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이잔산에 오른 고노는 구토를 느낀다. 그는 “모든 구토는 움직이기 때문에 하는 거라네. 속세의 모든 구토는 동(動)이라는 한 글자에서 일어나는 법이지.”(25p) 라고 한다. 그의 구토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닮았다.
“‘구토’는 내게 짧은 유예기간을 남겨준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니까.” (『구토』 장 폴 사르트르)
고노는 생각에 잠긴다.
“정적만이 남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그 고요함에 내 한 목숨을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세상 어딘가로 통하는 내 피는 고요하게 움직이는데도 소리 없이 해탈한 심경으로 몸을 토목으로 여기고, 하지만 어렴풋이 활기를 띤다. 살아 있다는 정도의 자각으로 살아서 받아야 할 애매한 번민을 버리는 것은,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벗어나 하늘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집착을 초월한 활기다. 고금을 공허하게 하고 동서의 자리를 다한 세계의 바깥에 한쪽 발을 들려놓아야만…… 그렇지 않다면 화석이 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죽어보고 싶다.”(27p)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존재자들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존재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막연한 불안을 품으면서, 다른 존재에 대해 자신을 잉여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나를 삭제시키는 것을 어렴풋이 꿈꾸었다.”(『구토』 장 폴 사르트르)
던져진 존재의 세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안하다. 불안으로 인해 생각은 움직이고, 구토를 일으키는 것이다. 고노는 실존주의자는 아니다. 죽음은 만사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단지, 그에게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롯된 고뇌와 무덤 이편의 무의미한 다툼을 끝내는 막(幕)이다. 항우(項羽)의 여인 우미인(虞美人)의 무덤에 피었다는 우미인초(개양귀비)는 고노가 사유하는 죽음의 미학이다.
번민하는 고노의 풍경은 안토니우스의 무덤 앞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슬픔을 읽는 후지오와 오노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오노는 교토에서 신세를 진 고도선생의 딸과 정혼한 사이나 후지오에게 흔들리고 있다. 후지노가 갖고 있는 시계에 흔들린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복남매 고노와 후지오 아버지의 유품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시계를 무네치카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것은 사위로 삼겠다는 암묵적인 의미이다. 교수를 꿈꾸는 가난한 오노에게 후지노와의 결혼은 재산과 신분을 약속받는 것이다. 그는 딸 사요코를 데리고 도쿄로 오겠다는 고도선생의 편지를 받고 곤혹스러워 한다. 편지를 내려놓으며 시선이 멈춘 ‘로세티 시집’은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을 나타낸다. 로세티는 부인(엘리자베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시로 관에 함께 묻었던 시들을 다시 꺼내어 시집을 펴낸다. 이 시집은 배덕(背德)의 상징이다.
<행복한 베아트리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4-70 (모델.엘리자베스 시달)
고노의 친구 무네치카의 누이동생 이토코는 고노를 사랑한다. 욕망과 사랑으로 얽혀있는 청년들-고노, 무네치카, 오노, 후지오, 이토코, 사요코-가 있는 도쿄는 박람회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박람회장과 고도의 집 정원은 근대와 전통, 환상과 현실, 욕망과 미덕으로 대비된다. 고요한 정원을 떠나 집밖으로 나가면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이 그들을 들뜨게 한다. 『명암』에서 도쿄와 온천장, 오노부와 기요코가 현실과 꿈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온천장을 향하는 쓰다를 연상하게 하는 오노의 생각이 흥미롭다.
“사요코는 과거의 여자다 사요코가 안고 있는 것은 과거의 꿈이다.…… 과거로 돌아갈까? 물에 섞인 한 방울의 기름은 쉽사리 기름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좋든 싫든 물과 함께 흐르지 않으면 안된다. 꿈을 버릴까? 버릴 수 있는 꿈이라면 밝은 곳으로 나가기 전에 버리면 된다. 버리면 꿈이 달려든다.”(155p)
둘로 나누어진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모순이 일어난다.
“자극의 주머니에 대고 문명을 체로 치면 박람회장이 된다. 박람회를 무딘 밤 모래로 거르면 찬란한 일루미네이션이 된다.”(194p)
아! 하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일루미네이션은 환각이다. 이 곳을 찾은 주인공들은 욕망이 서로 엇갈림을 느끼고 불안에 휩싸인다. 빛이 만들어낸 환상과 대비된다. 현실과 꿈의 대조이다. 어쩌면 박람회를 찾은 사람들 모두가 분열된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요코는 꿈처럼 불안해진다.”(201p)
욕망으로 치닫던 후지오는 그 거센 역풍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항우나 현종의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갑작스럽고 덧없는 죽음이다. 욕망은 그치고 무덤이편의 다툼은 무의미해졌다. 그녀의 주검이 눕혀진 시트 위에는 시계가 부서진 채 놓여 있다. 우미인초가 그려진 병풍이 거꾸로 세워져 있고, 그 그늘에 벼룻집, 백자 향로, 선향 주머니가 보인다. 바니타스다!
고노의 일기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일기는 인간의 죽음으로 출발한다. 죽음을 잊은 자는 도의를 잊게 되고, 도의를 잊은 자는 욕망으로 질주한다. “도의 관념이 극도로 쇠퇴하여 삶을 원하는 만인의 사회를 만족스럽게 유지하기 어려울 때 돌연 비극이 일어난다. 여기서 만인은 모두 자신의 출발점으로 향한다. 비로소 삶 옆에 죽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434p) 후지오의 갑작스런 죽음은 메시지다. “그리하여 비로소 비극의 위대함을 깨닫는다.”(435p)
등장인물의 변함없는 성격과 그로인해 단순해진 서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읽을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아마도 서사 외에 페이지마다 풍경과 사물에 녹아있는 소세키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고노는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본다. 커튼의 깊은 주름이 좌우로 갈라진 사이로 홍가시나무의 어린잎이 타오르는 듯이 유리창에 비친다”(319p)라는 문장을 두고 지나쳐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유리창에 비친 풍경에 역설적으로 반영하는 고노의 고뇌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 장면 속에 잠시 머물게 된다. 죽음이라는 명확한 현실 앞에서 존재는 질문한다. 무엇이 현존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고노는 무네치카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은 희극만이 유행한다네.”
<아르장퇴유의 개양귀비꽃> 클로드 모네, 1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