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미술관 -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역사 속 명화 이야기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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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세력들이 종교 미술 작품들을 우상으로 규정, 파괴하는 광기의 시간을 이기고 오히려 회화 열풍을 일으켰다. 교회나 왕실 등 부와 권력을 손에 쥔 후원자의 주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스템에서 새로운 시장을 적극 개척한 결과이고 미술품 소비층이 교황이나 왕을 비롯한 교회와 세속의 권력층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산된 덕이다. 그림 소재가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일반 시민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물건, 풍경 등으로 바뀐 덕이기도 하다.

 

루터는 교회 미술에 관대했고 칼뱅은 교회 미술을 우상시했다.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던 네덜란드 화가들은 (주문과 무관하게) 미술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것으로 우상 파괴라는 광기로 인해 빚어진 새로운 시대에 대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성을 배제한 작품을 절박한 심정으로 개발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을 그림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럽의 첫 나라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새 고객층인 시민계급이 요구한 독자성은 소재의 독자성이다. 당시는 사진이 등장하기 전이어서 당연히 사실적 묘사가 관건이었다. 기법의 독자성이 요구된 것은 19세기 사진의 등장 이후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등록 기준과 인정 대상은 부동산에 한한다. 동산(動産)인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보다 훨씬 많은 관람자를 루브르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음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후의 만찬은 부동성을 인정받아 회화로서는 아주 드물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르네상스에 뒤이은 바로크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시민회화가 폭발적으로 꽃핀 것도 캔버스가 도입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동산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 궁정의 식객으로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다빈치는 프레스코가 아닌 세코 기법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렸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화는 작업 속도가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실제로 예배당에서 올려다보면 생동감이 넘치지만 화집에서 자세히 보면 놀랄 만큼 대담한 터치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확대해서 들여다보아도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수정이 자유로운 유화와 템페라를 합친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 프레스코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리는 그림이다. 프레스코는 공공 공간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부동산 회화에 적법한 기법이라면 유화는 사적 공간에서 감상하는 동산 회화에 적절한 기법으로 가까이에서 감상해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정밀 묘사가 요구되었다. 집단 초상화는 네덜란드 특유의 현상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렘브란트의 공방(工房)행을 명문 미대 진학을 위해 유명 입시 미술학원에 입학한 미대 입시 준비생의 공방행에 비유할 수 있다면 15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방행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일찍 돈벌이에 나선 소년 가장의 공방행에 비유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현금 대신 그림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페르메이르가 3년치 빵값을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치른 것이 대표적 사례다.

 

렘브란트가 운영했던 공방은 위작 혹은 모조 그림을 생산한 가짜 그림 생산 공장이다. 당시 네덜란드 대중은 그림을 구매할 때 이미 화가라는 브랜드를 중요한 기준으로 택했다. 렘브란트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화가 브랜드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 화가였다.

 

자화상은 네덜란드 회화의 본질을 대변하는 특별한 양식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미술은 신과 성인을 그렸으며 궁정미술은 왕과 귀족을 그렸다. 그에 반해 17세기 네덜란드 시민 회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림으로써 대중이 시선을 집중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삶의 현장 즉 현실이라는 점을 일깨웠다.

 

평생 거울을 가장 자주 들여다본 화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렘브란트일 것이다. 그가 14년 동안 그린 자화상은 유화, 판화, 소묘를 망라해 무려 100여점에 달했다. 교회가 이자 금지령을 공표한 시기는 1179년이다. 당대 기독교는 무엇을 근거로 이자를 금지했을까? 레위기 25장 35 - 37절이다. 메디치 가문은 성경이 말한 이자에 대한 금기를 깨고 금융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구었다.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는 로마 교황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바치고 죄를 묻지 않겠다는 허가권을 얻어냈다.

 

로마 교황청과 교회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당대 회화에도 뚜렷이 반영되었다. 메디치 가문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이자를 이자로 보이지 않게 하는 공작’은 은행업의 모태인 환전을 교묘하게 발전시킨 수법이었다. 환전은 무거운 화폐 대신 간단한 서류를 지참하고 현지 환전상에 가서 현금화하는 시스템이다. 참된 부는 천국 곳간에 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었는데 교리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부정하면서도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교황청만큼 막대한 화폐 수입을 얻고 복잡한 재무 관리를 필요로 하는 기관은 없었다.

 

메디치가는 교황청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 코시모는 이자로 재산을 불린 파렴치한 금융업자라는 양심의 가책과 사후 영혼의 안식 문제로 두려워 하며 불안함을 덜어내고자 몸부림쳤다. 코시모가 교황에게 연줄을 대고 주기적으로 알현한 것도, 메디치 가문이 예술 지원 사업에 온 힘을 쏟은 것도 불안감을 덜어내고 영혼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절실한 바람에서 나온 행위였다. 미술사에서 17세기 네덜란드와 프랑스 미술은 똑같이 바로크 미술로 분류된다. 그러나 실제로 둘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으로 대표되는 시민 회화를 탄생시켰다. 프랑스는 짐은 곧 국가라는 말로 알려진 루이 14세의 초상화로 대표되는 왕실 미술이 주도했다.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측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론에 최고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미술에 학술로서의 권위를 부여해 체계를 갖춤으로써 전통 도제식 교육에 의존해온 길드에 대한 학술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은 새로 탄생한 아카데미가 시급히 완수해야 할 임무였다.

 

루이 14세는 아카데미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카데미는 플라톤이 아테네 교외의 성스러운 숲인 아카데모스에서 개설한 학원에서 비롯되었다. 국무장관 콜베르는 신하와 백성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군사력과 더불어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문화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간파했다. 콜베르의 일사불란한 지휘에 따라 왕실 미술은 태양왕을 자칭한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대신해 지상을 채우는 왕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장치로 화려하고 호화로운 문화력을 발휘해나갔다.

 

종교개혁 이전 왕의 권한은 교황의 중개로 신에게서 부여받은 권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함에 따라 왕들은 자신의 왕권은 신에게 직접 받은 신성한 권력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고 신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조합이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조직인데 비해 중세 길드 조합은 일을 시키는 사람 즉 스승(우두머리 장인)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당시 기도하는 사람(성직자)와 싸우는 사람(귀족)의 이중 지배를 받던 평민 노동자들은 각각의 업종에 속한 길드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각종 직업 행위에는 길드의 허가가 필요했다. 길드의 규약이 정한 몇 년의 수업을 마친 도제는 스승의 허가를 받기 위해 일종의 졸업 작품을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스승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출하는 작품을 마스터피스라 했다. 길드는 스승의 허가 없이 왕실 허가장만으로 개업하는 화공의 활동을 제한하게 해달라고 왕실에 정식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재위 기간에 펼친 예술진흥책의 중심축이 1803년 창립된 나폴레옹 미술관 즉 루브르 미술관이다. 나폴레옹이 군대를 파견한 이탈리아, 이집트,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스페인의 미술품과 출토품이 속속 루브르 미술관으로 들어와 수장고를 채웠다. 민중의 반발을 무릅쓰고 포도주세를 부활시킨 나폴레옹. 이미지로 통치하던 그의 정권을 뒷받침한 유일한 무기는 미술이었다. 하지만 미술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는 폴 뒤랑뤼엘이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상주의 그림을 부르는 게 값인 고가상품으로 변신시킨 것들이다. 미술상인 그는 악취미에 근본 없는 인테리어로 여겨지던 카브리올(‘비약; 飛躍‘을 의미) 레그와 금테 액자 조합을 역이용해 명품으로 변신시켰다.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는 구시대 루이 왕조의 궁정 취향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가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고집을 꺾고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순한 디자인 액자에 그림을 넣어 전시했다.

 

이 시기에는 어떤 액자에 넣어도 인상주의 회화는 꼭 사겠다는 고객이 넘쳐날 정도였기에 금테 액자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폴 뒤랑뤼엘의 판매 전략은 귀족 취미와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귀족 기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판촉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폴 뒤랑뤼엘은 비평가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자비로 인쇄 매체를 출간하고 화가의 브랜드화에 매진한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그가 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에 도전한 것은 저널리즘이 브랜드 제조 장치임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자크는 이제 비평은 비평가를 먹여살릴 뿐이라는 말을 했다. 시민이 미술 시장의 고객이 된 근대 이전에는 제삼자인 비평가의 조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회화와 조각의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사회, 그리고 교회의 주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문자의 의향에 따라 정해지는 주문 제작 방식은 미술품의 본질에 관해서 비평가라는 제삼자가 관여할 여지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기성 미술품을 전시 판매하는 시민 시장에서의 판매 역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품의 품질과 구매 여부 판단이 물건을 사는 사람 즉 고객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객의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비평가라는 바람잡이 즉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부추기는 새로운 시대의 직업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나 왕의 구체적인 주문을 받고 미술품을 생산하던 시대의 예술가들이 교회와 세속의 강력한 권력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일에 동원되고 부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대 예술가들이 권력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되어 수동적 또는 기계적으로 미술품을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나 조각품 등 미술품에 투영되는 예술가의 욕망은 교황이나 왕 등 권력자의 욕망 못지 않게 크고 강렬했다. 아니 더 크고 강렬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그들의 욕망은 자기 손으로 최고의 걸작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 그럼으로써 미술사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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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08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2-05-08 18:00   좋아요 1 | URL
앗. 네 감사합니다... 좋은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