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어 오면서 깨달음이 몇가지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 모든 "시간은 죽는다"이다. 아니 죽는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진은 시간의 사라짐을 목도하는 것. 세상이 죽어가고 내가 죽어가고 모든 것이 죽어간다. 이 죽어감은 변화이다. 물질이 흩어져서 사라지고 사라진 듯이 변화해서 또 다른 무엇으로 바뀌는 것. 이 과정을 사진은 목도할 뿐이다. 나는 스스로 죽어간다. 시간이란 과정은 모든 것을 조립하며 분해시키고 다시 다른 어떤 것으로 조합시키고 재조립하는 일련의 흐름이라는 것. 그 속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었을 뿐이다. 결단코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과 빛은 그래서 늘 사라진다. 또한 다시 다가온다. 이 끝없는 연속적 과정에 사라짐을 목도하는 것. 이게 사진의 화두이다. 시간과 빛, 그리고 과정의 변화.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음을 인식할 수 없을 때 가끔 그런 말이 터져 나온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말. 아니다. 언제든 그런 불행과 사고와 고통이, 혹 그런 죽음이 당장에야 내가 처할 수 "있음"을 유념하지 못할 때 나올 수 있는 말일뿐이다. 왜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절대 없다! 유독 나에게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한 번이라도 절실하고 절박하게 인식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아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들에게는 뻔한 것들도 "왜 나에게는 유독스러워지는가"라고 한탄한다, 이런 무인식의 괴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닥치고 나서야, 그제서야 득도한 것처럼 비로소, 내지 겨우~ 사유가 깊어지려 한다. 후회란 항상 늦다. 그런데 앞선 후회는 왜 없는 걸까. 후회가 앞서면 후회라 하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 보면 "후회"의 반대말이 없다. 인생은 늘 뒤늦은 후회들만 있다. 만에 하나 후회가 앞서게 되면 내 지나온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리 하는 후회라는 반대말은 없다.
10년 전에도, 20 년 전에도 호스피스 병동에는 암 환자들의 임종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의 "내"가 암에 걸려 호스피스 병동에 누운 것에서 보자면 다른 게 없다. 다 같다. 그런데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때와 지금이 너무 다르다. 이런 차이. 이런 후회들.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모든 타자의 고통과 죽음은 철저히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 객관성을 내면화시키지 못할 때, 비로소 후회는 터져 나온다. 내가 죽어 갈 줄은 몰랐다고 토로한다. 웃기지 마라.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서히 조금씩, 그리고 시간에 지나감에 따라 야금야금 죽어간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했거나 혹은 인식하지 몰랐던 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이란 열차에 타신 승객이 되는 것은 확실한 이 팩트조차 모르려고 사는 거 같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 죽음역입니다."라고 준엄하신 열차 차장의 스피커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런 역에서 올라탄 시간의 승객일 뿐이다. 때로는 누군가 중간중간에 하차를 한다. 언젠가 나도 이 열차에서 내려 여행의 종지부를 찍는 날 반드시 온다는 것. 그럴 때 이 삶의 여행 과정이 어떠했으면 인생 열차에서 쉽게 내려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이 열차의 이름이 인생이란 타임머신호!~. 다만 각자의 인생타임머신호 열차 속도가 조금씩 혹은 많이 차이가 날뿐. 명확한 것은 반드시 이 열차를 탄 사람은 내려야 가야 한다는 절대성이다.
아프지 않고서도 암 환자가 된듯하게 자신의 존재론에 대한 절박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처럼 산다면, 우리 생은 얼마나 진중해지고, 얼마나 소중히 여길 것이며, 얼마나 사랑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실제로도 한해 죽어가는 사람 셋 중에 하나는 반드시 암 환자로 죽는데 왜 난 그 셋중 하나가 아닐 것이라고 낙관하는 무턱댄 근거는 대체 어디서 오며, 무슨 자신감으로 사는 걸까? 이럴 때 나오는 말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라도 따진다. 그러나 나에게만의 만이란 한정은 빼야 한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언제든지라고 바뀌도 되는 거다. 알 수도 없는 무엇에게 내 삶의 종지부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하게 되는 심리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 평소에 자신감 있게 무슨 용감으로 살았으면 자신감 있게 죽는 게 일관성의 스타일 구겨지지 않는 거다. 죽어가면서 살아왔던 스타일 방향 전환하는 거 참 꼴불견스러워 보인다. 생존이란 이 자체는 그때도 다르지 않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사진을 찍으면서 하루하루 내가 죽어간다는 목도한다는 것. 이 당연한 것에, 너무나도 확정적인 것에 대하여 사진은 항상 말한다. 내가 시간 속에서 스스로 자살당하는 것을 사진의 짧은 셔터 속도에서 자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사진은 항상 메멘토 모리!~그럼 이런 각성제를 주입된 오늘에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이다.
지금 죽어가는 놈이 악들 받게 움켜쥐고 죽어가면서도 끝끝내 가져가고 싶은 것들이 과연 돈이면 만족이 되겠는가? 사랑과 그리움이면 되겠는가? 시장 바닥 질퍽한 인생 사 같은 치열한 세상에서 콩나물 10원, 20원으로 다투는 삶이 그래서 안타깝다는 거다. 100년이 지나면 지금 내가 움켜쥐고 싶은 10원으로 당장에 다툰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고 되물어 보면, 지금의 10원이 시답잖게 보이거든. 아니 10원이 아니라 10조라 할지라도 비슷하거든. 몇십조 재산을 일군 회장님도 병상에서 오늘 내일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나, 무일푼 노숙자가 홀로 단신으로 자신의 임종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독방에서 죽어가는 거나 시간은 예외가 없더란 말이지.
자신의 인생에 시간의 블랙 컨뮤머. 즉 고객은 늘 자신이었다. 타고난 환경도 진상스러웠다면 사는 모습도 누구는 진상이었다가 누군 호상이었다가 아니면 타고난 환경도 호상스러웠다가 사는게 진상이었다가 결국 결정은 자신의 시간이었다.이게 객관이든 주관이든간에 다 복합적이다. 여기서 자신의 개연성을 증대시키고 증폭시키는 선택은 결국 완벽한 환경도 아니고 완벽한 자신의 선택도 아닌,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시간에 내가 불랙컨뮤머가 아니라 화이트 컨슈머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얼마나 즐겼는가라는 것. 그래서 이 시간 열차에서 언젠가 내릴 때 미련두지 않는 것. 이게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고 떠난 자가 잊혀지기보다 그리워지는 자로 기억에 남는다. 내가 떠날 때 그리움 한조각이라면 족할텐데, 오늘도 부동산과 주식과 아파트와 한 해의 연봉 협상에서 혹은 거래관계에서 한푼을 더 깍겠다 더 받겠다 아둥바둥의 삶을 지나는 허무함이란 이 순간의 착각들이 후회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고 했다. 그랬던가.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방법도 사진이라면 만족해야만 했다. 따라서 사진은 삶의 각성제처럼 여기는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사진 잘 찍어서 이름 드날릴 작가 소리 듣고 싶지도 않다.타이틀 때문에 사진 하겠다고 했더라면 이렇게 소박하게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각성. 사진 뽕에 취하려는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