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ㅣ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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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 1883)는 ‘올랭피아‘와 ’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은 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論)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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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중력이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최신작인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를 완독하고 13, 000자의 서평을 썼다. 서평이라기보다 요약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 내 관점에 따라 정리한 글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내가 읽은 카를로 로벨리의 6번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과학, 물리학, 철학은 물론 칸트,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 등 개별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주문할 것이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화이트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을 읽어야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로벨리의 최고의 책이 아닌가 싶다.

 

카를로 로벨리는 흥미롭게도 관계는 신학(神學)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고립적이지 않은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수학이나 예술처럼 우리는 과거의 축적된 유산을 바탕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유클리드, 알콰리즈미(페르시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진구소(秦九韶; 친지샤오; 중국 남송 시대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기상학자, 정치가), 가우스 뿐 아니라 사포(고대 그리스의 시인), 무라카미 시키부(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 소설가, 시인), 제니스 조플린(미국의 록 가수)의 유산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제니스 조플린이다. 록 음악, 특히 로벨리와 같은 국적의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을 오랜만에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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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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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인간을 구체적인 존재, 물리적 세계의 일부, 생각과 욕망, 계획과 감정, 그리고 꿈으로 직조되어 있는 존재, 창조하고 해석하는 존재로 본다. 2026년에 나온 그의 최신작인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는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 책은 출간 2년 전에 진행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의 특별 강연을 주요 소스로 해서 만든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양자 현상 및 양자 물리학을 주요하게 다룬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 현상의 발견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놀라운 혁신이다. 실험실에서 관찰된 다양한 현상이 물질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양자 물리학은 아주 작은 영역부터 거대한 영역까지 세상의 사실들을 놀라울 만큼 효과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은 오랫동안 세상이 다른 모든 것과 독립적으로 항상 고유한 속성을 지닌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세계관 전체를 지탱해온 유서 깊은 사고의 틀을 버리도록 요구한다. 양자 물리학의 세 가지 특징은 기이한 맥락성, 확률성,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불연속성)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수들은 특정한 값(양자화된 값)만 취할 수 있고 다른 값은 취할 수 없다. 입자성이란 우리가 어떤 시스템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유한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개념이다.(70 페이지) 확률성은 어떤 시스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가 최대치에 도달해도 그에 관해 새로운 유용한 정보를 항상 더 얻을 수 있음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확신을 의심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과학의 핵심 메시지다. 과학 문제의 어려움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것보다 당연해 보였던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은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틀렸음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현실 그 자체, 궁극적 존재론, 최선의 체계, 진리 같은 말들을 세계에 관한 확실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고 말하며 이러한 말들은 심리적, 문화적 고뇌의 투영 즉 과도하게 발달한 뇌를 가진 포유류인 우리 인간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필요한 것은 확률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입자성과 확률성, 이 두 가지 원리는 맥락성과 함께 양자 물리학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강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현실의 양자적 구조에는 모든 것을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고정된 기준점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지식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이와 똑같은 구조를 지닌다. 저자는 형이상학이든 인식론이든 근본 물리학이든 자신이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토대를 세우는 것보다 현재 우리의 지식 수준을 고려해 세상에 관해 사고하는데 가장 적합한 개념적 틀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관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어떤 관점 안에 있다. 관점들은 서로 소통한다. 일단 우리는 관점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지식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담고 있다. 현실은 관점들의 반영이며 우리의 지식은 그 일부다.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실,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은 바로 이 경이로운 거울 놀이 같은 관점들의 상호 반사(反射)다. 세상은 사건과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로 이 변화가 세상의 존재 방식이다. 사건은 시간 속에서 특정한 위치를 가지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과정을 시간이라는 순서로 배열해 조직한다. 계절의 변화, 낮과 밤의 교대, 시계의 뚝딱거림, 생각의 연속 등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흐름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저자는 가장 흔한 오류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포착하는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구조, 단 하나의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 공통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고도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두 친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 경과된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의 흐름은 전 우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시간은 장소 또는 궤적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공통된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국소적 개념이다. ‘지금, 여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 없이 지금이라는 단독의 단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멀리 떨어진 별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멀리 떨어진 별에는 우리가 망원경으로 관측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사건들, 누군가가 망원경으로 지금 우리를 관측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건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아닌 중간 시간대가 존재하며 별이 멀어질수록 그 시간대는 더욱 길어진다.

 

우리들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확장된 현재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과거와 미래에 일어난 사건의 총체로 그들을 현재의 순간과 구분해 생각한다면 현대 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주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우리의 생각이 흐르는 것도 사건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양자 중첩이란 사물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상대적인 정보의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물체의 위치를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물체들 집합의 안쪽 경계라고 정의한 것을 인용하며 공간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바로 인접성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다. 이런 공간 개념에는 거리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다. 두 손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두 손은 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간은 관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거리를 통해 정의되고 비어 있을 수도 있다고 배운다. 사물이나 사건이 없어도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실체가 가능하다고 상상한 뉴턴은 특유의 겸손하지 않은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그리고 일반적 상식에서의 공간을 평범한 공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창안한 공간을 진정한 공간이라고 불렀다.

 

중력장은 질량의 영향을 받으며 질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결정한다. 중력장이 출렁이면서 퍼져나가는 파동이 중력파다. 이것은 전자기장이 진동하며 퍼져나가는 전자기파와 비슷하다.(101 페이지) 저자가 설명하는 공간은 사물들이 서로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이루는 구조이며 사물들 사이의 인적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 공간이란 사물들 사이의 인적 관계이며 우리는 이 관계를 이용해 사물과 사건의 위치를 파악한다. 절대 운동은 존재하지 않고 상대 운동만 존재한다.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어떤 사물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절대적 장소는 없다. 오직 상대적 장소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공간의 구조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고정된 유클리트 기하학을 따르고 사물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뉴턴의 공간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착각이 생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현실을 확장된 실체인 장(場)들의 집합으로 묘사한다. 이 장들은 공간에 자리하지 않고 외부 시간 속에서 진화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의 연장(延長) 실체처럼 장들 자체가 공간적 확장을 규정하고 장들의 진화가 시간이다. 저자는 양자 물리학의 관계 구조와 시공간의 관계 구조가 일치한다고 말한다.

 

양자 물리학의 개념적 틀은 시스템 사유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양자 물리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 사이에 모순이나 긴장이 존재한다는 흔한 주장과 달리 두 이론은 연인처럼 서로를 감싸안는다고 말한다.(10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두 이론은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관계적 핵심을 공유한다. 두 이론 모두 과정들 사이의 상호작용 네트워크를 다룬다.(123, 124 페이지)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두 이론이 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 이론이 깔아준 역동적 시공간이란 무대 위에 양자 물리학의 관계적 속성이 올라타면서 비로소 우주의 진짜 모습이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주의 진짜 모습이란 시공간이 없는 루프의 그물망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전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우주란 물질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을 이동하는 곳이 아니다. 시공간마저 모두 녹아내린 자리에서 많은 미시적 루프들이 쉼없이 얽히고 설키며 관계를 맺고 있는 역동적 그물망 자체가 우주의 진짜 얼굴이다. 사회 역학은 시스템들이 다른 시스템들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공간적 관계를 정의한다.(110 페이지) 저자는 양자는 사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양자는 고정된 속성을 가진 사물이 아니라 대상들이 상호작용할 때만 나타나는 사건이자 관계다.

 

시간과 관련된 모든 현상은 소산적(消散的)이다. 에너지가 흩어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소산작용이 있을 때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엔트로피 기울기 즉 차이가 존재한다. 거시적 변수들에서 미시적 변수들로 넘어갈 때 소산이 일어난다. 이때 이 에너지는 거시적 변수들보다는 더 이상 포착되지 않는다. 저자는 자연을 더 잘 이해하려면 자연을 우리의 기존 개념에 맞추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의 개념을 분석하고 수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은 생물권의 일부인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소산적이며 비가역적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다. 과거의 미래 사이의 차이는 통계적인 것이다. 열역학 제2 법칙은 보편적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통계적이란 개별 입자의 움직임 수준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지만 수많은 입자가 모인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확률적으로 한쪽 방향 즉 미래로만 현상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저자는 세상의 기본 물리 방정식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산에 있는 모든 돌을 물리 방정식으로 설명하려면 그 방정식들의 수많은 해(解)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해들을 다 알아내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어떤 대상에 관해 유용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구체적 상황의 측면들을 포착하는 데 적합한 개념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는 것은 과학이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과학의 불통일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다양성은 과학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관점들이 일관되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과학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물리학이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현상이 물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과정이 완전히 똑같아도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저자는 복잡한 현상은 단순한 구성 요소에서 생겨나지만 그 구성요소로는 원리적으로 절대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 질환이라 말한다.(171 페이지) 저자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다는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고 말한다. 부제가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인 것이 이해된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도 생명체가 물리학의 범주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생물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생물학자가 많았다. 오늘날 생화학은 모든 생물학자에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양자 물리학은 화학의 기본 원리가 물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장벽을 허물었다. 저자는 물리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노래라고 말한다. 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말을 걸고, 세상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부르는 다양한 노래들은 서로 공명하고 반영하며 서로에게 말을 건다.

 

저자는 상대적이란 말과 자의적이라는 말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가령 달의 속도는 지구에 대한 상대적 속도로 정의되지만 그것이 달의 속도가 자의적이어서 달이 원하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이 그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지 그 자신의 윤리를 어긴 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식이 누군가의 지식이라는 사실이 지식을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으며 다른 사람 또는 나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세상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해 훈련하지 빛의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훈련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판단이 중요한 것은 도덕이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덕성 붕괴보다 핵전쟁이 문명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더 높다며 절대적 진리의 소멸이 문명을 붕괴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덕성은 우리 존재의 복잡성을 구성하는 실질적 요소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학적, 문화적, 사회적 뿌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가 숙고하는 모든 과정의 복잡성과 분리하기 어렵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평등하게 존재하며 그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관계는 신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고립적이지 않은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다.(201, 202 페이지)

 

저자는 물리학이 먼저 명확하게 정의된 실체적 바탕을 제공하고 그 위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순진한 유물론과 결부된 헛된 희망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사물(실체)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계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로벨리에 의하면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만 그 대상의 속성이 정의되고 존재하게 된다. 고정된 물질적 실체가 먼저 있고 그 위에 관계가 쌓인다는 생각은 고전적이고 단순한 물질 만능주의(순진한 유물론)가 만들어낸 착각이자 현대 양자물리학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 지적이다.(202 페이지)

 

전자(電子)에 관한 모든 설명은 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세상에 관한 물리적 기술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관점에 따른 것이라 설명한다. 세상의 상태에 관한 모든 설명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근사치(近似値)다. 여러 과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은 세계의 각 부분이 서로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보다. 따라서 세계는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의 상호(相互) 정보(情報)다. 물리학은 시스템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상호 정보를 다룬다. 세상에 관한 모든 설명은 상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상태에 관한 진실은 언제나 주관적이다.((204, 205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주관성이란 진리가 본질적으로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주체가 없는 객관성은 추상적 개념이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점은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소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점들은 물리적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들에게 숨겨진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들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수히 많을 뿐이다.(210 페이지) 저자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개별적 자기 성찰조차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접근하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디고 말한다. 저자가 이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 의식적 자기 성찰은 만능이 아니며, 우리 뇌와 신체가 자연의 거대한 인과법칙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주관성은 현실의 다른 어떤 특성보다 특별히 더 깊이 감춰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관성이나 의식을 과학으로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로운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주관성 역시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세상의 다른 물리적 특성들보다 특별히 더 깊이 감춰진 비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양자역학 해석(관계론적 양자역학)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오직 다른 존재와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속성을 가진다. 주관성 역시 뇌라는 물리적 계가 외부 세계 및 자기 자신과 맺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주관적 경험이란 결국 계(뇌) 내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보의 처리 과정이다.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뉴런의 전기 신호와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느낌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같은 현상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의식을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로 분류하지만 저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는 과거에 인류가 생명(Life)을 물리화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의 기운(생기론)으로 보았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극복했듯 주관성 역시 거대한 뇌의 메커니즘이 밝혀지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

 

저자는 우리가 객관적 지식이라고 믿는 것 역시 결국 하나의 특정한 관점이자 주관성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지식의 주체인 인간이 결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의 한 파편이며 우리가 만든 객관적 이론과 과학적 지식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고 탐색하기 위해 신체와 뇌로 구현해 낸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한 파편이며 우리가 만든 객관적 이론과 과학적 지식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고 탐색하기 위해 신체와 뇌로 구현해 낸 도구일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신체와 뇌라는 말은 한계가 있고 제한적인 도구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과 지식은 우주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그보다 인류가 가진 제한된 감각 기관(신체)과 처리 능력(뇌)을 통해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생존하기 위해 최적화된 지도에 가깝다. 우리는 우주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없다. 우주라는 거대한 계(System)의 안에 속해 있는 작은 파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우리 신체와 뇌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온 제한되고 주관적인 정보일 뿐이다. 우리의 뇌는 우주의 모든 차원과 법칙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간, 공간, 객체의 개념조차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유용한 도구'일 뿐, 우주의 근본적인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과학이 말하는 객관성은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객관성이란 너와 내가 서로 소통하며 조율해 낸, 고도로 공유된 상호 주관적 경험이다. 즉, 수많은 주관적 관점들이 상호작용(실험과 검증)을 거쳐 서로 불일치를 줄이고 합의에 도달한 상태를 우리는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상의 속성은 오직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만 드러난다. 지식 역시 언제나 특정한 물리적 위치, 시간, 문화적 배경이라는 관계와 맥락 안에서만 성립하는 시각(Perspectival knowledge)이다. 절대적이고 탈맥락적인 객관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저자는 객관성을 절대화하는 태도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착각이자 주관적 집착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는 과학이 위대한 이유는 완벽한 객관적 진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의 지식이 언제나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임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은 과학적 지식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의 진짜 리얼리티(관계적 현실)를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철학적 통찰을 담은 말이다. 마음 역시 만물의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이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탁자가 원자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상적 의미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듯 영혼과 감정에 관해서도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만물의 평등함이라는 것이다.

 

지식은 과정, 주체, 그리고 나머지 세계 사이의 관계다. 지식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개념적 틀 위에서 형성되는 집단적 현상이다.(223 페이지) 지식은 물리적 현실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연구하고 상호작용하는 세계는 다른 시스템들이 우리에게 투영된 모습이며 현실 자체를 구성하는 상관관계 그물망의 일부다. 우리는 이러한 순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224 페이지)

 

우리의 지식은 다른 모든 정신적, 영적 삶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불안전하며 그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다. 계몽주의와 특정한 분석 철학이 소중히 여겼던 순수이성, 궁극적 명료함이라는 이상은 비로소 무너진다. 모든 모형은 포착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놓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이론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는 다른 무언가가 간과되어 있다. 우리가 어떠한 질문에 우선순위를 두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228 페이지)

 

저자는 모든 지도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우리는 무지와 확실성 사이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덧붙인다. 현실의 관계적 본질과 그로 인한 관점주의를 인식하면 현대 과학과 일관되게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가 바로 주관적 관점이다. 진리는 주관적이다. 과학이 많은 질문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한다고 믿지만 이러한 해답들은 타당성과 신뢰성이 높을 뿐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과학 지식과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들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세상에 관해 즉각적으로 설명할 때 쓰는 단어인 탁자와 과학적 차원에서 쓰는 단어인 전자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다 세상을 특정한 수준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 단어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실제를 지칭한다. 저자는 뉴턴의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통합되었을 뿐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도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물리학은 타당성의 범위 내에서 훌륭하고 강력하며 정확하다. 뉴턴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사이의 관계는 뉴턴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물리학과 맺는 관계와 같다.

 

과학 이론은 세계를 이해하는 체계의 일부다. 기존 사고의 틀에 덧붙는 도구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이론은 표현조차 될 수 없다. 과학 이론은 결코 세계에 관한 완벽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근본적 수정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존의 세계관을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시켜가며 새로운 이론을 발견한다.

 

이 말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과 뚜렷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가진다. 카를로 로벨리의 관점은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존재론(우리가 어떤 틀에 갇혀 생각한다는 점)은 수용하지만 그 틀이 깨지고 바뀌는 과정에 있어서는 쿤의 과격한 단절(혁명) 대신 기존 패러다임 내부에서의 유기적인 확장과 변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쿤의 패러다임론에 대한 세련된 비판이자 보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신중한 진화 과정에서 과학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의해 왔다. 과학은 우리가 사고를 조직하고 세상을 경험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과 도구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기초과학의 급진적 도약은 반증된 이론을 버리고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란 속에서 이미 얻어진 과학적 성과를 신뢰하면서도 방법론적 개념적 틀을 수정하고 축적된 지식이 제기한 수수께끼의 해답이 되는 새로운 종합을 구축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은 개념의 변화를 감수한 끝에 얻어진 것이다.(251, 252 페이지) 결국 과학은 기존의 탑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것이 아니라 기존 탑의 설계 오류(개념)를 고쳐 더 높고 견고한 탑으로 확장하는 개념적 재구성의 역사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개념은 모호한 실체다. 개념의 사용은 항상 모호하고 가변적이다. 물리학에서 가장 풍부한 개념들은 끊임없이 재정의되어 왔음에도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진다. 엔트로피에 관해서는 새로운 정의가 꾸준히 등장하지만 오늘날까지 에너지에 관한 개념이 물리학에서 차지하는 수많은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정의는 없는 것 같다. 개념과 언어의 모호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모호함에서 또 다른 모호함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언어는 적응하고 폭증하고 차별화하고 진화하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특성 덕분에 오늘은 더욱 미묘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무한한 과정이 풍요로운 문화의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추를 통해 개념을 구축한다. 유추란 개념의 한 측면을 가져와 다른 맥락에서 재사용하고 그 의미 중 어떤 것은 유지하고 다른 것은 버림으로써 새로운 조합이 참신하고 효과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입자 물리학에서의 입자, 시공간의 곡률 등이 모두 은유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너무 많은 것을 뒤에 남겨두면 앞으로 나아갈 도구가 부족해지고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면 이해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한다.(259 페이지) 이 역시 훌륭한 은유다. 너무 많은 것을 남겨둔다는 것은 과거의 지식을 버린다는 것이고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과거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지식을 무조건적인 진리로 숭배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허구라며 완전히 무시하지도 말며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유용한 은유이자 도구로써 영리하게 쥐고 나아가야 한다는 중용의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저자는 특수 상대성이론을 예로 든다. 이 이론은 그냥 보기에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와 맥스웰 방정식, 두 가지 모두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확신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포퍼와 쿤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을 수정하는데 몰두하거나 고속 체계에서의 속도 상대성 이론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두 이론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갈릴레오의 생각과 맥스웰 방정식 사이에서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점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바로 개념적 틀 즉 동시성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 역시 같은 전략의 선물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특수 상대성이론 관련 영역에서의 뉴턴 중력, 그리고 뉴턴 힘의 동시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형으로서의 맥스웰 이론에 관한 확실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우리는 이 낯선 세상 속에서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채로 불안하고 조심스럽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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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근대 개발 시대에 중요한 통찰력을 주었고, 불교는 문명의 위기와 맞물려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지향점과 방법론이 다르겠지만 종교적 깊이, 인문학적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불교와 양자역학], [양자역학과 불교] 등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때만 해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은 불교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존 폴킹혼, 러셀 스태나드 등을 통해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논의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자이자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나드는 양자역학의 '빛과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기독교의 '예수의 신성·인성 이중성(기독론)' 및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한 바 있지요. 물론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불교가 양자역학과 훨씬 더 근본적인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평가하는 반면, 기독교는 양자역학을 통해 교리의 모순을 방증하거나 비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 그리고 그 물리학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겠지요. 덧붙여 잘 모르지만 불교 성직자들은 이상한 정치적 언행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기독교는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기독교 책이 잘 선택되지 않고, 불교 책이 잘 선택되는 한 요인이겠지요. 저도 기독교인인데 기독교 설교는 수천년 전에 쓰인 경전을 현대적 맥락하에서 어떻게 살려서 가르치고 갈 길을 제시할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약간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 교회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쓰신 모 기독교 전문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전개하는 것에는 예리한 구성력을 보이시는 등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셨지만 결론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참 소략한 말씀이었습니다. 큰 상찬을 받은 논문인데도 참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다 된다는 상황이라면 답은 명확하고, 할 바는 별로 없어 그것을 책으로 낼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최근에 안 바이지만 질그릇 이론이 있더라고요.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고 그 손에 붙잡아 쓰시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그런 그릇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행동이 성경적이어서 지지하고 그를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성이 같아 그를 하나님이 흠이 있어도 쓰신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향이 보인다고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삿되고 무도한 그릇은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적당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경향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보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수전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해석하기 어려우면 놓아 두어야 할 텐데 굳이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현실을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으로 설익은 결론을 내고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인사들이 기독교 책을 읽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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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는 과학으로
이자벨 스탱게르스 지음, 장하원.김연화 옮김 / 에디토리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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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과 교수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는 느린 과학 선언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는 복잡계 과학의 선구자이자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과 비평형 열역학을 바탕으로 한 자연의 비가역성과 '혼돈(카오스)으로부터 어떻게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는가'를 공동 연구한 인물이다. 저자는 몇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1) 다른 과학과 느린 과학(Slow Science); 자본과 산업의 논리에 포획되어 맹목적으로 가속하는 현대 과학(빠른 과학)에 대한 대안적 과학이다. 2) 관심의 문제; 브뤼노 라투르가 제기한 것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이고 고정된 ‘사실(Matters of Fact)’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얽힌 수많은 행위자들의 연결망, 취약성,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돌봄과 염려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저자는 관심의 문제에서 핵심은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저하고 집중하면서 세심하게 조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게끔 종종 어려운 선택지를 더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3) 대중지성; 대중을 일방적인 지식 수용자로 보지 않고 과학과 사회적 의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에 전문가와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주체적 역량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에는 감식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식가란 맹신과 맹목적 반대를 넘어선 능동적 시민, 산업 자본에 포섭된 과학에 제동을 거는 사람, 사실을 관심사로 전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감식가란 과학이 실험실에서 규명한 닫힌 사실을 사회적 논쟁과 협의가 필요한 공동의 관심사로 끌어내오는 이들이다. 저자는 대중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들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개입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과 수단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비평가인 장 마르크 레비 르블롱이 한 ‘과학에는 아마추어가 없다’는 말을 인용한다. 여기서 아마추어는 실력이나 수준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추어란 원래 라틴어 'amator(사랑하는 사람)'에서 유래한 말로 보상이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레비 르블롱은 예술이나 스포츠와 달리 과학에는 왜 아마추어가 없는지 질문한다. 예술의 아마추어는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어도 음악을 깊이 사랑하고 연주를 즐기는 아마추어 음악가나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평하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를 말한다. 반면 과학에서는 실험실 밖의 대중이 과학을 취미로 즐기거나 비평하는 아마추어 애호가가 되기 어렵다. 과학계가 고도의 전문 용어, 거대한 자본, 격리된 장벽을 세워 대중의 접근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중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없다고 말한다. 레비 르블롱이 아마추어가 전멸했다는 말로 경종을 울렸다면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과학의 감식가(아마추어 애호가, 비평가)를 길러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 학문의 구조와 연구 방식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개방적인 과학은 지구·우주과학(지구과학, 천문학), 가장 폐쇄적인 과학은 군사·국방과학, 상업용 응용화학, 신약 개발 분야다.

 

지구 우주과학은 '인류 공공의 자산'을 연구하기 때문에 데이터 공유와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이나 허블 망원경의 관측 데이터는 일정 기간(보통 1년)이 지나면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공개된다. 우주는 한 국가나 기업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 지진, 대기 순환을 연구하려면 전 세계의 관측 자료를 합쳐야 한다. 세계기상기구(WMO)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교환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군사·국방과학, 상업용 응용화학, 신약 개발 분야는 국가의 안보나 기업의 생존(특허 및 독점 수익)과 직결되어 있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다. 군사·국방과학 분야는 국가 기밀로 분류되어 연구 결과가 논문으로 발표되지 않거나, 핵심 기술은 철저히 은폐된다. 학문적 교류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는 경우가 많다. 응용화학 및 제약·바이오 분야는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특허권이 걸려 있다.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실험실 내부의 레시피를 절대 공개하지 않으며 학회에서도 핵심 노하우는 숨긴 채 발표하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스티븐 제이 골드가 훌륭하게 보여주었듯이 진화 과학의 강건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증거가 아니라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해지고 흥미로워지는 사례들의 숫자가 다양성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진화 과학이 단순히 '실험실에서 증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과학'이라기보다 다윈주의라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수많은 생명의 다양성과 현상들이 비로소 이해되고 흥미로워지는가에 의해 그 가치가 증명된다는 뜻이다. (생물의 역사적 우연성과 다양성을 우아한 글로 풀어내며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명체들이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제각각의 의미를 얻고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 되는지를 평생에 걸쳐 보여준 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과학이 단순히 딱딱한 진리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방식을 제공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관점은 설명력이 곧 과학의 강한 힘임을 말한다.

 

저자가 굴드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현대 과학을 지배하는 ‘생산성 중심의 빠른 과학(Fast Science)’에 맞설 강력한 대안으로 ‘느린 과학(Slow Science)’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증거의 양’보다 ‘설명의 풍요로움’이 가진 힘, 동료 시민을 소외시키지 않는 과학, 통제와 예측에서 ‘관계와 역사’의 과학으로란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바이다. 저자는 건전한 과학이라는 말이 경성과학이란 용어보다 훨씬 더 무례한 용어라 주장한다. 경성과학은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 등을 지칭한다. 연성과학은 인문, 사회과학을 지칭한다. 경성과학은 데이터 시각화를 위한 그래프의 사용 빈도가 매우 높고 학계 내의 이론적 합의 수준이 연성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조밀한 편이다. 연성과학이란 말은 다소 서열화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학문이 아니라거나 가짜라는 식의 전면적인 부정을 뜻하진 않는 데 건전한 과학의 반대어들은 불건전한, 의심스러운, 가짜의, 사기성 있는 등의 말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척결해야 할 가짜 과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저자가 건전한 과학이란 말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는 미국 등 주류 정치·경제 권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연구를 배제할 때 불건전한, 의심스러운, 가짜의, 사기성 있는 등의 말을 쓰기 때문이다. 건전한 과학이라는 용어는 주로 담배, 화학, 기후 변화 등과 관련된 거대 기업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규제나 연구 결과를 방해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해 온 말로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과학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동료 과학자들의 연구나 시민들의 우려를 불건전하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몰아세워 입을 막는 기능을 수행한다. 저자는 경성과학이란 말이 학문 간의 방법론적 차이(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등)를 나누는 오만한 표현에 그친다면 건전한 과학이란 말은 무엇이 올바른 과학인지를 기득권이 독점하여 판정하려는 더 교활하고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저자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역사적 인식론학파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핵심적인 관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저자는 바슐라르가 정립한 과학적 합리주의가 현대 과학을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일상적인 경험이나 상식(의견)과 과학적 사유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 épistémologique)이다. 바슐라르는 의견(Opinion)은 원칙적으로 항상 틀리다며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과 주관적 상상력을 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이 과학자와 비과학자(대중, 시민) 사이에 정당하지 못한 이분법적 장벽을 세웠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대중의 무지나 왜곡된 의견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바슐라르 식의 논리가 결국 과학을 사회적 통제나 민주적 토론으로부터 격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바슐라르가 상정한 과학 모델을 빠른 과학(Fast science)의 전형으로 본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과학은 실험실이라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 고유한 질문을 던지고, 그 외의 다른 복잡한 세계의 맥락(생태적, 사회적 영향)은 과감히 무시(Ignore)하면서 전진하는 과학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와 고립을 강조하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결과가 사회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주변 주체들과 함께 고민하는 느린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슐라르적 전통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사회의 복잡한 문제나 인문학적 상상력에 관심을 가지면 과학자로서 끝장난다는 식의 강박을 주입해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거세했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이 스스로 오류를 교정하며 진보하는 자율적인 합리성의 영역으로 보았다. 저자는 과학은 결코 진공 상태나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현대 과학은 철저히 자본(산업적 이익) 및 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바슐라르식의 순수한 과학이라는 환상은 오히려 과학이 외부 세력(거대 기업 등)에 의해 포섭되고 도구화되는 현실을 은폐하는 가림막이 될 뿐이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로버트 보일의 순결한 연구자란 개념도 비판한다. 사적 이해관계의 배제, 투명한 관찰자, 의견과 사실의 분리 등을 주지(主旨)로 하는 보일의 순결한 연구자는 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발명한 근대적 이상향이지만 오늘날 지구적 위기 속에서는 과학이 사회 및 대중과 단절되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적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상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이라는 인위적 공간과 이를 인정해주는 특정 전문가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생산된다고 본다. 저자는 과학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순결한 영역으로 두는 탓에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 파괴, 기술적 부작용 등의 결과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오직 연구의 진보만을 외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식경제가 초래한 피해를 계기로 병적 공포를 지닌 몽유병자들이 마침내 눈을 뜰 것이라 너무 자신만만하게 기다리지는 말자고 말한다. 여기서 몽유병자들이란 자본주의와 지식경제가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기존의 삶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을 뜻한다. 몽유병자라 불리는 이유는 기후변화나 지식경제의 폐해(불평등, 경쟁 심화 등)를 머리로는 알지만 시스템이 정해놓은 궤도(생산과 소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관성대로 살아가는 상태를 보이기 때문(무감각한 순응)이고, 위기가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대안을 찾기보다 무력감과 병적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마비된 공포)이고, 잠을 자며 걷는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주체성의 상실)이다.

 

저자는 위기가 심각해진다고 해서 이 몽유병자들이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 행동할 것이라 낙관해서는 안 되며 이들을 흔들어 깨울 새로운 정치적·행동적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사고할 때 쉬운 희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 등에서 전쟁과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엘리트주의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직시한 인물로 저자는 울프처럼 우리를 둘러싼 파국의 원인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쉬운 희망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은 절망이나 냉소주의로의 도피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값싼 위로를 버리고 우리가 처한 이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 발을 딛고 버텨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해결책이 즉각 보이지 않더라도 비극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주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사유를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유효한 대안과 단단한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철학이다.

 

저자는 브뤼노 라투르가 연구실(실험실)에서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했음을 지적한다. 과학적 사실이 인간 과학자 개인의 천재성이나 외로운 고군분투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의 철학을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양분으로 평가하며 깊은 경의를 표한다. 저자에게 들뢰즈는 자신을 철학의 세계로 이끈 해방자이자 과학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마술적이고 생태적인 실천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 준 개념적 나침반이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강연에서 저자의 출석을 반가워하며 그녀의 사유를 존중하는 등 두 학자는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누었다. 저자는 들뢰즈가 보인 세 가지 점에 깊이 공감했다. 1. 지식의 도그마(독단)를 깨뜨리는 유머와 해방감, 2. 고정된 본질이 아닌 생성과 배치의 존재론, 3. 정답을 내리는 대신 문제를 발명하는 철학 등이다.

 

저자는 근대 과학이 추구해 온 동일성의 과학(하나의 절대적 진리, 보편적 법칙, 환원주의)에 맞서 세계의 복잡성과 이질성을 인정하는 다원성의 과학을 제시한 대표적인 현대 과학철학자다. 저자는 자신이 실험적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극도로 엄격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경성 실험 과학이 이미 누리고 있는 특권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표는 실험적 성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그것을 재창조하며 다른 유형의 조건들과 연결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성공의 여지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반드시 연성일 필요는 없다. 또한 실험적 조건 만큼 엄격할 수 있지만 단지 상당히 다른 것을 요구할 뿐이라 말한다. 경성과학의 실험실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맥락이 바뀌면 엄격함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며, 그 다른 기준을 통과한 지식 역시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말로 지식의 다원주의를 역설한 것이다.

 

저자의 말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을 느리게 만드는 것 자체가 과학들 사이의 대비를 어떻게 창조할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지만 그러한 해답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말이다. 첫째는 이는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누적적 지식 모델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동료들을 연결할 수 있는 평가 실천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 말한다. 저자는 느림에 대한 권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느림은 속도와 마찬가지로 연구자들을 유연성과 경쟁력의 명령이 결국 자신들을 파괴로 몰아넣을 것임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우리는 근대과학의 기묘한 모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또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이미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더 잘 사는 것만으로는 배울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다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며 다시 사물들과 친숙해지는 것이고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고하고 상상하며 그 과정에서 타자들과 포획의 관계가 아닌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사이에서 그리고 타자와 함께 병든 자들에게 효과적인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 함께, 타자로부터, 타자 덕분에 배우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만한 삶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저자는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하다는 토머스 쿤의 주장에 아연실색한 과학철학자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두 패러다임이 공통의 척도로 비교될 수 없다는 의미다.

 

과학적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더 우수한 패러다임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혁명적 전환이라는 뜻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토머스 쿤의 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은 과학이 상대주의나 비합리주의에 빠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실천의 독특하고 까다로운 구체성(situatedness)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쿤은 과학이 계단을 오르듯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는 혁명(단절)을 통해 변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 과학사에서는 옛 패러다임의 핵심 유산이 버려지지 않고 새 패러다임 속으로 흡수되어 발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새 패러다임)이 등장한 이후에도 뉴턴의 고전역학(옛 패러다임)은 폐기되지 않고, 빛보다 느린 거시 세계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여전히 유효한 진리로 누적되어 사용된다. 쿤은 주로 천문학(코페르니쿠스), 물리학(뉴턴, 아인슈타인), 화학(라부아지에)의 역사만을 바탕으로 패러다임론을 정립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생물학은 패러다임의 붕괴와 혁명을 겪었다기보다는 유전학, 분자생물학 등과 결합하며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누적해 온 역사에 가깝다. 쿤의 이론은 복잡하고 다원적인 타 과학 분야의 발전 패턴을 해명하는 데 한계가 크다. 쿤의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이하고 새로운 틀로 급격히 전환되는 과학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이론은 지질학의 역사, 특히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의 정립 과정을 설명하는 데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저자는 사회구성주의를 이야기한다. 사회구성주의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지식, 진리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소통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구성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인식론적 흐름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구성주의는 사실(Fact)은 인간에 의해 구성(Constructed)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라거나 허구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다. 물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구성주의(특히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물리학자들은 과학적 사실이 정치나 문화적 합의로 결정된다는 사회구성주의에는 강력한 적대감을 보이지만 과학이 자연을 관측하기 위해 이론적 모형과 실험 정교함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는 실천적 의미의 구성에 대해서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따라 점차 세련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현대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치명적인 허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자벨 스탱게르스, 브루노 라투르 등은 인간들끼리만 말장난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사회)와 비인간 존재(자연, 물질, 생태계)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공존하는 생태적 민주주의(코스모폴리틱스)의 실현을 소망한다.

 

빠른 과학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지 말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명령이며 그렇지 않으면 ...과 같은 식의 경고를 의미한다. 저자는 되찾기(Reclaiming)를 말한다. 자본주의의 주술과 빠른 과학 체제에 포획되어 상실한 과학 본연의 가치와 사회적·윤리적 책무를 다시 회복하는 실천적 과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되찾기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병들었기에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느린 과학은 이미 완성된 해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약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으로 가는 여러 경로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운동의 이름이다.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1000개의 고원]을 인용하자면 자신은 되찾기 작업이 우리에게 모범 사회가 아니라 전달자들로 이루어진 이동하는 민족에 대해 말해준다고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가 가이아와 화합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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