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도둑 - 99%는 왜 1%에게 빼앗기고 빚을 지는가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안세민 옮김 / 책세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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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카운티의 베이싱스토크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공동 교육 독립학교인 로듣 완즈워스 대학 (LWC)을 거쳐, 옥스포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서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의 세인트 안토니스 칼리지에서 아프리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얼마간의 경영 컨설턴트 경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2019년에 뉴 스테이츠먼이라는 잡지에 경제 해설로 칼럼과 팟캐스트 등에서 활약하고 드디어 그녀의 이력에 중요한 시점이 된, 논저 "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을 출간합니다. 이 책은 영국 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평론가인 마이클 갈란트는 "사회주의자와 회의론자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높은 비판"이라 평가를 하였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출판과 영국 국내의 상황을 돌이켜 보건대 신기하게도 콜린 크라우치와 비슷한 사례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야 글을 완독하고 나서 들었던 첫 느낌은 현재 체제에 대한 그녀의 예측과 분석이 라구람 라잔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 글은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논저라고 감히 판단해 봅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으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의 중요한 점이라 생각되는 것은 과거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그 시기의 다소 상반된 영국에서의 짧은 케인스주의적 시대를 지나치며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시티 오브 런던'과 이익을 함께하는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신자유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마거릿 대처가 일부 보수층에 의해 현재까지도 추앙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전통적인 노동당 식의 정치를 극도로 경멸했으며, 특히 노동 조합에 대한 엄청난 증오를 블레이클리의 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로버트 달의 중요한 관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달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대치해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적대시 하지 않고 사회와 건전한 정치를 위해 각자가 다원주의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대처와 같은 보수주의 정치인이 스스로의 입장과 정치적 신념으로 그 반대에 있는 다른 정치인을 개인적 인상을 포함해, 그저 혐오하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하버마스 식의 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당위와도 같은 문제입니다. 물론 대처가 카를 슈미트를 일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식의 대결 구도와 경멸적 태도는 오늘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인종주의적 행태와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프랭크 푸레디는 그러한 "공포와 혐오를 매개로한 정치가 어떠한 대안도 마련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레이건과 함께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규정될 수밖에 없는 신념 체계가 어떠한 맥락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신자유주의가 영국인들 대다수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블레이클리가 강조하는 브레턴우즈 체제 후반의 비판적 맥락은 종전 이전의 자본 이동을 엄격히 금지한 체제에서 내심 자본가들이 요구한 소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용인함으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금융 자본주의를 잉태한 꼴이 되었는데요. 이것은 종래의 리밍치 교수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로 하이브리드화 된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에 기본적으로 블레이클리는 이후 전사회적으로 시행되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들이 외형상으로는 국가들간의 경제적 성장을 견인하기도 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성장의 혜택'이 오로지 소수의 상위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갔고, 일종의 지대로서 이익을 창출하는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출현과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이 만나 의외로 일부 중산층에게도 그들 소유의 집값 상승을 추동해, 그러한 결과로 꽤 많은 수의 영국 시민들이 대처 정권을 지지하는 지지 세력으로 탈바꿈했다고 밝힙니다. 종래에는 영국 사회에서 많은 중산층들이 노동자계층의 이익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권력 관계'를 면밀히 인식하고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 편을 들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체제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화가 되었고 그로 인해 각 시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가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관점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시민 전반의 이익 추구를 중점으로 세운 것 보다는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포함한 배타적 자본 축적과 사회와 정치가 이들의 이익 추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일종의 '인위적인 개조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사실 그 이전의 사회에서는 케인스주의적 체제로 인해, 무엇보다 사회적 부조와 공공의 이익에 가치를 두고 정치와 경제 전반이 이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는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마거릿 대처가 노동당 정권의 스스로 경멸감에서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적 시도를 추진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시티 오브 런던의 자본가 그룹을 비롯한 상위 계층에 대한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지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냉엄하게 불어닥친 민영화의 광풍과 광범위한 금융 자본주의적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었던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물론 이 부분도 다소 결과론적인 입장이긴 합니다만 밀턴 프리드먼이 주구장창 강조한 '사적 이익의 (거의 무한정대의) 추구'가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 우파들의 기득권 모임인 '몽펠리에 소사이어티'의 주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듭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한 자본가들과 이를 인지했으면서도 시장의 규제에 실패한 미국 당국의 때늦은 후회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히 비틀린 슘페터의 논법이기도 합니다만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이 시장 독점으로 귀결될 경우, 경쟁이 없는 시장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라 불릴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블레이클리는 이 글 4장에서 일종의 사례로써,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 해협 밑의 터널 공사에도 당시 대처 정부가 '민영화'를 강조하게 된 맥락은 분명 기업의 손해가 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이를 보증하겠다는 일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라고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만 조만간 이어질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다시금 국가가 시장을 구원해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입이 닳도록 주장했던 "공공 지출을 삭감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것"등의 금과옥조를 휴지조각으로 돌린 것과 같은 사태였지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과 금융 자본가들 및 경제 엘리트들은 매우 태연하게 당연하듯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들이 신봉해 마지 않았던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콜린 크라우치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이미 초기 금융 자본주의화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은 체제가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면 일정 부분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데이빗 코츠가 분석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제로 원하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낙수 효과라든지, 자본에 의한 주주 자본주의의 필요성과 금융의 첨단 기법 등 온갖 미사여구로 이를 치장해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칭송하고 시민들에게 이를 주입하는 데 꽤나 열성적이었지만 그것의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블레이클리는 이 당시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굴복해,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지젝과 미지크를 비롯한 좌파들이 자본주의의 이런 파행적 이행을 전혀 비판하지 못하고 겨우 숨만 이어간 점은 실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사적 이익에 경도된 보수 우파를 방치한 죄이자, 시민을 위해 사회를 건전한 비판을 다하지 못한 책무의 유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굳이 케인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자본주의에서 노동 조합의 필요성과 특히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시민들이 자본가들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보루가 존재해야만한다는 주지의 사실은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이 노동 조합을 거의 '금세기의 최대 악'으로 규정, 영국의 탄광 노조 사태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들 노동 조합을 일거에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파행적 이익 추구와 관련해, 많은 경제이론가들과 학자들은 자본의 이익 창출을 위해 어느 정도 거품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 이전의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의 거품은 투자 은행들이 이익만을 위해 무분별한 증권화를 무릅썼으며, 신용평가기관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한 몫을 챙겼습니다. 시장의 거품 상황이 가용할 수 있는 많은 돈을 가진 자본가들에게는 분명 이익을 단단히 챙길 기회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 지점에서 분명한 사실은 거품은 언젠가는 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 전반과 체제에 해악이 될 수 있는 거품이 꺼진 이후에 발생할 고통은 과연 누구의 몫이 될까요? 여기서 굳이 사적인 안전망을 두루 갖춘 부유층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고통의 몫은 그저 공적 자금을 쥐어짜내고 삶의 기반마저 뒤흔들리게 될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사적 이익 추구에 마땅히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이 아니라면 정치학과 사회학이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죠. 이를 그저 시장에 대한 정치의 무간섭주의나 및 비개입으로 신봉해 어떠한 통제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소모적인 민주주의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해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밀턴 프리드먼을 그리워하고 신봉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사회나 국가 체계 전반을 시장의 이익만을 위한 시녀로서만 여긴다면 다수의 이익은 어디서든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의 무쓸모를 강조시켜, 사회 전반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우리의 민주주의의 경제적 비용들을 과대 포장해, 엘리트들만의 편리한 '과두제'로 귀결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5장은 2008년의 뉴욕 발 금융 위기를 거침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주택 금융 채권에 대한 무분별한 증권화가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다들 여실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후 사태에서 조지 W. 부시의 뒤를 이어 수습의 책임을 가진 정치인이었던 오바마는 결국 실망스럽게도 단 한 명의 법적 기소도 없이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끝내 월 스트리트를 회복시켰습니다. 당시 책임에 있던 많은 자들이 공적 자금으로 무분별한 은퇴 자금 파티를 벌이고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죠. 저는 바로 그 시점에서 '오바마의 정치적 선명성'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대선 캠페인에서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을 차치하더라도 공적 자금을 신중하게 다뤄야만 하는 최상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재무부 각료들을 비롯한 월 스트리트의 요구대로 백기 투항을 했던 것이죠. 오바마에 이어 여전히 발만 잘 뻗고 살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천연덕스런 상황은 덤으로 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다소 상반된 인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글 5장에서 저자인 블레이클리는 당시 영국의 상황을 불행한 구렁텅이에 빠져든 영국인들로 처연하게 그리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그녀 역시 사건의 앞 뒤 맥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월 스트리트와 시티 오브 런던은 한 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중소 은행 한 곳의 뱅크런은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이미 미국과 영국을 공동 운명체로 만들었기에 (동일한 맥락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은 이들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 엘리트들 모두였기에) 그 참혹한 결과 또한 공유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시장과 정부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 이러한 주장에는 정부보다는 시장의 권리와 원칙이 여전히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과거 볼커가 기습적으로 금리를 인상해 전세계 시장의 돈을 끌어 모은 것과 같은 사례들을 차근히 손에 올려보면 이와 같은 논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개 체제 자체가 너무나 과도한 힘을 갖는 것은 일상적인 시민 사회와 우리 정치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된 금융 자본주의가 시민의 건전한 삶과 지속적인 안정된 삶을 지탱했던 과거의 사회적 부조와 노동 조합을 악으로 치부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그러한 논법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보다 1970년대 이후의 그 짧은 시간에 자행된 자본주의의 일방향 독재와 같은 파행들이 결국 시민 사회와 우리의 삶을 고통에 빠트리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솔직한 평가대로 자본주의가 어떤 왜곡된 이행을 거친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한자에게 붙은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이 점은 그녀의 다른 논저인 '코로나 크래시'에서 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자본주의에 대한 시민의 저항을 막고 있으니 자유주의가 좀 더 시민 권리에 가까운 쪽으로 변하던가 아예 시장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을 도태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민의 정치적 분별력이 이 즈음에 통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본연의 삶의 통제력을 위해 시장 전반을 공익을 위해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반자본주의적 논법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앞으로 시장에는 마땅히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며, 인간에게조차도 완벽하고 무한정의 자유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시장 자유를 그러한 위치에서 해석함은 정치와 시민의 권리를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만을 위한 배타적 체제로 이미 심각하게 변질된 상황이며, 다수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체제적 모순을 시정하고 개선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조차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이 근 50여년간의 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글의 7장에서 금융의 사회화를 비롯한 몇가지 대안을 저자가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시장에 마땅히 '통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것은 다수의 자본가들을 위해서라도 시민 사회의 안정과 점진적인 사회 안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물론 로버트 미지크와 같은 좌파들 또한 크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문 89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다른 논저들과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부유세에 대한 논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유층이 공익도 아닌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정부와 공공 기관을 동원하고 있기에 이것의 사회적 합의 단초조차도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토록 우리의 민주주의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죠. 


이 두 기관(정부와 기업)은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이것이 ‘자유‘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 브레턴우즈 회의는 국제 금융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를 제도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자본의 이동성 증대와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식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변했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무자빕한 이윤 추구가 기업의 유일한 책무라는 사상이 만연했다

자본주의가 1980년대의 변화에 의해 왜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강한 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적응했을 뿐이다

1980년대에 이러한 문제들이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영국에서는 주주 가치 이데올로기에 제약을 가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융 주도 성장 정책의 핵심은 가계가 물질적 행복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결정 요소로서 임금을 부채와 개인의 자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과거에 사회가 부담하던 부분을 개인보험에 의존하게 되면서, 복지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에게 제공하는 각종 혜택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보다는 오히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시티오브런던 법인의 이해관계와 영국의 이헤관계를 합치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금융 주도 성장이 초래한 불평등의 일부를 해소하고 경기순환의 상승과 하락을 완화하기 위한 공공 지출을 민영화하려고 했다

글로벌 노스에서 자산 소유의 민주주의가 자산 소유의 과두제로 썩어들어가는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금융자본주의가 기반을 둔 정치적, 경제적 합의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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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2-01-1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급하게 글을 작성하느라 비문이 너무 많습니다. 빨리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