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나는 그분은 고종과 귀인(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지요?란 말을 했다.(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분.) 나는 후궁이란 말이 싫다. 주궁(主宮) 뒤편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어 그렇고, 종1품을 의미하는 의젓한 귀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귀인은 따로 있다. 귀인(貴人)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부족하거나 넘치는 기운을 바르게 해 나를 완성시켜주는, 명리학이 말하는 소중한 분을 의미한다. 나는 귀(歸)in이란 말도 쓴다. 귀납법은 induction이란 의미이다.
귀(歸)in과 함께 연(演)de라는 말도 쓴다. 연역법은 deduction이란 의미이다. 한 유명 문학평론가가 환원(reduction)을 연역(deduction)으로 읽은 사례가 있다. 이로 인해 이 분은 바슐라르의 감싸기란 개념을 이야기하며 감싸는 이론과 감싸이는 이론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자가 후자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확장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귀납에 의해 이론을 수립하는데 관찰해야 할 대상은 무한이기에 즉 언제까지 계속 관찰을 할 수는 없기에 귀납을 넘어 연역을 통해 관찰에서 제외된 대상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에 의하면 귀납은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되풀이하며 도/道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고, 연역은 상명하달하는 방식이다. 공자가 연역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조의 결론이다. 공자는 귀납적, 소인은 연역적이란 것도 그렇다. 어떻든 오독 사례가 있기에 이런 편법 조어와 암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덕혜옹주‘를 감상하러 가야겠다. 귀인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