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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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원본인 '도덕감정론'부터 읽었다.

러셀 로버츠의 이 책이 가진 존재이유가 

도덕감정론란 원전을 읽지 않고 이 책만으로도

도덕감정론이 주는 주요느낌은 느껴볼 수 있는 구조일테지만,

원본이 있고 그 해석을 위해 탄생된 비슷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만은 원본을 읽고 싶단 감정이 꽤 크게 일어났다.


왜냐면, 일단

러셀 로버츠의 도덕감정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느낌이 좋았고,

나로써는 이미 꽤 오래전에 도덕감정론을 펼쳤다가

너무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느낌 때문에 읽기 그만뒀던 

그때의 내 판단이 잘못됐었나를 

다시금 이 책이 불러일으켰기 때문.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덕감정론이 주는 감동이 70%라면

러셀 로버츠가 전달하려는 도덕감정론의 느낌은

110%처럼 다가왔던 것이라고도 말해보고 싶다.


당연히 일정부분 러셀 로버츠의 해석을 한번 거친 것보다

원전이 주는 느낌이 좋고 깔끔하거나

우선히 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도덕감정론은 

분명 현대적 언어를 구사하는 편한 느낌은 아니다.


서양철학이라 봐야하고 

구성면에서는 상당히 '파스칼의 팡세'란 책과

보여주는 구성이나 흐름이 흡사한데,

팡세가 좀더 아포리즘 같은 식의 문장들이라면

도덕감정론이 가진 네러티브는 훨씬 친절하고 자세한 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요즘의 언어는 분명 아니다. 


대신, 군더더기가 없이 

직선적이고 바른 애덤 스미스의 정신의 옳곧음이 

도덕감정론 책 전체에 묻어있다고 느껴진다.

또, 왠지 애덤 스미스가 썼음에도

공자 맹자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러셀 로버츠가 쓴 이 책을 주제로 기록해야 하는데

원전에 대한 얘기가 길어진다.

그래도 기왕 하나 더 추가 해야겠다.


좀 세부적인 항목이 될테지만

원전에 나오는 연민, 동정, 동감이 나오는 부분이나

동류의식 등이 나오는 부분들은 더 유심히 읽은 편이다.

책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오히려 

현시대의 책들이 주는 이야기보다

더 본질을 꽤뚫는 느낌의 애덤 스미스의 직관과

그만이 가진 해석력으로 세상을 이해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민(pity), 동정(compassion), 동감(sympathy).


이 간단한 세단어의 한국적 뜻풀이를 위해서는

한글이란 껍데기에 한문적 뜻풀이가 가미되야 한다.

그래서 이해를 더 돕는 언어적 특징은 존재한다.


하지만, 영어로는 전혀 헛갈릴 구석이 없다.

그냥 pity, compassion, sympathy란 다른 단어들일 뿐.


그런 단어가 이 단어뿐인가?


감정(emotion), 정서(feeling), 기분(mood) 등도 마찬가지.

한국어로는 엇비슷하고 구분하기가 모호해 보이는 단어들도

영어 단어로는 매우 다른 단어들인게 많다.


이 얘기를 굳이 해보는 이유는,

도덕감정론을 그냥 책 자체로서가 아닌

저자가 담고자 했을 느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어 하나하나들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가 명확이 있어야 한다.


즉, 원전에 쓰인 여러 엇비슷한 한국적 영단어들에 대해

그 속뜻을 좀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원전이 주는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원전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러셀 로버츠의 책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시작은,

저자 본인 서재에 오랫동안 쳐박아 두었던 '도덕감정론'을 

자신의 프로에 출연하는 호스트의 추천을 계기로 

우연히 꺼내 읽게 되면서 부터다.

자신의 인생책이라 느낀 그는 그 감동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담은 이 책까지 쓰게 됐음으로 이어졌다.


근데 왜 저자는 

이토록 이 책에 감명을 받았다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의 변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과 세상,

내가 바라보는 타인과 세상.

그 둘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를 수 밖에 없는 인지오류를

스스로 자각해 본 것.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어쩌면 당연한 관점이고 누가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니까.

그냥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거고

어떤 해석방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도 사실 잘 알 수 없다. 

근데 그것을 뒤집는 계기를 도덕감정론이란 책이 건드려 준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식을

상대에게 의지를 관철시키듯 퍼붓는 말들을

대화라 생각하며 살았던 거 같다고 말하는 그.

이를 저자는 대화가 아니라고 느꼈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종의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던

싸움과 같다고도 느꼈다.

자신이나 상대방도

결국 이런 식의 말들을 모두 하는 것이고,

내 말을 니가 들어라란 그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나갔던게 그동안의 자연스런 세상사.



헌데, 도덕감정론을 읽은 저자는

자신의 오래된 시점과 태도에 큰 오류를 느낀다.

내가 느끼면 상대도 이렇게 느껴야 하나?

반대로, 상대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난 그 상대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결국 둘 다 아니었다.

내 얘기도 전달될 수 없었고

상대의 이야기도 나에겐 도달하지 못한다.


그건 서로가 내뿜는 확성기 같은 태도의 연속선상이지

내가 보이고 있는 태도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감정에 대해

제3자 심지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봤을 땐 

그저 남일이란 그 관점을 이해해야 했다.

그걸 이해했을 때에서야 비로서 모든게 균형을 찾는다.


저자의 이런 깨달음도 깨달음이지만 일정부분

러셀 로버츠나 도덕감정론 자체에 들어있는 철학은

공자 맹자의 동양철학이나

불경과 비슷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거 같다.


저자 러셀 로버츠는 이런 비유도 해본다.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면이란 비유.

이게 자신에겐 잠을 설치게끔 만드는 

어마어마한 심적 부담을 줄 사건일 수 있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한텐 무슨 상관이냐는.

반대로,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벌어진 고통이

자신의 손가락에 벌어진 일만큼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오더냐는 물음까지.


자신이나 남들 모두

모질고 관심 없는게 아니라

그게 어느 부분에선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보편적인 관점이라는 것.

그러나 유독 어느 부분에선

서로 특별한 잣대를 원하는 걸 수 있다는 발상.


쉽게 비유하면 한국속담 중에도

생각나는 것들운 있다.


내 눈 속 들보,

아픈 손가락,

손톱 밑 가시,

등잔 밑이 어둡다 등

자신이 자신을 못보거나 

도리어 자신것만 유독 부풀리고

그 이외에는 눈 감아버리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이런 여러 속담들.


러셀 로버츠는

자신의 일이 타인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란 게

그렇게 이상한게 아니란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하나의 느낌으로 출발해서

원전 '도덕감정론'에 정설을 쏟은 '애덤 스미스' 자체를

러셀 로버츠 방식대로 이해했던 걸

이 책 안에 담아내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에,

촛불을 켜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와 이미지를 그려보며,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도덕감정론이란 책으로써 이어진

저자의 상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는 원전 서문에서,

여러번 책을 보완했야겠으나

결국 자기 수명 내에는 

미완으로 남을 작업이라 스스로 평했다.

애초에 결론내기 어려운 작업에 뛰어든 것이기에

하는 데까지 계속 보완하는 정도에서 마무리 될 것이란

도덕감정론이 가진 숙명과 같은 완성도에 대한 추측이었다.


애덤 스미스 본인은

인간에겐 교육이나 깨우침이 아닌

타고난 긍정적 부분이 분명 내재됐다고 봤고

소수는 운좋게 올바른 방향으로 

그리 태어난 것이라 하는데,

이는 평생 독신이자 학자로써 살아간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진 인간본성을 

느껴볼 수 있 부분이 아닐까도 싶다.


러셀 로버츠가 

자신이 느낀 도덕감정론의 정수를

가급적 쉽고 상징적으로 이 책에 담으려 했지만

전체를 다 담았다고 보긴 어려운데,

그건 부족한 해석이 아닌

원전 자체의 바이블적인 구성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반대로

방대한 소재를 다룬 도덕감정론 원전보다

러셀 로버츠의 이 책이,

도덕감정론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가장 압축적이고 특별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정수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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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뇌과학 - 뇌과학과 심리학으로 부를 끌어당기는 6가지 비밀 부자의 나침반 5
우에하라 치카코 지음, 오정화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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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어떻게 버느냐 자체는 나와있지 않다.

왜냐면, 직업이나 돈을 벌 수단의 선택을 돕는 책이 아닌

돈을 버는 사람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을 변화시킨 이야기이기도 한데,

일찍부터 은행원인 아버지로부터

기본적인 돈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자란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돈에 관한 소양을 기르며

자란 편이라 여기는 그녀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대학시절을 어렵게 보낸 저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 친구들 중 부유한 가정에 속하는 부류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이 꽤 오래 지속됐다.

금융쪽의 직업을 찾게 되어 

학생이 아닌 직장인으로써 

자신이 쓸 돈을 버는 사회인이자

기본적 경제적 기반을 가진 후에도 

경제에 관한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생기는 불안이 아닌,

최악의 경우인 것 마냥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생각하고

대비하려는 듯한 착각이 주는 불안.


그러다, 이 모든게

경제력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

돈에 관한 문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자신의 경우

파이낸셜 문제들과 더불어

뇌과학과 심리학이 더해져야만

실제 경제적 변화를 위한 

올바른 행동이 가능해지고,

돈에 관한 무의식적인 관념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깨닫게 된다.


실제, 자신이 어렵다고 생각했던 그 대학생활 조차

이후 다시 객관적으로 돌아보니,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것 뿐이었지

경제적으로 코너에 몰려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단 걸 깨닫는다.

학교생활을 해나가는데 경제적 제약은 없었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


이런 개인적 사고변화에 힘입어

타인의 금융교육에 심리학과 뇌과학을 도입한 저자는

이것을 '파이낸셜 테라피'라 부른다.


여러가지 무의식 개조에 대한 방식이 설명되고 있는데

각각의 설명들마다 3가지 이상의 항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복잡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가능한 간단히 정리된 듯하고

그래야 실용적인 변화접근이 더 가능할 거라 여기며

자신의 테라피를 만들고자 했다는 느낌도 주는 부분이다.


사람마다 돈을 왜곡되게 보는 관점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


"회피, 공포, 과신"


회피란, 

자신은 누군가 돈을 준 것으로 써야 한다거나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관념.


공포는,

돈은 더럽고 추악하니

가까이 해선 불행해진다는 관념.


과신은

돈이 곧 행복이라 믿기에

돈의 소비로 자존감을 추구하는 관념.


이중 과신은

돈이 많은 이의 선택사항처럼 보이지만,

돈에 관한 연구에서

일정수준까진 분명 돈이 행복을 높여주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돈을 소유했을 때부터는

비례적으로 행복이 증가할 순 없다는 연구에 기반한다.


회피나 공포는

트라우마와 잘못된 신념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데,

트라우마는 편도체, 해마, 전두엽 피질에 영향을 미쳐

이 영역들을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투자에 망설이거나 소극적이기만 한 태도는,

어릴 적 돈에 관한 부정적 인식을 

교육받고 주입받았기 때문일 수 있고,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부터 받은 

일종의 충격 때문에 이것을 무의식 중

공포로 받아들임으로써

트라우마를 겪은 것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뇌에 깊이 박힌 신념은 

잘못이란 표현보단 

'그릇된'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트라우마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또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부정적 사유다.


그렇게에 일단 

자신이 돈과 인연이 없다는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로써의 그 신념부터 찾아야 한다.

그래야 '평정심'을 가지고 돈과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경제적인 행동력을 심리와 뇌에서 찾고 있다.


이 책 때문에 처음 알았지만

영국이나 일부 외국에선 어릴 때부터 

돈에 관해 단순한 교육이 아닌

심리학과 연관된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 애들에게 무관해 보일 수 있는

돈을 빌리고 갚는 수준의 이야기들 뿐이 아닌

돈을 못갚고 못받았을 때의 경우까지

고려해 보도록 만드는 

심리적 돈교육이라는 것에 놀라웠다.


앞서 말한 돈과 관련된 부정적인 신념에서

자신은 돈과 인연이 없다는 부분은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단순히 생각하면 '양보' 아님 '포기'일지 모를 이 부분

무엇이 일찍 이것을 내면화 하게 할 수 있을까?

이걸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인지부조화'와 연결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착한 것과 무지한 것의 구분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해 놨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읽기에도 좋은 실용적인 금융관련 심리학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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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 아웃풋 - 막연한 기대를 현실로 풀어내는 사고 모드
촉촉한마케터(조한솔)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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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이 좋은 책들이 있다.


이 책도 어쩌면 자기계발서라던가

일종의 심리학 책이라던가란 

해당 책만의 분류를 떠나

저자가 제안하는 발상의 옳음에 먼저

끌리게 되는 책이라 소개하고 싶다.


능동적이지 않게 사는 원리를

자전거에 빗대어 설명한게 있다.

자전거를 움직이게 하는 건

페달을 돌리고 있는 두 발인데,

그 수고에 불합리하게 맞대응 하듯

동시에 양손은 자전거 브레이크를 쥐고 있는 듯

두발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는 삶이

능동적 아웃풋을 막는 내적 브레이크라 비유한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생각으로 생각을 막는다는 발상도 틀렸다"고.


이 말은 흡사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란 

말장난 같은 진리와도 유사한 표현법이다.

걱정이나 생각 모두

계속 반복되는 돌아가는 루프처럼

사람의 사고방식이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선택적 인지양식을 야기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내면을 가로막는 일종의 

강박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큰 범주의 '망상'이라 보고있는 저자다.


망상이라고 들으니 

순간 병처럼 느껴지기 쉽겠지만,

자신이 나아가려 하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멈추도록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족쇄이자 잘못된 원천을

망상에서 찾는다고 보는게 맞고

그게 여기에서 쓰여진 망상의 정의다.


발상도 좋고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좋다.


거기에 직접 경험한 사연들과

시행착오들도 사례 형식으로 들려주고 있어

매우 공감가는 구성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다.


결국 해결점을 향한 방식을 위한 책인데

일종의 명상식 이완에서 상당히 많은 원리를 공유한다.

명상이나 인지행동치료 등을 말하고 있진 않지만

놓아주기라던지 자기몸을 스캔하듯

긴장된 곳을 풀어주는 방식 등,

몸 구석구석 두들기고 만져주며

일단 몸의 이완을 정신의 이완을 위한

단초로 활용하는 조언들은 명상류에 가깝다.

물론 옳기는 하고 검증된 효과도 있겠지만 

명상을 위주로한 마인트풀니스 류의 책들에서 활용되는 방법이  

이 책만의 색깔에 애매하게 끼워진 맛이 나 아쉬웠단 것.


발상에 맞춰 이론적 활용을 보완하는

간단한 자가 테스트까지 만들어 소개한 

그 저력에 비해서는,

해결점에 도달하는 과정에는

그 정교함이 다소 미흡해 보이는게 있어 

아쉬웠단 뜻이다.


그러나 큰 틀에선

옳은 발상과 그걸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을

이어나감에 크게 중복이 없고,

억지주장이라 느껴지는게 없이

공감가는 주제를 채택 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좋은 내용들이라 

좋았던 책이라고 결론내고 싶다.


이야기를 사례식으로 계속 들려주듯 말하며

동의할 수 있겠냐는 질문식 문장들들이 많은 점도

이 책만의 개성을 살린 부분들이다.


부드러운 듯 보여도

편견에 갇혀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발상면에서 이런 열린 사고를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과 사연을 공유했고

이론화 하는 작업에선 배울 점도 많았던 책.

저자의 전작을 읽진 못했지만

다루는 소재면에선 이 책이 더 마음에 들어온다.


망상이란 단어적 정의를

독자 스스로 좀더 객관화 해보기 위해

먼저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 후

저자가 말하는 망상의 정의를 이해해 보면,

능동적 아웃풋을 이루기 위해

어떤 시도와 변화가 필요한지

스스로 느끼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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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불안은 죄가 없다 - 걱정 많고 불안한 당신을 위한 뇌과학 처방전
웬디 스즈키 지음, 안젤라 센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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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불안과 불안장애로써의 불안을 먼저 나눠야 한다.

그러나, 이 나눠진 범주 자체에서도

약간 애매한 영역은 존재한다.

다음은, 일상적 불안과 불안장애로써의 불안을 분류해 

5개로 나눈 범주들 소개.


[범주1]

일상적인 불안으로써

책이 제시하는 실제 예들은,

청구서 처리,

취업,

연인과 이별,

삶의 중대사건.


이 범주에서

근거없는 걱정이라 판단되거나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야기할 땐

불안장애.


[범주2]

불편하고 어색한 사회생활이 주는

수치심과 주위의식


이때,

이런 불편함에 골몰하여

예상되는 굴욕감에 대해 두려움이 커져

사회생활 속 상황자체를 원천차단하거나 피할 땐

불안장애


[범주3]

시험,

사업,

무대공연,

행사 등에서의

긴장


이 상황을 앞두고 또는 상황시

실제 공황에 빠지거나,

공황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예기불안에 사로잡히는 건

불안장애


[범주4]

위험한 물건, 장소,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 또는 거부감이 들 때.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된게 없음에도

혹시 닥칠지 모를거 같은 불안감이 크게 엄습해옴은 

불안장애


[범주5]

트라우마 직후,

경험하는 불안, 슬픔, 수면장애


시간이 흘러

몇달 몇년이 지났어도,

발생됐던 트라우마에 대해

반복되는 악몽이나

당시 이미지의 재현이 계속 되고,

지속적인 감정적 마비를 경험시

불안장애


여기까지가,

5개의 범주로 나눈 '일상적 불안vs.불안장애'의 분류다.


직간접적으로 타당성이 와닿는 것도 있겠지만

일부에선 모호함도 있다.


예를 들면,

삶 속 중대한 사건이라는 기준을

일상적 불안으로만 

과소평가하듯 묶기엔 애매하다.


예시로써 등장한 것들 이외에도

배우자나 부모님의 죽음,

굳은 믿음으로부터의 배신,

타의에 의한 비자발적 고립 등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여럿 추가될 수 있는데,

이때 이 사건들이 일상적으로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상'이란 이유이면서

피치못할 사건들이라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분명 중대하지만 일상적이란 기준도 맞겠다.

그래서 불안장애로써 바로 인식되는게 

불충분한 쪽의 분류도 일단 맞겠고.


하지만,

이 불안에 '지속적'이란 근거가 생기기 전이라도

상식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거나

벗어나기 힘들 가능성도 있다는 건

고려해 보는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트라우마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분류지만

트라우마와 일상생활 내에서의 중대한 걱정꺼리들 간에

구분을 두고 완전한 차이로 나누기 어렵다.


트라우마 전문가들의 견해 중엔,

같은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라도 

해당사건을 각자가 받아들이고

내면화 시키는 관점차이 때문에

트라우마라 느끼는 기준이 달라져

전문가들 조차도 트라우마 기준을 정의하기엔 

어렵다는 코멘트가 있다.

그렇기에 불안이 된 사건이 

트라우마인지 또는

불안장애의 요소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자체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어쨌거나, 불안과 불안장애를 나누는 

모호함은 위와 같은 이유들이 있겠고,

이 외에 예시로 적은 다른 범주들 중엔

일상적 불안과 불안장애로 구분함이

타당해 보이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책은 결국,

불안의 구분을 타겟으로 삼진 않았으며,

불안의 종류는 여러가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불안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유용한 감정으로써

피하지 말고 이용해야 함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장점도 얘기하면서 말이다.


장점 중에

불안으로써 몰입과 집중력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 있는데,

쉽게 떠올려 볼 때

목전에 닥친 시험준비를 위해

평소 못해봤던 많은 양의 공부를 소화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일종의 불안의 힘이라 보는 것.


다만, 

불안이 압박감으로 작용하여

평소기량을 발휘하는 것조차 어렵게 하거나

쫓기는 듯한 분위기가 없어야만

두뇌가 편해지고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책이 쉽고 재밌게 읽힌다.

불안을 선물같은 감정이라고까지

받아들이는 데는 다소 힘들수 있겠지만,

맹목적으로 불안을 두려워하고 피하고만 싶은 성향이 있다면

이 책으로 자신의 그런 선입견을 

어느정도 날려버려야 된다는

기준정도는 줄 수 있는 소스가 담긴 책 같다.


불안을 다루고 있는 이 책,

불안해하지 말고 편하게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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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IT 디스 이즈 잇
얀 케르쇼트 지음, 방기호 옮김 / 씨아이알(CIR)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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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본문 자체로 이해를 해야 하겠지만

내가 이 책에 정을 두고 읽게 해준 건

오히려 역자인 방기호의 여는 글과 닫는 글이었다.

역자가 옮긴 책에 글을 2개나 실은 걸 보는 건 처음이다.

보통 저자의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는 있어도 말이다.


역자의 수련의 시절,

담당교수는 사람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설명하면서

그 구분을 둘 수 있는 가장 근접점을 묻는다.

사실, 몇cm까지 근접한 걸 

볼 수 있는냐는 질문이 아닌

눈이 더이상 물리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오히려 대상을 바라보는 두뇌의 힘으로

눈을 떠난 인식(consciousness)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설명.

헌데 여기서 의문.

이 인식과 awareness가 뜻하는 인식은 

비이원론과 비이분법에서 쓰는 인식과

많이 다른 것일까.


우선, 책 제목인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을 살펴보자.

이또한 역자의 글 속에서 본문에서보다 힌트를 얻게 됐는데

역자는 안다는 거 모른다는 거 모두가 틀렸다 하지만

힌트를 얻은 정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것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디스 이즈 잇'

이건 존재의 인식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문장.

그냥 직역하면 '이것은 그것이다'가 될만 하다.

하지만, 비이원론 입장에 서서

이 한 문장 뜻에 접근에 보자면

앞선 This와 뒤의 it은 같은 대칭적인 대명사가 아니다.

This를 역자는 '바로' 정도의 지시대명사로 활용해

뒤의 it을 바라보는 '눈' 또는 '시선' 정도의 구실로 해석했다.


즉, 비이원론적 입장에서

모든 건 하나를 뜻하기에,

자신이 자신을 본다는 말은 논리상 맞지 않다.

A=B라는 이분법이 아닌

A=A라는 비이원론적 뜻이 통하기 위해선,

이 2개의 A는 같은 A를 뜻함도 아니고

그저 A가 스스로 A임을 인식하는 

그 정도의 수준을 등호(=)가 화살표처럼 가리키는 역할.


20년이 넘은 예전 에크하르트 툴레와

저자의 대담 속에서 인상적이던 구절이 있다.

발현(Manifestation)을 이야기 하며

인식할 수 있게 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


존재, 즉 'being을 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가 가장 대중적인 설명이자 경험담으로 느껴져서다.

저마다 다른 느낌을 이야기 할 때

그걸 바라보며 참고해야 하는 입장에선,

기존에 자신이 스스로를 정의하며 느꼈던 존재와 

다른 자신을 인식했다는게 무엇인지

부드럽게 이해식으로 접근하게 해주는

마음에 드는 에크하르트 툴레의 설명이 이어진다.

특히, 발현이란 단어가 주는 우연성 느낌이 쉽게 와 닿으면서.


역자의 이야기를 또 안할 수 없는데,

결국, 모든 건 부질없다는 듯 들리기도 했지만

선을 통해서건 명상을 통해서건 종교를 통해서건

무엇을 쫒는다는 건 의미없는 목적추구라 설명하며,

이 설명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봤을 땐

나 스스로가 한마리 말이 되어 

눈 앞에 매달려진 당근을 쫓아 뛰니 

결국 나와 당근은 같이 뛰고 있는,

즉, 당근을 쫓으려 뛴게 아니라

뛰고 있는 나란 존재는 이미 당근 뒤에 있는데

나란 말이 계속 참나를 찾고 있는 듯 느껴지는 설명 같았다.


이 책은 정답이 있지 않기에

각자의 느낌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책을 읽으며 가질 수 있는 시간은

각자의 '각성'이 되어주리라 추측은 된다.


단정적인 말을 자꾸 피하게 되는 건

깨달음은 없다는 책이 내건 

애초의 명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좋은 것을 얻었다고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비이원론을 파고 들어가는게 황당무개하게 느낄 순 있어도 

그 '존재'하는 대상을 설명하는게 어려워서 생기는 느낌 띠문같지

부정하지 못할 단순명료한 핵심은 줄곧 느껴지기 때문.


책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운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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