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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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롯주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난 프랑스아즈 사강은 부르주아 부모의 막내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도피네에서 전쟁을 피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사강의 부계 쪽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 혈통입니다. 그리고 필명인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princess de Sagan 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슬픔이여 안녕'으로 당시 프랑스 문단으로부터 몇 세기 만에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이후 수많은 작품을 내놓으며 전세계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녀의 사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몇 가지 논란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에 코카인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고, 스포츠카를 고속으로 운전하다 사고에 연루되어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여겼던 사강은 2000년대 들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고, 2004년 옹플뢰르에서 69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사강의 죽음과 관련해. "그녀의 죽음으로 프랑스의 문학계의 가장 훌륭하고 열정적인 작가 중 한 명을 잃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거대한 명성을 안겨다 준 '슬픔이여 안녕' 이후, 두 번째 작품이 된 '어떤 미소'는 원제, 'UN Certain Sourire'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2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2년에 재간행 된 개정판입니다.

사강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한 '어떤 미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첫 작품보다는 어느 정도 무난한 장편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 시대조차 일부 국가들에서는 결혼한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은 일견 법적 혹은 문화적으로 금기시된다는 부분에서 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입장에서 이 소설이 출간된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 작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사강의 이 장편은 사랑을 겪는 평범한 젊은 여성의 심리와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고, 특히나 여성들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와 그것을 대하는 태도 등을 남자들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건전한 관계'에 대해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를 고심해 볼 수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주인공 도미니크는 2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누군가와 평범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인 사강이 여성의 첫 육체적 관계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듯, 첫 관계와 사랑의 현실적 변곡점을 도미니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이 글에서 공격적이 아닌 꽤 완곡하게 묘사된 유부남 자체에 대한 설정은 주인공인 젊은 여성에게 보다 매력적인 장치로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자친구의 훤칠한 외모와 육체적인 매력과는 달리, 현실적인 부분에 부합되는 경제적 능력은 있어 보이지만 그저 '슬픈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뤽과의 첫 만남과 그 전개 과정은 어설픈 편이고, 도입에서 관계를 나누는 세 사람의 결말이 대략 예상이 되는 점은 서사의 긴장감을 약화 시키기도 하는데요. 다만, 뤽의 아내인 프랑스아즈의 인물 조성은 꽤나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측하건대, 자신을 포함해 두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할 것 같았으나 그녀의 예상 못한 성품과 인간됨은 작가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 이 인물 자체의 애정으로도 읽힙니다. 2부 중간 부분에 뤽이 자신의 아내에 대한 감정, 그녀를 판단하는 여러 수식어들은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 않고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점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결말을 독자들이 어느 정도 암시하게 되는 설정이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본질적으로 사강의 이 작품은 여성이 겪게 되는 '진정한 첫사랑'의 체험을 독자들도 이미 스스로도 겪어 본 지난 날의 일들을 얼마간 곱씹어 보게 만듭니다. 물론 남자의 진정한 사랑과 여자의 처음 사랑은 그 결이 상이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도미니크 자신의 여러 대화와 독백 등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의 고백은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도달된 점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개인사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사강은 역설적이게도 유부남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진정한 사랑에 있어 윤리적 문제를 다소 차치하고, 사랑으로 인한 여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일관되게 묘사하는 부분은 그것 자체로 문학적인 매력이 가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강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특별한 여주인공이기도 한 도미니크의 존재는 작품 전반을 육체적인 성애화로 추락시키지 않고, 20대에 접어든 보통 여대생의 사랑에 대해, 우리 역시 이 작품으로 인해, 각자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게 하여, "그때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는가"를 스스로 반추해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가 젊은 시절 느끼고 체험했던 각자의 '순결한 사랑'에 대해서 말입니다.

젊은 시절의 서툰 열정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베르트랑과 세월을 겪고 여자에 대해 많은 경험을 한 뤽은 도미니크에게 있어, 각자 별개의 관계로 종속됩니다. 단순히 양자의 관계가 현실적인 문제로 이뤄질 수 없는 한계로 읽히기 보다는 도미니크의 입장에서 사랑의 존재 여부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를테면 여자에게 있어 '사랑의 의미'는 그저 육체적인 관계를 위한 자신 스스로에 대한 납득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자, 순간 순간을 함께하고 싶고, 나만의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초반에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한 뤽에 대한 '감정적인 면죄부'가 이 사랑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기도 하죠. 단지 사회적 시선으로만 봤을 때, 유부남과 여대생의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일련의 과정들이 역겨울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한 가운데에 있는 도미니크에게 있어서, 뤽의 아내 프랑스아즈의 선의와 자신을 향한 따뜻한 관심까지 거스르게 만든,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 그 자체가 때론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시점에서 사강이 여러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안락함'에 있어 뤽이 제공할 수 있는 그러한 경제적 가치도 쉽게 치부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젊은 여자가 보다 어른인 남자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락함'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 자체는 이미 현실에서도 관계에 있충분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의 안락함을 관계를 맺는 남자에게 기대하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사강의 고백은 이러한 맥락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은 2부 중후반부터 3부까지, 각 등장 인물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대사와 감정선이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도미니크의 뤽과의 예정된 결말에 대해 겪는 감정적인 변화와 스스로를 성찰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지난날의 서툰 편린들을 사뭇 떠올리게 합니다. 유부남의 마력에 빠진 도미니크의 모습 자체는 자신을 나락까지 끌고 가는 모진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한 인간의 순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작품에서 사강이 도미니크를 통해 거듭 언급하는대로 사랑이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패악을 겪어본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사랑이 매번 아름다울 수 없다는 현실의 대면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설사 이런 모든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으로 완고한 사람에게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이 젊은 남자의 말끔히 면도된 목덜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 나로 하여금 저항하지 않고, 생선처럼 차갑고 미끌거리는 사소한 생각들을 지닌 채 늘 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

베르트랑은 내 첫 애인이었다, 내가 내 몸의 고유한 냄새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몸 위에서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극도로 주의 깊게 대했고, 대단한 선의를 지녔으며, 그 선의 속에는 침착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게임은 베르트랑에 대한 충분히 견고한 감정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해 당혹스럽고 신랄한 감정을 갖게 할 터였다.

나는 그들의 잡담이, 남자애, 여자애 사이의 이야기들이, 소위 사랑에 빠진 어린애의 장난들이, 그들의 드라마들이 역겨웠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와 키스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베르트랑은 키스할 때 매우 빨리 지쳐버렸다.

왠지 모르지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생처음으로 내 어린 시절과, 가족의 안전함과 결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벌써부터 아비뇽이 싫어졌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베르트랑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고, 프랑스아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그와 같은 음색의 목소리, 한순간 아마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고, 나는 우리가 이 조그만 모험을 잘 치러냈다고, 우리는 정말로 문명화되고 합리적인 성인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해 일종의 분노와 함께 끔찍이도 굴욕적인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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