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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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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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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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 박사 권오영은 고대사는 불확실성(문헌 자료 부족)으로 백가쟁명의 장이 되었는 바 사료가 풍부한 근현대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고대사 해석의 1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고, 역사학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하는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하고,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하는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 스스로도 책임을 느끼고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실제 참고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 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고대사 연구자들이 땅에서 나오는 이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패가 달렸다. 현재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단연 고대국가 형성사이다. 그 다음은 삼국시대의 지배구조다. 반면 생활사 연구에 뛰어드는 이는 많지 않다. 박물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고대사 관련 강좌를 듣노라면 금세 따분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사라 하면 온통 정치사나 제도사 이야기뿐이고 고고학은 토기의 형식 분류와 연대 추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우리에게 백제 개로왕의 죽음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바둑의 고수인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냈고 도림은 개로왕의 환심을 사 그의 측근이 된다. 결국 도림은 개로왕을 꼬드겨서 왕릉과 궁궐을 더 크게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한다. 개로왕은 한정된 국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행했고 그 결과 국고가 텅 비어 백성들은 위기를 맞았다. 장수왕은 이 틈을 타 군대를 파견해 백제 도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 표현했다.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았기에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풀겠다며 많은 역사가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라는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답은 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자료를 분석해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건축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사가 한국이란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토와 생석회(산화칼슘)를 섞은 뒤 물을 부으면 생석회가 물과 반응해 소석회(수산화칼슘)로 변하는 소화 반응이 일어난다. 이 반응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격렬한 발열 반응이다. 온도가 순식간에 섭씨 100~200도 이상으로 치솟기 때문에 물이 끓어오르며 엄청난 수증기()가 피어오르게 된다. 조상들은 이 흙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을 보고 '흙을 찐다(蒸土)'고 표현한 것이다.

 

소석회(消石灰)의 소()는 사라질 소란 의미다. 생석회의 격렬한 반응()이 완전히 끝나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소석회 자체는 생석회보다 전혀 단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드럽고 잘 부서지는 고운 가루 형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처럼 굳는다. 소석회를 진흙(황토)과 섞어 반죽해 두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천천히 흡수한다. 이 과정에서 소석회가 원래의 단단한 암석이었던 탄산칼슘 상태로 돌아가며(탄산화 반응) 주변의 흙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결합시킨다. 생석회를 그대로 벽에 바르면 문제가 생긴다. 비나 수분을 만나면 그 안에서 열을 내며 부피가 대폭 늘어나 벽이 다 갈라지고 터지는 것이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다.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고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는 것은 단백질 음식을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뒤 다시 결합하여 근육을 만드는 단백질로 거듭나는 것을 닮았다.

 

사람의 뼈는 조선시대 후기 무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 이유는 이때부터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어 회격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격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질 뿐 아니라 내부 밀폐 상태가 잘 유지돼 나무 뿌리나 곤충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내부 환경도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기에 목관과 수의도 잘 보존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무덤 양식인 회격묘(灰隔墓)는 주희가 편찬한 가정 의례 지침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상례(喪禮)편에 그 제작 방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석실묘의 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이었다. 주희가 살던 남송(南宋)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면서 부모의 묘를 화려한 돌방(석실)으로 만드는 사치 풍조가 심했다. 하지만 주희는 석실묘가 시간이 지나면 돌 사이에 틈이 생겨 물이 차고 나무뿌리가 뚫고 들어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했다. 주희는 비싼 돌을 깎는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와 흙을 짓이겨 다지면(회격)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돌보다 더 단단해져 부모의 유골을 영구히 보호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비밀을 간파했다. ()은 관과 흙 사이에 석회 벽을 쳐서 외부 환경(, 나무뿌리, 벌레)으로부터 관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가로막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갓난아기 때 두개골에 압박을 가해 머리뼈 모양 자체를 납작하거나 길쭉하게 변형시키던 고대의 독특한 풍습인 편두(褊頭)를 이야기한 데 이어 사람 뼈를 잘못 해석해 역사 자체를 왜곡한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는 도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도굴의 역사는 아주 유구해서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만들 때부터 도굴이 심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무왕의 쌍릉은 고려 때 이미 도굴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쌓인 흙을 퍼내야 하는 도굴 과정에서 말끔하게 유물을 쓸어가기는 어렵기에 조심스럽게 흙을 채굴하다 보면 도굴꾼들이 흘리고 간 유물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백제는 신라나 가야처럼 엄청난 양의 부장품을 무덤에 두지는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무덤을 크게 만들고 순장하는 풍습을 빨리 없앴다. 그 이유는 불교를 빨리 수입한 것과 관련이 된다.

 

시인 고고학자 고() 허수경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이다. 어떤 맥락에서 본다면 무덤을 쫓아다니는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내면은 비슷할 것이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란 말을 했다. 저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의 압도적 다수가 수도 또는 수도와 관련된 유산이라는 데에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익숙하거나 잘 알려진 유적 또는 유산의 대부분은 한 왕조의 수도이거나 왕궁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수도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국가가 자국 내의 역사 수도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 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還戶聚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 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 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 취락 또는 거점 취락이라고 부른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 도성,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인 장안성도 경주 월성과 마찬가지로 바둑판 모양의 질서 정연한 토지 구획에 나섰다. 그 결과 이런 수도 유적에서는 굳이 땅을 파지 않고도 항공 촬영만으로 정연한 도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중국 요령성 환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건설한 왕성이라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있다. 국가를 세우며 경사가 90도에 가깝도록 가파른 산 위에 왕성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항상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간접 증거’(방증; 傍證)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모두 주변 세력 또는 중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니 방어 취락이 빠르게 발전했음을 물론이고 이를 발전시켜 산성을 만든 것이다.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때로는 새로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때로는 외적과의 항쟁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도 산성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시대에 건설된 산성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나 유튜버들이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아니라 중국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유물과 정식 학계의 검증 결과는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장안성)이자 중심지였음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다. 장수왕이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 지은 거대한 평지 왕궁인 안학궁(安鶴宮) , 안학궁의 배후에 있는 방어용 석축 산성인 대성산성(大城山城),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성곽인 펑양성(장안성) 등이 북한 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이 밖에 평양 고산동 고분군, 강서대묘,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등 평양 일대에서 화려한 고구려의 생활상, 사신도, 천문도가 그려진 벽화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성을 빠져나가 남성으로 향하던 개로왕은 고구려 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한강을 건너 고구려 군사기지가 있던 아차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당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현장은 국내외 사설을 통해 북성과 남성, 대성과 왕성 등의 명칭으로 표현되며 당시의 수도는 위례성과 한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관계를 풀기 위한 논쟁은 10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성의 위치를 명확히 하는 데는 실패했다. 양주, 천안, 광주, 하남 등 모두를 소환해 봐도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문헌 자료를 토대로 억지로 문헌 고증을 하거나 유적의 발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보는 등 초보적인 연구를 지속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해 풍납토성 서벽이 무너지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왕성으로 보는 연구자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이라는 주장에 오랫동안 힘이 실렸다.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 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김부식, 일연, 정약용 등 무수한 인물들이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위례성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풍납토성 발굴조사 덕분이다.

 

혹자는 풍납토성의 규모가 일본의 헤이조쿄보다 작아서 결코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3~4세기 무렵이라고 보면 710년에 완성된 헤이초교보다 4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동아시아 수도제의 발달 과정에서 3~4세기는 왕권과 왕성만 짓던 시기로 주변 지역을 바둑판식으로 나누는 지할(地割)은 유행하지 않았다. 풍납토성이 절대 백제의 왕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수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왕성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과 그 인근이 수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지형을 분석해보면 현재 한강의 흐름은 근대 이후 많이 변형되었으며 과거에는 풍납토성이 지금처럼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형적으로 보면 풍납토성은 단구(段丘) 형태로 된 한강변의 자연 제방 위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쉽게 침수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지형을 두고 1500년 전의 지형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연구는 당시 경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는 공부를 할수록 민족의 기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사료적 가치를 의심받는 문헌을 토대로 짓는 집이 사상누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인종적 스펙트럼이 획득되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생각도 되었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순수함과 우월함을 부르짖는 한편에선 차별로 소요되는 이웃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모든 학문 분야의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양한 주제와 평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실태와 담 쌓고 과거의 주제와 방법론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는 분야가 한국 고대사라고 말한다. 필자 또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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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
전호태 지음, 전혜전 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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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태의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의 핵심 주제는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며 성장한 대표적인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사 전반을 통해 오늘날 한국 문화의 원형과 참된 역사의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주몽)은 본래 동부여(또는 북부여) 왕실에서 자란 인물이다. 주몽은 부여 대소왕자의 시기(猜忌)와 생명의 위협을 피해 지지 세력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주몽 무리는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에서 비롯되어 북쪽 너른 벌판으로 흐르는 큰 강 하나를 간신히 건너고 나서야 부여 대소 왕자의 군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 후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이름은 고구려가 아니라 졸본부여(卒本扶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흙을 다져 쌓는 토성,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 혼축성도 만들었지만 돌이 많은 산간지대에 주로 살았던 까닭에 산과 평지가 맞닿는 지점의 돌로 쌓는 석성을 많이 만들었다. 고구려 석성의 벽은 가장 아랫부분에 커다란 네모꼴 바위 돌을 쌓고 그 위에 앞이 약간 넓고 뒤가 좁은 옥수수와 형태의 돌을 바깥에 놓고 베틀의 북처럼 양쪽 끝이 뾰족한 돌을 안쪽에 끼워 넣어 서로 쐐기처럼 맞물리게 하는 방식으로 쌓았다.

 

또 아래는 폭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조금씩 들여 쌓는 퇴물림 쌓기를 적용하여 높이 쌓아도 견고하여 외부의 큰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벽 구간에 큰 바위가 나타나면 그 형태에 맞게 돌을 다듬어 붙여 쌓는 방식인 그랭이 방식으로 자연 암반이 단단한 성벽의 일부가 되게 했다. 두 방식은 인위적인 시멘트나 접착제 없는 시대에 두 돌이 이빨 맞추듯 완벽하게 밀착되어 지진이나 충격이 가해졌을 때 성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비정형의 돌기들이 서로를 꽉 붙잡아주기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절대 무너지지 않는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했다. 정리하면 그랭이 방식을 통해 땅바닥(암반)과 성벽의 첫 단을 일체형으로 단단히 고정했고, 그 위로 퇴물림 쌓기를 통해 성벽이 밖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구조적 안정감을 완성시켰다. 그랭이는 우리 전통 건축에서 울퉁불퉁한 바탕면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그릴 때 사용하는 집게 모양의 도구(연장)를 뜻하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고구려는 성벽 구간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그 사실을 성돌에 새겨놓아 부실 공사로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도 했다. 성벽을 쌓으면서 일정 구간마다 성벽에 접근한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직각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도 설치하였다. 저자는 고구려를 단순한 정복 국가가 아닌 다채로운 삶이 공존했던 문화 강국으로 조명한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핵심 세력은 예맥(濊貊)족이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삼아 살았던 사람들로 예로 불리던 사람들이 고조선을 세웠고 맥으로 불리던 이들이 부여를 건국했다. 구려라고 불리다가 고구려라 불리게 되었다. 구려는 성()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만주와 북방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말갈족, 거란족, 선비족, 숙신족 등 다양한 북방 종족들을 연합하거나 속민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흡수하고 중국의 혼란기(516국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중국계 유이민과 망명객을 정착시켰다. 5호는 다섯 유목 민족인 흉노, 선비, , , 강 등을 의미하고, 16국은 화북(華北; 중국의 북부) 지방에 세워진 유목 민족의 국가 11개와 한족 국가 5개를 합친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북부 초원/산림 지대는 유목과 수렵 중심이었고, 서부 및 한반도 중북부 평야는 농경 중심이었고, 동해안 및 해안 지대는 어업 중심이었다.

 

중국의 516국 시대인 4세기~5세기는 중국 역사상 기후가 가장 악화되었던 대표적인 극심한 한랭기(2차 한랭기)였다. 당시 기온은 앞선 시대에 비해 지구 기온이 1~2도 낮았다. 이 시기는 여름(5~8)에 눈이 내리거나 서리가 빈번하게 내렸고, 겨울에는 폭설과 함께 바다나 큰 강이 얼어붙는 이상(異常) 한파(寒波)가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 한랭화와 함께 찾아온 건조 기후로 인해 대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가뭄 끝에 찾아오는 메뚜기 떼(황충)의 습격으로 화북 지방의 농작물은 초토화되었다. 몽골 고원과 만주 일대의 기온이 급락하자 초원이 황폐해져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몽골의 경우 한파와 건조한 기후가 만난 것을 조드라고 한다. 생존의 기로에 선 흉노, 선비, , , 강 등 5개 유목 민족(5)이 따뜻하고 먹을 것이 있는 남쪽(중원 화북 지방)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원의 한족(진나라) 역시 냉해와 가뭄으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국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에서 식량을 찾아 내려오는 유목민의 군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遷都)는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기 직전인 427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고구려 연구가 김용만 소장은 고구려가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에 자리한, 압록강 기슭의 좁고 긴 평야지대)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한 배경 중 하나로 국내성에 지나치게 많아진 공동묘지와 주거 환경 악화를 꼽았다. 400년 동안 인구가 누적되면서 국내성 주변 공간은 수만 기의 무덤으로 가득 차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변해버렸다.

 

전호태 교수의 본문([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은 이렇게 말한다. “수백 년에 걸쳐 고구려의 서울로 기능 하는 동안 왕실과 귀족 가문에서는 하나같이 국내성 일원에서 장지(葬地)를 구했다. 이런 까닭에 5세기경에는 죽은 사람의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산 사람의 집터마저 밀어낼 지경이 되었다. 죽은 사람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 지기들의 집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릉에는 수백 호, 대귀족의 무덤에는 때로는 수십 호에 이르는 무덤 지기가 붙는 것이 고구려의 관례였다 .평양 천도가 추진될 무렵에는 국내성의 수도로서의 기능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105 페이지)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혹독한 추위를 피해 남하한 것이라 말한다. 둘 다 작용했을 것이다. 박정재 교수의 [한국인의 기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수왕은 수많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원 수도인 국내성에서 새로운 수도인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4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다....그런데 당시 정점에 이른 추위를 고려하면 장수왕이 고구려의 지리적 중심인 국내성을 떠나 외곽의 평양으로 천도한 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제외하기란 쉽지 않다. 고구려인이 추위를 극복할 수 없어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고구려의 앞날을 그렸을 때 수도의 물리적 위치보다는 수도의 발전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반 여건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점차 인구가 늘면서 작물 농경의 비중은 늘어만 가는데 기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온난화 평양이 미래의 고구려 수도로서 더 나은 선택이라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 결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378, 379 페이지)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에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427년 장수왕은 제국 고구려의 심장부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좁고 교통상의 이점도 그리 크지 않은 국내성에서 주변 개발 가능성이 크면서도 방어선 확보가 용이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400여 년 동안 수도로 기능하면서 고구려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국내성은 고구려 귀족 가문들이 뿌리내린 도시이기도 하다. 당연히 건국 이래 국가가 겪은 고난과 영광의 주인공임을 자부하던 전통 귀족 가문들은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였다.(93 페이지)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과 인연을 맺은 곳이 경기도 연천(漣川)이다. 광개토왕은 재위 기간(391~412)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치며 백제를 압박했다. 396년 광개토왕은 몸소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벌 과정에서 연천을 흐르는 임진강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임진강은 당시 고구려의 최전방 방어선이자 한성백제를 타격하기 위한 거점이 되었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재위 413~491)은 아버지의 기반을 바탕으로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본격적인 한반도 경영에 나섰다.

 

475년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단하며 한강 유역을 완벽하게 차지했다. 장수왕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후방이 된 연천 일대(임진강 북안)에는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와 요새(보루)들이 대거 축조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감시하고 보급로를 확보했다. 연천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200여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에 속했던 지역이다. 한강 유역(서울·춘천·충주 등)475년 장수왕 때 점령되었다가 551년 나·제 연합군에게 빼앗겨 고구려의 지배 기간이 약 70~80년에 불과했다. 반면 연천을 비롯한 임진강 북안 지역은 396년부터 668년 멸망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로 지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48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475년 한성 백제를 공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부 정비, 외교적 세력 균형 유지, 백제의 철저한 방어선 때문이었다.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은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강력한 북위(北魏)가 있는 중원(中原) 진출도 어려웠다.”(유성운 지음 한국사는 없다’ 103 페이지)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이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는 말은 장수왕이 겉으로는 북위에 막대한 선물을 주며 비위를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남조(南朝) 및 유연과의 동맹 카드를 쥐고 북위를 철저히 외교적으로 통제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남으로 한반도의 아산만에서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갔다. 한반도의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중남부 일부 지방만 신라, 백제, 가야 연맹의 땅으로 남은 형국이었다. 백제의 패퇴 이후 요하 유역을 포함하여 그 동쪽에 펼쳐진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패권적 지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이나 나라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99 페이지)

 

심광주 교수에 의하면 475년 한성(漢城) 함락 당시 고구려로 끌려간 백제 포로 8,000명 중 백제 도성 내부의 고난도 석회·토목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 또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최전방 요충지(연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층(사령관급)의 무덤인 신답리 고분을 축조하는 데 투입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식 무덤(모줄임 천장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내부 접착제로는 백제의 선진 석회 기술이 접목된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 융합형 무덤이 연천 신답리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모줄임 천장 구조(말각조정, 抹角藻井)는 네모난 방의 네 모퉁이를 비스듬히 줄여가며 천장을 위로 좁혀 쌓는 고구려 무덤의 대표적인 천장 축조 양식이다. 방의 크기보다 천장 면적을 줄이면서 위로 높여 마치 돔(Dome)이나 피라미드 내부 같은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건축 기술이다.(; 지울 말, ; 각도 각, ; 꾸밈 조, ; 우물 정) 연천 신답리 고분의 회()는 조개를 태워 만든 패회(貝灰). 백제는 풍부한 석회암 지대를 배경으로 조개껍질이 아닌 자연 석회암(광석)을 고온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생석회 공법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백제의 풍부한 석회암 지대란 사비(부여) 시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금강 유역) 일대를 의미한다.

 

고구려 임진강 유역은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임진강 상·중류(북한 지역)는 지질학적으로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하부 대석회암통'에 속하는 울창한 석회암 지대다. 반면 남한의 연천·포천·철원 일대는 약 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현무암(변성암, 화강암, 응회암 중심) 지대가 주를 이룬다. 만일 고구려가 본국(평양이나 임진강 북한 지역)에서 쓰던 전통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고자 했다면 임진강 상류에서 석회암을 가져와 구워 쓰거나 평양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썼을 것이다. 하지만 연천 신답리 고분은 연천 주변 강가나 서해안에서 구하기 쉬운 조개껍데기(패회)를 기본 원료로 썼다. 즉 먼 북방에서 석회암을 공수해 오지 않고 연천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원료를 택한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남진하여 차지한 최전방 방어선인 연천 현지에서 무덤을 축조할 때는 북방의 석회암을 가져오지 않고 현지의 조개껍데기(패회)를 썼다. 이때 한성에서 생포한 백제 기술자들의 배합 노하우가 융합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과학적인 분석 결과다. 지리적 지질 분포와 고고학적 유물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은 고생대 초기(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에 해당하는 약 5~45천만 년 전) 한반도가 따뜻한 얕은 바다(해성층)였을 때 산호나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생물체와 침전물이 수천 미터 두께로 쌓여 형성된 한반도 최대의 석회암 지층을 뜻하는 지질학적 명칭이다.

 

고생대 초기(5~45천만 년 전) 한반도의 상당 지역(평남분지, 태백산분지)이 따뜻한 얕은 바다(조선해)여서 거대한 석회암 지층을 형성했던 것과 달리 남한의 연천 지역은 당시 바다가 아닌 거대한 대륙판의 일부(경기육괴)로서 육지 환경이었거나 지질학적 공백(결층)에 해당한다. 연천, 경기, 충청, 전라도 일부가 속한 경기 육괴는 당시 남중국판(Yangtze Craton)의 일부였다. 고생대 초기에 이 지역은 바다로 덮여 석회암을 쌓던 지역이 아니라, 오랜 기간 퇴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침식을 받던 육지 환경(지질학적 공백 또는 결층)이었다. 북한, 강원도 삼척·태백 일대가 속한 평남분지와 태백산분지는 당시 북중국판(Sino-Korean Craton)의 일부였다.

 

이 두 지역은 고생대 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5억 년 전)에 따뜻하고 얕은 바다인 조선해(조선누층군) 환경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석회암 지층이 형성되었다. 연천의 미산층(Misan Formation)은 원래부터 현재의 한반도 위치에 있던 지층이 아니다. 당시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의 얕은 바다(대륙붕)에서 쌓인 퇴적물이 약 25천만 년 전 대륙 충돌과 함께 지금의 연천 위치로 이동해 들어온 것이다. 고생대 중기인 데본기(4억 년 전) 남중국판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적도에 가까운 따뜻한 남반구 혹은 적도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남중국판 가장자리의 얕은 바다(대륙붕 환경)에서는 모래, 진흙, 그리고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물질이 번갈아 쌓이고 있었다. 이 퇴적물들이 굳어 훗날 연천 미산층의 원암(원래 암석)이 되었다. , 미산층은 '태생 자체가 남중국판 출신'인 해성층(바다에서 쌓인 지층)이다.

 

25천만 년 전(고생대 말~중생대 초)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이 서서히 북상하면서, 북쪽에 있던 북중국판과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대륙 충돌(송림변동) 과정에서 두 대륙 사이에 끼어있던 남중국판의 조각들과 미산층 지층이 강하게 쥐어짜이며 북중국판 밑으로 섭입하거나 밀려 올라갔다. 이때 충돌의 직접적인 '칼자국'이자 경계선이 된 곳이 바로 임진강대이며 미산층은 이 충돌대에 갇힌 채 지금의 경기 연천 지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단순히 위치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두 거대 대륙판이 부딪치는 엄청난 압력과 열을 받았기 때문에 미산층은 원래의 퇴적암 형태를 잃어버렸다. 모래와 진흙, 석회질층이 번갈아 쌓여있던 구조는 고온·고압을 받아 '변성사질암''석회질 규산염암'이 시루떡처럼 번갈아 나타나는 변성퇴적암(연천층군 미산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551년 고구려 왕은 양원왕(陽原王)이다. 551년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은 한강 유역 고구려 요새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한순간에 한강 유역뿐 아니라 동해안의 옛 옥저, 동해의 고지까지 모든 잃었다. 552년 더욱 강력해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는 등 대외 정세는 고구려에 이전보다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양원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의 평지성과 산성의 기능을 모두 갖춘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 성인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다. 557년 서위가 망하고 북주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더욱 더 빠르게 세력 재편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136 페이지)

 

아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화살이 공성전(攻城戰)을 지휘하던 온달 장군의 갑옷을 꿰뚫고 말았다. 장수를 잃은 고구려 군은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아차산성 일대에서 물러났다. 이제 신라가 한강 유역 전체와 동해안 북쪽 지역을 차지한 것이 고구려가 전략상 후퇴를 단행했기 때문만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온달 장군의 전사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에서 고구려가 누리던 절대적 우위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일임이 재확인되었다. 고구려로서는 남쪽 전선에도 북쪽 전선에 버금가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141 페이지)

 

559년에 즉위한 평원왕은 32년에 이르는 재위 기간에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안으로는 민심을 다독이고 인재를 모았으며 밖으로는 수시로 중국 왕조들에 사절을 보내 대륙 정세의 흐름을 읽고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평원왕대 평양 장안성 축조 공사는 계속되었고 요하부터 평양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의 성과 요새의 보수 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다.(147 페이지)

 

연천 호로고루는 551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시점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 기지이자 국경 방어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나라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가 건국 37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한 중국의 단명 통일 왕조다. 수나라가 무너진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다음 숙적이 되는 당()나라(618~907). 수나라는 단명했지만 고구려의 역사와 국운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치명적이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6년간 이어진 4차례의 전쟁 동안 고구려 전역(특히 요동 지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백성들이 농사 대신 성을 지키고 군량미를 조달하느라 생산 기반이 황폐해졌다.

 

북쪽의 거대한 위협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을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는 언제 다시 중국 제국이 침략할지 몰라 극심한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 이에 대비해 16년에 걸쳐 요동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는 대공사를 진행하며 국력을 연이어 소모했다. 이 장기적인 국가 위기 속에서 군부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심각한 분열로 이어져 훗날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정도로 강대하다는 사실은 새로 들어선 당나라에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한 준비를 거쳐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되었으며, 결국 고구려는 수·당과 도합 70여 년에 걸친 장기 전쟁을 치르며 완전히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수나라와의 전쟁은 고구려 군사력의 위대함을 증명한 빛나는 승리(살수대첩)였지만 동시에 고구려의 생명력을 갉아먹어 훗날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646년 천리장성이 완공되어 요동 방어선이 더 두터워지자 고구려는 자주 군대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두드렸다. 백제와 고구려에 협공당하는 꼴이 된 신라가 당에 구원을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648년 신라의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맺어진 비밀 군사 동맹으로 당은 고구려 외에 백제와 신라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 지배층의 권력투쟁은 극에 달했다. 패배한 자들이 자신의 세력과 함께 적국 신라와 당으로 망명하면서 저들이 지배하던 땅과 백성들을 졸지에 속한 나라가 바뀌는 웃지 못할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667년 당이 다시 한 번 대군을 일으킬 즈음 고구려는 이미 철벽을 자랑하던 국경 방어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6689월 서쪽에서 당, 남쪽에서 신라의 공격을 동시에 받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평양성은 적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겹겹이 포위된 채 공격받기 시작한 평양성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246 페이지)

 

연천 무등리 2보루는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철갑옷과 제철 유적이 발견된 고구려 최고의 군수·병참 기지다. 임진강 서쪽 구릉(해발 93m)에 위치한 이 보루는 남쪽 국경의 다른 고구려 성곽들과 구별되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보루 내부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 장수나 보병이 입었던 철제 찰갑(비늘갑옷)과 투구 1벌이 통째로 주저앉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중 이처럼 완벽한 형태의 보병용 찰갑이 출토된 것은 무등리 2보루가 처음으로, 고구려 무기 제작 및 방어구 구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보루 내부에서 철을 제련할 때 나오는 금속 찌꺼기(슬래그)와 제철 작업 흔적이 대량 발견되었다. 군사들이 단순히 주둔만 하던 다른 보루들과 달리 이곳은 소규모 용광로를 갖추고 철제 무기와 군수품을 직접 제작하여 인근 보루들에 보급하는 병참사령부 역할을 했다. 6~9세기경의 쌀, 좁쌀 등의 탄화 곡물과 함께 수레 부속기, 농경용 보습 등이 다량 수습되었다. 동쪽과 남쪽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활용해 후방에서 조달한 군량미를 안전하게 보관하던 창고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둘레 약 350m의 석축 산성으로 대강 다듬은 현무암 석재 사이에 점토(찰흙)를 함께 채워 넣는 특이한 방식으로 성벽을 견고하게 다졌다. 성벽 외면에 점토를 두껍게 덧대어 붕괴를 막았고 성벽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영정주 흔적)과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무등리 1보루가 행정 관청(치소) 역할을 했다면, 2보루는 철갑옷, 제철장, 곡물창고를 갖춘 핵심 군수기지로서 두 보루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임진강 변의 유연나루(교통로)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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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드 오젤 지음, 이덕환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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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박사이자 화학물리학 박사 채드 오젤(Chad Orzel)[우리집 강아지에게 양자역학 가르치기]는 상대성 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양자역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이다. 제목에 나오는 강아지는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강아지에게 양자역학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이다. 강아지는 사람과 다르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양자역학이 난해하고 난감해 보이는 것은 양자역학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의미하는 바는 양자역학을 배우려면 강아지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양자론을 정립하도록 만들어준 발견은 빛과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입자 - 파동 이중성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빛도 어떤 실험에서는 입자의 흐름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전자빔도 어떤 실험에서는 파동처럼 보인다는 사실들도 밝혀졌다. 저자는 앞부분에서 입자와 파동의 차이를 설명한다. 파동 자체는 공간에서 변이의 확산일 뿐 물리적으로 분명한 위치와 속도를 갖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입자는 한 개, 두 개, 세 개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파동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자 물리학을 이해하려면 파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비교할 수 없었던 빛과 소리는 지금은 파동의 상이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이야기된다. 빛과 소리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차이가 나타난다. 빛의 파동은 직선으로 지나가지만 소리의 파동은 장애물을 돌아서 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리의 파동은 상당히 넓게 회절되기 때문에 심하게 꺾인 길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일상적인 물체는 빛의 파장보다 너무 크기 때문에 회절을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작은 장애물에서는 빛의 파동적 특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플랑크의 편법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빛을 끊어짐 없이 이어져 있는 물(water)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빛을 연속적인 파동으로 생각하니 에너지가 무한대로 나오는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플랑크는 빛을 모래알처럼 쪼개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랑크의 편법은 물리학자들이 연속적인 파동이라고 생각해 왔던 빛을 입자의 경우처럼 물의 연속적인 덩어리의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플랑크의 가상적인 진동자는 빛을 불연속적인 밝기 단위의 입자로만 방출할 수 있다. 그 진동자가 바로 양자 물리학의 양자라는 개념이다.

 

플랑크가 빛의 양자에 해당하는 광자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플랑크는 빛이 불연속적인 양자의 흐름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이 사용한 이상한 편법을 쓰지 않고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플랑크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계산법을 적용한 결과 주파수가 낮을 때는 고전역학의 비례 그래프를 따르다가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에너지가 무한대로 가지 않고 다시 0으로 떨어지는 완벽한 곡선을 얻게 되었다.

 

닐스 보어는 플랑크의 불연속성 개념을 원자 구조에 도입하여 전자가 아무 궤도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에너지 준위를 가진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광자는 밝기가 아니라 진동수와 관계가 있다. 진동수가 너무 작으면 빛이 아무리 밝아도 전자가 방출되지 않고 진동수가 커지면 아무리 빛이 희미해도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가 방출된다. 빛의 밝기는 광자의 개수이고 진동수는 광자 하나의 에너지이다. 빛을 불연속적인 입자의 흐름으로 생각해야 했지만 그런 입자들이 여전히 파동과 마찬가지로 진동수를 가지고 있고 간섭 패턴도 만들어냈다.

 

아인슈타인, 밀리컨, 콤프턴은 모두 빛의 입자성을 밝혀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루이 드 브로이는 빛과 물질 사이의 대칭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자와 같은 물질적 입자도 파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빛 파동이 입자처럼 행동한다면 입자도 파동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드 브로이는 운동량이 파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광자와 마찬가지로 전자와 같은 물질적 입자도 운동량에 의해서 결정되는 파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데이비슨, 거머, 톰슨의 실험에 이어서 과학자들은 모든 아원자 입자들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입자의 질량이 증가하면 파장은 점점 더 짧아지기 때문에 직접 파동의 효과를 관찰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불확정성 원리는 단순히 측정 자체가 시스템의 상태를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양자 불확정성은 양자 물체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나타나는 결과로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해당한다. 불확정성이 측정에 의한 시스템의 상태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1920~1930년대에 등장했다.

 

마당에 있는 토끼의 위치와 운동량을 아주 정확하게 알아내고 싶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토끼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알아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면 토끼가 달아나버리기 때문에 토끼의 속도가 변한다. 아무리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라도 언젠가는 토끼가 도망칠 것이다. 결국 토끼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모두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토끼처럼 지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전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면 빛의 광자가 반사되도록 해서 산란된 빛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전자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광자도 운동량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광자가 전자에 의해 반사되면 전자의 운동량도 변한다. 현미경의 렌즈는 어느 정도 범위의 각도에서 광자를 수집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전자의 운동량이 불확실해진다. 전자가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자 이론에서는 위치와 속도에 관한 양들이 처음부터 정의되지 않는다. 불확정성은 측정의 실질적인 한계에 대한 법칙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에 대한 법칙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측정하기 전에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값을 물어보는 것부터가 의미가 없다.(68 페이지)

 

양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가 불확실하다고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파동 함수는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나타낸 식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이를 제곱하면 위치에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을 알게 해준다.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운동량의 불확정성과 위치의 불확정성이 지나치게 크지 않은 하나의 파동 다발을 얻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는 단순히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그런 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의 파동적 성질을 설명하려면 전자가 행성과 같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만 한다. 대신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일종의 구름처럼 흐릿한 모양으로 떠다닌다고 생각해야 한다.(83 페이지) 전자의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원자핵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고, 운동량도 불확실하지만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범위로 제한된다. 일상적인 대상은 너무 크기 때문에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을 확인할 수가 없다. 아주 작은 입자가 아주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야만 불확정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전자가 언제나 위치와 운동량 모두에 대해 불확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에너지가 절대 0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자의 일부이면서도 에너지가 0이 되려면 전자가 움직이지 않고 원자핵에 멈춰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전자를 원자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려면 원자핵에 중심을 둔 폭이 좁은 전자의 파동 다발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다발에는 운동량이 0이 아닌 상태들이 대단히 많이 포함되게 된다. 그래서 수소에서 가장 낮은 에너지를 가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에너지는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85 페이지)

 

영점 에너지는 갇힌 입자가 가질 수 있는 절대적 최소 한계가 된다. 시스템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만들어도 입자는 언제나 움직이고 작은 무작위적 요동 때문에 입자가 움직이는 속도의 크기와 방향은 끊임없이 바뀐다. 영점 에너지는 양자 물리학에서 우리의 직관과 가장 확실하게 어긋나는 아이디어 중 하나로 세상에 완벽하게 정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시스템으로부터 모든 에너지를 빼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언제나 약간의 에너지는 남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 텅 빈 공간도 영점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양자 효과에 의한 불확정성은 일반적으로 매우 작아서 현실적으로 거시적 대상은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과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고전 역학적인가 하는 점이다. 양자 물리학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는 입자, 서로 다른 두 곳에 존재하는 대상,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기도 한 고양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저자는 양자 법칙이 일상적인 강아지와 고양이를 포함한 거시적 세계에서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에서 이론을 지배하고 파동 함수를 계산해주고 행동을 예측해주는 수학적 방정식이 있지만 파동 함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는 대부분 이론의 해석에 대한 것이다. 파동 함수, 허용 상태, 확률, 측정은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이다. 모든 것은 파동 함수를 가지고 있고 파동 함수는 어디를 살펴 보거나 상관없이 어떤 값을 갖게 된다. 양자론에서는 주어진 대상이 언제나 어떤 상태에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전자는 중간 에너지 상태를 거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도약한다. 두 상태 사이의 극적인 변화를 양자 도약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에너지도 약에 해당하는 상태 변화에는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전자는 특정한 파장의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파동 함수는 확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철학적 문제가 끼어든다. 고전 물리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양자적 무작위적 확률은 매우 난감한 개념이다. 물리학에서는 최후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완전히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실험을 반복하더라도 두 번째 실험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가능한 결과의 확률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상자를 열어서 두 상자 중 어느 하나에 과자가 들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과자가 왼쪽 상자와 오른쪽 상자 모두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빛의 편광은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인 중첩, 측정, 확률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양자 지우개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양자 물리학의 핵심적인 요소를 모두 이해하는 셈이라고 한다. 이는 입자의 경로 정보(어디로 갔는지)를 지워서 사라졌던 파동의 간섭무늬를 되살리는 실험장치나 현상을 말한다.

 

코펜하겐 해석 진영은 미시적 물리학과 거시적 물리학 사이에 엄격한 경계선을 설정함으로써 중첩과 측정의 문제를 회피해보려고 노력했다. 양자, 전자, 원자, 분자와 같은 미시적 대상은 양자역학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지만 강아지, 물리학자, 측정 장치와 같은 거시적 대상은 고전 물리학에 의해서 지배된다.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는 절대적으로 구분이 되기 때문에 거시적 대상이 양자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절대 볼 수 없다. 양자 측정에는 거시적 측정장치와 미시적 대상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그런 상호작용이 미시적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그런 상황을 일반적으로 파동 함수가 단 하나의 상태로 붕괴된다고 표현한다.

 

유진 위그너는 파동 함수가 붕괴되는 것이 친구가 상자를 열었을 때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 결과를 통보 받았을 때인지를 물었다. 역학은 미시적 물체와 그런 물체로 구성된 집단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는 훌륭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고집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고전적이다. 미시적 세상과 거시적 세상의 절대적 구분을 고집하는 코펜하겐 방식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코펜하겐 해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말해주지만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했다.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는 미시 세계의 확률적 법칙과 거시 세계의 결정론적 법칙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어떻게 연결하고 설명할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만족한 물리학자는 거의 없다. 그 대안 중 하나가 다중 세계 해석이다. 그들에 의하면 똑같은 사건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과정으로 진행되는 무한히 많은 대안 우주가 있다. 파동 함수는 언제나 부드럽고 연속적으로 변화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파동 함수의 어느 한 가지만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가지를 보게 되는지는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결어긋남은 파동 함수의 서로 다른 가지들이 상호작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이나 다중 세계 해석은 물론이고 다른 해석을 좋아하는지에 상관없이 측정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파동 함수의 물리적 붕괴가 포함되거나 또는 계속 확장되고 진화하는 파동 함수의 여러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인식하거나 상관없이 측정은 능동적인 과정이다. 상태를 측정하기 전까지 물체는 모든 가능한 상태의 양자적 중첩 상태로 존재하지만 측정을 한 후에는 즉시 하나의 상태로만 관찰된다.(161 페이지)

 

본문에는 양자 제논 효과도 나온다. 제논의 역설의 양자적 해석이다. 1990년 콜로라도에 있는 국립 표준기술연구소의 데이브 와인랜드 연구진의 웨인 이타노가 베릴륨 이온을 이용한 실험으로 양자 제논 효과를 분명하게 확인했다. 터널 현상은 담장을 향해 달려가는 강아지의 경우처럼 장애물을 향해서 움직이는 입자가 마치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장애물을 통과해 버리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양자 현상이다. 양자 입자는 물질의 파동적 성질 때문에 고전 물리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단단한 물체 속으로 파고 들어가거나 지나가 버릴 수 있다. 가장 분명한 에너지의 형태는 움직이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운동 에너지이다.

 

일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질량에 속도의 제곱을 곱한 양의 절반에 해당한다. 운동 에너지는 언제나 0보다 큰 값을 가지며 질량이나 속도가 늘어날수록 커진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능성을 퍼텐셜 에너지라고 부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무거운 물체는 퍼텐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물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지나치게 활동적인 강아지가 테이블에 부딪혀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운동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183 페이지)

 

에너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에서 특히 중요하다. 양자 입자는 잘 정의된 위치나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그런 성질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도 에너지는 보존되기 때문에 에너지를 이용해서 양자 시스템을 설명할 수 있다. 얽힘(entanglement)은 기본적으로 두 물체의 상태 사이의 상관성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원인으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경로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철저하게 믿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양자역학에 대해서 심각한 철학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측정하기 전까지는 양자 입자의 성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확률적인 값을 가진다는 생각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1930년대 초가 되면서 아인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불확정성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양자 이론을 불편하게 느꼈다. 양자역학은 고전 물리학에서와는 달리 멀리 떨어진 측정들도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에서 비국소적 이론이다. 국소성은 고전 물리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의문을 품을 수 없다. 국소성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이 필요하다. 공간 이동은 비국소적 상관성을 응용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예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상상을 하게 되어서 순간적으로 물질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스타트랙]과 같은 과학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A에서 출발한 물체가 부드러운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가 멀리 떨어진 B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소설에서 보았던 것과 비교하면 실제 양자 공간 이동은 실망스럽게 보인다. 양자 공간 이동은 물체 자체가 아니라 물체의 양자 상태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더욱이 정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이동의 속도도 빛보다 느리다. 과학 소설에서 꿈꾸는 공간 이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간 이동의 핵심은 원격 복사라고 할 수 있다. 한 곳에 있는 물체를 다른 곳에 있는 복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는 팩스 장치가 고전 물리학을 이용한 공간 이동의 예가 될 수 있다.

 

중간 이동이 가능한 것은 양자 물리학이 비국소적이기 때문이다. 공간 이동 개념은 1993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1997년에 안톤 자일링거가 이끄는 인스부르크 연구진에 의해 처음으로 증명되었다. 그들은 자외선 레이저에서 나온 광자를 두 개의 적외선 광자로 변환시켜주는 결정을 통과시켜서 얽힌 광자를 만들었다. 각각의 적외선 광자의 에너지는 본래 자외선 광자의 절반이 되었다.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서 레이저를 결정해 통과시킴으로써 모두 4개의 광자를 만들었다. 광자 2와 광자 3의 쌍은 공간 이동에 필요한 얽힌 쌍으로 사용했고 나머지 두 개의 광자 중 하나인 광자 1은 공간 이동이 될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편광기를 통과시켰다. 나머지 광자 4는 언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를 사용했다.

 

저자는 물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목표라면 굳이 양자 공간 이동을 이용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양자 공간 이동은 특정한 상태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 그렇다면 양자 공간 이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명이 없는 물체를 옮기는 데에는 양자 공간 이동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대상을 옮기는 경우에는 반드시 양자 공간 이동이 필요하다. 의식은 근원적으로 양자역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다. 로저 펜로즈는 [황제의 새 마음]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그런 주장이 옳다면 사람이나 강아지의 뇌 상태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팩스 장치가 아니라 양자 공간 이동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을 공간 이동시킬 수 있는 단계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양자 공간 이동에 대한 관심은 훨씬 더 작은 물체에 한정되어 있다.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외에 에너지와 시간의 불확정성도 있다. 직접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입자인 가상 입자는 심각한 과학 이론에서는 지나치게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입자들이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빛과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 전기 역학 또는 QED라고 부르는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가상 입자는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가상 입자와의 상호작용이 전자의 상호작용 방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런 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효과는 아주 작지만 그 효과를 측정할 수 있고 그 결과가 실험 결과와 소수점 아래 14 자리까지 일치한다. 이런 실험은 QED가 옳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 아니라 수십억 달러가 필요한 입자가속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새로운 아원자 입자의 존재를 알아 낼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양자역학은 마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불가능하고 신기하게 보이더라도 양자역학은 물리학의 일반 원리에 맞는 과학 이론이다. 현상이나 장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양자라는 단어가 공짜로 에너지를 만들어 주거나 메시지를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보내도록 해주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의 원리는 우주의 심오한 구조 속에 들어 있다. 양자역학은 그런 법칙을 따를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그런 법칙이 양자적 특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여러 가지 예측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통찰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모든 상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양자역학은 사실이기에는 너무 그럴듯한 것은 거의 확실히 엉터리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상식 법칙을 넘어서지 않는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영점 에너지는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에 있는 경우에도 존재하는 에너지다. 운동 에너지를 최소값으로 만들고 퍼텐셜 에너지를 증가시킬 수 있는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모두 제거해 버림으로써 양자 시스템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꺼내더라도 여전히 시스템에는 잔류 에너지가 남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마찬가지로 영점 에너지는 물질의 기본적인 파동적 성질에서 비롯되는 결과이다. 우리가 불확정성에 의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점 에너지를 이용해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없다. 영점 에너지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광자의 절반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요구는 의미가 없다. 양자 자유 에너지에서 주로 언급되는 또 다른 요소는 진공 에너지다. 이것은 QED에 따르면 반드시 존재하는 가상 입자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빈 공간의 영점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영점 에너지 주장의 변종이다.

 

양자역학을 잘못 이용하는 또 다른 주요 분야가 대체의학이다. 서점과 인터넷은 양자역학이 건강과 부와 장수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주장에서 가장 흔하게 활용되는 것이 바로 양자 측정이다. 사기꾼들은 양자 이론에서 측정하기 전까지는 상태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자신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런 식이라면 스스로에게 양자 제논 효과 실험을 반복하면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해진다. 자신이 언제나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런 양자 측정이 몸이 병들지 않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자 효과는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연구대상이 커질수록 확인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양자 중첩 상태가 확인된 가장 큰 물체는 수십억 개의 전자가 모인 경우이고, 양자 제논 효과는 하나의 입자에서만 확인되었다. 양자역학은 이상하지만 훌륭한 이론이고 흥미로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현대 기술은 어떤 식으로든지 양자역학에 의존한다.

 

현대 전자 장치와 컴퓨터 칩은 양자역학에 의해 작동하고 현대 통신에 사용하는 레이저나 LED와 같은 공학 장치도 기본적으로 양자 장치이다. 놀라운 사실은 양자역학이 기적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예측이 일상적인 통찰과 어긋나기는 하지만 이론 그 자체가 상식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약속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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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 물리학 - 런던 대학교 물리학 교수가 들려주는 일상 속 과학 이야기
헬렌 체르스키, 하인해 / 북라이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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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해양학자인 헬렌 체르스키의 책이다. 헬렌 체르스키는 자연과 사물을 설명할 때 '기계(Machine)'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저자가 대상을 기계로 표현하는 이유는 물리학자이자 해양과학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체르스키는 바다나 인체를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가 아니라, 태양에너지나 영양소를 받아 전 지구적·생명체적 규모로 순환시키는 동적인 독립 시스템으로 바라본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바다의 해류와 밀도 변화, 인체의 세포와 근육 움직임이 모두 정교한 물리학적 규칙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다.

 

저자는 물리학은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도구가 되며 관심 있는 현상들을 설명해주기에 물리학을 공부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물리학의 몇 가지 기본 원리를 알면 세상은 장난감 상자가 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물리학은 동일한 패턴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멋지다. 과학은 사실은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토대로 사물을 이해하는 논리적 과정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의 핵심은 가능한 한 모든 증거를 검토해 스스로 실험한 후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자신은 해수면의 물리 현상을 연구한다고 말한다. 실험주의자라 바다에 나가 하늘과 바다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경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일부라고 말한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1687[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두 물체 사이의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규칙을 토대로 지구의 각 부분이 서로 당기는 힘을 합하면 옆으로 작용하는 힘은 상쇄되어 결과적으로 지구 중심을 향해 아래로 작용하는 힘만 남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저자는 지구의 거대한 엔진인 바다는 다른 모든 것처럼 중력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한다. 바닷물이 담긴 그릇을 계속 젓는 것은 열과 염분이다. 이들이 중요한 이유는 밀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밀도가 다른 각 부분의 유체는 중력 싸움에 적응하기 위해 유동한다. 바다의 염도는 모든 곳에서 균일하지 않다. 3.1%에서 3.8% 사이로 차이가 큰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문제다. 탄산음료에 설탕을 넣으면 밀도가 높아지듯 바닷물은 다량의 소금 때문에 담수보다 밀도가 높다. 뜨거운 물이 따뜻한 물보다 밀도가 높다.

 

바다의 온도는 극지방에서는 섭씨 0도까지 내려가고 적도 부근에서는 섭씨 30도에 이른다. 따라서 차갑고 염도가 높은 물은 가라앉고 따뜻하고 염도가 낮은 물은 떠오른다. 물은 이 같이 단순한 원칙에 따라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린다. 북대서양에서 바닷물은 바람에 열을 빼앗겨 온도가 내려간다. 해수면이 얼어 생긴 얼음은 주로 물로 이루어지고 소금은 바닷물에 남는다. 이 과정에서 바닷물은 온도가 더욱 내려가고 염도와 밀도는 높아져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해저 바닥을 향해 밑으로 가라앉아 밀도가 낮은 물을 밀어낸다. 이후 해저 바닥을 천천히 유영하다가 강물처럼 협곡을 흐르고 산등성이에 부딪히기도 한다.

 

북대서양에서 출발한 바닷물은 해저에서 1초에 몇 센티미터씩 남쪽으로 흐르고 약 1000년 뒤 첫 장애물인 남극대륙에 도달한다. 그리고 대륙 때문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이 막히면서 동쪽으로 움직이다가 남극해를 만난다. 지구 바닥의 거대한 해양 교차로인 남극해는 남극대륙을 감싸고 돌면서 대서양 하단, 인도양, 태평양과 결합해 모든 바닷물을 연결한다. 북대서양에서 출발해 천천히 흐르던 엄청난 양의 바닷물은 남극대륙 주변을 돌다가 다시 북으로 이동해 인도양이나 태평양으로 향한다. 1600년 동안 한 줄기의 햇살도 받은 적 없던 물이 주변의 물과 점차 섞여 밀도가 내려가면 해수면으로 떠오른다. 그곳에서 빗물, 강물, 얼음이 녹은 물로 염분이 희석되고 바람이 일으킨 해류에 밀려 다시 북대서양에 돌아오는 여정은 재개되고 반복된다. 이를 열염분 순환이라고 부르며 이 같이 바닷 물이 역전되는 현상을 해양 컨베이어 벨트라고 한다.

 

지구의 기상 패턴 뒤에는 열-염분 순환이라는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극단적 기상 상황을 잠재우는 안정적 열 저장고 위에서 변덕스럽고 얇은 대기층이 움직인다. 바람이 일으키는 해수면의 표층 해류는 몇 세기 동안 탐험가와 상인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해양의 컨베이어 시스템은 탐험가와 상인 만큼 인류 문명에 중요한 요소인 열을 이동시킨다. 모든 관심은 대기가 받지만 배후 세력은 바다다. 지구본이나 지구의 위성 사진을 볼 기회가 있다면 바다를 그저 대륙 사이를 메우는 파란 공간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천천히 움직이는 거대한 해류를 이끄는 중력을 상상하면서 파란 부분이 지구의 가장 큰 엔진임을 기억하자.(93 페이지)

 

케첩은 특이하게도 천천히 밀면 거의 고체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빠르게 힘을 가해 움직이면 액체처럼 쉽게 흐른다. 케첩이 병 바닥이나 포테이토칩 위에 있다면 가해지는 힘은 약한 중력 뿐이므로 고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게 흔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액체처럼 매우 빠르게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빠르게 하는지 느리게 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점액은 당단백질이라고 부르는 아주 긴 분자들이 섞인 젤(gel)이다. 젤은 가만히 있을 때는 사슬 사이에 화학적 연결고리들이 생성되어 고체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세게 밀면 바로 고리들이 끊어지면서 스파게티 면 가닥처럼 긴 분자들이 풀어진다. 그대로 몇 초가 지나면 다시 고리들이 생기며 젤이 된다.

 

흘러내리지 않는 페인트 역시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페인트는 가만히 있으면 걸쭉하고 찐득하다. 하지만 붓으로 누르면 점성이 떨어져 벽에 얇게 펴 바를 수 있다. 그리고 붓을 떼면 바로 점성이 높아져 마르기 전까지 벽에서 흘러내리지 않는다.

 

빗방울이 바위 위로 떨어지면 시간 척도는 달라진다. 빗방울이 떨어진 바위는 화강암이다. 인간의 기억에서 움직이거나 변한 적이 없다. 하지만 4억 년 전 남반구에 거대한 화산 분출이 있었고 아래에서 나온 마그마가 화산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후 수천 년 동안 마그마가 식으면서 서서히 여러 모양의 결정으로 분리되고 단단한 화강암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흘러 커다란 돌덩이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쪼개지고 식물과 얼음에 의해 깎이고 비에 침식되었다. 그러다가 화산활동이 뜸해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발로 화산활동이 끝난 후 대륙의 일부였던 암석이 북쪽으로 이동해 왔다. 지구가, 지표면에 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동안 여러 종과 지질학적 시대가 출현했다가 사라졌다.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 후 지구가 살아오는 시간 중 10분의 1 만큼의 기간이 지난 지금 화산이 남긴 것은 폭발 후 밖으로 튀어나온 내장의 잔해다. 그 잔해 중 하나가 영국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1345미터의 벤 네비스 산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생명이 약 37억 년 전 심해 열수 분출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측한다. 분출구 안은 따뜻한 알칼리성 물이었다. 바깥은 약산성의 차가운 바닷물이었다. 분출구 표면에서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섞이면서 평형이 이루어졌다. 초기 생명체는 평형으로 가는 경로 가운데서 수문 역할을 하다가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평형 상태로 가는 흐름은 방향을 틀어 최초의 생체 분자들을 만들었다. 최초의 수문은 성벽 즉 생명이 있는 안과 생명이 없는 밖을 구별하는 세포막으로 진화했다. 최초의 세포는 평형 상태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남았고 평형 상태를 피해야만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세계로 가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주의 다른 세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주 어딘가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항성과 행성의 수는 아주 많기 때문에 생명체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이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어디선가는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주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우리에게 전파 신호를 보낼 가능성은 낮다.

 

무엇보다도 우주는 엄청나게 광활해서 전파 신호를 개발한 문명은 우리에게 보낸 신호가 도달하기 한참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체가 전혀 의도치 않게 우주로 신호로 보낼 수는 있다. 하와이에 있는 마우나케아 산 정상의 산등성이 위에 한 쌍의 망원경 돔이 나란히 있다. 돔은 처음 봤을 때 우주를 쏘아보는 거대한 개구리의 눈 같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이름은 켁 천문대로 태양계 밖 생명체를 최초로 발견할 거대한 눈동자가 있다.

 

물의 신기한 동결 현상은 꽁꽁 언 북극해에서 가장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노르웨이 최북단에 있는 해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북극해가 보인다. 얼음이 없는 여름 동안 24시간 내내 끊이지 않는 햇빛은 작은 해양 식물로 조성된 이동하는 거대한 숲에 영향을 공급하고 물고기, 고래, 바다 표범이 이곳에서 배를 채운다. 여름이 끝나가면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여름에도 섭씨 6도에 불과했던 해수면 온도는 더욱 낮아진다. 서로 미끄러지듯 지나다니던 물 분자의 속도도 느려진다.

 

이곳의 물은 염도가 높아 영하 1.8도까지 액체 상태로 머물 수 있지만 맑은 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얼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얼음 쪼가리가 물 위로 떠오르고 가장 느린 물 분자들이 얼음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달라붙는다. 하지만 아무 곳에나 달라붙을 수는 없다. 분자는 얼음에 부딪혀 결합할 때 다른 분자의 위치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는다. 분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움직이던 구조는 규칙적인 육각형 격자로 배열되는 결정 형태로 바뀐다. 온도가 떨어질수록 얼음 결정은 커진다.

 

얼음 결정이 독특한 이유는 엄격하게 정렬된 분자들이 따뜻한 온도에서 돌아다닐 때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물질은 분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때보다 규칙적인 격자 형태로 정렬될 때 간격이 좁다. 하지만 물은 그렇지 않다. 결정체는 크기가 커지면서 주변 물보다 밀도가 낮아져 위로 떠오른다. 물은 얼면서 부피가 커진다. 그렇지 않다면 얼음은 가라앉아 극지방의 바다는 지금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도가 떨어질수록 얼음은 커지고 바다 위를 덮은 단단하고 하얀 부분은 늘어난다.

 

전자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춤춘다. 전자의 춤이 만든 화면을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은 부품들이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작동해야 한다. 따라서 초기 텔레비전에는 다이얼과 단추가 많았고 텔레비전 주인들은 이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침반의 주요 목적은 길을 찾는 것이다. 둥근 지구의 표면 위에서 길을 찾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수 세기 동안 탐험가들은 지구의 자기장을 믿고 의지했다. 지구는 자북극과 자 남극이 있어 누구라도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자성은 단순하고 저렴하며 결코 닳지 않는 훌륭한 항해 도구다. 하지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로 지구의 자극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극은 이동할 뿐 아니라 이동거리가 엄청나게 길 수 있다.

 

우리 발 아래 깊은 곳에 있는 외핵은 철이 풍부하고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 열은 지구 중심에서 지표면으로 옮겨가고 지구가 회전하면서 용해된 암석 또한 회전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외핵에 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기 전도체 역할을 하고 따라서 토스터의 전자석처럼 행동할 수 있다. 외핵이 회전하면서 발생하는 전류가 지구의 자성을 생성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은 용해 된 암석이 느리게 이동하며 일어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의 움직임이 변하기 때문에 자극들이 이동한다. 철 함유량이 높은 외핵 암석은 지구 전체가 회전하면서 같이 회전하기 때문에 자극은 지구의 자전축을 따라 대략 정렬되지만 대략 일 뿐이다. 따라서 정확한 방향으로 항해를 해야 한다면 자북극과 진북은 동일하지 않으므로 현재 자북과 진북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지도는 자북극과 진북 모두 알려준다.

 

저자는 우리 몸은 다양한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지만 원자들이 배열되는 방식 때문에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직접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줄 도구를 만드는 데 능숙한 전문가다. 우리는 손 안에 끓는 물을 담을 수 없지만 강철로 된 주전자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밀봉된 용기가 아니므로 말린 잎을 보관할 수 없지만 유리병이 대신 해줄 수 있다. 우리는 집게발이나 껍데기, 상아가 없지만 칼과 옷, 통조림 따개를 만들 수 있다. 세라믹 컵 덕분에 연약하고 민감한 우리 손가락에 열에너지를 전달하지 않고 뜨거운 음료를 담을 수 있다. 금속, 플라스틱, 유리, 세라믹은 나무, 종이, 가죽같이 생물학적 물질과 함께 인간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338 페이지)

 

우주의 모든 물질은 수소, 탄소, 산소 등 동일한 기본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연필심(흑연)과 다이아몬드가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는 것처럼, 원자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그 물질이 할 수 있는 일과 성질이 완전히 결정된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는 사실 지구상의 흙이나 돌, 또는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이라는 형태로 원자들이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걸어 다니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그 배열의 규칙(뼈의 강도, 근육의 수축 한계, 신경 전달 속도)을 벗어나는 일(: 날개 없이 하늘을 날거나, 벽을 통과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 너머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지구 시스템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암석, 대기, 바다, 얼음, 생명체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구성요소마다 고유의 리듬과 역학이 있지만 지구가 다양성을 갖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춤이 구성 요소들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구성 요소들은 모두 같은 힘에 이끌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슷한 현상들이 발견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로 이루어진 하늘의 공기는 부력에 따라 이동한다.

 

우리가 나온 건물의 난방에 의해 온도가 올라간 공기는 주변 공기보다 밀도가 낮아 위로 떠오른다. 따뜻한 지면에서 올라온 공기 기둥은 수 킬로미터에 이르고 1km를 오르는데 약 5분이 걸린다. 차갑고 밀도가 높은 공기는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아래에서 흐른다. 이러한 대류의 패턴은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 전반에 걸쳐 있다. 공기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깊은 바다의 표면을 바라보면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력이 존재한다.

 

물은 1번에 한 알갱이씩 깎여나가므로 자갈들은 수백만 번의 무작위적인 충돌로 지금의 모양을 갖춘 것이다. 아주 작은 알갱이를 깎는 것은 1/1000초면 충분하지만 자갈은 수년 동안 서서히 마모된 후에야 반질반질해진다. 지질 연대에서 해변은 일시적이다. 새로 공급되는 자갈과 모래의 양이 바다로 씻겨 사라지는 양보다 클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앞으로 수개월 그리고 수년 동안 모래는 바다의 움직임에 따라 바다로 들어갔다가 해변으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해변의 조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모래가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에 의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찻잔 안에서 폭풍이 보인다는 말이다. 자연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과학의 힘을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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