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리커버)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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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를 관람하기 전에 공부하려고 산 책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가인 마크 스트랜드가 쓴 책으로 미술을 공부한 번역가 박상미님이 우리말로 옮겨 소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개정판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다고 하는데 미술관련 책의 개정판을 우리말로 소개할 정도라면 대단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에서 느끼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호퍼의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다고 해서 기뻤습니다. 초기구매자들을 위한 관람이 먼저 이루어졌지만,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사태를 빚어 일찍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호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 같습니다. 전시에는 호퍼의 대표작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린 습작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호퍼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평가들이 낳은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흔히 호퍼의 그림들은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에서 비롯한 만족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고들 하지만 저자는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키기 때문에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마치 자신의 과거에서 온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1940년대 저자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세상을 호퍼의 그림 속에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립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을 보고, 오후에는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원계홍 전시회를 관람하였습니다. 서울의 뒷골목을 담은 원계홍의 작품들에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적에 살았던 동네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원계홍 화백의 골목길을 붉은 색 혹은 회색 일변도였는데, 당시 시멘트 벽돌 혹은 붉은 벽돌이 주로 사용하던 건축자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퍼의 전시에서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그려낸 소묘들이 같이 걸려있었습니다. 소묘들은 아주 세밀하게 그려졌는데 유화작품들은 붓질이 상당히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꼼꼼하게 계획된 것(59)’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반면 원계홍 화백의 작품들은 붓질이 아주 섬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시립미술관 전시에서는 다양한 책들에서 이미 만나보았던 호퍼의 대표적인 그림들 가운데 빠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이번에 처음 만난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빈방의 빛>에서는 모두 30점의 호퍼의 작품들을 싣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빈방의 빛>에서 다룬 작품들의 설명을 읽다보면 저자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호퍼의 작품들을 보면 자연광을 최대한 잘 살리고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하여 스트랜드는 호퍼의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의 빛은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마치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잉태되어 고른 색자로 우러나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58)’


작가는 절제된 언어로 초현실적인 인상의 시를 써왔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언어로 인상을 그려내는 그의 시는 종종 호퍼의 그림과 비교되어 왔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호퍼의- 빛에 관하여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런 느낌이 완연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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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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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늙어가기는 제가 쥐고 있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노화와 죽음은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요? 즐기려면 일단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제일이지요.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도 늙어감을 배우기 위하여 읽었습니다.


초판 서문을 보면 저자 역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문제를 곰곰이 따지며 생각해보려는 성향 덕에, 또 아마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인간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이 글에서 밝혀보려 한다라고 운을 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증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런 생각입니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일반이라는 보편적 문제에 지성이 등을 돌리는 시대에, 나는 살아본 구체적 경험(’levécu)만을 철두철미하게 고집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근접하게나마 충실하게 그리려는 노력은 성찰이라는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의 깊은 관찰과 공감 능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 요구하는 엄밀함, 심지어 철저하게 완벽한 논리를 기대하는 태도는 이 시도에서 포기될 수밖에 없다.(7)”


목차를 보면 살아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 ‘낯설어 보이는 자기 자신’, ‘타인의 시선’,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죽어가며 살아가기5개의 제목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55살이 될 무렵 초판을 냈던 것 같습니다. 살아온 나날이 덧없이 흘러간 것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지는 첫 번째 글 묶음입니다. 두 번째 글묶음은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문득 자신이 낯설어 보이더라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세 번째 묶음은 늙어가는 내 모습을 남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담았구요. 네 번째 글묶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있구나 하는 인식 혹은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담긴 듯합니다. 그리고 마지막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듦을 감내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겠지요.


각가의 글묶음에는 A라고 하는 화자가 있습니다. 물론 글묶음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첫 번째 글묶음의 화자 A<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입니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마침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하여 출간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편을 읽고 있어서 저자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마르셀 프루스트가 루아르에셰르 주 출신이고 그곳에서는 프뤼(Pruh)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늙어감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40대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우아하게 늙어가는 길을 모색했는데 답을 찾아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는데,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나이 듦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메리는 늙어감에 대한 저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어가는 현실에 체념하게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긍정적 태도, 품위 있고 불평하지 않는 노년의 두 가지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 변화와 발전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저 자기기만의 인기 높은 주장대로, ‘젊음과 더불어 젊게 살자!’고 외쳐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대를 뒤쫓으며 사회의 [노인]파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 숨 가쁜 행보로부터 자신은 빠져나왔다고 하면서 사회의 파괴를 부정한다.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젊었을 때는 토론에 끼어 말을 거들었을 뿐이지만, 늙은 지금은 내 말이 진리다. 이미 오래전에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없게 노후를 준비해두었다. 그러니 오 세상이여, 나를 이대로 내버려다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닌 평화를 이룩해준 사회에 만족했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잡는데 분명 도움이 될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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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자들의 죽음 수업 -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메이트북스 클래식 12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외 지음, 강현규 엮음, 안해린 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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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외면함으로써 애써 죽음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저는 최근에 암을 진단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처음 암이 진단되었을 때는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도 손에 잡히는 무엇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죽음 수업>을 읽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은 철학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내놓았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죽음 수업>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 로마의 황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그리고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 등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삶을 더욱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의 성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위대한 철학자 5인의 저작들 중에서 죽음과 관련된 내용만을 따로 골라냈다고 하였지만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한 원저자와 함께 엮은이와 다섯 명의 옮긴이가 소개되었지만 누가 어느 부분을 맡아 옮겼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죽음 수업이 곧 인생수업이라는 기회의도에 따라 5명의 철학자들이 남긴 글을 엮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주제 이외에도 딱히 죽음과 무관한 나이 듦과 삶에 관한 이야기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적을 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든 엮은이가 골라낸 글에 붙여놓은 제목이 안성맞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장을 열고 처음 표식을 넣은 대목은 담담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였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할 때 나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본다. 내 삶의 평가 기준 또한 내가 담담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는지가 될 것이다라고 몽테뉴는 마무리했습니다.


갑작스레 죽음이 닥쳐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는 대목은 충분히 이해되었는데, ‘늙어서 자연스레 죽은 것은 드물고 이례적인 일이다라는 생각은 당대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요즈음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 대목입니다. “늙어서 죽는 일은 드물다. 독특하고 이례적인 이 죽음은 다른 죽음보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노사는 죽는 방법 중에 최후이자 극단적인 방법이며 요원하기에 고대하지 않는 죽음음이다. 또한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이며 자연의 법칙이 우리에게 금지한 한계다. 그러나 동시에 노쇠에 이르기까지 사는 것은 자연이 허락한 희귀한 특권이다.(42)” 아마도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인용한 듯한데, 의학적인 것에 대한 몽테뉴의 인식은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맞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의사들은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눈살을 찌푸리며 내려다 보았고,”라는 대목에 동의하지 못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지 마라라는 세네카의 말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자기 나이보다 젊은 것처럼 행동하며 기쁨을 얻고 자신을 기만해가며 운명조차 속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나약함에 굴복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은 후, 겁에 질려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기껑 맞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말이다.(149)”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자라고 한 키케로의 죽음에 주목합니다. “가장 현명한 자는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고, 가장 어리석은 자는 마지못해 눈을 감는 것인가? 더 멀리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영혼은 더 나은 곳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혼은 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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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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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상을 수상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1948년 영국 보호령 잔지바르 섬에서 케냐와 예맨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잔지바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오만 제국의 속국을 거쳐 영국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술탄이 다스리는 독립군주국이 되었지만, 한 달 만에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세력은 탕가니카와 합병을 주도해서 탄생하 탄자니아에 편입되었습니다. 새로운 국가체제에서는 아랍계 무슬림이 박해를 받았고, 이에 작가는 잔지바르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시절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작품은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모국어인 스와힐리어, 아랍어, 독일어 등을 섞어 쓰기도 합니다. 작품의 무대는 동아프리카 해안지방입니다. <그후의 삶>은 역시 탄자니아의 해안이 무대이며 시대적 배경은 191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1930년대 말에 끝이 납니다.


4부로 구성된 <그후의 삶>의 독특한 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서술의 대상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함자가 살아내는 삶에 영향을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변인물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칼리파의 젊은 시절을 미리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부는 19세기 말 인도계인 칼리파가 아무르 비아사라의 고용인이 되고, 그의 조카딸 아샤와 결혼하고 주인공 함자의 아내가 되는 이사야의 오빠 일리아스와 친교를 맺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부는 독일제국이 현지인들로 구성한 아스카리 군대인 슈추트루페에 입대하여 보낸 시절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신병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중위의 당번병으로 뽑혔는데, 중위는 그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슈츠투르페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하여 밀고 들어오는 영국군과 전투가 시작됩니다. 초반에는 영국군을 밀어내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영국군이 상륙하여 독일군을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부대 운영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서 탈영병이 생기고 부대는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릅니다. 그 와중에 평소 중위가 관심을 쏟는 함자를 아니꼽게 생각하던 소위 펠트베벨이 휘두르는 칼을 맞은 함자는 엉덩이를 베여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다행히 생명을 구하고 선교지에 맡겨진 함자는 몸을 추스른 뒤에 어릴 적 살던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3부에서는 고향에 돌아온 함자가 아무르 비아사라의 아들 나소르와 조우하여 일자리를 구하고 역시 나소르와 관계를 맺던 칼리파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칼리파가 거두었던 일리아스의 여동생 아피야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4부는 함자와 아피아 칼리파와 아샤의 평온한 삶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아피야의 오빠 일리아스의 행적이 드러나는 단계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등장인물이 서로 엮어 사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 것처럼 마무리 역시 밋밋한 느낌입니다. 나치가 들어선 1933년에 아피야의 오빠 일리아스는 독일인 여자와 결혼하여 베를린에 살고 있었으며 1938년 다른 독일인 여성과 불륜을 저질러 체포되어 베를린 외곽에 있는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자진 입소한 아들 파울과 함께 1942년 사망했습니다. 일리아스가 체포된 것은 1935년 통과된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아리아인 여성을 모독한 죄였습니다.


작품을 통하여 20세기 초반 동아프리카 해안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유럽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직은 작가가 겪은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기 이전이라서인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그려졌습니다. 이야기가 더 진행이 되었다면 등장인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겪었을 신산한 삶과 전후에 들어선 탄자니아 정부의 무슬림 탄압이 어땠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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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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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신진 작가 단시엘 W. 모니즈의 <우유, , >을 고른 것은 강렬한 느낌의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흉곽을 이루는 갈비뼈와 흉골에서 쏟아진 피가 우유에 섞여드는 듯한 그림은 무슨 의미를 담았을까요? <우유, , >11편의 단편을 담은 작가의 등단 작품집이라고 합니다.


표제작 우유, , 을 맨 처음에 두었습니다. “분홍이야말로 여자 색이다.”라고 도발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8학년이 되면서 친해진 키라와 에바가 혈맹을 맺으면서 시작합니다. 각자의 피를 술에 섞은 뒤에 나누어 마시면서 혈맹을 다졌다는 이야기를 <열국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행동을 요즘의 청소년이 한다는 착상이 놀랍습니다. 나이를 고려한 탓인지 술이 아니라 우유에 피를 섞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혈맹 이후에 두 아이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데 같은 반 첼시의 생일축하연에도 함께 갑니다. 한창 때의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이 상상하는 세계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고기 분쇄기에 갈리게 되면 어떨까?’, ‘옥상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는 것도 끔찍한데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이니까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11편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주인공들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별개의 것임에도 마치 한 사람의 주인공을 다루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작가가 거주하는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 때문인 듯합니다.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분홍이라는 색조는 표제작에 등장하는 하얀 우유와 붉은 피가 섞여 만들어내는 색조인데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짚었습니다.


우유, , 에서는 뜨거운 우정을, ‘천국을 잃다에서는 임박한 죽음을, ‘뼈들의 연감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삶 혹은 생명을, ‘향연에서는 사산된 아이를, ‘스노우뼈들의 연감에서는 시작하는 사랑의 감정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의미 없이 틀에 박힌 듯 사는 삶을 bloodless라고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보이는 생각이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모습들을 우리 사회에서도 본 듯하여 문화적 차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성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긴이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을 이상한 여자들로 규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열한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연령도, 피부색도, 직업도, 성격도, 경험도, 상황도 모두 제각각이고, 심지어 살아남은 여자도, 죽어가는 여자도, 죽은 여자도 있는데, 번역 내내 그들이 모두 동시에 나인 것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343)” 저야 남성이라서 그렇게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보다 진한이라는 작품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을 생전에 좋아하던 산타페에 뿌리러 가는 남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밤마다 딸의 이불을 덮어주고는 딸의 귀에 대고 폴라 상그레(Por la sangre, 피는 진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위키백과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Blut ist dicker als Wasser) 독일어 속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하인리히가 쓴 12세기 중세 독일의 동물 우화집에 등장하는 여우 라인하르트(Reinhart Fuchs)에서는 ‘uch hoer ich sagen, das sippe blůt von wazzere niht verdirbet(혈육의 피는 물로 인해 흐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물보다 진한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것처럼 아랍에서는 물이 아니라 모유와 비교한다고 합니다. 아랍에서는 피는 우유, 특히 모유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형제를 모유형제 혹은 포유형제라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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