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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읽고 쓰고 배우는 법
고미숙 지음 / 작은길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미숙의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은 오행(五行)의 리듬이 천지만물에 두루 작용하지만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4()라는 전제하에 고전(古典)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것으로 짝지어 설명한 책이다. 가령 봄은 목(), 배움과 우정, 여름은 화(), 열정과 자유, 가을은 금(), 수렴과 성장, 겨울은 수(), 지혜와 유머 등이다. ()는 환절기이다.

 

세분하면 봄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임꺽정등이, 여름에는 장자(莊子)’, ‘그리스인 조르바’, ‘주자어류선집등이, 가을에는 오딧세이아’, ‘구운몽등이, 겨울에는 크리슈나무르의 마지막 일기’, ‘동의보감등이 속한다.

 

오행(五行)의 관건은 상생(相生) 상극(相克)의 균형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과정을 오롯하게 통과한다.”(44 페이지)는 구절을 보라. 여름에 포함된 산해경편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사물은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을 거쳐서야 이상해지는 것이기에 이상함은 결국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이 이상한 것은 아니”(70 페이지)라는 말이다.

 

이 말에 관심이 가는 것은 유식무경(唯識無境)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유식 불교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거나 내면적으로 상상하고 착각한 것 그대로의 세상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시공을 뛰어넘어 고전을 읽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유용성과 비전이다.(74 페이지)

 

주자(朱子)’편에서 우리는 주자도 처음부터 주자주의자였던 것은 아니고 쉬지 않고 배우고 익혀 새로운 길을 열어간 학인(95 페이지)이라는 사실과 주자 사후 주자학은 본인의 염원과 다르게 (원나라 이후) 국가학이 되어 도그마가 되었다는 사실(95, 97 페이지), 주자학과 달리 양명학은 도그마의 운명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102 페이지) 등을 알게 된다.

 

()인 가을에 해당하는 수렴과 성찰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구운몽의 성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덧없는 것이 삶이 아니라 부귀영화, 아니 부귀영화를 향한 욕망이라 말한다.(105 페이지) 가을의 대표작인 오딧세이아편에서 저자는 인생은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고 해피엔딩이 아니라 네버엔딩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라 말한다.(110 페이지)

 

가을의 고전을 읽으며 금기(金氣)를 충전하라(105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가을의 고전으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과 맞장을 뜨려면 제도와 서비스, 욕망과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길어올려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42 페이지)

 

반드시 욕망을 다스리는 수련을 해야 한다(101 페이지)는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또한 제도와 시스템의 결함을 찾아낸다 한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대학당국과 교육부, 정치인이 있지 않으니 믿을 건 청년 자신들 뿐이라는 말(48 페이지)과도 상통한다.

 

저자가 예로 드는 키케로는 겨울의 고전인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의 저자이다. 키케로는 혁명은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이 아닌 마음의 온전한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145 페이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지성과 지혜가 아닐까? 지성은 다르게 사유하고자 하는 열정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다.(48 페이지) 지혜는 물처럼 흐르고 파동처럼 퍼져 나가는 유연한 것이다.(144 페이지)

 

루쉰은 일상과 습속이 바뀌지 않는 한 모든 이념과 혁명은 사이비로 간주했다.(148, 149 페이지) 여름이 불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물의 계절이다. 참고로 말하면 저자가 관계하는 공동체 중 하나가 감이당(坎離堂)이다. 주역에서 감은 물, 이는 불을 상징한다.

 

저자는 윤리적 자율성과 영적 해방이 없는 혁명은 형용 모순이라 말한다.(168 페이지)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시작되어 유배지에서 완성된 고전이다.(174 페이지) 14년에 걸쳐 쓰인 책이다. 성리학(性理學)에서 말하는 성즉리(性卽理)는 우주의 이치는 존재의 내재적 법칙과 조응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천()과 인(), 자연과 도덕의 간극 없는 일치를 의미한다.(93 페이지)

 

이런 사상을 우리는 동의보감을 통해 확인한다. 우주의 물리적 배치와 몸의 원리는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이다.(176 페이지) 저자는 자연과 우주라는 말로부터 상생()을 떠올리는 것은 낭만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말한다.(176 페이지) 그러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 생명이 네트워크가 아니라 네트워킹을 하는 것이 생명(177 페이지)이라는.

 

저자는 아픔과 괴로움의 원천은 가난이 아니라 무지라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모르는 것이다.(178 페이지) 주자(朱子)가 제자들에게 책도 스스로 읽고 도리도 자네 자신이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이며 입회인에 불과하다. 의문점이 있으면 함께 생각해볼 따름”(94 페이지)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인상적이다.

 

이런 인식은 동의보감에서 의사란 단지 안내자에 불과하고 병은 환자 스스로 고치는 것(179 페이지)이라는 인식을 보인 허준의 지론과도 통한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가?“(182 페이지) 정조(正祖)의 말이다. 저자는 암기해서 뇌에 저장된 것이 기억(혹은 의식)이라면 읽기로 인한 파동을 통해 뼈에 새겨진 정보는 무의식(혹은 몸)과 연동되어 있다고 말하며 낭송을 복원해야 한다고 덧붙인다.(190, 191 페이지)

 

저자는 학습 과정에서 소리를 적극 활용하는 가장 쉬운 경우가 운문, 그중에서도 시()라 말한다.(191 페이지) 글쓰기의 두 축은 독창성과 논리이다.(202 페이지) 기승전결을 갖춘 글이 좋은 글이다.(211 페이지) 기는 문제제기, 승은 제기된 문제를 펼치는 것, 전은 그 문제에 대한 독창적 해석, 결은 전체를 수렴, 압축하여 앞으로 탐구할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수행하는 과정도, 글쓰기의 내적 구성도 결국 사계절과 함께 리듬을 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213 페이지) 이지(李贄)의 삶과 사랑을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견문과 도리를 알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너의 동심을 가리는 병폐라고 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을수록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옛 문장가들의 글만 베끼고 흉내 내게 된다.(231 페이지)

 

이지가 싸우려고 한 것은 이런 획일적이고 교조적인 학문이자 도그마가 된 지식이다. 저자는 진리를 구하려면 기개가 있어야 하고 자립해야 한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덕목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키워드는 자립, 스스로 성찰하는 것 등이다.

 

이 주장은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된 덕목이다. 많은 깨우침을 준 책임을 고백한다. 내면을 성찰해 욕망을 다스려야 하며 문제는 결국 홀로 푸는 것이라는 평소 내 지론과 일치하는 바가 있어 흥미 있게, 감사하게 읽었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지침이 생생하고 리얼했다고 생각한다. 봄여름가을겨울에 맞춰 글과 삶을 설명한 내공이 인상적이었음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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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시인수업 6
조동범 지음 / 모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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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韓屋) 도서관에서 시인의 시 창작 강의를 듣는 호사(豪奢)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37일 시작된 청운문학도서관에서의 강의로 59일까지 매주 수요일(1517)에 진행된다.

 

시 창작 강의를 듣고 있지만 나는 시를 이해하려는 것일 뿐이다. 물론 후에 시간이 되면 아니 마음에 여유가 들면 시를 쓰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사인 유종인 시인께서는 수사법(修辭法)보다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보는 자세와 시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초점을 두고 강의한다.

 

유종인 시인은 필요한 수사를 두 개 정도로 한정한다. 은유와 활유 또는 물활론(物活論)이. 사이비(似而非)란 표현이 눈에 띈다. (시인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인지 모르지만) 기존의 바탕이나 현상에서 출발하되 남과 다르게 보는 눈으로부터 새로운 사유가 펼쳐지는 것을 시인이 사이비(似而非) 즉 비슷하되 다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조동범 시인의 묘사(描寫)’를 통해 다음의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소가 들판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다'는 서경(敍景)적 표현을 '몸통을 잃어버린 소가 풀의 어둠을 뜯어 먹고 있다', '머리 잘린 소의 더러운 혀는 풀의 뿌리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한다' 같은 비가시적 이미지인 심상(心象)적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

 

심상적 구조의 문장과 이미지는 서경적 구조와 완전히 유리된 것이 아니며 서경적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경우도 많(61 페이지)(현상을) 심상적 구조로 파악하게 되면 서경적 구조로 파악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다.>(60 페이지)는 글이다.

 

완전히 유리된 것이 아니며란 말과 전혀 다른이란 말로부터 나는 사이비란 말, 더 나아가 청출어람(靑出於藍),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빙수위지(氷水爲之), 물보다 더 차다(寒於水)>“는 말(신영복 지음 담론’ 116 페이지)을 떠올린다.

 

유종인 시인의 강의는 일상적 단어를 찾아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조동범 시인의 '묘사'는 다른 시 창작 강의와 달리 유익하게 읽힌다. 이 책을 읽고 모악 출판사의 시리즈물인 엄경희 평론가의 '은유', 구모룡 평론가의 '제유', 유성호 평론가의 '직유', 권혁웅 평론가의 '환유', 정끝별 평론가의 '패러디'를 읽을 생각이다.

 

얼마 전 사둔 나희덕 시인의 '한 접시의 시' 도 읽어야겠다. 봄이 되면 특히 많이 생각나는 조용미 시인이 시 창작 책을 쓴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올 봄 하릴없어 옥매 두 그루 심었다는 시인이다.

 

유종인 시인은 어휘력을 기를 것을 주문한다. 어휘를 피상적으로 알지 말고 익히라는 의미이다. 특히 순 우리말을 익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집을 적극적으로 읽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메모하듯 쓰라고 말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를 예로 들며 그렇듯 교과서적인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시키는 것이 시라고 말한다.

 

시인은 우리에게 숙제를 내주신다. 자신의 기도는 어떤 것들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시인은 시란 의미의 파생(派生: 어떤 사물의 주체로부터 갈리어 나와 생김)이고 일견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짓는 것이고 무수히 많은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인은 영감(靈感)이란 결국 내가 일으키는 것이라 말한다. 시인에 의하면 시는 의미의 확장 놀이이다. 여기서 랑그와 파롤이란 말을 생각해 본다. 신영복 선생님은 시란 랑그가 아니라 파롤이란 말을 한다.(‘담론’ 26 페이지)

 

소쉬르에 의하면 랑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뇌 속에 자리 잡은 사회적 형태의 약속 체계이며 파롤은 개인적이며 순간적이고 개별적 언어이다. 이문재 시인이 한 것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 또는 그런 의식을 의미하는 기도란 단어를 파롤(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는 것,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는 것,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는 것 등..)로 만든 것이다.

 

여담이지만 시경(詩經)‘은 고대 중국에서 여론 조사나 동태 파악 차원에서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모아놓은 시를 편집한 책이다.(신정근 지음 동양고전이 뭐길래?‘ 38 페이지) 이를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점령(占領)이란 말이다.

 

()나라의 천자가 각 읍국(邑國: 고대 도시국가)의 점인(占人: 점치는 사람들)을 남치해간 뒤 점을 독점하고 그들 읍국들에게 점의 결과를 알려주는 정책을 통해 영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점령은 점으로 영도한다는 의미이다.(강병국 지음 주역독해상경(上經) 10 페이지)

 

시경(詩經)과 주역(周易) 모두 정치사회적 의미를 갖는 책이라는 의미이다.(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인 담론이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시와 주역이다.)

 

각설하고 시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묘사(描寫)는 이미지를 통해 지배적인 인상을 드러내며 감각화된 세계를 보여준다.(11 페이지) 또한 묘사를 파악하는 것은 시의 구성 원리를 파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17 페이지)

 

시적 언술은 묘사와 진술로 이루어지지만 묘사된 세계를 통해 시적 감각이 극대화된다.(19 페이지) 미적 인식을 제시하는 시적 상황을 지배적 정황이라 한다.(20, 21 페이지) 묘사는 지배적 정황이 됨으로써 비로소 시적 감각을 갖는다.(21 페이지)

 

묘사는 구체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설명은 개괄적 행위나 모습을 제시한다. ‘개 한마리가 도로 위에 죽어 있다.’는 문장은 설명이다. 반면 도로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는 개 한 마리. 터진 배를 펼쳐놓고도 개의 머리는 건너려고 했던 길의 저편을 향하고 있다.’는 묘사이다.(23 페이지)

 

묘사는 서경적 구조,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 등으로 나뉜다.(33 페이지) 서경적 구조는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방법론이다.(33 페이지) 심상적 구조는 비가시적인 이미지를 통해 시적 정황을 구축하는 방법론이다.(34 페이지) 심상적 장면은 서경적 구조만으로는 형언하기 힘든 시인의 내면을 제시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을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평범한 사물에서 지배적 인상을 제시하는 시적 대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 말한다.(43 페이지) 서경은 사실적 장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경적 구조가 사실적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익숙한 관계로 이루어진 상투적 장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46 페이지) 심상적 구조는 시인의 시적 개성을 발휘하기 적합하며 주관적인 묘사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수행한다.(57 페이지)

 

심상적 구조는 가시적인 물리 공간에서 감지한 것이 아니라 심리라는 비가시적 공간에서 감지한 것이다.(57 페이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심상적 구조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이다.(59 페이지)

 

주변의 모든 정황을 심상적으로 파악하려는 강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가 혼재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주변의 사물들 역시 서경적 장면과 심상적 장면이 섞여 있을 수 있다.(67 페이지) 각각의 장면들이 지배적 정황으로 기능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더불어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67 페이지)

 

영상조립시점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정황들을 돌연히 내세우되 그 안에 일관된 정서와 감각을 부여하는 창작 방법론이다.(74 페이지)

 

서경적 구조는 가시권 사물과 비가시적 사물이 혼재될 경우 자연스럽지 않을 경우가 있지만 영상조립시점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함께 묶어 재구성한 것이므로 가시권 사물과 비가시권 사물이 섞여 있을 수 있다.(74, 75 페이지) 두 개 이상의 조각난 영상이 조립되는 영상조립시점은 조각의 합이 전혀 다른 감각을 소환하기도 한다.(75 페이지)

 

영상조립시점을 구성할 때의 관건은 정황들이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파편화된 이미지가 조각나 있기만 하고 일관된 감각과 정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영상조립시점은 실패하고 만다.(80 페이지)

 

시에서 이미지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이러한(이미지가 무의식과 의식을 지배하는, 이마골로기의) 세계 속에서 시는 어떠한 이미지를 응시해야 하는가?(100 페이지)

 

시가 이미지의 산물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물론 시를 구성하는 원리와 요소는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101 페이지) 시인들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어떤 시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이미지를 통해 시인들의 경험과 상상력은 실재의 국면으로 재현되어 하나의 시적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는 실재하는 상상력이며 동사에 구체적으로 재현된 시적 경험이다.(101 페이지)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되기도 한다.(102 페이지) 이미지를 해현한다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장면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그것만으로 하나의 시적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시에서 묘사가 곧바로 의미로 전이되는 경우가 그러하다.(102 페이지)

 

바슐라르는 의미들이 너무 분할된다면 그것은 말장난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단 하나의 의미 속에 갇힌다면 교조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104, 105 페이지) 저자는 다층적인 의미 구조에 기대기보다 감각이 지나치게 극대화된 시적 이미지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105 페이지)

 

상당수의 작품이 다채로움을 잃은 채 화려한 감각과 언어라는 시적 경향이 지나치게 몰입하는 태도를 비판한다.(106 페이지) 심상화된 세계는 서경적 세계와 달리 주관적 언술 양상을 띠기 때문에 시인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주관화된 이미지의 양상을 띠게 된다.(107 페이지)

 

심상적 구조는 서경적 구조와 달리 사실적 이미지나 진술이 전달할 수 없는 내면의 미묘한 울림과 파동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환상적 세계를 통해 표현되는 시인 내면의 복잡다단한 감각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다.(107 페이지) 분절되고 파편화되기만 하고 의미 없는 감각만으로 채워질 때 문제는 발생한다.(108 페이지)

 

조동범 시인의 묘사는 자주 들여다보며 숙독할 책이다. 시를 이해하는 과정이 쓰는 행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바람직한 모습을 연출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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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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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談論)’은 신영복 선생님(이하 저자)(성공회대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저자는 서삼독(書三讀)을 주장한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한다.

 

교사와 학생의 대칭 관계(13 페이지)를 주장하는 저자는 강의라는 프레임을 깨뜨리고 우연의 점들을 여기 저기 자유롭게 찍어 갈 것이라 말한다. 대신 여러분들이 그 선을 이어 점을 만들고 장()을 만들어 여러분의 지도(知圖)를 완성하고 여러분이 발 딛고 선 땅속의 차가운 지하수를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고 말한다.(22 페이지)

 

인연들이 모여 운명이 된다고 말하는 저자이다.(15 페이지) 첫 시간에 시()를 논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틀이 문사철(文史鐵)에 과도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25, 26 페이지) 저자는 시를 랑그가 아닌 파롤이라 말한다.(랑그, 파롤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던 사람은 이 강의를 통해 의미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 파롤인가? 개인의 언어, 남다른 은유(隱喩)를 말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상투성의 지양(止揚)이다. 시서화(詩書畵)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37 페이지)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인생의 영원한 주제라 말(42 페이지)하는 저자는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간다고 설명한다.(44 페이지)

 

저자는 냉정한 자기비판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것은 일견 비정한 듯 하지만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훨씬 높여 준다는 것이다.(48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는 군자표변(君子豹變)을 읽었다. 저자는 생명이란 방랑하는 예술가(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자기 생성, 즉 자기가 자신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라는 말을 한 마투라나를 언급하며 그것은 기계론, 환원주의, 고전주의에 대한 창조적 배반으로 동양적 사유에는 인과론이나 환원론이 없다고 설명한다.(51 페이지)

 

추상화 능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사소한 문제 속에 담긴 엄청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52 페이지)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말이 알게 하듯 고전은 오래된 미래이다.(58 페이지)

 

나는 주역(周易)’을 점서로도 과학으로도 읽지 않는 저자는 주역 독법에 주목한다.(61 페이지) 주역은 패턴(을 보여주는 책)이다. 정착하며 농사를 짓는 반복 패턴의 사회인 농경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유목사회는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의미가 없다. 저자는 자신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주역을 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62 페이지)

 

저자는 위(), (), (), ()의 네 개념으로 주역을 읽는다. 양효가 어디에 있든 늘 양효로서 운동하지 않는 것이 위()를 설명할 때 중요하다. 자기 자리에 있어야(得位해야) 하는 것이다.(63 페이지) 양효, 음효 자체보다 그것들이 처해 있는 자리와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는 바로 옆에 있는 효와 상응 관계를 보는 것이다.(65 페이지) ()은 초효(初爻)4, 2효와 5, 3효와 6효의 음양 상응을 보는 것이다.(65 페이지) ()은 하괘의 중과 상괘의 중을 중시하는 독법이다.(66 페이지)

 

주역은 효() 자리, 효와 효, 소성괘와 대성괘, 대성괘와 대성괘 등 중층적인 관계를 읽는 것이다.(69 페이지) 주역은 64, 384효이다. 그것만으로 매우 복잡하다. 여기에 동효(動爻), 변효(變爻)도 있다. 그것까지 고려한다면 4,096개의 효가 된다. 주역은 그 무수한 관련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69 페이지)

 

저자는 개인주의적 사고, 불변의 진리, 배타적 정체성 등 근대적 인식론에 갇혀 있던 나에게 감옥에서 손에 든 주역은 충격이고 반성이었다고 말한다.(69, 70 페이지) 저자는 역이불역(易以不易) 불역이대역(不易以大易)을 언급한다. 퇴계와 다산의 독법이 다르다. 퇴계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 변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역(大易)“이라 했고 다산은 변하지 않는 것도 크게() 보면 변한다()”고 해석했다.(74 페이지)

 

철기시대인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宗法) 질서가 붕괴된다. 종법 질서는 천자(天子)의 맏아들은 천자가 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諸侯)가 되는 제도이다. 제후의 맏아들은 제후가 되고 둘째 아들은 대부(大夫)가 된다. 유가학파는 패권 경영에 반대하고 제후국 연방제라는 주나라 모델을 지지한다. 이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78 페이지) 저자는 우리의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선택은 화화(和化) 패러다임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저자는 시제(時制)와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비판은 처음부터 부정적 결론을 염두에 두는 비방이라 말한다.(94 페이지) 저자는 사상의 진보성과 민주성은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 속에도 여러 가지 충돌하는 쌍들이 혼재해 있을 것이라 말하며 공자와 논어의 경우 어떤 것을 호출하고 어떤 독법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결론짓는다.(95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의 끊임없는 재구성(103 페이지), 사회적 의미(114 페이지), 사람이 최고의 교본이라는 것(116 페이지), 필자는 죽고 독자는 꾸준히 탄생한다는 말(131 페이지),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만남이 곧 연대라는 말(137 페이지), 노동은 생명의 존재형식이라는 말(147 페이지),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을 선명하게 보는 것(153 페이지) 등이다.

 

묵자(墨子)’에는 무감어수(無監於水), 감어인(監於人)이란 말이 있다. 믈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물에 비추어 보면 외모만 보게 되지만 사람에 비추어 보면 인간적 품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155 페이지)

 

묵자 사상의 핵심은 겸애(兼愛)이다.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밥상을 함께 하는 것을 겸상이라 하듯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을 겸애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묵자의 반전, 평화 사상을 언급하며 나쁜 평화 없듯 좋은 전쟁이 없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노자가 개선장군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상례(喪禮)로써 맞이해야 한다고 했다면 전쟁에 관한 한 묵자 만큼 불가함과 흉포함을 소상하게 밝힌 사람은 없다.(167 페이지)

 

묵자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파이다.(168 페이지) 한비자는 권모술수의 달인 같은 평판을 받고 있지만 교사불여졸성(巧詐不呂拙誠)의 고사를 생각하게 한다. 교묘한 거짓을 졸렬한 성실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188, 189 페이지)

 

한비자(韓非子)’에는 진정성이 묻어나는 예화가 많다.(190 페이지) 세계는 분절되어 있지 않다. 분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틀이다. 결정론과 환원론은 단순 무식한 틀이다.(196 페이지) 저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글들이 차분해서 놀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들이 보는 (편지) 글이기에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검열을 거쳐야 했기에 무너지는 모습을 (국가에)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의 결과이다.(224, 225 페이지) 저자는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239 페이지)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함께 깨닫는 것이라며 불편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함으로써 생명의 위상을 새롭게 바꾸어 가도록 하자고 말한다.(253 페이지) 저자는 조카 단종을 유배해 죽이고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신하들을 처단하고 집권한 세조의 정치 과정을 윤리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국 초기의 산적한 과제들을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헤쳐 나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세조는 태종보다도 훨씬 더 비윤리적인 집권을 했다고 설명한다.(389 페이지) 의아하다.

 

저자는 마지막 글인 희망의 안어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이야기한다. 이 말이 20년 감옥 생활을 견디게 한 힘이다. 저자는 산지박(山地剝)괘의 효사인 석과불식을 이야기하며 사십불혹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의혹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혹(迷惑), 환상 등을 갖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420, 421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자살하지 않은 것은 햇볕 때문이었고 살아간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다고 말한다.(424, 425 페이지) 저자는 독방에서 만나는, 길어야 두 시간이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인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는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라 말한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기의 이유를 줄이면 자유(自由)라는 말이 된다.(426 페이지) 저자는 제한된 시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진 면도 있다.

 

물론 이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내 내공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리뷰를 쓰지는 않았지만 읽었기에 대부분 건너 뛰었다. 저자가 주역과 시를 강의 주제로 선정한 이유가 참 긍정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은 관계론, 시는 이성의 과잉에 대한 해결 방식으로 제시된 주제이다. 이 두 주제는 내 주제로 오래 유지될 것이다. 타계 2주기(2016115)를 넘긴 선생님의 명복을 늦게나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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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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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정 작가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자득명(自得明), 법득명(法得明)”이란 단어를 보았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패러디인가? 어떻든 자득(自得)이란 말을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다시 만났다.(먼저 나온 장회익 교수의 책을 내가 나중에 읽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 본질적 요소라고까지 말한 시간, 공간 등은 배우지 않고 스스로 아는 자득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지만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이 불완전해졌다. 시간, 공간 외에 자득적인 개념이 생명이다.

 

저자는 온생명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시간, 공간처럼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하듯 생명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 공간을 다시 보면 사물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지듯 생명을 온생명으로 수정해 보면 생명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저자는 (개별 인간의) 상위 개체로서의 공동체도 하나의 삶의 주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삶의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나눈다. 온생명은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이다.(17 페이지)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 체계는 온생명이고 각 단계의 개체들은 낱생명이다.(20 페이지) 온생명에 속하는 낱생명들은 온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족적인 온생명조차 그럴 경우 생존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20 페이지)

 

온생명도 내적 구성 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지닌 매우 특이한 성격은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점이다.(21 페이지) 의식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가? 저자는 마음과 물질을 한 가지 대상의 다른 두 측면으로 본다.(23 페이지)

 

의식의 주체로서는 자기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의식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곧잘 상정한다. 개체로서의 내 몸과 주체로서의 나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조직으로서의 공동체와 삶의 주체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28 페이지)

 

저자는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가는 현대 사회를 우려하며 제한적 의미의 이상을 내포한 대안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아직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못지 않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70 페이지)

 

생명을 논할 때 부딪히는 난점 가운데 하나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72, 73 페이지) 어느 범위의 대상을 놓고 생명을 말해야 하는지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생명이라는 말로 지칭될 엄연한 현상이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엄밀히 규정하려고 하면 번번이 우리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난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 개념 안에 독자적으로 규정될 그 어떤 실재로서의 생명 개념과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부분적 대상으로서의 생명 개념이 상충하기 때문이라 말한다.(74, 75 페이지)

 

비유하자면 생명현상의 경우 나무에 해당하는 것이 온생명이고 나뭇잎에 해당하는 것이 낱생명이다.(76 페이지) 어떻게 낱생명과 함께 온생명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물질의 화신이다. 그 자체가 물질이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이 물질 세계의 질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라는 형태로 내면화하여 사고하며 행위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의 이러한 조화가 결코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97 페이지)

 

환경 문제의 경우 과학의 언어만으로는 대중을 파고들 수 없기에 필요한 것이 문학이다. 작가는 두 가지 기능에 능통해야 한다. 과학을 포함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다시 이를 문학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대표 사례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다.(104 페이지)

 

미국 작가 다니엘 퀸의 장편 소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근원으로서 인류의 농경생활을 든다.(107 페이지) 인류는 다시 농업 이전의 수렵 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다니엘 퀸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110 페이지) 레이켈 카슨은 문명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니엘 퀸은 문명 자체의 근원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생명체 안에 이를 살아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 별도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것 안에 생명이란 것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외부의 여건과 잘 연결됨으로써 살아 있다고 할 때 보여주는 여러 기능들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113, 114 페이지)

 

저자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황무지에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문학의 힘이고 희망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현실은 삭막하고 파괴적이지만 우리는 그렇기에 이런 작은 씨앗 같은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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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지음 / 갈라파고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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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이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를 느끼던 차에 한재훈 교수의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입학 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시골 서당으로 내려가 15년간 한학을 공부해 사서삼경을 뗀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간 저자의 특별한 이력이 반영된 책이다.

 

현재 저자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본문에는 1904년 생인 겸산(兼山) 안병탁 선생이 아흔 살 시절 스물두 살의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노우(老友)라는 표현을 썼다는 구절이 있다.(207 페이지) 이 구절에 따르면 저자와 스승의 나이 차이는 68년이다. 그러니 저자는 1972년생이고 서당 공부를 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93년 사이이다.

 

겸산(兼山)이란 주역의 대성괘 가운데 하나이다. ()을 뜻하는 간()괘가 겹친 괘이다.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굳센 기질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벗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스승은 존함 뒤에 조아릴 돈()이란 글씨를 쓰기까지 했다. 퇴계(退溪)도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지 않고 강론(講論)했다는 표현을 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을 두고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신 분이라 칭하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추구했던 사람이라 말했다.(176 페이지) 또한 누구보다도 배움에 목말라 했기에 열린 마음으로 누구에게라도 배우려 했다.(176 페이지) 스승의 완고한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유연한 행동이다.

 

스승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벗이다. 스승과 벗의 관계를 말한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 양명학자 탁오(卓吾) 이지(李贄)이다. “스승이 될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수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이다. ‘분서(焚書)‘로 유명한 사상가이다.

 

저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이야기한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이 말은 스승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부모로부터 받는 은혜만큼 크다는 의미이다.(162, 163 페이지) 스승은 선택되는 존재이다. 임금이나 부모와 달리. 어버이나 임금은 바꿀 수 없지만 스승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간함을 통해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만 바꾸는 것이 허용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166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올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은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변화 이전에 있는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열을 가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170 페이지) 이 말에는 누구든 완벽할 수 없기에 반드시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늘 새롭게 하는 자기양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의미가 있다.(171 페이지)

 

군사부일체를 말하며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가 갖는 의미 또는 성격에 주의해야 한다(156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이다.

 

교학상장은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바 이때 그 현상의 주체는 교사(敎師)이다.(187 페이지)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 즉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듯 교학상장에서도 스승과 제자라는 주체가 아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위정편에서 온고이지신을 말한 공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편에서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더라도 몸이 늙어가는 줄도 잊고 남은 날이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하루 하루 애쓰다가 죽은 뒤에나 그만 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온()을 말한 공자의 다른 말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은 깃털의 총체로서 날개를 뜻하고(199 페이지) 날개의 주체인 새는 특정 종류의 새가 아니라 날갯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어린 새이다.(200 페이지) 이는 공부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과 늘 새롭게 자기 수양의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이란 없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만나지 못한 세상을 말하며 그 새로운 세상이란 세상이 변해서 우리 앞에 던져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상이다.(203 페이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않음을 의미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연상할 만하다.

 

저자가 서당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의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반대해 저자에게 선택권이 부여되었는데 저자가 형처럼 서당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써 전격 결정된 사안이다.(32 페이지) 물론 저자의 아버지는 삼형제를 똑같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의 아버지가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대학에 가서 현대학문을 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 뜻에 따라 현대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공부를 할지는 형제들이 알아서 정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는데 저자가 선택된 것이다.(110 페이지)

 

검정고시와 대학 입시 준비를 거쳐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한 저자는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했다. 저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서당 교육과 서양식 교육의 차이를 질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서당은 계단처럼 나이가 다른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며 공부하고 예절을 배우는 공동체이지만 저마다 다른 글들을 읽고(61 페이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만 공부란 결국 자율적으로 보완하고 관리해가는 것(75 페이지)이며 어떤 글들을 더 읽어야 하고 어떤 글들을 덜 읽어도 되는지는 철저하게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100 페이지)

 

서당에서는 100번의 성독(聲讀: 소리내어 읽기)을 통해 문장을 암송(暗誦)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서당에서 암송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문리(文理)가 트이게 하기 때문이고(64 페이지) 글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68 페이지) 문리에 대해 저자는 글의 결을 이야기한다. 장악에 대해 저자는 글을 충분히 소화해 전체적 이해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전통 한학 공부를 하는 서당과 현대식 학교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현대의 교육 체계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제적이고 획일적이다. 서당은 그렇지 않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이고 학문적이다.

 

저자가 공부한 서당은 초동서사(草洞書舍)란 곳이다. 스승에게 받아들여질 때 우여곡절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스승께 동생을 제자로 받아주실 것을 말할 것이라 생각했고 형은 동생인 저자가 청할 것이라 생각해 결과적으로 아무런 말 없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에 선생님이 지금 뭐하는 것이냐 물으셨고 저자는 글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네가 언제 내게 글 배우겠다고 한 적이 있으며 내가 언제 너를 가르치겠다고 한 적이 있느냐 하셨다.(141 페이지) 급기야 선생님은 저자에게 책 들고 당장 나가라는 말을 했다. 사태가 결말이 난 것은 선배들이 선처(善處)를 청해서였다.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은 촘촘한 인문학적 사유가 시종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다. 나로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할 만한 감동을 느꼈기에 상당히 고무적임을 밝힌다.

 

예에 깃든 정신이 아까워 양을 바치는 의식을 보존했다는 의미의 애례존양(愛禮存羊)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이미 없어져 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한다는 말을 한 머리말에서부터 배움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 성장하고 그로 인해 좋은 세상을 위한 파장이 나로부터 비롯되게 하라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말까지 저자의 책은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이며 따뜻한 인문학적 성찰과 사색으로 빛난다.

 

깊게, 치밀하게 사유하기의 전범(典範)을 본 느낌이다. 깊고 치밀하게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을 담보하려는 시각이 있어야 가능하고 또 그런 읽기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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