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표상 -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5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최유준 옮김 / 마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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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그동안 서양에서도 손꼽히는 중동학 분야의 학자로서, 또한 영문학과 비교문학, 문명비판론에도 큰 족적을 남긴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명성을 얻었고 오늘날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그의 아류들이 이 오리엔탈리즘을 의도적으로 한정해 차용했지만 그 이전까지 서양이 동양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이론적 체계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는 약간의 개인적 소회로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중동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던 이유에 대해 자신이 이슬람 가정이 아니라 일종의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가능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지난 1993년 영국 BBC의 리스 강좌에서 밝힌 지식인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1994년 책으로 엮은 것으로,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판되어 현재는 해당 출판사의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한 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인 글의 논의에 앞서 출판사 측에 한가지 밝혀두고 싶은 점이 있는데요. 엄연하게 편집자를 두고 이 책의 출판을 진행했으면서도 왜 문단의 줄맞춤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지 아주 의문이 듭니다. 문장이 이어져 본문이 되는 오른쪽 맨 끝은 줄맞춤이 전혀 되지 않고 삐뚤삐뚤합니다. 이건 프로그램으로 줄맞춤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은것인지 궁금한데 더욱이 2쇄를 찍을 동안 수정도 전혀 하지 않은 점에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이런식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과 관련된 평가에 대해 “오늘날 세계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권위를 제공하는 것을 주요한 역할로 삼는 지식인으로 가득차 있다”고 언급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지식을 상품화화하면서도 일면에는 권위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뜻을 갖고 있는 변형된 지식인들에 대해 일종의 비판적 메시지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장과 2장은 이런 지식인들을 쥘리앙 방당의 글을 통해서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방다의 그 과격한 지식인 비판을 우리 모두가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명언적 측면에서는 귀담아 들을만한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이를테면 자기 양심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주장 말이죠.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지식인의 표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쥘리앙 방다의 ‘지식인의 배반’이 필요합니다.다행히도 국내에 역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에드워드 사이드가 방다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들이란 화형에 처해지거나 추방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다”는 꽤 어려운 도덕적 양심을 말합니다.

사실 전통적으로 지식인들은 엄밀한 권력과 거리를 두고 심하면 권력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물론 권력과 밀착한 지식인들도 분명 있어왔으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 망명을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지금 막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슈테판 츠바이크입니다. 3장은 바로 그 점에서 아도르노를 통해 망명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지식인의 책무를 잊지 않았던 한 인간의 행로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아도르노와 관련된 사이드의 몇줄 평가라면 아마도 “극단적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지식인의 행동이 엄청난 가치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집단 투쟁에 대한 충성심이 지식인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거나 지식인의 사명을 축소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점은 민족과 국가의 생존이 직결된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당위성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죠. 물론 3장의 경우에 다소 달갑지 않은 키신저의 사례가 나옵니다만 결국은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는 망명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꼭 그 망명으로 인한 결과가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이드는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식인들이 스스로 귀중하게 여겨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마도 사이드는 밝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뒤이어 4장은 냉전시기 이후부터 첨예하게 등장한 전문화와 전문가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세계는 전문화 내지는 전문화의 압력에 이르렀는데요. 이들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에 봉사함으로서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펼쳐냈고, 전문성으로 통제된 고립된 시장이라는 측면의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소개된 노엄 촘스키의 일례는 꽤 의미심장합니다. 사이드는 중동과 관련된 촘스키의 여러 저작이 다른 전문가들보다 논리적이고 의미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에 있는 정치외교 전문가들이 촘스키와 이 분야에 대해 같이 말을 섞는 것을 피해왔으며, 과연 촘스키가 그러한 ‘전문 자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해 왔다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아주 명백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아닌 자들은 말을 하지 말아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을 놀리지 말아라 바로 이러한 상황 말입니다. 의료계라든지 원자력 산업을 비롯해서 그 전문가들의 시장은 여러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5장에서 사이드가 밝히고 있듯이, 지식인들이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적 자유’란 시민 모두가 할말을 해야하고 기득권이 전문가 집단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사실상 과두제로 바꾸려 하는 의도를 지식인이 이를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꼭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죠.

특히 5장에서는 “지식인의 행위에서 가장 보기 흉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회의 악행에 대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를 등한시하는 일로 반대로 토크빌의 사례를 통해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의무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4장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 운동을 벌이고 있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며, 지식인들이 자신의 국가와 집단을 더 우선시하며 가치전도를 무분별하게 해댄다면 그것이 과연 그 국가와 집단에 이로운 일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냉전 시기의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벌여졌던 인식적 배경 혹은 서사적 맥락을 인용하며 분석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언제든 다시 정립할 수 있다는 식의 하위개념으로 두는 논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사실상 그러한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아주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언급한 전문화 내지는 전문가의 대두에 대해 몇가지 언급을 했습니다만 오늘날의 학문과 산업 혹은 지식과 전문화의 경계가 이제는 확연히 구별이 되지 않을만큼 모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면밀한 계몽주의적 접근에 기반한 지식인들의 도덕적 책무가 물론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과연 온전히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확실한 예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것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그것이 이상주의라는 덧칠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사회의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필요해보입니다. 시장에 정치는 필요없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의 시기에도 그나마 할말을 하는 지식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드가 언급한 다른 어떤 단어들 보다도 제게는 이 ‘민주주의적 자유’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대중적 요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지식인은 그러한 집단주의에 맞서 할말을 해야 하며, 이에 따르는 사적인 손실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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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스커넥트 -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터넷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로버트 맥체스니 지음, 전규찬 옮김 / 삼천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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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로버트 W. 맥체스니 (혹은 맥케즈니)는 위스콘신 대학의 교수를 거쳐 현재 일리노이 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요한 전공 분야는 미디어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인터넷 시대의 민주주의의 행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인터넷 자유’를 외치는 미국의 언론 개혁 단체인 ‘프리프레스’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이 글은 지난 2013년 ‘Digital Disconnec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하반기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맥체스니는 ‘자본주의 현실과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큰 틀의 주제로 삼아 현재 미국의 중요한 인터넷 사업자들과 넷 관련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적 지위에 올라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비롯한 ‘인터넷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이 책을 통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더 진행될 경우엔 미국 사회가 파시즘으로 이행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총 7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책 전체의 분량은 무시못할 정도로 느껴지기도 한데요. 다만, 번역의 상태도 매우 좋고 글 전체의 논리적 전개과정과 근거들이 매우 명확해서 일독을 하는 내내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사실 월드와이드웹으로 대표되는 초기 인터넷 시기에서 급격한 성장세를 겪게되는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오늘날에는 이 웹이 상업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루고, 규모의 면에서도 굉장한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목도하게 되는 많은 전문가들은 이 인터넷의 발전과 민주주의가 과연 어떠한 현실에 놓이게 될지에 대해 적지않은 예측을 보여 왔습니다. 여기에 재런 러니어와 레베카 매키넌, 조너선 지트레인과 같은 학자들은 앞으로의 인터넷 시대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점을 그들 자신의 글에서 피력한 바도 있습니다. 과거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최근의 중동의 민주화 과정에서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인터넷 망이 많은 이들이 직접적인 민주주의 운동을 실천하는데 꽤 유용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역시 넷 상에서의 집단지성의 출현이 엘리트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군중 정치를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들 스스로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겨왔습니다만, 최근에 읽었던 여러 글들을 통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 제법 녹록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그동안 저자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동격이라는 거짓된 믿음이 내면화”되어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왔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쯤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해야된다는 얼토당토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같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제거하고 좀더 인간주의적 환경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으나, 우리의 좀 더 면밀한 현실은 모두에게 마땅히 열린 공간이자 시민에게 공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인터넷 현실이 급격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화에 직면해 그러한 윤리적 전망을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용은 이 책의 4장과 5장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특히 5장은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들은 오픈 소스와 그런 매개들을 바탕으로 기업을 확장시켜왔고, 자신들의 기업 운영이 시장의 표준화가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들을 기울여 왔는데요. 특히 광범위한 특허권에 대한 유지와 정치권에 막대한 로비들을 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앞선 이들과 비슷하게도 현재 미국의 ISP기업들도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각 지역 고유의 인터넷 사업자들로 경쟁시키고자 하는 의회의 노력이 매번 무산되었고, 해당 요금제의 꽤 의심스러운 분화를 반대편의 기업도 경쟁적으로 베끼게 됨으로서 그러한 비용 추가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되어왔다고 저자는 여러 근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At&T의 사례가 이와 동일합니다.

또한, 구글과 비롯한 인터넷 공룡 기업들이 수많은 개인들의 누적된 데이터를 축적 및 보유함으로서 전세계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사실상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정부가 테러의 위협이라는 명목으로 개인들이 만들어놓은 막대한 데이터에 접근하려고 했고, 이것에 굴복한 구글의 사례를 맥체스니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콘텐츠는 더이상 왕이 아니나. 중요한 건 이용자들에 대한 정보이다”라고 이코노미스트는 현재의 인터넷 현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4월 미국 연방하원이 인터넷 트래픽 정보를 정부와 몇몇 회사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이른바 사이버정보공유보호법(CISPA)은 해당 기업의 사법적 면책의 근거까지 되는 매우 의심스러운 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일반적인 넷기업의 중요 부품을 공급하는 퀄컴과 브로드컴의 독점 상황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현실인데요. 저자는 이에 “많은 경제학 이론대로라면, 이런 독점업체들은 공기업 형태로 운영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남용을 막기 위해선 강력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경제학 교리도 넘어서는 이들 거대 기업들의 사적 이익추구는 이미 그 선을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5장의 내용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군사와 디지털 복합체가 사업적으로 제휴하고 있는 상황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미국내의 군사 기업들이 비전시 상황이나 전지상황을 가릴것 없이 정부로부터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전시 상황에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이를 더 수월히 만들어주는 디지털 기업들과 만나 더 고도화되고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국가 안보와 군사비 증대 및 군사력의 현대화와 맞물려 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주의가 어떤식으로 어려운 현실에 직면했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ISP 카르텔과 함께 군산복합체와 디지털 기업의 카르텔이라 판단할 수 있으며, 이들의 손에 수많은 시민들의 안전과 자유가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민주적 지배 구조에 관한 이해할만한 수준의 냉소주의가 팽배하다”고 저자는 일침하면서, “자유시장 자체가 무오류에 근접한 가치가 아님에도”, “탐욕이 도덕적 행위를 가로막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뭔가 과장된 어조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숙고해보면 이것이 그냥 허튼 소리라고 치부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인터넷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아킬레스 건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기존의 모든 이해 방식을 은밀하게 위반하는 것으로부터 돈이 나오는 것”인데,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7장은 인터넷에 의한 이런 놀랄만한 상황을 경고하고 제어하기 위해서는 언론 고유의 저널리즘 회복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언급합니다. 여기 3장에서 “언론이 모든 사람이 정치와 선거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이른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해줘야 하며”, “나날이 미디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루퍼트 머독과 같은 현상이 결코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베카 매키넌을 통한 많은 인용과 브루스 슈나이어의 언급은 저자가 얼마나 현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지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억만장자나 기업 대표 혹은 신자유주의 주창자들의 배후를 뒤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국가에서 조차 상층부를 차지한 채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사항이다”라는 분석 또한 시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인 사적 이익 추구의 희생양이 되어 왔는지 잘 보여준다고 봐야겠죠. 나날이 인터넷 세계가 확장되고 있는 이 시점이 자본주의가 맹렬하게 침투하면서 그 미래가 암울하지만, 저자가 꾸준하게 외친바대로 인터넷과 자본주의 사이에 정치경젝학적인 가치를 회복시키고 들이댐으로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몰론 이 부분과 관련한 많은 시민들의 차분한 숙고는 매우 시급해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 정확한 판단을 해야만 할 시기가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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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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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칠레 출신의 정치학자인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공저로 나온 이 ‘포퓰리즘’은 최근까지 나온 포퓰리즘, 즉 대중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책들 가운데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논저라 불릴만합니다. 특히 앞의 카스 무데는 극우 운동과 극단주의 및 포퓰리즘과 관련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연구자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 개인의 이름값이 책 전체를 보장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포퓰리즘을 주제로 한 글들 중에서는 이에 관한 최근의 세계적 경향과 일목요연한 인식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Populism : A Very Short Introduction’ 이며,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꽤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9년 8월 12일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 논의에 앞서 이 책에 인용되었던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먼저 동의하기 힘들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필리핀 조지프 에스트라다, 남한의 노무현 같은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들’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는 것과 관련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식으로 인용한 것은 심각한 인식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변호사로서 일반적인 생활인으로 살다가 인생의 중반 이후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정치인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 시절의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를 포퓰리스트로 규정한 것은 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사회 운동 단계를 넘지 못하고 단명한 포퓰리즘의 완벽한 예다”는 이 부분 역시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마누엘 카스텔이나 필립 페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이 그들만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정보와 경제 행위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실망스러운 대처와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모두 면책된 결과는 미국이 엄격한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많은 제도와 토대를 비웃는 상황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일종의 자발적 시민운동을 포퓰리즘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럼 다시 논의에 들어와서, 이 책은 총 6장의 주제로 현재 전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포퓰리즘적 현상과 이론적 배경을 꽤 세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포퓰리즘 (다른 말로 대중주의)은 “대체로 민중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고 그 반대에 위치한 것을 소위 엘리트주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엘리트주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같은 이들이 ‘민중의 어리석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자체의 가장 큰 위협을 중우정치 내지는 군중정치로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민주주의 내부에 도래하고 있는 표면적인 위협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로 인해 발생한 요소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기도 합니다. “부정직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기득권들”에 반대해 민중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포퓰리즘은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언급한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이 거의 한몸과 같은 상황인 것을 우선 밝혀두고 싶습니다.

유럽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페루 등의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이미 엘리트에 준하거나 부유한 기득권에 속하면서도 기존의 엘리트 기득권과 거리를 두면서 오직 자신들만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선동주의적 정치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총리를 역임했던 베를루스코니와 현재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해악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옹호했던 다원주의에 심각하게 반한다는 것이며, 더불어 양극단주의와 매우 쉽게 결합된다는 점에서 다수의 많은 학자들이 포퓰리즘 자체를 일회성이거나 단순한 정치적 흐름으로 보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만 하는 증거라고 여겨집니다. 즉, 이 글의 4장에서 소개되는 이 ‘카리스마적 스트롱맨’이 포퓰리즘 정치인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으며, 대체로 이러한 포퓰리스트들이 “모두 절대 권력자로 여길 수 있고, 따라서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점이 강조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관례적 입장에서 포퓰리즘 자체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위험이라는 것에 간접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점도 어떤식으로 포퓰리즘이 발현되던 간에 끝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보다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체로 수긍되기도 하였습니다만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나 결국 민주주의를 끝장낼 수도 있는 위험성은 바로 과거에 타생한 파시즘과 다를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파시즘 역시 ‘선동하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출현이 매개물이 되는 것과 같이 이 포퓰리즘도 역시 거의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곳의 저자들은 포퓰리즘의 양면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엘리트들이 진짜 민중의 일에 안중에도 없다”는 점과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정치적 선택지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는 판단 등으로 이런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만한 것이 있다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고 왜곡된 기득권층의 행위를 견제하게 하는 동인을 유인해 낸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자체가 반지성주의와 결함해 쉽게 극단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앞선 긍정적인 요인도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민주주의의 축소에 관련한 최선의 해결책은 시민들의 경쟁과 참여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는 열린 토론과 적극적 의사의 개진일 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주창했던 것으로 이외에 현실적으로 마땅한 해결책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즉, 5장 말미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충분히 강해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쇠퇴 과정을 촉발할 수 있을것이다”라는 경고는 그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전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대두하는 시기에는 얼마만큼 기존의 정치 권력이 대의에 충실하고 시민들을 기만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고 봐야겠죠. 나날이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금권정치에 매몰되거나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과두제를 방치하게 된다면 포퓰리즘의 독이 우리의 민주 정치를 끝장낼 시기는 그만큼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이 포퓰리즘이 앞선 나치즘과 더불어 매우 사악하고 광범위한 정치 자체에서 크나큰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정치와 시스템을 아무런 근거없이 비난하는 선동 정치인들을 경계하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머릿속에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지난 전정권의 부정으로 인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지금의 정부가 최소한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권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선동하는 정치가는 민중들에게 말도 안되는 직접적인 반란을 획책하지,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키게 위해 힘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말했고, 그것을 수락한 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명확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의 사족으로 번역가인 이재만 선생님께 한가지 아쉬운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분명 원문에서는 우리나라를 South Korea로 표기되어 있었겠지만, 글 전체에서 따로 북한이 언급되지도 않는데, 우리 국명을 ‘남한’으로 표기한 것은 뭐랄까 아쉽다고 해야할까요. 한국이라고 표기해도 충분했을 것을 굳이 뉘앙스가 이상한 남한으로 했어야 했을지 이에대한 약간의 의문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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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독점에 반대한다
미셸 볼드린, 데이비드 K. 러바인 지음, 김평수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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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두 공저자인 미셸 볼드린과 데이비드 K. 러바인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에서 특별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여기서 특별 교수라는 직함이 석좌 교수라는 것과 유사한 직위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특별 교수 (Distinguished Professor)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구글링을 통해서도 잘 나오지는 않지만, 이 특별교수는 해당 학문 분야의 탁월한 업적이 있는 사람을 학교 측에서 초빙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전자인 석좌교수의 성격에도 일정부분 유사한 점이 있을 수도 있겠죠. 우선 앞의 미셸 볼드린은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로 특히 기술 진보와 지적 재산권 뷴야의 전문가이고, 뒤이어 데이비드 K. 러바인 혹은 데이비드 K. 레빈도 마찬가지로 경제학, 특히 실증 경제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갖고 있는 학자입니다. 원제는 ‘Against Intellectual Monopoly’ 이며, 지난 2008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그로부터 5년뒤인 2013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약간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번역된 책 제목이 뜻하는 바를 먼저 밝혀둬야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 독점이란, 지적 재산권과 특허권 등을 비롯한 독점 지식에 관한 분야입니다. 이에 두 공저자는 “지적 재산권이 만인에게 혜택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명제아래 그동안 영국 산업혁명 시대부터 현재까지 뿌리를 내려온 독점적 지식이 세계의 혁신에 이바지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시작으로 광범위한 비판적 논의를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10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의 서문을 비롯해 10장의 최종 결론까지 대부분의 내용이 온전하게 “앞으로 지식 독점은 다수의 공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재검토 되어야 한다”면서, 이에 관한 저자들의 아주 면밀한 토론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창작물과 지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된 특허와 관련된 소위 경제적 권리에 주목하고 인정하는 의견이 아마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두 저자의 의견 가운데 특히 “현재의 저작권법은 보장 기간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에 매우 동의하고, 경제학의 기본 개념인 경쟁과 혁신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이런 지식 독점이 제한이 되어왔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과 5장은 특히 미국과 유럽의 여러 사례를 인용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데요. 과거 특허 괴물이었던 램버스 사태에 대한 설명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처럼 견고한 특허 장벽이 신규 사업자들의 시장 진입을 막아왔으며, 일부 시장 지배적 위치에 있는 대기업들의 특허 풀 patent pools 역시 기존의 참여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기능을 해왔다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지적 재산 비효율성이라는 해악 때문에 특허권이 우리의 경제적 번영을 위협한다”고 평가하기에 이릅니다. 뒤이어 9장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제약 회사들이 벌이고 있는 특허권 문제와 약품 독점과 관련하여 “대형 제약회사들은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의 약품 가격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프리카를 에이즈 치료제 유통에서 제외시켜 인위적 희소성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들은 비판하며 이것은 즉, 아프리카에 이들 약을 싸게 공급하게 된다면, 미국과 유럽 소비자들(엄밀히 말하면 환자들)을 차별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아예 아프리카에는 이 치료제를 팔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순차적 내용에 반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9장에서는 ‘특허없는 화학물질’이라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까지 곁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특허가 없는 약품’도 정당한 인식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제약회사들의 약품 특허권과 이것의 판매권에 대한 최대한의 보장을 약속하고 있어 유독 선진국 가운데서도 국민들의 의료 안전망이 계속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아이디어 창작권과 비롯한 지적 재산권과 관련하여 두 저자는 출판계와 관련한 현실을 꼬집고 있었는데요. 작고한 소설가의 저작권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이것을 읽는 다른 작가들의 2차 창작 내지는 발전적으로 모방된 작품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이에 대한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7장에서는 “결국, 우리가 저작권과 특허 그리고 그것이 수반하는 자유의 박탈이란 상황에 도달해야만 하고, 이것이 아주 흔한 일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물론 저도 이것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작권과 특허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분명 필요해 보입니다. 앞선 2장과 3장에서는 마이크로 소프트를 비롯한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과 ‘리눅스 프로그램’의 상관관계와 특별한 장치인 ‘오픈 소스’를 설명하며, 공개된 프로그램과 공개된 소스를 바탕으로 개발된 광범위한 프로그램에 과연 특허권을 부여할 만한가에 대해 독자들에게 의구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과 관련해서도 해리포터의 후속편을 쓸 권리는 분명 작가인 그녀에게 전적인 권한이 있지만, 이미 충분히 이 작품으로 인한 보상을 다방면에서 부여받았다고 전제하고 이제는 작가들이 작품에 대한 적당한 최종 보수를 일시불로 받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2차 창작과 모방을 사실상 허용하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제안합니다. 물론 시장에서의 독점을 찬양한 조지프 슘페터를 언급하고 있긴 합니다만 개인의 창작물에 대한 ‘적당한 보상’을 책정하는 기준이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논란이 있어 보입니다.

끝으로 흔히 산업 혁명 이후의 시기를 거쳐 경제적 합리주의가 요동치고 그에 따른 ‘경제적 인간’이 칭송 받으면서 세계의 혁신과 번영은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장 동력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는 혁신과 관련하여 “혁신자는 기밀 유지를 통한 사적 지대추구와 특허를 통한 공적 지대 추구 사이의 실제적 균형과 마주하게 된다 (혹은 마주하게 될 것이다)”는 예측은 과연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의 시장경제가 이미 개인의 이익 창출에 대해 어떠한 한계를 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사적 이익이 과연 공적 이익과 수렴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 전망이 암울해보입니다. 저는 현재의 시스템이 지적 재산과 특허를 포함한 개인과 기업의 창작권에 대한 재검토와 철회가 있지 않는 이상 이런 기조는 변하기 힘들 것이라 예측하는데요. 물론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또한 그 필요성도 입증될 만합니다. 아마도 이후의 결과물과 관련해서는 두 공저자들과 다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치열한 토론과 의견 교환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과는 약간 논외로 저의 소감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꽤 최신의 세계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고,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많은 사례들이 해당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상황 인지를 위해 꽤 훌륭한 글이라 여겨졌습니다. 굳이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법조인과 동일 분야의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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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거대한 재균형
마이클 페티스 지음, 김성수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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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마이클 페티스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출신으로 투자은행 베어 스턴스를 거쳐 현재 베이징 대학교의 금융 및 경제학 교수이자 카네기 재단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멕시코, 마케도니아, 한국을 비롯한 각 정부에 재정 정책과 관련한 조언을 해왔다는 점인데요. 글 본문에도 우리나라가 수차례 언급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처음 출간되어, 국내에도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원제는 ‘The Great Rebalancing’ 입니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인데요.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과 관련된 흥미로운 해석을 책 전반에 담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이 중요한 글을 국내의 독자들이 일독하지 못한다고 하니 제법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총 9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마지막 9장은 세계 금융 위기가 이대로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담고 있어 주요 논의는 1장부터 8장에 이르는 분량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은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가 저자의 판단으로는 아직 이어지고 있다는 상황 판단과, 2장과 3장에서는 흑자국에 의한 무역 개입으로 봐도 무방한 통화 개입과 금리를 비롯한 저축 문제를 다루고 있고, 4장과 5장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6장은 앞에서 논의된 내용과 연장선 상에서 현재 독일이 주도하고 있는 유로화 경제권과 그 반대의 입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에스파냐와 그리스와 같은 적자국들의 분석, 7장은 잠정적으로 무역 불균형은 부채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입장과 8장은 종래의 의견과는 달리 미국의 달러화가 기축 통화인 상황이 마냥 미국에게 유리하거나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008년 미국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무분별한 수익을 위한 증권화 문제 뿐만 아니라 중국이 수년간 달성해 온 무역 흑자를 통해 구축된 중국 내의 과도한 저축이 미국으로 향하게 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많은 미국 내의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중국인들의 거대한 저축 때문에 미국 경제가 초토화 되었다고 보는 것에 마냥 동의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런 중국계 자금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무분별한 신용 생활을 한 것을 꼬집지 않은 것은 저자의 판단 미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글의 8장에서 “그 나라의 저축이 늘면 그 초과분은 틀림없이 나라 밖으로 수출된다”는 분석은 충분히 설득적이긴 합니다. 많은 중국인들과 독일인들이 미국의 국내 저축률이 그처럼 빈약한 것에는 많은 미국인들의 방만한 소비 생활을 손꼽히는 이유로 들고 있지만, 제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국내 소비, 즉 가계 소비를 지속적으로 억제해 온 중국과 독일의 사례가 결코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2010년 기준 중국의 가계 소비가 겨우 34% 수준에 이른 것은 문제가 될 만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당국과 학자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중국을 향해 요구해 온 위안화 절상과 관련하여 “위안화는 2005년 7월 이후 24%나 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역 불균형이 계속되고 있음에 비추어 통화는 분명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중국 당국이 태도가 급변하여 위안화 절상에 나선다 할지라도 ‘인민폐의 절상-보조금을 더 많이 지급-가계에서 이러한 보조금을 충당-중국의 무역 흑자는 오히려 더 증가’라는 단계별 이동으로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한 적자국 국민들에 대해 “게으르고 소비 일변도에 경제 관념에 있어 방만하기까지 하다”고 하는 도덕적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도덕적 평가는 사실을 오도하는 것으로 “매우 큰 규모의 지속적인 흑자와 적자는 거의 틀림없이 어느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의 정책이 왜곡된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 책에 소개된 독일과 중국의 정책은 꽤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하여 더욱 지속적인 무역 흑자를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국내 저축 자산을 미국에 투입하고 미국이 더욱 부채의 늪에 빠지게 한다던지, 독일은 에스파냐와 그리스에 방만한 소비 생활을 그만두라고 하면서도 이들 두 나라의 채권을 수집하고 결국 같은 유럽 국가들을 자국의 수출 시장화로 만든 것과 같은 사례는 흑자국에도 분명 왜곡된 정책이 관여한 것입니다. 많은 흑자국들이 유형과 무형으로 자신들의 가계 소비를 억제한 것은 비판받을 만하며,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 중국 그리고 브라질이 달러화 대 자국 통화를 지속적으로 인하시켜 온 것은 무역 거래에 있어서 미국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그와 같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만약 위안화와의 환율이 중국의 수출과 수입에 정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중국이 절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정확하고 분명한 결론일 수는 없다”는 점은 중국의 대규모 대미 무역 흑자는 환율의 문제라기 보다는 중국 당국이 암암리에 지급하는 수출 보조금과 가계 소비를 억제하는 정책 등이 더 중요한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통화 가치의 변화란 오직 다양한 부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무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은 그래서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자인 마이클 페티스가 오늘날 세계 무역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세계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저축은 글로벌 위기를 불러온 투기성 자본의 흐름과 무역 불균형의 핵심이다”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여기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저축의 수출’이 무역 적자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미국은 쌍둥이 적자를 자의반 타의반 감내하면서 세계 경제를 지탱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거의 미국적 특수 상황과 오늘날 중국의 경제적 대두에 따라 저자는 이런 양국의 무역 전쟁에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중요한 이유들로 첫째, 무역 전쟁은 합의 타결에 비해 세계적 성장을 더 늦춰놓는다는 점과 둘째로, 미국-중국 관계는 경제 문제를 뛰어넘어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중국은 단순히 슬리퍼나 라이터, 장난감을 만들어 미국에 파는 나라가 아님”에도 중국과 관련된 자신들의 국채문제, 중국을 대신할 나라는 얼마든지 시기에 따라 등장할 것이며, 미국 국민들의 신용 생활을 먼저 제어 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임을 망각하고 또한 가장 시급한 미국 국내의 사회 안전망 확보에 지금까지 손놓고 있었던 것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반대의 측면으로 그동안 독일이 가계 소비를 억제하고 통화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 인프라와 사회 안전방 구축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제반 수치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책의 일독을 마친 후에 기존의 세계 금융 위기와 관련해 꽤 훌륭한 분석을 시도했던 라구람 라잔이나 존 아이켄베리와 견주어도 저자의 이해와 식견이 부족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학자들이 단순한 도덕론적 입장에 빠져 무역 문제를 이분법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비판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앞서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을 더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모쪼록 출판사 측에서 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급히 재간행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페티스의 이 책을 알게 해주신 제 북플 친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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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8-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