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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한 시선집 - 망향에 서정을 노래하다
연규석 지음 / 고글 / 2020년 7월
평점 :
연천 향토문학 발굴위원회에서 펴낸 ‘허목 한시 전집’이다. ‘망향에 서정을 노래하다’란 부제를 가졌다. 1부 한시(漢詩), 2부 잡학(雜學), 3부 평설(評說)로 구성되었다. 미수 허목 선생은 1595년에 서울(한양 창선방)에서 태어나 1682년 연천에서 타계한 연천의 인물이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하는 데 시인, 국문학자(교수), 소설가, 평론가, 수필가, 시조시인 등 전문가들이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남쪽 사비수(泗沘水)를 유람한 시가 먼저 등장한다. 사비(泗沘)는 부여이고, 사비수(泗沘水)는 부여의 강이다. 선생은 바윗돌을 불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천승(千乘)이란 말이 나온다. 전시(戰時)에 천(千) 대(臺)의 병거(兵車)를 동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후(諸侯)를 이르는 말이다. 만승(萬乘)은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선생은 넓고 큰 성인 교훈 너무도 좋아하여 평생토록 공자의 글을 읽었다고 말한다.(설독개공자; 說讀皆孔子)
억편(抑篇)에서 경계한 것 밤낮으로 되뇌었다고 한다. 억편은 위나라의 무공이 90세에 지어 자계(自戒)란 작품이라 한다. 그래서였는지 87세의 선생은 지금의 나는 구십 된 늙은이란 말을 했다.(금아구십로; 今我九十老). 선생은 인정은 본래가 먼 가지로 변하는 것 세상일 날이 갈수록 복잡해진다 친숙한 교분도 때로는 호월처럼 멀어지니 한결같이 보기가 매우 어렵네란 말을 했다. 호월이란 중국 대륙 북쪽의 호족과 남쪽의 월족을 이르는 말이다.
선생은 산 밖의 일이야 알 까닭 없고 갈필에 먹 찍어 과두체를 쓰노라란 말을 했다. 갈필(葛筆)은 칡뿌리를 잘라 끝을 두드리어 붓 대신 쓰는 물건이다. 과두(蝌蚪)는 올챙이를 의미한다. 올챙이 모양의 허목 특유의 과두체(蝌蚪體)인 미수전(眉叟篆)은 후학들에 의해 은나라 솥과 주나라 그릇의 명문과 같은 기이한 옛 글이라는 평을 받았다. 선생은 고요한 가운데서 물리(物理)를 관찰하니 자신이 거하는 방도 하나의 건곤(乾坤)일세란 말을 했다. 건곤이란 하늘과 땅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에 통천(通川)이란 지명이 나온다. 북(北) 강원도 통천으로 주상절리인 총석정(叢石亭)이 유명한 곳이다. 통천은 정축년(丁丑年) 즉 1637년 정월 병자호란을 피해 강원도 동해로 피난하면 쓴 시에 나오는 지명이다.(병자호란은 병자년에 일어나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난 전쟁이다.) 선생은 난리가 있은 이후부터는 일마다 괴로움이 생겨난다 슬프다 오랑캐의 난리 때문에 애처롭게 가시 숲을 숨어 다녔네라고 말한다.
선생은 행실을 닦음은 수관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한다.(수행자수관; 修行自漱盥) 수(漱)는 양치질 할 수이고 관(盥)은 씻을 관이다. 선생은 묵매(墨梅)를 이야기한다. 묵매는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를 소재로 수묵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웅연(熊淵)에서 뱃놀이하고 영숙(永叔)에게 보여주다란 글이 있다. 웅연은 연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웅연(熊淵) 계람(繫纜)의 그 웅연이다. 범주(泛舟)는 배를 띄우는 것을 말한다. 영숙은 권수(權修)의 자(字)다. 미수의 종형인 허후(許厚)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다.
본문에 폐소(弊梳)라는 말이 나온다. 낡은 얼레빗을 말한다. 선생은 피난 길에 ‘만권 서적 읽었건만 나라에 도움 없고 외딴 지역 몸 피하니 부끄러움 많구려,...주머니 속 한 빗을 오히려 간직했네 아침에 헝클어진 머리 감아 빗고서 창해에 다다르니 두 눈이 밝았어라.’란 말을 한다. 본문에 기려(羈旅)란 말이 나온다. 기려란 객지에 머무는 것, 또는 그런 나그네를 말한다.
1627년 정묘호란을 피해 북 강원도 평강으로 피난했던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동을 거쳐 의령까지 내려가 의령, 창원 등에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이 시기를 기려(羈旅)의 10년이라 표현한 바 있다.(羈; 굴레 기) 본문에 의춘(宜春)이란 말이 나온다. 의령의 옛 이름이다. 선생은 문장은 애초부터 궁할수록 기이했나니 두보 이백 멀리 좇아 광염을 펼치리라란 말을 한다.(문장고래궁역기; 文章古來窮亦奇 원추보백양광염; 遠追甫白揚光焰)
선생은 늙은 것이 예만 배우고 세상일 몰라 예 말할 때마다 많은 사람 기롱하네란 말을 했다.(노인학례불학무; 老人學禮不學務 담례매피다인휴; 談禮每被多人 咻..咻; 떠들 휴) 선생은 일식(日蝕)을 재앙이라 판단한다. 선생은 감악곡(紺岳谷)을 이야기한다. 감악산 골짜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늙은 이는 연협(漣峽)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한다. 연협은 연천 골짜기를 말한다.
선생은 내가 그대와 65년간 인간의 객이 되었더니 베갯머리에 잠깐 봄 꿈을 꾼 것과 어떠하던가란 말을 한다. 정끝별 시인의 늦도록 봄이란 시를 연상하게 한다.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선생은 자신의 가난을 부귀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부귀불이오기한; 富貴不易吾飢寒) 선생은 은거시(恩居詩)를 남겼다. 숙종으로부터 집을 하사받고 임금의 은혜 안에 거한다는 의미에서 시를 남긴 것이다. 선생은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큰 병통은 망녕되이 엽등(躐等)하고 조장(助長)하여 빨리하려 함에 있으니 이는 사적인 뜻이 벌써 승(勝)한 것인데 사가 앞서고서 학(學)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말했다. 엽등은 등급을 걸러 뛰어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은 근세 학자의 폐단은 실천함은 부족하고 의견부터 내세우며 지나치게 과격하기까지 하여 경박하다고 말했다. 선생은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여진다고 말했다. 근본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쉬지도 않고 어그러지지도 않아 갔다가 다시 온다고 말했다. 드러난 것은 천지의 조화와 육성(育成)이요 사시(四時)가 차례로 교대하는 것이며 만물의 시작과 끝이요 인사(人事)의 성쇠인지라 심은 것을 북돋고 기울어진 것을 넘어뜨리기까지 흥하고 멸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다. 이것은 한 번 가고 한 번은 오는 소장(消長)의 일정한 원칙이다.(236 페이지)
소장은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을 이르는 말이다. 선생은 이(理) 밖에 기(氣)가 없고 기 밖에 이도 없다고 말했다. 선생은 육경(六經)의 글은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표준을 세우며 개물성무(開物成務)한 천지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했다. 육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를 이르는 말이다. 개물성무는 사람이 아직 알지 못했던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세상의 일을 이룬다는 의미다.
선생은 예송 논쟁(1659년 기해예송, 1674년 갑인예송)에서 남인의 인물로 참여한 인물이다. 참최(斬衰), 재최(齊衰)란 말이 나온다. 참은 마름질하지 않았다는 의미고 재는 꿰맸다는 의미다. 참최는 3년간, 재최는 1년간 상복을 입는 것이다. 효종 승하시 대비인 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남인은 3년, 서인은 1년을 주장했고(서인 승),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 승하시 남인은 1년, 서인은 9개월을 주장했다.(남인 승)
효종에 대하여 서인은 효종이 왕이지만 장자가 아니라는 점을 어필했고 남인은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이기에 적통을 이었다는 점을 어필했다. 남인의 3년설에 대립해 서인이 내세운 것은 기년설(朞年說)이다.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이 군주의 대통을 강조하는 이론을 내세운 것은 왕권 강화를 통해 왕조 질서를 확립하고 벌열 세력을 억제해 일반 사대부의 기회 균등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선생은 청사열전(淸士列傳)을 저술했다. 청사는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선생은 권람의 집 후조당(後凋堂)을 소개하며 자신을 경계하는 집이라고 플이했다. 후조는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야에서 나온 말이다. 가장 늦게 시든다는 의미이니 자신을 경계한다는 말이 타당하다 보인다. 비파는 늦게까지 푸름을 유지한다는 의미의 비파만취(枇杷晩翠)와 뜻이 통하는 말이겠다.
선생은 허자(許磁)의 증손이며 백호 임제의 외손이다. 선생이 우의정에 대배(大拜; 의정 벼슬을 받음)된 것은 81세 때인 숙종 1년이다. 선생은 같은 해에 정3품 좨주(祭酒)도 역임했다. 선생은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삭탈관직당했다. 선생은 퇴계학파에 속한다. 퇴계학파는 영남학파와 근기학파로 나뉜다. 선생은 근기학파의 성립에 기초 역을 맡은 분이다.
번암 채제공은 성호 이익의 묘갈명에서 우리의 학문은 원래 계통이 서 있다. 퇴계는 우리나라의 공자로서 그 도를 한강(寒岡)에게 전해주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에게 전해주었는데 성호는 미수를 사숙(私淑)한 분으로서 미수를 통하여 퇴계의 학통에 이어졌다는 말을 했다. 선생이 한강을 만난 것은 부친의 임지를 따라 고령, 거창 등 영남 여러 고을을 왕래하면서 23세 때 그의 종형 관설공 허후(許厚)와 함께 성주로 찾아가서다.
선생은 한강의 많은 제자 가운데 가장 후배로 한강 학문의 상속인이 되었다. 미강별곡이란 작품이 있다. 선생이 목민관으로서 삼척에서 약 2년간 근무하다가 돌아온 뒤 타계하고 9년이 지난 1691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嵋山面) 동이리(東梨里)에 미강서원(嵋江書院)이 세워졌다. 지난 2006년경 발견된 미강별곡은 1883년 고종 20년에 윤희배라는 사람이 미강서원 일대를 유람하면서 지은 국한문 혼용 가사문학 작품으로 추정된다.
윤희배는 고종 20년(1888년) 선생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고 상소한 인물이다. 미강별곡은 선생을 '신야에 은거하던 이윤이 은나라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축출하고, 위수에서 낚시하던 강태공이 주나라 무왕을 도와 은나라 폭군 주왕을 징벌한 공을 세웠듯 신야위수(莘野渭水)급의 혁명적 충신이라 노래하는 작품이다.
미강별곡에는 미강팔경이 선정되어 있다. 십리창벽(十里蒼壁), 세우어정(細雨漁艇), 일대징담(一帶澄潭), 석양풍범(夕陽風帆), 아미반륜(峨嵋半輪), 구포홍금(鷗浦紅錦), 봉암천인(鳳巖千仞), 학정단하(鶴亭丹霞) 등이다. 선생의 집은 구루암에서 은거당으로 바뀌었다.(393 페이지) 은거당 뒤에 150평 가량의 십청원에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맥문동 등 열가지 사시사철 늘 푸른 나무가 있었다. 백졸장(百拙藏)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