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고전의세계 리커버
마르퀴 드 콩도르세 지음, 장세룡 옮김 / 책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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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18세기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입니다. 그는 일생을 계몽주의에 헌신했고 자유, 인간의 이성, 평등한 교육 등과 관련된 진보의 이념에 큰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은 오늘날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가 연상될 정도로 튀르고와의 놀라운 우정과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기운이 더할 나위 없이, 팽창한 시기에 보다 합리주의적인 사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792년 12월,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그는 재판 자체는 지지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점 때문에 혁명 수뇌부에 눈밖에 나 도피를 강요받게 됩니다. 그는 총 8개월 기간의 도피 끝에 체포되어, 곧 부르라렌느에 수감되고 얼마 안 가, 아편을 사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후 그의 사상적 업적을 기려 1989년 상징적으로 팡테옹에 안장되기에 이르는데요. 그의 시신은 19세기에 이미 분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콩도르세의 저작 가운데 두 편을 발췌해 번역한 것으로, 참고로 이 글의 1장은 '공교육 5론'의 1장을 번역했고, 2장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의 '열 번째 시대'를 옮긴 것입니다. 국내에는 2002년 1월 초판 번역이 이뤄졌고,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19년 12월에 펴낸 개정 1판이 되겠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글의 1장은 인종과 성별에 따라 차별 받지 않는 시민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권력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공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이것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콩도르세의 제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러 평론에서 콩도르세에 대해 공통적으로 평가하는 부분도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 계몽을 굳게 신봉했던 인물이며, 인간 이성이 기반이 된 우리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도 읽힙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성을 수단으로 삼았던 칸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소 이른 결론이지만 이러한 공교육이 많은 국민들에게 제공될 때, 그가 말하는 대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정치가 더 이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는 인간 진보와 나아가 사회적 진보와도 결부될 수 있고 이렇듯 진정한 계몽주의자라면 큰 맥락에서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교육은 어린 시기부터 훈련이 이뤄진다면, "이성을 강화하고 이미 습득한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살찌우고, 오류를 바로잡는 등"의 순기능을 보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협잡과 궤변의 홍수 속에서" 속된 말로 평생을 전전긍긍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콩도르세 역시, 약간의 논외로 능력의 차이라든지, 주어진 환경에 따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능력주의적 기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있습니다. 다만, 광범위하고 소위 독선적인 중상주의적 잣대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상업주의적 현란함에 우리가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무엇보다 이런 상업주의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의 이해를 저자는 1장 후반부에서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것은 콩도르세가 애덤 스미스의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용하며 경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사회에 만연된 대부분의 악덕을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철저한) 교육이 이러한 악덕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당위입니다. 이를 좀 더 확대해 보면 '특수한 지식'이라는 소위 특정 계층의 전문 지식화와 이를 통한 헌법 바깥의 소위 특별한 지위의 부여와 같은 주장 등이 많은 지식에 융합되어 전문성을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소위 전문 계층의 독재가 일반 시민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모든 사회가 특수 계층과 기득권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정치 관념적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대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평등을 그저 아주 일관된 '사회적 균질화'로 폄훼하여 이것을 언론과 여론을 통해 그 일고의 가치도 없는 분란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현란한 정치 논설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정 자체는 진정한 계몽주의적 진보의 흐름이라 읽히기도 합니다.


또한 일전에 로버트 달이 우려했던 바와 같은 통찰을 콩도르세의 다른 논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시민들의 자녀 대부분이 고된 직업에 종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문장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 보면, 높은 교육과 이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부모 밑의 자녀들이 그만큼 고된 일자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추정하는 것과 앞선 문장의 이후 진술에서, "교육에 적은 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립된다면 그 사회는 계몽의 진보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익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력합니다. 이처럼 교육은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 부와 지식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소외되어 있는 많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한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부모의 가난까지 짊어진 자녀의 세대가 진정한 삶의 돌파구로서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논증의 결말에서 교육이 어리석은 정치에 우리 권리가 희생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무엇보다 탁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을 위해, 공권력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이 교육을 둘러싼 환경에서 권력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콩도르세는 후반부에서 이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눈길을 사로 잡은 부분은, "공권력은 진실의 모든 힘으로 악덕에 대항해야 하지만 그 진실을 결정하는 것은 공권력이 아니다"라는 특별한 문장이었습니다. 이는 전반적인 논증에서 참으로 중요한 맥락으로 여겨졌는데요. 앞선 종교와 도덕의 원리에서도 그렇고 공권력이 시민들에게 그러한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들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처럼 민주주의의 '분립'과 하등 어긋나지 않고 맞닿아 있습니다. 시민들은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독립과 평등에 대한 고귀한 열정"을 몸과 마음에 지녀야 하며, 그들 스스로가 노예의 삶이 되지 않게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계몽주의의 뼈대가 붙든, 진보 이념 혹은 인간 이성의 곁 가지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구나 후반부에서 종교적 광신에 빠진 종파들이 사회와 시민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주장이나 진실과 진리를 결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같은 '이성의 불안'이 조장된다면 이는 계몽주의의 몰락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콩도르세를 콩도르세 다운 외침으로 여겨지는 남녀 평등에 준하는 교육의 필요성은 사실상 1세기 이상 차이나는 선구자적 발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교육을 통해 발견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에 대해서도 그는 강조하고 있고 특히 여성만이 갖는 이점에 대해서도 역시 논하고 있습니다. "치밀할 정도의 정확성, 정주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요구하는 그런 관찰" 등은 여성이 갖는 고유성으로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계몽의 이바지 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통해 더욱 더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여자들을 단순한 가사 노동에 몰아서 가부장적 체제에 이바지하는 것보다 이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 사회에 더 이익이라는 측면을 사실상 강조한 것인데요. 이는 계몽이 남녀를 떠나 서로 동등한 이성의 존재라는 관념에서 명확히 부합하는 인식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제안들을 한 콩도르세는 어쩌면 시대를 벗어난 진보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스스로를 교육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분연히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입으로만 이성을 위치는 다른 사상가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의 특성일 겁니다.

결국 완전한 인간상을 구현할 수 있는 교육과 이런 체제의 사회는 결국 진보의 이념적 결과물로서 태어날 수 있을 텐데요. 체제를 그저 생물로 빗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이성에 부합되는 수많은 시민들이 건설한 사회야 말로,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꿈꿔 왔던 사회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보적 건설이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추정한 건대, 상업주의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의 출현일 겁니다. 저자인 콩도르세도  "자신의 이익에 대해 계몽될 수 없다"는 문장으로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어긋난 이해 관계'라는 구절 자체도 앞으로 사회가 어떤 식의 갈등에 놓일지 그는 미리 예견"한 듯 보이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 이익과 도덕은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시장의 이성이라는 궤변도 어떻게 하면 개인이 추구하는 이익을 무엇보다 인간의 우선 순위에 둘 수 있겠는가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이전에 과학의 진보가 달성한 인간 사회의 개념적인 진보의 기여에 대해서 저자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상찬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인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것의 진보는 점진적인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과학의 진보가 초래한 광범위한 기여에 대해 우리가 망각을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일 텐데요. 그럼에도 콩도르세가 철학자의 역할, 철학의 의무 등을 언급하며 양자 간의 균형을 기대한 것은 그저 그가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논법을 주장한 것은 아닐 걸니다. 다만 인간은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고 궤변에 농락당 할 수 있는 존재이니 만큼 과학이 사회와 격리되는 것은 미연에 방지해야 하며, 마치 과학의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도록 여러 노력과 사회의 배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존 듀이가 설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논법들은 그저 뜬구름 같은 이론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도 인문학의 거듭된 쇠퇴로 매일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일전에 우리가 철학자에게 보였던 존경과 애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경제적 이성'의 노예가 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으니 그 가운데 민주주의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부득 전쟁의 비참한 참화가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볍률이 파괴할 수 없는 어떤 현실적 구분이, 계몽된 사람들과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의 수단이 아니라 분명 어떤 사람들을 위한 권력의 도구가 될 어떤 현실적 구분이 존재할 것이다.

무지의 결과인 이러한 굴종적 종속 상태는 거의 모든 인민, 최대 다수에게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수많은 의무 가운데 하나는 지식 획득 수단을 보장하고 용이하게 하고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평등은 예술의 완성에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의 불평등이 예술에 몸바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놓은 불평등을 파괴할 뿐 아니라, 복지의 평등이라는 더 일반적인 또 다른 평등을 확립시킬 것이다.

같은 지점의 주위를 더욱 확장해, 같은 원리에서 나오는 결과들과 같은 방법론으로 발견된 진실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는 것 역시 과학의 진보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육이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육은 양성한 사람들을 보존하고, 다시 무지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더 자유로운 국가는 더 많은 공적 기능이 공통 교육만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사될 수 있는 나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지 않으면 권력은 그것을 얻은 개인들의 배타적 유산으로 만들면서, 어떤 직업에 헌신하면서, 매우 현실적인 어떤 불평등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여러 나라의 인민이 결국 정치와 도덕의 원리 안에서 접근하게 될 떄, 한나라의 인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외국의 인민들에게 자연이나 자신들의 산업에서 나오는 재화의 더욱 균등한 분배를 호소하게 될 때, 국민적 증오를 낳고 악화시키고 영속시킨은 그 모든 원인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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