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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감정의 정치학 마이크로 인문학 6
김종갑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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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嫌惡)라는 감정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으로 김종갑 교수의 혐오, 감정의 정치학을 읽는다. 물론 해명 이후에 대안 제시 아니 적어도 당위 차원의 당부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혐오는 분노와 달리 말이 통하지 않는 감정이다. 혐오는 상대를 동물화하는 감정이다.

 

혐오의 본질은 타자화에 있다. 저자는 혐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를 그것이 정치적이기 때문이라 말한다.(16 페이지) 혐오는 자기보다 약하고 만만한 상대를 타겟으로 고르기에 정치적이라 말한다.(191 페이지) 저자는 혐오의 에너지도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18 페이지) 혐오감은 생명 유지는 물론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도 기능한다.(26 페이지)

 

중요한 점은 혐오감은 이해관계보다 더욱 강력한 동기 즉 자기 정체성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93 페이지) 혐오는 자신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이런 자기혐오는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자기혐오는 나르시시즘적이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먼저 부정하기 때문이다.(65 페이지) 자기혐오는 한편으로는 죽지 않는 영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비루한 육체라는 이중적 존재인 인간 정체성으로 인해 생긴다.(41 페이지)

 

취향과 감각에도 역사가 있다.(51 페이지) 혐오는 철저하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혐오 식품이란 말을 보자. 이 말은 1984년에 생겼다. 올림픽 유치로 인한 현상인데 이는 당연히 외국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둔 결과이다.

 

혐오의 주체는 혐오의 대상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 혐오는 나르시시즘을 강화한다.(66 페이지) 대상을 혐오하면 할수록 자신은 그 대상과 다르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가령 악을 혐오하면 할수록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82 페이지) 혐오의 논리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논리로 발전한다.(92 페이지)

 

증오와 폭력이 집단적 규모로 확대되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범죄가 혐오 범죄로 분류된다.(70 페이지) 전두환 정권의 삼청 교육대 사건은 권력이 사회악으로서 혐오의 대상을 만들어낸 사건이다. 혐오의 정치는 권력 내부의 폭력을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하는 권력의 기제다.(76 페이지) 혐오 범죄는 소수의 희생(타자화)을 통한 다수의 자기 치유의 메커니즘이다.(78 페이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혐오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1930년대 초 남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앵무새는 미워하고 욕할 이유가 없는데도 누가 욕하면 덩달아 미워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이다.(93 페이지)

 

이를 보며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역치(閾値)가 낮다는 말이다. 자기혐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흠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타자 혐오는 남에게서 찾아낸 흠을 가지고 자신의 결점을 숨기는 것이다.(103 페이지) 물론 엄밀하게 말해 자기혐오는 자기혐오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발전의 도약판으로 삼기 위한 행동이다.

 

저자는 혐오감은 자기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룬다고 말한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한다면 그것은 내가 개성이나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좋아하는 것은 무질서이다.(109 페이지) 인상적인 말이지만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라면 굳이 혐오가 아니라 배제의 감정, 불선택의 감정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혐오는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변수이다. 이는 개인의 성향과 취향이 진공 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114 페이지) 저자는 동성애에 대한 관점 변화를 거론하며 혐오스러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대상을 바라보는 혐오의 감정과 태도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115 페이지)

 

혐오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여성 혐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는 넓게 보면 가부장적인 역사와 문화, 제도가 만들어낸 관행, 언어, 생각, 태도, 감정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117, 118 페이지)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식의 생각, 바람 등은 여성 혐오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저자는 가부장제가 곧 여성 혐오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판도라의 신화와 아담을 타락시킨 이브 이야기는 여성의 잘못으로 인해 죄 없는 남성들이 불행을 덤터기로 짊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근저에 깔고 있다. 이를 보며 군 가산점 폐지로 인해 손해를 감수함으로써 피해의식과 박탈감 등에 시달리는 남성들이 여성 험요를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무엇일까? 서양 철학은 남성을 이성적 존재로, 여성을 감정과 본능의 존재로 그렸다.(121 페이지) 그렇다면 여성을 그런 존재로 만든 기독교의 신(그리스 신화의 경우는 생략)을 문제삼아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손쉽게 여성을 문제삼는다. 이는 병역 가산점 제도로 피해를 여성, 장애인 등에게 부가하는 정책을 펴다가 그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남성들에게 불리를 감수하게 할 뿐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부 대신 여성에 분노와 적대감을 표하는 것을 닮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말한 바를 통해 알 수 있듯 20세기 초반까지 여성들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읽고 쓰는 것을 남자들이 독점했다. 여성은 공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매체를 갖지 못했다.(122 페이지) 최근 강신주는 여성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외에는 없다는 말,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 등을 했다. 몰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여성혐오와 남자들이 이해하는 여성혐오에는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어려운 편차가 존재한다고 말한다.(154 페이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보자. 이 책에서 개진된 치즈코의 논의는 구조주의적이다. 여성혐오는 의식의 표면보다 무의식의 심해에서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156 페이지)

 

치즈코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을 여성 혐오로 보았다. 이는 마사 너스바움의 논의와도 통하는 바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구조주의적 접근은 왜 여성혐오가 한국사회에서 최근 지배적인 정동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162 페이지)

 

세상이 많이 변했다. 특히 가부장 질서가 많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여성이 살기 힘든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소크라테스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남성 우월적인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디오티마라는 여성을 만나 그녀의 지혜에 감탄하고 그녀로부터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얻었다.(187 페이지)

 

저자는 혐오 대신 분노로 혐오의 구조에 저항하며 그것을 전복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반복의 악순환에 온몸으로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19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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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홀릭 - 되새길수록 좋은 서울의 한옥마을 이야기
로버트 파우저 지음 / 살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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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한국과 인연을 맺은 로버트 파우저(1961 - )서촌 홀릭은 되새길수록 좋은 서울의 한옥 마을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는 서촌에는 인(), (), () 사이에서 나오는 여유가 있고 현대인의 일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정취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 보존을 선과 악으로 극명하게 구분짓는 이분법적 사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보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28 페이지) 저자는 성북동 이태준 고가(古家), 북촌 등을 둘러본 뒤 한국에 개발(이라는) 악이 작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했다.(31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서울은 빨리 변하는 도시이다.(45 페이지) 그리고 자기 흔적 찾기가 힘든 도시이다.(46 페이지)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인스턴트 도시이다.(51 페이지) 저자가 서촌(西村)을 발견한 것은 2008년 늦가을이다.(53 페이지)

 

저자가 2008년 가을에 서울에 와 서울 속에서 자신만의 작은 교토를 찾기 위해 첫 번째로 탐험한 곳이 북촌이다.(59 페이지) 교토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의 일원이었던 저자의 아버지로 인해 살게 된 도시이다.(55 페이지) 그곳에서 저자는 문화의 깊이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55 페이지)

 

저자는 한옥 보존 반대, 주민은 재개발 원한다 등의 현수막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60 페이지) 저자는 북촌보다 서촌이 그간 꿈꾸었던 작은 교토에 가까워 보여 서촌에 매력에 빠져들었다.(61 페이지)

 

저자는 혜화동 추억도 밝힌다. 1980년대 말은 대학로 시대였다. 소극장 중심으로 문화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이다. 당시 저자는 재능교육문화센터 자리 뒤에 자리한 마음에 드는 한옥을 찾았다.(72 페이지) 저자는 혜화동에서 한옥 살이를 해본 경험 덕분에 한옥이 한국 고유의 신비로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감정은 매우 반가우면서도 부담이 될 때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76 페이지)

 

한옥은 마당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자연이 집 안으로 끌려들어오는 셈이다.(86 페이지..이 문장은 형용사로서의 자연과 명사로서의 자연이 함께 등장하는 드문 예이다.) 한옥은 자연과 소통하는 집이기에 불편하다. 저자에게 한옥은 집이기보다 각박한 일상에서 비발디의 사계(저자가 초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던 음악)처럼 화조풍월(花鳥風月)을 즐거워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87 페이지)

 

저자는 한국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한국이 근대 사회를 열면서 옛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전반적인 성향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유교 사상을 낡은 것이라 강조하며 한국의 수많은 문화적 재산을 파괴한 일본적 정서에 대한 반대급부 때문이라는 것이다.(107 페이지)

 

한국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을 끝낸 뒤 남한의 군사 독재 정권은 국민적 단합을 위해 유교 사상을 강조했고 북한은 조선시대를 봉건시대로 규정했다. 그 뒤로 두 국가는 조선시대를 다르게 서사하고 있다.(108 페이지)

 

저자는 선불교로부터 오리엔탈리즘적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파트를 투기 대상으로 삼는 우리 모습을 보며 우리 정서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샤머니즘이 아파트를 통해 새롭게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116 페이지) 무당이 특별한 능력으로 한 사람의 고민을 구명할 수 있듯 아파트가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구명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118 페이지)

 

저자는 곧 없어질(재개발 될) 한옥 지구를 사진 찍는 것을 폐허 포르노에 해당한다고 말하며 폭력 행위라 할 그런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120 페이지) 고통의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의식을 높이지도 않고 동정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한 번 보면 계속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120 페이지)

 

저자는 한옥에 워낙 관심이 많아 집 뼈대부터 섬세한 창살까지 한옥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차에 전주 한옥 마을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한다.(152, 153 페이지) 저자에게 전주는 한국의 교토다.(155 페이지)

 

저자는 서촌에 살면서 동네의 모든 역사를 멸시할 재개발을 반대했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난개발도 반대했다. 동네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180 페이지) 저자는 보존(保存)과 보전(保全)의 차이를 논한다. 환경과 자연 경관을 이야기할 때는 보전이란 말을 쓴다. 특정 유물이나 건축물에 대해서는 보존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181 페이지)

 

저자는 역사적 가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옛것은 다 철거하고 어디서나 찾아볼 법한 특색 없는 건물을 그렇게 쉽게 짓는 우리의 심리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심리라 말한다.(186 페이지)

 

저자는 한국의 곳곳을 많이 다녔다.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리라. 저자는 골목의 정취가 좋다고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교토를 보존해야 한다는 자신의 강한 생각이 낭만적 시선 어떻게 보면 오리엔탈리즘적 이해로 인한 생각인 것 같았다고 말한다.(204 페이지) 그리고 오래된 것을 지키는 것은 선이고 없애는 것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교토의 오래된 경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다양해졌다고 말한다.(204, 207 페이지)

 

저자는 집을 산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원형이 잘 보존된 것보다 좋은 위치, 주변 건물들이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환경적 요건이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저자는 한국에 살며 답답한 것 중 하나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분위기라 말한다.(223 페이지)

 

저자는 어락당의 주인이었다. 체부동의 도시형 한옥이다. 저자는 언젠가 다시 한옥을 짓는 과정이 자신에게 필요하면, 그때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어락당을 지었을 때처럼 즐겁게 할 것이라 말한다.(225, 226 페이지)

 

2015년 이후 서촌은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큰 몸살을 앓고 있다.(230 페이지) 서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젠트리피케이션보다 상업화에 가깝다. 저자는 무분별한 개발은 반대하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데에 중심을 두기로 했다고 말한다.(233 페이지)

 

저자가 인용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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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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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女性嫌惡)를 비판하는 글을 써야 하기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었고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3년만에 다시 읽고 있다. ‘혐오와 수치심은 알라딘 신간평가단 과제여서 리뷰를 썼지만 미흡하다는 생각 때문에 1개월여만에 리뷰를 다시 쓰다가 중단한 상태이다.

 

3년만에 다시 읽는 너스바움의 책에서는 월트 휘트먼에 대한 기술(記述)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이는 올해 읽은 두 권의 책(박홍규 지음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장석주 지음 은유의 힘’)에서 휘트먼에 대한 글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박홍규의 책에서 시집 풀잎의 시인인 휘트먼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헤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스타프 그레저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고 장석주의 책에서는 은유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다.

 

구스타프 그레저는 자신의 성()인 그레저(Graser)는 그라스(grass)의 복수를 의미한다며 풀 잎 한 닢을 명함으로 삼았다.(‘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144 페이지) 휘트먼은 한 아이가 풀잎을 따와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織造)된 깃발이라고 말했다.(‘은유의 힘’ 25 페이지)

 

논점이 달라서이지만 이 책들에서 거론된 사실만으로 휘트먼의 온전함을 아는 데는 부족하다. 휘트먼은 몸의 흥분을 노래한다란 시에서 남자의 몸도 여자의 몸도 신성하다네./ 어느 누구의 것이든 몸은 신성하다네. 노동자 집단의 몸이라고/ 비천할까?”란 말을 했다.(‘혐오와 수치심’ 218 페이지)

 

너스바움에 의하면 전 생애에 걸쳐 휘트먼의 응답은 섹슈얼리티의 수용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을 기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같은 책 220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의 미국은 하나의 허구로 실제 사회는 그에 의해 표현된 방식으로 혐오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한다.(같은 책 224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이 그린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이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너스바움이 말한 바는 여성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든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리에게 혐오는 실제적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진화적인 유리함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양한 시기의 다양한 문화에서 또는 최소한 같은 문화 속의 여러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것과 매력적인 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바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섹슈얼리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휘트먼의 요구대로 하려면 결국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과 퇴화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껴안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225, 226 페이지)

 

꽤 설득력 있지만 동의하기가 꺼려진다.(세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불교 수행을 참고한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에노 치즈코는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고 말한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16 페이지)

 

치즈코는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얻게 되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남이 실은 여성을 멸시하는지, 또는 왜 남자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여자를 욕망하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는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289 페이지)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 아닐지?

 

우에노 치즈코의 책은 복잡 다기(多岐)한 폭력과 도착(倒着)적인 현실을 잘 그려낸 책이다.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읽는 데 꽤 불편하다.(우에노 치즈코는 사회학자라는 직업이 업보라 생각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기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마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것, 화가 나는 것, 용서하기 힘든 것을 대상으로 골라 그 수수께끼를 밝혀내고자 골몰하기 때문이다.)

 

우에노 치즈코에 의하면 여성 혐오는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멸시이다.(1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이 성녀로 추앙되든 매춘부로 업신여겨지든 모두 한 동전의 양면이라 말한다.(27 페이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생식용 여성(아내)와 쾌락용 여성(매춘부)의 이분법적 시각이다. 전자는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후자는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53 페이지) 물론 이때 말하는 쾌락이란 오로지 남성의 쾌락만을 의미한다. 저자는 남성에 의해 성녀와 창녀로 나뉘는 여성의 현실을 분할 통치라 말한다. 성녀와 창녀는 여성 억압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며 양쪽 모두 허울 좋은 타자화에 지나지 않는다.(57 페이지)

 

저자는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에 대한 동일화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에 의해 성립하며 그 경계에는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게 된다고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는 다른 남자의 성적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가 된다. 이로 인해 남성됨의 방식에는 다양성이 없다. 음담패설이 정형화되고 나는 ...’식의 일인칭 말하기가 성립하지 않는다.(43, 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멸시를 아이덴티티의 핵심 깊은 곳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 여성 혐오이다.(51 페이지) 중요한 것은 호모 포비아이다. 남성은 자신이 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증명해야 한다.(51 페이지)

 

이브 세지윅에 의하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이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02 페이지)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끝까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이다.(79 페이지)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 한다.(111 페이지) 여성 혐오는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이다.(112 페이지) 페미니스트는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는 사람이다.(297 페이지)

 

여자의 질투는 남자를 빼앗은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지만 남자의 질투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소유권의 침해, 한 명의 여자가 자신에게 소속됨으로써 유지되던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125 페이지)

 

남자는 바보 취급 가능한 여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한 명 확보해 놓는 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시키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177 페이지)

 

어떤 의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혐오하는 감정은 모든 근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보편적 감정이라 할 수 있다.(154 페이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전편이 밀도 높은 데다가 정신분석적 개념에 근거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9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가 그렇다.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라캉 학파의 계승자인 사이토의 모녀관계론은 프로이트 이론에 익숙한 이라면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남성에게 해부당하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169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라고.(302 페이지) 그리고 이브 세지윅에 의거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는 말을 한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 치즈코에 의하면 남성됨을 인정해주는 것은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동성인 남성이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이다.

 

물론 나는 이런 남성 집단의 인정에 별 관심이 없다.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이 부분에서 나는 김영민 교수(철학)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사람은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성을 선사받는다는 플라톤의 향연의 논의를 겨냥해 자신에게는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하려는 욕심이 없다는 말을 했다.(‘보행’ 319, 322 페이지)

 

어떻든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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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 -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9
사이토 다카시 지음, 남지연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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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다작의 저술가 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부제로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배움에의 동경(憧憬)과 꾸준한 열정이다. 이 미덕들은 다른 사람들 가령 후학, 제자 등등의 배우려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동경의 벡터는 언어를 초월하여 몸에서 몸으로 전해진다.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계속적인 배움에 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가르치는 행위에만 골몰하여 교사 자신이 배움을 잊는 것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서로 함께 실력을 갈고닦는 적당한 긴장 관계가 배우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상대에게 배움이 즐겁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전문가인 동시에 배우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학생들에게 갖게 하는 것이 교욱자의 임무이다.

 

교사의 실력이 검증받는 승부처는 발문력(發問力: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물음을 던져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힘)에 있다.(33 페이지) 중요한 것은 물음은 모호해서도 평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질문은 아는지 모르는지 묻는 것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생각하며 접근하려 하는 것이 발문이다.(106 페이지) 저자는 1년의 수업을 했음에도 상대가 늘지 않았다면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학생이 책을 읽도록 능숙하게 유도하여 1년 후 학생이 지식을 갖추고 생각하는 힘을 얻었다면 이는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 된다고 말한다.(42 페이지) 저자는 잘 가르치기 이전에 잘 배우는 것이 기반(基盤)이 되며 가르침에 있어서 기본은 배움을 통해 기쁨을 얻은 경험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43 페이지)

 

저자는 교육자에게 학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일종의 축제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터프함이 있으면 좋다고 말한다. 저자는 니체의 구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인용한다. “보라, 나는 지금 너무 많은 꿀을 모아버린 꿀벌처럼 지혜의 과잉에 싫증이 났다. 나는 나에게 손을 뻗어줄 많은 이들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을 전하고 함께 나누리라.”

 

이 인용 후 저자는 교사는 꿀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48 페이지) 개개의 지식을 연결된 육지로 만드는 설명 방식이 교사에게 요구된다. 교사란 해당 지식을 기억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맥력이다.(49 페이지)

 

공부의 기본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57 페이지) 공부하면 할수록 융통성 없이 고집만 부리게 된다면 그것은 공부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서야 배우는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59 페이지)

 

공부란 정보의 고속 처리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맥(文脈)을 파악하는 힘을 가리킨다. 저자는 학문을 엄청나게 잘하지 못한다고 교단에 설 수 없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배움의 즐거움, 소중함을 전하는 종합력이 중요한 직업이 교사직이다.(71 페이지)

 

공부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숙달(熟達)의 보편적 원칙을 상대에게 전한다는 의식을 항상 가진 사람이 교육력 있는 사람이다.(73 페이지) 아주 빠른 속도로 다른 것을 흡수하면 그것들을 조합해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74 페이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모방력이야말로 창의성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모방은 언뜻 무의식적인 행동 같지만 실제로는 포인트를 인식(의식화)하여 문자로 나타낼 때 비로소 정착한다.(78 페이지) 모방이란 고도의 인식력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지 어쩌다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80 페이지)

 

천재는 처음부터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숙달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8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적 정신이란 조건을 한정하는 능력이다.(88 페이지)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바꾸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 요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실험이 가진 본질적 의미는 조건을 제한하는 절차구성법이다.(89 페이지)

 

부지런히 연구하는 교사는 일반적인 통설은 이렇지만 이런 시각의 설도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다각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94 페이지) 연구란 스스로 테마를 발견하여 논문을 쓰는 것이다.(95 페이지) 지금까지 연구 대상이 된 적 없는 것을 대상으로 삼으면 훌륭한 연구가 된다.(96 페이지)

 

연구자적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은 50, 60세가 되어도 존경받는다.(98, 99 페이지) 저자는 아무리 연구해도 읽어줄 사람이 없는 것은 쓸쓸한 일이라 전제한 뒤 자신도 논문을 써도 아무 반응이 없는 시기가 10년이나 이어져 비관하다가 대학생이라는 들어줄 사람을 얻고 나서 젊어진 듯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한다.(100 페이지)

 

천재란 남이 시키지 않아도 계속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연습하는 사람이다.(102 페이지) 진짜가 갖는 대단함을 알게 하는 것 자체가 교사의 역할이다.(111 페이지) 저자는 교과서를 해체하여 학생에게 전할 만큼의 힘이 없으면 교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시험은 학생의 역량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교육력을 평가하는 방편이 된다.(131 페이지) 잘 하게 만드는 힘은 선생님의 실력이다.(133 페이지) 대화력은 교사의 기본이다.(134 페이지)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지금 정체(停滯)되어 있는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과 만나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닫는다.(158 페이지)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을 불생불멸의 열매를 얻기 위해 신앙이라는 씨앗과 이해라는 쟁기, 부드러움이라는 채찍으로 밭을 가꾸는 농부로 표현했다. 사이토 다카시는 교사를 지하수맥을 발견해 그것을 퍼 올리고 물과 비료를 계속 공급하는 양수 펌프에 비유한다.(170 페이지)

 

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럼 나는 기꺼이 멸망하리라! 그때엔 조종(弔鐘)이 울려도 좋을 것이며, 너는 나에 대한 종노릇에서 해방되리라.

 

시계는 멈추고, 바늘이 떨어질 것이며, 나의 시간은 그것으로 끝나게 되리라!.. 내가 한순간을 고집하게 된다면, 나는 즉시 종이 될 것이며, 그것이 너의 종이건, 누구의 종이건 상관하지 않겠노라.”(이인웅 옮김 문학동네판 괴테 파우스트’ 1108, 109 페이지)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이인웅 옮김 문학동네판 괴테 파우스트’ 2432 페이지)

 

사이토 다카시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위반을 이야기하며 결국 파우스트가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란 말을 한 계기가 된 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행위라 설명한다.(178, 179 페이지)

 

다카시가 말하는 미래를 건설하는 행위란 당연히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이다. 저자는 교사에게 문화유산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그 수업은 의도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저자는 문화의 수준은 제작자의 질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교사는 문화의 수용자와 제작자를 동시에 길러내는 역할을 짊어진 존재이자 다음 시대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197 페이지) 동경하는 마음을 심미안과 함께 길러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201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둘이서 대화할 때 못하는 사람은 셋을 상대할 때도 하지 못하고, 셋을 상대 못하는 사람은 열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며, 열을 상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십 명은 도저히 무리라는 것이다.(215 페이지)

 

교사란 지성, 감정, 의지에 리스폰스(응답)할 수 있는 몸까지 가져야 하는 균형 잡힌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다.(216 페이지) 공부에서는 객관성과 다각성 시점이 매우 중시된다.(223 페이지) 자신의 호불호에 상관 없이 틀린 것은 틀린 것, 그것을 항상 직시할 필요가 있다.(224 페이지)

 

교육에는 스타일이 요구된다.(264 페이지) 스타일과 더불어 언급해야 할 것으로 호흡이 있다. 교사는 활기차고 차분하게 호흡해야 한다. 숨을 길게 내쉬어야 한다. 호흡을 컨트롤함으로써 거리감을 컨트롤할 수 있다.

 

시간 감각도 컨트롤할 수 있다. 말의 간격을 조절할 때도 호흡은 중요하다.(269 페이지) 호흡이 너무 거칠고 불규칙하게 끊기면 계산을 하든 무엇을 하든 의식도 끊어져버린다.(271 페이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인간관계도 좁아진다.(272 페이지) 교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배우는 자세를 만들어주는 것이다.(273 페이지)

 

저자는 학문 그 자체의 재미,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즐거움에 이끌리는 공부를 권한다.(274 페이지) 저자는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을 강조한다.(276 페이지) 저자의 책은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한다. 지정의체(智情意體)를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이 공부이고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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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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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건축에 큰 의미를 부여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부제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이지만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의 행동을 중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중독되었다고 말하려면 타지마할을 지은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건축을 하다가 국고를 탕진해 보다 못한 아들에게 강제 폐위를 당하기까지 했다.(104 페이지)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이란 회재(晦齋) 이언적, 남명(南冥) 조식, 퇴계(退溪) 이황, 고산(孤山) 윤선도, 다산(茶山) 정약용, 사계(沙溪) 김장생, 우암(尤庵) 송시열, 명재(明齋) 윤증 등이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성리학자들이 집을 뜻하는 재(), () 등의 글자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저자는 시인이자 건축가이다. 현역 건축가로서의 경험과 안목이 작품 서술에 충분히 반영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등장 인물들의 사상과 건축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조선 유학을 정주계(程朱系: 정호, 정이 형제 및 주희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 성리학 일변도로 만든 원흉으로 꼽히는 이언적은 용()자 형태의 집을 지었다. 이는 자생풍수(지형풍수)를 변용한 결과이다.(61 페이지)

 

지형 풍수는 자생 풍수이고 가택 풍수는 중국 풍수이다.(27 페이지) 이언적이 자생 풍수를 변용해 지은 집이란 향단(香壇)을 말한다. 이언적은 독락당(獨樂堂)도 지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에 지은 집이고 향단은 복원되어 경상감사를 제수받고 금의환향하여 지은 집이다.(53 페이지)

 

이상한 것은 불우한 시기에 지은 독락당은 너무도 여유롭고 완완(緩緩: 느릿느릿함)한데 화려한 시절의 집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우울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향단은 전체적으로 용()자 형국의 집이다.(60 페이지) ()은 일()과 월()의 합성자이다. 그리고 둘을 나란히 쓰면 일() 풀러스 월() 즉 명당(明堂)의 그 명()자가 된다.(61 페이지)

 

()가 어떻고 기()가 어떻고 논하던 성리학자들이 아무리 정치 생명,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풍수(風水)에 의존한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풍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풍수는 발복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을 얻는 방법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관건은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가꾸고 보살핌으로써 좋은 수세(樹勢)를 얻듯 풍수지리의 의미도 단지 좋은 땅을 선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땅을 자자손손 지켜나가는 데 있다.(49 페이지) 명당은 없다.(22 페이지)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풍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술법(術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49 페이지) 저자는 술법 풍수도 반대하지만 지세를 의생물화하는 형국론(形局論)도 반대한다.(79 페이지) 저자는 얼마나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학문적 바탕을 숨겨왔는지 전공자들이 더 잘 알 것이라 말한다.(93 페이지)

 

사상과 집을 이야기했지만 사상과 권력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구절을 보라. “()의 움직임만을 인정하는 율곡의 입장으로 볼 때 그의 제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현실적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 수양의 문제를 탐구하는 퇴계의 제자들이 산림에 근거하여 공부에 전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선조 이후부터 율곡 문하의 서인은 거의 정국을 주도하는 집권 세력이 된다.”(173 페이지)

 

율곡은 기()의 움직임만을 인정하고 이황은 리()의 움직임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에 의해서 이가 가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리()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공유했다.(175 페이지) 서인(西人)은 이율곡의 기호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고 남인(南人)은 이황의 영남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다.(166 페이지)

 

그러면 남명 조식은 어떤가. 그는 지리산을 노장(老莊)적 세계를 상징하는 산으로 여겼다.(95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 , ,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론은 부처로부터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마지막 혜능에까지 이어진 법통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7 페이지)

 

성리학은 선진(先秦) 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단점을 보완하며 이루어졌고 아무리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하며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불교와 도교가 정리해놓은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25 페이지)

 

윤선도의 호 고산(孤山)은 서울 시절 별서(別墅)를 둔 남양주 수석동이 홍수로 인해 범람하면 사방이 물에 잠기고 퇴매재산만이 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호방함이거나 철없음의 소산이다.(145 페이지) 해옹(海翁)이란 호는 윤선도가 후에(철들었을 때) 보길도 부용동에 살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자위하기 위해 지은 또 다른 호다.(148 페이지)

 

지천명이라 했지만 퇴계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50이 넘어 주자(朱子)를 접했다.(115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자가 본격적으로 연구될 때 이미 중국에서는 비판받고 있을 때라는 사실이다.(115 페이지)

 

다산은 다산초당의 조경 원리를 주역(周易)‘에서 찾았다. 은자(隱者)의 길함을 표상하는 것이다.(201 페이지) 이괘(履卦)에 나오는 유인(幽人)이라야 정()하고 길()하다는 사()이다. 물론 다산초당은 다산이 직접 지은 집이 아니다. 다산의 외가 친척인 윤단이 초옥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후에 다산에게 내준 것이다.(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의 묘가 윤단의 묘다.: 200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사상과 집의 관계, 사상과 정치의 관계는 물론 사상 자체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가령 성리학이 가진 기본적 정치 입장은 왕권신수설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209 페이지)

 

조선은 치열하게 당쟁했지만 (왕을 바꾸기보다) 왕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더 주효하다는 대전제에는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하다(209 페이지)는 말을 보라. 이런 모습은 여야(與野)가 치열하게, 아니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다가도 세비(歲費) 인상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현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영남학파는 퇴계의 학문에서 비롯되어 심경(心經)‘의례(儀禮)‘를 중시했고, 기호학파의 예학은 율곡과 구봉(송익필: 宋翼弼)에 의해 계도되었으며 소학(小學)‘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했다.(209, 212 페이지)

 

()란 신의 계시를 받고 신을 섬기는 제사 의례 즉 무격신앙(巫覡信仰)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이를 사상으로서 승화시킨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는 시시콜콜하게 예를 따진 사람이다.(216 페이지) 팔일무(八佾舞)란 것이 있다. 공자는 제후인 계손씨(季孫氏)가 천자의 춤인 팔일무를 춘 것을 질책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보며 (천자가 아님에도 팔일무를 추었으니)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을 했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33 페이지)

 

사계(沙溪) 김장생은 임이정(臨履亭)을 지었다. 이는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처럼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디 하라는 시경(詩經)‘의 여림종연(如臨淙淵) 여리박빙(如履薄氷)에서 따온 것이다.(230 페이지)

 

저자는 우암(尤庵)을 주자(朱子) 탈레반, 사계(沙溪) 예학의 사도(司徒) 바울이라 부른다.(233 페이지) 송시열이 어린 아이처럼 따랐던 스승은 오직 한 사람 주자(朱子)였다.(242, 243 페이지)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으로부터 배웠다. 송시열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공자와 주희의 말이 다를 경우 주자의 말을 따르겠다고 밝혔다.(249 페이지)

 

윤선도와 더불어 송시열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심한 건축 중독자 중 한 명이었다.(257 페이지) 저자는 이황이 툇간을 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검박(儉薄)한 생활 양식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무너진 것은 왕권에 비해 신하들의 권력이 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본다.(257 페이지)

 

이언적이 회재(晦齋)를 주자(朱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처럼 송시열은 주자의 호 회암에서 암()을 따와 우암(尤庵)이라 한 것은 유명하다.(271 페이지) 송시열(1607 1689)도 오래 살았지만 그의 정적인 윤증(尹拯: 1629 1724)도 오래 살았다. 윤증은 조선 후기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조선의 문인이다. 파격적이게도 윤증은 81세에 집을 지었다.(295 페이지)

 

송시열의 주자근본주의에 대항했던 젊은 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은 양명학(陽明學)이다.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299 페이지) 성리학에서 쓰이는 사문난적이란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쓴 최초의 인물이 맹자이다. 그는 공자의 도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여겨 철저하게 배격했고 공자와 다른 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단호히 붓을 들어 탄핵했다.(300 페이지)

 

윤증의 사랑채의 당호는 리은시사(離隱時舍)이다.(318 페이지) ()나 당()이 아니라 사()를 쓴 것이다. 주역 중천건괘(重天乾卦) 구이(九二: 두번째 양효)는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이다. 리은 즉 숨어 있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현룡이고 땅 위에 있으므로 밭에 있다고 한 것이다.

 

()는 집이라는 의미, ()의 의미가 있는 글자이다. 깊이 생각하고 지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리은시사는 용이 숨어 있다가 세상에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서 나온다는 의미이다.(322 페이지)

 

실사구시의 학풍과 양명학자들을 송시열의 칼날에서 비호한 절대 공로자는 윤증이다. 그는 주자학이나 양명학,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서인이나 남인 할 것 없이 두루 교류하며 주자근본주의 시대에 다각적 추론의 장을 열어놓았던 윤증의 집은 비단 학문이나 정치에서뿐 아니라 민중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흉년이 들면 마을에 공사를 일으켜 그 노임으로 쌀을 지급하고 추수 때는 나락을 길가에 두어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가져가도 모른 체했다. 그런 윤씨 가문의 가풍 때문에 이 집안은 동학혁명 때도 한국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322, 323 페이지) 다 읽고 나니 통쾌한 느낌이 든다. 주자 탈레반 송시열이란 표현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윤증의 학문과 삶이 보여준 모범적인 일치 때문일 것이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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