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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해설을 할 때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고 지금도 그런 편인 말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의미의 천원지방(天源地方)이란 말이다. 그러다가 '동의보감'에 사람의 머리는 둥글고 발은 네모나다는 의미의 천원지방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사람이란 말을 했지만 발이 땅을 향해 있는 것은 모든 동물의 고유성이지만 머리를 하늘로 향해 둔 것은 사람 외에는 없을 것이니 천원지방을 방향과 관련해 사람의 형태를 수식하는 말로 써도 무방하리라. 즉 사람의 머리는 둥근 하늘을 향해 있고 발은 네모난 땅을 향해 있다는 뜻이란 말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궁궐 외의 분야에서도 천원지방이란 말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태()라는 글자도 주역의 지천태괘(地天泰卦) 외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물론 나는 주역에서 만나는 태라는 글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기는커녕 좋아하는 주역 괘 중 하나다. 어떻든 주역 외에서 태라는 글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심장과 신장의 기운이 막혔을 때 교태환(交泰丸)을 처방한다. 교태환의 교태는 교태전(交泰殿)의 교태처럼 주역이 출처다. 중요한 사실은 태()란 글자가 소통하다, 뚫어주다 등을 뜻한다는 점이다.

 

내 이름에도 태가 있다. 그러면 그런 나는 소통과 해결의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까? 하늘을 상징하는 가벼(워서 위로 향하는)운 건괘가 아래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무거(워서 아래로 향하는)운 곤괘가 위에 있어 소통한다(만난다)는 지천태괘가 상징이듯 내 이름 가운데 글자인 태 역시 상징일까? 나는 태()란 글자를 좋아한다. 위축되고 지쳤지만 아니 그렇기에 이름 값을 하도록 나를 이끄는 태란 글자가 좋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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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로널드 롤하이저는 '()과 성()의 영성(靈性)'에서 스러움을 사랑의 광기에 비유했다. 이 사실을 언급하며 신학자 김화영 교수는 영성(靈性)의 과제는 에로스의 생명력을 통합과 균형을 통해 아가페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설명했다.('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170 페이지)

 

16세기 가르멜회 수녀 아빌라의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우리 영혼이 신을 찾는 과정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연인을 찾는 과정에 비유했다.(제임스 러셀 지음 '영혼의 책 54' 63 페이지) 신에 대한 인간의 찾음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찾음도 근본에 있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김화영 교수는 관건은 에로스의 지향성이지 에로스 자체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앞서 언급한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녀의 고해 신부인 디에고 수사가 (신비체험에 대해) 쓰라고 하자 "저는 글을 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만한 체력도 재주도 없기 때문입니다."란 말을 했다.

 

그런가 하면 로널드 롤하이저가 에로틱하다고 표현한 마더 데레사는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만을 먹일 수 있습니다."란 말을 했다.(이현경 지음 '영혼을 깨우는 책읽기' 197 페이지) 경제성의 원칙을 생각하게 하는 사실이다. 글과 일과 사람에 대해 두루 적용되는 바이고.

 

힘이 소진되면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걸었던 특별한 여정(페요테 선인장에서 추출한 메스칼린 섭취를 통해 의식의 변형을 체험한 것)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곤 하던 나는 에로스와 아가페가 뿌리가 같듯 이성주의와 신비주의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뿐이다.(헉슬리가 행한 메스칼린 퍼포먼스는 호흡법으로 대체되어 향유되는 듯 하다.)

 

사려 깊은 좌파 지식인이었던 발터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한 다음의 말로 내 지원군을 삼고자 한다. "달빛에 의해 잠이 깨면 나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달빛 외에는 누구와도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 이성(理性)을 잠시 맡기고 (신학자 로널드 롤하이저가 광기로 불타오르는 것이라 표현한) 삶을 얻어오고 싶다. 근원적으로 "내 것이 아닌 열망들"(기형도 시인이 '빈집'이란 시에서 쓴 표현)이라 해도. 이렇게 2020년의 반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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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6주 일정으로 계획된 건국대 통일인문학 연구단의 연천 강의를 듣고 있다. 간략하게나마 앙리 르페브르 이야기도 언급되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가 언급한 앙리 르페브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르페브르는 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인류 지성사를 비판하고 공간 생산을 사회변화의 주된 요소로 주장한 철학자다.

 

시간 순서에 따라 진보와 발전의 정도가 정해지는 수직적 시간 중심적 세계관은 문제다. 이 세계관에서는 남성이나 서구가 발달의 기준, 모델이라는 가정 아래 여성, 장애인, 유색 인종은 남성, 비장애인, 서구의 앞서간 시간을 따라간다고 여겨진다.(‘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수록 정희진 글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 222 페이지)

 

공간은 장소와 다르다. 공간은 사물들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고 장소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공간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르페브르는 그릇으로서의 공간 개념을 공간에 대한 본질화의 오류라고 비판했다. 정희진씨는 공간을 그릇으로 인식하는 것(공간의 대상화)은 위계적 인식론을 동반한다고 말하며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공간론을 소개한다.

 

그로츠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공간을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공간으로 보았다. 그로츠에 의하면 사회적 공간은 운동하고 변화하면서 다른 공간을 만드는, 계속적인 다른 거주의 가능성이다. 통일인문학 연구단의 워크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회적 공간은 서로 침투하면서 서로서로 포개진다.”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문제의식과 공명함을 알 수 있다.

 

워크북에는 이런 글도 있다. “사회적 공간 특히 도시공간은 고전적인 수학의 동질성과 등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보다 얇은 조각들이 층을 이루고 있는 밀 푀이유(mille feuille; 천 개의 나뭇잎) 페이스트리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DMZ를 평화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다른 거주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지?란 생각을 한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기원을 추구하는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가 기본적으로 시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권정화의 논의도 있다. 이 논의를 통과해 되기론으로 가볼만 하다. 어떤 배경에서인가? 노마디즘(’유목주의; 遊牧主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실이 배경이다. 나는 지난 번 동료 해설사에게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무장하고 자동차로 기동력을 발휘하며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을 노마디즘으로 알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했다.

 

유목주의란 사막이건 시베리아건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바꿀 수 있는 것, 그렇지만 그 초원을 결코 고향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 더 나아가 고향이라는 표상성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다.(‘사회변동과 여성주체의 도전수록 고미숙 글 노마디즘과 여성 - 되기‘ 219 페이지)

 

되기란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이하고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정우 교수는 되기의 존재론에 대해 말한다. 현실성보다 더 많은 존재, 실존하는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윤명을 타고 난 존재인 인간은 늘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물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배우는 DMZ에 대한 것이리라. 2회차 워크북에 이런 내용들이 있다. “그동안 DMZ, 하면 떠올랐던 생각이나 이미지들은 무엇인가요?”, “두 번의 강의를 들으면서 DMZ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거나 생각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연천은 파주, 김포(이상 경기도),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이상 강원도), 강화, 옹진(이상 인천) 등과 함께 DMZ와 맞닿은 10개 지자체들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초점은 변화다. 구체적으로 말해 적대적 서사의 극복이다. 르페브르는 지배적 공간과는 다른 이질성을 보이는 차이의 공간을 의미하는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곳에서는 다른 무엇인가가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궤도를 정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데이비드 하비 지음 반란의 도시‘ 20 페이지) 하비는 르페브르의 도시권을 언급한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 여기서 르페브르가 말하는 대안적 도시생활이란 소외가 덜하고, 더 의미 있고 활기가 넘치는 것이지만 생성과 만남(두려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만남)의 여지는 물론 미지의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할 여지가 열린 감동적이고 변증법적인 도시생활이었다.”(데이비드 하비 지음 반란의 도시‘ 9 페이지)

 

서울 답사를 종로, 중구 중심으로 해온 입장에서 그간 광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앞 거리 등의 중심지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도시론, 공간론 등으로 새롭게 보는 광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앞 거리 답사를 가을쯤 시연(示演)하고 싶다. 르페브르, 하비, 그리고 최민아 등의 논의로부터 단서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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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분석가의 책에서 읽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수면제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의사' 이야기로 서두를 뗀 뒤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답시고 말을 들려주는 것이 그 의사처럼 이미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도움이 필요하기라도 하듯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글로 시작하는 장문(長文)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되었는지 그 사람으로부터 에너지가 바닥 나 있으니 어떤 어떤 류()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는 답을 받고 나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난 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그것은 글이 고백하는 류인지 자랑하는 류인지 도움을 주려는 류인지 받으려는 류인지 모를 작품(!)이 된 것이기보다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추스르지 못했기 때문이나 더욱 문제인 것은 그가 지금껏 내 글을 읽어준 감사함이 새삼 감지되기에 미안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이렇듯 분명함에도 나는 다시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홀로 씁쓸함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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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Roy)는 왕이란 의미를 가진 말이다. 연천 전곡리 선사 유적지 내의 로이 카페(주먹도끼 빵을 만들어 파는 카페)의 로이와 같은 단어다. 피츠로이(Fitzroy)는 왕의 자식이란 뜻. 흔히 왕의 사생아들이 성()으로 썼다고 한다. Fitz는 케네디 가문의 아들 존이란 의미의 존 F 케네디의 그 F.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는 영국의 해군장교, 수위측량사, 기상학자로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이 타고 해외로 나간 '비글호'의 선장이었다. 다윈이 동승한 비글호는 남미 대륙의 해안선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나선 해군 측량선이었다. 수위 측량사 피츠로이가 해안선 지도 제작을 위해 출범한 비글호의 선장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듯 하다. 피츠로이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고 불경스러운 책이라 말했다.(찰스 다윈 지음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84 페이지)

 

자연이 있는 그대로 고정불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지질학에서 먼저 나왔다.(장철수, 이재성 지음 아주 명쾌한 지질학 수업’ 14 페이지) 지질학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온 이후 생물은 안 그럴까? 란 의심을 품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이었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에서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탐독했다. 물론 라이엘은 다윈의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구의 시간은 균일하며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라이엘의 시간관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스티븐 제이 굴드다. 급격한 변화에 의해 새로운 종이 갑자기 출현하면서 진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의 이 이론을 단속평형론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종의 형태는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변화하지만(단속; 斷續) 그 후 대부분의 기간에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가 지속될 것(평형; 平衡)이라는 의미다.(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지음 '과학과 휴머니즘' 26 페이지) 단속(斷續)이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는 의미다. 나는 굴드의 단속평형론을 지지한다.

 

나는 내가 굴드의 이론을 지지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때로 단속적인 내 공부, 그리고 너무도 다른 여러 결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령 나는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이진명 시인의 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중에서)라는 시어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나를 수식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단속평형의 의미가 이렇게까지 쓰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도 내 단속적인 마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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