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大饑饉), 조선을 뒤덮다‘는 소빙기, 현종(顯宗), 미수 허목 등에 대한 관심에 따라 고른 책이다. 책이 다룬 시기는 경신 대기근 시기로 경신년이란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의 머리 글자를 딴 이름이다. 소빙기란 16세기에서 17세기 또는 17세기에 해당하는, 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온이 지속되었던 때를 말한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량인 6000만명에 이르던 아메리카 원주민 수는 유럽인들로 인해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의 학살이 의도적 결과였다면 그들이 신대륙으로 천연두와 홍역 등의 바이러스를 가져온 것은 비의도적 결과였다. 침략의 충격으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100년 만에 500만~600만명으로 줄었다.
줄어든 인구가 부른 것은 경작의 감소였다. 이는 초목의 자연적 재생(재산림화)을 유발했다. 이에 따라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어 온실효과가 사라졌다. 이런 연쇄가 초래한 것이 소빙하기였다.(2019년 10월 19일 한겨레신문 기사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기후변화 초래' 참고) 컬럼버스가 신대륙에 진출한 1492년에서 1650년 사이 아메리카 인구가 5천 만에서 5백 만으로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2019년 1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 ’8천만 명→1천만 명... 인류 최대 인종학살‘ 참고) 당시 이산화탄소가 줄어든 사실은 남극 얼음 속에 갇혀있는 당시 공기를 분석해 알아낸 바이다.
나무 나이테로 몇 백년전, 몇 천 년전의 날씨를 알아볼 수 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의 지구 온도는 얼음을 통해 알아낸다. 남극, 그린란드 등에는 몇 만년전부터 온 눈들이 얼음이 되어 쌓여 있다. 이 얼음을 분석하면 눈이 내린 당시의 연평균 온도, 계절별 온도까지 추정할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7 페이지) 최성락은 조선 영정조,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프랑스 루이 14, 15세 등이 모두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칭송받지만 이는 왕이 잘해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났다기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난 때에 우연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18세기 말은 지구 평균 온도가 하강했고 온도 하강 추세가 몇 백년 정도 지속되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9 페이지)
17세기 조선에 연이은 대기근이 닥쳤다. 소빙기가 초래한 사건이다. 전술한 경술년, 신해년은 모두 현종 재위기였다. 1659년에 즉위해 1674년에 타계한 현종의 치세는 내내 참혹한 기근의 고난을 겪은 시기였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으니 현종 재위기는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 김덕진이 기본으로 삼은 자료는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승정원일기 등이다. 덧붙여 이해 당사자들의 취사선택에 의해 작성된 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집, 기타 고문서 들을 참고했다. 현종실록이 남인 집권기에 편찬된 책이라면 현종개수실록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을 추방하고 집권한 서인이 재편찬한 책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현종실록보다 재해 건수와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남인 집권층의 실정을 부각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기후적 관점에서 소빙기란 약 100만년전에 시작해 10만년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해 정도가 작다는 의미다.(22 페이지) 저자는 소빙기의 원인을 나열한다. 1) 태양 흑점 활동이 쇠퇴하거나 중지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든 결과라는 설, 2) 거대 운석 등의 외계발(發) 충격으로 인해 대량의 먼지가 태양을 가려 급랭 현상이 일어난 결과라는 설, 3) 유별난 화산 활동의 결과라는 설 등... 17세기 위기론 또는 17세기 소빙기 설은 학계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전 세계적 문제(글로벌 히스토리)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36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대기근 극복을 천혜의 자연조건, 상부상조 정신, 극복 시스템에서 찾는다.(39 페이지) 천혜의 자연 조건이란 말은 한 지역 안에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순창의 재력가 양운거는 몇 백 석의 미곡을 관아에 납부한 데 이어 1661년(현종 2년) 흉년이 들자 기아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 영조 대의 무관(武官) 류이주가 세운 99칸 고택 운조루(雲鳥樓)의 일화도 예시할 만하다. 굴뚝을 낮게 만들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지 않게 함으로써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뿐 아니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먹을 만큼 곡식을 꺼내 가라는 뜻으로 뒤주를 놓아 두었는데 그곳은 가져가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주인과 쉽게 마주치지 않는 곳이다.
조선은 지역 차원의 기근 구제 제도를 두었다.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된 효종의 아들로 병사한 아버지를 이어 임금이 된 현종은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볼 사람은 미수 허목이다. 미수 허목은 기해예송(1659년)이 서인의 1년상 채택으로 종결되자 삼척에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2년이 채 되지 않아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했다. 윤휴와 허목은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하다가 현종 말년에 정계 복귀했지만 윤선도는 복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신권 강화 vs 왕권 강화의 구도이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종은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1666년 이후 부쩍 남인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즉위 2년만에 아들(숙종)을 낳았다. 이에 송시열은 상중에 해서는 안 되는 부부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왕을 비난했다.
현종은 누이들의 집을 신축하는 일에 강경 입장을 보이다가 대신들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섰다. 대기근 때문이었다. 1670년의 자연재해는 냉해로 시작되었다.(106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7월에 우박, 서리 눈이 전국에 내렸다는 점이다. 찬바람이 불고 된서리와 찬비, 눈이 잇따라 내리는 겨울 추위가 1671년 봄까지 이어졌다. 가장 두려운 자연재해는 가뭄이다.(111 페이지) 전국 각도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나 속수무책의 상황이 이어졌다. 봄 밭농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모내기를 할 5월이 되어도 해갈 기미는 없었다. 오랜 가뭄 끝 비가 왔으나 폭우로 이어져 수해(水害)가 발생했다. 수해는 가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76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문을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할 것을 건의했다. 영제(禜祭)란 말이 있다. 오래도록 장마가 이어질 때 서울 사대문 다락 위에서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다. 폭우는 폭풍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아사자가 속출했고 황충(蝗蟲) 피해가 잇따랐다. 황충이란 농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을 말한다. 1670년 ~ 1671년 재해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충해 등 5대 재해가 겹친 전례 없는 대재해였다. 백성들은 재해, 염병, 우역(牛疫) 등 3대 악재에 시달렸다. 1670~1671년 2년간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 두에 이르렀다. 소의 대량 폐사는 엄청난 재산 손실이었다. 소가 없으면 농사와 교통 수단이 막힌다.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우금(牛禁)이라 한다. 우금은 소나무를 베지 몫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송금(松禁),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금(酒禁)과 함께 조선의 3금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우역이 나날이 번지는 가운데 남아 있는 병들지 않은 소를 도살한 후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자가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현종 즉위(1659년) 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의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1670년에는 유난히 갖가지 재해가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칠게 일어났다.(160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기근, 전염병, 가축병, 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161 페이지) 곡물가가 폭등했다. 사재기가 기승을 부렸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솔잎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정부의 송금령(松禁令)과 민간의 송계(松契)로 입산 및 채취가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채취 허가 명령이 내려졌다. 시늉만 내거나 전혀 시도하지 않은 수령도 있었으나 함경도 감사 부임 직전 청주 목사를 역임한 남구만은 관아 뜰에 절구를 놓고 솔잎 가루를 만들어 기아자에게 먹여 큰 효과를 보았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조는 전원의 소박한 삶을 그린 노래가 아니라 맹렬한 '권력비판'의 작품이라고 한다.(시인 이상국) 해가 뜨는 창인 동창이 밝았느냐는 의미는 임금의 안목과 총기가 밝아졌느냐는 의미고, 노고지리 우짖는다는 의미는 간신들이 왕에게 거짓을 고한다는 의미고, 소치는 아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미는 충직한 목민관이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의미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벼슬아치들이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벌이는 말꼬리 싸움을 언제 그치고 산적한 현안 해결에 나설 것인가를 묻는 의미다. 남구만의 시조는 숙종이 장희빈을 책봉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강릉에 유배된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다.
굶주린 엄마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아자와 걸인이 넘쳐났다. 아사자와 병사자의 동시 대량 발생이 현실이 되었다. 조선 천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신 처리가 큰 문제였다. 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륜 도덕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떠돌며 도둑질을 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이 빈번했다. 진휼소가 설치되었다. 줄을 잘못 서거나 동작이 느리면 솥을 국자로 빡빡 긁어도 국물 한 방울 없는 '국물도 없는' 사태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억만(億萬)이 진창(賑倉)에 나왔으니 엉망진창이었다.(238 페이지) 진휼곡을 빼돌리거나 진휼에 소극적인 지방 관리들이 많았다.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이 건의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휼에 쏟아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 만하지 않았다.(283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남인과 척신을 앞세워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려던 현종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302 페이지) 저자는 현종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기근 극복 과정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왔다. 측근 신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과감하게 비축곡을 풀고 세금을 감면해 민심 수습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서인들이 이상론으로 포장한 간섭을 물리쳤다. 대기근은 현종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효종 비 인선 왕후 장씨가 죽자 예송이 다시 발생했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의 일이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1차 예송에서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고 2차 예송에서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1차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2차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1674년 재위 15년만인 서른 넷의 젊은 임금 현종이 죽었다. 저자에 의하면 현종은 신하들에게 끌려만 다니고 신하들의 눈치만 본 군주가 아니었다.(309 페이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노력했다. 현실주의자로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 속에서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천 사람인 나에게 대기근 중 미수 허목의 거취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미수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신 대기근 시기는 미수가 연천으로 낙향해 세월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대기근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안은 예송논쟁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