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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삶의 재발명 마이크로 인문학 9
임지연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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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임지연의 사랑 삶의 재발명격렬한 이십대를 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고대하면서 어서 빨리 늙어가기를 바랐던 저자가 몇 가지 사랑에 대한 질문들을 살려 기획한 책이다. 저자가 가졌던 첫 번째 질문은 폭풍의 언덕에서 보듯 서로를 파괴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간 역설적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다.

 

두 번째 질문은 사랑은 청춘의 전유물인가, 이다. 세 번째 질문은 사랑은 왜 어려운가, 이다. 네 번째 질문은 사랑 이야기는 왜 여전히 매력적인가, 이다. 저자는 몇 가지 당위 차원의 말을 제시한다.

 

사랑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12 페이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행복한 삶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13 페이지), 사랑의 주체들은 사랑의 역설적 구조를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사랑이 작동하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44 페이지), 나의 모순적 정체성과 상대의 타자적 성격을 이해할 때 사랑은 가능하기에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상대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70 페이지) 등이다.

 

저자는 재난과 위험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헤어질지 모른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은 뒤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고 답한다.(17 페이지)

 

저자는 사랑을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또한 사랑이 타인과의 친밀감, 연대, 열정적 관계맺음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이라 말한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차이가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 저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예로 들어 사랑의 의미를 전한다.

 

저자는 히스클리프에 대해 그는 나보다 더 나 자신이라 생각한 캐서린, 캐서린을 향한 사랑을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로 인식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파멸에 이른 것은 융합적 사랑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정의한다.(59 페이지)

 

사랑은 이중적인 것이 공존하는 역설 구조로 작동하기에 어렵다.(44 페이지) 그것은 안정감과 불안정성, 구속과 자유, 희생과 자기 보존, 만남과 이별, 쾌락의 순간성과 지속적 연대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부드러움과 폭력,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의 비대칭성, 사랑의 맹세와 미래의 불확실성, 사랑의 의지와 감정의 변화 등이다.

 

저자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지닌 문제점을 정밀 분석한다.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여성을 비사회적 존재로 보는 것 등이다. 모든 인간은 복잡하고 변화하며 성찰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상대 역시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변화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정체성을 갖는다.

 

남자/ 여자 구분법은 시대마다 달라지며 최근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해체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정적 성차만으로 상대를 규정할 때 사랑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52 페이지)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내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며 나를 자기동일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65 페이지)

 

사랑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65 페이지)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정의(21 페이지)를 소개한 저자는 사랑과 자본주의의 모순적 관계를 탁월하게 분석한 에바 일루즈의 견해를 전한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수행성 체제에서 감정 진정성 체제로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즉 사랑은 에티켓 매뉴얼대로 수행하는 것이었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정 진정성 체제로 변했다. 사랑의 규범 대신 감정의 진정성으로 중심이 이동했으며 성적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섹스는 자본화하고 결혼은 노동시장처럼 경쟁의 장으로 진입했다.(85 페이지) 현대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의 감정과 결혼 시장이라는 이중적 코드가 맞물린 복잡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는 저자는 현대 이후의 사랑은 사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우리 선택에 달렸다고 결론짓는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역사적으로 변화하지만 역사의 포로가 아닌 인간(개인)은 그 역사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갈 수 있다.(88 페이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정의(14 페이지)한 저자는 사랑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성찰하면서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사랑의 개념은 변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현재의 사랑은 어떻게 발견하고 미래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107 페이지) 저자는 낭만적 사랑을 비판적으로 본다. 낭만적 사랑이 원리가 될 때 사랑은 연인들의 삶에서 유리(遊離)되고 관계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109 페이지)

 

돈과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 무결점의 순수한 사랑, 자기를 과감히 던지고 헌신하는 사랑, 언어와 국가를 뛰어넘는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한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랑을 현실에서 다시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111 페이지)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다가 총에 맞는다. 이상적 사랑에 대비되는 현실적 사랑이나 현실에 굴복한 지배적 사랑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이 현실 속에서 발견되고 발명되는 사랑이 필요하다.(115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융합적이다.(116 페이지) 저자는 일심동체를 강하게 비판한다. 기부장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일심동체는 하나가 되는 사랑, 융합적 사랑, 하나의 기준으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랑을 왜곡한다. 융합적 사랑은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으로 변질된다.

 

나와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인가?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왜곡이다.(120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영원을 추구한다.(121 페이지) 변화하지 않는 절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 지향하는 영원성은 감정의 불변성과 같은 말이다.(122 페이지)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은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124 페이지)

 

그러나 만일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즉 변하기 때문에 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문을 걸 듯. 사랑은 변한다. 퇴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상이 달라지고 질적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의미이다.(125 페이지) 저자는 18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와 함께 발흥한 낭만적 사랑(128 페이지)에는 발생적으로 탁월한 가치들이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129 페이지)

 

낭만적 사랑이 열정적 사랑을 밀어내고 코드화된 것은 사랑이 계급, 계층, 나이, 권력을 초월할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이 등장하는 하나의 무대라 정의했다.(138 페이지) 바디우는 레비나스적 타자는 신적 매개를 통해 전체 타자가 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망각하는 경험이기에 융합적 사랑의 변형이다.(138 페이지)

 

저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 젊은 베르테르의 자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죽음, 강명화의 음독 자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 개츠비의 죽음은 사랑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죽음이라 말한다.(140 페이지)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선택된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바디우는 사랑을 구축(構築)의 관점으로 접근한다.(147 페이지) 바디우는 사랑을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으로 정의한다. 진화 생물학은 인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고정된 질서를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148 페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이 사랑의 독창성이며 사랑의 재발명이라는 것이다.(158 페이지) 물론 일부일처제는 그것을 깨트리는 불륜과 혼외정사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며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과제처럼 제시된 것이다.(150 페이지)

 

문제는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과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하는 것이 조화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싶다.

 

작고 얇은 책임에도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공감했다. ’사랑 삶의 재발명‘(a)은 최화 교수의 박홍규의 철학‘(b)을 읽다가 지치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읽은 책이다. ba의 철학적 문제들 가령 타자, 동일성, 외부 등의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었다. 바디우의 레비나스 비판이 흥미로웠다. 섣불리 건드릴 사상가가 아니지만 시원하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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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선비문화의 산실 조선의 사대부 9
우응순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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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의미한다. 누각보다 간소한 형태가 정자이다. 저자는 현재의 시각에서 조선시대 누정의 존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산된 시조, 가사, 한시 등의 누정 문학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누정은 사대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물론 여행중인 평민, 여성들도 이용했을 것이다.

 

()는 어원적으로 중첩하여 지은 집으로 당()과 만드는 방식이 비슷하지만 당에 비해 높이가 높다는 특징을 지녔다. ()은 머무른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멀리 여행하는 사람이 잠시 멈추어 쉬는 곳이다. 정사(亭榭)의 사는 높은 언덕 또는 대() 위에 건립한 집을 말한다.

 

누각이 왕족이나 사대부층의 유흥 및 사회를 위한 격식을 갖춘 공간이었다면 정자는 평민과 여행자들의 휴식과 만남의 장소였다. 누정은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누정의 위치는 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어떤 누정이든 그 주변에 못<: )>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함흥 칠보정(七寶亭)은 못 위에 세운 누정이다.

 

누정은 정자라는 점에서 충남 이남에 분포한 모정(茅亭)과 비슷하지만 모정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소박한 정자이다.(32 페이지) 편액(扁額)은 흔히 현판(懸板)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도 하며 글씨를 세로로 쓰기도 한다.(: 띠 모, : 이마 액)

 

정자는 때로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정철이 담양이 세웠다는 송강정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 이는 송강정 아래 죽록평야를 끼고 흐르는 송강을 죽록천이라고도 부른 데서 생긴 이칭이다. 양양의 하조대(河趙臺)는 이곳을 찾은 하륜과 조준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달성의 삼가헌(三可軒)을 비롯, 괴산의 애한정(愛閑亭)과 피세정(避世亭), 담양의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등은 각각 박성수(朴聖洙), 박지겸(朴智謙), 조신(曺紳), 송순(宋純), 정철(鄭澈) 등의 호를 누정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누정에 얽힌 고사는 주로 중국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에서 가져온 명칭도 있다. 조선조 효종은 북벌계획이 무산되자 그것을 한탄하여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했는데 송시열이 이 이야기에서 괴산 모원루의 이름을 지었다. 서울 종로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44 페이지  

 

누정은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가졌다. 누정은 시단(詩壇)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유흥상경의 흥취가 시적으로 표현되면 그것이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이 형성되었다. 누정에서는 학문을 연마하고 토론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고 계승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한 사대부들은 고향에 누정을 짓곤 했다.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나 마을사람들의 동회 또는 각종 계 모임을 가졌다.

 

누정은 활쏘기 수련장 구실을 하는 등 체력 연마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누정은 한 고을의 문루(門樓)로 방어 기능이 있었다.(문루는 궁문, 성문, 지방 관아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이다.) 누정은 이 밖에 별장, 전쟁 때의 지휘 본부, 재실(齋室), 치농(治農) 및 측후(測候) 시설로도 활용되었다.

 

누정에서 창작된 한시를 누정제영(樓亭題詠)이라 한다. 누정이 시문의 산실이 된 까닭은 누정이 풍광이 좋은 경승지에 건립된 데다가 누정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시문을 즐기던 식자층으로 그들이 교유한 사람들 대부분 학자이며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고명한 학자이며 이름난 시인이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무등산 밑 소쇄원(瀟灑園)의 주인 양산보와 사돈지간으로 깊은 교유의 정을 나누었다. 식영정(息影亭)의 주인이었던 임억령(林億齡)도 식영정을 중심으로 20곳의 경치 좋은 구역을 선택하여 이름을 붙이고 식영정 20영의 누정시를 남겼다.

 

누정에는 어제시(御製詩)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누정문학에는 한시로 된 누정시문 이외에 시조와 가사 등 국문시가가 다수 남아 있다. 누정제영은 고도의 창작 역량이 없으면 짓기 어려웠다.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입자에서는 시는 여기(餘技)이므로 깊이 빠져서 할 일이 아니라 틈틈이 취미로 하는 재주나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 창작에 몰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자기 수양에 저해된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경(書經)을 출처로 하는 완물상지는 완인은 덕을 잃고, 완물(玩物)은 지를 잃는다는 말에서 나왔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덕을 잃고 사물에 빠지면 심지(心志)를 잃는다는 경계의 의미이다. 하지만 16세기 호남의 문인들은 심미적 욕구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지나치게 과도하지 않다면 작시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물론 경물에 심미적으로 몰입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68, 69 페이지)

 

누정은 작가의 현실공간과 이상 공간 사이의 경계 역할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인위로 조성된 공간이지만 의미적 지향은 세속을 벗어난 탈속적 성격이 강한 것이다. 누정은 세속과 탈속, 현실과 이상이 서로 뒤섞이고 길항(拮抗)하는 점이지대의 공간이다.(71 페이지) 누정은 연대(聯隊)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정치현실을 피해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을 찾았다. 거기서 정신적 위안을 찾고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83 페이지) 누정제영을 의례적이고 상투적으로 즉흥 창작하는 관행이 지양되고 높은 수준의 작품성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누정문학에 대한 인식이 여기(餘技)가 아니라 문학적 진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적어도 그러한 분위기 내지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완강한 주자학적 문학관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문인 학자들이 등장했고 그들이 산수미에 심미적으로 몰입하고 자유분방한 호기를 발휘하는 새로운 시풍을 시도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87 페이지)

 

3지역별 주요 누정과 누정문학 관련 자료편에서는 서울, 영남, 호남, 강원 지역의 대표 누정들을 만날 수 있다. 경회루, 압구정, 세검정, 보신각, 팔각정(이상 서울),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이상 영남), 담양 면앙정, 남원 광한루(이상 호남), 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이상 강원) 등이다.

 

저자는 조선의 누각과 정자가 지녔던 다양한 기능이 근대화 과정에서 휴식의 공간으로 산정되어 인식되고 지금은 관광의 일정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150 페이지)

 

누각과 정자에 참 많은 인물, 사연, 의미, 배경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소득이다. 조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한문을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도 그렇다. 시사(詩社)라는 말을 음미하게 된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경회루를 설명하며 주역의 중천건괘를 인용한 부분, 완물상지, 여기(餘技)와 주자학적 질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부분에 대한 설명 글 등이 인상적이었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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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
박병기 지음 / 인간사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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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는 칸트의 세 물음(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을 연상하게 하는 명제이다. 이 명제를 제목으로 한 박병기 교수의 책은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란 부제를 가졌다.

 

저자는 '금강경', '수심결(修心訣)' 등의 책들은 자신과 올바른 관계 맺기의 관점으로, '꾸란', '니코마코스 윤리학', '윤리형이상학 정초' 등의 책들은 다른 사람 및 공동체와 관계 맺기의 관점으로,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노자 '도덕경', '장자' 등의 책들은 일상을 넘어 다른 존재와 관계맺기 등의 관점으로 분류했다.

 

고전 읽기는 삶으로부터의 거리두기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고전과 가까워지려면 내 안의 보편적 지향 즉 삶의 의미 물음을 꺼내드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그 물음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삶과 무관해 보이지만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할 때 반드시 만나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만나고 있는 친근한 것이기도 하다고 결론짓는다.

 

세 챕터로 구성된 책의 각각이 관계맺기(자신과, 다른 사람 및 공동체와, 일상을 넘어 다른 존재와)이거니와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파스칼의 말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홀로 조용히 방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란 말이다. 조용히 방에 머무는 것은 자아 성찰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움, 욕망, 불안 등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 다른 사람 및 공동체, 더 나아가 다른 초월적 존재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관계 맺기의 중요성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轉移)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다.(자세한 설명 생략)

 

자기와의 바른 관계 맺기는 삼가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동체 및 다른 존재들을 헤아리고 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인 독해와 저자 특유의 독해가 반영된 '우리는 어떤 삶을 만날 수 있을까'를 읽음으로써 훌륭한 인류의 고전들과 만나는 방법을 제시받게 된다.

 

행복한 일이지만 그렇게 제시받은 방법을 참고하며 해당 고전들을 또는 다른 고전들을 직접 읽어야 하는 과제 앞에 서게 된다. 저자는 '금강경'을 이야기하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깨달음의 네 단계는 순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기보다 어느 순간에 문득 도달하는 것으로 본다.(34 페이지)

 

'금강경'은 소유와 관련된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는 책이다. 저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갖는 것을 상()을 세우는 것으로 본다. 수다원은 세상의 흐름을 뛰어넘은 사람을 의미하거니와 저자는 수보리에게 보내는 부처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일상의 작은 깨침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상의 흐름을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노력하면서 그 노력을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하는 친절과 미소와 실천으로 연결시켜갈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39 페이지.. ‘금강경은 부처와 수보리라는 제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다.)

 

문득 깨침<돈오(頓悟)>과 지속적인 닦음<점수(漸修)>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한 목우자(牧牛子) 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설명하며 저자는 깨침을 얻는 과정에서는 스승 즉 선지식과의 관계가, 닦음의 과정에서는 도반과의 관계맺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저자에 의하면 마음먹기는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49 페이지) 깨침은 마음먹기에 크게 의존하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인정하지 않는 나에게 저자의 통찰은 반가운 마음을 갖게 한다. 저자는 이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설명하며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이익이나 자리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윤리의 중요성을 제시한다.(60, 61 페이지)

 

나는 저자가 시민 윤리의 핵심을 의로움과 이익 사이의 균형 잡기로 풀이하는 것을 보며 공자가 말한 군자는 그 균형 잡기에 성공한 사람이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의로움과 이익 사이의 균형은 공자의 논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제시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을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으로 정의했다.(93 페이지) 이 챕터에서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윤리는 대체로 부담스럽고 답답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한편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는.(95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우정과 정의임을 강조한다.(‘니코마코스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건넨 가르침을 모은 책이다.) 우정과 정의는 각자에게 맡겨지는 시민윤리를 넘어 필요한 공공의 영역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98 페이지)

 

저자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리 사회에서 윤리에 관한 단 하나의 정의(定義)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통용되는 규범의 차원, 그것과 연계되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 속 열망의 차원은 윤리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일관성 있게 관찰되는 두 차원이라 말한다.(103 페이지)

 

전자는 도덕(道德), 후자는 윤리(倫理)라 불리지만 엄격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본능적 욕구와 희미(稀微)한 선의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106 페이지) 칸트가 말한 준칙(準則)은 주관적인 것, 가언명령(假言命令)이고 법칙은 당위적인 것,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107 페이지)

 

칸트의 정언명법은 실현 가능성을 회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유한한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 물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109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고전은 시대적 한계와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 끊임없이 현재적 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요소 요소에서 우리 현실과 연계시켜 고전을 설명하는 비근한 방법을 제시한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마광수 교수 이야기를 하고 플라톤의 국가를 이야기하며 아비투스와 상징폭력을 이야기한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를 이야기한다. 법꾸라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는 도덕경편에서 노자의 부드러운 음성은 우리 일상 속에서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는 강함과 단단함의 허상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죽비(竹篦)라 말한다.(191, 192 페이지)

 

저자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이야기하며 한강(韓江)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고, 목우자(牧牛子)라 불린 지눌(知訥) 스님의 수심결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어릴 적 경험한 소 치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근취저신(近取諸身) 즉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주역 계사전의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저자의 문제의식은 근취저신과 대대(待對)인 원취저물(遠取諸物) 즉 멀리는 만물에서 진리를 찾는 데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고전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자고 말한다.(205 페이지) 필요한 것은 우리 일상에서 직면하는 철학적 물음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이다. 저자는 고전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으려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문제 상황 즉 화두(話頭)와 만날 수 있는 구절이나 행간을 중심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207 페이지)

 

저자는 고전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노력이 시민이 지녀야 할 기본 자세 중 하나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시민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채효정 저자에 의하면 국민은 정치적 존재가 아니고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223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일상의 도도한 흐름에 온전히 내맡기지 않는 거리 유지의 자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금강경을 이야기하며 세상의 흐름을 뛰어넘은 사람인 수다원을 말한 저자의 의도를 떠올리게 된다. 비판적 성찰의 자세, 지금 여기에 답을 찾고 먼 미래, 근원적인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치열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발심(發心)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고전 읽기에도 적용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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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나를 흔들다 - 매혹과 혼돈의 메시지 64
이지형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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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이지형은 내게 지난 201661일 발행된 Skeptic(월간)음양오행과 사주편에 실린 두 글 가운데 한 글의 필자로 기억된 분이다.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농담, 위험한 농담이란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글에서 필자는 음양론의 현실적 화신(化身)으로 추앙받는 주역(周易)은 무의미한 음양 막대기 6개씩의 조합과 유학자들의 사유가 자의적으로 결합된 무질서한 텍스트이며 적어도 태양 지구 달이라는 천문학적 시스템에 근거를 두고 구축된 음양론보다 훨씬 조악한 이론 체계에 해당한다는 말을 했다.(119 페이지)

 

또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근대의 이론 체계를 인문학과 지식의 새로운 형식으로 격상시키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126 페이지) 지난 해 5매혹과 혼돈의 메시지라는 부제를 가지고 나온 주역, 나를 흔들다에서 저자는 주역을 우리가 주목하지 않던 세상으로 열린, 잊고 지내던 우리들의 내면을 들추어주는 64개의 창, 아주 멀리서 우리에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으로 정의했다.

 

책의 부제인 매혹과 혼돈에 대해 저자는 주역은 느릿느릿 이런저런 점사들을 던지다가 어느 한순간 예상치 못한 매혹의 메시지를 내던지지만 그 순간의 매혹은 닫히고 다시 어눌하고 모호한 말들이 펼쳐진다는 말로 설명했다. 미니 태블릿 PC 크기의 라지’(가로 12.5cm, 세로 20.5cm) 크기를 가진 240여 페이지의 책에 64괘가 차례로 등장한다.(정상 크기는 가로 15cm, 세로 22.5cm이다.)

 

64괘의 시작은 건괘 위에 건괘가 자리한 중천건(重天乾)이고 마지막은 감괘 위에 리괘가 자리한 화수미제(火水未濟)이다.(건은 하늘, 곤은 땅, 감은 물, 리는 불, 손은 바람, 태는 연못, 간은 산, 진은 번개를 상징한다.)

 

왜 중천건인가? 그것은 건괘 위에 건괘가 (거듭: )왔기 때문이다. 왜 화수미제인가? 물을 상징하는 감괘 위에 불을 상징하는 리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첫 챕터의 제목을 살다 보면 최소한 64개의 상황으로, 마지막 챕터의 제목을 걱정하지 않는다로 설정했다.

 

저자는 불리하지 않으면 유리하고, 유리하지 않으면 불리하고의 관점을 갖지 않기를 주문하며 주역이 신비하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쪽이든 삶의 상황이 최소 64개는 된다는 주역 설명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편견도 한몫 한다고 말한다.(15 페이지)

 

곤괘 위에 곤괘가 자리한 중지곤괘를 보자. 가장 아래부터 1)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다, 2) 곧고 모나면서 크다, 배우지 않아도 불리할 것이 없다, 3) 빛을 품어 곧다, 큰일을 할 때 이름은 없어도 끝은 없다, 4) 주머니를 여미듯 하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 5) 황색 치마를 입으면 길하다, 6) 용이 들에서 싸우는데 그 피가 검고 누렇다 등의 설명이 붙는다.

 

저자는 이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점사(占辭)들을 곤이라는 괘 이름 아래 모아놓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 말한다.(17 페이지)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혼란스러운(자의적인, 연결성이 없는) 설명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역에 유일하게 높은 점수를 주는 부분은 그 연결성도 없는 자의적인 것들을 꾸리고 조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로부터 찾는다.(18 페이지)

 

저자는 여덟 개의 요소(8 X 8= 64)로 세상을 보는(파악하겠다는) 사고방식을 아름다운 착각이라 말한다. 저자는 그냥 닥치는대로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지금의 내가 뒨 것이라며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말을 덧붙인다.(25 페이지)

 

저자는 위에 산이, 아래에 물이 자리한 산수몽괘의 설명 중 한 번 점치면 알려준다.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이다. 알려주지 않는다.”는 구절을 설명하며 선택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차선이든 차차선이든 자신의 선책을 밀고 나가면 대부분 무언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주역은 점이나 치는 책을 넘어 계도하려 하고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은 음양과 주역 64괘에 우주의 원리를 통째 연계시키려 했다.(38 페이지)

 

주역 편찬자들의 갖다 붙이기는 상상을 절하는 수준이다.(40 페이지) 저자는 주역 이해의 관건은 질서 속에 감추어진 무질서를 간파하는 것이라 말한다. 질서는 강박이고 환상이라 말한다.(44 페이지) 저자는 사주의 현란한 기법, 주역의 파란만장한 괘와 효의 스펙트럼도 알고 보면 모두 구라이고 마음 약한 사람을 현혹하는 잡문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요체는 지난 일을 보살피고 다가올 일을 살피는 것이 가장 정확한 천기누설이란 점이다.(64 페이지)

 

주역은 난세의 책이다. 주나라 문왕이 감옥 안에서 64괘를 만들었다. 문왕은 주나라를 창건하고 은나라의 폭정을 뒤엎기 전 은의 주왕에 의해 세상과 격리된 채 감옥에 살았었다.(66 페이지) 주역은 염려와 근심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책이다.(67 페이지) 주역은 은, 주 교체기의 혁명적 상황을 담고 있고 점사에 그런 전운(戰雲)이 완연하다.(147 페이지) 주역은 난세의 책이기에 뒤집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건이 아래에, 곤이 위에 있는 지천태를 혁명과 변화의 괘로 보는 것이다.(지천태는 소통의 괘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평안을 지향한다.

 

주역의 괘들이 저마다 여섯 개의 효를 늘어놓으며 펼쳐대는 얘기들은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르는 법이 없다. 산화 비(山火 賁) 괘의 경우 주역의 드라마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계에서 드러난다.(100 페이지; * ; 클 분, 꾸밀 비) 저자는 주역은 본질적으로 음양의 조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역은 근본적으로 점사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102 페이지) 아무리 좋은(나쁜) 괘라도 여섯 번째 효에서 나쁜(좋은) 점사로의 반전을 통해 경계와 의심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정도가 구성의 일관성이다.(103 페이지)

 

점사와 무관하게 막대 모양 자체로 의미를 갖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산지박괘와 지뢰복괘다. 전자는 아랫쪽 다섯 개의 음의 막대 위로 양의 막대 하나가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형국이다. 지뢰복괘는 양의 막대 하나가 자신을 덮은 음의 막대 다섯 개를 전복시킬 태세다.(103 페이지) 곤궤 아래에 진괘가 자리한 지뢰복괘는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이 가능함을 알리는 부활의 괘이다.(107 페이지)

 

지뢰복의 상서로운 양기를 발견하려면 어둠과 좌절과 막막함을 견뎌야 한다.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흥분하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아직 가냘프기에 지극히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108 페이지) 동지(冬至)는 해가 길어지는 날이어서 반전 즉 지뢰 복의 상징이기도 하다.(109 페이지) 진괘 위에 간괘가 자리한 산뢰이괘는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할 것을 가르치는 괘이다.(117 페이지)

 

저자는 점사에 따라붙는 주역의 해설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관심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저자는 주역 해설자들이 64괘를 상하경으로 나눈 뒤 주역의 세계가 이중적이라 말하며 상경(上經)은 천도(天道), 하경(下經)은 인도(人道)를 다룬다고 설명하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라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64괘의 구분은 무질서한 것이다.

 

64괘의 구성 원칙을 굳이 뽑아낸다면 짝을 이루는 두 개의 음양 배열을 위아래로 뒤집은 형식이라는 것과 도입부에 건()괘와 곤()괘를 배치하고 마지막에 일의 완성<기제(旣濟)>과 미완성<미제(未濟)>를 뜻하는 괘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 정도다.(132 페이지) 저자는 주역을 상하경으로 나누는 것은 쓰레기 같은 발상이라 말한다.(133 페이지)

 

주희(朱熹)는 불교가 유학을 무너뜨리려던 상황을 유학(儒學)이 불교를 접수하는 상황으로 180도 역전시킨 학자이다. 그런 그도 주역 점을 따른 적이 있다. 주역의 메시지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사유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143 페이지) 세상의 변수는 인간의 능력 이상이다.

 

주역의 괘 하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여섯 번째 효는 괘의 전체 의미와 반대일 때가 많다. 괘가 긍정적이면 효가 부정적이고 괘가 부정적이면 효가 긍정적이다.(170 페이지) 주역은 우주만물을 설명해보겠다는 야심의 체계다.(182 페이지)

 

()이란 단어를 택화혁괘에서 만난다. 이 단어는 무언가를 바꾸는 것 이전에 털과 가죽을 뜻했다. ()가 나무나 구슬의 결이었다가 이치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듯. 점은 바람이지만 미래에 대한 의혹과 불신의 이면이기도 하다. 때를 맞이해 호변(虎變)하고 표변(豹變)하는 이에게 불안과 공포는 없다.(198 페이지) 혁괘 다섯 번째 양효에 대인호변(大人虎變)이란 메시지가 있다. 미점유부(未占有孚)라는 말도 있다. 점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주역은 원래의 점사들을 후대 유학자들의 해설이 감싸 안는 구조다. 열 개의 날개 즉 십익(十翼)이란 멋진 이름이 붙은 해설이다. 하지만 이 십익은 멋지지 않고 몹쓸 때가 더 많다. 저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이란 단서를 단 뒤 유학은 고도의 처세이고 그 처세의 테크닉을 군자연(君子然)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주역의 매력은 마구 들떠 있는 누군가에게 찬물을 확 끼얹는 데 있지 않을까, 라 말한다.(212 페이지) 주역과 공자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공자는 평생 결실을 얻지 못하고 떠돌다가 돌아와 주역의 해설을 썼다.(216 페이지) 저자는 다른 것 없다며 다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운명이라 말한다.(233 페이지) 주역 64괘가 그렇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여섯 개가 수시로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건()으로부터 미제(未濟)까지 숱한 상황을 만들어냈다.(245 페이지)

 

저자는 계사전(繫辭傳)은 너무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것 같지만 낙천지명(樂天知命) 고불우(故不憂)라는 말은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걱정하지 않는다, 이 한 마디를 나누고 싶었다는 저자.(246 페이지) ’주역, 나를 흔들다는 인상적인 책이다. 다른 주역 해설서를 읽도록 하자. 논란이 될 요소들이 있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다른 책들을 읽고 비교하며 내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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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8-02-2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지형 님 ‘강호인문학‘이 좋아서 이 분 책 몇권 더 읽었었는데,
다른것들은 ‘강호인문학‘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 들인지는 좀 됐는데, 이런 저런 이유에서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님의 귀하고 좋은 리뷰를 보니 저도 읽고싶어집니다, 불끈~(__)

벤투의스케치북 2018-02-2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시군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강호인문학을 읽지 못했습니다. 한번 찾아 읽고 싶습니다..
 
다비 - 위빠사나 수행기
정해심 지음 / 에디터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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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화장(火葬)을 의미하는 다비를 제목으로 한 책 다비(茶毘)’60세의 수행자가 기독교를 거쳐 알게 된 불교의 수행 중 초기 불교의 위빠사나를 한 기록이다.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는 그에게 믿음이 무엇이며 초월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만 의심을 키워준 종교이다

 

하지만 저자는 성향이 맞지 않아 기독교와 갈라서고 말았다. 저자가 불교를 접한 것은 일엽(1896 1971) 스님을 통해서이다. 본명이 김일엽(金一葉)인 일엽 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었고 불교 승려, 시인 겸 수필가였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던 분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위빠사나를 권한 분은 아내이다. 1990년대 저자는 생계를 위해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세상 모든 것을 귀찮아 했지만 신기하게도 위빠사나에는 관심이 갔다고 말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삶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아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위빠사나를 통증과 오기 속에서 가열차게 따라 갔다.

 

독학으로 하게 된 위빠사나는 저자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는 것인가?”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좌선을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통증이 오고 통증이 사라지는가 싶으면 망상이 오고 망상이 조금 사라지면 졸음이 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위빠사나는 현상(마음, 대상, 느낌 등)을 바로 보는 수행인데 그 바로 봄을 통해 통증을 극복한 저자에게 이번에는 망상이 왔다. 저자는 호흡으로 인해 생기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 현상을 주목함으로써 보는 힘을 키웠다.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신비 체험이 왔다. 물론 환상은 권할 것이 아니다. 그저 주시의 대상일 뿐이다. 환상에 빠지면 수행이 이상한 길로 빠진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를 처음 소개한 거해스님으로부터 위빠사나를 배우게 된다.(마하시는 좌선, 행선을 번갈아 한다.) 저자는 수행이란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잡는 것이라 말한다. 수행은 힘을 주면 안 되고 빼도 안 되고 죽기 살기로 대들어도 안 되고 자유롭게 풀고 있어도 안 되는 것이다.(57 페이지)

 

저자는 행선 중 신비 체험을 한다. 물론 인터뷰를 통해 지도 스님(거해 스님)으로부터 그래 뭐 대단한 거 본 것 같아?”란 말을 들었다. 저자는 수행을 홀로 하기로 마음 먹은 뒤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간격이 점점 짧아져 톡톡 튀는 경험을 했고 호흡을 하지 않고 아는 마음만 남는 상태에 들어선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선정(禪定)과 관찰이다. 저자는 지혜 없는 수행은 환상에 불과하고 지혜가 없으면 번뇌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72 페이지) 저자는 불교 수행의 핵심은 계(), (), () 삼학(三學)의 조화라 말한다.(73 페이지) 저자는 두통을 수행(보는 힘)으로 극복한다. 저자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생멸현상이니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저자는 교단 차원의 여러 트러블을 자등명(自燈明)의 지혜, 자신을 귀의처(歸依處)로 삼겠다는 다짐으로 넘어서기로 한다. 저자는 이런저런 힘든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을 권하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행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87 페이지)

 

저자는 수행 중 현상들의 소멸을 보게 되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에 수반하는 일반적 현상이다.(94 페이지) 위빠사나 수행에서 소멸의 경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의 체험과도 연결된다.(95 페이지) 수행자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98 페이지)

 

생멸 현상에 적응이 되는 것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스승은 수행자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109 페이지)

 

저자는 마하시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한 스님께서 어떤 사람이 비오는 날 지붕 위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놓여 있는 댓돌을 오랜 세월 파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몸과 마음이라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아닌 외부에서 일어난 현상을 보고 깨달았다면 소설책 보고 깨달았다는 말과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님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 수행하여 깨달았다고 답하는 것을 듣고 저자는 미얀마의 모든 스님들이 진지한 수행자는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111 페이지) 저자는 인과응보를 관장하는 자도 없고 업의 실체도 없으며 죄를 지은 고정된 자아도 없고 죄를 받는 고정된 자아도 없지만 수행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은 내가 쌓은 의도적 행위의 결과 외에 다른 답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1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바라본다는 것은 관념을 내려놓고 존재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현상이 실제이다. 수행자는 관념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지 말고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132 페이지) 자동적이며 동시에 편견으로 변형되기 쉬운 관념을 만드는 작업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커다란 괴로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132 페이지)

 

생멸 현상이 아닌 것은 없다. 수행의 시작에서 몸의 느낌(감각)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실제에 머무는 것이 쉬워진다. 생멸현상은 마치 파장의 연속처럼 이루어졌다. 생멸현상에서 영원이나 영속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정불변의 영속적인 실체가 있다면 경험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경험되지 않는다. 심지어 붓다도 이 고정된 실체(아트만)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한 실체를 찾아 끊임없이 허우적 거린다.(132, 133 페이지)

 

먼저 일어난 현상과 다음에 일어난 현상은 같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같은 현상의 반복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들도 계속 변해 간다.(135 페이지) 내 몸과 마음에 영원불변의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그런 속성을 지녔다고 파악할 수 있다.(135 페이지)

 

저자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있어 아픔이나 가려움 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며 나 자신이 통제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내가 놓치는 무수히 많은 조건과 작용들이 함께 하며 혹시 내가 있어 조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멸현상의 일부일 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162 페이지)

 

그 과정들을 예리한 주시를 통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고 수행자는 오직 바라볼 뿐이다. 저자는 열반은 조건으로 연결된 작용의 중지라 말한다.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으로 사고 체계를 동원하여 분별할 수 있는 작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0 페이지) 짧지만 인상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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