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 금요일엔 역사책 2
문경호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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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는 고려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사회 현실과 내 개인적 호감을 반영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첫 번째 내용은 바다와 강은 곡물이 화폐 역할을 하던 시기에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던 중요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고선박(古船舶)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침몰한 배는 화려한 도자기에서 느끼는 감동과 다른 유형의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보란 듯 곧게 자란 나무들은 목재로 잘려나갔지만 구부러진 나무들은 둥글고 곧게 다듬어져 돛대가 되었다는 말을 한다.

 

본문에는 출수(出水)된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홍수를 뜻한다고 사전에 나오지만 저자는 침몰한 배에서 물건이 건져진 것이란 의미로 썼다. 그런데 저자는 출토(出土)라는 말도 몇 번 썼다.(53 페이지, 197 페이지) 국내에서 처음 출수된 고선박은 1323년 원나라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다가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신안선이다. 도자기와 공예품 27, 000점, 동전 약 28만톤(800만개), 불상을 만드는 고급 향나무(자단목) 1, 100여점 등 박물관 한 개 규모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는 출수된 물품들 중 빗<즐; 櫛>과 장기알을 이야기하며 그 가운데 빗을 예로 들어 조선사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가령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는 말을 한다. 얼레빗은 엉킨 머리를 초벌로 빗는 빗이고 참빛은 초벌로 빗은 머리를 곱게 빗거나 이를 훑는 데 쓰던 빗이다. 저자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강조가 적을 얕보고 장기를 두다가 성이 함락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거론한다.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장군이다.

 

저자는 무신들의 물자 수탈이 증가하면서 의도적인 파선이 늘어났을 수 있다는 추정을 했다. 조선 시대에 출발할 때부터 이미 세곡을 빼돌리고 고의로 조운선(漕運船)을 침몰시킨 예가 종종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 추론이다. 조(漕)는 선박을 이용해 서울에 조세를 상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운(漕運), 조전(漕轉), 조만(漕輓) 등은 같은 의미다. 고려 후기 조운을 가장 힘겹게 한 것은 왜구의 침입이었다. 왜구는 단순히 노략질을 하던 도둑이 아니라 일본 남조(南朝)의 정예군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거세지자 우왕은 1376년 조운을 금지했다. 고려의 조운이 재개된 것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였다.(82 페이지) 이성계 일파가 조운을 재개한 것은 경제기반 확립을 위한 조치였다.(161 페이지) 고려 정부와 개경의 관리들은 지방에서 나는 생산물을 쉴 새 없이 수도로 실어날랐다. 무신정권이 1232년 강도(江都)로 천도(遷都)한 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이나 몽골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삼남에서 강도로 이어지는 뱃길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91, 92 페이지)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은 연구자들에 따라 30년에서 40년까지 다양하게 설정되지만 그 기간 내내 전쟁이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고려 침입 목적은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서이지만 고려가 남송 및 일본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몽골은 고려를 맹렬히 공격했다가 홀연 군사를 되돌리곤 했다. 고려 농민들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산성이나 섬으로 집단 이주하여 몽골에 맞서면서도 틈틈이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다. 그렇게 농사짓고 물질을 하여 마련한 곡물과 어물이 배에 실려 강도로 보내졌다.

 

고려에는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 있어 조운선이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충주 일대에서 남한강을 따라 내려온 곡식은 동강(임진강)으로, 서남해 지역에서 올라온 조운선은 서강(예성강)의 광흥창에 짐을 풀었다. 우리나라 지형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산과 강이 많아서 이동하거나 물자를 운송할 때 수레보다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은 두 차례 파견된 원의 사신을 살해했다. 여몽 연합군은 두 차례 일본 원정에 나섰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태풍, 그리고 일본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당시 여몽연합군에 타격을 입힌 태풍을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 불렀다. 여몽연합군의 사령관이 김방경이었다. 숭의전에 모셔진 16공신 중 한 분인 김방경은 충렬왕 대의 공신이다. 삼별초를 토벌했고 일본 원정을 위한 고려와 몽골(원나라)연합군의 사령관 역할을 했다.

 

고려, 조선시대에 운하 시공 역사가 있다. 운하는 굴포(堀浦), 하거(河渠)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 경계, 부평에서 김포까지 굴포를 시도했고 조선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 경계, 태안의 의항, 안면도 등지에서 굴포를 시도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제작한 지질도에 따르면 운하 굴착이 시도된 태안과 서산의 경계는 모래와 토지, 자갈 등으로 이루어진 충적층과 석질이 단단한 흑운모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흑운모 화강암은 굴착이 어렵다. 당시 사람들은 불을 지펴 돌을 익힌 다음 정으로 깨트리는 방식으로 바위를 제거했다. 구간이 길면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와 송은 광종대에 국교를 맺었고 거란 침입 이후 문종 대에 국교를 재개했다. 국교 재개 후 송은 고려 사신을 예우하는 데 매우 극진했다. 1084년 고려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밀주 판교진에 고려정을 건립했고 1117년 명주에 고려사라는 관청과 영빈관을 설치했다. 1085년 동주 지사로 부임하던 소식(蘇軾)은 화려하게 지어진 고려장을 보며 오랑캐에게 모든 것을 대주어 백성들은 노비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소식이 이렇게 고려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송은 당시 3용(冗)의 폐단(弊端)이라는 구조적 문제로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冗은 쓸모 없을 용이다.) 3용의 폐단이란 무리한 군대 증강 즉 용병(冗兵)의 폐단, 지속적으로 늘어난 관리로 인한 용관(冗官)의 폐단, 무리한 재정 즉 용비(冗費)의 폐단 등이다. 3용의 폐단으로 인한 만성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신종이 왕안석을 부재상으로 삼아 1069년부터 1076년까지 신법을 추진했으나 사마광, 소식 등 구법당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었다. 이때 농민들은 흉년이 지속되면서 기아에 허덕였다.

 

그러나 송 정부는 빈민 구제보다 고려 사신 접대에 더 정성을 기울였다. 송이 고려를 두텁게 대우한 데에는 신법당이 추구한 연려제요(聯麗制遼) 정책이 있었다. 고려와 송이 연합하여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받아가던 거란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고려 또한 송으로부터 들어오는 문물들이 필요했기에 겉으로는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지만 송과의 교류를 은밀히 이어갔다. 신법당의 정책이 눈엣사기 같았던 소식의 눈에 고려의 이중 외교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구법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요구는 지속되었다.

 

소식은 거란이 송과 고려의 관계를 알고 있다가 훗날 트집을 잡는다면 난처해질 것이라 경고했다. 고려인들은 소식(蘇軾; 소동파)을 크게 사랑했다.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입(제3차)으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인 와중에 소동파의 문집(‘동파문집’)을 발간(경향신문 기사 참고)했을 정도다. 언급한 기사는 소식을 혐한파라 칭했다. 혐고파나 혐려파라 해야 하지 않을지? 어떻든 소동파가 고려를 혐오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이중적 정책을 편 고려와 손잡고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송나라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고려 사신들을 과하게 대접한 현실을 비판한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지?

 

저자는 조선이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것은 조선의 중화주의 탓이라 말한다. 조선은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을 정벌하여 중화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이 중화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을 통해 전해받는 물자와 문명조차도 배격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은 명이 멸망한 후 명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 땅에 살았는데 명과 청은 완전히 다른 나라라 인식했다.(192 페이지)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것을 1이라 하면 말은 2, 수레는 10, 선박은 30이라는 주장이 있다.

 

저자는 19세기 말까지 포구마다 빼곡이 정박해 있던 그 많은 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는다. 개항 후 30년이 되지 않아서 국내 선박들은 일본이 들여온 증기선에 그들의 기능을 빼앗겼다. 외국 자본으로 가설한 철도가 포구와 포구를 잇게 되면서 선박의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다. 경강 상인들을 비롯하여 포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선상들이 몰락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저자는 선상의 몰락과 함께 맥이 끊긴 조선 기술을 이야기하며 박물관이나 유명 관광지에 복원된 황포돛배들은 국적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지적한다. 고려 시대 해양사를 재조명하자는 것이 저자의 결론격의 이야기다. 흥미롭게 읽히는 책,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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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4-01-1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재밌네요. 고려거란전쟁 덕분에 확실히 고려사에 관심이 커진 거 같습니다. 고선박 연구자시라 해서 책 내용이 지엽적이고 딱딱할 줄 알았더니 조운선 침몰같은 국내 문제부터 당시 지정학적 정세까지 종횡무진이네요.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했고 그 이유가 신법당과의 갈등과 지나친 고려 사신 접대와 당시 국제관계 때문이었고...리뷰를 훑다가 처음부터 정독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4-01-17 07:02   좋아요 0 | URL
네.. 얇은 책이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치밀하고 재미 있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