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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란 무엇인가? 먼저 태어나 오래도록 살아 남으면 어른이 되고 선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벼슬이고 자랑인가? 본인이 잘 나서 먼저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나이 많음을 남을 가르치고 자신과 관계 없는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권력으로 여기는 것 같다.

 

"박**이는 계집애도 아니고 뭐야?" 얼마전 나이든 남자들이 나에 대해 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분명 여자를 가르치려 들고 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이 기준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미덕을 가진 여성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과 두루 잘 지내며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등의 말을 아끼지 않는 내 모습을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여성들이 불편해 하는 성적인 말을 불편해 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의 말에도 귀기울이는 내 모습을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여성적 가치관을 동경하지만 외모나 목소리로 그런 주의(主義)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진심어린 태도다. 지인 박 샘은 "좋은 말이네요"라고 했다. 맞다. 하지만 내가 불편해 하는 것은 자신의 주제를 아랑곳 하지 않는 자들의 오지랖이고 계집애란 말에 깃든 여성 차별적 인식이다.

 

뒤틀리고 꼬인 의식의 산물인 그들의 말을 번역기에 넣어 여과하면 박**은 여성에게 유연하고 소탈하고 겸허한 사람이란 말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대화 상대로 여기는 나를, 당당하고 사려 깊은 여성에게서 배우고 공감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나를 아는 것 같다.

 

문명화될수록 남성은 여성화하고 여성은 남성화한다는 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말을 음미한다. 화낼 일도 아니고 어이없어 할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그들이 감사의 대상은 아니다. 이래저래 세상은 재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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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곡의 결혼행진곡을 듣는다. 바그너의 것(로엔그린이란 오페라에 나오는)과 멘델스존의 것(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이다.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은 신부가 입장할 때 울려퍼지고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울려퍼진다. 사실 바그너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브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그너 음악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브람스 음악 애호가인 것과 별개로 바그너 음악을 듣지 않는다. 어떻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음악이 결혼식장에서 나란히 울려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그너는 멘델스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만큼 브람스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브람스는 교향곡 3번 2악장에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그너의 유도동기(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를 담았다. 이를 지휘자이자 음악 교육자인 존 마우체리는 브람스가 적이 아닌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며 차분하게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바그너의 대단한 성취를 기리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렇듯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존 마우체리의 ‘클래식의 발견’은 참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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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나 과제 마감에 쫓기는 중에 관련 없는 책을 읽고 서평까지 쓰려는 이상한 버릇이 또 나타나고 있다. 바쁜 중에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서평까지 쓰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듯 하다. 읽다 보면 쓰지 않을 수 없지만 읽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황 없을 때에는 자제해야 할 욕심이다. (서평을) 쓰고 싶은 책은 며칠만에 다 읽은 정승연의 ’세미나책‘이다.

 

과제 마치면 책만 읽게 될 시간들이 올 것이라 믿지만 어긋난다. 다른 과제, 다른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알라딘에서 내 리뷰를 읽고 구매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보낸 thanks to link를 두 건 받았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문 쓰기의 기술‘, 니시나리 카츠히로의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등이다. 책 값의 1%에 해당하는 120원, 150원을 각각 받은 것이지만 기분 문제다.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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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이문 교수는 “과장된 평가로 이미 나이 든 나를 빠리로 유혹하고 논문 지도교수와 그곳 작가들을 소개해주고 고통스럽지만 보람있는 지적 방랑의 길로 이끌어주셨던 교수 겸 문학평론가 故 R. M. Alberes 선생님을 생각하면서”라는 말을 했다. 나는 스스로 과한 평가로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나 자신을 끌고 올라가는 것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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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용암을 출발해 백의리층을 향해 가는 중에 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 모 숲해설 교육기관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 서울의 최 **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요? 란 말을 하고 말았다.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고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통화 후 나를 돌아보니 지난 1년 사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 몇을 차단하는 데에 참 과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머뭇거리기 잘하고 정 많은 내 성향을 감안하면 스스로도 의외다 싶을 정도다. 내가 차단한 세 사람은 필요할 때만 전화하거나 겉과 속이 다르게 나를 이용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나는 그럴 만해 그들을 차단하고 친구목록에서 잘라냈지만 그런 일이 몇 건 일어나다 보니 내가 지나치게 빡빡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난감함이 든다는 점이다. 아직 사회화가 덜 되어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욕심과 안하무인적 태도로 덕(德)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을 몹시 경멸한다.

 

내가 연천의 비기독교 신자 지질해설사 가운데 최고로 깨끗한 분이라고 하신 한 선생님은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정치인들만이 부도덕하고 탐욕스런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 가운데서도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꽤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에 맞게 점점 더 사람을 속이고 남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길 사람들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을 읊조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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