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
크리스티네 카를 외 지음, 강민경 옮김 / 북스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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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에 주관적인 서평을 씁니다]


한동안 너도나도 우울증이라는 자가판단이

열풍처럼 늘어났던 순간이 기억나는데,

이제는 그 다음 바톤을 ADHD가 넘겨받은듯 하다.

우울증, 공황장애 만큼이나 ADHD가 

일반사람들에게 그만큼 보편화 되어 다가와 버렸다.


책에서는 ADHD와 ADD로 둘로 나눠 설명한 후

간단한 표기법으로 AD(H)D로 합해 병기했다.

주의력 결핍과 과잉행동까지 나타나는 건 ADHD,

주의력 결핍만 있다면 ADD로.


단순히 ADHD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면

나라면 '도파민 부족'이라고 설명하련다.

선천적으로 적은 도파민만을 자가 생산해내는

뇌의 문제를 가졌으니 그걸로 살고 해결하고자

짧은 집중력, 빠른 흥미전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불안 등을 경험하는 병.

반대로 이를 감추기 위해 살면서 터득한

나름의 가면들까지 곁들이게 되면

이 모든걸 포함하는게 바로 완성형 ADHD다.


한국내 전문가가 쓴 ADHD책도 봤지만

이 책보다는 내용이 풍부하지 못했다.

풍부하기 위해 쉽게 이해되거나

감별해 낼 수 있는 징조들 뿐만 아니라,

이외로 아닌듯 보이게 감춰진

전혀 ADHD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부분들까지 다루기에,

왜 그것들이 전형적인 증상들이나 행동패턴이 아니면서

ADHD에 해당할 수 있는 것들이 이리 폭넓은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좀더 읽어볼 만한 책이라 느꼈을텐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설명들을 해주고 있어서다.


여성ADHD들을 위한 책이라고 하나

애초에 여성들만을 위한 책이란 생각은 안했다.

왜냐면, 특정 여성호르몬 때문이라면 몰라도

여성만 걸리는 병으로써의 ADHD가 아니고

남녀구분을 떠나 여성성으로 인한 부분으로 인해

ADHD가 겪는 고충을 다뤘다고 봤기 때문에,

일례로 남성들 중에서라도 여성성을 띄거나 내향적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충분히 참고할 만한건 많으리라 봤다.

결국, 남녀 구분없이 '내향적 성향' 사람에게도 적용가능하단 결론.

그러나 저자는 기존 전통사상에 입각한 여성성 안에서

ADHD인 여성이 살아가는 고통과 은폐에 들이는

노고를 그리고자 함이 더 크긴 하다.


기본적으로 ADHD로 알려진 증상들은

주의산만, 정리정돈 미숙 등이 바로 떠오르지만

책내용 중 그런건 일단 빼고 

조금 다른 각도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겠다.


보통 집안에 ADHD환자가 있다면

그 한사람만이 집안의 유일한 ADHD로 보지 않는다는 저자.

왜냐면 유전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ADHD가 ADHD인 남자형제와 같이 살 경우

남성성에 밀린 여성형제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본인의 ADHD성향을 자연스레 감추고 살 확률이 커진다고 한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각자의 삶을 꾸려가다 보면

어떤 경우엔 ADHD와 정반대의 성향으로 사는 경우도 흔하다는 입장.

체계적으로 보이고, 정리정돈도 곧잘하고, 주의력 높은 사람으로.


근데도 왜 끝까지 ADHD라 불려야만 할까?

완치라고 볼만한 조절력하에 잘 지낸다고 보는게 안 맞겠나?


저자가 말하는 ADHD환자의 핵심문제는

선천적으로 적은 도파민과 빠른 휘발성이다.

이로인한 내부적 폐해는 아무리 잘 관리하더라도

발생되고 있는거고 진행중인거다.


결국 ADHD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도 충분히 가능은 하나

본인 스스로만 느끼는 굉장히 부댖끼는듯한 내적소진 경험과

그걸 우울처럼 느끼는 감정경험은 본인이 ADHD임을 모른다면

그냥 사는게 힘들고 자긴 독특한 사람이라 치부하며 살게 될 것이니

가능하다면 ADHD인걸 인지하고 사는게 

스스로의 삶을 관리하고 살아가는데 분명 도움이 되리라 느끼게 썼다.


그렇기에 가만히 병의 이유와 그로인한 행동들을 보면

의외로 아주 단순한 원리가 느껴진다, 

도파민 부족이란 그 단하나의 이유.


도파민의 기능은 희열을 제공하는 물질.

삶의 희열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의 에너지와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는 없는 에너지를 아낄 것이고

누군가는 더 외부에서 찾으려 들것이다.


아마 전자는 무기력으로 후자는 과잉행동이 나타날 듯 싶다.


이 부분에선 ADHD에겐 선택의 문제가 끼어들법 하다.

나는 이거라도 아끼며 사는게 덜 피곤해와

나는 이거 가지고는 못산다는 부류로써의 선택.


한국 ADHD전문가의 책을 볼 땐

오히려 환자 입장속 이야기들 보다는

의사로써 ADHD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음이 먼저 와닿았다.

살아온 과정을 통해 ADHDd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진단법은 분명 필요한데 

거짓없는 환자 본인의 정확한 설명을 듣더라도

반드시 ADHD인지를 분별하기란 참으로 

힘든게 ADHD진단이라는 전문의의 소견.


그 내용에 비해 이 책으로 더 이해해 볼 수 있던 건

의사뿐 아닌 본인이 ADHD더라도 

스스로를 구분하기 힘든 여러 다양한 이유를 떠나

마치 ADHD가 아닌 듯 보이는 별개증상들과 겉모습들도

그 이유를 잘 들여다보면 ADHD로 귀결되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별도의 심리분석 케이스로 이 병을 들어볼 수 있는 듯한 느낌.


완벽주의가 나타나는 경우, 

굉장히 섬세해지는 경우,

밝고 추진력이 있는 경우, 

과감성이 떨어지는 경우


만일 ADHD란 연결고리 없이 그냥 본다면

이들은 각기 다른 증상으로 접근할 이야기들이고

그냥 사람사는 과정 중에 일어날 평범한 것들일 수 있지만

ADHD로 설명해 볼 수 있을 땐 

서로 다름이 공통된 하나로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가진 결핍을 느끼니 더 완벽해지려는 성향이 생겨나고,

덤벙대지 않으려니 섬세해지는 것도 가능했던 일이고,

떨어지는 주의력은 오히려 때론 추진력처럼 발휘될 수 있겠으나,

그로인한 잦은 실패경험은 많아지면 결국 의기소침로 발전되는.


책의 후반부에서 정리된 ADHD들을 위한 해법 중

가장 근간이 되는 이야기는 '시스템'이었다.

삶을 운영해가는 본인만의 시스템.

본인이 만든 시스템만이 안정을 주고 실수를 줄여주리라는

ADHD환자라면 본인을 위한 셀프패턴을 만들라는 내용.


ADHD란 명제를 오히려 들어내고 읽으면

아무나 읽어도 좋은 책도 될 수 있다.

외냐면 그냥 심리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참고할  

여러 각도에서 잘 분석한 책처럼 볼 수도 있겠으니.

그런면에서 반대로 단순 심리문제가 아닌

이유가 있었던 문제라는 ADHD가 가진 전제는

누군가에겐 오랜 방황을 멈추고 

없었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축복 아닌 축복의 진단명이 ADHD라고도 느낀다.


내향적인 성격과 ADHD 모두에 관심이 있다면

여성ADHD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읽어도 좋을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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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사랑이 없다면, 그 무엇이 의미 있으랴 - 에리히 프롬편 세계철학전집 4
에리히 프롬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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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된 책에 주관적 서평을 올립니다]


일단 이 책은 에리히 프롬 책 원문 자체가 아닌

한국저자가 에리히 프롬 책들을 읽고 느낀 바를 쓴 에세이다.

에리히 프롬의 여러 저작들 안에서 좋은 점들을 발견한 저자가

각 책들에서 자신이 느낀 바들에 본인의 철학을 투영해

어떻게 소화했는지를 본인만의 언어로써 소개한

일종의 에리히 프롬에 대한 헌정느낌의 책이라 본다.


여기에 더해 좀더 특별했던 건,

에리히 프롬의 책들은 각권마다 다른 내용들인데

이 책에선 '사랑'이란 공통된 주제로 

에리히 프롬의 모든 책들을 하나의 주제처럼 

서로 비슷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구성했기에

저자의 그런 발상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독자 각자가 음미해보게 한 부분이었다.


한때 '사랑의 기술'을 진짜 연애나 사랑방식을 알려주는

매우 단순한 책쯤으로 알았다가 놓쳤던 나인데,

실제 그 사랑의 기술을 늦게 읽게 됐을 땐

예상과 달리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고 깊어 놀랐었다.

공감되는 부분들에선 데미안만큼 특별했던 경험도 했고.

관련된 사유들을 더 넓혀보고 싶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 

뭔가 더 추가해 읽을게 없을까 고민했다가 선택한 책이다.


이 책엔 사랑을 주제로 여러 이야기가 실려있지만

그냥 순서대로 읽어나가며 나도 모르게 들던 생각은

왠지 불경에서 느껴지는 이타적인 관점측면이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타인에 의해 영향받아 그 결과로

자신이 이리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게 된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 의한 선택이었고 결정에 의해서였다는 논리.

책 전반적으로 깔린 이런 사랑에 대한 철학들에는

조망적 사고가 깊게 베어있다는 생각도 들게한다.


에리히 프롬의 

'이해는 사랑의 핵심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인용구를 전제로

저자가 펼친 해석부분을 보면,


상대가 내게 특별했던 첫이유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유일무이한 사랑이 시작됐고 커졌다고 느낀다.

이는 원인을 내 선택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사랑의 정의.

그런 사랑은 어느 순간 그 기존의 빛이 바래버린다.

모든게 변한거 같고 본인 스스로도 변해버린것 처럼 느끼면서.

그러나 사실 변한 건 본인 마음뿐.

못난 짓을 해도 좋았고, 자신과 달라서 좋았던 게

지금은 이해하기 싫어졌을 뿐이다.


완벽했기에 사랑이 시작됐고 가능했던게 아니라

불완전함 까지도 포용했던 때가 있었다는 말.

그 유지의 원천은 바로 이해였으며 

그게 사랑의 기술이라 설명하려는 책.


'왜 이렇지?' 

'내가 예전엔 뭘 못 본거지?' 

'뭘 잘못 판단했던거지?'


이게 진짜 고민이 아니라 

그냥 이해하기가 싫어진 걸 

지금의 원인으로 설명해보려 한다걸 제공해준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건 

그냥 상대를 그 존재자체로 봐주는 것이고,

이해해 준다는 의미 안에는

감정이 아닌 '기술'로써의 사랑이 

같이 담겼다고 느껴지도록 글을 썼다.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이 기술이 좋았던 건

사랑의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는 아니었다.

러블리한 내용도 결코 아닌 사랑의 기술이란 책은

굉장히 철학적인 책일 뿐이니까.

정통적인 심리학 내용이고 사랑뿐이 아닌

폭넓은 인간관계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어 좋았던 책.


그렇기에 사랑의 기술을 사랑관련 튜터리얼로 보지 않지만,

이 책뿐 아니라 에리히 프롬의 책들 안에서 

사랑이란 주제로 각자의 이해나 욕심이 관여된 

주관성 측면을 사랑완성의 방해물로 해석한 저자의 정서엔 

앞서말한 불경같은 고요함의 정서가 느껴지게 하는 

묘한 부분들이 있는거 같았다.


사랑을 분노나 애착과 연결해 다룬 글들도 있는데

그런 글들에선 누군가를 향한 '기대'라는게

상대에게 잘못 부여한 존재이유고 존재가치로 설명됐다.

그로인한 고통유발 또한 자초한 것이란 설명도.

상대를 인정하게 됐던 건 스스로 성립한 주관때문이니까.

결국 스스로 키워서 벌어진 내적 갈등이란 말.


사랑의 많은 부분들이 타인으로 인해 느껴지는거라 생각하고 산다면

결국 사랑은 실망과 결별로 끝날수 밖에 없을거란 생각도 든다.

  

잘못된 평가기준을 안고 산다면 

언젠가는 사랑했던 타인이 미워질 때가 오고

관계란 얼마나 복잡해질수 있고 방향성을 잃게 될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주는 잔잔한 에세이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책들 중에선 

사랑의 기술이 가장 인상적이었었지만

사랑을 매개로만 종합정리한 이 책 구성도 나쁘지 않았다.


'사랑의 기술' 뿐만이 아닌

에리히 프롬의 철학을 고루 접해봤을 저자가

그걸 하나로 묶어볼 수 있을 키워드로

'사랑'을 선택하고 쓴 이 책은

타산지석의 감정으로 자신과 타인을 생각해보게 하는

깨달음의 순간들을 염두하고 쓴듯 하다. 

밖을 좀더 순수함과 만족감으로 바라보고 

이해해 보는데도 도움 되도록 말이다.


순수한 생각들을 정리한 깔끔한 글이라 느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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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되는 한국의 산나물 50
이상각 지음 / 아마존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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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가 제공한 책 써보는 주관적 서평입니다]


산나물 정보라는 목적성이 뚜렷한 책임에도 

예상못한 서평의 글느낌이 너무 좋았다.

결국 산나물을 언급이지만, 끼어있는 맥락들에

삶과 자연을 의식해 볼 수 있는 저자의 생각들이 많아 

의도치 않게 내 생각이 산기운을 받고 

흡사 정화되는 느낌도 들정도로 좋았다.


몇주 전엔 사두었던 건나물로 반찬을 만들었다.

해봐야지 해봐야지 늦장 부리다 드디어 뜯은 건나물 재료.

생각보다 손이 많이 안 갈거 같았는데

삶고 찬물에 몇시간 식히는 과정까지 필요해 

요리 전부터 들인 시간만으론 공을 들인 반찬만들기가 됐다.


책에선 이런 건나물들을 '묵나물'이라 부른다.

묵이란 뜻이 아마 묵혔다 먹을 수 있게 

데쳐서 가공한 나물이란 뜻을 담았을텐데,

묵나물로 부르는 건 처음 본터라

혹시나 묵나물이란거와 건나물의 차이라도 있어

오독이 될까 나름 신경써서 용어를 다시 살폈기도.

내가 해먹은 나물은 더덕취였는데 책엔 없다.

내가 보고도 혹시 놓친건 아닐까 했는데 이 역시나 없었고.


책엔 50가지의 산나물이 실렸는데

의외로 나물들 이름 중 모르는 이름보다

아는 이름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한국사람으로써 나도 이미 봤거나 먹어본 것들이란건데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내가 거쳐온 산나물들에 대해

이 책 내용들이 어느 면에서는 복습처럼도 느껴졌다.


책에 산나물 삽화들이 매 나물들마다

두드러지게 여러장이 실리진 않았다.

그럼에도 몇몇 산나물들은 대표 사진 이외에도

꽃대가 올라있는 모습들이나 

열매같은 사진들도 추가로 실려있는데,

이것들도 대표사진처럼 정보차원에서 올렸겠지만

그냥 먹거리 소개로만 보기에는 

꽃들과 열매일지 모를 그 추가 사진들이 참 이뻤다, 

그 색깔, 모습들 하나하나...


저자는 각 산나물마다의 적당한 채취시기와

생육과정들을 중복되더라도 소개하는데,

그렇기에 계절에 따라 공통적으로 들어둘 말들도 존재한다.


봄나물들을 그냥 생으로 먹기에 적당하나

여름과 가을로 이어지는 기간에 채취한 나물이라면

나름의 독성이 있을 수 있어서 식용으로 먹을 땐 

데쳐서 독성을 빼는 등의 방법이 필요하단다.

저장 또한 앞서 말한 묵나물의 방법일 땐

살짝 데쳐서 그늘에 말려 보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계절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게 저장되고

이걸 다시 다시 물에 삶고 담가두면

오히려 원래 가진 향보다 더 진한 느낌도

느낄 수 있다고 전한다.


산나물...이들을 꼭 약용으로 부르거나 먹어야 할까?


어떤 요소들도 그냥 다 몸에는 필요한 것들인데

무엇을 약으로 부르는 건 인간의 기대같아서.

그럼에도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약용이라는 그 말에 더 믿음을 갖고 

먹는 나물에 몸에 좋으리라 의미를 두려는 그런 마음.


실려있는 딱봐도 산나물인 것들과 대비되게

비비추나 원추리는 동네 관상용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식물들.

이미 상식적으로 약용식물인 걸 알고는 있었는데

책에 소개된 이 식물들이 동네에서 볼 수 있는

도시속 비비추와 원추리와 동일하며 먹어도 될런지는 살짝 의문.


여러 산나물 중 이름 때문에 기억에 남고 인상적이던

'풀솜대(지장보살)'이에 관한 내용을 인용해 적어본다.


솜대, 지장보살로 불리는 이 산나물은 

한방에선 사슴이 먹는 약이라 하여 녹약이라고 부르는 약재.

낙엽이 쌓이고 습한 곳에서 자라는 다년생이라고 하니

그말만 들어서는 버섯과 비슷한 환경에서 잘 사는 듯 했다.

옆으로 자라고 줄기는 20~50cm까지 군락을 지어 자란다.

윗쪽이 비스듬이 휘어지고 흰색 꽃도 피는 식물.


잎에 솜털이 달렸다고 해서 솜대라 불리고

보릿고개 때 뿌리로 죽을 쑤어 먹었다고 하여

지장보살(고통에서 구해주는 자비로운 보살)로 불린 식물.

나물의 이름이 지장보살이라니...


처음엔 지장보살이란 이름을 보고 궁금했고 

그 뜻을 읽고나서는 아련했던 식물.

누가 이 나물 하나를 처음 지장보살이라고 불렀을지...


그냥 사전처럼 활용하게 되거나

나물에 관심있는 사람들만

찾아 볼 내용들이겠지 예상하고 접했는데,

식물도감처럼 읽어나가던 어느 순간부턴

동호회라도 따라나서 나도 나물을 직접 캐러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는 건강이나 나물욕심만도 아니다.

그냥 귀한 살아있는 책에서 본 산나물들이

하나하나 귀한 인연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치면 풀인데 산나물로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다 사람에겐 쓰임이 있는 나물들.

하나가득 뜯어오면 환경 해치는 일이라 

나라차원에선 막기도 한다는 뉴스도 들었다.

그런데도 한번쯤은 가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냥 먹기만 하는게 아닌 이 식물들이 사는 그 장소에서.

딸 땐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냥 나물이 이상하게 땡기는 요즘이라

필요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던 책인데

머릿말부터 이어지는 내용들까지 

자연의 고마움도 새삼 많이 느끼게 해주고 

현재의 내 식생활도 반성해 보게 한 의미있는 독서였다.

누구라도 아무 목적없이 한번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자연속 산나물이라 불리지만 왠지 

알고 싶어질 식물들기도 하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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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관해 - 암 진단 후 10년, 병원 밖에서 암을 이겨낸 자기 치유 일지
상처받은 치유자 토마스 지음 / 대경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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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가 제공한 책에 주관적 서평을 남깁니다]


관해란 용어를 이번 책까지 2번 만나본다.

한번은 조울증인 의사가 자신의 회복 상태를 말한 책에서

그리고 이번 이 책의 항암치료 없이 자가치료한 경험담 속에서.


관해의 의미는 완치다.

그러나 완치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는 건

의학적으로 재발을 염두에 둔 완치임을 말하는 것.

그러나 재발의 염려를 고려만 했을 뿐이지

결코 재발이 또 오리란 뜻이 아닌

완치를 두고 쓰는 요령섞인 표현이라 보는게 맞다.


저자는 현재 누구보다도 건강하다.

내 느낌으로만 간단히 표현하자면 

어느 누구보다 건강하게 '먹고 살아간다'.


완전 두꺼운 책이 아니지만

암과 관련해 그간 들었봤던 모든 민간요법이 

거의 집대성 돼 들어있는 기분을 준다.

즉, 저자는 거의 자신이 실행해 봤다는 뜻.


NK세포, 관장, 해독, 케톤...


그중, 

사이먼튼 심리요법에 관한 언급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어봤는데.

의료계에서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개발한 

심리치유를 돕는 명상법에 가깝다고 설명된 보조치유법.

하지만 저자에겐 상당한 비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상황 중 이 방식을 알게 됐는데

혼자 해보다가 진척이 없어 해외지부에 연락한 후

비대면 화상채팅으로 일본에서 주관하는

사이먼튼 지도에 참여한게 첫 시도가 됐다.


저자의 이름은 정확하게 언급 안돼 있고

상처받은 치유자 토마스란 명칭으로 언급된다.

이 상처받은 치유자란 어원이

칼 융의 글에서 나왔다는 얘길 들었을 땐,

사이먼튼 방식이나 명상 등에 대해

좀더 비중있는 얘기가 있을거라 기대했으나

의외로 식이요법과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부분이 많아

비중 차이는 분야별로 대동소이 하게 느낀다.


식이요법, 정신, 육체.


어쩌면 이 책이 담은 경험의 범주는 

이 3가지가 핵심일거다.

하지만, 이 부분들 빼고 뭐가 더 담겨야 하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다른 답은 없다.


저자가 타인의 관장을 돕다가

못참은 그 사람의 변이 뿜어져 나와

봉변처럼 겪은 그때의 악취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지금까지 트라우마처럼 남았다는 얘기는,

커피나 레몬을 이용한 저자가 소개한 관장법 얘기 속

에피소드처럼 회상된 이야기이지만

본인 이야기이던 타인과의 이야기이던

이 뿐만이 아닌 모든 회복과정 속 이야기들은 

사실 녹록한게 없어 보인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무언가의 정보를 찾아보고

무엇을 먹을지 직접 키워보는 등,

본인을 위한 농부겸 의사겸 간호사까지

1인 다역까지 되어야 했던 투병기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자는 투병기간 중 어떤 시간대도

절대 고통으로 소개하지 않고

그렇게 간접적으로 느끼게도 묘사하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수고의 이유는

미리 신호를 보낸 몸의 소리를 듣지 않아

뒤늦게 수고와 노력을 들여야했던

본인만의 벼락치기 공부로 인한

불가피했던 수고라 스스로 느끼는게 보였다.


식재료도 기르고

산을 달리고...


좋아진 체력으로 대회도 참가하여

스스로 자존감도 높여가고 있으니

지금은 오히려 환자로써의 투병기가 아닌

건강한 그 자체로 비춰질 당사자지만,

그가 실천한 여러가지 치유과정들은

일반사람들이 다 따라할 수 있을까 싶게

당찬 면면이 존재한다.


병소를 결코 적으로 보지않은 그.

본인의 치유과정시 그린 그림에도 나타나 있듯

친구처럼 대하고 그저 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대상이자

조바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었던

배짱과 심지가 그를 낫게 한 건 아닌가 싶다.


가끔 자기 몸 하나 건강하자고

이렇게 아둥바둥 애를 쓰며 사는가라며

세상속 사람들을 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에 악착같은 집념이 아닌

내려놓은 듯 한 결정 후 

마치 새로 얻어진 생명처럼 사는 출발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귀감이 되는거 같다.


책제목처럼 완전관해의 삶이 

저자에게 영원히 이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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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독송과 다라니 기도를 위한
상욱.현안 옮김 / 위앙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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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가 제공한 책에 관한 주관적 서평입니다]


책의 기원이 안에 내용으로써 들어있기에

그 부분을 기억속 각인과 타인의 이해를 위해 

인용해 보기로 하였다, 약사진언 자체와 더불어.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문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이라 이름하며,

또는 '12신장요익유정결원신주'라 이름할 것이고,

또는 '발제일체업장'이라 이름할 것이다.

그러니 이와 같이 지녀야 할 것이다."


거의 말미에 약사경의 실천방식에 관한

독송 이야기가 제일 궁금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책의 서두에 실린 '약사경'이라 칭함의 의미는

이 한권의 책을 이해하기에 필수.


'불설약사여래본원경'의 줄임만로써

대표적인 판본으로는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이며,

관정경 중 12권에 수록된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 등이 있다고 

약사경은 설명돼 있다.


약사경...


법화경을 떠올려 봤을 때 약사경도

묘법연화경을 법화경이라 부르는 식의

약칭이란 걸 알 수 있다.


불경이긴 하지만,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페이지를 먼저 골라봤었다.

그렇게 선택한 첫페이지는 122p의 약사주.

근데 책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니

64p에 약사진언이라고 똑같은 내용이

단 몇줄로 이미 소개된 바 있었다.


나무소재연수약사불을 3번 합장하여 외치고,

나모보체파디 비샤셔 쥐루비류리 보라포 허라셔에

다퉈제둬예 어라허디 산먁싼푸퉈예 다즈퉈 안

비샤스 비샤스 비샤셔 샨모제디숴허.


이걸 54독 또는 108독 하라는 권고의 약사주.


샨 스크리트어 그대로를 한글로 옮긴 것으로써

실제 해보면 발음이 여간 어렵지 않다.

이미 발음에 도움되게 적었다지만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옮겨진 것이라

반복해봤음에도 결코 발음이 

수월하게 느껴지지 않던 약사주다.


절을 가본 사람들이라면 마주쳐봤을 '약사전'이란게 

아마도 이 약사경 속 부처님과 관련이 있을 듯 싶은데

어느 절을 가도 약사전은 참 고즈넉하다.

마치 동떨어진 별채의 느낌도 나고.


하지만 들어가보면 

수많은 개인등들이 어두운 공간을 고요히 밝히고 있음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기원이 느껴지는 

특이하고 경건한 공간이 약사전.


이 책을 통해, 

약사경 부처의 기원과 존재는 무엇이며

약사경이란 자체는 또 무엇인지

의미룰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냥 믿음과 실천이 주라고 생각하며 읽는게 

더 맞지 않을께 불경이라 본다.


문수보살의 질문에 부처가 답하며

중생의 고통과 그 종류를 이해한다던 부처님.

그렇게 설법하기 시작한 부처의 말씀은 계속되고

고통의 종류를 구분해가며 약사경이 가진 

능력을 설명해주니 한권의 책으로써

약사경은 마무리가 된다.


불경 특유의 구성으로

좌측엔 번역을 우측엔 원문이 실려있는데

한권 모두 읽기까지 결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의외로 속도가 나지 않는 느낌인 건,

짧지만 삶의 핵심과 번뇌를 건드리 있고

원인을 간추린 듯하지만 모두의 마음을 건드리기에 

고대 부처의 내려보는 듯한 조망적 시선이 느껴짐에

그런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릴 땐 부처는 단지 한명인 줄 알았다, 마치 예수처럼...


하지만, 부처라는 명칭은 불경에서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고 신이 여러명이란 의미가 주된 핵심은 아니던데.


약사경을 외우면 모든게 해결된다고 설한다.


그러나 묘한 주석이 하나 달려있는데

타인을 위해 비는 건 보장 못한다는 조용한 경고.

이 말은 자신만을 위해 염원하란 뜻도 결코 아닌듯 하다.

그럼에도, 물을 보고 빌어도 약사경 효험이 나타난다는데

왜 타인을 위해 독송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꼭 원문으로 전체를 읽지 않더라도 

참고로 써둔 약사진언 암송 정도는 시도해봤음 싶다.

마법사의 주문처럼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담은 작은 기원으로써 말이다.

그저 읊는 것만으로 많은 일을 이뤄준다는 경전.

그 힘이 누군가에게도 발생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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