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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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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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수호신, 성층권 오존
시마자키 다쓰오 지음, 한명수 옮김 / 전파과학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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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대기 물리학 전공인 시마자키 다쓰오(島岐達夫)의 책이다. 저자는 남극의 오존홀을 보았다, 그 아래를 지나면 피부가 타는 느낌이 든다, 오존홀이 확대되어 지구 전체를 덮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잘못된 보도를 접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흥미 있는 인물이 한 명 나온다. 바로 스위스의 물리학자인 오귀스트 피카르(Auguste Piccard: 1884-1962)이다. 1931년 피카르는 인류 최초로 성층권을 탐험한 선구자다. 피카르는 압력이 아주 낮은 성층권을 탐사하는 데 쓰인 기술을 압력이 극단적으로 높은 심해를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가 만든 현대적 심해 잠수정인 배씨스케이프(Bathyscaphe)가 그것이다.

 

성층권의 오존을 모두 모아 상온, 상압 상태로 압축하면 두께가 약 3mm 정도에 불과하다. 대기 전체를 마찬가지로 하면 수 킬로미터가 되므로 오존은 전체 대기의 100만분의 1 이하의 아주 소량이다. 하지만 오존은 320nm보다 짧은 파장의 자외선을 강하게 흡수하기 때문에 태양 자외선 중 이 짧은 파장의 빛이 지상에 전혀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전체를 대기라고 한다. 대기의 약 75%는 대류권에, 25%는 성층권에 존재하며 성층권 위쪽에는 겨우 0.02%만이 분포한다.

 

11km까지의 대기에서는 상하 대류 운동으로 인해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이 감소한다. 이 영역을 대류권이라 부른다. 구름의 발생, /저기압의 발달 등 각종 기상 현상은 모두 이 대류권에서 일어난다. 11km에서 50km까지의 영역에서는 오존이 태양 자외선을 흡수하면서 대기가 데워지기 때문에 기온이 다시 상승한다. 이 영역에서는 더운 공기가 찬 공기 위에 얹혀 있기 때문에 대기는 열적으로 안정되며 층을 이루고 있어 성층권이라 부른다. 성층권에서는 기온이 상승하지만 11km를 지나도 잠시 동안은 기온이 상승하지 않고 등온 상태가 계속되는 일이 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성층권을 등온층이라 불렀다.

 

기온이 감소하다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높이는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인 대류권계면이다. 대류권계면은 약 50km의 성층권계면에서 끝나며 그 위에서는 오존이 줄어들기 때문에 가열이 감소해 온도가 다시 하강한다. 이 영역을 열권(熱圈)이라 부른다. 지구는 태양이나 다른 행성과 같은 시기 즉 46억 년 전에 원시태양성운을 이루던 가스와 먼지가 응집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때 생긴 대기 성분은 고온으로 인해 입자의 자유 속도가 커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거나 강대한 태양풍에 날려 거의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 지구 대기는 주로 지하에서 분출된 화산가스로 이루어졌다. 주성분은 이산화탄소, 질소 분자, 수소 분자, 수증기였다. 메테인, 암모니아, 황화수소, 일산화탄소, 염화수소 등도 함유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소가스는 아주 가벼워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갔고 수증기는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액화되어 땅속에서 스며 나온 물과 함께 해양을 형성했다. 그 속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녹아들었다.

 

화산가스 등으로 지구 대기가 형성된 시기와 초신성 폭발로 죽어간 거대 별 내부에서 합성된 후 성간 먼지와 가스 구름에 섞여 있다가 지구가 형성될 때 모여든 철, 니켈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지구 핵 쪽으로 가라앉은 시기는 거의 동시다. 지구 형성 과정에서 중력에 의한 밀도 차이에 따라 층상 구조화가 일어났다. , 니켈 등 무거운 원소들은 지구 중심부로 가라앉았고 산소, 규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은 지각과 맨틀을 이루었고 수소, 헬륨 등 가벼운 원소들은 지구 대기를 이루었다.

 

산소, 규소,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은 별에서 만들어진 후 지각이나 맨틀을 이루다가 화산분출로 대기권, 수권, 암석권을 순환하며 판구조 운동에 의해 맨틀 속으로 가라앉거나 지각 변동을 통해 새로운 암석으로 재탄생하는 기나긴 순환 과정을 거친다. 성층권 오존은 태양 자외선에 의해 생성된다. 그러므로 자외선이 강한 저위도나 여름철에 더 많이 생성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정반대다. 특히 겨울철에 고위도 지역에서는 하루 종일 태양광이 비치지 않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존량이 관측된다.

 

고위도에서 오존이 많은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운동에 의해 오존이 저위도로부터 고위도로 운반되기 때문이다. 공기가 운동하는 모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기와 함께 운동하는 물질을 찾아내 그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된다. 이 목적에 사용되는 물질을 추적자(tracer)라고 부른다. 인간 활동으로 공기 중에 방출되는 프레온 가스는 발생 원인이 명확하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없는 데다가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지면이나 다른 물질에 부착되어 소멸하는 일도 없기에 추적자로서 이상적이다.

 

오존 자체가 하부 성층권이나 대류권에서 추적자 역할을 한다. 수증기도 추적자다. 1883827일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섬에서 일어난 화산 분화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건으로 분출된 분진은 32km까지 치솟았다. 이후 몇 주 지나 25km 부근까지 내려온 분진은 오랜 기간 동안 그 고도에 머물렀으며 강한 돌풍을 타고 지구를 몇 바퀴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남북 방향의 운동도 더해지면서 이 분진 때문에 일몰 때와 같은 붉은 태양이 관측되었다. 몇 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0.5°C나 낮아졌다.

 

이산화탄소는 지표면의 열을 가두어 상공으로 열이 올라가는 것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다. 성층권 입장에서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열을 공급받지 못해 부족해지고 결국 온도가 떨어지게 된다. 성층권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가 상승한다. 그 이유는 오존 때문이다. 오존이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자외선을 흡수하면서 막대한 열에너지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성층권에서는 이런 이유로 공기가 열적(熱的)으로 안정되어 있어 상하 방향의 공기 혼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류권에서 올라온 프레온 등의 물질은 대류권계면의 벽에 가로막혀 성층권으로 침투할 수 없다. 그러나 적도 지방에서는 강한 지면 가열로 생기는 상승기류의 일부가 대류권계면을 통과해 상층권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104 페이지) 성층권이 대류하지 않는 것은 오존층 때문이다. 농산물을 더 많이 수확하려면 비료가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질소를 포함한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사용하면 증가한 질소산화물이 촉매로 작용해 성층권 오존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오존층이 형성되(어 유해 자외선이 차단되)고서야 육상 식물이 번성할 수 있었다. 광합성은 바닷속 플랑크톤과 같은 조류에서도 일어나므로 오존층이 형성되지 않아 육상 생물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해양 조류(藻類)로부터 산소 분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초기 지구의 대기는 지하 깊은 곳에서 분출된 화산가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 오존이 없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오존 생성에 바탕이 되는 산소 분자도 화산가스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았다. 산소는 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엽록소가 태양의 가시광선을 흡수해 물과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수화물을 만들 때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오존은 산소 원자 세 개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오존층은 주로 성층권에 있다. 오존 생성에 필요한 강한 자외선과 산소의 양 때문이다. 오존 생성에 자외선이 필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강한 자외선이 산소 분자를 강제로 쪼개 산소 원자 두 개를 만든다. 이렇게 떨어져 나와 불안정해진 산소 원자가 주변의 산소 분자와 결합해 오존이 된다.

 

성층권은 안정된 대기층이라는 의미다. 성층권 에어로졸은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 복사 에너지를 우주로 반사해 온도를 떨어뜨린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지표에서 올라오는 열이 대부분 대류권에 갇힘으로써 성층권으로 전달되는 복사 에너지가 감소해 성층권은 온도가 떨어진다.

 

남극의 겨울에는 태양이 전혀 비치지 않기 때문에 오존홀 관측은 주로 달빛을 이용해 이루어진다. 남극 오존홀의 정식 이름은 남극의 봄 기간 동안 성층권 오존의 이상적인 감소이며 오존이 아주 없어져 구멍이 뚫려 있거나 1년 중 오존이 계속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존홀이란 지구 대기 중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의 오존 농도가 급격히 감소하여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지칭한다.

 

감소한 오존은 긴 시간에 걸쳐서이지만 회복된다. 오존파괴물질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성층권 오존 문제는 자연과학 문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문제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사안이다. 인간이 물질적 욕망 나아가 생활의 풍요로움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지구환경 파괴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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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 현대 물리학의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도발적인 답변
자비네 호젠펠더 지음, 배지은 옮김 / 해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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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자비네 호젠펠더의 책이다. 원제는 [실존적인 물리학(Existential Physics)]. 책은 다루는 분야(다중우주, 빅뱅, 만물의 이론 등)로 인해 어러운데다가 저자 자신도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과는 거리가 있는 학자이고 연구자다. 인내하며 읽으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는 책이다. 본문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에필로그를 통해서는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불가지론자이자 비종교인이되 종교적 신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저자는 자신의 책은 현재 물리학이 제기하는 거대한 물음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말한다. 가령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다른지, 각각의 기본 입자에 우주가 깃들어 있는지, 자연 법칙이 우리의 판단을 결정하는지 같은 의문은 다루는 책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자연에 기반한 증거를 바탕으로 수립된 이론만 고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과학이 발전하면 내용이 바뀔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상대성이란 절대적인 정지 상태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 저자는 시간의 흐름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결론 낸다. 저자는 양자역학이 관련되기 이전에 당시 알려져 있던 자연 법칙은 결정론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물리학자들은 자기가 쓰는 수학이 실재에 관해 실재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학의 목적이란 세상을 유용하게 서술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 말한다. 설명은 단순할수록 더 유용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과학 이론은 우리가 세상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대폭 단순화한다고 결론 낸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창조주 가설은 설명력을 정량화할 수 없다. 이 가설로는 아무것도 계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비과학적이다라고. 덧붙여 저자는 6000년 전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은 틀릴 것도 없고 쓸모도 없다고 말한다. 이 가설은 정량적으로 대단히 복잡해서 초기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집어넣어야 한다.(58, 59 페이지)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취하고 거기에서 단순한 설명을 찾는다. 계산할 수 있는 데이터 안에 패턴이 많을수록 설명은 좋아진다. 저자는 초기 우주에 관한 모든 가설은 순수한 추정일 뿐으로 이러한 가설들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인 현대판 창조 설화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증거가 없을뿐더러 그 중 옳은 가설을 가려내려는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 그 자체를 생각해내기도 어렵다고 말한다.(73, 74 페이지)

 

저자는 우주는 오직 제한된, 축복받은 시간 틀 안에서만 생명을 지원해줄 뿐이고 마침 우리는 그 틀 안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한다. 자연 법칙은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휙휙 바뀐다면 애초에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저자는 의식이 있는 존재가 만들어지려면 입자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할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전체는 부분들의 합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을 대단히 수학적인 사람이라 소개하며 개인적으로 수학을 일상생활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추상적 수학의 직관적 언어로 설명할 때 뭐가 문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양자역학이다.(174 페이지) 저자는 양자역학의 기이함은 대부분 양자역학을 일상의 언어로 억지로 설명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정확한 비유 같은 것은 없다. 그 비유가 정확하다면 더 이상 비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을 파동 함수로 서술한다.(176 페이지) 양자역학에서 결과 측정이 불확실한 것은 초기 조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양자역학 자체가 그냥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혼돈 법칙도 실은 결정론적이다. 다만 초기 조건에 대단히 민감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양자 사건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이며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저자는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 일관성이 없는 아이디어다. 의지가 자유로우려면 다른 무엇도 그 의지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뇌의 신피질에는 자연 법칙을 능가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용액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제한된 정보 안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이 전부다.

 

결정은 우리 진화의 결과이며 자연 법칙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자유의지가 없어도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통합적인 원리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최소 작용의 원리를 꼽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소작용의 원리란 자연계의 모든 물리적 현상이 항상 가장 효율적이고 작용이 최소화되는 경로를 따른다는 법칙이다. 자연 상수들이 왜 지금의 값인지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물론 관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평행우주를 끌어들이는 이론들도 모두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수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과학으로 변장한 종교라고 말한다.

 

저자는 적어도 과학자라면 자신들이 속한 분야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과학적인 답이 그건 우리도 몰라요밖에 없을 때도 있다고 말하는 저자 다. 저자는 여전히 진행 중인 지식 발견 과정에서 종교와 과학은 앞으로도 한참 더 공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과학 자체로는 한계가 있고 인간은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방식의 설명을 갈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 길을 꽤 잘 걸어왔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진화를 직접 떠안은 최초의 종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환경에 의해 선택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필요에 맞게 환경을 바꾼다. 물론 이것을 잘해 나가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지구의 기후를 살기 좋은 범위로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보면 우리가 복잡계인 동시에 일부는 혼돈계인 계를 정확히 인지하는 능력이 과연 있는지 심각한 의심이 든다.

 

어쩌면 기후처럼 다면적인 비선형성 계를 이해하기에는 우리 뇌가 역부족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다면 종국에는 과학 지식을 사용해 서식지 통제를 더 월등히 해낼 수 있는 종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저자는 과학만이 유일한 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과학은 직업이기 전에 영감이라 말한다.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고 진정한 새로움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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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게 물리학, 지구과학에서 전자와, 전자의 에너지 상태는 중요한가?라고 물으니 두 분야에서 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구과학에서는 광물 동정(同定)과 원소 분석에서 유용하며 오로라 현상 분석, 대기화학 등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두 학문은 모두 미시세계의 전자 행동을 통해 거시 세계의 현상들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학문이라고 한다.

 

볼프강 파울리의 배타원리와 전자 오비탈에 대해 알게 해주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1. [스핀](이강영 지음), 2. [양자역학 이야기](팀 제임스 지음), 3. [우리집 강아지에게 양자역학 가르치기](채드 오젤 지음) 등을 추천한다. 사이토 가쓰히로의 [한 권으로 읽는 원자, 소립자, 양자의 세계]는 전자와 전자의 에너지 상태, 오비탈 등에 대해 말하는 책인가?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오비탈은 원자핵 주위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공간으로 나타낸 함수나 모형을 뜻한다. 과거에는 전자가 태양계 행성처럼 정해진 궤도를 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양자역학에서는 전자가 워낙 빠르고 작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전자가 나타날 수 있는 '확률적인 구름' 모양의 공간을 오비탈이라고 한다.

 

지질학과 전자, 지질학과 오비탈은 관계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전자는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중 어떤 학문과 가장 관계가 큰가?라고 물으니 물리학이 가장 높고 화학은 높고 생물학은 보통이고 지질학은 낮다고 한다.(매우 관계가 깊다고 하면서 가장 낮다는 것이 부조화스러워 보인다.) 인공지능은 전자는 지질학이나 지구과학에서 지구 자기장 형성, 광물 분석 등과 관계되지만 직접적인 연구 대상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럼에도 전자, 오비탈, 파울리의 배타원리 등에 대해 관심이 많다. 현무암은 왜 검은가?라는 질문에 철이 많아서라고 답할 수 있지만 결국 전자의 에너지 상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무암은 철이 많아서 검다고 말하는 것은 지질학적 설명이고 현무암 속 철 화합물들이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거의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물리학의 설명이라고 인공지능은 답한다. 그런데 숲해설사들은 나뭇잎이 초록색인 것은 광합성에 필요하지 않은 초록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식이라면 지질해설사들도 물리학 차원의 설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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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 개경 금요일엔 역사책 13
박종진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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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기본 요소인 사신사(四神砂)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신사란 풍수의 대상이 되는 땅의 동서남북에 있는 산을 말한다. 그런데 개성은 일찍부터 물과 관련된 지세 즉 구불구불 흐르지 않고 거의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으로 인해 수덕(水德)이 불순하다는 말을 들어 왔다. 개성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물이 귀했지만 비가 많이 오면 그 물이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려와 수해로 연결될 가능성이 컸다. 크게 보아 개성은 예성강과 임진강, 넓게는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우리 국토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며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곳이다.

 

태조 왕건은 9186월 태봉의 철원 도성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한 지 7개월 만인 9191월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력 징발 등 경제적 부담도 크고 이전 수도에 터를 잡고 사는 세력의 반대도 많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태조는 건국 직후 반란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천도(遷都)를 단행했다.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로 구성됐던 개성부는 현종 9년인 1018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혁파되고 개성현 지역과 장단현 지역을 중심으로 특별구역이 재편성되었다. 그것을 경기(京畿)라 부르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도적으로 경기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후 경기 영역은 몇 차례 개편이 있었지만 왕도를 지원하고 보유하기 위한 특별구역의 위상은 고려 말까지 계속 유지됐다. 경기는 고려 왕도인 개경을 유지하고 보위하기 위하여 개경 바깥에 설치한 특별 구역이다. ()은 천자의 도읍, ()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는 도성 주변의 땅을 의미했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무역을 가볍게 하고 왕의 교화도 먼저 시작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 경기 지역은 수도 개경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어서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요역(徭役)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조세 부담이 많은 곳이었다. 또 국가의 위급한 일이 생기면 경기 지역에서 군역 징발(徵發)을 먼저 했고 경기는 다급한 재정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시세인 과렴(科斂)이 자주 시행된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기는 다른 지역보다 부담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세 감면과 구휼(救恤)이 자주 수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개경 도성 밖 사방에 설정된 사교(四郊)는 도성과 경기에 속한 군현 경계까지의 공간으로 조선 시기 한양의 성저십리(城底十里)와 비슷한 공간이었다. 사교는 도성은 아니지만 도성의 배후지로서 역, , 왕릉, 제사 공간 등 중요한 시설이 설치된 곳이었고 도성 안에서 할 수 없는 의례를 하는 공간이었다. 또 사교는 왕이 사냥을 하거나 군사가 주둔하고 훈련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제사 공간인 태묘는 나성 밖 동교에 있었다. 또 고려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圜丘壇)은 원나라 이후의 천단이 북경 남쪽에 있었던 것과 같이 남교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원구가 회빈문 밖에 있었다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동남쪽에 있었던 적전(籍田) 역시 의례 시설에 속한다. 이 외에 송악산 정상과 박연폭포 근처에 있던 신사(神祀), 개경 주변에 분포한 왕릉과 절이 위치한 곳 역시 사교의 범위에 포함할 수 있다. 성을 성곽이라 하는 것은 보통 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내성을 성()이라 하고 외성을 곽()이라 한다. 고려 시기의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했다. 개경의 주요 길은 궁궐, 관청, 시전(市廛) 등 중요한 시설과 성곽의 성문을 연결했다.

 

왕조시대 궁궐은 도성의 핵심 공간이었다. 궁궐은 국왕의 정치 공간이자 생활공간이었고 또 의례 공간이기도 했다. 고려 시기 개경의 정궁 곧 본궐은 송악산 남쪽에 있었다. 고려 말 이후 전각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고려 본궐터인 만월대의 경관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과 사뭇 다르다. 북한의 개성에 있는 고려 궁궐터는 지금 가기도 어렵지만 그것 말고도 고려 궁궐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우선 송악산 남쪽의 본궐은 이름도 없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본래는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고려의 본궐은 고려 초기부터 전쟁과 화재 등으로 훼손되었다가 중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제일 먼저 확인되는 궁궐의 피해는 거란의 2차 침입 때인 1011(현종 2) 1월로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을 떠난 나주까지 내려갔다. 개경에 돌아와서 본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궁인 수창궁으로 들어갔던 현종은 이후 두 번 궁궐 공사를 했다. 강화 천도 직후까지 남아 있던 개경의 수창궁은 몽골과의 전쟁 기간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연경궁은 본궐 동쪽 가까운 곳에 있던 이궁이었다. 본래 현종의 비 원성태후의 궁이었던 연경궁은 덕종 때 왕의 누이 연경궁장공주에게 지급되어 공주 궁으로 바뀌었다가 1098년 숙종이 태자를 세우고 첨사부를 설치한 이후 공주 궁에서 왕의 이궁이 되었다.

 

고려 시기에 태묘와 사직이 정비된 것은 성종대였다. 이때 유교의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했고 건국 이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태묘와 사직을 설치했으며 아울러 유교적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했다. 태묘와 사직은 도성의 상징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격식이 있었다. [주례]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태묘는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위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태묘는 동쪽에, 사직은 서쪽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려 시기 수도인 개경에 설치된 대표적인 교육기관이 국자감이다.

 

국자감은 교육기관이지만 교육만 맡았던 것은 아니다. 국자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과 과거의 첫 번째 시험인 국자감시를 주관했다. 그래서 국자감에는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 시설, 관원이 배치되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시장은 꼭 필요한 시설일 뿐 아니라 도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구의 집중과 시장의 발달에서 도시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는 도시사의 고전이론이다. [주례] 고공기에 조정 곧 관청은 궁궐 앞에, 시장은 뒤에 둔다고 한 것은 시장이 아주 오래전부터 도성에 꼭 필요한 시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개경의 절은 풍수적으로 개경을 비보(裨補)하는 기능을 했다. 고려 태조는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개경에 절과 탑을 세워 개경의 풍수를 보완하는 작업을 했다. 고려왕릉은 조선 건국 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도굴 등으로 본 모습을 잃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고려 왕릉을 정비하고 그중 일부는 발굴조사도 했다. 최근에는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 일부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지만 주로 개성 주변에 있는 고려 왕릉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조선 건국 후 고려 왕릉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조선 태조 즉위교서에서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했지만 태조 때에는 고려왕릉의 관리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조선 초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는 부실했고 숭의전에 모신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을 제외한 다른 왕의 능들은 거의 방치되었다. 조선 초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는 1476년 성종 7년에 완성한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그 내용은 역대 시조 및 고려 태조 이하 4(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능침은 소재지의 수령이 매년 돌아보고 또 밭을 일구거나 나무 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다.(141 페이지)

 

고려는 몽골과 전쟁 중이던 12327월 강화로 천도 했다가 12705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919년 고려의 수도가 된 이후 개경은 강도(江都)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외적의 침입과 정변 등으로 궁궐 등 주요 시설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수도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1232년 수도를 강도로 옮기면서 개경은 수도의 지위를 내어주었다. 고려 말 개경의 위상은 공민왕 이후 천도 논의가 등장하면서 흔들렸다.

 

고려 전기에는 정종(定宗)이 서경 천도를 주장했고 문종과 숙종 때는 남경을 건설했으며 인종 때에는 묘청이 중심이 되어서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또 강도로 천도했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는 1290년 원나라의 반란 세력인 카다인이 침입했을 때 충렬왕이 잠시 강도로 피신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천도 논의는 없었다. 고려 말에 대두된 천도 논의에는 개경의 지리적 위치가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기 때문에 내륙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가 보이기도 하지만 천도론은 대체로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개경의 지덕이 쇠했다는 지기쇠왕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아울러 천도론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불안정한 정국의 변화를 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고려 말 천도 대상지로 주목된 곳으로는 철원, 연주(지금의 연천군), 강화, 충주, 기달산, 회암(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등 다양했지만 실제 왕이 움직인 곳은 남경 곧 한양(백악)뿐이었고 그것도 천도라기보다는 몇 달 정도 왕이 거처를 옮긴 정도였다. 공민왕 후반기 이후 궁궐 운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수창궁과 화원이다. 고려 초부터 중요한 이궁 중 하나였던 수창궁은 몽골군과의 전쟁 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370(공민왕 19) 공민왕은 수창궁 터에 행차해 조영(造營)을 명령했는데 이때 훼손된 본궐의 강안전과 연경궁 대신 수창궁을 중건하여 사용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창궁은 공민왕 대에는 완공되지 못했고 1384년 윤 9월 낙성되어 그 후 중요한 궁궐로 기능했다. 수창궁에서 공양왕과 조선 태조가 즉위한 것은 고려 말 수창궁의 위상을 보여준다. 또 충혜왕 때부터 보이던 화원은 1373(공민왕 22) 628각전을 건설한 후 우왕 때 주요한 궁궐 공간이 되었다. 우왕 14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압박하자 수세에 몰렸던 우왕과 최영이 머문 곳이 화원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화원이 우왕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개경의 태묘는 나성(羅城) 밖 부흥산 남동쪽에, 사직은 나성 안 오공산 남쪽에 있었다. 나성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외성이다. 수도 방어와 도시 구획을 위해 쌓은 성곽이다. 나성을 기준으로 보면 태묘는 나성 밖, 사직은 나성 안에 있게 되어 그 위치가 자연스럽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태묘와 사직이 설치되었던 성종 때는 아직 나성이 축조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태묘와 사직은 모두 도성인 황성 밖이었다. 또 사직은 궁궐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태묘는 궁궐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있게 되어 태묘와 사직의 위치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성이 많이 어그러진다. 그렇지만 개경 궁궐의 위치 역시 서쪽의 오공산과 동쪽의 부흥산의 중심이 아니라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즉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동쪽의 부흥산 남쪽에 태묘를 설치하고 서쪽에 오공산 남쪽에 사직을 설치했는데 나중에 나성이 축성되면서 결과적으로 사직은 성안에, 태묘는 성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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