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 마하트마 간디 주해, 김대웅 옮김 / 아름다운날 / 2019년 2월
평점 :
마르셀 프루스트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건축·사회 비평가인 존 러스킨의 저작을 광범하게 탐독하고(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59p)”라는 한 문장을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프루스트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자취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예술·건축 비평에 더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책은 러스킨의 사회 비평이다. 1년 전 책 제목이 마음에 깊이 남아서 구입해서, 몇 페이지 넘겨보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이다.
버지니아 울프도 러스킨을 그의 책에서 언급한 바 있고, 미술사와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19세기 예술비평가로서, 후원자로서 자주 등장한다. 그의 연설이나 저서의 내용은 19 세기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사유들이므로 현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가 경계했던 자본주의 사회 현상은 오늘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다. 그가 예상했던 패망의 길은 이미 우리가 지나왔거나 멀리서 보던 것과는 다른 풍경을 갖고 있기도 하다. 때론 그 길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자본주의가 몸체를 거대하게 키우고 사회를 잠식해가는 상황에서 그가 한 외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미 세상이 가고 있는 방향을 점검해 보게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 책을 읽고 러스킨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서전 제4부 18장 ‘책 한권의 기적’에서 “그날 밤 도무지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책의 이상에 따라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184p)”고 기록한다. 그리고 『사르보다야』라는 제목을 붙여 구자라트어로 번역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간디의 편역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기로 결심하게 하는 힘이 있는 저서다. 존 러스킨의 사상은 당시 여러 지식인과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은 신약성경에서 따온 말이다. 저녁이 다 돼서 고용된 일꾼에게도(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아침과 낮부터 일한 일꾼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임금을 준 주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받은 임금은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일찍 온 일꾼들이 불평하자 주인은 그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에게 임금을 똑같이 준 것은 자신의 자비라고 말한다. 노동시간으로 계산해서 임금을 받는 현대의 시선에는 불합리해 보이는 처사다. 하지만 최저 생계비를 줌으로 일꾼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기 위한 주인의 선행으로 받아들여진다. 러스킨은 근대 경제학에 애정(사랑)이 있어야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 책을 시작하며, 러스킨은 자신이 이 글들에는 ‘부wealth’에 관해 정확하고 확고부동한 정의를 내리고, ‘부의 획득’이란 궁극적으로 사회의 어떤 도덕적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음을 밝힌다. 도덕적 조건들 중 정직에 관한 예화로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에 대한 리비우스의 언급을 든다. ““그의 장례식은 국비로 치러졌다”언급은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도 낮은 사람에게도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로서 결코 불명예가 될 수 없다(23p)”는 주장은 그가 앞으로 어떤 비평을 전개해 나갈지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다양한 시대에서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온갖 망상들 가운데 가장 기이한 것,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애정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때 더욱 진보된 사회적 행동규범을 갖는다.’는 관념에 뿌리를 둔 근대 학문으로서 경제학을 비판한다. 인간의 영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경제학은 ‘뼈 없는 인간을 위한 체조학’과 같다고 일침을 가한다.
한편, 상인과 군인에 대한 인식의 비교는 오늘날과는 맞지 않는다. 이미 헌신이나 희생과 같은 단어는 가치평가의 기준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상업적 경제학과 정치적 경제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설명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공통적으로 부를 추구한 인간의 욕망과 그를 이루기 위한 활동과 모색들에 대한 분석과 경계는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상기시켜주는 부분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된다.
“로마 검투사의 죽음은 ‘가진다’라는 뜻의 ‘하베트habet’ 한 마디에 달려 있었지만, 군인의 승리와 국가의 구제는 ‘쿠오 플루리뭄 포세트 Quo plurimum Posset, 즉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 제7권 6절)’에 달려 있다. (134p)” 이것은 ‘가진다has’라는 동사에 대한 설명이다. ‘소유’에 따라오는 힘은 소유한 사람에 대한 적합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활력에 있다. ‘누가 어떻게 쓰는가가 더 중요하다’로 전개된다.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유용(use)할 수 있는 물건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무용(from-use) 또는 오용(ab-use)이 될 수 있다. ‘idiot’은 국가에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전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135p)”
“부는 “용기 있는 자THE VALIANT에 의한 가치 있는 것 THE VALUABLE의 소유”이며 부를 한 나라 안에 존재하는 힘으로 고찰할 때는 물건의 가치와 그 소유자의 용기valour라는 두 개의 요소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부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또 영원히 부유해질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들의 튼튼한 금고에 채워진 자물쇠가 부유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전혀 부유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7p)”
단순한 부의 힘 자체는 그림자를 껴안는 것처럼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익시온의 신화를 비유로 설명한다.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을 가지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는 “생명 없이는 어떤 부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어떤 물건이든 간에 사용되거나 소비된 물건에는 그만큼 인간의 생명이 소비되었다는 것, 그렇게 해서 현재의 생명을 구하거나 더 많은 생명을 얻게 되면 그것은 좋은 소비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큼 생명을 방해하거나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명심해야 한다(178p)”고 권고한다.
현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들일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윤을 남기고 축적하는 것을 부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현실에서 허공을 치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축적하는 부라는 것이 실체가 없고 어느 한순간 거품처럼 가치가 사라지는 현상은 러스킨이 예견한 것이다. 분명 예감하고 동의하지만, 마치 줄다리기 줄에 묶여있는 사람들처럼 자본이 외치는 구령에 맞춰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용기는 다른 사람이 하는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