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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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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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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짧은 역사 - 한 권으로 읽는 하버드 자연사 강의
앤드루 H. 놀 지음, 이한음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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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놀의 ‘지구의 짧은 역사’는 여덟 가지 지구를 소개한 책이다. 1) 화학적 지구. 2) 물리적 지구. 3) 생물학적 지구. 4) 산소 지구. 5) 동물 지구. 6) 초록 지구. 7) 격변의 지구. 8) 인간 지구 등이다. 이 책의 주지(主旨)는 셋이다. 1) “지구의 모든 것은 역동적이다.” 2) “대산소화 과정 및 흙은 물리적 과정과 생물학적 과정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3) ‘인간이 멸종으로 치닫는 현 상황의 책임자다.’ 등이다.

 

화학적 지구편에서는 우주와 그 역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가장 덧없이 사라지는 빛이라는 원천에서 나온다는 말이 관심을 끈다. 반면 우주의 건축자는 중력(重力)이다. 별빛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우주는 주로 수소 원자들이 퍼져 있는 차가운 곳이었다. 우리 행성을 이루는 철, 규소, 산소,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 질소, 인 같은 원소들은 후대의 별에서 기원했다. 빛이 우주의 역사를 말해준다면 암석은 우리 행성의 역사를 말해준다.(30 페이지)

 

이런 점에서 보면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는 오규원 시인의 시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 수 있다. 지구는 한 손으로 자신의 역사를 쓰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워버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우는 손이 더 바쁘게 움직였다.(32 페이지) 고요하게만 보이는 달도 시적 영감의 대상이기 이전에 격변의 산물이다.(35 페이지) 지구는 짙은 대기로 감싸여 있었지만 그 공기에는 산소가 없었다. 시간 여행자인 사람이 그 원시 지구로 간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51 페이지)

 

물리적 지구편에서는 지구 환경의 항상성은 융기와 침식의 균형을 통해 역동적으로 유지된다는 말이 핵심이다. 단층과 습곡은 지층이 수직 운동뿐 아니라 수평 운동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60 페이지) 지각의 무덤은 섭입대다. 섭입대는 한 지각판이 다른 지각판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지각의 암석을 원래 기원했던 맨틀로 돌려보내는 곳으로 지각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있다.(65 페이지)

 

생물학적 지구편에서는 단백질을 만들려면 DNA 명령문이 있어야 하고 거꾸로 DNA를 복제하려면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글이 눈길을 끈다.(91 페이지) 지구는 기나긴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생명의 행성이었다. 별의 진화 모형은 40억년전 태양의 밝기는 지금의 약 40퍼센트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가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은 것은 온실가스 때문이다.

 

온실가스는 21세기인 지금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취급받지만 더 정기적으로는 지구의 서식 가능한 기후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대기의 이산화탄소는 지금보다 농도가 100배 이상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지구의 표면에 액체 물이 유지될 만큼 지구를 따뜻하게 유지했을 것이다.(107 페이지) 무수한 실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생명의 기원으로 이어질 화학반응은 산소가 존재했을 때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지구임을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환경에서 출현했다. 물로 뒤덮여 있었고 육지는 거의 없었으며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많은 데 비해 산소는 거의 없었고 수소를 비롯한 기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펴져 있는, 온천처럼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세계였다. 시작은 이렇게 초라했지만 생명은 불어나고 다양해지면서 지구를 세균, 돌말, 세쿼이아, 우리로 가득 채웠다.(108 페이지)

 

산소 지구편에서는 남극의 얼음에 갇힌 물방울 가운데 200만년 이상 된 것이 없어 암석 기록에 새겨진 화학적 흔적을 토대로 원시 대기에 대해 추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암석과 광물의 조성은 형성될 때 공기와 물에 어떤 식으로 접촉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구 역사의 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지구의 대기와 대양에는 본질적으로 산소 기체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었다. 물론 무산소 지구에서도 생명(미생물)은 있었다.

 

오래 유지되던 지표면의 상태가 바뀐 것은 24억년전이다.(122 페이지) 햇빛이 들지만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탄소 순환이 일어났다. 지구의 유년기는 철기시대였다.(125 페이지) 지구 대기에 산소를 불어넣을 수 있는 과정은 오로지 산소를 생성하는 광합성뿐이다.(127 페이지) 지구 대산소화 사건은 대변혁이었고 이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은 남세균(藍細菌; 시아노박테리아)이었다. 남세균은 산소성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균이다.

 

인은 암석이 자연력에 풍화될 때 흘러나와 강물에 실려 바다로 유입된다. 광합성 생물은 이 인을 흡수하여 생명 분자를 만드는 데 쓴다. (130 페이지) 지구가 성숙함에 따라 크고 안정적인 대륙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침식되어서 바다로 유입되는 인의 양도 늘어났다. 이 결과 남세균이 생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섰다. 남세균이 진화함에 따라 대산소화사건이 일어났다. 대산소화 사건은 단순히 지구의 물리적 발달의 산물이 아니라 지구와 생명의 상호작용의 결과다.(131 페이지)

 

동물지구편에서는 에디아카라 화석군이 나온다. 선캄브리아기 시대 말에 형성된 세계 각지의 해성층에서 발견되는 화석군이다. 에디아카라는 그 화석군이 최초로 발견된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지명이다. 에디아카라기는 2004년에야 국제 지질연대표에 추가된 시대다.(149 페이지) 저자는 “에디아카라 화석과 캄브리아기 화석은 종류가 놀라울 만큼 다르지만 관찰된 생물학적 차이가 진화가 아니라 보존 양상과 환경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159 페이지)

 

캄브리아기의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했다는 증거는 몇 가지 방면에서 나온다. 눈덩이 지구의 꽁꽁 언 기후에서 벗어난 뒤 진정한 온실이 된 셈이었다.(164 페이지)

 

초록 지구편에서는 육상식물에 대해 알 수 있다. 오늘날 약 40만종의 육상식물은 지구 광합성의 절반과 지구 총 생물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지구를 초록으로 뒤덮은 식물은 우주에서도 보이는 우리 행성의 주된 특징 중 하나다.(171 페이지) 저자는 많은 세포학적 특징들과 분자생물학적 특징을 볼 때 육상식물은 민물에 사는 녹조로부터 진화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물론 강과 연못에서 마른 땅으로 진화 여행을 하려면 건조 방지, 기계적 지지, 자원 획득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물에 에워싸여 있을 때 광합성 생물은 마를 위험이 없지만 육지에 있을 때는 세포에서 계속 수증기가 증발한다. 그래서 민물을 계속 빨아들이지 않는다면 금방 시들어 죽을 것이다. 수생 조류에게 물은 몸을 받쳐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지만 육상식물에게 공기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육지의 광합성이 필연적으로 물 손실을 수반하므로 식물은 주변에서 물을 흡수하여 몸 전체로 수송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175 페이지)

 

대다수 식물에서는 영양소 흡수의 상당 부분을 뿌리와 긴밀한 협력을 맺고 살아가는 균류가 맡는다. 식물은 물과 영양소를 위쪽으로 운반하고 광합성을 통해 생산한 먹이를 온몸으로 보내야 한다. 이 일을 관다발이 수행한다.(177 페이지) 관다발에서 물을 운반하는 세포는 벽이 두껍다. 이 두꺼운 벽은 식물이 서 있도록 지탱하는 기계적 강도를 제공한다.

 

저자는 책 허파(book lung)를 말한다. 절지동물문 거미류의 호흡 기관을 책 허파라고 한다. 배의 아래쪽 앞에 몸 표면이 푹 패어서 생긴 주머니 속에 많은 얇은 주름이 책장이 겹쳐진 것처럼 쌓여 있다고 해서 책 허파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서폐(書肺), 폐서(肺書)라고도 한다. 책 허파 안에는 공기와 접촉하는 표면적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책장이 접혀 있는 것처럼 복잡하게 접혀 있는 조직이 있다. 책 허파는 수생 조상의 아가미에서 진화한 듯 하다.

 

저자는 실러캔스와 틱타알릭을 언급한다. 흙은 생물의 육지 정복의 산물이다. 우리는 흙이 지구 표면이 물리적으로 변형된 형태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과정과 생물학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육상 생태계가 발달할 때 기름진 토양도 함께 발달한다.(185 페이지) 저자는 공룡은 멸종한 것이 아니라 참새, 지빠귀, 비둘기 등 살아 있는 조류들로 이어졌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조류가 공룡의 후손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헉슬리에게서 유래한다.

 

격변의 지구편에서는 충격 석영이 관심을 끈다. 충격 석영은 일시적으로 온도와 압력이 높아질 때 만들어진다. 거대한 운석이 충돌할 때 생긴다는 의미다. 지름 200미터의 거대한 운석 크레이터가 퇴적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207 페이지) 현재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생물 다양성은 모든 면에서 집단유전학 못지않게 대멸종과 환경 변화의 산물이다.(209 페이지)

 

지질학계에서 트랩은 현무암이나 다른 검은 화산암이 대규모로 쌓여 있는 용암대지를 가리킨다. 대개 마치 계단처럼 층층히 겹쳐 올라가면서 쌓여 있다. 계단(trappa)이라는 스웨덴어에서 유래했다.(214, 215 페이지) 철원 한탄강을 옛날에 체천이라 부른 것이 생각난다. 체는 계단을 의미한다. 시베리아 트랩 화산 활동은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로 방출해 온실효과를 일으켰다. 그 결과 지구 온난화가 일어났다.(217 페이지)

 

대멸종은 고생대를 끝장내고 중생대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백악기 말 격변은 중생대라는 책을 덮고서 우리의 신생대 책을 펼쳤다.(219 페이지) 2억 2천 5백만년전에 생성된 시베리아 트랩(페름기 말 대멸종을 낳은 화산 폭발의 결과물)은 종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질학적으로 볼 때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저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반복되는 대멸종 사건들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환경 교란이 빠르게 일어났다는 점은 공통점이라고 말한다.(225 페이지) 대멸종은 지구 내에서 또는 태양계의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통해 추진되는 일시적이지만 심각한 환경 교란을 반영한다. 대멸종은 진화 역사를 빚어내는 데 분명히 주된 역할을 했다. 현대 세계가 포유류로 가득한 것은 어느 정도는 공룡이 멸종했기 때문이다. 어류는 백악기 말 대멸종으로 암모나이트가 사라진 뒤에야 다양해졌다.

 

인간 지구편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오래 씹는 데 알맞은 커다란 어금니가 있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서 번성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모로코의 30만년 된 지층에서 나왔다.(239 페이지) 빙하기 지구에서 우리의 직계 조상이 살고 있을 때 사람속은 적어도 세 종이 더 있었다. 네안데르탈인, 호모 플로렌시엔시스, 데니소바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신들이 동물을 창조했을 때 각 동물에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맡겼다. 에피메테우스가 치타에게는 빨리 달리는 능력을, 개에게는 갑옷을, 코끼리에게는 커다란 몸집을 부여했다. 사람은 불행히도 가장 나중에 서 있었기에 가질 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언어, 불, 기술의 능력을 훔쳐서 사람에게 부여했다.(243 페이지) 언어, 불 제어 능력, 도구 제작 능력을 갖춤으로써 인류는 동물계의 다른 종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인류는 식량이나 거래를 위해 동식물을 선택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종을 본래의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김으로써 생물 다양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250 페이지) 무엇보다 남획(濫獲)이 심각하다. 광합성과 호흡은 서로 거의 균형을 이룬다. 완전히는 아니다. 호흡 및 관련 과정을 피해서 퇴적물이 되는 유기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유기물 중 일부는 변형되어 석유, 석탄, 천연가스를 형성한다.(252, 253 페이지)

 

이런 화석 연료들은 수백만년에 걸쳐서 아주 천천히 지표면의 탄소 순환 과정으로 복귀할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화산 분출을 통해 대기로 추가되고 화학적 풍화를 통해 제거된다. 제거된 탄소는 석회암으로 쌓인다. 기후 변화는 많은 종의 분포 양상을 바꿀 것이다. 예전에 서로 만날 일이 없었던 종들이 한곳에 모이게 될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종간 경쟁과 생태계 복원력에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261 페이지) 해수면 상승이 큰 문제다. 대기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바다도 따뜻해진다.

 

바닷물은 따뜻해질수록 물에 덜 녹게 된다. 바다에서 산소가 사라질 것이다. 산성화가 진행될 것이다. 인류가 일으킨 세계적 변화와 연관된 모든 현상 중에서 아마 가장 놀라운 점은 인류의 반응일 것이다. 현재까지 인류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264 페이지) 저자는 전 세계가 힘을 모은다면 우리는 안전하고 온전한 세계를 물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는 우리의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2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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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 듣기의 기술이 바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케이트 머피 지음, 김성환.최설민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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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기술이라 정의했다. 기술이란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사랑은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또는 감정이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듣기는 어떤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못 견디고 조급해 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 타자에 귀기울이지 않는 시대에 듣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산업조직심리학 박사 출신의 인터뷰 전문 기자인 케이트 머피의 ‘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를 통해 그 점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듣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는 누군가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 정의한다.(3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듣기와 연관되며(23 페이지) 듣기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미덕이다.(40 페이지)

 

듣기는 창의성의 원동력이다.(126 페이지) 듣기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기술이다. 온갖 유형의 사람들과 미리 짜인 각본 없이 제삼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상호작용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습득되는 매우 특별한 기술이 듣기인 것이다.(43 페이지)

 

말을 건네는 사람은 물론 말하는 ‘당신‘ 자신까지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미덕이 듣기다. 듣기는 상대가 말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61 페이지) 듣기는 더 나아가 생존에 필수적이기까지 하다.(57 페이지) 청각이 물리적 측면이자 수동적 측면이라면 듣기는 마음가짐의 측면이자 능동적 측면이다.

 

우리는 듣기라는 매우 특별한 기술을 통해 이해에 이른다. 듣기의 목표인 이해 역시 노력을 필요로 한다.(45 페이지) 그렇다면 소통이 잘 되는 대화 당사자들은 감정 차원의 만족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뇌파 공명(共鳴)으로 드러난다.(45 페이지) 어린 시절 양육자와 아이의 애착에도 적용되는 공명은 내부로 침투하여 감정뿐 아니라 몸까지 뒤흔들어놓는 목소리를 통해 실현된다.(57 페이지)

 

잘 먹어야 한다(Il faut bien manger)는 말이 있지만 잘 들어야 한다. 잘 듣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상대를 향한 배려와 관심을 표출하는 행위다.(54 페이지) 사람은 자기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을 때(26 페이지), 그리고 의미 있는 교감의 기회를 놓칠 때(55 페이지) 외로움을 느낀다.(55 페이지)

 

듣기란 호기심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이다. 누군가에게 호기심이 부족하다면 이는 제대로 된 질문을 받지 못한 탓이다.(64 페이지) 호기심이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나 질문에 의해 자극된다. 듣기 능력은 끊임없이 정제되고 증대되면서 예술적 경지에 가까운 수준에 이를 수 있다.(83 페이지)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마저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다. 타자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지만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중 누구도 항상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없다(40 페이지)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의 낡은 신경 연결망을 강화(50 페이지)해서는 안 되듯 상대에 주의를 기울여 그의 새로운 변화상을 반영해 바라보아야 한다(79 페이지)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신의 말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할 때보다 설명이나 평가가 담긴 말을 건넬 때 더 이해받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93 페이지) 단 주의할 사실은 사람은 냉철한 이성보다 정서에 더 이끌린다는 점이다.(97 페이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잘 듣는 기술은 주의력과 집중력,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 등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102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주의가 산만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에 할 점잖거나 인상적인 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4 페이지)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똑똑한 사람일수록 옆길로 새는 경우가 많고 상대의 말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높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점잖거나 인상적인 말들을 생각하려 하지 말거나 평소 대단한 내공을 쌓아 상대에 온전히 귀 기울여도 그런 말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공부하지 않고 생각하기만 잘 하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역설적인 사실은 올바른 표현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상대의 말을 더 놓치게 되고 그 결과 잘못된 말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생각이나 주의력이 분산되면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초점을 회복하라는, 명상을 응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06 페이지) 또한 상대의 말이 끝나고 잠시 멈춰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볼 것도 주문한다.(108 페이지) 투쟁 - 도피 반응이 있다. 투쟁(fight)할지 도피(flight)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가 말하는 사람의 신념에 적대적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경우 뇌는 곰에게 쫓길 때와 같은 활동 패턴을 보인다고 한다.(115 페이지)

 

해결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반대 의견을 품은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숨을 고르면서 상대의 논리적 결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던질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119 페이지) 자신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짜증을 내지도 않고 논박하느라 온라인상에서 악담을 퍼붓지도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반대되는 관점에 귀 기울여 자신의 생각을 재조직하는 과정을 배움이라 표현했다.(123 페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선 누구나 자신의 한계와 상황, 관점을 바로 보고 생각하는 훈련을 부단히 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무책임하거나 사리에 어긋난 편협한 생각과 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저자는 현상의 이면에 자리하는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 애쓸 것을, 말끔한 해명이나 즉각적 해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런 열린 태도가 편협함의 반대이자 창의성의 뿌리다.(124, 125 페이지) 이런 인지 복잡성은 너그러움은 물론 바람직한 것을 생산하는 능력과 관계된다.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관점도 타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상대방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수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126 페이지)

 

책에는 거부감 없는 질문으로 사람들의 사생활을 깊이 있게 드러내는 나오미라는 전문 모더레이터도 등장한다. 나오미의 비결은 듣는 데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엄청난 양의 말을 듣는다는 뜻이다. 이는 전공 관련 서적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책을 읽고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을 닮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관건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하려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143 페이지) 잘 들어야 적절한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웃음은 정직성과 친밀성, 친근감의 부산물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머는 듣기에서 비롯되는 유대감의 한 형태다.(158 페이지) 이야기를 통제하려는 사람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듣기 능력이 탁월하고 대화의 함의를 탐지해내는 능력을 대화 민감성이라 한다. 이는 공감의 전제 조건이다. 공감이란 예전 경험에서 느끼거나 배운 감정들을 소환하여 나중의 경험에 적용하는 능력이다.(162 페이지) 대화 민감성은 다양한 경험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며 모순되는 관점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인 인지 복잡성과도 관계한다.(126, 162 페이지)

 

귀 기울일 말은 여섯 번째 감각인 직관이 축적된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162 페이지) 거짓과 속임수는 겨짓말을 하는 사람과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말도 흥미롭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잘 듣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애매한 점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한 요인이다. 번거롭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기도 하고 물으면 둔한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던지지 않은 질문이야말로 최악의 질문이라는 말이 있다.; 193 페이지)

 

우리가 혼잣말을 할 때 사용하는 두뇌 영역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두뇌 영역이 완전히 일치한다(180 페이지)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은 이로 인해서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내적 독백의 어조와 질을 결정한다. 내적 독백은 인지 복잡성을 증진시키고 강화한다. 자신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기비판적인 내면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과 남을 비방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질적으로 다르다.(181 페이지) 독서가 내적 독백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읽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나름대로 소리내기 때문이다.(183 페이지) 여성이 남성보다 듣기 능력이 뛰어나지만 형편 없는 여성들도 있고 비범한 남성들도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내적 혼돈과 마주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라고 말한다.(196 페이지) 상대의 고민을 들어준다 해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할뿐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말하는 순간 신뢰를 잃는다고 덧붙인다.(197 페이지)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신의 말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할 때보다 설명이나 평가가 담긴 말을 건넬 때 더 이해받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93 페이지) 상대의 말을 평하는 것과 상대에게 무엇을 하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다른가? 평가 정도는 하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의미인가 싶다.

 

저자는 상대가 당신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당신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해결책을 제시해주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의 경험담이나 충고 등은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203 페이지) 어떤 경우든 가르치려 하고 교정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들어야 말할 수 있듯 들으려면 질문해야 한다. 단 의미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상대의 내면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기만 해도 당신은 그들 스스로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울 수 있다.“(202 페이지)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바탕으로 한 개방적이고 호기심 어린 질문은 없고 현실적인 질문들로만 채워지면 문제다.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상대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겠는가?”(207 페이지) 이 부분에서 다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 아버지다운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머니다운 양심이란 어떤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했다면 너는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어야 하고 나의 마음에 들고 싶으면 너는 네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 듣는 것은 이해하고 배려하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제이기에 성숙한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이 아닐지?

 

서양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0.5초 이상 지속되는 침묵을 반감이나 거부, 외면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서둘러 말을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침묵이 단 4초 동안만 지속되어도 사람들은 그 침묵을 자신의 견해에 대한 경계로 간주하고 기존 견해를 수정하거나 누그러뜨리곤 한다.(252 페이지) 하지만 훌륭한 듣기 능력을 갖추려면 침묵의 순간들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253 페이지)

 

상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대화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254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효용성 있는 청취 대상에는 뒷담화도 포함된다.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딋담화를 들은 사람들은 그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 받고 부정적인 뒷담화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좋은 느낌을 품게 된다고 한다.(260 페이지)

 

이 부분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은 뒷담화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뒷담화라 할 수는 없지만 유용하다는 점에서 뒷담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후일담은 비교적 죄책감이나 부담감 적게 늘어놓을 수 있다. 어떻든 뒷담화는 적응에 필수적인 지적 활동이다.(262 페이지)

 

영국의 진화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로빈 던바는 진정으로 악의적인 뒷담화는 전체의 3~4%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뒷담화는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지위(변화)에 대한 것이다. 뒷담화에 귀 기울여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뒷담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원숭이의 털 고르기 행위다. 원시 인류는 원숭이들처럼 서로 털 고르기를 해주는 행위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지했다. 하지만 점차 지성이 발달하고 활동의 복잡성과 공동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언어가 털 고르기를 대신하게 되었다.(263 페이지)

 

털 고르기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대일로 할 수밖에 없지만 뒷담화는 시간도 더 적게 들고 몇 명이서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는 채집과 사냥을 하는 동안 동료들과 협력함으로써 종으로서 생존할 수 있었다. 말하기 만큼 듣기도 중요하다. 복잡해지고, 간접적인 면이 강해지고, 고립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은 그 만큼 듣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들어야 한다. 듣기는 우리를 인간적으로 연결시켜주는 핵심 요인이다.(269 페이지) 우리 중 누구도 항상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없다(40 페이지)는 말을 하는 저자는 모든 사람의 말에 다 귀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구에게 우리의 시간을 내주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273 페이지)

 

영국의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는 우리가 대화 상황에서 1) 진실, 2)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정보들‘, 3) 일관성 있고 논리적인 진행, 4) 간략하고 질서 있고 모호하지 않은 내용 등을 기대한다고 정리했다. 문득 나는 자유분방하지 못한 채 뒷담화도 논리를 갖추고 두서 있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저자는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대화는 어떤 형태로든 각인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내가 전한 지식 및 뒷담화 형태의 정보가 대화 상대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뒷담화조차 논리적으로 한 것은 사람들의 비판에 직면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나도 상대도 시간이 제한적이기에 가능한 한 의미 있는 말을 하려 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관심을 거두는 가장 흔한 이유는 바로 상대방의 비판 때문이라고 말한다.(289 페이지) 저자는 이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하면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단 저자는 비판이 부당하다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오해를 풀어 자신의 진의를 전달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점이 중요하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지만 지식 전달이 주(主)이기에 무방하다고 생각해왔다. 지식 전달이라고 했지만 자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관종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진단이다. 관종이라는 말을 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정녕 그대는 말할 거리, 자랑할 지식이 많음에도 자제하는가?

 

전에 썼지만 나는 자랑을 많이 하기에 공손한 어조로, 가르친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말한다. 나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공유하려 한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지인이 생각을 물은 뒤 자기 답변에 귀 기울여주었을 때 그때까지 받은 것 중 가장 큰 찬사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는 말을 했다.(296 페이지) 백번 공감하고도 남는 말이다.

 

이 책은 귀한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책이다. 나를 잘 아는 친구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받았다. 감사하다. 모두(冒頭)애서 에리히 프롬을 인용했기에 하는 말이지만 프롬은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 사람, 사상, 자연과 관련된 주제에 거리를 두기 위하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말을 했다.(범우사 출판 ’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225 페이지)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위해 또는 관심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를 이야기 해왔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기와 수용하기다. 내게 중요한 책을 선물해준 친구의 말에 더 아니 제대로 귀 기울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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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T 사용설명서 - 블록체인과 메타버스가 바꿀 거의 모든 돈의 미래
맷 포트나우.큐해리슨 테리 지음, 남경보 옮김, 이장우 감수 / 여의도책방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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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말의 이니셜인 NFT(non fungible token)는 창작자가 중개자 없이 거래하게 해주는 도구다. NFT는 예술가가 짧은 코드 조각을 그들의 작품에 넣어 불법복제의 우려 없이 작품 유통을 돕고 팬들에게 직접 지불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NFT는 예술가들에게 지식재산권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아줄 뿐 아니라 더 나은 투명성을 보장하고 로열티나 판매 대금의 분배나 추적도 가능하게 한다.

 

현재 신생 NFT는 초기 구글과 닮았다. 멤버쉽 카드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앞으로 NFT는 분명 훨씬 더 다양하게 활용될 것이다. NFT는 암호화폐에 사용되는 기술인 블록체인을 통해 거래 내역이 검증된 고유한 디지털 아이템을 의미한다, NFT의 토큰은 블록체인에서 왔다. 암호화폐의 블록체인이란 그 암호화폐로 성사된 최초의 거래를 포함한 모든 결제 목록이다.

 

토큰은 코인과 다르다. 비트코인, 라이트코인, 도지코인, 이더리움 같은 코인 형태의 암호화폐는 자체 블록체인을 가지고 있지만 토큰은 자체 블록체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암호화폐를 의미한다. 토큰은 다른 코인의 블록체인을 활용한다. 모든 NFT는 암호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만 NFT의 최대 공급량은 1이다. 이렇기에 NFT는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다.

 

2021년 초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의 NFT 작품이 크리스티에서 800억 원 넘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이는 NFT의 가치를 실감하게 하는 신호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미술계의 큰 비밀은 위조 문제다. 스위스의 FAEL(fine art expert institute)에 의하면 전 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미술품의 50%가 위작이거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속인 것이다.

 

NFT는 전통 미술계와 수집품 업계를 괴롭히는 핵심 문제인 작품의 진품 여부 및 프로비넌스 이슈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몇 가지 추가적인 이점이 있다. 미술계와 달리 NFT는 작가의 영혼을 소환해 작품을 직접 그렸는지 물어볼 감정사와 같은 전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NFT의 진위는 블록체인을 통해 검증된다. 이더리움 기반 NFT의 경우 NFT,의 스마트 컨트랙트는 42자리 이더리움 주소를 갖는다.

 

아무나 블록 익스플로러에 가서 NFT의 주소를 검색 창에 넣으면 그 NFT의 스마트 컨트랙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블록 익스플로러는 NFT가 처음 만들어진 주소도 보여줄 것이다. 만약 스마트 컨트랙트의 주소가 작가의 주소와 일치하면 그 작품은 진품이다. 불확실성은 전혀 없다. NFT는 작가에서부터 현재 소유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소장 기록인 프로비넌스를 내장하고 있다. 블록체인상의 모든 거래는 검증을 거쳐야 한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 네트워크다. 물론 NFT도 완벽하지 않다. 그 중 하나가 가스피이다. 줄여서 가스라고 한다. 이더리움 네트워크 상에서 거래할 때 지급하는 비용이다. 블록체인에 관계된 프로젝트도 언제든지 해킹당할 수 있다. ‘NFT 사용 설명서’는 NFT에 대한 정보들을 상세히 다룬 책이다. 꽤 전문적인 영역을 다룬 책이지만 찬찬히 읽으면 도움이 된다. 오스틴 클레온의 ‘당신의 작품을 보여주세요’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작품에 주목받기 위한 원칙으로 제시한 열 가지가 꽤 흥미롭다. 1. 천재가 아니어도 좋다. 2.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자. 3. 사소한 것이라도 매일 공유하자. 4. 호기심의 캐비닛을 열자. 5.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자.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남에게 전하자. 7. 인간 스팸 메일이 되지 말자. 8. 두들겨 맞는 법을 배우자. 9. 돈 버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 10. 끝까지 기다리자.

 

이 원칙은 예술가, 디자이너, 웹 개발자. 코미디언 등 모두에게 적용되며 NFT 창작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만든 NFT를 널리 알리고 수요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마지막 챕터는 NFT의 미래다.

 

저자들은 NFT의 미래는 밝다고 말한다. NFT를 단지 투기 목적의 예술 자산으로 바라보는 것은 수많은 NFT의 미래 효용을 간과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NFT의 미래를 논할 때 반드시 다뤄야 할 세 가지 영역은 메타버스, 비담보가능자산, 디지털 지갑 등이다. 메타버스를 비유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영화다. NFT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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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침묵
박정선 지음 / 푸른사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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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집 ‘존재와 사유’에서 이회영의 삶을 비극적 세계관으로 설명한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박정선의 장편이다. 제목으로 쓰인 ‘백년 동안의 침묵’에서 백년이란 우당(友堂) 이회영 독립투사가 저자에게 알려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의미한다. 이 책은 2021년 11월 남산, 예장 공원 해설에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발견하고 읽은 책이다.

 

이 해설 코스에 명동성당 앞 이회영 길, 이회영 생가 터, 2021년 6월 개관한 이회영 기념관이 포함되었다. 독립투사 이회영은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했고 후에 아나키스트가 되어 활약하다가 조카(아버지의 사촌 형 이유원에게 양자로 ‘출계; 出系’해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모두 쏟아부은 ‘중형; 仲兄’ 이석영의 둘째 아들 이규서)의 밀고 때문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모질고 혹독한 고문에도 조국을 버리지 않고 끝내 의리를 지키다 순국한 비극적 영웅이다.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조선 사람은 일본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듯 무단 통치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나라는 망했지만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승 대감의 여섯 아들들(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은 중국 망명을 결의한다. 백사 이항복으로 인한 대한 공신의 후예로서 세세토록 국가의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해야 하기에 당연히 생사를 막론하고 가족을 모두 인솔하고 일제치하를 떠나 중국 땅으로 망명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다.

 

그들은 재산을 팔아 만든 독립자금을 지닌 채 열두 대의 삼두 마차에 나눠 타고 물빛이 오리의 머리색처럼 북청색이라 해서 이름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그들이 망명한 뒤 다른 동지들이 가을부터 겨울 내내 압록강을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 관건은 군사기지 설립에 필요한 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지인들은 땅 팔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런 상항에서 이회영이 난제를 해결했다. 총통 원세개와의 개인적 인연에 힘입은 바다.

 

이회영이 원세개를 만난 것은 20대 중반이었고 중국으로 망명했을 당시 이회영은 원세개를 못본 지 16년이나 된 상태였다. 원세개는 조선에서 10년이나 살았고 조선 때문에 말단에서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청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내정간섭까지 하는 등 오만방자했던 원세개는 다행히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 대감의 말은 잘 듣는 편이었고 여덟 살 아래의 이회영을 좋아했다.

 

원세개는 이회영의 석파난(石派蘭)을 좋아했다. 아니 석파난 때문에 이회영을 좋아했다. 원세개는 삼전지묘법(三轉之妙法)을 입에 올리며 석파난에서 바람 소리와 심오한 향기가 난다고 말했다. 삼전지묘법은 난 잎을 세 번 돌려 빼는 기법이다. 이회영에게 난을 그려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자고 한 사람은 서예가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 1870 - 1935)이었다. 원세개는 이회영의 퉁소 소리도 좋아했다. 원세개는 이회영의 퉁소 소리를 듣고 향수(鄕愁)를 달랬다.

 

이 소설에서 퉁소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하는 악기다. 석파난과 함께 원세개의 마음을 움직인 악기이자 이회영의 22년(1910년 - 1932년)의 망명생활의 한(恨)을 위무(慰撫)해준 악기였다. 이회영은 분신처럼 지니던 그런 악기를 마지막 순간에 챙기지 못했다. 만주 군벌 장학량을 만나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조직을 만들고 일본 광동군 사령관 무토를 암살하는 거사를 수행하기 위해 가는 길에 형님 이석영의 집에 들렀다가 챙기지 못하고 나온 것이었다.

 

뤼순감옥에서 만난 단재가 “그림자도 지워버리시는 분”이라 칭한 것처럼 용의주도했던 혁명가 이회영은 형제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중형 이석영에게 북만주로 간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말을 이규서가 듣고 일본 밀정에 고하는 바람에 이회영은 체포되어 영웅적 생애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이석영은 동생 이회영이 챙기지 못하고 남기고 간 퉁소를 불며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 있는가?”, “내 아우를 기다린 게요. 만주로 가면서 꼭 오겠다고 그날 밤 이 늙은이와 약속했거든.”이란 자문자답을 했다. 이석영은 아우 이회영이 분신처럼 대했던 퉁소를 놓고 간 것을 자신에게 다시 오겠다는 의미로 읽은 것이었다.

 

국수집에서 외상으로 국수를 얻어먹던 이석영은 음식 먹기를 거부하고 홀로 삶을 마쳤다. 그때 그는 80세였다. 66세로 삶을 다한 아우 이회영이 죽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소설에는 이회영과 관계한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1) 우당 이회영이 영구(榮求)라는 호를 지어준 두 번째 아내 이은숙은 이회영보다 스무 살이나 적은 사람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 가문의 당찬 여인이었다. 이은숙의 아버지가 무남독녀인 은숙을 은숙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많은 이회영에게 시집보낸 것은 이회영 가문이 명문가여서가 아니라 지사(志士; 절의가 있는 선비) 집안이어서였다.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기 2년 전인 1908년의 일이었다.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온갖 고생을 다한 이은숙은 24년의 결혼 생활 동안 우당과는 13년 밖에 함께 하지 못했다.

 

프롤로그, 본문, 에필로그 이루어진 소설 가운데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우당은 아내 이은숙의 꿈에 나타난다. “내 사명이 끝났으니 이제 다른 신지(新地)로 가야 하오.”, “저도 함께 가렵니다.”, “영구는 나와 함께 가지 못하오.”, “그래도 따라가렵니다.”, “아니 되오.”..1908년 혼인식을 치른 스무 살의 이은숙과 마흔 둘의 이회영은 첫날 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울 때 정초식에서 불렀던 애국가를 불렀다. “두 사람은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지결의를 맺는 심정이었다.”

 

2) 중형 이석영은 양부 이유원의 막대한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쏟아부어 결과적으로 양부의 이름을 알렸다. 3) 이회영보다 세 살 적은 이상설(李相卨)은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의 저동(苧洞) 댁 옆의 이용우 대감 댁에 출계(出系; 대를 잇는 양자가 되는 것)하기 위해 진천에서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온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이다. 훗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활약한 이상설은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한 스승이었고 우당 이회영에게 해외의 한인 자녀들을 교육하여 독립군으로 길러야 한다는 뜻을 표명한 선각자였다. 1906년 이상설이 중심이 되어 만주 용정에 설립한 신학문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瑞甸書塾)은 1년만에 폐교된 뒤 명동서숙으로 승계되었다.

 

4) 뱃사공 첸징우를 빼놓을 수 없다. 첸징우 덕에 이회영 가족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첸징우는 이회영이 사례비로 준 돈을 종자돈 삼아 후에 큰 배의 선주가 되었다. 상해에서 다렌을 오가는 유람선주가 된 첸징우가 이회영에게 손님을 받지 않고 이회영만을 모시고 황포강을 건너겠다는 제의를 하지만 이회영은 다렌 부두에 나와 자신이 탄 남창호를 기다릴 동지들을 생각해 거절한다.(다렌은 만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일본 요원들은 이규서의 밀고를 받고 40명의 승객이 탄 여객선에서 정확히 이회영을 찾아냈다. 젊은 투사들, 가족 등이 중대한 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나서겠다는 이회영을 만류하자 이회영은 언제까지 늙으면 들어앉아야 하고 젊은이는 불속이라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 것인가, 늙었으니 초라한 행색으로 가족을 찾아가는 것처럼 하면 누가 혁명가로 보겠는가, 적임자는 자신이라는 말로 맞섰다. 첸징우는 남창호에서 일본 경비정으로 옮겨지는 이회영을 보고 따라가 구하려다가 일경들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던 이회영은 고문기술자이자 다렌 수상경찰서장 후쿠다 오시이로부터 “충성스러운 밀고자”의 이름을 듣고 절규한다. 후쿠다 오시이는 망명 전 민족자본을 만들기 위해 왕실 소유의 개성 땅을 빌려 대규모 인삼 재배를 시작한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우리 청년들을 보며 일본에 맞서려는 야심을 가진 혁명가의 눈을 보았었다. 당시 후쿠다는 수확을 앞둔 2만평의 인삼을 군인들을 동원해 모조리 도둑질해갔다. 이회영은 당시 경무청이 도리어 인삼재배가 무허가라고 엄포를 놓자 격분해 경무청과 후쿠다 고문의 방문을 부수어 구금되었다가 고종의 개입으로 방면되었다.

 

이회영이 민족자본을 만드는 데 뛰어든 것은 이상설이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올 동안 상동청년회 동지들과 민족자본을 만들겠다고 공언(公言)한 데 따른 것이다. 상동(尙洞), 하면 전덕기(全德基; 1875 -1914)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던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한 데 이어 신학 교육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상동은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던 곳에 그의 성을 따 지은 동네 이름이다.(‘상; 尙’은 후백제의 목천 사람들이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하자 왕건이 내린 코끼리를 뜻하는 상(象)이란 성을 후에 바꾼 것이다. 1908년 이회영이 신식 결혼식을 거행한 상동교회는 상진 대감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상동교회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변해가자 스크랜튼이 정치적인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전덕기는 “불의와 정의는 언제나 정치에서 시작되고 정치에서 실현”된다는 말을 한다.

 

이회영은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쫓기기도 했다. 물론 나석주의 의거를 기획한 사람은 유림(儒林) 대표 심산(心山) 김창숙(1879 - 1962) 선생이었다. 조선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된 유림이 그나마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심산 덕분이다. 이회영의 동생 성재 이시영, 이회영 본인, 이상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이다. 각각 그들의 나이 17세, 25세, 22세의 일이다. 단재(丹齋) 신채호도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두루 읽고 후에 성균관에 입교한 유학 진영의 사학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돋보이는 것은 이회영의 열린 정신과 선진적 혜안이다. 이회영은 여덟 살의 나이에 일본을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나라로 규정했는가 하면 수재(水災)를 당한 사람들을 보며 아버지 이유승 대감에게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우리 집안이 솔선해서 곳간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42세에 상동교회에서 신식 결혼을 올렸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개화 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여성의 재혼을 백안시하던 시대에 스무살에 청상이 된 누나를 거짓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재혼을 시킨 것도 대단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노비들을 해방시킨 것도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노비 출신들도 서간도에 간 것은 평등한 신분이 된 그들이 원해서였다.)

 

안온(安穩)한 삶을 버리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길에 나선 투사 이회영의 지조(志操)와 절의(節義)에 감동하며 책을 읽었다. 안타깝고 비장하게 읽히는 이 소설은 일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인상적인 점은 이회영을 비롯 관련 인물들이 불가피하게 때로 자발적으로 맞닥뜨리는 혹독함 사이 사이에 만들어가는 짙은 서정성이다. 이회영이 석파난을 그려 독립운동자금을 만드는 대목은 예술의 무목적성과 목적성이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이다. 이상설과 이회영이 만나 감동적인 면모로 낙조(落照)를 이야기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우당 형은 매번 지는 해에 넋을 놓습니다.”란 이상설의 말, 단풍이 붉으면 인삼이 살이 찌고 향이 짙어진다는 말,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회영이 말술을 마시는 원세개와 어울리며 한 “술은 차를 대신할 수 없으니 차는 술을 대신하는 법”이라는 말 등은 비극적 삶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는 장치이자 그 자체로 예술적인 부분이다. 남산에서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서울’을 자칫 일본군의 발길에 치기 전에 결단하라는 독촉으로 읽는 부분은 또 어떤가. 비극적이지만 한탄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예술성과 사상성이 조화를 이루어 이회영 선생에 대해 충분히, 그리고 바로 알도록 해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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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0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 박정선 님이 저자인 거 같군요.
이런 역작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책 담아갑니다. 리뷰 고맙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1-12-03 18:33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좋은 책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