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조의 화성행차 - <반차도>로 따라가는
한영우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격차는 350여년이다. 정조 시대와 현대의 격차는 240여년이다. 같은 시대인 세종과 정조 시대의 간격보다 정조 시대와 현 시대의 간격이 더 짧은 것이다. 세종과 정조는 자주 비교된다. 두 군주의 공통점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애민정신이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위대한 국문자를 만들어냈고 정조의 애민정신은 철저한 기록문화를 남겼다.

 

정조 시대 기록문화의 꽃은 의궤(儀軌). 이 가운데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는 무섭다는 평을 받을 만하다. 전자는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만든 공사보고서이고 후자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서다.

 

한영우 교수의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는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반차도를 상세 해설한 책이다. 돋보이는 것은 원래의 그림에는 수행원의 경우 직함만이 적혀있으나 새로 만든 반차도에는 직함에 해당하는 인물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조사하여 넣었다는 점이다.

 

서울 청계천에는 188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도자벽화로 반차도가 재현되어 있다. 정조는 군사(君師)로 자처했고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자임했다. 정조는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문집을 발간해 앞선 군주와 차별성을 보였다. 정조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킨 것은 왕권강화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핍박한 정치세력을 간접 응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 중 하나가 군대 장악이었다. 장용영은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였다. 규장각 창설이 문신 장악의 의미를 갖는다면 장용영 창설은 군대 장악의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18세기는 상공업의 발달로 농업 일변도의 국가 운영이 종말을 고한 때였다. 경제가 성장하며 새로운 상업문화가 등장했다. 상공업 발달의 긍정적인 측면을 수용, 시전상인들에게 부과했던 금난전권을 혁파했다. 이를 신해통공(1791)이라 한다.

 

문체반정은 정조가 상업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다. 정조가 주자성리학을 정학으로 정립하려 한 것은 청나라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 제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성리학만을 유일한 교학으로 고집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고급문화 즉 과학과 기술, 고급학문 등은 즉각 수용했다.

 

정조는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을 기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은퇴하여 살 직할도시를 갖고 싶어 했다. 화성건설은 정조 18(1794) 봄에 착수하여 2년 반 뒤인 정조 20(1796) 가을 완료했다. 정조가 아버지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남쪽의 화산(花山)으로 옮긴 것은 단지 그곳이 명당이어서가 아니라 무덤 북쪽의 팔달산 아래에 왕의 모든 꿈이 담긴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웅대하고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였다.

 

화성을 군사 요새지로 만드는 것이 정조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었다. 화성에 인구를 모으고 경제를 발전시켜 대도회(大都會)로 키우고 행정상으로도 격상시켜 부수도(副首都)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한 것이다. 그래서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켰고 이름도 수원에서 화성으로 바꾼 것이다. 정조의 꿈은 화성 주민들이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화락하는 낙원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화성 공사 비용은 국가재정에서 지출하지 않고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했다. 화봉삼축(華封三祝)이란 고사가 있다. ()나라 지방에 봉해진 어떤 사람이 요() 임금에게 수(), (), 다남(多男)을 기원했다. 요임금은 수는 욕됨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다남은 걱정이 많아서 싫다고 했다. 화성이란 이름에서 정조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 부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 왕의 입장에서는 요 임금처럼 덕을 펴는 도시를 의도한 것이다.

 

정조는 행행(幸行)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했다.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려면 길을 닦고 다리를 건설하거나 보수하게 되니 치도(治道)의 효과가 있었다. 많은 군사를 데리고 가면서 수도권의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회가 되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회갑연을 베푼 뒤 618일 창덕궁 연희당에서 다시 회갑연을 치렀다.

 

반차도는 단원 김홍도의 지휘 아래 김득신(1754-1822), 이인문(1743-1821), 장한종(1768-1813) 등 당대 인류 화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새로 만든 반차도에는 원래의 그림에 들어있지 않은 채제공(총리대신), 홍낙성(영의정), 심환지(병조판서), 윤행임(정리당상) 등 수십 명의 인원을 넣었다.

 

원래 현륭원으로 가는 갈은 시흥 방향이 아니고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果川)과 인덕원(仁德院)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1795년 거둥길에서는 새로 시흥길을 택했다. 남태령길을 닦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야사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과천에서 인덕원으로 가는 길에 찬우물점을 거치는데 이곳의 김약로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김약로는 노론의 영수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의 형이다.

 

화성거둥길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배다리를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배다리는 정조의 기본설계에,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끝에 최종 완성되었다. 정조는 행차를 떠나기에 앞서 한강의 배다리에서 도강 예행연습을 가졌다. 이 행사를 주교도섭습의(舟橋渡涉習儀)라 했다.

 

척후복병의 배치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니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29일 묘시로 출발 시각이 정해졌다. 정조는 융복(戎服)을 입었다. 211일은 한양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자 화성에서 여러 행사가 시작된 첫날이다. 화성에서의 첫 행사는 향교 참배였다. 두 번째 행사는 낙남헌(洛南軒)에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한 일이었다. 시험문제는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였다. 자궁(慈宮: 혜경궁)께서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부()를 지어바치라는 것이다.

 

셋째 날의 마지막 행사는 봉수당에서 거행한 진찬습의(進饌習儀)였다. 회갑 잔치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넷째 날은 오전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했고 오후와 야간에는 화성에서 두 차례 군사훈련을 거행했다. 화성을 건설한 목적의 하나가 난공불락의 군사요새지를 만드는 것이었기에, 또 화성에 5000명의 장용영 외영을 두었던 만큼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성에서 하는 군사훈련을 성조(城操), 낮에 하는 훈련을 주조(晝操), 밤에 하는 훈련을 야조(夜操)라 한다. 다섯 째 날은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진찬례였다. 잔치는 진정(辰正) 3각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여섯 째 날 정조는 신풍루에서 주민들(환과고독의 화성부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열었다.

 

이어 정조는 자신이 설계한 화성의 성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 경관이 가장 빼어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갔다. 수원성곽의 동북각루로서 깎아지른 암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이 정자는 장안문 및 화홍문(북수문)과 인접하여 화성 동북지방 방어의 요해처로 건설되었지만 평상시에는 시정(詩情)을 자아내는 절경을 연출한다. 득중정(得中亭)에서의 활쏘기를 끝으로 화성에서의 모든 행차는 끝났다.

 

일곱 째 날은 한양으로 돌아가는 첫 날이다. 여덟 째 날 정조는 백성들을 가마 앞으로 직접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왕성한 정력을 과시하던 정조는 180062849세를 일기로 갑자기 타계했다.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각계각층의 백성을 끌어안았던 개혁은 종말을 고하고 정조가 싫어했던 서울 귀족 양반들의 연합정권인 세도정권이 19세기 정치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세도정권의 주역들은 학벌이 높고 감각도 세련되었지만 지방 백성들을 끌어만을 만한 지도력과 포용력이 없었다. 19세기는 서울과 지방이 극단으로 대립하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왕의 책
윤희진 지음 / 황소자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자가 공부하는 교재는 소학,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대학연의, 상서(尙書), 주역, 예기, 춘추좌전, 통감강목 등이었다.(신명호 지음 조선의 왕’ 37 페이지) 국왕이 공부한 교재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세종대에 사서, 삼경, 춘추, 통감강목, 대학연의, 송감(宋鑑), 사기, 통감속편, 성리대전 등이었다. 성종은 예기, 근사록, 정관정요, 한서, 고려사, 국조보감 등을 추가했다.

 

그 후 교재는 국왕의 취향에 따라 더 추가하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영조 대에는 소학, 심경, 대학연의보, 동국통감, 성학집요, 절작통편 등이 중시되었다.(심재우, 한형주, 임민혁, 신명호, 박용만, 이순구 등 지음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131 페이지)

 

윤희진의 제왕의 책에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에는 10 명의 군주가 즐겨 읽은 책이 나온다. 한 사람의 고려 왕과 아홉 사람의 조선 왕이 즐겨 읽은 책이다. 고려 왕 광종의 정관정요, 조선 왕 태종의 대학연의, 세종의 자치통감, 성종의 소학, 연산군의 춘추, 선조의 주역, 효종의 심경, 영조의 예기, 정조의 서경, 고종의 효경, 조선책략 등이다.

 

광종은 정관정요를 읽은 뒤 연호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해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당나라의 역사가 오긍이 지은 정관정요에는 당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명군으로 그려져 있다.(‘정관: 貞觀은 당 태종 이세민의 연호다.) 그런 까닭에 고려의 신하들은 광종이 이 책을 애독하며 집권 초기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며 광종이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현명한 군주가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27 페이지)

 

광종은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쌍기를 데려와 과거제를 도입, 집권 세력의 물갈이를 시도했다. 이는 무인 출신 호족들과 그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였다.(28 페이지)

 

대학의 의미를 풀어쓴 대학연의는 독서를 즐기지 않았던 무장 태조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고 읽은 책이자 조준이 이복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울분을 참지 못하던 이방원에게 권하며 이것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책이고 세종이 100번도 더 읽었다는 책이다.

 

대학은 정호, 정이 형제가 예기에서 중요 구절을 발췌해 편찬한 책이다. 대학연의는 진덕수가 대학과 자치통감강목을 종합해 지은 책이다. 경제통 조준은 정조전과 함께 조선 개국공신의 하나였으나 정도전과 다른 길을 걸었다. 정도전이 방석을 지지한 것과 달리 이방원을 지지한 것이다.

 

태조는 세자로 방번을 주장했고, 신하들은 방번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방석이 타협안으로 선택되었다. 저자는 대학연의를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를 두어 아버지를 비롯 여러 신하들의 외면을 받은 태종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읽은 책으로 풀이한다.(55 페이지)

 

세종이 즐겨 읽은 책은 자치통감이다. 세종은 제왕이 뒤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왕이 되었다. 즉위 두 달이 채 안 된 시절에 경연을 연 세종은 첫 책으로 선택한 대학연의 공부를 4개월만에 마쳤다. 양녕대군이 6년이 걸렸으니 4개월은 그 1/18의 시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다. 대학연의 이후 세종이 선택한 책은 북송의 사마광이 19년에 걸쳐 완성한 총 291권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이다. 당시 조정 신하들은 대학, 중용 등 경서를 금과옥조로 삼고 연구할 뿐 역사서는 소홀히 다루었다. 세종은 누구보다 자치통감의 역사적 가치와 정치교재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성종은 소학을 즐겨 읽었다. 훈구세력들을 압박했으나 이른 죽음을 당한 예종의 뒤를 이어 열세 살의 잘산군이 왕이 된 것은 훈구세력들 입장에서 이미 성장한 월산대군보다 어린 잘산군이 수월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선왕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네 살의 어린 나이였다.) 성종은 경연에서 소학을 공부하겠다고 한 첫 임금이었다. 성종이 소학을 읽겠다고 한 지 20여일만에 폐비 사건이 일어났다.

 

폐비 논의가 시작되던 무렵 승정원에서 다음 경연에 읽을 책으로 사서와 대학연의를 추천했다. 성종은 소학을 주장했다. 대학연의에 따르면 부부 불화의 일차 책임은 성종에게 있다. 수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가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학에 따르면 문제의 원인은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중궁 탓이다. 성종이 소학을 강조한 해가 재위 7, 8년 무렵인 것도 흥미롭다.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이 심히 아낀 조광조에 이르러 소학은 개인의 실천을 위한 책에서 사회적 실천을 위한 책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춘추를 즐겨 읽었다. 건국 이래 궁궐에서 원자의 자격으로 태어난 왕은 단종 이후 연산군이 처음이다.

 

세종까지는 조선 건국 이전에 태어난 왕들이었고 문종은 아버지가 충녕대군이던 때에 태어났으니 궁 밖에서 태어났고, 예종은 아버지가 수양대군이던 시절 태어났으니 역시 궁 밖에서 태어났다.(109 페이지) 연산군이 태어난 것은 생모 윤씨가 후궁에서 왕비로 발탁된 지 3개월 후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서다.

 

선조가 즐겨 읽은 책은 주역(周易)이다. 선조는 이황, 기대승, 이이 등 최고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대학, 소학,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 유학의 기본서들을 착실하게 배워나갔다. 난세 때문이었는지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주역에 몰두했다. 다른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오직 주역만 읽은 것이다. 선조가 주역만 읽자 이를 비난하며 다른 책을 권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선조는 주역을 마음 다스리는 용도로보다 사물에 접응(接應)하는 역학용으로 보았다.

 

효종은 심경을 주목했다. 남송시대의 진덕수가 마음 수양을 목적으로 쓴 심경의 핵심 내용은 경()이다. 효종이 심경을 선택한 것은 산림(山林)에게 손을 내미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효종은 10만의 정예군만 있으면 북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황폐해진 조선에서 10만의 군사를 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효종이 북벌에만 올인해 민생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육(金堉)의 제안을 받아들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효종이 심경을 선택한 것은 북벌을 위해서였다. 물론 효종의 북벌과 송시열의 북벌은 달랐다. 효종의 북벌은 군사적인 것이었고 송시열의 북벌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론적인 것이었다.

 

기해독대(己亥獨對)1659년 효종이 송시열과 단 둘이 마주앉아 북벌에 대해 논한 일을 말한다. 이 독대 이후 두 달만에 효종은 급서(急逝)했다. 효종은 심경을 마음을 다스리는 책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대했다.

 

영조는 예기를 즐겨 읽었다. 영조는 임인옥사(壬寅獄事)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다. 임인옥사는 1722(경종 2) 노론 측에서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임인옥사는 삼수옥(三手獄)이라고도 한다. 자객을 시켜 살해하는 대급수, 독약으로 죽이려 한 소급수, 숙종의 유언을 빙자해 폐출시키는 평지수를 말한다.

 

숙종의 유언이란 숙종이 노론 대신 이이명과 가진 독대에서 연령군(명빈 박씨 소생으로 숙종의 3)과 연잉군(영조)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이 음모에 연잉군이 가담했다. 연잉군은 역적의 수괴였다. 그러나 경종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고립된 연잉군을 구한 것은 영의정 조태구를 비롯한 소론 온건파였다.

 

경종 재위시 왕위를 세제(世弟)인 연잉군에게 넘기라는 주장을 한 노론 4대신을 법으로 처단하라고 한 김일경을 연잉군이 왕이 되어 국문할 때 김일경은 스스로를 신()이 아닌 나<:>라 칭해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애써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대리청정이 임금이 아플 때 통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론이 주청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대리청정이 결코 역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예기는 영조가 읽다가 눈물을 흘린 책이다. 영조가 예기를 논하다가 임금이 죽고 세자가 탄생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경종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은 그리움과 죄책감의 눈물이라기보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정치적 눈물 즉 악어의 눈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 영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생각한 노론은 영조를 압박해 소론에게 정치 보복을 가하려고 했다.(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설을 확신하며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에게 소론은 경종 처단 역모 연루로 고립된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이었다. 영조는 노론 대신 소론 온건파의 손을 들어준 정미환국을 단행했다.

 

정조는 서경을 즐겨 읽었다. 영조 31년 강경 소론들이 벌인 나주벽서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노론으로 돌아섰다. 노론을 이를 계기로 소론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노론의 생각이 동의하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보복을 막으려 한 것이다. 정조는 강력한 국왕 중심의 정치의 실마리를 서경에서 찾았다. 서경은 요, , 탕왕, 문왕, 무왕의 말을 기록한 고전이다.

 

노론은 늘 임금에게 요순시대를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 정치는 신하들에게 맡기고 임금은 유학 공부에 전념하라는 말이다. 정조는 서경을 재해석했다. 정조와 남인은 서경 해석에서 뜻을 같이 했다.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요순도 흉작에 분발하여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시켰고 정밀하고 엄혹하여 천하 사람들을 공손하게 움츠리고 떨게 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게 한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정조는 서경을 근거로 노론과 다르게 요순을 도덕적 모범자로서의 국왕이 아니라 정치의 한복판에서 권력의 중심을 잡았던 적극적인 정치가로 본 것이다.

 

고종은 효경과 조선책략을 즐겨 읽었다. 신정왕후의 뜻을 따라 고종은 효경을 첫 교재로 받아들였다. 신정왕후는 고종의 양모다. 조선책략은 1881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지고 와 고종에게 직접 바친 책이다. 저자는 황준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니시나리 카츠히로 지음, 이진경 옮김 / 일센치페이퍼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학을 생각하면 고개를 절로 젓게 된다. 학생 시절 내게 수학은 블랙홀 같은 과목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철이 든(?) 어느 날 철학을 공부하다가 얼핏 자연과학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자연과학의 언어가 수학이라는 사실을 더불어 알았다.

 

문화 해설을 하게 된 뒤 수학을 이용해 경복궁, 한옥, 백제의 미, 수원 화성 등을 설명한 책을 읽고 지식 위주가 아닌 일상에서 살아 있는 수학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같은 류의 책을 많이 접했지만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책은 처음 접했다.

 

여기서 수포란 수학을 포기했다는 뜻이니 수포(數抛)가 된다. 니시나리 가쓰히로의 이 책은 일본인 특유의 디테일함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인생에 필요한 수학은 중학교 수학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을 하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6일만에 중학교 수학을 정복하(게 하)는 금단의 책으로 소개한다.

 

그림이 전편에 고루 그려진 이 책은 일반 경로가 아닌 지름길을 걷게 구성한 책이고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담당 편집자의 대화 형식으로 마련된 책이다. 제목대로 엿새의 시간이 주어졌다. 1일째는 우리는 왜 수학을 공부할까? 2일째는 중학교 수학을 가장 빠르고 가장 짧게 배우자!

 

3일째는 중학교 수학의 정상, 이차 방정식을 한방에 정복하자!! 4일째는 머리에 쏙쏙! 중학교 수학의 함수를 정복하자!! 5일째는 중학교 수학의 도형을 여유롭게 정복하자!! 6일째는 특별 수업 수학의 최고봉, 미분 적분을 체험해보자!로 구성되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에게 수학과 암산은 전혀 관계 없다는 말을 한다.

 

배우는 사람은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계산의 신속함이 아닌 치밀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르치는 사람은 논리를 말로 쓴 것이 국어이고 기호로 쓴 것이 수학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수학을 대수(代數), 기하(幾何), 해석(解析)으로 나눈 뒤 대수의 목적지는 이차방정식, 해석의 목적지는 미분, 적분, 기하의 목적지는 벡터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미분, 적분에서 헤맸다는 것은 결국 중학교 이차함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라 설명한다.(대수는 수와 식을 다루고, 해석은 그래프의 세계를 다루고, 기하는 도형을 다룬다.) 인상적인 대목은 음수 곱하기 음수는 플러스에 대한 설명이다. 가르치는 사람에 의하면 그것은 약속(에 따른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임을 증명한다. 전편이 이런 구조로 이루어졌다. 대화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하는 식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이차함수 그래프에서 매끄럽게 연결하려면 선이 왜 굽는지 묻자 배우는 사람은 속도가 일정하지 않아서라고 답한다.

 

기하는 재(측정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출발한, 가장 오래된 개념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리 중 하나인 피타고라스 정리를 직각삼각형 조합을 이용해 증명한다.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은 기본적인 개념을 이용해 엄청난(?) 수학을 증명해 보이는, 마법 같은 책이다.(도형, 수식 등을 옮겨 적을 수 없어 아쉽다.)

 

기본을 착실히 배우지 못한 우리는 지난 시절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마치 기본기는 도외시하고 이기는 기술을 익혀 실전에 뛰어든 선수를 보는 듯 하지 않은가. 하이라이트는 머리카락을 이용해 미분, 적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설명에 의하면 초등학교 3학년도 알 수 있는 방식이다.

 

이렇게 저렇게 구부러진 머리를 머리카락 끝에서 구부러지기 전까지 재고 조금 재고 식으로 재고... 잘게 나누어 계측하는 작업이 미분(微分)이고 그것을 다시 더해 가는 작업이 적분(積分)이다. 미적분은 복잡한 것도 잘게 나누면 계산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수학의 매력이 아닐지?

 

단순해진 것은 계측하기 쉽고 불필요한 것도 눈에 잘 띈다. 저자는 이 책은 위험하다며 착실하게 공부하는 중학생은 절대 보지 말라고 말한다. 가장 빠르고 가장 짧게 중학교 수학을 정복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학생이 3년은커녕 5, 6 시간도 안 걸려서 중학교 수학을 정복해 버리면 교과서를 차근차근 공부할 마음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생 시절 아인슈타인을 동경해서 일반상대성 이론을 공부했지만 너무 어려워 한 번 좌절한 뒤 우연히 서점에서 영국 물리학자 폴 디랙의 일반상대성 이론 강의 관련 책을 읽었다. 서문에는 이 책으로 여러분은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을 이해할 것이다.”란 글이 쓰여 있었다.

 

폴 디랙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중학교 수학에서 달인이라는 말을 한다. 이 책은 중학교 수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하는 한편 수학으로 어려운 물리 등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갖게 하는 책이다. 특별한 인연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OD] 흥선대원군 : 운현궁의 봄 평생 소장 소설
김동인 지음 / 부크크(bookk)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석파(石坡)라는 호 외에 유극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나막신을 신는 노인이란 뜻을 가진 유극옹이란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호다. 흥선대원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운현궁이다. 고종이 즉위한 후 대대적으로 확장, 정비된 궁이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嘉禮)가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가장 핵심적인 설명은 금동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을 통해 알 수 있듯 흥선대원군이 보인 능숙하고 탁월한 처세(處世)와 보신(補身)의 근거지라는 말이다. ’운현궁의 봄은 안동 김씨가 위세를 부리던 철종 재위시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로 묘사되었다.

 

본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옳은 말이로다... 상갓집 개지. 옛터를 잃고 굶주려 다니는 석파나, 주인을 잃고 구석을 찾아다니는 상갓집 개나. 다를 것이 뭐냐? 이제부터는 석파라는 호를 버리고 상가구(喪家狗)라는 호를 쓸까 보다.” 총애하는 계월로부터 김병기(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자 영의정 김좌근의 양아들)가 자신을 상갓집 개 같이 헤헤 하며 다니는 사람이라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흥선대원군이 계월에게 건넨 말이다.

 

김동인은 흥선대원군을 주책없는 인물, 가난한 주정뱅이라 설명한다. 흥선대원군은 김병기로부터 놀림과 무시를 당한다. 그런 그에게도 자기 편이 있었다. 대제학 김병학, 훈련대장 김병국 형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인 조성하, 그리고 그의 장인 이호준 등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성하를 통해 신정왕후와 접촉하려고 한다. 조성하는 백악(白嶽)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홀로 숭례문까지 간다. 거기서 그는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에 눈길을 보낸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맏아드님으로 일찍이 세자로 책립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님 왕의 마음이 자기에게 계시지 않고 자기의 셋째 동생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고 양녕은 아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미친 체하고 치인(痴人)의 흉내를 내었다.” 흥선대원군도 그렇다는 의미다.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속 없는 사람으로 처신하면서도 아들 이재황(훗날 고종이 되는)에게는 은밀히 왕자(王者)의 길을 가르쳤다. 서민을 긍휼히 여길 것, 편중편애를 삼갈 것, 처권(妻權)에 눌리지 말 것, 처세에 밝을 것 등이다. 흥선대원군은 헌종의 7촌 아저씨이자 철종의 6촌형이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철종이 왕이 된 것은 안동 김씨들에 의한 것이었다. 세도정치를 계속 펼 수 있는 데 문제가 없을 인물이 강화도령 철종이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보령(寶齡) 15세까지 하지만 철종은 19세에 즉위했음에도 아는 것이 없어 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건강했던 철종은 너무도 편한 궁중 생활에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였다.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역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철종은 바로 그 강화에서 태어난 초동(梢童)이었다. 철종의 아들들이 죽자 후계자가 누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왕족인 이하전과 이하응이 물망에 올랐다. 도정 이하전(李夏銓)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정통 후계자였다. 이 상황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이하전 역모사건을 꾸몄다. 이하전은 강인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헌종 승하시 신왕의 후보자로 꼽혔던 사람이었다. 권돈인이 강추했으나 순원왕후 김씨가 철종을 선택한 것이다.

 

흥선군은 그간의 행실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하전은 왕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벌써 12년 전에 당했을 일이라 생각한다. 부인에게는 "12년을 더 살았으니 넉넉하지 않소?"라고 말한다. 흥선군은 이하전이 사사된 이후 더욱 어지럽고 거친 생활을 하는 한편 조대비가 자신을 부를 날을 기다렸다.

 

조대비의 부름을 받은 흥선은 자신의 아들 재황을 거론했다. 조성하는 흥선이 겉보기와 달리 대군, 왕자에게 지지 않는 단아한 귀인이라고 판단한다. 조성하는 서원 문제를 비롯 나라의 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은 흥선군 밖에는 없다고 판단한다.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는 운현궁의 천하장안이라 불렸다. 흥선은 천하장안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불렀다. 원형이정은 주역의 용어다.

 

김병국 역시 흥선군의 처신에 숨은 뜻을 알았다. 그리고 조대비와 결탁해 큰 일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았다. 김병국은 흥선의 정체를 호소할 경우 오히려 비웃음을 살 것이라 판단하고 눈감고 흥선에게 미래를 맡기기로 결심한다. 흥선군과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익종의 대를 이어 26대 조선 국왕으로 만들자는 밀약을 한다. 헌종이 위중할 때 순원왕후 김씨와 동생 김좌근이 헌종 승하시 강화도령을 모셔다가 순조의 대를 이어 25대 조선 국왕을 만들자고 한 것처럼.

 

조대비는 조씨 일문의 세도를 생각했지만 흥선군은 외척을 제거해 강한 왕권을 확립하는 데에 생각이 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대리를 하게 된 조대비에게 흥선군은 김씨들이 신을 모욕했을망정 무서워하지는 않는다며 종실의 다른 분을 추대하는 것보다 자신을 오히려 쉽게 볼 테니 극력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김씨 일족은 몰락을 지각하고 있었다. 왕으로 내세울 마땅한 자기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순조 대왕 대로부터 지금까지 삼대째 보름달과 같이 빛나는 영화에 취해 있었던 그들이다.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익성군으로 봉해 이미 절사된 익종 대왕(효명세자)의 대통을 부활하게 하라고 명한다.

 

흥선대원군은 생존해 대원군이 된 유일한 존재였다. 인조 부친 정원대원군, 선조 부친 덕흥대원군, 철종 부친 전계대원군 등은 사후 추존된 경우다. 영의정 하옥 김좌근은 흥선의 계략을 뒤늦고 알고 치를 떨었다. 특히 흥선군은 김좌근을 찾아가 이하전 사건 며칠 전 전하가 돌아가시면 아마 대개 이하전이 보위에 오르겠지요?란 말을 했다. 김좌근 입장으로서는 그 말에 부담을 느끼고 부랴부랴 역모사건을 꾸며낸 것이었다.

 

이재황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의 생친이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이 힘든 시절에 병국, 병학 헝제에게 신세를 적지 않게 졌으니 자신의 얼굴을 보아서 두 형제는 그냥 머물게 하고 김좌근은 아무리 순원 왕후 마마의 동기로되 무능한 노물에 지나지 않고 그 위에 독부 양씨가 있으니 실직을 깎을 것을 제안했다.

 

조대비의 조카이자 큰 역할을 한 조성하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으로 정3품 통정대부 우승지가 되었다. 운현궁은 붐비는 곳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노론 외의 소론, 북인, 남인 가운데서 추려내 요직에 앉히기로 결정한다. 김동인은 이렇게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전에는 비루먹은 개 한 마리 찾지 않던 흥선 댁이나 지금은 팔도 강산에서 매일 찾아드는 수없는 시민의 무리 때문에 수십 명의 궁리도 그 응대를 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이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은 오랫동안 쓸쓸하였던 만큰 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