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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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몬머스셔의 레이븐스크로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틀란드 러셀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논리학자 및 존경 받는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철학,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문적인 접근에서의 러셀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믿는 바를 실천했던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상당히 다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역시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겪기도 했고 전쟁 수행에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집중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평화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지식인의 의무를 알고 있던 러셀은 공공선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을 반대했고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공산주의 역시 그에겐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반대로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자각은 무엇보다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는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첨예화 되어 가던 시기에 BBC를 비롯한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향한 강의와 견고한 시민 사회를 위한 지성적인 기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정치권조차도 러셀의 이런 노력을 인정했고, 그의 왕성한 대외 활동에서 이를 지켜보는 언론인들조차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이미 수차례 러셀을 존경한다고 밝힌 노엄 촘스키는 러셀의 이런 치열한 삶을 정중히 인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애 말년까지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정력적인 삶을 이어간 러셀은 1970년 2월 2일, 웨일스의 한적한 지방인 펜린듀드레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wer'로 193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번역가 안정효 선생에 의해 1988년 1월 처음 번역됩니다.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03년 8월에 펴낸 신판입니다. 자리를 빌어 이 책과 관련된 짤막한 개인적 소회를 남기고 싶은데요. 러셀의 이 책은 제가 지난 2008년 5월에 신촌에 있는 모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 책을 비로소 찾게 되었는데요. 때문에 이제야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마련일 겁니다. 더욱이 이 권력이라는 존재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포함한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권력자의 명암'이라는 수식어처럼 러셀 역시 '고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의 속성'에 대해, 그의 특유의 현란한 수사를 통해, 거의 통사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는데요. 글의 후반부인 16장에서 러셀이 지나가듯 밝히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권력의 양상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제러미 벤담의 언급대로 인간의 무리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한 편이다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권력의 존재 유무는 바로 '통제를 통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러셀에 의해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은 유럽의 사료가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14세기 이전, 유럽의 전제 정치 하에 국가 사회적으로 양대 권력이었던 왕권과 가톨릭에 의한 소위 신권은 유럽 사회 전반을 끌고 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짐작하고 있듯, 특히 가톨릭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 대부분은 비판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과 황제가 체제의 질서를 위해 서로가 협력하지 않고 몇세기에 걸쳐 대립한 역사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나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교황권에 대한 본질에 있어, 종교에 대한 길드 상업주의의 개입은 꽤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러셀의 강조대로 교황권의 몰락이 촉발되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 이후 교회의 통치는 유럽의 지배력 나날이 잃게 됩니다. 여기에 교황의 스스로 자초한 권력의 이탈은 교황에게도 불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루터 이후에, 전 유럽이 종교 전쟁으로 피바람을 몸소 겪을 수밖에 없던 점을 감안하면 종교가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끝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시도 자체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훌륭한 성인들이 교회에서 나타나 이들이 "무절제한 탐욕과, 방탕과, 사리사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의 탄생과 헌신"은 이러한 교회 권력의 전반적인 몰락을 막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후에 등장하는 '실천적인 도덕'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주장대로 일반적인 도뎍률과 그에 따른 도덕의 함의는 권력을 보다 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저 윤리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말장난 같은 도덕이 아니라, 앞선 '실천적인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는 이 실천적인 도덕의 부재는 과거 교회 권력의 빠른 종언을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간음을 하지 않는 등의 교회의 가르침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도덕 관념의 이행은 아주 예전의 청렴하고 신실한 사제들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던 교회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그런 연유로 '종속은 항상 도덕성에 의해 강화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러한 진술은 꽤나 엄숙한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 도덕 스스로가 과거 말고 현대에 있어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혹은 상업주의적 시대의 태동은 사회에 적지 않은 부유층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콩도르세의 언급대로, "부유층 대부분이 과두제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6장에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과 같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부유층이 아닌 비로소 잉태하기 시작한 그 시기의 부유한 자들의 대두는 역사적으로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한 권력을 갖는 이 시기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본가들의 기저에 깔린 근심은 완벽히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파시즘이 유럽을 강타할 시기에 미국의 포드와 같은 자가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효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구실로 삼아 국가가 다른 모든 것들과 대기업의 위로 올라섰다"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대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여실히 잘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히틀러에 의해 종말을 고한 바이마르의 비극이나, 무솔리니의 철권 통치는 권력을 심각히 오도한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부유층의 대두와 그들이 가졌던 과두제에 대한 동경과 함의는 2차 대전시기의 자본가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인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철저히 민주적인 정부라고 해도 권력의 재분배는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혁명을 배제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회에 용인시키는 소위 다른 형태의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한 가지 비극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고 고백하는데요. 어떤 목적을 위해 가혹한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는 식의 권력의 오만은 그것의 정당성을 답보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을 거듭 강조했던 과거 공리자주의자들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많은 정치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월급과 이익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공의 선 같은 것을 '겉치레 과시'처럼 강조하는 연유의 바탕에는 '현대 정치의 복잡한 양상'이라는 왜곡된 지식인들의 선전 효과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요인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권력의 후퇴에 있어 많은 시민들이 그저 거수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작금의 정치는 참으로 불행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나 정치 권력'이 시민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박해로 이어진다면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러셀이 심히 경고하는 듯한 어조의 다음의 진술인, "광범위하게 얘기하자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몰락한 이유는 다수가 민주주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우세한 힘이 수적으로 다수인 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그 시사하는 바가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기에서 군대가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물음은 다소 논점을 벗어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지향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권력'에 대한 본질을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과거 권력이 초래했던 여러 불행한 사건들과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권력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셀은,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자신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라도 꼭 나쁘지 만은 않다고 믿는 습성이 필요하다"고 12장의 논증 가운데 강조합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이 부와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전쟁 자체가 민족주의와 경제적 이익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대다수의 민주 국가들이 이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민주주의 자체는 그것의 이식과 더불어 체제 안정에 있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정치인들의 인내심과 그에 준하는 시민들의 안정된 삶 또한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논증 하에 글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권력을 길들일 수 있겠는가'에 우리의 민주주의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판단을 옹호할 어떤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다수의 결정에 기꺼이 응해야만 한다"는 제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온순한 시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와 정치의 본질에 끊임없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민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소위 '강한 기질'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인 러셀이 "국가가 스스로 과학이나, 형이상학이나, 도덕의 수호자로 자처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과 시민, 국가와 국가 사이의 서로 간에 공감을 찾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며, 러셀의 논증에서 드러난 민주주의가 갈등과 대립에 다소간 취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러한 갈등 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그 어떤 사상가 보다 국가 간의 전쟁과 그러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정치사회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과거의 숱한 역사에서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쳐간 많은 엘리트 계층이 은폐했던 전쟁의 본질에 대해 그처럼 파고든 지식인은 아마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의 조언들은 현재에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본문 140 페이지에 역자는 모슬렘과 무슬림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기입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히 동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두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20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한가지인 권력에 대한 사랑은 아주 불균형하게 분포되었으며,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따위의 갖가지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의 벼락불에 의해 파괴되는 도시들이 런던과 파리가 아니라 베를린과 로마라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파괴자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인간다움이 남을 수 있겠는가?

상당히 묘한 일이지만 이른바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은 가장 야만적인 집단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진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의식을 지닌 상당한 규모의 계층이 없어야만 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권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납득할 수 없는 벤담 공리주의자는 실질적인 목적에 있어서 똑같은 개념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외적인 권위의 간섭이 없이 개인이 자유롭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일 어느 생활 영역을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때는 만인의 행복이 증가한다.>

기독교의 윤리에 의하면 어떤 국가의 필요성도 어느 사람에게 죄악 행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권한을 정당화활 수는 없다.

개별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잡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하게 권력을 연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 요소일 따름이다.

정부의 구성원들은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관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손에 넣지 못한 까닭은 러시아가 그곳에서는 영국만큼이나 강력했기 때문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 것은 그가 그곳을 방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자유가 부여되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해서 수립된 권리자들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진실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 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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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 참 인간을 행복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드는듯요. 인류역사의 불행의 이유인듯요.

베터라이프 2023-06-23 00:08   좋아요 1 | URL
러셀이 이 글에서 인간이 지배를 하는 쪽과 지배를 당하는 쪽으로 분류할 수 있고, 상당수가 은연중에 지배를 당하는 것을 원한다고 인간을 그리 평가했어요. 권력에 대한 측면도 이와 비슷한데 모순적인 부분과 동시에 자유주의에 반하는 속성을 권력이 역사에서 여럿 드러냈다는 점은 독재 권력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정치의 상반된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라고 읽히는 걸까요. 쓸데없이 주저리 쓰게 되었네요 ^^ 참.. 그레이스님이 쓰신 에르노 관련 글들은 에르노가 생각날때마다 읽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