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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전인적인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62
김광식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 역사공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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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시인, 민족주의자, 스승, 행동인이다. 김광식의 전인적인 독립 운동가 한용운은 영웅 만해가 아닌 인간 만해에 초점을 둔 책,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에 초점을 둔 책, 자료중심의 서술과 객관성 유지에 초점을 둔 책이다.

 

세 초점 가운데 인간적 면모를 중심으로 만해를 조명하면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분석할 여지가 충분한 만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른바 구강 성격, 항문 성격 등의 개념으로 만해의 삶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해의 삶은 유랑(流浪)으로 볼 수 있고 만행(萬行)으로 볼 수 있다. 만행(萬行)이란 스님이 일정한 소재를 가리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하기 위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만해가 태어난 1879(829)은 고종 16년 즉 조선왕조가 내우외환, 서세동점의 격변을 치르던 때이다. 만해의 어릴 적 이름은 유천(裕天), 호적 이름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여섯 살부터 열 살까지 한학을 수학하며 자치통감, 대학, 서경 등을 독파했다.

 

189214세때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소홀했다. 189618세때 글방 선생이 되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189719세때 의병 운동 실패로 고향을 떠났다. 189921세때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등을 전전했다. 190426세때 2차 출가했고 190527세때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다.

 

1906년 세계일주 차원에서 시베리아행을 감행했다. 러시아를 거쳐 유럽과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인제에서 서울로 올라온 만해는 백담사와 금강산 마하연의 승려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만해 일행이 도착한 블라디보스톡은 머리 깎은 승려들을 친일파 일진회원으로 보고 무조건 죽이는 관행이 있었다.

 

조선 청년 5 6명이 만해를 결박해 바다로 던지려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만해는 현장 바닷가에 있던 러시아 경관의 개입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만해는 일차 귀국했다가 1912년 만주로 떠난다.

 

만주 역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친일파나 일제의 앞잡이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만해는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다가 조선 청년들에게 총을 맞았다.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 만해는 관세음보살의 환상을 보았다. 피를 많이 흘리는 위기 속에서 만해는 자신을 뒤쫓아온 청년들에게 총을 쏠려면 또 쏴보라고 호통을 쳤다.

 

이 소리에 청년들이 달아났고 중국 사람이 만해를 헝겊 조각으로 싸주어 만해는 다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했다. 191739세때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았다. 만해는 스물 여섯에 정식 출가했다.

 

만해의 삶 자체를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 동자의 삶에 비유할 수 있다. 화엄경의 선재 동자는 진리를 찾아 53 분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 선지식이란 깨달음을 얻은 덕망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만해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랬기에 그의 깨달음과 독립을 위한 헌신, 그리고 불교 개혁을 위해 치른 노력이 더욱 값진 것이다.

 

만해의 부친인 한응준은 청주 한씨의 사족이었고 홍성군 관아의 하급 관리였다. 만해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만해의 집안은 만해의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 눈물 나는 일이다.

 

만해 집안과 비교되는 집안이 이회영 집안이다. 명동 일대에 땅 만 평을 보유한 조선 최대 부자 집안이었던 이회영 집안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자 오늘날 기준으로 600억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만해의 부친 한응준이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응준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몰락한 양반이라는 명분과 동학군을 진압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갈등했다. 만해는 부친이 정해준 대로 결혼을 했다. 아내 전정숙은 지주의 딸이었다.

 

만해는 그런 처가 덕으로 홍주 향교에 다닐 수 있었고 결혼 이후 일체 가정 일에 무관심한 채 공부만 하는 칩거생활을 했다. 만해에게 결혼 생활은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당시 만해는 매일 밤 술집을 드나들었고 이름난 술꾼들과 술을 겨뤄 모두 이길 정도로 술이 셌고 자연스럽게 과음이 잦았다.

 

이것은 의존대상이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로 바뀌었으나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던 결혼 생활 때문에 술 즉 구강적 쾌락에 의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는 학문에도 무관심하게 되었지만 생계 때문에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만해는 이때 아이들에게 까닭 없이 화를 냈고 옷이 더러워져도 잘 갈아입지 않는 등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만해 집안은 몰락해 처가로부터 양식을 얻어먹는 처지가 되기까지 했다. 만해는 어릴 적 부친의 과도한 기대와 편애 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상대적으로는 소외되었다.

 

이로 인해 욕구 불만이 쌓였고 욕을 많이 했고 과도하게 술을 마셨고 남을 잘 믿지 못했다. 만해의 강직한 성격 때로는 괴팍한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 많다. 만해는 3.1 운동을 준비할 때 기독교측의 월남 이상재 선생과 논의를 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독립 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만해는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이고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 본위가 아닌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결국 두 분의 회합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만해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때 만해는 자신의 이름이 장의 위원 명부에 오른 것을 보고 수표동에 있는 장의 위원회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버렸다. 그때 펜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질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3.1 운동때 이상재 선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만해 선생과의 일화도 있다.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 사람들이 도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5백년 동안 정권을 잡아 일을 잘못 했고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를 받아 왔기 때문이라는 답을 했다. 이 이후로 만해는 다시는 도산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

 

만해는 3.1 운동때 독립선언서를 썼지만 변절해 친일파가 된 육당을 길에서 만나자 내가 아는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창씨 개명을 한 뒤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오자 네 이놈 보기 싫다며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선생은 소심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보면 크게 못마땅해 했다. 술을 한잔 하면 괄괄한 성격으로 젊은이들에게 사정 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 나 같은 존재는 독립 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을 해봐.”란 말을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축하한다고 격려했다.

 

만해는 건봉사 시절 속초에 거주하는 여연화 보살과 긴장감 넘치는 인연을 이어갔다. 저자는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였기에 만해에게 새로운 여성과의 인연 만들기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인연의 그물은 현실의 이러저러한 구속을 뛰어 넘는다고 말한다. 이 보살은 3.1 운동으로 옥에 갇힌 만해를 면회하기도 했고 출옥 후에는 선학원을 찾아왔는데 이때 만해가 호통을 쳐 내쳤다는 이야기가 있다.(37 페이지)

 

만해는 건봉사 조실(祖室)인 정만화(鄭萬化) 선사로부터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조실은 참선을 지도하는 큰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만해는 을사늑약 후인 1908년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한국 포교에 주력한 일본 조동종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만해는 일본의 불교는 물론 선진 문명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1910년 만해는 승려의 결혼 건을 들고 나왔다. 인구를 늘릴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승려 결혼이라는 불요불급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조동종 맹약을 분쇄하는 업적을 이룬다. 조동종 맹약은 우리나라의 대표 종파인 원종(圓宗)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 불교인 조동종의 도움을 얻어 불교를 발전시키겠다는 비밀 협약을 맺은 것인데 이는 결국 원종이 일본에 예속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말할 수 있다.

 

만해는 한국 불교는 임제종임을 내세웠는데 이는 명분이고 실은 조동종 예속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임제(臨濟)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로 유명한 당나라의 승려이다. 어느 곳에서든 주체적일 수 있다면 가는 서는 곳 모두가 참된 곳이라는 의미이다.

 

임제의 말 가운데 유명한 말이 또 있다.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다. 물론 임제종 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이 일로 만해는 만주로 떠난다. 이때 만해가 만난 사람들이 이시영, 이회영, 김동삼 등이다.

 

귀국길에 만해는 굴라재에서 죽다 살아나는 사건을 겪는다. 외부에서 온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당시 만주의 분위기 탓에 만해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총을 맞는다. 정신을 잃어갈 때 만해가 본 것은 어여쁘고 아름답고 절세의 미인인 관세음보살의 환상이었다. 정답고 달콤한 미소를 만해에게 던진 보살은 네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만해는 결국 목숨을 건진다.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정(坐定)하던 만해는 바람이 불어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해결하지 못하던 의문 덩어리를 풀었다. 깨달은 것이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뜨리니/ 눈속에도 복사꽃이 펄펄 날린다..” 이것이 게송(偈頌)이다.

 

이는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불교만이 아니라 민족까지 살리는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만해는 서울 종로 계동 북촌 지역 구석의 한옥을 거처로 삼았다.

 

만해가 깨달음의 게송을 만공(滿空) 선사에게 보내자 만공 선사는 날아다니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란 답을 보냈고 만해는 거북 털과 토끼 뿔이라는 답을 했다. 만해는 자기 집에 유심사(惟心社)란 간판을 걸었다. 종합 교양지 유심(惟心)’을 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만해는 불교의 정체성으로 민족과 국가의 진로를 풀고자 했다.

 

만해는 191811월 천도교의 최린(1878 1958)을 찾아가 독립에 대해 논의한다. 만해와 최린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 만난 바 있었다. 최린의 연인으로 유명한 분이 나혜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최린을 만난 것은 파리에서였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아내였는데 나혜석이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이었으나 희대의 스캔들에 휩싸여 35세에 이혼한 후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다. 남편 김우영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나혜석이 최린에게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사실이 빌미가 되어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난 것이다.

 

만해는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옥중 투쟁 3대 원칙이란 것이 있다. 만해는 이를 끝까지 실행했고 일본 경찰에게 당당하게 금후에도 계속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 답했다.

 

192112월 출옥한 만해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서울 포교당 인근의 안국동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선학원은 19211130일 준공된 건물이다. 선학원은 항일 불교의 중심처였다. 만해가 선학원에 머무르며 추진한 것은 불교대중화를 위해 한문 불경을 번역, 출판한 것이다.

 

만해가 불교개혁 운동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불교정책에 안주하는 주지들이었다. 만해는 정신의 고향이라 할 백담사와 서울 선학원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저자는 오세암 시절(1925년 초여름 이후)의 만해는 투사적인 인물에서 중후한 인물로 변화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1926년 봄 상경한 만해는 선학원에 머물며 회동서관에서 님의 침묵을 발간한다.(120 페이지) ‘님의 침묵은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 만해는 김억이 번역한 타고르 시집 원정(園丁)’을 읽어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김억은 소월의 스승이다.)

 

만해는 운동 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이는 좌우합작의 형태로 등장한 신간회로 나타났다.(123 페이지) 만해의 민족운동은 지엽적 문제는 제거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농민, 여성, 청년 등의 활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만해는 여성 스스로의 진정한 자각을 강조했다. 여성 자각이 여성 해방과 인류 해방의 근원이라 주장한 것이다. 만해는 여성의 속박이 전통적인 윤리, 도덕, 습관 등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려면 여성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해의 여성 운동관은 유교적, 전통적 질서를 극복하면서도 근대적인 평등 사상을 수용, 조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왔다.(128, 129 페이지)

 

만해를 찾았던 시인 신석정(1907 1974)은 만해를 거만 무쌍하면서도 다정했고 아주 붙일 맛이 두터웠고 그칠 새 없는 장광설이 인상적이라 평했다.(156 페이지) 만해는 1930년 무렵부터 종로 청진동, 사직동 등에 방을 얻고 지냈다. 혼자 살다 보니 늘 냉방에서 지냈다.

 

만해는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땐 방에서 편안히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해는 차디찬 냉돌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1934년 이후 만해는 심우장에 거처한다. 고향 홍성에서 17세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둔 만해는 55세에 다시 결혼을 했다.

 

보령 출신의 유숙원이란 분이 만해의 새 동반자가 되었다. 종로의 단성사 인근의 진성당이란 병원의 간호사였던 36세의 분이었다. 만해와 유숙원은 1933년 겨울 서울 성북구 신흥사의 불상 앞에서 간단한 의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심우장은 만해를 잘 아는 승려 김벽산으로부터 땅 52평을 넘겨받아 지은 건물이다. 이 땅은 김벽산이 초당을 지으려고 소유하던 것이다. 심우장은 정남향이 아닌 북향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만해는 심우장에서 안정을 취하며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했다. 재가승으로 신분이 변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결과이다. 유마(維摩)는 가장 뛰어난 재가불자이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그의 말이 유명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의 대사가 생각난다.

 

만해는 단 한권의 시집을 냈다. ‘님의 침묵이다. 만해는 제도권 교육을 일체 받지 않았다. 오직 그의 정신, 독서력, 정열이 그의 작가적 원천이었다.(175 페이지) 심우장 시절 만해의 문학적 행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설 집필이다. 생활 안정과 조선일보사장 방응모와의 각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다.

 

만해가 방응모와 친하게 지낸 것은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한 홍명희(1888 1968)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홍명희는 조선 승려 7천을 다 모아도 만해 하나가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만해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작품은 흑풍이다.

 

만해는 자신은 소설가가 되고 싶지도 않고 문장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연재로 인해 조선일보의 부수가 6천부가 증가했다. 만해는 소설을 통해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통한 진면목을 알리려 의도했다.

 

만해 문학의 가치는 지금은 대단한 평가를 받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조종현은 만해의 종교는 석가모니, 사상은 간디, 시는 타골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만해가 재혼으로 얻은 딸이 영숙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문만을 가르치던 만해는 딸이 신문의 일본 글자를 보고 무슨 글자냐 묻자 그건 몰라도 된다, 글자도 아니라고 말했다.

 

만해는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난관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만주의 호랑이라 불렸던 김동삼은 고향 안동에서 개화운동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넘어가 군사훈련을 하면서 독립항쟁에 나섰다.

 

3.1 운동 이후에는 만주의 군 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총 단결을 위해 헌신했다. 1931년 만주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1937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만해는 유해를 인수해 심우장으로 옮기고 5일장을 치러주었다.

 

만해는 해방을 못 보고 열반의 길로 갔다. 1944629일의 일이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아픈 마음을 그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달래야 하리라. 저자는 만해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새로운 이해는 앞으로도 더욱 지속될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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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걷는다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울역사산책
유영호 지음 / 창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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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西村)’을 걷는다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통일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북한 전문가가 쓴 이례적인 책, 역사적 배경에 충실한 책이다. 책은 전체 5장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장 느리게 걸어보자 서촌, 2장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 서촌, 3장 수많은 예술가들의 둥지 서촌, 4장 도심의 살아 있는 박물관 서촌, 5장 우리가 몰랐던 서촌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서촌이란 엄밀히 말해 북촌의 일부이다. 그런데 책에서 말하는 곳이 서촌이라 불리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종로구 가회동 일대가 북촌 한옥마을로 알려지면서 옥인동 일대를 북촌이라 이름하기 어색한 까닭이었다.

 

현재 책이 말하는 곳은 경복궁 서쪽 마을이란 의미로 서촌이라 불리고 있다. 일제때 청계천이 복개(覆蓋)된 것은 조선을 대륙 침탈의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총독부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재정문제로 일부만 진행되었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스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도시설계자들은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는바 일반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한편 저자가 주시경의 집터여서 용비어천가 빌딩으로 불리는 곳을 논한 자리에서 우리는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행한 문헌이 한 외국인이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책은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쓴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이다.

 

저자는 조선이 전조후시(前朝後市)를 완전히 따르지 않고 시장을 궁궐 뒤가 아닌 종로와 남대문로에 세웠다는 점, 성곽을 네모나 원으로 짓지 않고 산을 기준으로 분지에 성을 지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이 같은 유교문화권이었지만 자기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성곽 축조의 관념을 보유했다고 말한다.(62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영추문(迎秋門)이 경복궁의 대문들 중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복원된) 문이라는 사실도 접하게 된다.(82 페이지) 이 역시 일본의 조선 궁궐 훼손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슬픈 역사는 영추문 앞 보안여관에도 깃들어 있다. 서정주 시인이 투숙한 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한 보안여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건너온 부락(部落) 즉 부라쿠(ぶらく)란 말은 신분적사회적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동네의 고유 명칭을 부락으로 명명한 것 역시 영추문 사건처럼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이다.(85 페이지)

 

오감도의 시인 김해경이 이상(李箱)이란 필명을 쓰게 된 사연이 역사적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서촌을 걷는다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가 구본웅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들어간 김해경에게 사생상(寫生箱: 화구畵具를 담는 상자)을 선물했다. 가난했던 김해경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필명에 상자를 의미하는 상()을 넣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앞 글자는 흔한 성씨이되 사생상이 나무이니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를 사용하기로 했다.

 

연애로 이름을 알린 이상은 후에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을 세 번째 여자로 맞는다.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 뒤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와 결혼했다. 그녀는 김환기 사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변동림의 이복 언니가 변동숙이고 변동숙의 호적상 증손녀가 발레리나 강수진이다.(101 페이지) 구본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였다.

 

이상의 집과 2 3분 거리에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노천명의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의 집이 있고 바로 옆에 그의 화실이 있다. 이상범의 집 처마 아래로 누하동천(樓下洞天)이란 친필 편액이 보인다.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115 페이지)

 

서촌의 또 다른 명소인 대오서점 이야기도 흥미롭다. 대오서점은 조대식, 권오남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이름이다. 자식들을 교육시킨 서점인 대오서점을 지금은 다섯 째 딸이 북카페로 리모델링 해 계승하고 있다.

 

서촌의 맛집 골목인 통인시장은 일본인의 생활 편의를 위해 만든 시장이다. 통인시장의 일부가 옥류동천 상류의 물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본래 통인시장은 일본이 19416월 효자동 일대에 살고 있던 자국인들을 위해 개설한 제2공설시장이다.

 

서촌에서 가장 많이 방문객이 몰리는 곳은 옥인동이다. 옥류동과 인왕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옥인동 면적의 반 이상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 윤덕영이다. 그의 저택인 벽수산장은 16천평의 대지를 차지했었다.

 

박노수 미술관은 윤덕영이 시집간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기도 하다. 벽수산장 본채와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박노수 미술관이 있다.(132 페이지) 자수궁(慈壽宮)은 문종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문종이 선왕 세종의 후궁들을 거처할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다. 후에 성종의 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가 빈()으로 강등된 후 거처했고 중종 비 단경왕후도 궁에서 쫓겨난 뒤 생활했다.

 

재혼할 수 없었던 왕의 후궁들은 비구니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자수궁은 5천여명의 여승을 수용한 국내 최대 승방이었다.(164 페이지) 자수궁 터인 군인아파트 정문을 마주보며 서 있는 세종아파트는 사회주의자 이명건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명건은 친구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1948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란 호를 가졌다. 김원봉의 고모부가 지어주었다.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란 의미이다. 민족해방 운동을 위해 중국에 가는 그들에게 이국땅에서도 조국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167 페이지) 이명건의 동생이 화가 이쾌대이다.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곳은 옥인동 보안수사대이다. 조선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과 윤덕영의 가옥 바로 옆이다.(195, 196 페이지) 마지막 5장은 우리가 몰랐던 서촌이다. 전체 다섯 장(), 44편의 글 가운데 40번째 글이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이다.

 

()은 기를 육인데 같은 자로 육()이 있다. 김포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를 모신 능)에 가면 인종의 어머니가 묻혔던 육경원(毓慶園)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육경원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흥경원(興慶園)이 합쳐져 장릉이 된 것이다.

 

마지막 44번째 글은 혈흔처럼 남은 인조반정의 역사 창의문(彰義門)’이다.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는 모습이 개성의 자하동을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 창의문은 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경복궁의 두 팔에 해당하므로 길을 열지 말고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함에 따라 늘 폐쇄되어 있었는데 어명에 의하지 않고 창의문을 출입한 경우가 단 한 번 있었으니 바로 인조반정을 말하는 것이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이루어진 인조반정으로 명청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과 대북파가 제거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력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역사의 계승과 세월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게 된다. 이렇듯 서촌 순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역사를 배우는 현재적 의미이리라. 역작(力作)임을 실감하며 책을 덮는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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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
가게야마 가츠히데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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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렵고 관념적인 학문이다. 학자들끼리 사용하는 어의(語義)도 다르고 학문 자체가 일상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을 규정하는 본질 차원의 깊이를 이해함으로써 얻게 되는 희열감은 크다. 그 때문인지 쉽고 재미 있는 책은 그 나름대로, 본격적인 무게로 쓴 책도 그 나름대로 선택되고 있다.

 

가게야마 가츠히데의 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은 제목 그대로 쉽고 재미 있게 철학자들 28인의 핵심 사상을 설명한 책이다. 28인은 탈레스에서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베이컨, 데카르트, 칸트, 헤겔, 벤담, 존 스튜어트 밀, 키에르케고르, 니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프로이트를 거쳐 융에 이르는 분들이다.

 

돋보이게도 왠만한 철학서에서 잘 접하기 어려운 지식들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책이 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이다. 이는 각 철학자들을 짧게 핵심을 골라 설명해야 하는 부담감이 작용한 결과이다.

 

가령 우리에게는 선천적으로 경험론적 능력인 감성(感性)과 합리론적인 능력인 오성(悟性)이 있다. 감성이 감각적으로 소재의 상황을 인식한 것을 오성이 분석, 판단한 뒤 이론이성이 양쪽을 정리해 인식으로 연결시킨다.

 

칸트 철학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론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가능하다. 이 부분은 야스퍼스의 포괄자 개념으로 이어진다.(296 페이지) 한계상황은 과학만능의 시대에서 포괄자의 존재를 잊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포괄자를 생각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칸트가 말한 것처럼 과학적인 인식이 감성 오성의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이상 먼저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초경험적 세계까지 포함한 세계의 전체상을 과학의 힘으로는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괄자란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이다.(292 페이지)

 

여러 철학자들 가운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질적) 조합은 많은 곳에서 의미 있게 이어진다. 그리스도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은 위험하다.(128 페이지) 플라톤 철학이 천상의 본질인 이데아를 중시하기에 교회적으로 신과 동의어인 까닭에 교회 입장에서는 반가운 상황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본질은 개체에 내재해 있기에 연구자가 본질을 연구하다 보면 어느 사이 개체에 대한 흥미로 바뀌기 쉽다.

 

여기서 보편 논쟁이 있게 되었다. 형상이나 이데아 즉 사물의 본질을 의미하는 보편은 실재하는가 이름만인가, 하는 논쟁이 보편 논쟁이다. 개개의 사물이 보편을 복사했다고 요약할 수 있는 플라톤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이 안셀무스이고 보편과 본질은 존재하지 않을 뿐 부르기만 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이 로스켈리누스와 오컴의 울리엄이다.(129 페이지)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재적 위치에 섰다. 그는 보편은 신의 지성에 있어서는 사물에 앞서 실존하지만 세계 속에서는 사물 속에 실존한다고 정리했다. 개별 철학자들을 논하지만 이어지는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의 또 다른 특징은 시대 배경을 잘 반영했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편에서 이런 부분이 논의되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인데 정신적인 쾌락을 의미하고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부르짖었는데 이들은 모두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도시 국가가 붕괴된 시대의 삶의 방식이다.(90 페이지)

 

저자는 입시학원 강사로 현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가볍고 거친 말투도 그대로 게재했다고 말한다.(15 페이지) 그런 점을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편을 보자. “어설프게 진지하고 불성실한 인간은 태연하게 나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신념을 굽힐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담고 스스로 쓰레기더미 속에 떨어진다.”(264 페이지)

 

이 부분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이 글을 쓰다가 때려주고 싶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친으로부터 지금껏 자신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만 해왔기에 그 벌로 너희 일곱 형제는 모두 34세 이전에 죽을 것이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자랐다.

 

다행히 살아남은 키에르케고르는 정신불안증으로 우울한 인간이 되었다. 아무 직업도 없이 부자 아버지에게 빌붙어 산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기분대로 살며 열살 연하의 레기네 올슨을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대하고 구애한 끝에 3년만에 약혼에 이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녀를 위해 그녀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치워주어야겠다. 근데 그게 대체 뭐지? 어머 그게 바로 나? 그런가? 나란 말인가? 그래 나다....”란 생각 끝에 결국 혼자서 멋대로 파혼을 단행한다.(258 페이지)

 

저자의 예리함은 여기서 빛난다. “왜 키에르케고르처럼 자기를 좋아하는 이기주의자가 레기네의 행복을 생각했지?” 저자는 키에르케고르를 어설프게 진지하고 불성실한 사람으로 정의한다.(263 페이지) 재미 있고 역동적이고 효용까지 있는 저자의 내공을 만끽할 수 있는 책으로 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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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유럽을 걷다 시간으로의 여행
정병호 지음 / 성안당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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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이 함께 떠난 유럽 여행을 기록한 책이 특이하게 유럽 역사서의 형태로 다가왔다. 유럽 곳곳에 대한 촘촘한 정보 아니 지식을 대화 속에 담았다. 제목이 특이하다. ‘시간으로의 여행 유럽을 걷다

 

이 책에는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가령 저자는 유럽의 어원이 저녁을 뜻하는 에레브(EREB)에서 유래했다는 것, 그래서 유럽이 해가 지는 곳으로 명명된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하고 그에 상대되는 태양이 솟아오른다는 의미의 아나톨리아, 레반트 등의 말을 제시한다.

 

대화는 구체적이고 리얼하다. 가령 아들이 이집트는 지명이나 인명이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이집트 통일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말하자 아빠는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아빠는 아들이 빨리 알아차리자 눈치가 빠른데란 말을 한다. 또한 아빠는 아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있어 신들의 이름을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한다.

 

아빠는 아들이 로마 신화에 대해 묻자 단군 신화를 아는지 묻는다. 저자는 로마의 일곱 개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즉 팰리스의 어원을 이야기한다. 아빠는 유럽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스타일로 상세하고 길게 이야기한다. 물론 지루하지 않다. 더구나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자연스럽다.

 

아빠는 생소한 칸나에 전투 이야기, 자마 전투 이야기도 한다. 아빠는 아들의 반응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는 말을 한다.(95 페이지) 이를 보며 해설을 생각하게 된다. 반응을 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는 순간이다. 아들은 아빠 곁에 바짝 다가가기도 한다. 우파니샤드 생각을 하게 한다. 힌두의 스승 곁에 앉다란 뜻이다.

 

아들은 흥미진진한데요란 말을 한다.(117 페이지) 추임새이다. 아빠는 훈족이 우리 조상인 한민족과도 연계가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있음을 언급한다.(129 페이지) 아빠는 합스부르크의 이름이 합스부르크 성 또는 매의 성이란 말에서 유래했음을 이야기한다.(145 페이지)

 

저자는 니케아 공의회를 거쳐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언급한다. 중요한 언급 가운데 하나는 정교회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가톨릭은 철저히 신봉한다는 이야기이다.(177 페이지) 본문 중 이런 글이 있다. “아들에게 바티칸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15세기 상황을 이야기해줘야만 했다.”(162 페이지)

 

이뿐 아니라 책은 전편에서 긴밀히 얽힌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며 쉽게 설명하는 미덕을 보인다. 아빠는 아들이 어느 나라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변함없이 좋아하는 나라는 터키라고 말한다.(248 페이지)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의 개인적 성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터키 여행을 꿈꾼다. 그런 저자는 터키의 이곳 저곳을 이야기한다.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러스, 가파도키아 등..

 

이는 책이 여행 안내이기도 하고 인류학 또는 유럽사 안내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본문에는 이스탄불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도시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257 페이지) 이는 그리스 자연철학 이야기할 때 나오는 이오니아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이오니아는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지점이다.(23 페이지) 연결성을 중시하는 처음과 끝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셍겐 조약과 축구 이야기까지 최신 성과까지 담겨 있는 책이 시간으로의 여행 유럽을 걷다이다. 셍겐 조약은 유럽 연합 비가입국인 노르웨이, 스위스 등이 가입했다. 이 조약은 공통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해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국가간 통행을 제한 없이 하는 내용을 담았다.(288 페이지) 올 컬러에 충실한 내용까지 역작인 시간으로의 여행 유럽을 걷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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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쓰는 법 -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낀 것의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박숙경 옮김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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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11일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된 서평 강의에 다녀왔다. 저자(가와사키 쇼헤이) 가 아닌 번역자(박숙경)가 맡은 강의였다. ‘리뷰 쓰는 법의 리뷰를 하게 된 것은 그때 책을 구입했기 때문이고 책을 읽으면 가능한 한 리뷰를 쓰는 원칙 때문이다.

 

몇 번의 서평 또는 리뷰 강의를 들었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리뷰를 1500편 가까이 썼는데 그런 점은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 번역자가 말했듯 서평이든 비평이든 리뷰든 쓰는 일은 귀찮은 일“(역자 후기 참고: 222 페이지)이다.

 

리뷰와 서평, 비평 등의 차이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차이를 말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지는 않다. 강의 후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아 내가 두 가지 질문(또는 요청)을 했다.(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했어도 질문했을 것이다.)

 

1) 리뷰 작성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일본 문학 전공자로서 저자가 디테일이 강한 일본 저술가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말해 달라는 것(우치다 다츠루, 다치바나 다카시, 우에노 치즈코, 가라타니 고진 등 글 잘 쓰는 일본 저술가들 사이에서 저자는 성향으로 치면 어떤 스펙트럼에 위치하는가?)이다.

 

1)에 대해 박숙경 님은 애정을 꼽았고 2)에 대해 평범한 저자와 1급 저자들 사이에 위치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평범한 답 같지만 책을 다 읽으면 저자도 나름으로 꽤 디테일이 강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저술가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가치를 전달해 읽는 자로 하여금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을 리뷰(작성)의 목적으로 꼽는다. 단 리뷰 역시 공적인 글이기에 비판하든 동의하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덧붙여야 한다. 근거 제시가 자기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책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리뷰를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한번 읽고 그냥 흘려버리면 남는 것이 없기에 지식을 정리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것이 내가 리뷰를 써온 동기라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리뷰의 목적은 1) 책 자체를 알리는 것(읽히지 않고 사장되는 것을 막는 효과), 2) 지식 정리, 3) 가치관 변화 유도 등이다. 정리에 대해 말하자면 그냥 메모식으로 할 수도 있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을 다듬어 완성된 형태로 쓰면 기억도 잘 되고 언제든 전후 맥락이 갖추어진 완성된 형태의 문장을 검색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리뷰를 많이 썼지만 잘 고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정리는 잘 하지만 자기 생각을 잘 덧붙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않는다기보다 못한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는 수위 조절에 실패하는 것이라 해도 좋다. 비판은 너무 공격적이고 동의는 너무 일방적인 것이다.

 

책의 내용을 리뷰하는 것이니 당연히 저자가 말하는 것인데 나는 저자는 ~ 말한다식의 글을 자주 쓴다. 고쳐야 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리뷰는 내게 양가감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리뷰 수에 연연해 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리뷰도 의미 있지만 여러 책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나는 요즘 한다. 번역자도 이야기했지만 좋은 리뷰를 쓰려면 그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조명하고 다른 자료들과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저자는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글로 누군가를 움직이겠다는 미래를 그려보라는 의미이다.(30 페이지)

 

나의 또 다른 단점은 글이 길다는 점이다. 이는 정리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핵심을 잘 가리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주역 이야기이지만 정이천(程伊川)이란 분이 한 말을 생각해 볼 만하다 생각한다.

 

한 효() 사이에는 항상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성인은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만을 취하여 효사(爻辭)를 삼았다.“(심의용 지음 주역과 운명‘ 21 페이지) 출처가 생각나지 않지만 죽간(竹簡)에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압축적이고 핵심적인 형태가 되었다는 글이 있다.

 

죽간을 확보하는 차원이나 글을 쓰는 과정이 어렵기에 핵심을 전하려는 태도가 생긴 것이다. 리뷰도 그런 마음 가짐으로 써야 한다. 쉬운 글이 선호되는 시대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글을 읽는 사람에게 알기 쉬운 쪽은 신선함도 없고 감명도 없고 생각을 일깨우지도 못합니다.

 

알기 어려운 상황이야말로 글을 쓰기 위한 좋은 재료입니다.“(51 페이지) 저자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가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아는 즐거움이 종종 글 쓰는 기쁨을 이겨낸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차이는 그래서 저자는 아는 행위에 강한 희열을 느껴 자꾸 조사를 계속한다는 점이고 나는 자꾸 조사를 계속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 대개 책을 읽으며 리뷰를 써나가는 유형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글도 길어지고 전체를 조망한 뒤 내용을 간추려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폐단을 극복하기 어렵다. 저자는 고명한 비평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비평을 독자라는 뛰어난 지성과 공뮤하면서 연마하고 새로운 것으로 발전시키는 편이 건설적일뿐더러 비평을 더욱 재미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65, 66 페이지)

 

이 책의 장점은 좋은 글의 예와 나쁜 글의 예를 상세히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인상적인 문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당연하지만 자신만의 특징을 갖는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단어 선정도 신중해야 하고 제목도 핵심을 선택해 골라야 한다. 본문 내용을 잘 요약하되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 가서도 안 되고 낚시가 되어서도 안 된다. 글은 결국 사유 훈련의 결과이다.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글이 잘 안써질 때는 문장론, 서평론 등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가장 좋은 훈련은 명문을 읽는 것이다.(191 페이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명문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나는 그 문장들을 내 나름으로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려 한다. 리뷰는 대부분 인문 교양서들, 소설, 시 등에 국한한다. 인문학 글쓰기 능력은 하루 아침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쓰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반대를 발전의 계기로 삼는 의지도 포함된다. 비평은 대상을 긍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215 페이지)는 말이 인상적이다. 당연히 신중한 쓰기가 필요하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가와사키 쇼헤이의 리뷰 쓰는 법을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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