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그 미국이 아니다 -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
안병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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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사회학과를 거쳐 서울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수여받고,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을 담았던 뉴스쿨(New School)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뉴욕 시립대에서 미국 정치를 가르치다 2003년에 귀국하여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우선 그는 전세계적으로 진보주의 학계에서 꽤 의미있게 통용되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재교육'과 건전한 여론 형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여러 매스컴들을 통해 북한 문제와 같은 여러 이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기도 한데요. TV 시사 프로그램과 라디오 교양 프로에 출현하면서 근래 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을 알리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다른 논저인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의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고 몇년전에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안 교수의 발언 내용을 주의깊게 시청한 바가 있는데요. 꽤 온화한 외모에 조리있게 말을 건네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국내에 2021년 5월 출판되었습니다.

안병진 교수의 이 글이 어떠한 의도하에 기획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에 대한 비평을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닌 좀 더 쉽게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각 장의 서두에 뮤지컬과 영화를 인용하면서 독자에게 저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일정한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이 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였는데요. 사실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우리에게는 유독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충분히 인지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일단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한반도에 급격한 전운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다행히 별 위기 없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저 정체되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안 교수의 말마따나 지금은 트럼프의 모든 것이 낱낱이 분석된 글들이 서점가에 넘쳐나 그의 행보와 정치적 성격이 이미 폭로되었지만 초기에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예견에 너무나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에 대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일개 시민으로서 정말 당시엔 우려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저자는 미국 정치를 전공한 학자답게 그저 트렌드와 경향에 급급한 다른 글들과는 달리 꽤 논리적이고 논증 과정에서는 높은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촘스키식 글쓰기'로 이해하고 있는 최신의 자료들과 다수 논저의 인용과 적지 않은 관련서들의 소개는 저자 스스로도 끊임없는 독서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일종의 샤머니즘과 다름없는 예단과 추측으로 일관된 국내의 다른 글들과 달리 이 부분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이 책의 부제대로 저자는 현재의 미국의 정치가 세 갈래의 정치적 흐름으로 갈라져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러한 미국 정치의 상황이 그들의 국내 정치적 모습 뿐만 아니라 점차 정치경제적으로 중국과 대결에 나서려고 하는 작금에서 독자들이 앞으로 2~30년간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각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즉, 달리 말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미국의 헌법과 자유주의를 계승하고자 하는 '토크빌주의자들'과 작고한 새뮤얼 헌팅턴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극명한 문명적 대결로서 미국의 유일주의를 내포한 '헌팅턴주의자들' 그리고 이 헌팅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짐 체인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국 사회주의 정치 운동의 연원인 '데브스주의자들'이 저자가 분석한 오늘날 미국 정치 세력의 분화입니다. 물론 제가 느끼기에는 다수의 토크빌주의자들 대 나머지 소수의 헌팅턴주의자들과 데브스주의자들의 구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과거 예상하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출현은 미국 예외주의와 미국 자체와 자신을 동일시한 괴랄한 인물의 탄생으로 어느정도 세력화가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판대로 "정치인이라면 자기 내키는대로 아무거나 입밖으로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아주 상식을 무색하게 한 도널드 트럼프는 아무래도 미국 정치의 새로운 서막(물론 아주 부정적으로)을 밀어제낀 인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토크빌주의의 향수로도 읽혀지는 이 글의 2장은 엘리트주의의 면모를 보여준 알렉산더 해밀턴과 그의 대척점에 섰던 토마스 제퍼슨의 일화로 대략 요약될 수 있습니다. 후세에 많은 이들이 토머스 제퍼슨의 '제퍼슨주의'만을 열렬히 신봉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한데요.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일각에서도 알렉산더 해밀턴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도 합니다. 즉, 저자는 2장 초입에서 "해밀턴과 매디슨 등 연방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내재한 소유적 개인주의, 엘리트주의는 공공의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 공화주의 가치 측면에서 결함을 내포한다"는 의미가 이를 설득력있게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시 미국의 건국 이념이 루소에 의해 기인한 '공화주의'로 인식해 이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실상은 내면에 지독한 엘리트주의와 부유층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배타적 권리 등으로 기록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영국 등 귀족주의적 정치에 매몰되었던 유럽에 있어서 미국의 건국 이념은 그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공화주의란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무지와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해밀턴식의 엘리트주의자들이 이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의회제도가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발상으로 돌아가고 있고 실제로 고등학교 학력의 소유자나 일반 노동자 및 하급 계층에서 자신들의 계층을 대변할 정치인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골적인 금권정치 내에서 제한적인 기회조차 기대할 수 없는 극명한 미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진정한 진보주의 정치가 미국 정치에서 실종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1912년 이래로 제대로 된 사회주의적 정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 미국에서 '한 줌도 안되는 진보주의 역사'를 고려해 봤을 때, 아마도 이것은 미국인들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와 노골적인 완벽한 자유에 경도된 자유 지상주의와 다름없는 '자유주의'를 내면화해 다른 정치적 주의가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이 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미국에서 진정한 공화주의가 숨을 쉬고 있느냐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시에 그러면서도 새뮤얼 헌팅턴이 넘긴 예외주의의 유산이 트럼프를 통해 실제로 체현된 것은 미국 정치에 있어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분노를 먹고 사는 이런 극단주의적 논법과 배후에 암약해 있는 이 정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트럼프 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읽히는데요. 미영 전쟁이 한창이던 1814년에 백악관이 영국군에 불태워진 이후, 2021년 극우 민병대에 의해 미국 의회 건물이 점령당한 사건은 저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분노의 정치'에 물들어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분노를 통한 정치' 자체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데요. 안 교수의 논증대로 미국의 공화주의에 있어 시민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점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존 듀이가 말한대로 '시민들의 끊임없는 재교육'이 자신들과 사회를 위해서 필요함에도 시민들이 이미 오랜 세월동안 자본주의적 요구에 매몰되었고, 현재의 미국 선거제도가 모두에게 실질적인 실효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정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로 소모된 것은 분명 불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헌팅턴주의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분석은 크게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네오콘들이 이를 널리 인용하고 끝내 미국의 패권을 후퇴시킨 결과를 초래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4장에서는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페미니즘과 다원주의의 부단한 확장에 불쾌감이나 어색함,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우리식 현상으로 얼마나 '일베적 사고'에 물들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을 베격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배타족 인종주의로 대응해, 이것을 스패니시가 없는 오로지 백인들만의 '하나된 미국'으로 승화시킨 것은 최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상황을 오버랩하게 하는데요. 저는 오래전부터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 정치를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반동 우파들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던 바가 있습니다. 앞선 후쿠야마의 경고대로 과연 "인종주의를 자신의 양심으로 승화시켜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주의나 주장"으로 표출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치의 모습일까요. 다만 한가지 저로서는 안교수의 평가와는 달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미국 내에서 갖고 있는 위상이 현실 정치에 있어 아직은 심각하게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리버럴들에 대한 자정 능력이 크게 상실되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으로 연방정부에 대한 회의를 주장하거나 헌법과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수면에 잠겼다는 점에서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급격한 SNS의 발달로 인해 헌팅턴주의자들을 포함한 무분별한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시대의 표상이라 할만 합니다. 리버럴을 극도로 혐오하는 티파티들의 일원이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계층이 이 음모론들을 이용해 기성 정치를 맹렬히 공격했었는데요. 물론 모든 음모론들이 어떠한 정치적 연결고리를 위장하며 현실 정치에 폐해를 일으킨 건 아니지만 '이 SNS의 시대'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의를 확장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믿었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크게 벗어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또한, 이는 정치의 건전화를 말하기에 앞서 거대 인터넷 기엄들의 배만 불렸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해외에선 러시아 해커 그룹에 의한 영국 브렉시트에 대한 개입처럼 서구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데 이 SNS가 동원되면서 앞으로 민주주의에 있어 또다른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발견한 것일텐데요. 내부적으로 차라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금권 정치 하에 우파를 지원하는 기업들과 개인들의 돈줄을 노리고 있는거라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KKK단이 자신들의 신분이나 외형을 세탁하는 기본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있는그대로 거리를 활보하는 셈이니, 극우 포퓰리즘과 다름없는 저들이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요. 어느 누구도 냉전 이후 미국의 정치가 이런 식으로 귀결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끝으로, 데브스주의에 대해선 제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과연 미국 내에 순수한 진보주의 운동이 있는지에 대해선 저는 아직도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에 일단 저자의 분석으로만 갈음하려고 합니다. 다만, 앞으로 기후 위기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국가간의 여러 문제들은 데브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제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학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잉"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소명할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해법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기후 문제와 같은 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막는 원인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의 저개발 국가로의 아웃소싱 그리고 그로 인한 해당 지역의 환경 파괴와 하이에나처럼 저노동을 따라 이동하는 이들의 행태는 기존의 민주주의적 논법과는 아주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악명은 스스로기 짊어지지 않고 회피해 해당 국가가 오명을 쓰게하는 영리한 정치적 작업은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논리가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해밀턴식의 위장한 공화주의는 어느 나라나 하이브리드화 된 자본주의와 우파의 결탁으로 외형을 바꿔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의 평가대로라면 그저 A라는 엘리트의 다른 B라는 엘리트로의 제도적인 교체 정도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미국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토크빌주의나 헌팅턴주의의 분류가 아니라 미국의 '금권정치'전반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코크 형제와 같은 거대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그것이 먼저 낱낱이 분석하고 어떻게 이러한 돈이 오고가는 정치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해밀턴식의 정치 구조에서 너무나 왜곡되어 과두정치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글 3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아마도 하워드 진의 주장으로 기억합니다만 이제는 정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자유주의와 동등하게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을 위해 사회제도와 시민의 교육 등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애초에 민주적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부정적 의견을 갖고 있는 시선들이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적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기에 더 이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시녀로 국한되지 않도록 어느 사회나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악시오스 Axios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민주당의 5분의 1일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공화당의 54퍼센트는 민주당이 악의에 차 있고, 민주당의 61퍼센트는 공화당이 인종주의자이고 편견에 가득 차 있거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반면 좌파가 보기에도 미국의 통합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동적 우파는 기존 황혼에 찬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하리라 본다.

원래 공화주의는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 혁명은 토크빌과 아렌트가 찬양한 공화주의의 동등성 가치가 경제 영역여에서는 거의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낸시 프레이저 교수의 지적처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 설정을 모호하게 회피하는 담론이다

미국 건국 시조들의 사상적 배경은 인간 이성의 특권적 힘과 과학에 대한 믿음과 중요성을 가진 계몽주의가 깔려있다

아이켄베리가 보기에 과거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위험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방어하려던 윌슨의 고민은 오늘날 미국 지성의 고민으로부터 부활했다. 미 안팎으로 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전체주의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생존이 다시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피즘의 원천적인 에너지는 바로 기득권에 분노한 인민들의 반란으로서, 급진주의적 함의를 가진다

트럼프는 단지 이들을 자신의 나르시시즘 Narcissism 과 이익 목적에 이용해 단물만 빼먹는 스타일에 능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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