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철은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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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매크로가 아닌 마이크로적인 사상가였다. 변화(생성)를 생각했지만 바꿈(혁명)을 생각하지 않은 사상가가 들뢰즈였다. 문제는 들뢰즈에게서 정치적인 면모를 발견하(려)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혹시 가타리에게서 읽은 바를 들뢰즈에게서 읽은 것으로 생각하는 결과는 아닐까? 고쿠분 고이치로에 의하면 들뢰즈가 특정 사상가들에 대해 서술한 내용들은 그들의 사상이지 들뢰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들뢰즈의 사상으로 읽힌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들뢰즈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자유간접화법이다. 이는 가령 “그것은 틀렸다” 같은 문장을 인용부 없이 그대로 문장 속에 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틀렸다는 문장이 마치 들뢰즈가 인용한 사상가의 것이 아닌 들뢰즈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직접 화법이 ‘그는 말했다. “틀렸다.”라고‘라면 간접 화법은 ’그는 그것은 틀렸다고 말했다.‘이고 자유 간접 화법은 ’그것은 틀렸다‘이다.


들뢰즈에게 철학연구는 대상이 되는 철학자가 그것이라고는 의식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던, 또는 다 말할 수 없었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열어젖히고 그 문제가 위치하게 되는 사유의 이미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인 바 자유간접화법의 다용(多用)은 이 사유의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도입한 방법이다.(사유의 이미지는 철학자가 스스로 사유한 것을 말로 분석해낼 때 암묵적 전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다.)


자유간접화법적 구상에서는 논하는 측과 논해지는 측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논하는 자에게 고유한 사상이 거기서부터 생기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이다. 그것에 의해 비로소 개념은 창조된다.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한다. 경험론은 주제 그 자체의 발생을 묻는다. 들뢰즈의 철학적 시도는 초월론 철학의 가능성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잃어버린 발생의 질문을 경험론 철학에 의해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려낼 수 있다.(58 페이지)


발생을 묻지 않는 초월론 철학은 최종적인 곳에서 변화의 조건에 관한 질문을 봉인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발생을 묻는 것은 변화를 묻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초월론적 경험론(발생의 관점에 주목하여 경험론에 의거하면서 초월론 철학을 재정의하는 시도)이다. 이는 초월론 철학과 경험론 철학을 종합하는 것이고 발생을 묻는 초월론 철학을 구상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하기에 발생을 묻지 않게 된다.(경험론은 주체를 구성된 것으로 파악한다.) 칸트류의 초월론 철학은 자아나 초월적인 통각(統覺)을 상정하고 있기에 비판받았다. 자아가 있어서 외계의 것을 대상화하는 작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 작용에 의해 비로소 자아가 발생한다.(64 페이지) 들뢰즈에게 초월론적인 것은 사건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특이성이라 부른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았다. 아니 매료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건의 개념에 의해 개체의 발생과 세계의 발생을 그려 보인 라이프니츠에게.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모든 것이 주어로부터 연역되는 고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의 주어(주체)가 동사(사건) 작용의 흔적으로서 있고 사건이 도래하는 그 도래 자체가 집약되어 세계를 이루는 유동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최종적으로 라이프니츠에 대해 이론(異論)을 드러냈다. 라이프니츠가 본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였기 때문으로 들뢰즈에게 라이프니츠는 호교론자였다.


들뢰즈는 무인도(無人島)의 형상에 의거하면서 타자가 없기 때문에 자아도 없는 역설적인 상태를 그려보였다.(75 페이지) 칸트가 자아를 상정하고 있었다면 프로이트는 자아의 발생을 그린다.(78 페이지) 들뢰즈에게 사유하는 것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습관은 경험에 후속하지만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을 했다. 들뢰즈가 말하는 것은 차이와 반복이다. 습관은 그러한 하나하나가 교환불가능, 치환불가능한 경험의 반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관점을 형성한다. 들뢰즈를 통해 우리는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끼게 하는 기존 질문과의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개념 창조의 기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들뢰즈의 사유의 강제성(어떤 사건에 접함으로써 사유를 하게 되는 사태)을 말하며 이를 망각함으로써 철학은 주체나 의식 등을 전제한 것이 아닌가, 란 말을 한다. 들뢰즈는 사건만을 초월론적인 요소로 인정한다.


물론 들뢰즈는 조우하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란 말을 했다. 사유는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와의 만남에 의해 발동하지만 기호는 해독되어야 한다. 습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무엇도 배울 수 없으며 우리에게 유일한 교사는 ’나와 함께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은 거짓 문제의 주위를 계속 맴돌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거짓 문제를 피하는 기술을 배우고 문제를 적절하게 제기하는 것은 빼어난 사회적, 비평적 실천이다. 들뢰즈는 ’시네마 2‘에서 운동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를 구별한 뒤 ’운동 이미지로부터 시간 이미지로‘라는 흐름을 기초로 파악하면서 주체성을 재정의한다. 시간 이미지는 영화의 등장 인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저자는 들뢰즈가 자기 철학의 한계(비정치적)를 타파하기 위해 거의 도박이라고 불러도 좋을 실천 즉 펠릭스 가타리와의 협동 작업에 뛰어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당시 가타리는 구조를 대신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었다. 구조가 일반성의 차원에 속한다면 기계는 반복의 차원에 속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사태가 반복되는 일은 없다. 가타리는 일반성의 차원을 구조에, 반복성의 차원을 기계에 분배했다. 기계는 나아가 시간, 사건의 관점에서도 특징지어진다. 구조주의는 감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현실도,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상상도 아닌 세 번째 수준 즉 상징적 수준을 다룬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금지가 실제 아버지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아버지가 안 된다고 말한다고 생각되는 것도 아닌 구조 속에서의 역할 즉 의미를 지니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시각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안 된다고 말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구조 내의 한 항이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다. 구조의 상징적 요소는 모두 위치에 의해 의미와 역할이 결정된다. 들뢰즈는 주변항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되는 어떤 항의 가치를 도출하는 작업을 미분(微分)이라 불렀다.


들뢰즈는 시니피앙(법, 규칙)과 시니피에(그 적용 대상) 사이의 불균형 - 필연적임 - 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보았다. 들뢰즈는 억압하기에 반복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와 달리 반복하기에 억압한다는 말을 했다. 이는 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원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반복이 억압을 낳는 것이라면 최초의 억압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이 원억압(기원적 억압)은 관측된 것이 아니라 결과로부터 역으로 상정된 것이다.(들뢰즈의 두 주장 즉 타자가 있기에 자아가 성립한다는 것, 결과로부터 역으로 상정된 원억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에 대해서도 유효有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원억압에 대한 의문은 신경증과 정신병의 구별에 기반을 두는 정신분석상의 태도에 변경을 요구한다. 라캉에 의하면 신경증이 원억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정신병은 원억압이 실패한 것이다. 원억압이 실패했다는 의미는 시니피앙 연쇄가 미약하다는 의미이다. 정신병 환자에게는 세계가 거대한 무의미 즉 수수께끼로서 나타난다. 신경증은 의미의 과잉이다. 정상인은 가벼운 신경증 환자이다. 원억압의 정상적 작동을 의심하는 것을 분열분석이라 한다. 들뢰즈, 가타리는 분열분석은 정신분석과 같이 신경증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증화한다는 말을 했다.


들뢰즈, 가타리는 원억압의 가설을 제거함에 의해 욕망을 팔루스의 결여로 설명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으로부터의 탈각을 꾀했다. 분열분석의 목표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는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예속을 바라는 심리를 해명하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프로이트 라캉적 정신분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을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과 접속하여 욕망 일원론의 철학의 원리를 구축한 저작인 데 비해 ’천개의 고원‘은 그 원리에 기반을 두어 권력 장치의 분석을 실로 다양한 테마 아래서 수행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음 저서로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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