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최옥정 작가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자득명(自得明), 법득명(法得明)”이란 단어를 보았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패러디인가? 어떻든 자득(自得)이란 말을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다시 만났다.(먼저 나온 장회익 교수의 책을 내가 나중에 읽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 본질적 요소라고까지 말한 시간, 공간 등은 배우지 않고 스스로 아는 자득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지만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이 불완전해졌다. 시간, 공간 외에 자득적인 개념이 생명이다.

 

저자는 온생명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시간, 공간처럼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하듯 생명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 공간을 다시 보면 사물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지듯 생명을 온생명으로 수정해 보면 생명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저자는 (개별 인간의) 상위 개체로서의 공동체도 하나의 삶의 주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삶의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나눈다. 온생명은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이다.(17 페이지)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 체계는 온생명이고 각 단계의 개체들은 낱생명이다.(20 페이지) 온생명에 속하는 낱생명들은 온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족적인 온생명조차 그럴 경우 생존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20 페이지)

 

온생명도 내적 구성 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지닌 매우 특이한 성격은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점이다.(21 페이지) 의식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가? 저자는 마음과 물질을 한 가지 대상의 다른 두 측면으로 본다.(23 페이지)

 

의식의 주체로서는 자기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의식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곧잘 상정한다. 개체로서의 내 몸과 주체로서의 나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조직으로서의 공동체와 삶의 주체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28 페이지)

 

저자는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가는 현대 사회를 우려하며 제한적 의미의 이상을 내포한 대안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아직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못지 않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70 페이지)

 

생명을 논할 때 부딪히는 난점 가운데 하나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72, 73 페이지) 어느 범위의 대상을 놓고 생명을 말해야 하는지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생명이라는 말로 지칭될 엄연한 현상이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엄밀히 규정하려고 하면 번번이 우리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난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 개념 안에 독자적으로 규정될 그 어떤 실재로서의 생명 개념과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부분적 대상으로서의 생명 개념이 상충하기 때문이라 말한다.(74, 75 페이지)

 

비유하자면 생명현상의 경우 나무에 해당하는 것이 온생명이고 나뭇잎에 해당하는 것이 낱생명이다.(76 페이지) 어떻게 낱생명과 함께 온생명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물질의 화신이다. 그 자체가 물질이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이 물질 세계의 질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라는 형태로 내면화하여 사고하며 행위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의 이러한 조화가 결코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97 페이지)

 

환경 문제의 경우 과학의 언어만으로는 대중을 파고들 수 없기에 필요한 것이 문학이다. 작가는 두 가지 기능에 능통해야 한다. 과학을 포함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다시 이를 문학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대표 사례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다.(104 페이지)

 

미국 작가 다니엘 퀸의 장편 소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근원으로서 인류의 농경생활을 든다.(107 페이지) 인류는 다시 농업 이전의 수렵 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다니엘 퀸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110 페이지) 레이켈 카슨은 문명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니엘 퀸은 문명 자체의 근원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생명체 안에 이를 살아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 별도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것 안에 생명이란 것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외부의 여건과 잘 연결됨으로써 살아 있다고 할 때 보여주는 여러 기능들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113, 114 페이지)

 

저자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황무지에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문학의 힘이고 희망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현실은 삭막하고 파괴적이지만 우리는 그렇기에 이런 작은 씨앗 같은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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