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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아 드 람의 [중력이라는 아름다움]의 원제는 추락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The Beauty of Falling]이다. 저자가 말하는 바는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Falling)이야말로 결국 새로운 발견과 도약의 발판이 된다는 중의적인 위로 차원의 말이다. 우리는 흔히 '떨어지는 것(Falling)'을 실패나 두려움, 위험과 연결 짓지만 지구가 잡아당기는 힘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떨어지는 그 순간의 '무중력 상태'와 자유로움에 집중하며 추락 그 자체가 가진 순수한 아름다움을 느껴보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주비행사 후보에서 탈락한 개인적 좌절은 물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조차 블랙홀 같은 한계점에서는 무너진다는 과학적 사실을 언급한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 대부분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고민하는 것은 일반 상대성이론이 실패할지,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가 아니라 그 다음에 등장할 이론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AI에 물어보니 세 가지를 든다. 1) 루프양자중력이론, 2) 끈이론, 3) 질량이 있는 중력자(重力子) 이론이다.

 

클라우디아 드 람은 질량이 있는 중력자 이론 연구자다. 물리 자체가 쉽지 않은 분야인데 일반 상대성이론 다음의 이론이라니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지난 15일 루프양자중력이론을 연구하는 카를로 로벨리가 쓴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를 읽고 쓴 글자 수만 10000자인 내 서평을 읽고 구매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thanks to 버튼을 눌러 책 값의 1%에 해당하는 180원이 서평 작성자인 내게 적립된 이래 오늘 같은 책을 읽은 또 다른 분이 thanks to 버튼을 눌러 180원이 적립 되었다.

 

10000자나 되는 서평이고, 가장 앞서가는 물리학 분야의 책을 일주일 사이에 두 사람이나 구매하며 서평자인 내게 thanks to 버튼을 누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클라우디아 드 람의 책을 읽은 후 구입해 둔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읽게 될 것이다. 올해는 물리학 책을 많이 읽은 해로 기록될 것이다. 어려운 부분은 다시 생각하고, 다른 책이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알고자 한다.

 

올해 읽은 물리학 책 중 리언 레더먼과 크리스토퍼 힐의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을 빼놓을 수 없다. E=mc²은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라는 뜻이 아니라 멈추어 있고 질량이 m인 입자는 E=mc²을 만족시키는 에너지 E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는 글이 본문에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유도한 공식의 진짜 이름은 정지 에너지 공식으로 만일 두 개념이 완전히 같은 뜻(등가)이라면 질량이 없는 곳에는 에너지도 없어야 하는데 빛(광자)은 질량이 0이지만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두 저자의 설명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운동량과 위치의 관계만으로 생각하다가 시간과 에너지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 한쪽이 정밀해지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불확정해지는 두 물리량의 쌍을 양자역학에서는 정규 공액 변수(Canonical conjugate variables)라고 한다고 한다.

 

레로이 W. 두벡(Leroy W. Dubeck) 교수가 [과학, 영화와 만나다]에서 한 다음의 말도 새롭게 다가온 부분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미래로부터 추가의 물질이 갑자기 과거로 더해지기 때문에 에너지 보존에 위배된다. 과거가 물질의 형태로 에너지를 얻으면 미래는 그만큼 에너지를 잃는다. 간단히 말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과 논리의 지식에 근거하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불가능함을 예로 들 때 할아버지의 역설 같은 인과율의 오류를 들지만 우주 전체의 질량과 에너지의 총량이 변한다는 물리법칙을 예로 든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 알게 된 디랙의 바다(Dirac sea)라는 개념도 흥미롭다. 디랙의 바다는 1930년 폴 디랙(Paul Dirac)이 이론으로 우주의 진공 상태가 사실은 음(-)의 에너지 상태를 가진 전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가설이다. 이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서 반물질(Antimatter)의 존재를 예측하고 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리학자 마이클 길렌의 [믿음 없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빼놓을 수 없다. 파란곡절의 여정을 거쳐 무신론자였던 저자가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과학으로 신앙을 해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인 책이다. 클라우디아 드 람의 [중력이라는 아름다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휘어진 실재를 따로 가로지르는 직선은 항상 가장 직접적인 경로다. 행성의 관점에서 보나, 지구에 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보나 태양계를 자유롭게 항해하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직선 경로를 따라 멈추지도 미끄러지지도 방향을 바꾸지도 않은 채 곧장 나아간다. 태양계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이 행성에 태어난 순간부터 곡선 공간 속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이 휘어진 공간 속의 직선 하나뿐이다.”

 

단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개인 차원의 공부이지만 물리학 책들, 지구과학 책들, 철학 책들을 읽는 지금의 내 움직임을 휘어진 공간 속의 직선을 묵묵히 걷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물리학이라는 거대한 지성(질량)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왜곡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난해하고 고독한 곡선으로 보일지라도 지적 호기심을 따르는 이 길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가장 저항이 적고 자연스러운 나만의 직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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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의 저자 쥘리앙 보브로프는 흔히 물리학자들이 거만한 눈으로 동료 화학자들을 대하는 것은 아마도 두 학문이 지닌 역사적 기원의 차이에서 기인한 현상일 것이라 말한다. 보브로프의 말은 갈릴레이, 뉴턴과 함께 탄생한 물리학은 세계에 대한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을 제시했지만 화학은 연금술사 덕분에 여러 의식(儀式)으로 가득한 마법 세계에서 첫 발을 떼었던 역사적 차이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그런데 양자 물리학이 탄생한 이후 원자와 전자의 행동을 물리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화학적 결합과 반응도 물리학의 법칙 안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복잡한 현상이나 개념을 그것을 이루는 더 단순한 하위 요소나 근본적인 법칙으로 쪼개어 설명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가 문제인데 양자역학을 통해 화학을 설명해 낸 것은 하위 요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상위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의 가장 아름답고 성공적인 사례(긍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양자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전자야말로 빛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리언 레더먼과 크리스토퍼 힐은 [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에서 전자는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며 입자이면서 파동이라 말했다. 그들에 의하면 전자는 무언가 새로운 것, 양자(量子) 상태다. 전자가 양자 상태(Quantum State)라는 말은 전자를 단순히 입자다 또는 파동이다 같은 이분법적 틀로 대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공존하는 미시 세계 고유의 완전히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관측하기 전에는 파동처럼 퍼져 있는 확률로 존재하다가 관측하는 순간 입자처럼 특정한 위치에 모습을 드러내는 양자역학의 신비로움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을까], [한 권으로 충분한 시간론],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등은 최근 내가 읽은 물리학 책의 목록이다. 나에게 전자를 주제로 한 책은 없다. 다만 아직 읽지 못한 일본의 이학 박사 사이토 가쓰히로의 [한 권으로 이해하는 원자 소립자 양자의 세계]란 책이 있다. 


최근 일본의 물리학 석사, 공학 박사 에마 가즈히로의 [전자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 물질·양자·생명을 움직이는 작은 입자]란 책이 출간되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목차만으로도 관심을 끈다. 제1장 전자는 자연계에서 ‘가장 작은 부품’, 제2장 전자의 베일이 걷히면서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제3장 전자가 보여주는 양자역학적 운동, 제4장 화학에서도 주인공은 전자, 제5장 금속, 절연체, 반도체, 그리고 초전도체, 제6장 생물 몸속에서도 대활약하는 전자 등이다. 양자, 생명 등의 키워드가 눈길을 끈다. 제4장 화학에서도 주인공은 전자는 앞서 예시한 쥘리앙 보브로프의 말을 뒷받침한다. 


분자생물학자 찰스 코켈은 [생명의 물리학]에서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원자에 전자를 하나씩 추가하면서 입자의 종류를 늘릴 수 없다. 전자는 자신과 똑같은 다른 전자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은 일란성 쌍둥이를 생일 잔치에서 나란히 앉히는 것과 비슷하다. 쌍둥이들은 비교당하는 것을 싫어하며 친구들에게 독자적 존재로 대접받고 싶어 한다. 따라서 무작정 전자 옆에 전자를 쌓을 수는 없다. 전자 또는 모든 페르미온이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이 원리를 파울리의 배타 원리라고 부른다....그렇다면 원자 안에 나란히 있는 두 전자가 서로 똑같지 않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성질 중 하나는 전자의 스핀이다. 전자의 스핀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 둘은 다르다. 쌍둥이에게 자신을 개인으로 느낄 수 있는 특징이 있는 것처럼 두 원자는 이제 파울리의 원리를 따를 수 있다...”


[전자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원자와 양자역학부터 화학 결합, 금속과 반도체, 초전도체, 생명 현상까지 따로 배웠던 과학 지식이 전자라는 하나의 열쇠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기대가 크다.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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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중력이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최신작인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를 완독하고 13, 000자의 서평을 썼다. 서평이라기보다 요약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 내 관점에 따라 정리한 글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내가 읽은 카를로 로벨리의 6번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과학, 물리학, 철학은 물론 칸트,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 등 개별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주문할 것이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화이트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을 읽어야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가 로벨리의 최고의 책이 아닌가 싶다.

 

카를로 로벨리는 흥미롭게도 관계는 신학(神學)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고립적이지 않은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수학이나 예술처럼 우리는 과거의 축적된 유산을 바탕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유클리드, 알콰리즈미(페르시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진구소(秦九韶; 친지샤오; 중국 남송 시대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기상학자, 정치가), 가우스 뿐 아니라 사포(고대 그리스의 시인), 무라카미 시키부(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 소설가, 시인), 제니스 조플린(미국의 록 가수)의 유산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제니스 조플린이다. 록 음악, 특히 로벨리와 같은 국적의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을 오랜만에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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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근대 개발 시대에 중요한 통찰력을 주었고, 불교는 문명의 위기와 맞물려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지향점과 방법론이 다르겠지만 종교적 깊이, 인문학적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불교와 양자역학], [양자역학과 불교] 등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때만 해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은 불교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존 폴킹혼, 러셀 스태나드 등을 통해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논의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자이자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나드는 양자역학의 '빛과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기독교의 '예수의 신성·인성 이중성(기독론)' 및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한 바 있지요. 물론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불교가 양자역학과 훨씬 더 근본적인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평가하는 반면, 기독교는 양자역학을 통해 교리의 모순을 방증하거나 비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 그리고 그 물리학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겠지요. 덧붙여 잘 모르지만 불교 성직자들은 이상한 정치적 언행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기독교는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기독교 책이 잘 선택되지 않고, 불교 책이 잘 선택되는 한 요인이겠지요. 저도 기독교인인데 기독교 설교는 수천년 전에 쓰인 경전을 현대적 맥락하에서 어떻게 살려서 가르치고 갈 길을 제시할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약간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 교회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쓰신 모 기독교 전문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전개하는 것에는 예리한 구성력을 보이시는 등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셨지만 결론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참 소략한 말씀이었습니다. 큰 상찬을 받은 논문인데도 참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다 된다는 상황이라면 답은 명확하고, 할 바는 별로 없어 그것을 책으로 낼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최근에 안 바이지만 질그릇 이론이 있더라고요.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고 그 손에 붙잡아 쓰시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그런 그릇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행동이 성경적이어서 지지하고 그를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성이 같아 그를 하나님이 흠이 있어도 쓰신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향이 보인다고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삿되고 무도한 그릇은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적당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경향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보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수전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해석하기 어려우면 놓아 두어야 할 텐데 굳이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현실을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으로 설익은 결론을 내고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인사들이 기독교 책을 읽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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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18일 아이슬란드 오크예퀴들(Okjökull) 빙하 장례식이 열렸다. 녹아 사라진 얼음 조각을 애도하는 자리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후변화로 인해 소멸한 자연을 향해 치러진 공식 장례식이자 전 세계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다. 과학적으로 빙하는 자체 무게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두께(약 40~50m 이상)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크예퀴들은 2014년 이미 자격을 잃고 '사망 판정'을 받았다.

 

"오크(Ok)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빙하의 지위를 잃은 빙하입니다. 앞으로 200년 동안 우리의 모든 빙하가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기념비는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알고 있음을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행동했는지 여부는 오직 당신(미래 세대)만이 알 것입니다."

 

오크예퀴들 빙하 추모비에 새겨진 이 '미래로 보내는 편지'의 추모 글을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 환경운동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Andri Snær Magnason; 1973 - )이다. 작가는 오크예퀴들 장례식 이후인 2019년에 나온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2014년 어느 날 아이슬란드의 한 빙하가 사라졌다.”고 썼다.

 

마그나손은 ”우리는 신문에서 빙하 해빙, 기록적 고온, 해수 산성화, 배출가스 증가 같은 머리기사 제목을 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여긴다. 과학자들이 옳다면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 심각하다. 우리가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이 단어들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 의미들의 99퍼센트는 백색잡음으로 흩어져버린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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