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권력의 시대
마이클 페렐먼 지음, 오종석 옮김 / 난장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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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손꼽히는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경제사학자인 마이클 페렐먼은 미시간 대학을 거쳐 버클리에서 농업경제학에 관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당시 경제학계의 큰 족적을 남긴 조지 쿠즈네츠의 사사를 받은 펠렐먼은 이후 사회경제 분야와 관련해 다양한 관심을 갖고 진보적 경제학의 틀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삼는 등의 여러 연구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진보적 매체인 먼슬리 리뷰에 글을 기고한다던지 미디어 매터스와 퍼시피카 라디오 등의 여러 방송에서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등의 학자 이외의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올해인 2020년 9월 21일 캘리포니아 주 치코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명에 대해서는 구글링을 통해서도 나오지 않고 있는데요. 어찌됐든 이런 저명한 경제학자가 세상을 등진 것은 매우 아쉬울 따름입니다. 일단 그의 여러 저서들 가운데 특히 ‘자본주의의 발명‘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하지만 국내에는 그의 논저들이 많이 번역되지를 않아 아쉬움이 크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Manufacturing Discontent : The Trap of Individualism in Corporate Society˝로 지난 200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글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원제를 국역한 책의 제목이 내용 전반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원제를 그대로 번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을 통해 저자인 페렐먼이 밝히고자 하는 점은 ˝오도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업들의 거대 권력화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해 미국의 소름끼치는 상황은 낙농축산계의 우유 생산에 있어 배설물과 여타 오염물을 방사선으로 처리해 출하하고 있는 현재 미국의 상황과 이러한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로비 시스템‘이 사실상 소비자 주권을 무력화하는데 힘쓰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2장에서는 이 소비자주권과 관련해 오히려 기업들이 많은 소비자들에게 ‘과시적 소비‘를 확대하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무력화시키고 있는데요. 전통적인 경제학 측면에서도 애덤 스미스 조차 노동자들의 소비활동에 대한 꽤 윤리적인 문제 등을 다뤘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날이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현재의 많은 사회들에서 보여지는 양보와 지원책을 좀 더 배타적으로 유지하고 기득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은 깊은 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캘리니코스가 오로지 이익만을 취하려는 기업과 그 반대의 세금 부여, 사회적 책임 등은 사회와 시민들에게 전가하는 이러한 행태들을 마찬가지로 강하게 질타한 바가 있습니다.

앞선 개인주의에 돌아가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개인주의와 대규모 기업들이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그것은 매우 결이 다르다 할 수 있을겁니다. ˝소위 노동자를 굴복시키는 기업 개인주의 즉, 기업형 개인주의˝는 사회의 많은 시민들에게 ˝개인의 역할이란 것은 오직 부지런히 일하고 동시에 적절히 소비하는 것˝이라고 주입합니다. 많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이렇게 개인들을 파편화시켜서 오로지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 전락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자본주의가 태동한 시기가 그리 짧으면서도 어떻게 민주주의를 비롯한 유구한 정치철학의 과거를 무너뜨리고 어떻게 이토록 빠른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참으로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 특히, 기업이 효과적으로 운영됨에 따라 그것의 실리를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들이 얻게 되고 이러한 선순환이 지속된다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주장들이 현재에 어떤 식으로 파행적 결과를 낳았는지는 ‘프레카리아트‘ 및 개인의 파편화, 복지 제도의 유명 무실화 등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4장 기업의 책임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환경오염과 같은 일련의 도덕적인 불감부터 자행되고 있는 여러 기업들의 범죄행위에 있어 법률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큰 우려할 만한 사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미국과 같은 나라는 일반 개인들이 거대 기업들을 상대로 제기할 수 있어야만 하는 소송과 관련해 여러 막대한 비용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소송 자체에 대한 접근을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사법 시스템 자체가 비효율적인 측면을 떠나서 다소 기업 친화적인 편견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미 사회 계약에 따른 법치주의와 법 제도의 근간이 자본주의화에 따른 매우 불합리한 기업들의 권력화가 이러한 사태를 조장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다음, 6장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 저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경제 정의에 입각해 법 테두리 안에서 이어나가야 하는 기업의 운영 법칙들이 어떻게 불식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와 전통적인 자본주의 간의 인식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현재까지 자본주의 자체가 고도화 된 금융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다 받아들여도 거의 무방합니다. 전세계 금융의 역사에서 지난 2008년에 있었던 뉴욕발 경제 위기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않는 사태는 모든 기업들의 윤리적 함의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선 개인주의를 기업이 변형시켜 배포한 기업형 개인주의가 사실상 윤리와 도덕 문제, 더 나아가서는 법의 문제를 ‘탈각‘시키는 쪽으로 시스템 전반의 변화를 기업들이 획책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2008년 당시 거대한 도덕적 해이와 대마불사와 같은 ‘이득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손해와 책임은 사회에‘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자들이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는 충분히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라구람 라잔과 누리엘 루비니 더 나아가서는 하이먼 민스키 정도로 대변되는 정상론자들을 무력화시킨 작금의 금융 자본주의가 과연 모든 시민과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겠느냐는 그 결과의 도출이 매우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글 중간에 저자인 페렐먼은 ˝현재에 지속되고 있는 테러의 위협에 투입되는 돈 만큼 기업의 위협과 불안에 대비해 투입되어야만 하는 돈의 총량˝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테러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즉각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이 방만한 기업들의 권력 독점에 대해서는 왜 국가가 제대로 나서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 시민들의 무력감은 차치하더라도 소위 보수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로 이 글 마지막 8장에서 저자는 약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자유방임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개인들이 가지는 민주적 권리는 시장 경제의 소중한 미덕 중 하나˝라는 주장에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멋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전자의 가치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뒤이어 진술된 내용들이 마땅히 따라오는 시장 내부에서의 정치의 퇴장과 선거의 모순 등이 나오는데요. 전반적인 시장의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가 자초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기업들이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제거하는 데 몇십년에 걸쳐 노력해 왔지만 소위 ‘먹고사니즘‘에 따른 일방적인 강요된 개인주의화에 대해 제대로 저항하지 않은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죠. 전반적으로 시장과 정치에서 시민들을 괴리시키는 일련의 정치경제적 작업에 우리 시민들이 어느 정도의 파급을 갖고 있겠느냐의 문제를 잠시 제쳐놓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 최소한의 의구심을 우리가 견지하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히, 샹탈 무페가 강조했던 바대로 전 사회적으로 좌파들의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인해 몰락한 것은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는 것을 방조하고 기업들의 문제들을 수수방관하는 데 도움을 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역시나 지금으로선 기업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시민들의 힘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대체적으로 그동안 자본주의가 기업 경영에 대한 어떤 성역을 강요하고 기업 전반의 자율권을 배타적인 권리 등으로 포장한 일련의 사회경제학 과정을 철폐하는 데 힘써야만 앞으로 50년의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는 리스크를 감내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취급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자리가 부족한 시대에 기업이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더 공익적이라는 게 되어버렸다.

소비자 주권이라는 수사가 맞다면 기업들의 존재 이유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 위함에 있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선택을 하면서 시장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게 돌아가도록 내버려두게 만드는 여러 전제 조건들 중 가장 필요한 것은 대중이 완전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갈수록 정부가 학계로부터 오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 막대한 힘을 쏟아붓는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이 좋아하는 학자들에게는 연구비를 대주는 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연구결과를 제시하는 학자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인댄다.

회사의 이윤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기업이 환경 오염을 발생시키면 사회전체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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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숨겨진 부 - 국가에 내 행복의 책임을 묻다
데이비드 핼펀 지음, 제현주 옮김 / 북돋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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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영국 노동당 정부인 토니 블레어 정권에서 관료를 역임한 데이비드 헬펀은 주로 실험심리학에 근거한 사회 분석 및 인간 심리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영국 국내에서 국민들의 사회적 인간 행동 심리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옥스포드에서의 전임 교수와 킹스 칼리지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하는 등 관료계와 학계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손씻기 운동과 같은 사회적 장려 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대중 매체 등에서 얼굴을 알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영국내에서는 과거 내각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앞서 언급한 대로 BBC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서 전문가로서도 조언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Hidden Wealth Of Nations˝로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년 뒤인 201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국내 번역본은 완역 여부를 떠나서 역자가 아마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역자 주를 넘어 다른 자료들를 임의로 첨부해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 점은 독자들에 따라 평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편역본이라기 보다는 역자 보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저의 평가는 애매하다는 정도로 갈음하고 싶습니다.

먼저, 헬펀의 이 책을 좀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문단에서 설명한 것처럼 독자들이 읽을 때 역자가 표명한 인식과 저자의 주장하는 바를 대체로 구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끼어들기‘라는 미명하에 한국 상황을 보론이랍시고 삽입하고 있는데 이 점은 명확하게도 본래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따라서, 너무나 광범위해서 의미가 없는 ‘웰빙‘ 다룬 1장을 제외한다면 (사실 1장도 저자가 쓴 원글인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만) 2장부터가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일단 제가 보기에는 저자인 데이비드 헬펀이 근래 세기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빈부 격차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옹호와 ˝불평등에도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이 있다는 논리˝등과 같은 수사를 봤을 때 주장하고 선호하는 바의 근거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현시대의 자본주의가 단순히 형식상의 능력주의 체계라든지 아니면 그 일면의 모든 것을 옹호하든지 간에 현재로서는 찰스 틸리가 설명한 것처럼 평등의 문제가 자본주의가 침식한 민주주의하에서는 더욱 불명확해졌기 때문에 사회 정치 이론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능력주의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적 본질에서 평등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현시점에서는 매우 어렵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차별˝이라는 정치학적 수사에도 그 본질의 완벽한 이해가 대체로 평등의 인식 부재로 한계가 명확하기에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에서 자유의 문제 보다 평등의 문제가 보다 이념적이고 보다 기피하게 되는 가치가 되었던 것은 어느 국가의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4장 도덕의 정치학과 5장 국가의 역할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글임은 일독하고 나서 분명해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서평에서 오늘날 정치의 문제점은 극명하게 법에 판단에만 의지할 정도로 도덕주의의 실종이 큰 역사적 손실임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사회 구조가 루소의 말대로라면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국가와 같은 조직체를 만들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권리들을 뒷받침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도덕주의적 원리가 항상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2장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능력주의‘ 사회의 최대한의 공정성은 과연 누구한테 혹은 어떤 제도한테 기댈 수 있는 불명확한 것은 도덕주의의 실종과도 연관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통주의적인 도덕적 사회는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러한 관계들이 건전해질 때야말로 그 사회가 온전히 돌아간다고 전세대들은 그리 판단했습니다. 그런 사회학 역사의 중간에 오도된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진화학 등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거의 모든 도덕주의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오로지 개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면에서 이 글, 2장의 논의들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는데요. 약간 틀에박힌 논의일 수도 있으나 사회적 자원의 집중과 그에 따른 부의 쏠림이 과연 건전한 방식이냐에도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에 기대하는 것 또한 충분히 중요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글에서 인용된 ˝우편향의 정치인 좌편향의 정치인˝ 정도의 사회적 문제 해석은 다소 미흡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 설명을 위해 앞선 용어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삽입했겠습니다만 불평등 문제와 빈부 격차를 오로지 이념에 기대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사회 문제를 더욱 극단화 시켰던 원인이기도 하기에 현재로선 각계 각층의 열린 토론과 합의에 이르는 어떤 획기적인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취지의 결론을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4장은 꽤 중요하다고 판단이 되었는데요. 단순한 ‘존중‘ 이상을 넘어 그리고 쉽게 투입되는 돈의 여부를 넘어서서 사회 구성원 모두의 변화와 이를 통한 사회 전체적인 폐해를 개선하는 데 저자는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복지의 사각지대를 매우는 네트워크˝와 같은 문단은 생각해 볼 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명백하게 정부의 투입되는 돈이 아니면 무기력하다는 시민들의 인식을 뛰어넘는 꽤 중요한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 결론적으로는 사회와 국가가 진화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인식에도 ‘아주 터무니없다‘ 라고는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동안 국제무대에서의 공익을 위한 여러 NGO단체들의 활동이 있어 왔는데요. 앞선 사회적 갈등과 대화 단절 등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책동에 분명히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있을겁니다. 다만 그동안 복지 문제와 관련해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반감은 꽤 노골적이었으며 소위 슈미트의 영향이라고 봐도 일견 무방해 보이는 ˝경제적인 개인의 결단주의˝는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에 연결된 가치라고 맹목적으로 주장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조화로운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불협화음 정도의 부정적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의 힘이 불식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후, 5장에서는 그런 변화된 사회를 통해 나아갈 국가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데요. 전통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달리 말하자면 휴머니즘에 입각한 자유주의를 적절하게 안배하는 국가의 여러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파트너 관계라든지 공동 책임이라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관련해 5장 도입에서는 ˝과연 훌륭한 통치는 무엇인가˝대해 적절히 가늠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북유럽 국가들의 면면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제가 더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국가의 적절한 판단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설득력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이념에 따라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부가 꽤 적절하고 훌륭한 정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국가에 해야만 하는 혹은 시민들이 행동해야만 하는 여러 당위들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헬펀의 여러 제안들은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원칙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유층들이나 권력층이 자신들의 입맛에 맛는 정책이나 권력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연유에는 아마도 본질적으로는 다중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자신들의 권력이 집중되어도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의 태국에서의 국왕 퇴진 운동을 비롯한 민주주의 운동을 보노라면 확실히 교육을 받았던 안 받았던 시민 정치 전체에 대한 불신이 이들의 사회맥락적 메커니즘의 전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들 간의 정상화 내지는 내밀화가 각계 각층의 불신을 씻어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확실한 점은 우리의 당면한 숙제로 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의 국가의 숨겨진 부는 다른 의미로는 매우 중의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자의 과도한 편집이 전체를 독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금 밝혀두고 싶습니다.

불평등에도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이 있다는 논리는 ‘실력중심주의‘, 바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빨리 승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력‘을 어떻게 규정할 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 계좌에 몇백 파운드 (몇십만 원)의 돈을 가진 것만으로도 청년 시절, 인생에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이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의 자본 지원은 다른 정책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부유한 학생들이 일류 대학을 다니는 데 드는 돈을 정부가 일부 부담하면서 대학 진학이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한 젊은이, 전통적인 대학 교육에서 요구하는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의 능력 계발에는 재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대중으로서 우리는, 그리고 정치인들 역시 개인의 책임에 대해 상당히 모순된 자가당착적 입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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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본질 현대사상선 13
L. T. 홉하우스 지음, 김성균 옮김 / 현대미학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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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웨일즈의 센 이브에서 태어난 L.T. 홉하우스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였습니다. 위키백과에도 공공연하게 지목되고 있듯이 서구의 다수 학자들은 그를 신자유주의의 사실상의 시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가 알페로비츠와 루 데일리의 공저 역시 홉하우스를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국내에 번역된 홉하우스의 논저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른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에 인식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그가 정립시킨 자유주의 이론과 더 나아가 이를 초기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양자의 이론적 간극은 극명하다 밝히고 싶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단 몇줄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본문에서 제러미 벤담이 당시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개혁 사상에 눈을 감은 점에 실망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대체로 수용한 홉하우스는 사실상 오늘날의 기준으로 제법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와 관련된 논증은 다음에서 천천히 밝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이 책은 ˝Liberalism˝이라는 원제로 1911년 초도 출간이 이뤄졌으며, 국내에는 2006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제가 쓰는 서평의 다소간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언급해 두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소위 존 스튜어트 밀과 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홉하우스가 일반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전제는 글 초입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개인의 이익이 확실히 공동체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는 단언입니다. 뒤에 6장과 7장에서도 이에 대한 작은 단초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는 성숙된 시민의 존재 여부가 선결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진술을 더한다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공화주의 초기와 민주주의의 도래에서 장 자크 루소가 일반의지와 공동의지를 기반으로 단적으로 계약관계에 의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러한 도식으로서 후세에 규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수의 학자들과 소위 권력의 향배에 근접한 사람들은 이 무분별한 일반의지가 밀이 경고한 ˝다수의 횡포˝를 필연적으로 예측해 내고 증명하기 위한 사회학적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요. 사실 홉하우스는 앞선 것과는 별개로 견고한 민주주의에 대한 의의를 글 곳곳에서 피력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새롭게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의 건전한 공존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확립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점은 당시 초기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와의 대척점에 서는 사회학적 이론으로 여겨짐에 따라 이러한 수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현재의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와는 이론적 형태와 현실 기반이 아주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연이어 홉하우스는 이 글 2장에서 ˝자유는 평등을 포함한 것˝이라 규정하고 1장에서 간략히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권 개념을 비롯한 일반적인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를 모색하는데 그는 벤담과 밀을 인용해 내내 논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이 당시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글래드스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이 자유주의에 기반되는 도덕적 통제 혹은 도덕주의를 중요하시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굳이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 ‘도덕주의‘를 관짝에 집어넣기 위한 일련의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강조가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교묘한 논리들은 명목상 다수의 권리들을 위해 구축된 법 토대를 사뭇 인정하면서도 유명무실해진 도덕주의를 굳이 과거 계몽주의적 가치로 오늘날 다시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반대를 해왔는지 이는 아주 명백합니다.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이라는 것에 대해 이 글의 홉하우스도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관계를 전혀 무시하지 않고 양자간의 상호보완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일면으로 ˝만일 국민이 심사숙고 끝에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면, 국민은 그런 법안에 인민 주권의 이름으로 순종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권의 이름으로 불복해야 할까˝라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토대의 딜레마를 설명해 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가 분석해 내는 자유주의의 본질은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얼마나 공정한 계약에 근거한 일련의 자유 경제의 기반이 전제된 자유주의의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에 집중했던 것으로 어떻게 보면 상충되거나 존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자유주의 안의 가치에 대해 그가 고민한 흔적으로 얼마간 짐작해 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익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가설은 많은 측면에서 잘못된 가설이다˝라고 앞선 논증들을 기반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며 근본적으로 사회 부조와 다수의 이익에 근접하는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확실히 보장해주며 아무도 타인을 희생시켜 사익을 챙기는 데 경제적 기득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지했어야하는지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는 홉하우스 역시 존 스튜어트 밀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경제하에서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의 문제를 구별해 인식해 왔던 것을 비추어 보았을 때,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불명확한 부유층의 불로 소득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해보면 이러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점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부르짖는 다수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주장의 근거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이를 통해 명백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위 개인들의 자유를 소급 적용시켜 이론화 했을 때, 홉하우스는 8장의 경제적 자유주의에 이르러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동등한 계약관계에 의한 노동 계약˝만이 양자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이 당시의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밀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노동자들의 편익을 점차 증대시키는 쪽으로˝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점을 일정 부분 긍정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사익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여기에는 시장의 우월성을 근거로 정치를 배제하고 사실상 힘있는 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배타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경제적 진행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자유 확대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그 해법은 명백합니다. 이것은 6장에서 저자가 ˝자유는 개인의 권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다˝는 진술을 보이는 것은 앞선 논증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자유의 영역 자체는 성숙의 영역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주의의 확대의 여부는 개인의 선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도 홉하우스가 자유주의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글의 결말 부분에서 ˝빈자들이 사회적 자원에 대한 선취적 특권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부분에서 저역시 긍정할 수 있었는데요. 자유주의 자체는 이처럼 민주주의와 개인들의 권리내에서 상호보완적이고 가치발전적인 주제이며 이 모든 전제는 자유가 마땅히 합리적인 근거와 정확한 현실 조건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를 인식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당시 대두하고 있던 사회주의와의 대립된 이론으로 한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민주정치와 시민들의 권리에 대한 충분한 근거에 기반한 당위로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회학적 논저임에도 불구하고 역자의 훌륭한 번역은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구입한 책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문 182페이지에서 한 단어의 인쇄 누락이 있었습니다.

-종래의 자유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국가와 사회에 좀 더 진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듯 싶은데요. 자유방임과 자유주의는 완전 다른 개념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하며, 거의 40여년의 걸쳐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실질적인 자유의 구축을 위해선 사회에 성숙된 시민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마찬가지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계약의 자유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실질적인 평등이 전제될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론의 기반 요소인 권리 및 의무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자유보다 평등이 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결국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익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가설은 많은 측면에서 잘못된 가설이다

자유 계약과 개인의 책임은 모든 자유주의 운동의 핵심과 밀접한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의무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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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역사학이자 경제학자인 가 알페로비츠는 특히 손꼽히는 냉전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소위 원자폭탄 외교와 원자 폭탄이 냉전시기에 갖는 여러 함의들에 대한 저서들을 쓰기도 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의회의 격식있는 조언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추측하건대 최근에는 세계 경제적 상황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과 재분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위키 백과와 이 책의 소개에서도 그를 정치경제학자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위스콘신 대학과 버클리를 거쳐 캠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알페로비츠와 함께 공저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루 데일리는 영국의 유명한 민주주의 연구의 싱크 탱크인 데모스의 선임 연구원으로 주로 GDP와 관련된 연구를 지속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과의 공동 연구도 있었던 듯 싶은데 그외 그의 학력이나 주요 사항이 구글링으로 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로 사회 민주주의자로 그를 소개하고 있는 언론사들이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저의 검색 스킬 부족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8년 ‘Unjust Deserts‘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1년에 번역 출판되었지만 현재에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일독하고 나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국역된 책 제목이 다소 적절치 못하다는 소감이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번역한다면 ˝불공정한 보상˝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알페로비츠와 데일리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막대한 부를 쌓은 부유층과 기득권을 보유한 상위 계층의 그 부가 명실상부한 ‘사회적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일전에 소개한 질베르 리스트의 글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축적된 사회적 지식의 여러 산물로 인해 발생한 과학지식의 발달과 그로인한 경제적 발전에 대해 오로지 ‘경제학의 산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런 자신들의 특수성이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뭐 이들의 그러한 행동의 해석상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역사와 사회학과 괴리되어 있는 연유에는 시장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떠한 것에서도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학적인 교조주의적 관점에서 안온하려는 의도 떄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이론적 배경의 인식 개선을 위해 자주 강조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틀렸거나 잘못되었다면 언제든지 이를 철회하고 새롭게 재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가 자신들의 선에서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이 이상은 현재의 심각성을 단순히 인식하고만 있는 분배점 함의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일종의 제언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하이에크 조차 경제 성장에 대해 ˝지식이란 세기마다 진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발달에 부분적으로 힘입어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 글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만, 17세기 이후 인류가 전시기에 비해 이토록 많은 지식을 구전과 기록을 통해 후대를 위한 ‘지식 축적‘에 나선 것은 꽤 경이로운 일이며, 예를 들어 ˝양자 역학이 없었더라면 반도체가 마이크로 전자공학, 자기공명 영상이나 레이저 같은 기타 무수히 많은 기술에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그 지식의 축적을 통한 기술 발전의 일면을 이렇듯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술 진보가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이다˝ 라는 3장의 주제 또한 말하는 바도 명백한데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이 기술 진보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전은 생산 기술의 향상과 그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체계가 층층이 쌓이며 분화되고 발전되는 그 결과물이 경제 발전에 직접적으로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 진보의 산파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 거대한 축적된 지식˝입니다. 이것은 당시 평범한 개인들이 마치 ‘사과 껍질을 깎을 때는 어떻게 칼로 깎아야 잘 깎이는지‘와 같은 가벼운 것들의 경험들까지 포함한 누적된 지식의 총체적 산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에 따라 산업혁명에 따른 포드주의와 기술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경제적 계산에서 계상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진 무언가 바로 그것은 ‘잔차‘입니다. 따라서 ˝현대 경제학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식과 기술의 중심 역할을 대체로 무시했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저역시 무척 놀라울 정도였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경제학 자체는 자신들의 존립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위상을 강요하며, 경제학을 인문학의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 경제학을 역사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다, 경제학을 사회학의 수단으로 환치시킬 수 없다는 등으로 자신들의 배타적 권리를 다수의 학문군에게 집요한 태도로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경제학의 오만으로 받아들여할지 아니면 다른 학문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당위성으로 받아들여할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만 어찌됐든 이러한 배타성이 학문적 접근을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불평등 이상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낳은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저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강조했던 것은 명확합니다. 능력있고 수완이 있는 자들이 더 많은 과실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 말입니다. 아니 논리라기 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겠죠. 여기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의 ˝우리가 자신에게 매우 관대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소득의) 5분의 1 정도가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 주장할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를 전적으로 인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까지의 일련의 경제적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의 산물이 인류가 축적해 온 사회적 지식에 기반해 있으며, 이를 뭔가 손쉬운 ‘거저먹기‘로 혹은 아무 의미없는 ‘뜬구름‘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에 관련한 과학사적 증거와 일련의 논의들을 저자들이 이 글 2장과 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 논증의 의미를 떠나서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지식 자체가 일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에 동의를 하고 계신다면 4장의 ˝지식 생산의 가장 큰 투자자는 공공 부문이다˝라는 함의에 동의를 하실 겁니다. 사실 항암 치료제인 텍솔 Texol 에 대해 저자들이 언급하는 대로 정부나 공공기관들이 사회 공적인 안전과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그에 맞는 여러 투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미한 기술의 안전 투자자가 바로 정부라는 소리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겠죠. 이런 중요한 논리는 다른걸 다 떠나서 시장에서 정부와 정치는 필요없다는 소리에 반박할 증거가 되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교조주의적인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대로 하되,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의 사회적 보장 장치를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대로 ˝없애는 것은 그 자체로 손쉬운 일이었다˝는 일종의 소회가 시민다수를 웃음거리로 취급하는 것은 이제는 없어야 할 겁니다. 모든 체계는 법과 도덕이 규정하는대로 ‘경제적 인간‘ 모두가 이를 준수하고 축적된 자본과 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부유층은 어느 정도로 적당한 이기심을 발휘할 자유와 반대로 그렇지 못한 많은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면 될 일입니다.

이 책의 논의 가운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논증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생산성 효용 한계와 그를 기반으로 분배적 정의에 몰두하는 로버트 노직과 다소 다른 입장에 있는 존 롤스를 통해 이 불로 소득의 의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지식 경제 수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마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니 로드릭의 말대로 이 거대한 불로 소득의 문제는 ‘고빠 풀린 금융화‘의 문제이며,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거품 경제에 한결같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거품과 불로소득은 아주 연관성이 크기 때문일겁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활동을 하던 국내 한 소장학자가 이러한 금융화에 대한 비판 연구를 도미해서 시작했을 때, 당시 금융계와 경제학자들의 로비를 받은 로비스트들이 끈질긴 공격을 했다는 어느 짤막한 후일담을 담은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학과 전세계적인 글로벌 금융화에 대한 어떤 이념적 태도는 거의 교조주의와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이 생산품이 적정 수준까지 소비되지 않으면 강한 압력을 받고 이에 따라 재투자된 금융계 저변까지 영향을 끼치는 거의 단일대오적인 형태의 종적이면서 횡적인 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이먼 민스키가 어느 정도의 거품이 끼어야 적잖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했다는 일설이 이 시장과 행위자들의 복잡한 관계를 일견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시민사회가 수면위에 올리고 있는 불평등 문제 전반에 대한 매우 불쾌한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러한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부유층이 있어야 약탈 경제가 지속된다는 그 해괴망측한 논리들 말이죠. 그래서 종장에서 인용된 로버트 달의 마지막 유고와도 같은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해결이 가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제학적인 문제를 담은 원문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번역의 질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는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 그 점은 아쉽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술 진보는 역사적 과정 없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거나 똑똑했기 때문에 오늘을 이룩했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성공을 개인적 과정으로 보도록 길들여졌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생산 활동과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는 소유물을 당연히 사회적 부의 일종이며, 그렇게 취급 되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밀과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개인적 기여와 무관한 이들은 분배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특별히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 노력으로 기여하여 이룩했다고 보이는 것 조차도 상당 부분은 각 개인이 받은 유산, 사회적 영향, 행운이 낳은 생산물이다.

아직도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공동의 유산이라는 입장에서 제기하여 평등 문제로 다룬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고소득자들은 획득한 지식이 많고 지식 획득의 기회도 많기 때문에 고도로 교육받게 된 것이다.

현대에서 가장 눈에 띠는 현상은 한마디로 말해 총체적 지식의 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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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현상금 견인 도시 연대기 2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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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성공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매김하고 있던 한 인물이 꽤 대단한 판타지 스토리를 쓰게 되고 이 역시도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일임은 분명한데요. 이 ‘견인 도시 연대기‘ 물의 처음 1편이 피터 잭슨에 의해 영화화 된 것도 작가인 필립 리브의 명성을 높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만, 피터 잭슨의 영화팀이 원작을 거의 훼손할 정도로 스토리 라인을 바꾼 것은 분명 실망스러운 일이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와 필립 리브의 이 이야기는 뭔가 매치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이 2편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Predator‘s Gold˝라는 원제로 지난 2003년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6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서지에 4쇄가 찍혀있는데요. 예상보다는 판매량이 적긴 하지만 요즘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에서 이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만약 피터 잭슨이 다음 작품들도 영화화를 한다면 특히 이 ‘사냥꾼의 현상금‘은 꽤 기대가 될 만하다고 여겨졌는데요. 그것은 몇가지 반전과 스토리 전반이 변화되어 가는 길목에 이 2편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팀이 1편의 경우와 같이 원작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자인 필립 리브는 아주 명확한 경제사관과 정치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전작인 ‘모털 엔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해내는데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는 점은 다소 색다른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들어, 약육강식의 이 시기의 견인 도시 시스템에서 개중 한 곳인 ‘아크에인절‘이 신봉하고 있는 신이 ‘대처‘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집권기에 레이건과 손을 잡으며 ˝대안 따위는 없다˝고 일갈한 영국 보수당 총리 마거릿 대처는 정부와 기업들에게 손쉬운 정책만을 일삼으며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시민들의 대량 해고와 경제적 안정성과 복지책을 그야말로 휴지조각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바로 그런 그녀를 약육강식 시스템의 전형적인 도구로서 삼고 있으니 이 내용이 들어가 있는 행간을 읽은 도중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을 통해 마거릿 대처의 행적이 드러나 현재 영국에서는 레이건의 사례와는 달리 영국내에서 비판적인 인식도 있습니다만, 아직도 그 시기의 잘못된 향수를 갖고 있는 일반 시민들이 많을겁니다. 그래서 이 ‘아크에인절의 대처신‘ 이라는 문구에서 시대의 교차되는 감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번역된 제목은 다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냥꾼의 현상금˝이 아니라 ˝약탈자의 현상금˝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약탈자의 전리품˝ 정도가 이 전 시리즈를 옳게 치장하는 제목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소설가들의 스토리라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성격과 인품의 주인공인 톰 내츠워디는 비정상적인 시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것을 쟁취하는 이 시대의 대비적인 구도로 놓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대립의 결과물입니다. 많은 견인 도시들이 내부에 노예 제도라는 계급주의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썰매도시‘ 앵커리지의 수장인 프레야가 그를 평민 수습 역사학자로 되새기는 장면의 삽입은 명백합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죠. 단호하게 계급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 사실상의 돈과 지위에 의한 계급주의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이식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수많은 지식인들만을 제외하고 다수의 시민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 뿐만 아니라 이 극이 증명하고 있는 과거의 자본주의적 시기를 과학의 뒷받침과 반대로 정치의 많은 희생이 살찌워 왔습니다. 이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도 잘 살수 있었다는 일종의 확인되지 않은 나레이션을 저자가 감행하는 점도 그 가리키는 바가 지극히 명확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과거와의 단절에 따른 소위 ‘올드-테크‘ 유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우리에게 어떤 반면 교사가 돌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선생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그 역사는 왜곡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필립 리브 역시 과거 참혹한 전쟁 이전의 꽃피운 자본주의적 문명이 어떻게 순식간에 잿더미로 끝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단절로 인한 후세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 왜곡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E. H. 카의 그 유명한 구절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일찍이 모든 윤리철학자들이나 정치철학자들이 첨단 과학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와 도덕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 견인 도시 연대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일치합니다. 이 연작 소설의 첫편인 모털 엔진에서 시장의 옥죄는 명을 받아 발렌타인이 벌인 일들은 앞선 부분과 거의 일치합니다. 고삐가 전혀 없는 과학 문명이라는 것이 어떨지는 충분히 상상할 만한 문제이고 여기에 고삐풀린 과학과 견제 없는 자본주의는 얼마나 환상의 궁합인지 이 부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이러한 저의 이해 가운데에서 아직도 일부 정치인들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폭력 혁명에 대한 경고를 운운 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찰 따름입니다. 사실 정치인들이 고삐풀린 과학과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양 손에 들고 할 일이란 것들은 모두의 상식 바깥에 있는 것들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도덕주의적인 부활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주인공인 톰 내츠워디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보면 톰과 상처받은 영혼 헤스터의 단순한 러브 라인의 수용 방식 정도로 이 둘의 영향력을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큰 의미에서 톰과 헤스터의 결합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과거와의 화해랄까요. 이 서평에서는 이 정도선에서만 언급하겠습니다.

끝으로, 개인적으로 약간 놀랐던 안나 팽에 관한 두 가지 반전이 있었습니다. 한가지는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한가지는 작가의 스토리 라인이 변화되는 분기점이라고 느껴질 만큼 대단한 장치이기도 했는데요. 살아남은 런던의 엔지니어의 연구로 인해 더욱이 다른 일도 벌어졌다면 (불행하게도 3권과 4권의 알라딘 상세 페이지를 보는 바람에 저는 스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알라딘의 페이지는 방문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냥 시리즈 4권을 전부 구입하셔서 쉬지않고 쭉 읽으시길 권유해 봅니다) 꽤 흥미진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예상되는 대결구도가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어찌됐든 저는 오늘 퇴근하고 이 연작의 3권을 구하러 중고서점에 가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페니로얄 박사의 술취해 혀 꼬부라진 대화 한토막을 역자가 꽤 재밌게 번역하셨던데, 이런 노력을 보이는 역자는 꽤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를 삽입하고 있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는 꽤 훌륭한 노력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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