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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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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원본인 '도덕감정론'부터 읽었다.
러셀 로버츠의 이 책이 가진 존재이유가
도덕감정론란 원전을 읽지 않고 이 책만으로도
도덕감정론이 주는 주요느낌은 느껴볼 수 있는 구조일테지만,
원본이 있고 그 해석을 위해 탄생된 비슷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만은 원본을 읽고 싶단 감정이 꽤 크게 일어났다.
왜냐면, 일단
러셀 로버츠의 도덕감정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느낌이 좋았고,
나로써는 이미 꽤 오래전에 도덕감정론을 펼쳤다가
너무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느낌 때문에 읽기 그만뒀던
그때의 내 판단이 잘못됐었나를
다시금 이 책이 불러일으켰기 때문.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덕감정론이 주는 감동이 70%라면
러셀 로버츠가 전달하려는 도덕감정론의 느낌은
110%처럼 다가왔던 것이라고도 말해보고 싶다.
당연히 일정부분 러셀 로버츠의 해석을 한번 거친 것보다
원전이 주는 느낌이 좋고 깔끔하거나
우선히 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도덕감정론은
분명 현대적 언어를 구사하는 편한 느낌은 아니다.
서양철학이라 봐야하고
구성면에서는 상당히 '파스칼의 팡세'란 책과
보여주는 구성이나 흐름이 흡사한데,
팡세가 좀더 아포리즘 같은 식의 문장들이라면
도덕감정론이 가진 네러티브는 훨씬 친절하고 자세한 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요즘의 언어는 분명 아니다.
대신, 군더더기가 없이
직선적이고 바른 애덤 스미스의 정신의 옳곧음이
도덕감정론 책 전체에 묻어있다고 느껴진다.
또, 왠지 애덤 스미스가 썼음에도
공자 맹자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러셀 로버츠가 쓴 이 책을 주제로 기록해야 하는데
원전에 대한 얘기가 길어진다.
그래도 기왕 하나 더 추가 해야겠다.
좀 세부적인 항목이 될테지만
원전에 나오는 연민, 동정, 동감이 나오는 부분이나
동류의식 등이 나오는 부분들은 더 유심히 읽은 편이다.
책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오히려
현시대의 책들이 주는 이야기보다
더 본질을 꽤뚫는 느낌의 애덤 스미스의 직관과
그만이 가진 해석력으로 세상을 이해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민(pity), 동정(compassion), 동감(sympathy).
이 간단한 세단어의 한국적 뜻풀이를 위해서는
한글이란 껍데기에 한문적 뜻풀이가 가미되야 한다.
그래서 이해를 더 돕는 언어적 특징은 존재한다.
하지만, 영어로는 전혀 헛갈릴 구석이 없다.
그냥 pity, compassion, sympathy란 다른 단어들일 뿐.
그런 단어가 이 단어뿐인가?
감정(emotion), 정서(feeling), 기분(mood) 등도 마찬가지.
한국어로는 엇비슷하고 구분하기가 모호해 보이는 단어들도
영어 단어로는 매우 다른 단어들인게 많다.
이 얘기를 굳이 해보는 이유는,
도덕감정론을 그냥 책 자체로서가 아닌
저자가 담고자 했을 느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어 하나하나들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가 명확이 있어야 한다.
즉, 원전에 쓰인 여러 엇비슷한 한국적 영단어들에 대해
그 속뜻을 좀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원전이 주는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원전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러셀 로버츠의 책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시작은,
저자 본인 서재에 오랫동안 쳐박아 두었던 '도덕감정론'을
자신의 프로에 출연하는 호스트의 추천을 계기로
우연히 꺼내 읽게 되면서 부터다.
자신의 인생책이라 느낀 그는 그 감동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담은 이 책까지 쓰게 됐음으로 이어졌다.
근데 왜 저자는
이토록 이 책에 감명을 받았다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의 변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과 세상,
내가 바라보는 타인과 세상.
그 둘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를 수 밖에 없는 인지오류를
스스로 자각해 본 것.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어쩌면 당연한 관점이고 누가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니까.
그냥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거고
어떤 해석방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도 사실 잘 알 수 없다.
근데 그것을 뒤집는 계기를 도덕감정론이란 책이 건드려 준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식을
상대에게 의지를 관철시키듯 퍼붓는 말들을
대화라 생각하며 살았던 거 같다고 말하는 그.
이를 저자는 대화가 아니라고 느꼈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종의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던
싸움과 같다고도 느꼈다.
자신이나 상대방도
결국 이런 식의 말들을 모두 하는 것이고,
내 말을 니가 들어라란 그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나갔던게 그동안의 자연스런 세상사.
헌데, 도덕감정론을 읽은 저자는
자신의 오래된 시점과 태도에 큰 오류를 느낀다.
내가 느끼면 상대도 이렇게 느껴야 하나?
반대로, 상대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난 그 상대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결국 둘 다 아니었다.
내 얘기도 전달될 수 없었고
상대의 이야기도 나에겐 도달하지 못한다.
그건 서로가 내뿜는 확성기 같은 태도의 연속선상이지
내가 보이고 있는 태도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감정에 대해
제3자 심지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봤을 땐
그저 남일이란 그 관점을 이해해야 했다.
그걸 이해했을 때에서야 비로서 모든게 균형을 찾는다.
저자의 이런 깨달음도 깨달음이지만 일정부분
러셀 로버츠나 도덕감정론 자체에 들어있는 철학은
공자 맹자의 동양철학이나
불경과 비슷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거 같다.
저자 러셀 로버츠는 이런 비유도 해본다.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면이란 비유.
이게 자신에겐 잠을 설치게끔 만드는
어마어마한 심적 부담을 줄 사건일 수 있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한텐 무슨 상관이냐는.
반대로,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벌어진 고통이
자신의 손가락에 벌어진 일만큼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오더냐는 물음까지.
자신이나 남들 모두
모질고 관심 없는게 아니라
그게 어느 부분에선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보편적인 관점이라는 것.
그러나 유독 어느 부분에선
서로 특별한 잣대를 원하는 걸 수 있다는 발상.
쉽게 비유하면 한국속담 중에도
생각나는 것들운 있다.
내 눈 속 들보,
아픈 손가락,
손톱 밑 가시,
등잔 밑이 어둡다 등
자신이 자신을 못보거나
도리어 자신것만 유독 부풀리고
그 이외에는 눈 감아버리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이런 여러 속담들.
러셀 로버츠는
자신의 일이 타인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란 게
그렇게 이상한게 아니란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하나의 느낌으로 출발해서
원전 '도덕감정론'에 정설을 쏟은 '애덤 스미스' 자체를
러셀 로버츠 방식대로 이해했던 걸
이 책 안에 담아내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에,
촛불을 켜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와 이미지를 그려보며,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도덕감정론이란 책으로써 이어진
저자의 상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는 원전 서문에서,
여러번 책을 보완했야겠으나
결국 자기 수명 내에는
미완으로 남을 작업이라 스스로 평했다.
애초에 결론내기 어려운 작업에 뛰어든 것이기에
하는 데까지 계속 보완하는 정도에서 마무리 될 것이란
도덕감정론이 가진 숙명과 같은 완성도에 대한 추측이었다.
애덤 스미스 본인은
인간에겐 교육이나 깨우침이 아닌
타고난 긍정적 부분이 분명 내재됐다고 봤고
소수는 운좋게 올바른 방향으로
그리 태어난 것이라 하는데,
이는 평생 독신이자 학자로써 살아간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진 인간본성을
느껴볼 수 있 부분이 아닐까도 싶다.
러셀 로버츠가
자신이 느낀 도덕감정론의 정수를
가급적 쉽고 상징적으로 이 책에 담으려 했지만
전체를 다 담았다고 보긴 어려운데,
그건 부족한 해석이 아닌
원전 자체의 바이블적인 구성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반대로
방대한 소재를 다룬 도덕감정론 원전보다
러셀 로버츠의 이 책이,
도덕감정론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가장 압축적이고 특별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정수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