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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중력이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최신작인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를 완독하고 13, 000자의 서평을 썼다. 서평이라기보다 요약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 내 관점에 따라 정리한 글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내가 읽은 카를로 로벨리의 6번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과학, 물리학, 철학은 물론 칸트,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 등 개별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주문할 것이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화이트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을 읽어야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로벨리의 최고의 책이 아닌가 싶다.

 

카를로 로벨리는 흥미롭게도 관계는 신학(神學)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고립적이지 않은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수학이나 예술처럼 우리는 과거의 축적된 유산을 바탕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유클리드, 알콰리즈미(페르시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진구소(秦九韶; 친지샤오; 중국 남송 시대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기상학자, 정치가), 가우스 뿐 아니라 사포(고대 그리스의 시인), 무라카미 시키부(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 소설가, 시인), 제니스 조플린(미국의 록 가수)의 유산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제니스 조플린이다. 록 음악, 특히 로벨리와 같은 국적의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을 오랜만에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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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근대 개발 시대에 중요한 통찰력을 주었고, 불교는 문명의 위기와 맞물려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지향점과 방법론이 다르겠지만 종교적 깊이, 인문학적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불교와 양자역학], [양자역학과 불교] 등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때만 해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은 불교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존 폴킹혼, 러셀 스태나드 등을 통해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논의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자이자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나드는 양자역학의 '빛과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기독교의 '예수의 신성·인성 이중성(기독론)' 및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한 바 있지요. 물론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불교가 양자역학과 훨씬 더 근본적인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평가하는 반면, 기독교는 양자역학을 통해 교리의 모순을 방증하거나 비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 그리고 그 물리학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겠지요. 덧붙여 잘 모르지만 불교 성직자들은 이상한 정치적 언행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기독교는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기독교 책이 잘 선택되지 않고, 불교 책이 잘 선택되는 한 요인이겠지요. 저도 기독교인인데 기독교 설교는 수천년 전에 쓰인 경전을 현대적 맥락하에서 어떻게 살려서 가르치고 갈 길을 제시할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약간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 교회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쓰신 모 기독교 전문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전개하는 것에는 예리한 구성력을 보이시는 등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셨지만 결론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참 소략한 말씀이었습니다. 큰 상찬을 받은 논문인데도 참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다 된다는 상황이라면 답은 명확하고, 할 바는 별로 없어 그것을 책으로 낼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최근에 안 바이지만 질그릇 이론이 있더라고요.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고 그 손에 붙잡아 쓰시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그런 그릇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행동이 성경적이어서 지지하고 그를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성이 같아 그를 하나님이 흠이 있어도 쓰신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향이 보인다고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삿되고 무도한 그릇은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적당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경향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보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수전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해석하기 어려우면 놓아 두어야 할 텐데 굳이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현실을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으로 설익은 결론을 내고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인사들이 기독교 책을 읽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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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18일 아이슬란드 오크예퀴들(Okjökull) 빙하 장례식이 열렸다. 녹아 사라진 얼음 조각을 애도하는 자리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후변화로 인해 소멸한 자연을 향해 치러진 공식 장례식이자 전 세계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다. 과학적으로 빙하는 자체 무게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두께(약 40~50m 이상)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크예퀴들은 2014년 이미 자격을 잃고 '사망 판정'을 받았다.

 

"오크(Ok)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빙하의 지위를 잃은 빙하입니다. 앞으로 200년 동안 우리의 모든 빙하가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기념비는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알고 있음을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행동했는지 여부는 오직 당신(미래 세대)만이 알 것입니다."

 

오크예퀴들 빙하 추모비에 새겨진 이 '미래로 보내는 편지'의 추모 글을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 환경운동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Andri Snær Magnason; 1973 - )이다. 작가는 오크예퀴들 장례식 이후인 2019년에 나온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2014년 어느 날 아이슬란드의 한 빙하가 사라졌다.”고 썼다.

 

마그나손은 ”우리는 신문에서 빙하 해빙, 기록적 고온, 해수 산성화, 배출가스 증가 같은 머리기사 제목을 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여긴다. 과학자들이 옳다면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 심각하다. 우리가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이 단어들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 의미들의 99퍼센트는 백색잡음으로 흩어져버린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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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warming이 아니라 글로벌 heating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현재 지구의 온도 상승 속도는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지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하게 빠르다. 가속 가열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지금의 기온 상승이 인간 때문이 아니라 태양 활동, 화산, 지구 자전축 변화 등 자연적 요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적 요인만으로는 지금의 폭발적인 온도 상승 속도를 절대 설명할 수 없다. 만일 산업화 이후 인류가 지금과 다르게 마구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순환형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수준을 유지함에 따라 폭염, 한파, 초대형 태풍 같은 극단적인 이상 기후가 일상화되지 않고 예측 가능한 계절의 변화가 유지되었을 것이다. 석탄, 석유 대신 수력, 풍력, 조력, 초기 형태의 태양광 기술이 19세기부터 집중 연구되었을 것이다. 가뭄과 홍수로 인한 식량 위기가 적어 전 세계적인 기아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덜했을 것이다. 거주지가 사막화되거나 침수되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수천만 명의 기후 난민이 발생하지 않아 국제 사회의 사회적 비용과 갈등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화석연료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축복이자 문명의 존립을 흔드는 저주였다고 할 수 있다.

1) 전 세계에서 화석연료 연소 및 산업 공정으로 인해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나라는 중국, 미국, 인도 순이다. 2) 누적 순위는 미국, 유럽연합, 중국 순이다. 3) 국민 1인당 배출량을 기준으로 하면 미국, 호주, 대한민국, 사우디아라비아 순이다.

 

우리나라는 기후 빌런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1) 재생에너지 비중이 9~10% 수준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꼴찌 기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2) 전력 생산의 60~70% 이상을 여전히 석탄화력발전과 액화천연가스(LNG)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고, 3) 철강(포스코), 반도체·전자(삼성) 등 탄소를 다량으로 배출하는 중화학 공업과 제조업이 국가 경제의 뼈대를 이루고 있어 단기간에 탄소를 줄이는 것이 매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고, 4) 개발도상국의 기후 변화 대응을 돕는 기금(기후 재원) 분담이나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설정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억울한 점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설령 넷 제로(탄소중립)에 성공하더라도 다른 나라들이 탄소를 계속 배출한다면 우리는 기후 변화로 인한 타격을 거의 그대로 입게 된다. 대기는 국경 없이 전 지구를 하나로 순환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의 약 1.3~1.6% 수준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고가 난 네팔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극히 미미하지만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네팔은 기후 불평등으로 인한 대표적 희생국이다. 얼마 전 한 탐방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미국, 중국 등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는 관심이 없고 패권주의적 경향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세계가 암울하다고 하자 탐방객은 (선호하는) 미국을 (“빨갱이 나라”) 중국과 함께 논하는 것이 불편했던지 화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70대 여성 탐방객이 지지하는 트氏는 기후 위기를 사기라고 부르며 전면 부정하는 확고한 기후 변화 회의론자다. 마이클 마니아티스의 [분리수거에 진심인데 왜 지구는 뜨거워질까?]란 책이 나왔다.

 

글로벌 기후 연구 기관인 카본 메이저스(Carbon Majors)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파리협정 이후 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80%가 단 57개의 화석연료 및 시멘트 기업에 의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전 세계에서 분리수거된 플라스틱 중 플라스틱 제품으로 재활용되는 비율은 9~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기술적·경제적 이유로 매립되거나 소각로에서 불타며 엄청난 탄소를 뿜어낸다. 1970년대 미국의 대형 석유화학 기업들은 플라스틱 규제를 피하기 위해 재활용 마크를 만들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플라스틱은 죄가 없다,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 한 소비자의 잘못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워 쓰레기 처리 비용과 도덕적 죄책감을 고스란히 개인과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긴 것이다.

 

요즘 많이 떠도는 말이 화성 또는 달 테라포밍이다. 아메데오 발비 같은 천체물리학자가 지적하듯 테라포밍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위험하고 비용이 너무 들어가는 일이다. 전 세계의 넷 제로(Net-Zero)를 달성하는 것이 화성 테라포밍보다 압도적으로 쉽고, 비용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게 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환경 보호 캠페인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뼈대를 바꾸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다. 이번 빙하 붕괴에 의한 히말라야 대홍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의 추세는 비관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Exodus가 난망한 거대한 늪에 빠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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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브레인이란 용어가 있다. 프라이팬에서 톡톡 터지는 옥수수처럼 빠르고 강렬한 디지털 자극에만 뇌가 반응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컴퓨터 학자 데이비드 레비(David M. Levy) 교수가 스마트폰과 디지털 멀티태스킹에 중독된 현대인의 뇌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비공식 용어다. 


책을 오래 읽어왔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팝콘 브레인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물론 팝콘 브레인 상태를 면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리라. 긴 호흡의 글, 양질의 글을 계속 꾸준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글에 공감하고 익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전이(轉移)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란 과거 부모나 주(主)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정, 기대, 관계 패턴을 현재의 다른 대상에게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내 입장에서 전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글, 깊은 서사를 가진 긴 호흡의 양질의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안정감을 다시 경험하(려)는 것일 수 있다. 글은 나를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깊은 존재감으로 나를 맞아주는 안전한 대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학사에서 나온 내러티브 총서(叢書) 2번 [일꾼과 이야기꾼; 서사적 주체]에 나오는 장태순 교수의 진단을 접하고나서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해 박사가 된 장태순은 좁은 의미의 전이는 정신분석이라는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전이는 우리가 이야기를 교환하는 모든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질(地質) 공부에서도 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지질학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의 역사와 비밀을 과학적으로 추적하는 학문이다. 이는 정신분석가가 환자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무의식의 억압된 상처를 파헤치는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자신의 자전적 회고록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자신의 사상적 뿌리이자 평생의 세 가지 뮤즈(Three Mistresses)로 지질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꼽은 것이 기억난다. 이 학문들은 표면 아래의 거대 심층 구조와 역사를 파헤쳐 본질을 규명하는 학문들이다. 


레비스트로스는 20대 초반에 지질학을 독학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지평선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 이 바위는 여기에 있고, 저 골짜기는 왜 깎여 나갔는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흔적과 법칙을 읽어냈다. 이는 정신분석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 역시 환자가 겉으로 횡설수설하는 말(표면)을 넘어, 그 아래 도사린 무의식의 지층(본질)을 분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사회의 화려한 이데올로기 뒤에 숨은 경제적 하부구조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지질학 공부가 전이의 한 형태가 아닐까?란 생각을 한 것은 스콧 솔로몬의 [비커밍 마션]을 만나고서다. 본문에 지진해일이 남긴 퇴적층이란 말이 나온다. 영어로는 Tsunami deposit라고 한다.(모쿠다이 구니야스는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에서 쓰나마이트란 말을 썼다.) 


쓰나마이트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활발하다. 눈앞의 뒤틀린 지층(표면)을 보고 쓰나미의 흔적이라고 단정 짓고 싶은 열망과, 단순한 폭풍우의 흔적일지 모르니 철저하게 의심해야 한다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구별의 요령은 있다. 쓰나미로 인해 만들어진 지층은 파도의 파장(길이)이 수십~수백km에 달해 에너지가 줄지 않고 해안선에서 수km 내륙 깊숙한 곳까지 모래를 밀고 들어간다. 지형의 굴곡을 그대로 따라 부드럽게 덮듯이 쌓이는 경향이 있다. 폭풍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층은 파장의 한계 때문에 아무리 강한 태풍이라도 해안가에서 보통 300m 이내까지만 퇴적물을 남긴다. 언덕 같은 거대 지형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막혀 쌓인다. 


쓰나미는 워낙 유속이 빠르고 강력해서 내륙이나 갯벌을 통째로 뜯어내며 전진한다. 이때 부서진 진흙 덩어리(진흙 포획암)가 모래층 사이에 그대로 박힌 채 굳어버린다. 폭풍의 경우 오랜 시간 서서히 물이 차오르고 빠지기 때문에 진흙처럼 약한 덩어리들은 파도에 반복해서 씻기며 다 녹아버리므로 진흙 덩어리가 거의 없다. 이런 단서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은 심층을 파헤치는 것이고 전이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쿠다이 구니야스는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은 내가 지질 해설사가 된 첫 해인 2020년에 나온 책이고 바로 사서 읽은 책이다. 6년이 지난 지금 보니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느껴진다. 단 [비커밍 마션]을 읽은 후에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탈(脫) 지구 및 화성(火星) 안착을 논한 책이다. 아무리 지질학이 전이의 대상이어도 위기에 처했다면 떠나야 한다는 말에 저자는 어떤 말을 할까? 성공한다면 화성이 새로운 전이의 대상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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