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81 | 82 | 83 | 8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
정인경 지음 / 여문책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을 읽다란 제목과 달리 정인경의 책은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 등의 다섯 챕터로 구성되었다. 각 챕터는 다섯 편의 책 리뷰로 구성되었다.

 

역사에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 , 등의 책이, 철학에는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등의 책이, 우주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등의 책이, 인간에는 조지 오웰의 교수형‘,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등의 책이, 마음에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폴 새가드의 뇌와 삶의 의미등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이 자신의 전작인 뉴턴의 무정한 마음의 후속작이라 말한다.(11 페이지) 전작이 과학이 무정한 것에 대해 비판한 책이라면 이 과학을 읽다는 비판을 넘어 과학을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도 말했듯 우리가 과학 공부를 하는 이유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왜 중요한지를 알고 우리의 삶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는 데에 있다.

 

이는 최근 유럽인 이야기 등을 펴낸 주경철 교수가 한 말과 상통한다. 기계적으로 팩트를 외운다면 그건 퀴즈왕이고 전문가는 팩트를 연결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며 깊이는 시간과 함께 쌓인다.”는 말이다.

 

과학을 읽다의 특징은 특정 주제나 개념에 따라 논의를 전개한 책이 아니라 한 챕터당 한 권의 책을 리뷰한 책이라는 점이다. ‘과학을 읽다는 다소 특이한데 그것은 저자가 말했듯 인간의 역사를 말하면서 뜬금없이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인간의 사랑과 고통을 말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26 페이지) 이 챕터의 본론은 진화이다. 저자는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고 쓴 애도일기를 짧게 설명하며 수잔 손택의 아들이 어머니와의 사별에 대해 쓴 어머니의 죽음과 영장류 학자 제인 구달과 인간은 아니지만 아들과 다름 없었던 침팬지 플로, 플린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애도일기의 롤랑 바르트와 침팬지 플린트를 비교하는 것이 불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생명의 진화에서 인간도 침팬지도 모두 포유류의 뇌를 가진 것임을 언급한다. 저자에 의하면 다윈은 종의 기원‘ 4장에서 멸종과 탄생의 과정을 생명의 큰 나무로 설명했다.(29 페이지)

 

생명의 나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지가 갈리지는 지점이다. 나뭇가지가 갈라져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공통조상으로부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니 아기는 아지에서 왔고 아지는 가지에서 왔다는 말이 생각난다.(송아지, 망아지 할 때의 그 아지)

 

저자는 내일 어느 곳에서 새로운 화석이 하나 발굴되면 인간의 계보는 또다시 수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지금은 우리 빼고 모든 인간종이 멸종했다는 것! 대체 그 수많은 인간의 조상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왜 멸종하고 우리만 살아남은 것일까?란 말로 챕터를 마무리 짓는다.

 

이런 연결(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이야기를 하고 관련된 자료로 수잔 손탁의 아들이 어머니를 잃고 쓴 책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제인 구달의 침팬지와의 관계로 이어나가고 말하고자 하는 진화를 이야기하며 끝은 열린 형식 즉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과학을 공부하는 방식이고 책을 리뷰하는 한 방편이다.

 

저자는 사랑에 빠진 네안데르탈인을 제목으로 한 챕터에서 스티븐 미슨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소개하며 우리는 가끔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낀다는 첫 문장을 선보인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부터 외로움을 느꼈을까란 물음을 던진다. 엄정한 주제나 개념을 다루는 과학책도 시작은 정서(情緖)임을 생각하게 하는 포석(布石)이다.

 

저자는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40억년 만에 처음으로 한 생명체가 자신에 대해 사색하고 깊은 밤 갈대에서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접하고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할 수도 있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지구에서 40억 년 만에 출현한 사색하는 생물종인 우리는 배가 부른 후에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특별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이는 스티븐 미슨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사랑에 빠진 네안데르탈인이란 챕터의 결론(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종교, 인간의 문명을 만들다란 챕터에서 종교와 과학은 모두 같은 나무에서 나온 가지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한다.(가지라는 말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다룬 챕터에서도 의미 있게 제시되었다.)

 

이 챕터는 철학 챕터답게 니체가 인용되고 비트겐슈타인이 인용되고 강상중이 인용된다.(철학 챕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 비트겐슈타인 등이 다양하고 적절하게 인용된다.) 이 챕터의 결론은 과학에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과 철학을 폭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108 페이지)는 문장이다.

 

결국 과학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 철학, 종교 등 여러 학문들을 섭렵(涉獵)해야 함을 알게 한다. “진짜 진리는 신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실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도달하고픈 완벽한 그 무엇이다.”(107 페이지) 이 문장은 저자의 주요 전언(傳言)이며 논의를 풀어나간 궤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단서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원한다는 챕터에서 앎은 인간의 본성임을 역설한다.(116 페이지) 물론 인간 존재로부터, 보는 것으로부터, 앎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고 삶의 지혜를 구하려한 철학자들의 존재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를 통해 우리는 뉴턴이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데 몰두한 철학자들과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명료함과 확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숫자나 기호, 도형과 같은 수학적 언어를 활용하고 수학적 증명방식을 채택했다는 사실(120 페이지)을 알게 된다.

 

뉴턴의 원리와 법칙으로 세계는 신비의 베일을 벗고 실체를 드러냈다.(12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에드먼드 핼리가 뉴턴을 신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 칭송한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다룬 챕터에서 우리는 자연과학과 같은 확실한 지식이 등장하고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앎이 믿을 만한 것인가를 따져 묻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말(131 페이지)을 접한다.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짜인 책이 과학을 읽다이다. 과학사를 공부하면 이런 체계와 유기체적 질서를 짤 수 있다.(책 날개에 의하면 저자는 수학과에서 공부했고 한국과학사를 전공했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해 일제 식민시기 역사연구자로 30대를 보냈고 과학기술학 협동과정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자에 의하면 고대 철학에서는 세계는 무엇인가, 란 질문을 던졌다면 근대 철학에서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이는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전환이다.(132 페이지) 칸트의 문제의식은 철학사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철학의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18세기 철학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133 페이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제껏 철학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면 자신은 인간의 앎이 무엇인지를 먼저 탐구하겠다고 했다.(이 부분에서 진은영의 순수이성비판해설서의 제목이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을 세우다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제목이다. 정인경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136 페이지)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세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의 인식을 따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135 페이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뉴턴 과학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지식이고 신의 존재를 다루는 형이상학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지식으로 선을 긋고 교통정리를 했다. 뉴턴이 없었다면 칸트 철학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순수한 직관이라고 보았다. 시간과 공간은 변화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객관적이라고 확신했다. 칸트의 관념론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자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고 칸트 철학의 토대가 된 시간과 공간 개념도 무너졌다.(137 페이지)

 

앞에서 엄정한 주제나 개념을 다루는 과학책도 시작은 정서(情緖)라는 말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저자의 이 말이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163 페이지)

 

저자는 과학이란 무엇이며 가치란 무엇인가를 물은 리처드 파인만을 이야기한다.(164 페이지) 저자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자.(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별의 메시지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과학사에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기념적인 책으로 설명한다.

 

갈릴레오는 인간의 감각이 실재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실재는 무엇이고 인간은 실재를 어떻게 아는가?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 갈릴레오는 답을 찾은 것이다. 실재하는 우주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근대 과학이었다.,, 지구 밖에 있는 달을 관찰하기에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망원경과 같은 도구에 의지해서 우주를 관찰할 수 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가설이라는 벽에 부딪혔을 때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망원경 덕분이었다.(17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인데 갈릴레이라 하지 않고 갈릴레오라 한다는 사실이다. 퍼스트 네임으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가령 아이작 뉴턴, 임마누엘 칸트, 리처드 파인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과학을 읽다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래스트 네임으로 부르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만은 퍼스트 네임으로 부른다는 의미이다.)

 

저자의 책에는 운동의 상대성 원리가 나온다. 저자는 부둣가에서 친구가 손을 흔들며 서 있다고 할 경우 배가 부둣가에 당도하는 순간 자신이 다가서는 것인지 친구가 뒤로 물러서는 것인지 착각이 들거나 옆 선로의 기차가 서서히 뒤로 움직이는데 내가 탄 기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 이는 상대성 원리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상대성 원리는 정지상태와 등속(等速) 운동상태는 관찰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른 차이만 있을 뿐 실제로 양자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상대성원리와 광속 일정원리를 2대 가정(假定)으로 한다.

 

저자는 이제 우주에 대한 사색과 탐구는 과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하며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더 어렵지만 이렇게 복잡한 우주일지라도 우리는 아는 만큼 볼 수 있기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191 페이지)

 

저자는 빛의 물리학을 다룬 챕터에서 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 개념들은 과학자들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라 말한다. 때로 과학자들은 그 개념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못하기도 했다. 입자와 파동도 그 중 하나이다.(192 페이지)

 

뉴턴은 빛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을 입자로 보았다. 그런데 빛을 입자로 설명하면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뉴턴은 지구와 달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 사이에 중력이라는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물리적으로 납득이 갈 만큼 설명하지 못했다.

 

뉴턴은 중력이 두 물체 사이의 텅 빈 공간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 가정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마술적이고 신비스러운 힘의 작용이라고 비판했다... 빛을 파동으로 보면 좀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193 페이지)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 이는 빛이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는 말이다. 빛은 무엇인가? 왜 파동이면서 입자일까?

 

아직도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빛과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그렇게 존재한다. 빛은 우리 눈에 색 파장처럼 파동으로 보이다가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그 파동이 입자를 닮아간다. 1920년대 양자역학은 이런 신기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출현한 학문이다.(198 페이지)

 

저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이야기하며 릴케의 나는 정말 두렵다란 시를 인용한다.(이 챕터의 제목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이다.) 왜 두려워하는가?란 제목이 붙었을까? 릴케의 시의 제목인 나는 정말 두렵다가 실마리를 던져준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너희는 그 모든 노래하는 사물들을 죽인다란 구절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언급하며 릴케가 두려워 한 것은 자연의 신비를 낱낱이 파헤쳐 신의 능력까지 다가선 과학이었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릴케가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비밀스러운 뜻을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는 시인의 행위를 신에게 저주받을 일이란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고운기 지음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16 페이지)

 

윤동주 시인의 시 가운데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이란 구절이 있다.(‘쉽게 씌어진 시’) ”‘코스모스는 우주에서 태어난 지적 존재가 거꾸로 의식, 생명, 물질, 우주를 탐색하는 경이롭기 그지없는 이야기다.“(206 페이지) 세이건은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는 점점 강등했다.“고 썼다.

 

문제는 앎이다. 세이건은 (위대한/ 결정적) 앎이 증가할 때마다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는 점점 강등했다고 말했지만 앎은 위대한 것이다.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은 용기이자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저자는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시인 윤동주의 서시한 구절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210 페이지) 칼 세이건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창백한 푸른 점은 지구를 의미한다.)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 철학은 죽었다!에서도 우리는 앎의 중요성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호킹은 우리는 이 우주에서 작고 별 볼일 없는 존재지만 심오한 우주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225 페이지) 이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편에서 내가 한 말과 공명한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교수형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솔직히 우리는 우주를 이해하는 것보다 인간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을 한다.(237 페이지) 저자는 다윈의 말대로 우리는 동물에서 유래했지만 동물 중에서 아주 특별한 동물이라 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를 다루며 다윈 진화론을 인간의 출생의 비밀에 비유한다. 물론 비천한 내력이 담긴 비밀이다. 다윈은 악마의 사도(司徒)라 불린다. “에른스트 마이어가 쓴 진화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왜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철학적으로 무엇이 문제였고, 다윈이 발명한 새로운 생물학적 개념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명료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250 페이지)

 

중요한 단서는 인간의 진화에서 사회진화론과 같은 잘못된 이론도 개체군의 개념을 잘 몰라 빚어진 오해라는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의 단위는 개인이나 인종이나 민족이 아니라 개체군이다.(255 페이지) 인류 전체가 진화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백인종은 우월하고 흑인종이나 황인종은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다윈이 인간의 유래서문에서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방법이 다른 생물들과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말한 것은 인간 우월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말한다.(261 페이지) 저자는 인간의 유래는 자신 인생의 책으로 소개한다. 과학사를 공부하며 늦게 읽은 책이라고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며 저자는 도킨스나 굴드의 책을 보고 난 후에 이 책을 읽고 놀라움과 후회,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가 되었고 다른 생물학자들의 책이 모두 다윈의 각주(脚註)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260 페이지) ’인간의 유래는 인간의 진화를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그려냈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무엇이었나, 인간의 신체가 어떻게 생겨났고 그 다음에 인간의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차례로 보여주었다.(262 페이지)

 

저자는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가 인간다움의 특별함을 다윈이 말한 사회적 본능(자기 보존 본능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아끼는..)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에서 인류는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바탕으로 고대 문명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음을 상기시킨다.

 

도킨스는 동물행동학자로서 유전자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의 관심은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동물과 인간의 이타주의였다.(280 페이지) 도킨스는 인간의 이타적 성향도 유전자의 프로그램에 동원된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생존에 집착하고 더 많은 자식을 낳으려고 욕망하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우리 몸속에 있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위해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통제한 것을 의미한다.(281 페이지)

 

마음, 뇌의 활동편에서는 가정 먼저 편성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눈길을 끈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다.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즘 투쟁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레비는 19441월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로 보내졌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가스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데 젊고 건강한 레비는 합성고무를 만드는 공장에 차출되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299 페이지)

 

레비는 자신이 겪은 수용소의 참상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배고픔과 추위,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수많은 고통 중에 레비를 가장 괴롭힌 것은 기억의 고통이었다. 의식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아우슈비츠에 오기 전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300 페이지)

 

레비는 기억은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라 말했다.(301 페이지)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었기에 기억을 갖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무리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억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었다.(302 페이지)

 

기억은 인간의 조건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생물체로서 뇌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의 뇌 안에 있는 신경세포는 우리가 경험한 일들과 배운 지식들을 차곡차곡 부호화하여 저장한다.(302 페이지)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 인간 선언은 오직 살아남는 것,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나치의 잔학상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304 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기억하지만 또 생존하기 위해 망각해야 한다. 아무 것도 잊지 못한다면 그것도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305 페이지)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할 일과 잊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번민한다.”(305 페이지) 아우슈비츠 생존자 레비는 1987년 투신자살하고 만다. 레비는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악몽을 매일 매일 꾸었다.

 

저자는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과학 공부도 이해하고 기억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31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기억은 집단의 기억이다.(310 페이지) 이 말은 진화의 단위는 개체군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다.

 

인지과학자 폴 새가드는 뇌와 삶의 의미에서 인간의 뇌가 실재를 알고 삶에서 중요한 문제를 깨닫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342 페이지) “지적인 연구조차도 발견의 즐거움, 실패의 두려움, 적당한 발전의 만족감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어질 것이다. 개념, 믿음, 목표의 표상을 가치 평가에 묶어주는 뇌의 감정적 과정들이 없으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는 상황과 선택권의 끊임없는 평가를 잃게 될 것이다.”(343 페이지)

 

저자는 뇌가 느끼는 감정은 가치판단과 예측을 하기 위해 진화한 것임을 상기해보라, 감정이 있어야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343 페이지) 우리 뇌는 지각과 추론, 감정, 기억이 따로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작동한다. 실재를 알면서 동시에 실재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실재를 아는 것과 그것의 중요성을 느끼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344 페이지)

 

인간은 개인적인 행복을 넘어 수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즉 규범과 도덕을 추구한다. 우리는 똑같은 뇌 신경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345 페이지) 이는 인간다움의 특별함을 다윈이 말한 사회적 본능(자기 보존 본능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아끼는..)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 ’축의 시대에서 인류는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바탕으로 고대 문명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철학자 카렌 암스트롱 등을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샘 해리스의 신이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몇 가지를 다룬 챕터에서 진정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는가?란 말을 한다. 폴 새가드는 사실과 가치의 연결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샘 해리스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다. 세계에 가치가 없고 과학이 어떤 가치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즉 과학이 가치중립적일지라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355 페이지)

 

사실로부터 가치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일 뿐이다. 인간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옳고, 중요하며, 믿어야 한다는 감정을 느끼고 가치판단을 한다. 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이유에서 믿는다.(356 페이지) 샘 해리스는 우리의 뇌가 기능적으로 사실과 가치를 처리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356 페이지)

 

샘 해리스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발견할 때에도 사실에 대한 믿음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한다.(357, 358 페이지) 과학자들은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증거와 논증을 토대로 옳다는 가치판단을 한다. 저자는 인간은 사실을 토대로 가치판단을 한다. 사실상 모든 가치판단의 영역은 과학적 사실들과 결부되어 있다. 지금까지 우주, 인간, 마음에 대한 과학책을 읽고 내린 과학적 통찰이다. (사실)과 판단(가치)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364 페이지)

 

앞에서 과학을 읽다는 제목과 달리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 등의 다섯 챕터로 구성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 배경을 알 수 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는 과학책이면서 인문학책이다. 이 책들은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과학적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과학적 개념과 내용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지식()의 가치, 과학기술의 방향성, 올바른 사회, 삶의 의미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과학저술가는 잘못된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367 페이지)

 

편의상 과학으로 크게 분류했을 뿐 그 안에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 등의 세부 항목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의 관점 또는 가치관에 나는 공감한다. ‘과학을 읽다는 서평집 형식의 책이지만 하나의 관점으로 수렴하는 책들을 선정, 배치한 일관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하나 하나의 책들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처럼 유기적으로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책, ‘과학을 읽다를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윤동주의 삶과 문학 이삭문고 3
고운기 지음 / 산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윤동주 가족들이 평양으로 이주해간 것은 용정의 공산화 때문이다. 여동생 혜원씨는 남북 단독 정부 수립(1948) 후인 1949년 겨울 종교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검문이 심해 오빠의 유품(사진첩)을 친지에게 맡겼다. 함경북도 남양의 부모를 만나러 가던 친지는 발각을 우려해 차창 밖으로 유품을 버리고 말았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에 입학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때였다. 윤동주 시 가운데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이 시 가운데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시인은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릴케의 말을 바꾸어 쓴 것이다.(16 페이지)

 

릴케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비밀스러운 뜻을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는 시인의 행위를 신에게 저주받을 일이란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란 표현을 시인이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편하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표현한 것이기보다 즉 시를 쓰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으로 본 것이기보다 철저하지 못한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윤동주의 독립운동과 옥사(獄死)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윤동주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길을 갔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지역인 간도(間島)는 청나라의 발상지였다. 청이 후에 베이징으로 옮겨감으로써 간도는 빈 곳이 되었다. 간도는 조선과 옛 청나라 사이에 섬처럼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특히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라 함)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도에 살게 된 것은 1869년 무렵으로 함경북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게되면서부터이다. 간도는 풍수지리의 이점을 갖춘 곳이자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윤동주가 태어난 당시 주소는 중화민국 동북부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이다. 외사촌 김정우(윤동주보다 한 살 어림. 동창생)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교회와 나무이다.

 

학교를 세우고 선생을 물색하는 명동촌에 정재면이란 22세의 청년이 나타난다. 그의 요구 조건은 학생들이 공부할 과목에 기독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9년의 일이다. 윤동주는 후에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다녔다.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행동 지향적 인물이었다. 문익환은 1932년 윤동주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중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중퇴한 뒤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 재학중에는 학병을 거부했고 이 해부터 전도사로 활동했다.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열등감을 가졌고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세 사람은 특출난 친구들이었다. 문익환은 두 친구를 같은 해(1945)에 한꺼번에 잃고 50년을 더 살다 갔다. 그의 희생정신은 두 친구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은 중요한 자리에서 윤동주의 시를 암송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윤동주와 그의 시를 알렸다.

 

윤동주는 자신의 작품 아래에 늘 쓴 날짜를 적었다. 저자는 부끄러움을 윤동주의 온 생애를 뒤덮었던 말로 정의한다. 명동소학교는 서숙(書塾)이란 이름으로 소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었다. 윤동주가 속한 학년 전체가 문학적 소양을 갖춘 아이들로 짜여 있었다. 이것이 서로를 부추기는 힘이 되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로부터 졸업생 13명과 함께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받았다. 이 시집이 어린 윤동주와 친구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국경의 밤'은 소외된 국경 지대의 궁핍한 생활상과 식민지 치하의 비정한 현실을 눈물겹게 그린 시집이다.(57 페이지)

 

은진중학교는 용정에, 숭실중학교는 평앙의 학교였다. 윤동주는 살아서 시인으로 데뷔하지 못했다. 윤동주가 남긴 것은 시와 그 시를 쓴 날짜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문인들이 데뷔를 하고 통상적인 문단 생활을 대신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65 페이지)

 

193519세의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당선된다. 이 역시 윤동주에게는 분발(奮發)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구 선생을 찾아가 교육을 받았다.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동맹 자퇴한다.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이때 송몽규는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 땅을 떠돌고 있었다.

 

윤동주의 평양 시절(숭실중학교)은 짧게 끝났다. 소득이 있었으니 바로 정지용 시인을 만난 것이다. 물론 실제 만남이 아니라 정지용 시집과의 만남이었다. 정지용은 김억, 김소월, 한용운으로 이어지던 한국 현대 시단에 현대시다운 현대시를 처음 쓴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85 페이지)

 

윤동주는 정지용 시를 읽음으로써 시가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꼈을 수 있다. 윤동주는 동요 시인 강소천(1915 -1963)을 만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이상의 시에도 관심을 보였고 백석(1912 - 1996)의 시집 '사슴', 김영랑의 '영랑 시집'을 필사하기도 했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다닌 연희전문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였기에 거의 유일하게 조선어 교육이 살아 있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윤동주를 있게 한 두 사람을 고르라면 송몽규, 정병욱이라 말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보다 먼저 문학에 재능을 보인 송몽규는 정작 다른 길을 갔지만 윤동주로 하여금 자신의 길 전부를 문학에 걸게 했고 정병욱은 윤동주 시의 충실한 조언자였고 윤동주가 증정한 자필 시집을 해방이 될 때까지 자기 집 장독대에 묻어 끝까지 지켜내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저자는 송몽규를 지혜의 보살이자 계기를 마련해주는 문수보살에, 정병욱을 위로의 보살이자 완성의 보살인 관음보살에 비유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는 정병욱과 함께 서대문구 누상동 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다.(누상동, 부암동 등은 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마광수 교수는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우물을 시인의 감성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즉 한 포기 꽃을 통해서도 우주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시인의 감성이라고 한다면 윤동주는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우물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대자연과 우주를 지켜보고 있다고.(129 페이지)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자비를 들여 시집을 내려 했을 때 완성된 원고의 첫 작품이 '자화상'이었다. 이 시는 습작기를 마친 윤동주가 이룬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바람이 불어'에서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란 구절이 있는 '서시'는 윤동주가 붙인 제목이 아니다. 이 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격의 짧은 시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오늘날의 비자에 해당하는 도항증명(渡航證明)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는 서류 제출 5일 전에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는 이 시가 쓰인 종이 여백에 글씨를 썼는데 그것은 도항증명, 비애금물(悲哀禁物)이었다. 저자는 정병욱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따온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쉽게 씌어진 시'를 윤동주가 남긴 최대의 명편이라 칭한다.(158 페이지) 송몽규의 조카인 소설가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란 구절이 있는 ''을 윤동주가 생애 처음 다가온 사랑에게 바쳤으리라 짐작한다.(161 페이지)

 

윤동주는 일본에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시를 써 보냈다. 후에 경향신문 기자가 된 강처중은 그 가운데 한 편인 '쉽게 씌어진 시'를 경향신문에 싣는다. 저자는 윤동주를 오로지 민족주의적 순교의 시인으로만 말한다면 본디 제 모습을 일그러뜨릴 수 있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가시밭길이요 올무로 뒤덮인 벌판에서 제 나라 말로 끝내 시를 쓰는 일에 생을 바치기로 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죽음을 담보로 한 민족운동이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윤동주의 부친과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정체 불명의 주사(注射) 이야기를 들었다.(182 페이지) 윤동주 가족은 윤동주 묘에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글을 새겼다. 처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순간이다. 송몽규의 혐의는 스스로 문학자가 되어 지도적 지위에 서서 민족적 계몽 운동에 몸 바칠 것을 윤동주와 협의했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의 유려한 해석이 돋보이는 책,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을 추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30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30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동주 -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 문학의 이해와 감상 13
이건청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동주 시인을 이야기할 때 열사(烈士)와 의사(義士)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열사는 무기 없이 비폭력으로 저항한 분들, 의사는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다.) 윤동주처럼 신념의 인간이 행동의 방식이 아닌 시의 방식을 택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보드랍기 짝이 없는 서정적 자아로 완강하고 투박한 굴욕의 시대에 응전해 갔기에 수많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크나큰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윤동주는 지사(志士)도 투사(鬪士)도 아니었다. 다만 시로써 끊임없이 "아픔의 먹이"가 되어갔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은 1890년 회령에서 이주해 와 청국인에게서 땅을 구입해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발전시켰다.

 

간도는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윤동주 집안과 김약연 집안은 혼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윤동주는 아명이 해환(海煥)이었다. 그 아래에 달환(達煥; 일주)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이 별환이었다.(해와 달과 별이다.)

 

천문학자 박석재 교수는 "우주에는 무엇이 있나요?"란 아이들의 물음에 ", , 별이 있단다"고 답한다고 말한다.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67 페이지 참고) , , 별은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이다. 윤동주 부모는 해와 달과 별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아들들을 생각하고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었을 것이다.

 

, , 별은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 나오는 하늘, 바람, 별과 잘 어울리고 시와도 잘 어울린다. ()이지만 시()라 해도 좋을 듯 하다. 윤동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명동의 생가 마을은 과일나무에 둘러싸인 기와집, 오디나무 밑 우물, 이 모두를 굽어보고 선 교회당과 학교 건물 등이 있는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지닌 곳이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194529세로 타계할 때까지 학생 신분이었다. 명동 소학교 시절 윤동주는 학교에서 발간되는 벽보신문에 동시를 빠짐없이 발표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할 정도로 독서 범위가 넓었다. 명동 소학교 5학년 과정을 수료한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10리 동남쪽의 대랍자라 하는 곳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을 더 다녀 졸업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 (), () 등의 이름은 이 시절 만난 여학생들이다. 이 중국인 소학교를 마치고 윤동주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 집안은 이를 계기로 용정으로 이사했다. 통학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동에 유입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때문이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의 미션 스쿨이어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 시절 윤동주는 다방면에 능력을 보였다. 축구, 교지 편집, 재봉질, 웅변, 수학.. 윤동주는 2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침착한 어조와 내용으로 1등을 했다는 점이다.

 

동급생이자 고종 사촌인 송몽규가 길림을 거쳐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자 윤동주는 부모를 설득해 19359월 숭실중학교로 옮겨갔다. 윤동주는 백석(1912 - 1996) 시집 '사슴'이 출간되자 책을 구할 수 없어 1백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온종일 걸려 정자로 베껴냈다.

 

중학 시절 윤동주의 서가에는 '정지용 시집', 한용운(1879 - 1944)'님의 침묵', 수주 변영로(1898 - 1961)'조선의 마음', 파인 김동환(1901 - ?)'국경의 밤', 무애 양주동(1903 1977)'조선의 맥박', 백석의 '사슴' 등이 꽃혀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윤동주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가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1894 - ?) 선생에게서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손진태 교수로부터 역사를, 이양하(1904 - 1963) 교수로부터 영문학 강의를 들었다.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계속 영문학을 한 것도 이양하 선생의 영향이었다. 산책길에서 윤동주는 삼베 또는 옥양목 한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항상 책을 들고 있었다. 윤동주 시에는 가필, 정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윤동주는 형편상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 때문에 기숙사도 영향을 받았고 4학년 생인 윤동주는 이에 2학년생인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하게 되었다. 누상동 마루터기였다.

 

이 하숙집 이후 소설가 김송(金松; 1909 - 1988)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동주는 많은 시를 썼다. 김송은 요시찰인이었다. 이 때문에 윤동주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이 시기는 참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윤동주는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별 헤는 밤', '서시' 등의 대표시들을 썼다.

 

윤동주는 독서 범위가 넓어지면서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윤동주는 책에 메모를 할 때도 있었지만 좀체 책에 줄을 치지 않았다. 윤동주는 별안간 떠오르는 시상을 충동적으로 표현해내지 않고 몇 달, 몇 주를 두고 머릿 속에 간직해 두고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되었을 때 문자화했다.

 

윤동주는 천성적으로 걷기를 좋아한 시인이었다. 정병욱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것은 해방 후인 1948130일이다. 애초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 졸업기념의 시집으로 기획한 것이었는데 7년이나 지나 빛을 본 것이다. 1942년 연희전문 문과를 마친 윤동주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된 윤동주는 상당 분량의 시작(詩作)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했고 압수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해야 했고 심한 취조를 겪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윤동주는 읽힐 기약도 없는 시들을 위해 가장 치열한 정신을 태워올렸다. 윤동주 시 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117편이다. 이 가운데 35편 정도가 동시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윤동주 시가 일관되게 노래한 것은 그가 설정한 절대적 양심에 도달하지 못한 채 현실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의 번민상이다.

 

윤동주 시의 정서적 근원은 고향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상(理想)으로 설정한 절대 자아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 '또 다른 고향'에 나오는 백골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인이 고향에 돌아온 날 백골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윤동주의 고독은 고향에 돌아옴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윤동주는 보다 포괄적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을 표명하기 위해 우물, 거울, 하늘, (), 십자가 같은 상징들을 동원했다. 우물이나 거울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비추는 것들이다.

 

윤동주는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도취된 나르시스와 달리 연민과 갈등의 모습의 자신을 발견했다.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멸망한 왕조의 후예인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상징물로 거울을 설정했다. 하지만 그 거울은 파란 녹이 끼어 있었다.

 

윤동주의 자아 성찰은 비극적 자아를 확인한 아픈 것이었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그의 존재는 모멸과 오욕의 것이었다. 윤동주는 단절이나 좌절에 대한 감정적 위로나 화해를 말하지 않았다.

 

윤동주는 그것을 강하게 응시하고 뛰어넘으려 했다. 윤동주는 한국 서정시에 긴장을 불어넣어 깊은 공감의 시세계를 완성한 시인으로 기록되었다.(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이건청의 '윤동주'100 여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꽤 체계적이고 세밀한 책이다. 충실한 반영과 분석이 돋보이는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김수영의 연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현경 여사(1927 - )가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 정지용 교수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중입니다"란 말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 아내, 한 여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은 이렇게 책 날개서부터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영어, 라틴어, 한문, 고전 등에 능통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김순남, 김현경의 5촌 오빠이자 성우 김세원의 아버지인 이 분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받은 작곡가이다. 스승인 하차투리안이 오히려 김순남에게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을 정도이다.

 

김순남의 집에는 임화, 오장환, 김남천, 안회남, 함세덕 등의 카프(KAPF) 시인들이 자주 모였다. 진명여고 2년 여름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난 김현경 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이종구란 이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일본 유학 내내 함께 기거한 막역지우이다.

 

이종구가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당시 김현경 여사는 배인철을 만나고 있었다. 임화의 집에서 알게 된 배인철은 흑인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문학자였다. 남로당 주요 멤버였던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괴한의 총에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연애 금지 학칙을 어긴 죄로 이화여대에서 제적을 당했다.

 

모두 꺼렸지만 김수영 시인은 가택 연금 중인 김현경 여사를 찾아왔다. 김수영 시인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을 한 사람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My soul is dark란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문학은 모든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란 말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32 페이지) 1950825일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 시인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김현경 여사에게 두어 번 말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군을 만났다가 미군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지서로 끌려가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시인은 결국 살아 돌아왔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허락을 얻어 고교 영어 교사를 하던 이종구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년이 훌쩍 지났다. 이종구는 광적으로 집착했다. 세 사람, 아니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사이에서 한 처신은 애매했다. 더 이상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이란 시에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 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란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김현경 여사에게 외설 소설을 쓰게도 했다. 그렇게 받게 된 원고료를 김수영 시인은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술을 마시는 데 쓰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은 매문(賣文)이란 말도 했다. 속물이란 말도 했다. 진짜 속물이 되는 것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진짜 속물이란 어엿한 글쟁이를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김현경 여사는 '도취의 피안'을 김수영 시인의 시 중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은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직접 물으니 김수영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73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황무지 같았던 서강 언덕에 삶의 자리를 잡았을 무렵 "농사라고 할 것은 없지만 500평의 채소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그는 농부요 나는 알뜰한 농부의 아내를 자처했다. 그는 또한 매일 같이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했다. 농부와 시인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77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삶의 여유를 반기면서도 끊임 없이 경계하는 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풀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하던 해 529일 쓴,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현경 여사는 '' 역시 수식 없이 수영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었다.(135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安逸)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했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작고(作故) 무렵 단호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와 에세이에 자기만의 시론을 멋지게 정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143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는 끝까지 고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자신의 자랑이라면 가끔 대화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죽음을 "48년 생애를 마치고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표현한다.(149 페이지)

 

김수영 시인이 운명(殞命)의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것은 번역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수영 시인은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부끄러움도 없이"(김현경 여사의 표현)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했다.(152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 시인의 시를 박인환 시인이 일본어로 낭송했는데 음독이 너무 틀려 그 후로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초현실주의 예술이나 전위예술에 무서운 비평을 가했고 거기에 취해 있는 시인들을 뒤떨어진 시인이라며 경멸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길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한다.(166 페이지) 그것은 어머니한테 먼저 가야 하나, 아내와 아들한테 먼저 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김수영 시인이 택한 곳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매순간 다짐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답답한 시간을 이를 흔들어 빼는 것으로 달랬다. 김수영 시인에게 그 고통은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극히 민감했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랬다. 그래서 소음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황무지 같은 서강(西江) 언덕에 자리하게 되었고 호구지책으로 양계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늘 그늘과 비애를 삼킨 위대한 서정을 깔고 시를 썼다고 표현한다. 김수영 시인은 일 년에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 시를 썼다. 김현경 여사가 한 일은 초고(草稿) 정서(淨書)였다. 김수영 시인은 비위에 거슬린 술을 마신 날 김현경 여사에게 심한 주사를 부려 여사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고 별거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일과 무위를 싫어한 김수영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술은 마시지 않은 염결(廉潔)성을 보였다. 김수영 시인은 집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과 서재를 엄숙한 일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앞서 가는 시 정신을 갖기 위해 철학서는 물론 새로운 문학 책을 숙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문명과 서울과 인간정신과 인류의 온갖 오염을 시와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고 살다 간, 끈질긴 의지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자발적 또는 적극적 감금생활로 정의했다. 김수영 시인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시인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수영 시인은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을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움은 자유고 자유는 새로움이란 말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고 시인에게는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 진정 아름다운 우리 말이라는 말을 했다. 김현경 여사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한 수영의 정진하는 자세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기관지염이다. 김현경 여사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을 읽으면 수영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 시인은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었다. 울분과 불만 이후에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최측의 농간판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敎檀(..교단) 四十年(사십년)回憶(회억)'이란 부제를 병기하지 않고 제목만을 명기한 책이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결합한 저자만의 글쓰기를 수필이란 장르로 한정짓지 않기 위해서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사실 혼동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저자 무애(无涯) 양주동(1903 - 1977) 선생님(이하 저자)은 우리나라 최초로 신라 향가 25수를 해독한 국어학자이고 우리 고어를 의식적으로 글쓰기에 활용한 분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몇 어찌'란 글을 통해 그 분의 성향이나 스타일을 알 수 있었거니와 깔끔한 노란 색 표지가 인상적인 전집 형태로 새 단장되어 나온 책을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저자의 책은 술의 힘에 편승해 써내려간 문학 책이 아니라 깊고 거침없고 정교한 사유가 압권인 책이다. 저자는 문학을 자신의 평생의 기호(嗜好)라 말한다. 자칭 한문학 중독자, 신학문 중독자인 저자의 글은 종횡무진 지식의 보고(寶庫)들을 섭렵한 내공에 기인한 유서 깊은 것이다.

 

()()() 세 방면을 겸수(兼修)한 저자의 끝내의 귀의처는 국학 곧 국문학의 사학(斯學)이었다. 저자는 열한 살 때 동네 야학숙(夜學塾)의 숙장겸 선생 역할을 수행했다.(: 글방 숙) 저자는 이때 학비 일체는 숙장(塾長)인 자신이 부담하고 월사금은 없고 속수(束脩: 입학할 때 내는 돈) 대신 한 달에 술 한 병을 지참할 것을 요구했다.

 

구학(舊學)의 대가가 신학(新學)을 접할 때 어려움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삼인칭(三人稱)이란 말을 처음 듣고 논어에 나오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의 그 삼인행인가, 아니면 좌전에 나오는 삼인점 종이(三人占 從二)‘의 그 삼인점인가 궁구했다고.(삼인행 필유아사는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고, 삼인점 종이는 세 번 점을 쳐서 두 번 나온 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신학문 중 수학을 가장 좋아했다. 앞에서 몇() 어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공간 속 도형이나 대상들의 치수, 모양, 상대적 위치 등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측량과 관계된)geometry를 중국에서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기하 시간에 저자는 안기하(安幾何)로 통하는 안일영 선생이 대정각(맞꼭지각)은 상등(相等: 같다)하다는 문제를 증명해내는 것을 보고 놀라 근대문명에 지각(遲刻)하여 ”, “도장만 찍다가 드디어 봐라, 어떻게 되었느냐?”의 망국을 당한 내 나라도 대개 시골뜨기나 자신 같은 무지의 과정의 소치였구나! 오냐 기하를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는 가위로 실제 각을 만들어 대정각이 같다는 것을 증명한 저자와 달리 수식만으로 깔끔하게 증명해낸 안일영 선생이 자신의 도출 과정을 가리키며 봐라,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 데서 나온 말이다. 저자가 이름을 날린 것은 약관 20세의 와세다대 초년급 학생으로 춘원 이광수의 중용과 철저‘(동아일보 수록)를 반박하는 철저와 중용‘(조선일보 수록)이란 글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였다.

 

춘원(1892 1950)은 저자(1903 1977)보다 11살 연상이다. 열 살 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자신의 기주벽(嗜酒癖)과 한때의 경음(鯨飮: 고래가 물을 마시듯 술을 많이 마심)은 모두 전가(傳家)의 내력이라 말한다. 저자는 기주(嗜酒: 술을 즐김)했는데 술과 관련된 중국 고전들로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단지 술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시회(詩會)가 발전하면 주회(酒會)가 되고, 시회는 번번이 시루(詩樓)로부터 주막으로 옮겨짐이 항례였다.(135 페이지) 저자는 청춘은 한창 서럽고 인생은 그저 외롭고 사랑도 차츰 권태로워졌기에 술이 자꾸 늘어만 갔다고 한다.(138 페이지) 저자가 술과 글로 어울린 사람들은 나도향(1902 1926), 이은상(李殷相: 1903 1982), 염상섭(廉想涉: 1897 1963) 등이다.

 

술은 염상섭과, 글은 이은상과였다(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 호는 도향, 필명은 빈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염상섭은 시에 자못 흥미가 없었음에 대하여 자신은 소설의 경계를 아주 몰랐다. 염상섭이 끙끙거리며 열심히 퇴고(推敲)해 쓴 치밀하고 끈기 있는 문장을 저자는 트리비얼리즘이라 평했는데 정작 그런 저자는 구상한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저자는 이를 일러 버선 한 켤레도 꼼꼼히 말아보지 못한 시골 색시가 서울 마누라의 저고리 깃, 섶 솜씨를 비평하는 격이라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는 그리도 자긍(自矜)이 심하던 시를 중단하고 평론과 잡문에 종사하다가 신라가요 연구에 전()하였다고 한다.(179 페이지)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우연히 읽고 선생도 일찍이 자신처럼 객기를 이국에서 잠깐 부린 일이 있었거니와 만일 선생이 자신의 글을 읽는다면 후생이 가외라 했을 것이라 말한다.(208 페이지)

 

저자는 1921년에 일본에 갔다가 중간에 지진으로 인한 재해 때문에 1년을 휴학하고 1928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6년 공부 기간을 개인의 영화나 일신의 이해를 꿈에도 계교(計巧: 여러 모로 빈틈없이 생각하여 낸 꾀)해본 적이 없고 오직 겨레를 계몽하고 지도하고 향상하여 독립과 해방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228 페이지) 충분히 공감한다.

 

저자가 회월 박영희, 필봉 김기진, 빙허 현진건, 노산 이은상, 금동 김동인, 서해 최학송 등 유명 문인들과 어울린 모임 가운데 시조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토론이 가장 인상적이다. 저자는 시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쪽이었는데 일부에서 봉건 시대의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두 진기한 발언이 있었다.

 

김동인(金東仁: 1900 - 1951)은 시조라는 것은 도무지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김동인은 시조를 개수작, 당치도 않은 객설이라 칭했다. 저자는 이에 자신이 한 시조혁신론의 평범, 진지한 일석의 변을 듣고 도리어 일종의 반발감을 느껴 잠깐 역설적인 독설을 농()한 모양이라 말한다.

 

신경향파의 작가 서해 최학송은 시조 집어치우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술에 취해 한 그 말을 시조() 집어 치우고 술이나 마시자는 소리인지 시조 같은 유한 문학을 아예 현대문학에서 집어치우자는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말로 마무리한다.(314 페이지)

 

저자는 서해의 그날 밤 진의는 아마 영원한 비밀이겠으나 자신은 그것이 이념적, 위치적으로는 사회파에 기울어지고 인간적, 체질적으로는 민족파에 친근한 그의 딜레마적 입장에서 고민된 나머지 취중에도 궁여의 일책으로 고심 안출(案出)된 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저자는 뜻 밖에도 H. G 웰스의 타임머신을 이야기한다. 사연인즉 소동파가 술을, ()를 낚는 갈구리라 칭한 것을 살짝 고쳐 술은 현실을 잊게 하는 에테르, 시간을 줄이는 비행기라 말하며 (시간 단축술을 논한) 웰스가 술이라는 간단한 틀의 축시(縮時: 시간 단축)적인 기능을 작품에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과 같은 주도(酒徒: 술꾼)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실천적인 경험과 착상이 부족한 탓이니 섭섭한 일이라 말한 것이다.(351, 352 페이지)

 

저자는 문재(文才)도 뛰어나고 그 만큼 아량(雅量)도 크다. 저자의 아량을 문재에 기반한 아량이라 할 수 있다. 초나라 왕이 명궁(名弓)을 잃자 신하들이 찾아보기를 청하자 왕이 초나라 사람이 잃은 것을 초나라 사람이 얻었으리니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라 말했다. 이를 들은 공자가 왕의 생각이 크지 못함을 아까워 하였다. 왜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얻었으리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라 말했다.

 

이에 저자는 공자의 생각이 크지 못하다. 왜 자연은 얻고 잃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하필 사람이리오?라 말했다.(368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두 가지 지적 결함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독일어를 통 모르는 것, 다른 하나는 아주 음치(音癡)인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릴케, 카프카의 여러 작품을 원어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도 아무 영감이 없었음이 괴로운 일이었다고 말한다.(431 페이지)

 

저자는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말한다. 당시 저자는 휴학중이었다. 저자는 이를 천운(天運)으로 돌린다.(442 페이지) 저자는 위방불입 난방불거(危邦不入 亂邦不居: 멸망할 듯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정치와 풍속이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논어태백편), 화염곤강 옥석구분(火炎崑崗 玉石俱焚: 곤강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모두 같이 불탄다. 재난이 있으면 선한 자 악한 자 구분 없이 모두 다 죽을 수 있다는 의미.)이란 경전 내용으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의 스무 살 직후 청춘기의 글벗이요 애인이었던 K와의 인연을 꺼내기도 한다. 재래의 봉건적 가족 제도에 의한 친권 중심의 도덕관에 대향하여 연애와 결혼, 이혼의 개인적인 자유를 믿고 주장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 조혼(早婚)에 의한 결혼을 솔선 파기하는 등 진보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일본 유학생회에서 제명 논의가 있자 저자는 스스로 모임에서 탈퇴한 뒤 고별 연설을 겸하여 한 바탕 문학 강연을 시험했다.

 

연애지상주의, 자유 연애 등을 주제로 게거품을 물었는데 그 열변을 들은 K가 찾아왔고 저자는 그녀를 제자 겸 애인으로 두었다. 저자에 의하면 그녀는 참으로 지식욕이 엄청나고 감수성이 날카로운 만큼 연애에 대해서도 미상불(未嘗不: 아닌 게 아니라) 뜨겁고 용감하였다.(458 페이지)

 

저자는 뜻하지 않은 한 불행한 일로 그녀와 헤어진 날 비가 와 날이 음침한 탓도 있었겠으나 대낮인데도 시야가 컴컴하여 길이 온통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아마 내가 K를 무던히 사랑했던가 보다. 그 빛나는 눈, 참새 같은 몸매, 훤칠한 이마, 그 재주, 그 소박함, 그 정열, 그 영리, 또 그 까불음 모두 다 좋았다.”(462 페이지)

 

K는 소설가 강경애(1907 1943)이다. 강경애는 병으로 일찍 타계했다. ‘인간 문제등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불문과에서 춘원이 자신과의 논쟁에서 물과 밥 같은 평범, 건실함의 문학으로 칭한 영문학과로 적()을 옮긴(474 페이지) 저자는 문학행동과 술 마시기에만 몰두하며 날뛰다가 졸업 3개월 전에 논문을 쓰게 되었다.(490 페이지)

 

토마스 하디의 소설 기교론을 주제로 한 논문인데 하디의 전작과 평론의 참고서들을 부랴부랴 구해 단시일내에 모조리 섭렵, 독파하고 결국 논문을 완성한 뒤 고국에서 온 아내와 함께 논문을 나누어 정서(淨書)해 마감 10분 전에 제출까지 했다.(493 페이지) 저자는 논문에서 (하디를 염두에 둔 바에 따라) 운명론, 염세주의 따위는 당초부터 엄밀한 의미로서의 문예상의 이즘이 아니며 형식에서 출발하여 내용에 미치고 드디어 그 총체에 도달함이 문예 비평의 모든 행정(行程)이라는 말을 했다.(500 페이지)

 

저자는 가을 날 황혼에/ 줄나무 길을 혼자 걷다가/ 신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말씀하리라 - / 당신을 찾지 않을 만한/ 굳센 힘을 제게 주소서같은 존 골즈워디의 시를 읊곤 했다.(509 페이지) 저자는 대학 3개년 전 과목 성적의 4/5가 갑()이어야 취득할 수 있는 고등면허를 위해 나머지 학기에서 모두 갑을 얻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에만 매진 목표를 이루는 등 몰입하는 대단한 힘을 보이곤 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야망을 두었던 바 시인, 비평가, 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런 자신으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 연구에 발심(發心)케 한 것은 일본인 조선어학자 오구라 신페이씨의 저서 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 말한다.(557 페이지)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이 저자에게 통절(痛切)함을 안겨주었다.(558 페이지)

 

저자의 글은 현란한 한자어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독학무사(獨學無師: 스승 없이 홀로 배운 것), 독서불구심해(讀書不求甚解: 책을 읽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접어두고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 염운(拈韻: 운자를 뽑는 것), 촉각시(燭刻詩: 초에 금을 그어놓고 촛불이 거기까지 타들어가기 전에 짓는 시. 짧은 시간 안에 짓는 시), 학숙(學塾: 글방),

 

후생가외(後生可畏: 후학이 두려워 할 만하다는 뜻으로 논어 자한(子罕)편이 출처이다.), 일일지장(一日之長: 하루 먼저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 나이가 조금 높음을 이르는 말.), 시참(詩讖: 우연히 쓴 시가 자신의 앞날을 예언한 격이 되는 경우), 기주벽(嗜酒癖: 술을 즐기고 좋아함), 경음(鯨飮: 고래가 물을 들이키듯 술을 몹시 많이 마심), 일람첩기(一覽輒記: 한 번 보면 다 기억한다는 뜻),

 

중인개취아독성(衆人皆醉我獨醒: 모두 술에 취해도 자신만은 깨어 있음을 이르는 말로 굴원의 어부사(漁父詞)‘가 출처),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이 출처), 겁나(怯懦: 겁이 많이 마음이 약함), 치의(緇衣: 승려), 치문(緇門.. ()는 검은 비단 치자로 치문(緇門)은 물들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세계(世界)라는 뜻으로 승도(僧徒)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일지반해(一知半解: 하나쯤 알고 반쯤 깨닫는다는 의미. 지식이 충분하게 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거나 많이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 필흥(筆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나는 흥취) ..

 

문주반생기는 대단한 책이다. 발간 60년이 다 된 책인데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것이 놀랍다. , , 학문, 우정, 사랑.. 이 모든 것이 책에 담겨 있다. 천재이지만 필요할 때 놀랍게 몰입한 사정은 노력의 힘을 일깨운다. 오래 된 문주반생기를 한글 세대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새로운 감각과 주해(註解) 등으로 새롭게 단장한 최측의 농간(출판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81 | 82 | 83 | 8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