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나는 그분은 고종과 귀인(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지요?란 말을 했다.(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분.) 나는 후궁이란 말이 싫다. 주궁(主宮) 뒤편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어 그렇고, 종1품을 의미하는 의젓한 귀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귀인은 따로 있다. 귀인(貴人)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부족하거나 넘치는 기운을 바르게 해 나를 완성시켜주는, 명리학이 말하는 소중한 분을 의미한다. 나는 귀(歸)in이란 말도 쓴다. 귀납법은 induction이란 의미이다.


귀(歸)in과 함께 연(演)de라는 말도 쓴다. 연역법은 deduction이란 의미이다. 한 유명 문학평론가가 환원(reduction)을 연역(deduction)으로 읽은 사례가 있다. 이로 인해 이 분은 바슐라르의 감싸기란 개념을 이야기하며 감싸는 이론과 감싸이는 이론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자가 후자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확장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귀납에 의해 이론을 수립하는데 관찰해야 할 대상은 무한이기에 즉 언제까지 계속 관찰을 할 수는 없기에 귀납을 넘어 연역을 통해 관찰에서 제외된 대상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에 의하면 귀납은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되풀이하며 도/道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고, 연역은 상명하달하는 방식이다. 공자가 연역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조의 결론이다. 공자는 귀납적, 소인은 연역적이란 것도 그렇다. 어떻든 오독 사례가 있기에 이런 편법 조어와 암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덕혜옹주‘를 감상하러 가야겠다. 귀인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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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관람하고 왔다.(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국립기관으로는 처음 여는 것이라고 하니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그런 반면 이제야, 라며 푸대접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확하게 말해 나의 경우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관람을 마쳤다고 해야 옳다. 물론 주최측의 기획의도에 따라 도슨트의 해설이 맞추어졌을 것이고 그 도슨트의 해설에 맞추어 관람자들의 사유의 길이 유도되는 것은 유별난 일은 아니다. 한정된 시간 때문에, 그리고 관람자들의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도슨트의 해설 이후 각자 돌아가 이중섭 화가의 그림과 삶에 대해 퍼즐을 짜맞추는 것에 맞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가난, 가족과의 이별, 사기(詐欺)를 당한 뒤 맞은 파탄, 식욕부진과 우울증, 분열증, 간염, 정신병원행 등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유일하게 희망적이고 밝았던 시기는 통영 시절이었다. 이 시절 그가 그린 소는 참 역동적이었다. 반면 통영 이후 대구에서 그린 소는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가 맞은 시기에 따라 소도 얼마나 달랐는지 알 수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은지(銀紙)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지화)이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은박지에 철필 같은 것을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리고 채색까지 한 그림) 그것은 화가 생존 시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형편이 좋아지면 은지화 기법으로 벽화를 그려보고 싶다던 이중섭의 바람을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타이틀에 따라 그의 작품을 알리는 기획자들이 컴퓨터 작업으로 대형 벽화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배려해 만족시킨 것이다.


신화화되었다는 이유로 이중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대구 시절 지신의 그림을 정상적인 화풍으로 여기지 않는 정신적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신화화의 장막을 걷어내고 보아도 이중섭은 충분히 뛰어난 역량을 앞서서 보여준 화가라 해야 한다. 이중섭은 민족을 상징하는 소를 거침 없이 그렸는데 그것은 민족적 요소와 독창성의 결합이라 할 만하다.


여러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내 눈길을 끈 작품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작품이다. 오른쪽에 창틀에 몸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가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더 근사(近似)하게 말하면 오른쪽의 남자와 왼쪽의 여자 사이에 벽이라도 놓여져 있는 듯 하다. 여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이중섭의 삶을 고려하면 그림의 여인은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고 기형도(1960 - 1989) 시인의 ’엄마 걱정‘이란 시를 떠올렸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유년의 윗목”


통하는 부분이 많은 그림과 시이다.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삶과 그림을 나누어 보고 싶다던 내 생각은 잘못이라 해야 한다.) 문학적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권영민 교수), 심리학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우종민)를 들을 기회를 놓쳤고 이제 남은 것은 미술사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김현숙)이다. 일찍 알았다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강의를 듣기 위해 세 번이나 그림을 보러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기에 만일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골랐을까?


심리학 강의를 골랐겠지만 관건은 그를 이해하는 데에 있지 그를 분석하고 재단(裁斷)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번 읽은 저자이기에(믿을 수 있기에: ‘미술 전시장 가는 길‘, ’예술가로 산다는 것‘) 박영택 교수의 ’그림으로 삶을 완성한 화가 이중섭‘을 읽어야겠다. 대구 시절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 - 2004)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나 비참한 결과를 맞보고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된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지만 줄곧 희망을 생각했던 화가 이중섭...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은 사실보다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소 그림의 터치를 추사체처럼 처리한 역동성과 연계성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래야 덜 우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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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한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 글 또는 문화로써 벗을 모으고 벗과 더불어 사랑의 공동체를 키워나간다)이라는 말. 이는 군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군자란 말이 걸릴 수 있지만 군자는 대의(大義)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일본의 오구라 기조는 군자는 특정 형태 또는 용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해석되어온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군자는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구별 없이 모든 일에서 인(仁)이라는 ‘사이의 생명’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최근에는 ‘군자를 버린 논어’라는 책도 나와 관심을 끈다. 공자는 스스로를 성인(聖人)이나 인자(仁者)가 되기 위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떻든 이문회우 이우보인이란 말은 참 아름답다. 비현실적이라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군자의 의미를 유연하게 해석한다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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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1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자는 많이 만나게 되지 않는데 ㅡ 정말 다양하게도 읽으십니다~^^ 잘 듣고 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0:34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다양하기보다 두서 없이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장소] 2016-08-17 06:18   좋아요 0 | URL
두서없음 이 다양함일지 ..모르겠네요 .^^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7:19   좋아요 1 | URL
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8-17 07:26   좋아요 0 | URL
저도 저도~ 감 ,사드릴....게요!!^^ㅋㅋㅋ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7:30   좋아요 0 | URL
네? ㅎㅎ...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그장소] 2016-08-17 08:11   좋아요 0 | URL
벤투의 스케치북님도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8:34   좋아요 1 | URL
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열리고 있다.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 기억이 나 얼른 펼쳐보니 덕수궁은 세워지기 전이어서 김정호 선생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나와 있지 않다.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지만 그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덕수궁을 말하는 것은 덕수궁에 이르는 돌담길, 정동길 등을 산책하려는 두서 없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누구나 아는 화가이지만 제대로 아는 바도 없지 않는가 싶다.


물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는 이름에 말을 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화가의 삶과 화풍을 분리해서 볼 수 없음에도 그의 신산(辛酸), 고초(苦楚)의 삶과 그림을 나누어 보고 싶다. 나는 그림 이상으로 화가가 생전에 살았던 곳에 더 관심이 간다. 통영, 제주 등... 모두 바다와 관련한 이 곳들은 결국 내가 아직 가지 못해 로망처럼 여기는 곳들이다. “한 겹 아래 저 세상으로/ 또 피난”(김혜순 시인의 시 ‘진행’의 일부)을 가는 마음으로 가고 싶은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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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철은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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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매크로가 아닌 마이크로적인 사상가였다. 변화(생성)를 생각했지만 바꿈(혁명)을 생각하지 않은 사상가가 들뢰즈였다. 문제는 들뢰즈에게서 정치적인 면모를 발견하(려)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혹시 가타리에게서 읽은 바를 들뢰즈에게서 읽은 것으로 생각하는 결과는 아닐까? 고쿠분 고이치로에 의하면 들뢰즈가 특정 사상가들에 대해 서술한 내용들은 그들의 사상이지 들뢰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들뢰즈의 사상으로 읽힌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들뢰즈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자유간접화법이다. 이는 가령 “그것은 틀렸다” 같은 문장을 인용부 없이 그대로 문장 속에 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틀렸다는 문장이 마치 들뢰즈가 인용한 사상가의 것이 아닌 들뢰즈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직접 화법이 ‘그는 말했다. “틀렸다.”라고‘라면 간접 화법은 ’그는 그것은 틀렸다고 말했다.‘이고 자유 간접 화법은 ’그것은 틀렸다‘이다.


들뢰즈에게 철학연구는 대상이 되는 철학자가 그것이라고는 의식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던, 또는 다 말할 수 없었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열어젖히고 그 문제가 위치하게 되는 사유의 이미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인 바 자유간접화법의 다용(多用)은 이 사유의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도입한 방법이다.(사유의 이미지는 철학자가 스스로 사유한 것을 말로 분석해낼 때 암묵적 전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다.)


자유간접화법적 구상에서는 논하는 측과 논해지는 측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논하는 자에게 고유한 사상이 거기서부터 생기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이다. 그것에 의해 비로소 개념은 창조된다.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한다. 경험론은 주제 그 자체의 발생을 묻는다. 들뢰즈의 철학적 시도는 초월론 철학의 가능성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잃어버린 발생의 질문을 경험론 철학에 의해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려낼 수 있다.(58 페이지)


발생을 묻지 않는 초월론 철학은 최종적인 곳에서 변화의 조건에 관한 질문을 봉인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발생을 묻는 것은 변화를 묻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초월론적 경험론(발생의 관점에 주목하여 경험론에 의거하면서 초월론 철학을 재정의하는 시도)이다. 이는 초월론 철학과 경험론 철학을 종합하는 것이고 발생을 묻는 초월론 철학을 구상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하기에 발생을 묻지 않게 된다.(경험론은 주체를 구성된 것으로 파악한다.) 칸트류의 초월론 철학은 자아나 초월적인 통각(統覺)을 상정하고 있기에 비판받았다. 자아가 있어서 외계의 것을 대상화하는 작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 작용에 의해 비로소 자아가 발생한다.(64 페이지) 들뢰즈에게 초월론적인 것은 사건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특이성이라 부른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았다. 아니 매료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건의 개념에 의해 개체의 발생과 세계의 발생을 그려 보인 라이프니츠에게.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모든 것이 주어로부터 연역되는 고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의 주어(주체)가 동사(사건) 작용의 흔적으로서 있고 사건이 도래하는 그 도래 자체가 집약되어 세계를 이루는 유동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최종적으로 라이프니츠에 대해 이론(異論)을 드러냈다. 라이프니츠가 본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였기 때문으로 들뢰즈에게 라이프니츠는 호교론자였다.


들뢰즈는 무인도(無人島)의 형상에 의거하면서 타자가 없기 때문에 자아도 없는 역설적인 상태를 그려보였다.(75 페이지) 칸트가 자아를 상정하고 있었다면 프로이트는 자아의 발생을 그린다.(78 페이지) 들뢰즈에게 사유하는 것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습관은 경험에 후속하지만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을 했다. 들뢰즈가 말하는 것은 차이와 반복이다. 습관은 그러한 하나하나가 교환불가능, 치환불가능한 경험의 반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관점을 형성한다. 들뢰즈를 통해 우리는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끼게 하는 기존 질문과의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개념 창조의 기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들뢰즈의 사유의 강제성(어떤 사건에 접함으로써 사유를 하게 되는 사태)을 말하며 이를 망각함으로써 철학은 주체나 의식 등을 전제한 것이 아닌가, 란 말을 한다. 들뢰즈는 사건만을 초월론적인 요소로 인정한다.


물론 들뢰즈는 조우하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란 말을 했다. 사유는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와의 만남에 의해 발동하지만 기호는 해독되어야 한다. 습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무엇도 배울 수 없으며 우리에게 유일한 교사는 ’나와 함께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은 거짓 문제의 주위를 계속 맴돌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거짓 문제를 피하는 기술을 배우고 문제를 적절하게 제기하는 것은 빼어난 사회적, 비평적 실천이다. 들뢰즈는 ’시네마 2‘에서 운동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를 구별한 뒤 ’운동 이미지로부터 시간 이미지로‘라는 흐름을 기초로 파악하면서 주체성을 재정의한다. 시간 이미지는 영화의 등장 인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저자는 들뢰즈가 자기 철학의 한계(비정치적)를 타파하기 위해 거의 도박이라고 불러도 좋을 실천 즉 펠릭스 가타리와의 협동 작업에 뛰어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당시 가타리는 구조를 대신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었다. 구조가 일반성의 차원에 속한다면 기계는 반복의 차원에 속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사태가 반복되는 일은 없다. 가타리는 일반성의 차원을 구조에, 반복성의 차원을 기계에 분배했다. 기계는 나아가 시간, 사건의 관점에서도 특징지어진다. 구조주의는 감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현실도,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상상도 아닌 세 번째 수준 즉 상징적 수준을 다룬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금지가 실제 아버지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아버지가 안 된다고 말한다고 생각되는 것도 아닌 구조 속에서의 역할 즉 의미를 지니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시각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안 된다고 말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구조 내의 한 항이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다. 구조의 상징적 요소는 모두 위치에 의해 의미와 역할이 결정된다. 들뢰즈는 주변항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되는 어떤 항의 가치를 도출하는 작업을 미분(微分)이라 불렀다.


들뢰즈는 시니피앙(법, 규칙)과 시니피에(그 적용 대상) 사이의 불균형 - 필연적임 - 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보았다. 들뢰즈는 억압하기에 반복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와 달리 반복하기에 억압한다는 말을 했다. 이는 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원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반복이 억압을 낳는 것이라면 최초의 억압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이 원억압(기원적 억압)은 관측된 것이 아니라 결과로부터 역으로 상정된 것이다.(들뢰즈의 두 주장 즉 타자가 있기에 자아가 성립한다는 것, 결과로부터 역으로 상정된 원억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에 대해서도 유효有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원억압에 대한 의문은 신경증과 정신병의 구별에 기반을 두는 정신분석상의 태도에 변경을 요구한다. 라캉에 의하면 신경증이 원억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정신병은 원억압이 실패한 것이다. 원억압이 실패했다는 의미는 시니피앙 연쇄가 미약하다는 의미이다. 정신병 환자에게는 세계가 거대한 무의미 즉 수수께끼로서 나타난다. 신경증은 의미의 과잉이다. 정상인은 가벼운 신경증 환자이다. 원억압의 정상적 작동을 의심하는 것을 분열분석이라 한다. 들뢰즈, 가타리는 분열분석은 정신분석과 같이 신경증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증화한다는 말을 했다.


들뢰즈, 가타리는 원억압의 가설을 제거함에 의해 욕망을 팔루스의 결여로 설명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으로부터의 탈각을 꾀했다. 분열분석의 목표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는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예속을 바라는 심리를 해명하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프로이트 라캉적 정신분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을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과 접속하여 욕망 일원론의 철학의 원리를 구축한 저작인 데 비해 ’천개의 고원‘은 그 원리에 기반을 두어 권력 장치의 분석을 실로 다양한 테마 아래서 수행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음 저서로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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