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클라인은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생물물리학 박사 학위를 가진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2016년 7월)에서 프로이트의 꿈 및 무의식 이론과 반대되는 견해를 다수 제시한다. 대표적인 것이 무의식적 충동은 자동적인 행동 습관이지 억압된 감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잠든 뇌는 낮의 뇌와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법칙을 따른다는 말도 주목할 만하다. 꿈을 설명하는 열쇠는 현재이며 꿈 시험의 배후에는 억압된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숨어 있지 않으며 현재의 불안이 자신과 어울리는 기억을 불러낼 뿐이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들은 스켑틱 vol 6에 실린 이지형의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농담, 위험한 농담’의 구절들을 생각하게 한다. “괘 또는 효와 그 같은 유학적 언급들의 관계는 자의적일 뿐이다. 왜 주역의 15번째 지산겸 괘가 겸손을 뜻하는 겸의 괘여야 하며, 이 괘의 5번째 효에 관한 해설이 침범하는 게 이롭다는 것은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정벌한다는 뜻이 되어야 하는지 음양적 근거 따위는 없다.” 요즘 프로이트는 여기 저기에서 비판받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란 부제를 가진 마시모 레칼카티의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2016년 8월)도 그런 시도들 중 하나이다. 물론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유래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를 일반화해 볼 수는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꿈 해석에서만은 프로이트는 타당하다고 볼 여지가 거의 없다. 이지형의 글 제목을 따 꿈 해석이라는 거대한 농담, 위험한 농담이라는 말을 떠올려도 무방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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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비밀 - 문예중앙산문선
송재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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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을 정통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문단의 흐름 같은 것이 있는 듯 하다. 작년 가을 구입한 '검은색이란 시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시인의 풍경의 비밀이란 산문집을 구입한 지 거의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더욱 최근 읽은 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란 산문집이 좋아 나는 그런 기대감으로 풍경의 비밀에 기대를 걸게 된다.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에 시론(詩論)이 충분히 담겼듯 풍경의 비밀도 시론이 잘 정리되어 있어 기대에 부응한다.


시인은 자코메티의 조각을 본 결과를 악기가 필요할 때란 시로 남겼다. 저자는 방이 없다는 것을 사유의 공간이 좁아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방이 없던 당시 자신의 글이 미문에만 머물렀었다고 말한다.(저자는 자신이 자주 미문의 함정에 빠졌던 것은 김현을 그릇 배운 탓 즉 김현의 겉멋만을 따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른 죽음을 소재로 소래 바다는이란 시를 썼음을 밝히며 시의 중요 부분들을 해설한다.


저자가 열세살이던 때 그의 아버지는 서른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커다란 상처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지상 밖 어디선가 새 살림을 꾸려가실 그분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손(不遜)한 의문인지 모르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다면 부자관계는 어땠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단언할 수 없지만 박완서 선생의 따뜻함을 상찬하는 글을 보아서는 저자가 오이디푸스적 반감을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억압이었다는 말을 통해서, 그리고 좋은 시는 긴장과 불평 밖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자신의 시는 불평일 뿐이라는 말을 통해 시인이 어느 정도의 오이디푸스적 반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시를 쓰지 않았다면 세계의 미묘하고 얼룩진 부분에 대한 얄팍한 증오의 포용력밖에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런 미학의식이 자신의 긴장의 시학을 만들었다고 한다.(170 페이지)


저자는 몇 개월의 용맹정진을 통해 재능없음을 깨닫고 막 문학을 포기하려는 자신에게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 날아든 것은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긴장이야말로 시학의 중심이라 생각한다. 평정한 상태에서는 시가 고이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진술에는 생각의 여지가 많다. 흔히 시()는 말씀 언()과 절 사()의 결합으로 칭해진다. 절제된 언어, 수행자의 평정한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시이다. 이제 시란 절제된 평정의 언어라는 고래(古來)의 정의를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긴장은 시를 말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임에도 긴장의 미학으로 시를 분석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한다. 저자는 좋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힘은 서로 반대되는 세력들의 밀고당김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앨런 데이트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바슐라르를 통해 책읽기의 게으름, 삶의 게으름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게으름이란 발효에 필요한 시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읽기는 늘 주마간산이고 생각이란 것을 정연하게 적을 수 없는 바 시론(詩論)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고 덧붙인다. 당연하지만 풍경의 비밀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얼마나 자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송재학 시인만의 일은 아니다. 풍경의 비밀이란 제목을 한 그의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시란 나에게 어떤 운명을 준비하는가란 이름을 가진 시론이다. 충실히 읽는다 해도 그의 시집들을 이해하는데 직절(直截)한 도움이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시와 조금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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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 26일, 9월 1, 2일 마포에 갑니다. 일군(一群)의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듣는 모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는 성경 말씀대로 나 스스로 문을 두드렸고 청강생으로 접수한 사람의 포기에 힘입어 극적으로 기회를 얻었지요.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은 또는 갈 곳은 많은 사람이 부리는 억지 같지만 다행인 것은 물론이지요. 일정도 모른 채 문을 두드렸는데 다행히 모임 7일전이었던 것도 극적이지요. 8월 22일부터 8주에 걸쳐 매주 월요일에 만나는 고척동 강의 듣기 모임도 마지막 순서인 서른 번째로 기회를 얻었지요. 운이 좋은 것인지, 아슬아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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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있는 꽃을 잠깐 보았는데 벌써 꽃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의 ‘재견개화우낙낙(纔見開花又落落)’이란 구절을 송재학 시인의 산문집 ‘풍경의 비밀‘에서 읽는다.(纔: 겨우 재.. 시인은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맘을 훔친/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란 정끝별 시인의 ’늦도록 끝‘의 정조(情調)와 통하는 시이다. 조용미 시인의 “..별이 스러지듯 꽃들도 순식간에 사라지니까요..”란 구절(’하늘의 무늬‘)도 유사한 분위기로 읽힌다. 번득이는 삶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시인들의 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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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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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아득한 시의 길을 조용히 생각하겠다는, 창조적 정신의 불씨를 지키는 새로운 사색이 필요하다는, 시의 결을 가지는 문체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등의 말로 치열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인의 근황을 말하는 책이다. 저자는 시를 존재와 언어 사이의 틈을 메우는 것으로 정의한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저자는 시인을 그렇게 섬세한 감각을 가진 낙타에 비유한다.


저자는 풍경은 체험과 무관하지 않기에 길을 떠나면 자신의 내면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인을 삶의 풍경을 가장 멀리 보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낙타는 섬세한 동물이고 사막을 건너는 강인한 동물이다. 시인 저자도 시를, 그리고 산문을 건져올리기 위해 길을 가고 또 간다. 저자는 하나의 풍경이 나의 체험이 되고 나의 체험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일순(一瞬)을 말한다.


시인이 울주군 서생면에 속한 진하(鎭下)라는 해변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나는 내 서생 시절을 떠올린다. 서생면 신암리, 간절곶에서 가까운 그 바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마을. 그곳에서의 시간들을 추억하는 나... 견자(見者)의 그 랭보,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말테의 수기’의 릴케.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우상의 황혼’의 니체 등을 이야기하며 시인은 본다는 것의 남다름을 이야기한다.


시인에게 그런 새롭고 독창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낙타는 십리 밖 냄새를 맡는다’는 기행 산문집이기도 하다. 로마 기행에서 시인은 릴케의 ‘로마의 분수’라는 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서는 수직성이란 평면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는 실존이란 말을 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한다. 시인은 릴케가 본 세잔보다 메를로 퐁티가 읽은 세잔에 더 끌린다고 말한다. 시인은 메를로 퐁티의 릴케 읽기는 피나는 사색의 결과로 본다.


시인은 꽃이 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꽃을 위해 있다는 존 러스킨의 말에서 단서를 얻어 시인이 언어라는 그릇을 빌려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시인의 표현을 빌려서 스스로를 전개한다는 표현을 한다. 시인은 시를 우리의 논리의 손가락 사이를 새어나가는 모래에 비유한다. 시인은 지구는 푸르다고 말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말과 그 이전에 상상력으로 지구를 푸른 것으로 본 폴 엘뤼아르라는 시인의 말을 소개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시인 역시 상상력으로 미술품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시에서 산문적 의미만을 찾지 말 것을 말한다. 시인이 즐겨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메를로 퐁티라면 주안점을 두어 이야기하는 시인은 릴케이다. 시인에 의하면 파스칼이 우주가 침묵을 속성으로 한다고 보았던 데 비해 릴케는 세계가 침묵이 아닌 노래라 생각했다. 시인은 언어의 본질은 현실 인식의 도구가 아닌 아름다움과 에로스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데리다의 인식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흐의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에 나오는 불꽃이, 시인은 빛의 유용한 원천이 아니라 빛을 남에게 베풀고 자신은 고독하다고 한 바슐라르의 논의와 아름답게 호응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시론에 강하다. 시인에 의하면 자신은 시란 무엇인가란 물음보다 자신은 시의 근거를 어디에 두는가란 물음을 선호한다고 한다. 시 창작이란 수많은 시론들을 생각한 뒤에라야 효과적이고 매끄러울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시인을 보며 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시의 근거를 죽음을 향한 생의 일회성에 두고 싶다고 말한다.


‘낙타는 십리 밖 냄새를 맡는다’는 저자가 시, 서, 화, 도자기 등의 예술에 고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하는 책이다. 시인은 그림은 시가 그렇듯 수수께끼의 심연이라 설명한다. 릴케는 세잔의 그림에서 사물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요구하는 긴 인내를 배웠다고 한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지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를로 퐁티의 릴케 읽기는 피나는 사색의 결과라는 말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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