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힘
존 포데스타 지음, 김현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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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유수의 대학인 조지타운의 로스쿨을 마치고 주검사 등을 역임한 존 포데스타는 일찍이 선거판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후, 클린터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정권 인수위원장을 거쳐, 정권 2기 무렵에는 백악관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관련된 짤막한 일화로 책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 한 가지는 클린턴이 꼭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클라호마에서 겪었던 선거 운동 경험이 이 두 사람에게 큰 인연이자 미래가 된 듯 싶은데요. 또한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고초를 겪은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믿음도 글에서 잘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많은 독자 여러분들은 미국에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 정치가 있었느냐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1부, ‘과거 진보시대의 교훈’은 초기 미국 진보주의 정치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분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Power of Progress”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판되었는데요. 다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현재 미국 정치의 상황은 “보수의 도그마와 이를 추종하는 패거리 자본주의 및 코포라티즘 (대규모 재계단체들에 의한 국정 장악을 지지)”하에 놓여 있다고 인식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다수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돈 많고 힘 있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행위”에 결과적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근원에 대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이 과거 공공시설에서의 흑백 분리를 규정한 ‘짐 크로우법’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보수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 인종 차별의 외양을 벗었지만, 보수주의 운동은 남부의 백인 유권자와 인종 평등에 반대하는 집단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과거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규정된 종래의 보수주의는 급격한 사회변화나 혁명 보다는 안정적인 전통의 유지라는 모멘텀을 답보했으나, 현재의 변형된 보수주의는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여러 책들을 통해 추정해 본 결과) 이들이 과연 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실로 진실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포데스타의 이 책에서도 약간의 실마리가 보여집니다만, 진보주의가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점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견고한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땅히 사람이라면 따라야 할 도덕적 책임과 개인의 양심과 같은 공통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어서 교리적으로 어떠한 강력한 연결고리가 없는 점도 명백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제가 누누이 입장을 밝혀왔던 전세계에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라서가 아니라 변형된 보수주의자들과 이 보수주의가 대체로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모호의 장막을 몇 겹이나 두른 채,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제적 자유”에 집중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자유주의의 제한적이면서 강력한 신봉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제가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책의 1장에서 꽤 면밀히 소개되고 있는바와 같이 미국에도 진보주의적 정치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허버트 크롤리와 제인 애덤스 등과 같은 정치적 사상가들의 면면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시어도르 루즈벨트와 우드로 윌슨 그리고 후에 케네디를 거쳐 린든 존슨의 진보주의 시기까지를 저자는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의 보편주의적 사고를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차용해 적극적으로 통치에 사용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를 차치하더라도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행정부가 엘리트 관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내각”으로 극복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뼈아프게도 트루먼 행정부 당시 메카시즘에 의한 광풍에 진보주의가 가담해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든 점은 저자가 꼽는 진보주의의 여실한 실패였습니다. 즉, 미국의 진보주의는 완벽히 사회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며, 개인의 능력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용인하면서도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정치를 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초기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가들은 열렬한 민주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소위 자유주의라고 인용되는 리버럴의 민주당의 오른쪽에 그리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공화당의 왼쪽 어디쯤에 속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1장에서 잠깐 언급되는 진보주의와 포퓰리스트들과의 관계에서 이 양자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는 저자의 판단에는 약간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독점 기업과 거대 자본가들 및 트러스트, 철도 회사 동맹의 기득권층이 과거 미국을 주도”했다고 밝혔는데요. 이처럼, 단순히 거대 기득권의 경제적 권력에 반하고자 탄생되었다고 포퓰리즘의 정치적 성격을 저리 규정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치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국의 진보주의와 포퓰리즘을 민주적 가치로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설사 그것이 정치공학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오해의 소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반지성주의와 엮어야지, 카스 무데와 같이 단순히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동인하는 요인 정도로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호프스태터가 비도덕적인 일종의 자본가들이나 기업 경영인들을 포퓰리즘 운동 한복판에 있는 이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없으나,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1980년대 뉴욕의 반이민 정서에 불을 질렀고,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적 경멸은 꽤 유명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이들이 단순히 다수의 민주적 정치의 참여를 북돋는 퍼레이드와 같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뒤이어, 2부에서는 이러한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의 정치적 과거를 비교하고 있는데요. 특히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전쟁 비용에 투사하고, 결국 중동에서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 정치의 이식에 실패한 것을 대체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저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남부 뉴올리언스시의 막대한 피해 복구와 관련해 늦장을 부렸던 당시 백악관과 희대의 무능이라 지칭해도 모자라지 않은 부시의 친구 ‘데이비드 사파비언’의 언급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의 성지에서 과연 대통령 친구가 낙하산으로 내려가도 되는가에 대해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최악의 결과가 뉴올리언스에 직격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파비언의 무능은 기사라도 잘 나와 있으니 여러분들도 쉽게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물론 각자의 정치적 태도에 따라 클린턴과 부시에 대한 평가가 다를수도 있겠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뒤로하고 사리사욕만 채운 대통령의 친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뭔가 거창한 역사 논법을 꺼내오지 않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포데스타의 이 책은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되는 논저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클린턴 내각에 참여해 당시 행정부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느껴지기도 한데요. 클린턴 행정부의 과오가 분명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심혈을 기울인 중동 평화 정착에 실패했고, 복지 부분에서도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지 못했으며, 인권을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의 행적은 아주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와는 달리 논외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글에 나오기도 하는데요. 1997년에 러시아 알렉산더 레베드 장군은 100개의 핵가방이 사라졌다고 폭로한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핵무기를 저런 식으로 관리하는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이 정말 암담할 정도인데요. 그래서 오사마 빈 라덴이 모든 수를 동원해서라도 핵무기를 손에 쥐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요. 저자인 포데스타도 짧게 표명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의 대 테러 전쟁이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더티 밤’을 소유한 소수 단체와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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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신적 삶 - 예속화의 이론들 철학의 정원 31
주디스 버틀러 지음,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 그린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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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받는 페미니즘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주디스 버틀러는 예일대를 거쳐 풀브라이트 장학금 프로그램으로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이후 웨슬리언, 조지 워싱턴, 존슨 홉킨스, 버클리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초로 퀴어학을 창안했고, 더불어 스스로는 레즈비언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한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 역시 교수이기도 한데요. 얼마전에 모 우익 방송에 출연한 우파 번역가가 주디스 버틀러를 단지 좌파 지식인이라고 규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일찍이 나치즘과 극단주의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표명할 정도로 상식선을 지키려고 하는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제가 그녀의 논저를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나 단순히 마르쿠제와 알튀세르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 인용자를 좌파로 규정해야 하는지와 젠더학과 페미니즘에 연구적 열의를 보인다고 해서 그냥 좌파로 만들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구심이 듭니다. 하물며, 아직도 국내에서는 좌파가 주는 어감에 적지 않게 ‘멸칭’의 의미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그녀의 논저를 다 섭렵하고 나서 그 이후에 뭔가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소위 우파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역시 그녀의 컨텐츠에 자주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버틀러가 요즘 과도화 된 페미니즘적 돌출로 국내에서 꽤 오역이 되고 있는 점은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 점도 꽤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동성애와 퀴어에 반감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디스 버틀러를 그 시조로 격상시켜 그녀를 욕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1997년 “The Psychic Life of Power : Theories in Subjectio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강경덕 선생을 비롯한 두 분의 번역가가 번역에 참여했는데요. 난해한 철학 논저의 번역 치고는 꽤 훌륭한 번역이라 할만 했습니다. 번역자들의 노력이 깃든 글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이 책을 손에 들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와 인종차별에 대한 ‘불균형한 권력’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 책의 본질로 여겨졌으나,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매우 빗나가고 말았는데요. 총 6장의 분량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글은 뒤의 5장과 6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취급한다면 1장부터 4장이 주요한 본문이며, 앞선 장에서 논의된 본론에 이어 사실상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에 의한 결말을 열어놓은 (보이지 않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버틀러는 이 글에서 강력하게 밝히고자 하는 점은 고유한 영혼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주체와 주체성 그리고 이 개인들의 내면에 이어지는 몸과 영혼의 본질적 관계와 이들의 겉과 속의 정체를 통해 권력이 어떤식으로 작용하고 어떤식으로 표출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표방하며 탐구해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 헤겔과 니체, 푸코 및 알튀세르를 통해 버틀러 자신의 고유한 사유체계를 제시하는 것 보다는 앞선 주체의 선각자들의 사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추렴해 그것의 대응방안과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데 노력하고 있는 것이 엄밀히 다른 철학적 논저들과는 구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알튀세르는 주체와 주체성과 관련해 전자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풍부한 이론을 확장시켜 왔지만, 후자인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많은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이 주체라는 관념에 대해 상이한 의견들이 산재해 있기도 한데요. 과연 개인이 주체를 바탕으로 삶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과 주체가 그 스스로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있어왔습니다. 저자인 버틀러는 이에 주체란 “존재와 행위성의 언어적 표현”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행위성과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 논란이 들어차 있는데요. 이것은 언어가 그 자체로 행위의 담론을 답보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불확실성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점은 “주체가 종종 사람이나 개인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가”로 의문시 된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데요.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언급한 “인간의 불확실성”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인간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육체와 영혼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주체라는 ‘제2의 객관성’을 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중점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이러한 철학적 담론을 담은 글들은 자주 동어반복적인 의미와 매우 빈번하게 양가적이고 치환적인 언어들을 남발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발이라는 저의 표현은 꽤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철학적 용어 조차도 철학자들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규정되고 또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 의무 또한 요구되기도 합니다. 저는 앞선 주체가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이것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개인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와 이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또 어떤 식으로 규명되는지에 글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권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가 있어야만 하나, 이러한 필연성은 주체를 권력의 기원으로 만들지 않는다”와 같은 해석은 이 글 3장의 푸코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철학적 연원을 살펴 볼 수 있었지만, 대체로 일개 독서인이 이해하기란 턱이 높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군요. 우리가 육신과 영혼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육체의 단순 원리로서 영혼의 지배나 제어를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구조로 여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서장에서 계속 확장되는 일종의 외부인 사회 규범들의 내부화를 통한 영혼의 내면화와 더 나아가 주체가 권력에 의한 남용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예속화가 진행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예속화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렇게 예속화가 된 자신의 거울은 무엇을 뜻하는 것과 같은 수많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뇌리를 스쳐가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1장에서 푸코가 질문했던, “이 주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놔두어야 하는가”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주체와 관련해 푸코는 “현대 정치학의 핵심은 더 이상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생산되고 유지되는 규제 메커니즘을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것은 예속과 욕망의 문제, 그리고 권위에 제약된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영혼이 육체의 제어 상실이라는 불안한 의식의 근원에서 ‘노예적 상황’이 도출되며, 이러한 장면을 해석하는 수많은 회의주의자들과 육체의 소멸이라는 최종적 파멸에 따라 인간은 불변의 영역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경멸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헤겔의 평가는 꽤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자기 불안정에 따라 인간은 욕망을 우선시하게 되기도 하고, 상반된 내면의 감정으로 이런 욕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금지를 강요하기도 하는데요. “금지는 금지된 욕망의 삭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 금지된 욕망의 재생산을 추구한다”는 일종의 저자의 양가적 해석을 도출하게 됩니다. 욕망의 금지를 통해 인간의 고난의 길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보인 니체를 차치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욕망이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은 사뭇 의미심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법이 육체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원천적인 기능으로 도래되었다 하더라도 헤겔은 ‘불행한 의식’에서 함의하는 도덕적 비참함이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에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육체의 존재를 언제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비참함의 추구와 애착은 최종적으로 예속화의 원인이자 결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는 아예 애착하지 않는 것보다 고통에라도 애착할 것이기 때문에” 애착 자체가 자극이 되어 욕망하려는 의지가 될 수 있다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한결된 주장은 주체와 규제된 권력의 관계가 어디까지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에 들게 합니다.

뒤이어 2장의 양심의 가책의 순환이라는 장은 특히 심리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꼭 읽어봐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양심과 양심의 가책을 논하면서 앞선 것들을 기반으로 도덕성과 도덕주의에 대한 니체의 판단을 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이 어느 정도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미 우리게 친숙한 것이다”는 버틀러의 평가는 꽤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내면의 예속화를 가속화시키는 금지의 언행은 어쩌면 영혼에게 폭력에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양심을 강화하는 도덕성은 어느 정도 폭력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나아가 버틀러는 “나는 폭력에 대항하는 주체가 실은 이전 폭력의 효과라는 것, 심지어는 폭력에 자기 자신을 대립시키는 주체도 그러하다는 점을 보이려고 한다”고 언급하는데요. 앞선 서장에서 ‘상실의 상실’이라는 논법과 비슷한 양가적 측면의 해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앞선 양심으로 돌아가서 니체는 죄와 빚의 예시를 통해 양심을 분석하고 있지만, 상이하게도 버틀러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속을 어기는 행위에 가담하는 내면성의 가공이자 의지의 불연속성이다”라고 꽤 내밀하게 설명합니다. 다분한 약속의 어김에 대해 양심의 논법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신속히 알려주고 이를 통해 양심의 작동 원인이 내면의 메커니즘이라는 것 또한 전달됩니다.

3장은 푸코의 주체화에 대한 논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푸코는 주체화 자체가 “주체로 되기와 예속화 과정” 모두를 지칭한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육체가 영혼을 담는 일종의 감옥이라고 여기는 철학자들이 많다고 봤을 때, “정신은 정확히 일관된 정체성 속에 머물러야 하며 일관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적인 요구의 감금효과를 초과하는 그 무엇이라고 해석됩니다. 뒤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과 주체를 비교 규명하고 이를 통해 다시 푸코의 결론에 이르는 “주체는 절대로 예속화 과정에서 완전히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을 이루는 담론의 외부인지 아니면 말해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어져야만 한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규명에서 이 육체는 감금효과로 비유된 영혼의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어떤 작용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4장은 사실상 이 책의 복합적인 결론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요. 푸코의 주체에 대한 규정과 한계를 통해 명백히 이 점을 차용한 알튀세르가 말하는 주체와 양심을 좀 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죄의식’에 대해 논의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와 죄의식의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수의 사람들은 법의 목소리에 순응해 개인의 내면의 양심의 발동과 유사한 ‘법에서 돌아섬’을 설명합니다. 돌아섬은 부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법과 수취인 양자에서 규정되는 이 돌아섬은 결국 “정체성을 향한 기대의 움직임”이라는 표현으로 꽤 상대화되기도 합니다. 이에 알튀세르는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논법에서 그리고 주체적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돌아섬을 차용해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지젝과는 다른 슬로베니아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믈라덴 돌라르의 ‘알튀세르에 대한 재해석’을 저자는 글에 차용하고 있습니다. “강한 데카르트적 반향’이라는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대해 돌라르는 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반대로 주체의 문제가 주체성의 문제와는 사뭇 다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돌라르는 이를 명확히 구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한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체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안과 바깥 개념에 대해 돌라르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물질성과 관련해 알튀세르와는 달리 해석하고 약간 신학적 개념으로 이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술된 글을 통해 짐작되기도 했는데요. 또한 뒤이어 니체식으로 해석된 주체에 있어서 정념과 법의 문제 그리고 욕망의 문제 등 앞으로 주체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철학적인 질문들을 계속 해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꽤 산만하고 장황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지금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가 버틀러의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선 약간의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앞서 소개해드린대로 저는 이 책을 ‘세계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해부’라고 여기고 골랐으나, 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른 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각 개개인이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갖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을 포함해 이론적 근거의 다양성을 꽤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일찍이 미국에서도 버틀러의 글과 사상은 매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좀 더 얼마간의 책을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의 좀더 세밀하고 수준높은 서평을 기대하며, 저의 부족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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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세계 경제 -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의 충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장에르베 로렌치.미카엘 베레비 지음, 이영래 옮김, 앤서니 기든스 추천 / 미래의창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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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툴롱 출신의 경제학자인 장에르베 로렌치는 1992년 설립된 이코노미스트 서클의 창립자이자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는 1975년 파리 13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시작으로 1979년 프랑스의 다국적 광고회사인 하바스 그룹의 회장을 거쳐, 뒤이어 프랑스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고, 에디트 크레송 총리의 경제 자문을 맡는 등 프랑스 내에서는 꽤 유명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저자인 미카엘 베레비는 파리고등경제상업학교 ESSEC 의 이력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의 다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앤소니 기든스가 추천사가 실려 있다는 것이겠죠. 이에 ‘유럽의 산업 공동화’와 ‘영속적인 부채 현상’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기든스는 전체적으로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남겼습니다. 지난 2015년 출간된 불어 원제는 “Un monde violences. Leconomie mondiale 2016-2030”로 국내 번역은 지난 2017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

먼저, 이 글은 총 7장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요. 약간 뜬금 없기도 한 와해성 기술 Disruptive Technologies 에 기반해 해석한 현재의 기술 정체를 논한 1장은 업계를 완전히 재편성할 신제품과 기술들의 출현과 앞으로 미래의 한정적인 자원으로 비롯되는 ‘둔화’와 그것에 이어지는 새로운 경제침체와 문제점들을 도출시켜 뒤이어 이어지는 2장부터 6장까지의 논거를 뒷받침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2장과 6장은 7장에서 저자가 언급하는데로 사실상 앞으로 세계 경제가 직면할 위기로써 좀 더 면밀히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즉, 전세계의 노령 인구의 증가, 폭발적인 불평등의 문제, 선진국에서 비롯되는 산업공동화 현상, 자본주의를 더 왜곡하는 금융화의 존재, 그리고 빈약한 저축과 그나마도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각 주제별로 진단하고 그것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지정된 답변들이 면밀한 해결 방안이라고는 평가하기 어려웠는데요. 특히 3장의 오늘날 민주주의와 소득 재분배와 관련된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들의 불확실성에 대해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따로 언급하겠지만 지금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시장의 권한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강요되어 왔던것을 저자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러한 사정을 짐짓 모른척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이 점을 경제학자들의 ‘외눈박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다소 인신공격에 이를 수 있으니, 대충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순서대로 2장에서는 갈수록 더해지는 전세계의 노령 인구화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소위 전통 경제학자들은 노령화는 역동성의 결핍, 둔화, 약화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 현상이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결국 노인들이 받는 의료와 복지 혜택에 관련한 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하는데요. 이 장의 후반부에서 인정하는대로 시민은 누구나 “균일한 생활 수준”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데 앞으로 증대되는 노령인구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선진국이나 개도국 할 것 없이 추가된 복지비용이 필요할 것임은 자명해보입니다. 다만,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아직도 노인의 복지와 건강유지를 위해 가족 단위의 비용 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 점은 서구 사회와 약간 다른 부분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나 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에게도 지속적인 경제 부문의 성장 유무와는 상관없이 지금도 적잖은 비용을 노년층을 위해 지출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들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방해 요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노년층의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세대별의 갈등은 단순히 경제학적 논법으로 풀 수는 없으며, 사회학적인 접근과 복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분석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꽤 동의할 만합니다. 특히 저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또는 앞으로의 노년계층의 문제에 천착하기 전에 “전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어려움, 고통, 불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데요. 이런 불균형을 맞춰 나가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꽤 박수를 줄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3장은 특히,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취지대로 장의 제목 역시 “불평등의 억누를 수 없는 폭발적 증가”인데요. 이번 장에서 논의대는 주장들을 간략히 추려본다면, 현재까지 자본주의의 주요한 가치가 되고 있는 자유주의와 시장 자유주의와 관련해 “자유 시장 체제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은 개인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여기에는 모두를 극빈자로 전락시키는 평등주의 체제와 반대로 인구 성장에 대한 제약이 수반된다.”고 저자는 논의를 더하고 마찬가지로 모두를 하향 평준화 시켜 빈곤에 이르게 하는 무분별한 평등주의에 대해 일종의 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개인들의 이익 추구가 “국가 번영의 원천을 이루는 활동”이라는 소위 대의에 이른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과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의 확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나,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불평등을 감수해도 되느냐 혹은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 보장에 국한시켜 결과적으로 민주 정치를 토막내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버트 스펜서류의 ‘아주 자연스런 현상’으로 치부해야 되는지는 저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용인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존중을 받고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구성원 대부분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통해 불평등이 상쇄되는 경우에 한해서다”라고 저자가 설명하는 것은 꽤 합당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서는 과거 대럴 M. 웨스트의 “부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실로 적절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는데요. 즉, “민주주의는 자본 도피와 탈세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정치 정당과 같은 법률상 기관을 비롯한 엘리트에게서 나오는 사실상의 위혐요소를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상 경고에 기인합니다. 그동안 엘리트 관료들과 부유층은 민주 정치 자체를 민중들에 의한 중우정치로 취급해 그 불확실성을 경계해 왔는데요. 이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원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결국 법과 제도하에 돌아가는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권력들의 야합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협력을 통해 막대한 부유층과 경제 기득권들이 국가 권력의 징세에 맞서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한 메커니즘에 사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여서가 아닐까 고민해봤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민주주의가 평등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오로지 ‘발 하나로 지탱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것에 집중해 온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본을 갖고 있는 계층의 조치라기보다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절차 속에서도 민주주의가 사회의 불평등을 얼마나 늘려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뒤에 나오는 앞으로 미국의 중산층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껴서 절멸할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고, 또한 시장 자본주의의 강요가 불러 일으킨 민주주의의 약화를 먼저 전제하지 않고 민주주의 절차적 이행과 그러한 이면의 취약점을 물고 늘어져 저자들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다소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 아닌지 이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4장은 간단히 말해, 세계화의 끔찍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늘날 선진국들에게서 산업공동화가 나타났다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값싼 노동력을 위해 쉽게 이전과 이동이 가능한 현재의 다국적 글로벌 기업들은 기존의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끼칠 만큼 기존의 산업 국가들에게 산업공동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티글리츠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공장 이전과 관련해 좀 더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저자들은 전반적으로 “1790년부터 1820년까지 영국이 기술적 진보 상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면에서의 보호주의 때문이었다”라고 덧붙여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경제의 자유화 흐름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나 기존의 지역 사회가 붕괴되는 산업 이탈에 대해서는 적당한 규제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선 보잉의 사례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앞선 이 ‘불안한 세계화’와 관련해 미국이 본보기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필요한 개혁에 착수할 것을 요청하고, 여기에는 또한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보존하는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글로벌화에 따른 전구적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아직도 국민국가주의적인 대처 방안에 기대를 갖고 있으며, 대니 로드릭이 세계 정부에 극도의 회의를 보인 것과 같은 공감을 역시 글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민국가주의적 민주 정치의 부활과 강조가 분명 세계화의 문제에 어떤 대응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다소 동의하기도 합니다만, 마찬가지로 기후 문제와 관련된 문제 등과 같이 전세계적으로 의견 제시와 합의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이민 정서에도 이러한 합의가 필요하지 않나 고민해봤습니다.

5장은 현재 기형적으로 돌출된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의 금융화가 과연 탈금융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방대한 ‘유동성’으로 인해 남아도는 여유 자금을 다른 투자처에 투입하는 것은 소수의 부유층을 비롯한 다수의 경제 행위자들에게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경제 주체와 괴리되었다가 이제는 모든 기업들을 좌지우지 하게 된 모든 분야에서의 금융화는 필연적으로 충분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기업들의 경영 자금 조달이라는 일차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기업의 경영권을 위태롭게 하는 동시에 채무조차도 증권화하여 수익으로 남기는 이 비정상적인 행태에 소수의 이익자들에게만 막대한 돈이 돌아가는 것은 유동성의 위기를 논하기에 앞서 다소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카지노 자본주의’로 설명되는 금융의 세계화가 제어되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은 그 해결 방안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불명확합니다만, 지금부터라도 학자들과 경제 부문의 종사자들이 의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연금 기금과 복지 기금들이 수익을 위해 금융 시장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에 환경 개선의 필요성이 시급해 보입니다.

끝으로 6장에서 논의되는 저축의 필요성은 현재 기존의 과다한 저축률에 비견해도 직접적인 투자에 이르지 않는 것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왜 저축을 가장 희소한 자원이라고 했는지 공감이 갑니다. 단순히 저축의 확대를 금리 인상에만 기댈 수 없듯이, 그나마 꾸준한 저축 이면에는 자금이 산업계나 필요한 투자처에 공급되지 않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5장에서 연계되는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1차와 2차 산업이 주로 개도국에 집중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다국적인 저축 자금이 과연 이들 국가에 투자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글의 마지막 결론에 저자들은 고통의 분담화와 같은 소위 당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환경 오염 산업의 개도국에 대한 아웃소싱으로 인해 과연 선진국과 개도국간들 간에 투자를 비롯한 상생하고 발전적인 협력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현재 프랑스와 같은 유럽국들과 이들의 피식민지배국이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를 비추어 봤을 때, 명확합니다. 전반적으로 저축과 투자의 불균형과 과거 미국인들이 사실상의 중국계 자금으로 신용 생활을 했던 것과 같이 부분적인 세계화의 현실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즉, 저자들이 본질적으로 현재의 세계화는 반-세계화 semi-globalization 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점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번 이런 글들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은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가 세계 수준의 영향력과 파급을 생산해 내고 있지만, 다수의 경제학자들과 경제적 담론을 만들어 내는 지식인들이 체제의 균열을 비판하지 않고 오로지 단순하게 체제 옹호에만 나서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합니다. 또한 경제학자들이 앞으로의 남은 21세기를 불안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될만한 이론이라든가 대안 제시를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12장의 이러한 위기들을 건너는 방안에 대해 일부의 의견 전환과 관점의 재시도 또한 분명 필요하지만, 자본주의 전반이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개선의 시급함을 모두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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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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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젠더학과 페미니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는 낸시 프레이저는 실제로는 후기구조주의에 입각해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중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만, 근래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연구가 큰 화두가 되면서 관련 학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그중 국내 출판계에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프레이저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악셀 호네트의 연구와 함께 사회정의 및 정의론에도 관심을 갖고 어쩌면 여성주의 운동 또한 이런 정의론에 입각해 해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프레이저의 연구가 약간 난해하다는 평가도 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적절한 사회학적 지식 배경이 갖춰져 있지 않는다면 상당히 읽기 지루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토마 피케티에 의해 새롭게 점화된 정의론에 대한 최신 경향과 이론을 인지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꽤 어려운 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8년 원제 “Scales of Justice :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lbalizing World” 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대담을 포함한 마지막 장을 포함해 총 9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었는 글의 전체적인 구조는 특히, 요즘들어 자주 요청되는 정의론에 대해 그녀는 새롭게 인식과 배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화 시대’에 헌법에 의한 사회 정의 및 국가적 정의론의 주된 배경이 되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한 국민국가주의가 사실상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주된 논거를 확대하는데요. 이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라는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생산기지를 값싼 노동력을 따라 수시로 이전함에 따라 더이상 자본주의의 이전 제약이 없어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약간 논란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해당 사회에 정착한 기업의 생산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속지주의에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기업의 국적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정치적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가 강조하는 오늘날 비정상적 사회에서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 무시, 대표 불능의 문제”에 따른 정의의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에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과거 베스트팔렌적 국민국가주의는 오늘날 영토국가의 규제력과 세금 부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본질과 이 세계화 시대의 진실된 면모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이런 낸시 프레이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이러한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과 수많은 부유층들이 “시민들이 법 앞에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보았다”는 이들의 본심이 ‘과연 사회에 정의가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합리적 대응에 필요한 정의를 저자는 ‘삼차원적인 정의’라 표명하고 이에 “경제적 분배 차원 및 문화적 인정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대표 차원’을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삼차원적인 정의와 관련해서는 제일 마지막인 정치적 대표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요.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아예 배제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이 점은 뒤에 4장에서 이어지는 대로 ‘비정상적 사회에 종속된 사람들의 정의’는 그 대표성과 정의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며, 이것을 사회과학자들이나 사회철학자들에게 그 범주와 인정을 맡기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프레이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비정상적 사회에 놓여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인정과 운명을 소위 전문가들인 사회과학자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물론, 광범위한 정의를 주장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한 두 가지의 독단이 있다면서 프레이저는 3장에서 언급하는데요. 정의와 평등에 관한 의견 불일치에 따른 논쟁도 없이 국민만을 ‘당사자’로 규정하는 암묵적 가정과 표준 사회과학의 정의의 ‘당사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무언의,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일종의 베스트팔렌적 국가의 한계로 후자는 사회과학의 증거와 이론적 가정에 따른 이들이 ‘당사자’를 결정하는데 시민들의 맹신을 비판하고 있는 보였는데요. 사실 뒤이어 5장에서도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더불어 이런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이 국가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구조적 힘들이 무엇이냐”에 일부 해답이 바로 이 사회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맹신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과학 주류에서 통용되는 내용들은 기득권자들의 관점을 잘 반영하고 그들의 약점을 방어하기 마련인데, 이런 사화에서 과학주의적 가정을 채태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저자의 예견과 일맹상통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또 달리 말하면, 시대의 지식인들이 현재의 기득권과 결탁해 일찍이 신자유주의의 교조인 하이에크가 주장한 ‘정의 따위가 필요한가’에 매우 근접한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의 요청과 필요성과 관해서도 모두가 강제로 ‘결과주의적 평등’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주목해야되는 평등은 ‘출발선상에서의 평등’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

곧이어, 다음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적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런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요구들을 공정하게 검토할 수 있는 상대적인 안정틀이 필요하고 둘째로, 부정의를 시정할 제도화된 기관과 수단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휴머니즘적 원칙들이 결함을 가진다고 보았을 때, 우리 모두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 all-subjected principle에 따라 포섭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두가 인식하는 공통된 원칙을 가질 것을 일종의 정의를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규범화된 원칙은 이래서 매우 시급하며, 어쩌면 그런 연유로 사회과학자들의 각종 이론 제시는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는데요. 다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의 파편화와 시민들의 파생적 종속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여론의 돌출과 이를 이론화 시키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론은 분명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별반 언급은 안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조언 보다는 직접적인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의견 일치 및 광범위한 규범화를 더 인정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결과론적인 입장은 매번 엘리트 정치와 전문가적 조언이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주 정치 자체를 우리의 손으로 영위해 가는 중요한 가치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첨언으로 얹고 싶습니다.

끝으로, 6장과 7장 그리고 8장은 보는 독자에 따라서는 주제의 중요성을 구분하는 장으로 여겨질 수 있을텐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들 3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장의 여성주의적 상상력은 말 그대로 시급한 정의와 5장에서 논의되는 좀 더 효과적인 공론장의 역할에 대한 첨언이 될 수 있으며, 7장의 푸코, 8장의 한나 아렌트의 지구화시시대의 인류의 위협에 관한 부분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에 대해 따로 추려볼 수 있는 부분은 그녀가 일찍이 지구화 시대의 시민 권리의 축소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경고하는 다방면적인 증거 제시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악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일일이 분석했던 사상가로서 다른 어떤 사회학자나 철학자에 비해 그녀의 철학적 담론은 충분히 시민들에게 깊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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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 - 미국의 세계 지배와 힘의 논리
노암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인 노엄 촘스키는 세계 지식인들 가운데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인이자 현실의 부조리들을 선명한 양심에 따라 가차없이 비판하는 소위 ‘인류의 양심’이라 불릴만한 지성인입니다. 현재 MIT의 명예교수로 있는 촘스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정력가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와 관련된 한가지 특이한 일화는 미국 CIA가 그를 지속적으로 감시해 왔다는 점이었는데요. 아마도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더불어 생전의 지그문트 바우만과 촘스키가 서로 만나 정치와 사회 비판을 주제로 작은 대담집이라도 기획이 되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사뭇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Rogue States”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이듬해인 2001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아마 독자분들은 제목만 보고선 과거 조지 W. 부시의 테러지원국이라는 리스트가 올라간 그 담화를 떠올리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저자인 촘스키는 제목과 관련된 설명을 서두에서 하고 있는데요. “정치적 담론의 많은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불량국가 rogue state’란 용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선별된 적국들에 대해 적용하는 프로파간다로서의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국제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국가들에 적용되는 문자 그대로의 용법이다”라고 이어집니다. 물론 이 책에서는 미국을 후자에 빗대어 비판해내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중동의 권위주의적 종교 독재 국가들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은 과거 전 국무장관인 조지 슐츠가 말했던 대로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를 무시하고 유엔이나 국제 사법재판소와 같은 중재기관에 호소하는 유토피아적, 법률주의적 수단”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오로지 국익이 우선이라는 교리는 특히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며, 사실상 미국이 그러한 지위를 꽤 적나라하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큰형을 자처하면서도 행동은 그 반대가 되는 아주 역설적인 행태인데요. 니카라과와 아이티, 파나마 등에서 벌인 민중이 주도가 된 민주정치를 거부하고 다루기 쉽다는 미명하게 군부 독재 정권을 지원했던 미국 정부의 과거 이력은 우리와도 꽤 밀접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기분탓일까요.

사실 촘스키가 쓴 이 글에는 실로 소름끼치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터키와 이라크가 쿠르드족을 말살하기 위해 사용한 화학무기와 국가 폭력의 현장,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동티모르인들을 학살하면서도 당시 빌 클린턴이 이런 수하르토를 두고 ‘우리 사람’이라고 했던 것, 미국 정부에 의해서 콜롬비아에서 화학 및 생물학 무기가 사용되었던 것 등은 실로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 미국이 비합법적으로 파나마와 그레나다 및 쿠바에 군사적 침공을 벌인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앞마당이라고 부르는 남아메리카에서 군사 정권을 지원하며 벌인 일들은 단순히 역사의 불행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총 14장의 구성 중 7장까지는 앞에서 짧게 열거한 국가들에서 미국의 CIA와 군대 및 국무부가 벌인 일들을 UN을 비롯한 국제시스템 기반의 체제를 불신하고 반하게 된 원인들(물론 주요한 이유는 미국의 국익입니다)과 8장부터 14장까지는 2차대전 전후부터 마셜 플랜과 브레턴우즈 체제를 거쳐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유주의가 미국 국적의 집산 기업들의 이해에 맹목적으로 따르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진보에서 멀어지는 퇴행의 정치사회적 결과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소 냉전시기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첨예한 대결에 대해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체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이념 대결에서 남미와 아시아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를 좌파로 몰아가 탄압한 많은 군부 독재 정권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이 있었으며, 브루스 커밍스가 일전에 언급한대로 아시아의 여러 외교무대에서 미 국무부 장관이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을 양쪽에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후견국과 피후견국의 관계의 역사를 엿보았습니다. 과거 미국은 지역 안정과 자신의 국익의 부합이라는 미명하에 다루기 쉽고 말을 잘듣는 독재 정권들을 지원하였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이라크의 후세인은 오판하여 그러한 대열에서 이탈해 결국 미국의 응징을 받았다고 촘스키는 설명합니다. 우드로 윌슨의 도미니카 공화국 및 아이티 침공은 미국의 국익 우선이 어느 선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꽤 합리적이고 진봅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 아이젠하워 조차도 과테말라에 군사 개입을 시도해 현지에서 야만적인 억압과 고문의 시대를 열었다는 일편의 평가도 초강대국의 국익 우선이 어떠한 파급을 낳는지 감히 재단하기도 힘듭니다.

“법의 규제를 거부하는 불량국가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이러한 (유엔의) 해결책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국제 시스템의 무용론은 과거 미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수많은 거부권을 해온 것에 기반합니다. 또한 자의적으로 해석된 인도주의적 개입은 막상 소말리아나 앙골라와 같은 적극적 개입이 필요한 국가에는 유명무실했는데요. 만약 이들 국가에 원유라도 묻혀 있었다면 그 결과는 아마 다르게 나타났을 겁니다. UN에서의 각 가맹국들의 권한은 자신들 스스로 자결권과 침략에 대한 방어권을 갖고 있음에도 강대국들의 ‘인도적 개입’이라는 선별적 선택에 의해 체제 자체가 만신창이가 되었고, 꼭 필요한 인도적 지원에는 미국이 눈을 감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요. 특히 인도네시아 특수군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인들의 학살과 관련해 당시 미국 정부가 호주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평가는 이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나라로 묘사하는 것은 자행행위이다” 라든지, “우리는 적대국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국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닉슨의 미치광이 논리는 무력이 없이는 국제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촘스키의 설명에 단순히 맞아 떨어진다고만 봐야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책에 노엄 촘스키는 전반적으로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정도로 자신의 정부와 과거 불법적인 군사외교정책에 서슴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데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위하는 많은 국제정치학자들과는 다른 변치않는 양심에 걸맞는 그의 논법이라 할만 했습니다. ‘미국의 명령을 거부한 국가가 불량국가’라는 촘스키의 해석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아예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만, 베트남과 관련한 정치적 셈법인 “미국이 두려워했던 것은 이들이 결국 독립적인 아시아 지역을 형성하면서 일본식으로 발전하여 미국의 통제를 벗어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의 산업중심지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비평에는 다소 동의하기는 힘들었는데요. 베트남이 파란색이 아니라 다소 붉은끼가 감도는 국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역외 균형 Offshore Balancing 전략을 베트남에 적용할 정도로 이 소국이 지역내의 대두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일종의 예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는 이 책은 오늘날 강대국의 국익에 대한 논법과 이와 관련된 비현실적으로 비합법적인 행태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읽어봐야 하는 글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현대 외교의 창안자이자 영향력있는 과격한 현실주의자인 헨리 키신저가 촘스키의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역시 이 글을 완전히 부인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점의 차이라는 미명하에 수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될까요? 과연 미국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솔직히 물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현실은 대부분 “어떤 공식적 금지를 할 필요도 없이 어둠속에 갇혀 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26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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