 퇴출되야 할 텐데 안타까요.ㅠ

yureka01 2018-03-28 14:37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는 건지..이해 되지 않는바는 아니지만....
뭐 한편으론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도 있게 됩니다.
고삼때 억눌린걸 술로 풀려나..싶었거든요.....

앞으로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도 숫자가 많이 줄어 들거예요...

이즈음에서 사회의 방향과 대학의 방향이 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거서 2018-03-28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새 대학생은 학교 생활이 참 힘들지요. 제 아이들만 봐서도 그렇더군요. 격세지감을 느끼는 바이구요. 에고…
한가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은 어쩌면 옛말이 아닐까 싶어요. 요즘처럼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따로 내지 않으면 책을 읽기 힘든 때가 있었는지 반문하게 됩니다. 인터넷, 게임, SNS, 그리고 스마트폰은 개인의 시간을 무한정 없애버리기 일쑤라서요. 책을 읽기 위한 의지도 있어여 하고, 꾸준히 노력해야 하구요. 그리고 어느 때보다 책이 귀한 대접을 받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점 범접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

yureka01 2018-03-28 15:12   좋아요 1 | URL
네 격세지감..격렬히 바뀐 시대적 상황이 점점 어렵게 된 건 아닐까 싶더군요..
제가 학교 졸업할때만해도 연봉 많은 회사냐 적은 회사냐를 따졌지 아예 기회가 줄어든 건 아니었으니까요..
각박함이란 요즘 젊은 청년들에게 가혹한 것은 아닐까 싶더군요..
그러니 책을 읽을 처지가 못되는 경우도 허다할 거 같아서요...
한시간 몇천원짜리 알바에 책한권 사보는게 그리 쉬운 선택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3-28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 인증제 양식을 보니 정형화된 독후감 양식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사고의 크기도 작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책을 안 읽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겠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yureka01 2018-03-28 16:39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독후감에서 형식이라는게 별 의미는 없겠지만....
인증제라고 하니까 양식에 따른 객관적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하니까 틀에 맞췄을 거예요..
이게 성적표에 페스 .언 페스로 기재가 된다고 하더군요...

cyrus 2018-03-28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고서 양식을 보자마자 자소서 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저런 방식처럼 적정 기준에 맞춰야하는 글쓰기가 부담스럽고, 싫어요.

yureka01 2018-03-28 17:26   좋아요 0 | URL
양식 보고 얼핏 책 읽다가도 부담스럽단 느낌이랄까요...ㅎㅎㅎ
자소서 ....비유가 적절한!~ㅋ

강옥 2018-03-29 0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직장 다니는 아들의 책장에 꽃힌 책이
<쎄 보이는 기술> <에고라는 적>이었습니다
공대 출신이다 보니 재학중에도 인문학쪽과는 담을 쌓았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더니 ‘필요에 의한 독서‘를 하는 모양이네요.
읽고 싶어서 읽어야 하는게 진정한 독서라고 생각되는데
살아남기 위한 독서를 하는 아들이 가여운 생각이 들더군요ㅠ.ㅠ

yureka01 2018-03-29 08:52   좋아요 1 | URL
자기 계발서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주된 독서 목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이라는게 결국은 더더욱 노력하라는 멧세지가 담겼고..
그래야 성공하다는 도식이 강요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2018-03-29 0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2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1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