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 역사, 논리, 정치 레-프리젠테이션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노시내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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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출신의 정치학자인 모니카 브리토 비에이라는 정치 사상사와 정치 규범 이론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을 거쳐 현재는 영국 요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토머스 홉스에 관한 연구로 신진 학자들 가운데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한데요. 이 뿐만 아니라 자연법, 정의론, 헌법론에 관해 활발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같은 공저자인 데이비드 런시먼은 영국 런던 북부 세인트 존스 우드 출신으로 다원주의 이론과 여러 정치학 이론서들을 썼던 정치학자인데요. 그도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고 현재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런시먼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2015년부터 ‘talking politics‘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 프로에 토마스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등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국내에도 그의 두 편의 논저가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견고한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런시먼은 정치 외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발언을 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8년에 원제 ˝ Representation˝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부분은 해당 글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에서 ‘레-프리젠테이션‘이라는 소위 ‘대표 개념‘시리즈로 몇몇 논저의 출판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한데요. 특히, 한나 피트킨의 글이 번역될 예정으로 나와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만간 피트킨의 글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글은 총 3부로 구분되어 결론을 포함한 총 7장의 하위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표의 현대성을 다룬 3부가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 대표 자체가 민주주의와 함께 탄생되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대표와 민주 정치에 대한 연관성을 분석하고자 하는 여러 글들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 대표 개념은 전체적인 민주주의 역사에서 꽤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영국을 비롯한 사회 발전의 역사와 다수 정치의 이행 과정에서 이 대표 자체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다수의 반발과 거부 없이 보호할 수 있겠느냐에 따른 어떤 부산물과 같은 의미로 이미 글의 5장에서 논의됩니다. 이미 현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 형태로 사실상 다원주의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5장에서는 ˝이런 식의 다원주의는 소수 지배의 한 형태이며, 비록 다양한 소수가 교대로 정치 대표자를 압박할 수 있다고 해도, 시민 대다수가 언제든 배제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분석해 냅니다. 물론 이런 대표와 민주주의를 서로 긴밀히 연계시켜 이론화하는 글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자유주의‘ 대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대표 역시 민주주의 이념에 있어 어떤 측면에서는 그 의미 자체를 부정적으로 상충시키는 측면도 분명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고 싶습니다.

1장에서 공저자들이 다루고 있는 대표 개념의 역사에서 토머스 홉스는 대표 자체가 권력의 수단적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그가 밝히는 국가의 개념 또한 수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오늘날 홉스의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상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혁명의 언저리 시기에 거대해진 이 공중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만큼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하던 아니던 간에 대표 자체가 모두를 위해 위임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이 대표의 역사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정한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개념은 18세기 장 자크 루소에 의해 비로소 도출된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는 명목상이면서 관념적인 의미였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여기에 루소는 ˝대표 개념의 발전은 정치적 지배의 인민적 형태와 독재적 형태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를 없애 준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두드러지게 부각했을 뿐˝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하는데요. 루소가 원했던 것처럼 다수의 일반의지가 이 대표에 맞물려 그것이 진정한 인격을 갖추고 모두를 위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진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 대표 개념이 민주주의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믿으려고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직접 민주주의냐 대의제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스스로 실효적인 대표성 확립을 위해선 개인들 간의 이익 충돌의 문제, 사익과 대의와 관련된 인식적 부조화, 시민의식의 결여 등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 어떤 대표의 외형적 제도 확립과 같은 선언적인 내용들만을 강화하려는 것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건국의 아버지들은 개인들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진통 끝에 연방제를 비롯한 다방면의 국가 제한에 동의하게 되는데요. 이들 남성 엘리트들이 주도한 미국 건국의 모습에서도 슘페터는 ˝민주정치가 불가피하게 엘리트 중심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대표제 자체가 엘리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대표 개념의 탄생 자체가 어쩌면 다수의 공중을 무질서와 혼란으로부터 제어하기 위해 탄생한 개념일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시기에도 이러한 의도는 아주 명확했으며, 홉스 시기에도 ‘적절한 재산을 가진 자들‘이 다수를 통치하는 형태의 정치 제도에 대한 이해가 상위 계층에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은 분명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주권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확대된 개념으로 이 대표를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엘리트 정치 역시 민주주의의 주권 개념을 확실히 수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렇게 이론적으로 규명된 정치학 세계의 관념들이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시에 일정 부분 충돌이 일어나며 많은 학문적 차원에서 이론과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의 쇠퇴화가 거의 40여년에 걸쳐 각 사회에서 진행되어 왔고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마땅히 비판하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하지만 반대의 이상한 저항이 있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선 측면에서 장 자크 루소 이전에 존 스튜어트 밀은 ˝노동계급을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의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계급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와 권력 바깥에 있는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이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가 오늘날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지금의 미국 정치는 정당 정치 자체가 이익 단체화 된지 오래되었고 개개의 정치인들이 마이크 앞에서는 정치적 대의와 민주적 선명성을 매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동을 보이게 되는 정치 구조적인 파편화에 이르렀는데요. 그래서 저는 진정한 의미의 대표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1945년 이후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이후 진행된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거의 맹목적인 자본주의 이념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산된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파행에는 제러미 벤담이 이해했던 위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대표에서 기인해 그것이 굳어진 채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요. 샹탈 무페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을 시민들에게 요구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과거 토크빌과 존 듀이의 요구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불행하게도 대표제 민주주의 자체의 흥망성쇠는 시민들과 엘리트 정치 사이에서 권력의 지렛대가 다수의 시민쪽으로 기울여져야만 실행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는 다수의 정치를 중우 정치나 군중 정치로 몰아가는 엘리트화 되어 있는 지식인들의 공격부터 정치는 애초에 우리것이 아니었다는 만성적인 패배감에 젖어 있는 다수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배격하기 보다는 정치의 축소를 되살리기 이전에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충돌없이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욕망 충족에 분명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뭐든지 지나친 형태로 돌출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4장에서 보이는 시민의 생득적 권리와 이익이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두 공저자의 이 논저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표 개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민주주의가 헌법적인 정당성 내에서 발전해야만 하는 것처럼 반대로 정치 전반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사법으로 해결하고 사법이 이에 개입하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인식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인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적 인간이 아니며, 이질적이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들이 전부 그러하듯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홉스는 대표가 권력의 도구임을 확고히 밝혔다. 그는 만일 대표가 ‘권한 부여‘와 ‘책임 감수‘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인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절대적인 복종의 의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벤담은 영국의 기성 정치 지배충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선거권 개혁 - 보통선거, 연례 회의, 비밀 투표 등과 같은 - 을 밀어 붙여야 한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받아들였다

슈미트가 봤을 때 대실수는 다원주의와 거기에 결부된 가치 및 관행은 민주적이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은 비민주적이라고 전제하는 데 있었다. 이 같은 전제와 달리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토록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치적 우유부단과 불안정성이 자유주의의 증상이라고 믿었다

만약 정치 대표자가 피대표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대표가 아니라 그냥 온정적 간섭주의다

대표의 원리 그 자체는 집합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수파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홉스가 국가를 비롯한 몇몇 집단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며, 집합적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표자에 의존해야 할 것으로 본 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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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
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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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도메 다쿠오 (혹은 도마에 다쿠오) 교수는 일본의 명문인 게이오 대학의 경제학부를 마치고 교토대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리츠메이칸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현재 오사카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사카 대학 홈페이지에 가보니 그의 직위가 풀타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교수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그는 일본 내의 여러 경제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토마스 멜서스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고 있는데요. 대학 홈페이지에서 그의 연구를 소개하는 항목을 보니 ‘도덕적 정서와 국가 부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연구‘라는 수식어는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관념에 대해 별반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은 지난 2008년 원제, ˝アダム·スミス―『道德感情論』と『國富論』の世界˝로 일본에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0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으로 널리 유명한 지성인 애덤 스미스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본의 아니게 논란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저는 스미스가 자신이 쓴 주저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몇 편의 서평에서 짧게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스미스를 신자유주의의 교조로 만든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요. 이런 인식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신자유주의자들이 묘사한 애덤 스미스와는 달리 그는 매우 도덕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단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짧은 서문과 함께 크게 두 부분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국부론에 대한 부분만 따로 읽어보실 요량을 갖고 계실텐데요. 개인적으로는 도덕감정론에 대한 논고를 읽고, 이후 자본론에 대한 부분을 차례대로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비판한 ‘중상주의‘에 대한 의미와 왜 중상주의를 비판해야했는지에 대한 정밀한 답을 얻기 위해선 앞선 도덕감정론의 논증이 필요하며, 그가 결론에 이르러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처우에 보인 중상주의적 결정이 어떻게 영국과 신생 독립국에 해가 되었는지를 좀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와 가까웠던 데이비드 흄은 ˝계몽속에 내재된 오만함에 대해 통찰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아마도 데이비드 흄에 의해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스미스는 흄과는 약간 달리,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요. 바로 1부 ‘도덕 감정론‘에서 이러한 인식의 궤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스미스는 이 도덕감정론을 통해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선연한 목적이 인간 본연의 조화로운 질서라는 측면에서 당시 많은 지성인들에 의해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자연법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변질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특권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초기에 법의 필요성이 요구된 연유가 하위 계층에 의해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홉스를 거쳐서 우리의 사회가 특별한 계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자연상태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염두해 둔 것이겠죠. 어차피 그것이 타인을 위한 선의이든, 인간 본연의 도덕적 관념이든 간에 스미스처럼 자애심에 의지하지 않는 작게나마 서로가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필요성이 얼핏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사회 전체가 거대한 선의로 가득차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지그문트 바우만 식의 유토피아를 우선하는 것은 중요하겠습니다만 아마도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에서 적절한 단계의 사회 질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1부에서 진술되는 ˝이기심과 자애심은 의무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통상적으로 제어된다˝고 스미스는 그와 같이 믿었습니다. 즉, 인간이 구성한 사회와 세상 자체가 불규칙성을 가지며 개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은 인간이 정의로움과 지혜를 가능한 한 갖고 있어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부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유효한 방법은 덕과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재산에 이르는 길‘과 ‘덕에 이르는 길‘을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미스는 강조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저 재산에 이르는 길은 더할나위 없이 충분히 강조되고 있지만 후자에 관해서 전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가 도덕을 상실하게 된 연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1부의 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은 서로 연계가 되어 있어 따로 개별적으로 놓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와 재산을 쌓은 자를 개별적으로 인식해서는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은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어리석음과 악덕을 경멸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놓은 사람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경멸하거나, 적어도 무시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양자의 인식 문제는 사회에서 지혜와 덕은 잘 안 보이는 반면에, 부와 지위는 아주 잘 보이는 법이라면서 어느 새 부턴가 현대 사회에서는 이 양자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사실 이 지점의 진술도 저자가 왜곡해서가 아니라 후에 자본주의가 그 약탈적 속성을 드러내면서부터 부유한 자는 즉 지혜로운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부를 지키고 자식들에게 되물림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과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자들의 격언이 소위 ‘지혜로움‘으로 포장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요. 스미스는 이에 명백하게 반대되는 입장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와 정의를 논하면서 관용, 인간애, 친절, 동정심, 우정 등의 이러한 감정들에게 인간은 선호하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러한 바탕의 자혜로운 사회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스미스의 판단으로는 그것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더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정의감에 의한 정의로 인한 불의에 관한 분노에 대해 저어하고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불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주저하는 본성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스미스는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전한 사회적 질서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것이 그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2부 ‘국부론‘과 관련된 저자의 해석에 있어 가장 제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 이기심 + 페어플레이 정신 (도덕과 정의감)‘의 도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건전한 이기심을 발휘하여 모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적으로 제어될 수 있다고 강제로 주입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저 이기심에 분명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되, 전부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스미스가 비판한 중상주의 역시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어떻게든 이익을 추구하고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이 중상주의가 당시 영국 권력층에 있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사실상 착취하는 식으로 흘러갔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한 역사가 존재했지요. 아마 이 지점에서 스미스는 중상주의가 모두의 이익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계급주의적 사회를 거의 용인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중상주의는 하급 계층이나 노동 계층의 이익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스미스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도 스미스의 주장이나 사상을 오독해 자신들의 주의를 위해 써먹은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그와 같은 ‘오류 관행‘이 아직도 경제학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점은 그저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방법론과 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학문을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수단과 목적으로 공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익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굴종하는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은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도덕을 강제로 거세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연유로 도덕에 이어 다음 법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시장사회에 대한 스미스의 인식도 우리가 익히 짐작하는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시장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자애심뿐만이 아니다. 시장 사회는 페어플레이를 받아들이는 정의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교환 성향 그리고 설득 성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설득 성향은 법의 정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시장의 논리와 언어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 통행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시대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지금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더 수월하게 약탈적 경제‘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명정대한 거래가 기반하는 시장을 만들 수 있겠는가‘에 더 많은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입니다. 저들이 입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끝으로, 앞선 스미스의 진술에 대한 목표 의식을 담은 것이 2부 8강 ‘지금 이루어야 할 일‘ 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지혜로운 통치자에 대한 서술을 빼놓을 수 없겠는데요. 어떻게 보면 시장 본연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정치에 능수능란한 통치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도주의나 자혜에서 우러나온 공익적인 사람이 사사로운 특권이나 특혜를 폭력적 방법으로 제어하지 않으리라는 부분은 자기 조국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같은 진술의 요는 개인의 권리에 대해 정부가 어떠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소위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보통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시장의 분업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입장에서 어떻게 페어플레이 정신을 시장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그의 논저 전반에 제시되지 않는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요. 다수의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가 완벽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면 시장 또한 당연히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고 봐야되지 않을까요. 또한, 앞선 스미스의 사상대로 저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의 구축이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다시금 주지시키고 있습니다만, 적절한 정부와 효과적인 정치 없이 어떻게 저러한 목적이 가능하게 될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토크빌 조차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와 정치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요. 과연 시장이 그 건전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찬가치로 스미스가 중상주의와 관련해 당시 미국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비판한 연유에는 이러한 일정부분 시장의 문제점을 확인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알려지지 않은 스미스 사상에 대한 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을 통해 애덤 스미스의 진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랜시스 허치슨은 "사회의 질서는 인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감‘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의해 인도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공평한 관찰자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상상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할 만한 것이 되게끔 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또는 실제로 행위를 했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해로운 행위를 의도한 것만으로도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경우와 같은 비난과 처벌이 주어지는 사회는 매우 가혹한 사회다

사치품과 생활필수품을 전체 부의 분배라는 시점에서 보면, 지주만이 사치품을 소비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사치품을 소비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애덤 스미스가 분업이 교환의 원인이 아니라 교환이 분업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문명사회는 계급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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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 개정판
로버트 달 지음, 박상훈,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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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 주 인우드 출신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로버트 앨런 달 (이하 로버트 달)은 예일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털링 교수로서 대학과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학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대한 가능성,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현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인물입니다. 저역시 여러 서평을 통해 그의 학문적 논점과 주장들을 인용해 왔는데요.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자체가 정치적 본질을 얼마만큼 구현해 내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유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와 왜 사람들은 평등이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가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죠. 그런 면에서 실로 정치학 본연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심없이 연구를 했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호불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수의 불평등한 조직들이 추구하는 권력이 어떻게 정치적 하모니가 되어 시민의 평등과 기본권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아직까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점은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책은 원제, ˝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titution?˝으로 2002년 초도 출간 되었으며, 국내에는 2004년에 처음 번역 되었고, 이후 2018년에 개정판이 새로 나왔는데요. 아마도 서지 정보에 따라서 이 개정판은 2003년 제2판으로 번역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저는 최근에 나온 2018년 개정판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가지 더 첨언을 드리자면, 최장집 교수의 한국어 해설판이 약간의 보론으로서 삽입되어 있는 점이 특이사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건국 초기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혹은 ‘국부들‘은 헌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비범한 인물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이나 제임스 매디슨과 같은 인물들일텐데요. 이들은 공화주의적 기초 아래 미국인들을 위한 헌법을 마련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헌법에 대해 갖는 의미와 약간의 숭배 그리고 구태의연한 왕정을 거의 혁명없이 극복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은 꽤 놀라울 만한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로버트 달 교수는 ˝구체적으로 미국 헌정 체계가 오늘날의 민주주의 기준에 얼마나 잘 부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그가 논증하는 바와 같이 이 최초 헌법에 상당수의 비민주주적인 조항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인에는 13개주 (엄밀히 말하면 11개주) 대표자들과 연방주의자들이 모여 각자의 이견을 좁히고자 여러 무리한 합의를 한 것이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서술됩니다. 이를테면, 남부의 사활적인 노예제 유지를 인정하게 되는 식의 북부 주들의 양보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오로지 백인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이 헌법 초안은 1919년에야 인정 받은 여성들의 투표권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노예로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민들에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그 한계가 명백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18세기의 영국 정치에서 옥스브릿지(옥스포드와 캠브리지) 출신의 남성들이 갖는 우월한 정치적 지위와 유사한 체계라고 볼 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과거의 전통(혹은 한계)이 녹아든 헌법을 미국인들이 숭배하는 상황이 과연 이치적으로 맞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로버트 달은 명료하고 근본적인 이 글을 통해 두 가지 정도의 헌법에 대한 한계 내지는 비판점을 밝히고 있는데요. 그것은 승자 독식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소위 ˝불비례성‘과 개혁되지 않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대한 문제, 이를테면 지난 수년간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제도에 대한 개선을 하원에서 통과시키기는 했으나,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저지한 문제 등 국민 다수가 자신들의 투표 효능을 위해 바꿔야만 한다는 주장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방 내에 인구가 많은 주가 인구가 적은 주의 권리와 이해를 부정하거나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로 주마다 각 2명의 상원의원을 두는 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달은 이와 관련하여 ˝과연 지금의 민주주의 하에서 상원에 대한 개혁이 인구가 적은 주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이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우리의 민주주의가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선거인단의 선출로 취임하게 되는 이 연방 대통령제에 대해 과거 전통의 유지 요구를 떠나서 인구수가 적은 주들이 갖고 있는 이 연방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을 결코 놓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달은 해석합니다. 더군다나 선거인단 제도와 관련된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상원 의원의 3분의 2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 권력과 다수 국민의 이해가 전혀 일치 않은 현재의 미국 상황은 이것이 민주주의의 요구와 얼마나 부합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이러한 양쪽의 불편한 상황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줄곧 우려섞인 시선으로 본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억압‘과 같은 정치적 선입견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초기 연방주의자들에 의한 ‘재산의 보유 여부로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논의‘나 줄곧 백인 남성에 의한 의견 수렴과 같은 다소 민주주의에 반하는 논리들이 근래에 있어서 계급주의적 측면에서 기득권 층을 함부로 억압하게 될지도 모르는 다수의 민주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으로도 읽힌다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현재까지 미국의 사법제도가 선출직이 아닌 일종의 고용직으로 유지되는 것은 소수대 다수라는 권력 관계에서 그러한 균형점을 유지시키기 위한 제도 혹은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앞선 논의는 언급했던 대로 3장과 4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요. 대통령의 선출 문제를 쓰고 있는 4장에서 저자는 ˝선거인단 제도를 변경하는 헌법 개정안을 폐기의 무덤 골짜기로 몰고 가는 것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불평등한 대표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상원이다˝라고 핵심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정부의 수장에 선출 문제에 대한 큰 골자를 기반으로 5장에서는 이 초기의 미국 헌법이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고찰해보고 있는데요. 특히, 이와 관련해 근 50년간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은 22개국의 정치적 사례와 제도를 미국과 비교해 보고 그 차이점과 개선할 부분에 대해 논하고 마찬가지로 논하고 있습니다. 모두 이즈음에서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비례대표제와 다수 대표제에 대한 사항입니다. 미국은 후자인 다수 대표제에 특유의 승자독식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인데요. 원칙적으로는 비례대표제가 다수 대표제에 비해 공정하다는 인식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견고한 양당제보다는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다당제 시스템일텐데 그것을 잘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비례대표제입니다. 이 비례대표제에 대해 다수 정치인들의 거부감을 차치하더라도 미국 국민들의 통념도 꽤 견고한데요. 분열적이고 논쟁적이며 불안정한 무능한 정부라는 비례 대표제 하의 국가들에 대한 이해는 꽤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달 교수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사례를 들며 오랜 시기동안 정착한 이 비례 대표제의 정치적 안정성을 오히려 반증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국가 별로 최선의 정치가 있기 마련이고, 그동안의 정치사에 있어서 많은 논의가 엘리트들 사이에서 있어왔을 겁니다. 다만,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저자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은 각 정치 시스템 하에서 얼마나 시민의 기본권과 권리 그리고 정치인들의 책임감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에 있습니다. ‘공정하고 유능한 민주 정부‘라는 가치 아래 양 제도가 얼마만큼의 실적을 올릴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관심을 끌 만한 요소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 곳에는 라이파트의 36개국 연구가 눈길을 끕니다. 그는 다수제 민주주의 보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좀 더 뛰어난 실적을 얻었다고 평가하고 ‘공공 정책의 관대함‘도 마찬가지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은 바로 혼성 체계의 대표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달은 미국의 헌정 체계와 앞선 비교점과 관련해서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점은 현재 미국 정치가 그가 중대하게 여기는 ‘기본권의 보호 공정한 대표, 더 많은 합의와 같은 민주적 목표‘를 원만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글 중간에서도 제가 강조를 한 부분이었지만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 하에서 평등의 실현을 중요한 가치 문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행정권의 수립부터 그에 기반한 헌법 및 여러 정치 제도의 편람은 바로 이 평등의 문제를 민주주의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느냐에 있었는데요.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 모두를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측면의 여러 학설들과 이론들이 존재하는데요. 흔히 자유 민주주의라고 일컬으며 사익화된 보수주의자들과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꽤 계층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자유를 달성하는데 온갖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시장 자유가 정치적 자유를 얼마만큼 보장할 수 있느냐에 대해 연구라든지 개연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약간의 형용 모순처럼 이미 시장 자유 논법은 정치를 배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이지 않는 손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요. 경제적 편의를 위해 정치적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에 답변을 요구해야겠죠.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평등은 꽤 이념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인식들을 여기서 다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평등은 민주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죠. 바로 토크빌은 유럽과 다른 미국의 조건들의 평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여기가 새로운 세계라고 느꼈을 겁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 달 교수는 정치적 평등을 어떻게 하면 확대 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권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 반대에 있는 계층에게 이들의 저런 권리가 어디까지 정당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아니 의구심을 무조건 가져야만 하죠. 결국 앵무새들처럼 이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논법으로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매우 공격적인 작업이 이뤄져 왔습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인식의 기반 차원에서 혹은 주입된 사회 체계적 가치관으로서 뭔가 비판과 견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따른다고요. 그러면 자유는 왜 의무가 따르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기득권과 엘리트들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만 한다는 그런 논법일까요?

자본주의적 해석을 두서 없이 늘어놓기 전에 저는 순수한 민주주의가 계급 정치나 불평등한 권력으로 인한 계급 고착화 등을 자인하는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달의 인식 또한 저와 그 궤가 유사한 것이고요. 달리 말하면 이처럼 민주주의의 강화는 바로 다수 시민들의 권리 확보와 인식의 공감대 및 충분한 이해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연유로 ˝정치적 평등의 선결 조건은 민주적 제도의 확립˝일텐데요. 여기서 문제는 미국의 경우 왜곡된 금권 정치하에 민주주의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데에 있을겁니다. 우리도 이것에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포퓰리스트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직접적으로 표를 얻기 위해 알량한 믿음 조차 없는 민주주의를 수단화시킨다는 것과 포퓰리스트들과는 달리 꽤 정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프로파간다의 본질적인 폐해는 저런 진지함을 가장하고 무엇보다 선을 굳게 믿고 있는 식의 거짓된 외면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이나 사익에 매몰된 정치인들 모두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헌법을 비롯한 사법 제도가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저 역시 회의적입니다. 정치적 갈등과 모든 문제들을 법의 판단에 기대는 것을 반대하는 편이고, 균형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 대한 공청회라든지 의회 정치인들이 얼마나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역없는 공개와 정치 제도하에서 로버트 달이 강조한 것처럼 실효적인 시민들의 정치 담임권 등을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이미 정치적 자원의 불균형은 소위 사회경제적 엘리트들이 더 우월한 편이므로 시민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치적 평등의 강화에 있어서 이것을 이념적으로 몰아세우거나 자유라는 명목하에 강제적으로 입을 막게 하는 언론을 비롯한 일련의 여론 작업들에 대해 분별력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봐야겠죠. 그래서 로버트 달이 생애 말년에 이 부분에 대해 집중한 것은 이토록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가 사회의 정치, 경제, 법조 엘리트들에게 달려있다는 부분은 정말 오래도록 제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치적 평등은 과연 자유를 위협하는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공공연하게 침해하는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대표의 불평등이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인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다면, 작은 주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이 무시도거나 악용될까?

나로서는 그 답이 그 나라의 역사, 정치 문화, 민주주의 존속을 위협하는 내부적 전략적 요인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생각이 타당하다면, 결국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자유의 보장은 그 나라의 헌정 체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일반 시민과 그들에 부응하는 정치계,법조계,문화계 엘리트가 공유하는 신념과 문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붕괴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극히 드물며,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심각한 위기나 혼란에 처했을 때에나 나타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해결책은 이런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법률이나 정책을 채택하기 전에 가능한 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다수결에 따라, 물론 그럴 때에도 늘 민주적인 기본권을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정치체제이다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로버트 달이 얼마나 위대한 정치학자인지 가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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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 파시즘과 인문주의에 관하여
롭 리멘 지음, 조은혜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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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유명한 공공지식인이자 참여지식인인 롭 리멘 (혹은 리먼, 리에멘)은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에 있는 사회과학 명문 틸뷔르흐 대학을 거쳐 현시대의 ‘인문주의의 위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는 네덜란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토마스 만 연구자이며, 소위 ‘유럽 정신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강연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대륙에서 그의 강의를 요청하고 있기도 한데요. 확실히 그는 강단 지식인이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인문주의 잡지 ‘넥서스‘를 창간했고, 뒤이어 동명의 ‘넥서스 연구소‘를 창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평생을 거쳐 집중한 주제는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에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이 책의 2부에서도 그러한 그의 노력이 잘 정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편의 인문학적 에세이를 합쳐 출간한 이 글은, 원제 ˝To Fight This Age : On Fascism and Humanism˝으로 2018년에 나왔으며,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략하게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것은 ‘극우 포퓰리즘이 도래한 현재의 유럽이 직면한 시대˝를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인데요. 앞선 극우 포퓰리즘은 파시즘과 매우 가깝다는 측면에서 이 글의 맥락은 전후 유럽인들이 과거 파시즘에서 과연 어떠한 교훈을 얻었는가?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1장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정치적 수사와 인문학적인 방법론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고찰은 여타 어느 글보다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해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쩌면 많은 분들이 현재의 유럽이 그 정도로 심각한 위기의 시점이냐 반문하실 수 있겠는데요. 1장에서 논증되는 가운데 특히, 저자는 1940년대 초반의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현재의 ‘반이슬람주의‘를 같이 비교하며, ‘증오의 정치‘,‘대적의 정치‘가 히틀러의 그것과 지금의 극우 포퓰리즘과 매우 유사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이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어떠한 유사적 관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수많은 토론과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권의 몰락으로 극우 이념이 대척점을 잃어버렸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관점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입아프게 강조하는 선동 정치인들이 사실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단으로만 삼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 꼬집는 주장들도 있었는데요. 저자인 리멘 역시, 토마스 만의 연설을 인용하며 이렇게 답합니다. ˝제게 여러분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해드리죠. 만일 파시즘이 미국으로 온다면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재인식을 리멘의 이 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가세트에 대해 꽤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인 지식인이라는 틀을 갖고 있었는데요. 아도르노를 이 가세트에게 갖다 붙일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유의미하게 받아들일만한 점은 가세트가 민주주주의 쇠락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단어 ‘대중 민주주의‘가 거의 같은 맥락으로 ‘군중 민주주의‘와 그 함의가 공통적인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토마스 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유독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앞선 연유 때문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리멘 역시 현재의 고도로 교육받은 많은 시민들이 이 포퓰리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아마도 토크빌이 강조한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조되는 ‘특별한 변별력‘이 우리 시민들에게 부족한 것은 확실합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무지 ignorance 야 말로 대중민주주의에서 파시즘이 이렇게 쉽게 회귀하는 주된 이유다˝라고 말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 거짓말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발달했고 단어의 의미는 늘 왜곡되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정말 제 뇌리에 박힐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좀 더 첨언한다면, 이 대중들을 선동하는 정치인들, 언론인들 및 지식인들은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고 그 중에 한 두가지만 전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리멘은 현재의 엘리트 계층이 사회적 책임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것에만 집중해,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전통이 상실되는 상황을 스스로 획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도 한데요. 엘리트들에 대한 수사가 과격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상위 계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가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전반적인 ‘경제적 효용감‘에 대해 뒤에 2장에서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오로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은 바로 경제적 효용감˝이라는 진술은 현 시대가 어떠한 상황인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 시장이 사회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칼 폴라니의 해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엘리트들의 스스로의 궤멸적 변용‘과 더불어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인식은 1943년의 독일 엘리트들의 정신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더군다나 2장에서 줄곧 비판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의 그 만연한 아둔함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심장한데요. 우리는 그동안 소위 대중민주주의를 통한 선동 정치인들의 사적 이익에 따라 아무런 대안도 없이 사회가 깃발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을 2010년 이후 유럽에서도 목격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리멘은 자신의 모국인 네덜란드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일침하는데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평등의 분노를 엉뚱한 대상들에게 표출하게 만드는 극우 포퓰리즘이 과연 민주주의를 어떻게 절망에 빠트리게 될지에 대해 무슨 묵시록과 같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아예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의 외침을 우리 또한 경청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한나 아렌트 역시 가까운 미국 사회에 벌어질 일들이라는 정치적 분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해 훗날 제 2차 파시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진행되는 저의 진술과는 약간 논외지만,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사생아‘라는 거친 표현에 대해 지극히 반대합니다. 이에 2장에서 저자는 현재의 유럽은 ‘영혼 돌봄‘이라는 계몽주의를 즉시 회복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법치, 인권˝으로 측정되기 때문에 극렬한 민족주의와 함께 포퓰리즘과 파시즘은 명백하게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을 민주주의의 사생아라고 말하는 것과 민주주의가 스스로 자살을 꿈꾸기 때문에 대적자로 탄생한 것이라는 이 비웃음들은 시민들이 더욱 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꽤 면밀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많지만, 껍데기만 그런 자들이 대다수인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지금도 저는 로버트 달에게 의문을 갖는 부분이라면 과연 그가 다원주의를 신봉하면서도 저런 자들까지 포용해야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청일 것인가에 대한 한가닥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물론 슈미트 식의 정치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시민들이 이상적인 분별력을 발휘해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반정치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얼마간의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역할과 가능성을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스스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바람막이가 전무하다는 현실은 그저 회의적인 분위기를 양산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 이제는 정말 역할을 다해야 될 시점임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 선동 정치인들에 대한 귀중한 인식을 제공하는데요. 이들 선동가들이 실상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약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에도 하등 관심이 없다는 진술인데요. 여기에는 자신들의 권력에만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엘리트들의 배신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우리가 비즈니스 엘리트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 효용성을 제일 가치로 삼은 저들의 폐쇄성과 그외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저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지하게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이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일찍부터 깊은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차라리 가진자들과 권력을 항유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경제 제도와 사회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면 받아들일 수는 없을 지언정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러한 과정은 다들 아시다시피 대처와 레이건이 주도해 만든 것이며, 그러한 이행 가운데 현 시대의 불행한 일면들을 이용한 포퓰리즘의 도래는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중하게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 및 기득권층에 사회적 책임의 결여로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라이트 밀즈가 중요하게 주장했던 엘리트들의 책임 의식을 지지하는 편이며, 엘리트들과 일반 시민이 격리되고 구분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무조건적이고 안일한 시민들의 엘리트들에 대한 배척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또한, 지금도 이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리멘의 이 글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끔 파시즘이 기억 저편에 망각될 무렵에 이 책을 수시로 꺼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일개 개인의 삶으로서 이 사회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의 만연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각성할 수 있는 시기가 각자에게 왔으면 생각을 간절히 해봅니다. 제가 이런 사회학적인 책에 굳이 서평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이기도 한데요. 스스로 재교육을 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치의 건전성이 강화되리라 또한 의심치 않습니다.

무솔리니는 모든 대학교수에게 충성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직업을 잃게 되었다. 1100여명의 교수 중에 서명을 거부한 교수는 단 10명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자유를 향한 두려움과 최악의 소인배스러움에 뿌리를 둔,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정치학을 들고 나온 사상 없는 대중 선동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파시즘은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적 정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중-인간은 지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와 관련해 책임감을 느끼기는 커녕, 그것과 직면하기조차 원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어리석음과 공포 그리고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며, 이성의 힘을 사용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 외에는 안중에 없는 선동가들이 이용하는 형태의 정치학으로, 결국 그들은 원한을 악용하고, 희생양을 지목하고, 증오를 조장하고, 지적 무능을 시끌벅적한 슬로건과 모욕 아래 감추며, 포퓰리즘을 활용하여 예술의 경지에 달한 정치적 기회주의를 실행한다

우리 사회은 왜 이렇게 기술, 속도, 명성, 겉치장 그리고 외모에 많은 가치를 두는가? 그 대답을 소크라테스가 2500년 전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쾌락에만 초점을 맞추고 최고선을 경시하는" 삶의 방식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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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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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난 강상중 교수는 일전에 서경식 교수가 언급한 ‘일본 사회 내의 재일 한국인들이 갖는 디아스포라‘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중에 ‘나가노 데쓰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 평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넘어 노력한 끝에 보수적이라는 일본 도쿄대의 정교수가 되었고 또한, 학문적으로도 푸코와 베버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 큰 명성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저 글로써 일본 사회에서의 강 교수의 노력을 기술하는 데 그치고 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뭔가 상상이 안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많은 난관이 있었겠지요. 저는 주변 지인으로부터 일본 사회의 폐쇄성에 대해 익히 접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자이니치‘라 불리우는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은 꽤 노골적인 부분이 있어서 일본인들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충분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정도로 강상중 교수에 대한 개인적 소감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朝鮮半島と日本の未來˝ 라는 원제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한 출판사가 편집으로 삽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혐한과 반일‘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대해 논하고 싶습니다. 물론 강상중 교수 역시 본문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한데요. 먼저 한국의 반일은 민족주의적이거나 얼마전에 서평을 쓴 사와다 가쓰미의 국내의 ‘반일 현상‘과 관련된 한국의 좌파 정치 세력의 조직적 움직임과 같은 정치적 인식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은데요. 강상중 교수는 이 글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한일 관계가 더 좋았다고 언급하는 내용은 지극히 동의할 만하나, 오히려 반일과 혐한을 동일선상에 놓고 서술하고자 하는 부분은 전혀 수긍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혐일 데모를 주동하고 각 대형 서점에 ‘혐일 섹션‘에 동조하거나 일본 정부가 극우 세력인 ‘일본회의‘를 암암리에 지원하는 등과 비슷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거의 없습니다. 반일은 한일 관계 전반을 부정하거나 일본과의 외교 단절을 주장하는 터무니 없는 정치 논법이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에 따른 역사 부정을 일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일본의 의견이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지 일본인들을 한국에서 쫓아내자거나 당장 한일 관계를 단절하시키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반일과 혐한의 인식 대결 구도는 실망스런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한일 기본조약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의 안보는 즉각적으로 일본의 안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글에서 북한이 서울과 도쿄에 핵무기를 날릴 경우에 그 시뮬레이션에 대한 결과가 인용되고 있듯이, 전반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문제는 꽤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그래서 저자의 이 글은 1945년 이후의 남북한 관계 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 및 고이즈미 정권 당시 북한과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 노력 등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는 서두에 문재인 정부의 어설픈 외교 운운으로 남북 관계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외교 문제의 험난함을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에도 사실 저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북 관계 자체의 문제 뿐만 아니라, 도저히 예측이 되지 않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백악관에 찰싹 붙어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던 아베 정권의 주변에서 한국의 문 대통령과 그의 내각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리란 전망은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내부에선 반공주의와 북한에 대해 그저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꽤 다수였고 이들을 배경으로 정치 세력화 되어 있는 국내 정치 자체가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나마 판문점을 중심으로 북한과 미국을 중재한 것은 성과라고 극찬할 필요는 없지만 그 정치적 과정이 지난했으리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아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도의 무능이라면 저런 수사가 가능하겠지만 문재인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 배경과 외부 요인의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좀 더 면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저자가 논증하고 있는 두 가지 정치적 해석에 대한 부분도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우선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배외적 애국주의가 들끓는 이유는 두 사회 모두 격차와 대립이 심화되어 일체감이 옅어지고 단절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 다소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내 정치의 문제를 한국으로 돌려 지지율 문제를 해결한 정권이 일본 아베 정권이라 생각하는데요. 그가 극우 세력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독도와 관련된 터무니 없는 영토 문제, 특히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와 비교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식적 오류 또한 몇 번 양보해 제외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몇 차례나 한국에 대해 도발을 감행한 사실은 배외적 애국주의가 어느 나라에 가까운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맹목적인 세계화와 금융 자본주의의 문제로 말미암아 일본의 불황과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한국은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밖에 나가서 ‘일본인들을 모두 추방하자. 일본인들 때문에 한국의 국격이 낮아진다. 일본은 언제까지 사과를 번복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혐일에 손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까? 여기서 제가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잘 아실겁니다. 혐한의 뒤에 일본 정부가 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인데, 그래서 강 교수의 저런 논법은 그런 연유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위안부를 비롯 강제 동원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자인 강교수는 4장 후반부에서 ˝전시에 국내 노동력이 고갈된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노동자를 동원했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일본의 인프라를 지탱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요. 사실 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인들의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조속히 해결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일본과 관련된 역사 문제는 거의 모두가 정치 쟁점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특히, 일본은 역사 문제에 대해 노이로제와 비슷한 관념을 갖고 있고 더군다나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독일은 국격이 손상되어 남아나지 않아야 되는 수준인데, 지금 독일은 어떻습니까? 사실 강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베 정권이 2014년도에 과거 고노 담화를 대외적으로 철회하고 싶어했는데, 당시 백악관의 압력으로 무산 됐던 바가 있습니다. 바로 아베는 고노 담화의 의의를 다시 새기기도 했죠.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석개변이 존재하는데 이를 한국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명백합니다. 우리가 저들의 국격을 심대하게 손상시켰으니 정식으로 사과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또 한 가지, 일본은 행정부의 권한이 한국과는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법원 관료들도 행정부의 결정을 존중하고 일종의 내각의 권위를 무엇보다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설사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법원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그 내심을 드러낸다치면 탄행당하기 쉽상입니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즉, 한국의 국내 정치 문제를 무슨 내정 간섭 운운하기 전에 한국의 삼권 분립은 이처럼 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 기본 조약으로서 한일 기본 조약을 양국이 준수할 필요는 있겠죠. 이 부분에 대한 강 교수의 언급은 실로 동의할 만합니다. 과거사에 대한 국가간의 합의는 이미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그것이 우리 쪽에는 불합리할지라도 혹은 냉전시기에 졸속으로 체결된 조약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자유세계에 속해 있는 만큼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익에도 맞지 않겠고요. 다만, 우리의 국내 정치는 시민 사회를 비롯, 시민들의 의견 개진이 일본 보다 자유롭고 여론의 생성 또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국제법 상으로도 민간 차원의 민사 문제를 정부가 강제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법의 지배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는 당연한 부분입니다. 행정부가 사법부에 관리를 보내거나 시민단체에 수석을 보내거나, 장관을 파견하여 입을 다물게 하는 등의 해당 조치가 우리 사회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강상중 교수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근대화가 완성되었고, 무리한 만주 지배와 그에 따른 중국 팽창 정책이 일본 근대의 암(暗)이라고 서술하면서 이러한 측면의 이해가 일본의 공화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근대의 중요한 사상이 인간의 마땅한 권리와 계몽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체제로 변용됨으로써 일본 근대 자체가 과거 나폴레옹이 공화를 부르짖다가 제정으로 몰락한 반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국익과 정치적 견제가 없는 봉건 왕조로의 귀환과 비슷한 관점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사실 일본인들은 이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고 자신들의 근대가 아시아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성찰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배와 피지배 국민들간의 역사적 인식 차원을 넘어서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로 인해 관계 전반이 괴물이 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괴물을 먹여 살리는 것은 일본의 국격과 극우 정치입니다.

저는 가끔 일본에 대해 우리가 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저들과 협력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적당히 사회문화적 교류와 인적 교류만 하고 미국을 매개로 적당히 지내는 것이 양국에 이롭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치적 불안정성만 서로 잘 관리하면서 지내는 것이 양쪽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국제 관계를 이런 식으로 쉽게 처리할 수는 없을겁니다. 과거 한일 관계 개선에 노력한 김대중-오부치 두 지도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시점에서 한일 관계가 어떻게 재정립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만, 일본이 후쿠시마의 오염수를 태평양에 무단으로 방류할 시 그대로 한일 관계는 끝장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글에 대한 반론으로 많은 부분을 할애하긴 했습니다만 강상중 교수의 한일 관계의 일반론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 글은 남북한과 일본의 집약적인 외교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고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평이하게 일독할 수 있는 수준의 유익한 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국내의 반일 여론과 관련해서 일부 부적절한 언론들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있으니 특히 일본내에 거주하고 있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은 면밀히 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북한 핵문제의 정치적 전개 과정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저자의 이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이고 평이한 편이니 따로 사족을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을 포함해 당사자들이 대화의 장에 나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북한 핵 문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무단으로 미국이 무력 개입에 나서는 일은 한국의 협조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일본 내의 미군 기지의 공격 가능성 및 중국과 국지전으로 비화될 확률 또한 상당하니 저자의 평화 해결에 대한 조언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에도 부합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이라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본으로서는 전쟁 특수를 위해 내심 반겨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도쿄에 북한 미사일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과거처럼 잇속을 셈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글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오마주로서 시작되었디고 밝히고 있는데요. 과거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의 한일 관계에 대한 정치적 노력은 꽤 대단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 내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한국 정치 상황과 맞물려 일본에 대한 인식 및 반일의 기본적 의미 등의 인식이 이 글을 통해서도 매우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체로 한국에 대한 나쁜 인식을 일본에 주입하고 있는 우리의 일부 언론들의 기여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처럼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춰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1월 23일 겨우 지소미아의 파기는 면했으나, 그 까닭은 양국이 신뢰를 회복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미일의 안보 채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이 조약(한일 기본 조약)으로 국가의 청구권은 포기하지만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한국 내에서는 이를 침략을 명기한 배상 조약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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