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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5월
평점 :
세탁이란 주로 입던 옷가지나, 사용하던 물품을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는 때로 나쁜 일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부정한 돈의 근원을 감추기 위한 돈 세탁, 자금 세탁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사람의 근본을 감추는 신분 세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디(海帶)라는 필명을 쓰는 리자원(李家원) 작가가 쓴 <시간 세탁소>는 어떨까요?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라는 부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억 세탁에 관한 이야기 같습니다. 막다른 골목 안의 조용한 건물에 세탁소가 들어 있다는데,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찾아올 수도 없는 그런 집이라고 합니다. 세탁소이니 옷가지를 세탁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거리가 많지도 않어서 주인은 일이 없으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죠. 요즘에는 책방에서 차는 물론 음반, 잡화 등 다양한 것들을 판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집은 책방ㅡ세탁소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결혼도 안한 주인은 세탁만 하는게 아니라 인생상담도 해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탁물을 가지고 와서 맡기면서 자연스럽게 조언을 듣는다는 것이지요. 시간 세탁소에서 다룬 세탁물로는 첫사랑 손수건, 바쁘다 바빠 셔츠, 상실 속싸개, 작별 배낭, 자신감 가방, 비밀 축구화, 통제 스웨터, 망각 목도리, 과거의 기억 등 9건입니다. 그런데 세탁물을 맡긴 고객은 다섯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다섯 명이 맡긴 세탁물 이외에 나머지 네 건의 세탁물은 알고 보니 세탁소의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탁물인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이 책의 제목과 부제에 잘 어울리는 세탁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마다의 사연을 들어주는 주인장이 고객들에게 전하는 촌철살인하여 금과옥조가 되는 구절이 신박합니다. 작가와 편집자는 그런 구절을 굵은 글씨체로 표기해 주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에는 이런 댕속이 있습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에요. 사람도 헤어짐을 위해 만나는 것처럼요. 사실은 회자정리라는 점을 이야기했더라면, 첫사랑이 완성되지 못하고 헤어질까봐 걱정하는 어린 여학생을 이해시키는데 조금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요?
두 번째 이야기에는 일에 매달려 스스로를 혹사하는 젊은 여성에게 주는 "시간을 즐길 수 없다면 낭비라고 볼 수만은 없어요"라는 조언입니다.
가슴이 절절했던 이야기는 결혼 후에 우연히 가졌던 아이를 잃고 생의 허망함에 애를 태우는 젊은 어머니에게 주는 조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 생명, 그리고 사람은 각자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일단 그들의 임무가 끝나면, 함께 했던 사람과 머물렀던 장소를 떠나는 거죠."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자카란다라는 푸른 꽃이 등장합니다. 남미가 원산지로 뉴질랜드에 갔을 때 처음 보았던 자카란다는 곤명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어로는 란화잉(藍花잉)이라 하며 꽃말이 '절망 속의 기다림'이라고 합니다. 누리망에서는 화사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갖는다 되어 있어 자세히 찾아볼 노릇입니다.
세탁소에 놀러 오는 젊은이가 엮인 이야기에서는 첫 작품을 내고 생각이 꽉 막힌 젊은이에게 주는 조언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였습니다. 영화 니모의 대사라고 합니다. 사실은 돌아가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작별 배낭, 비밀 축구화, 망각 목도리, 과거의 기억 등 4건의 이야기는 세탁소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외국으로 가면서 부모에게 아들을 맡건 채 돌아오지 못했던 엄마와 아들 사이에 뒷이야기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라는 세탁물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들에게 되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어머니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은 지워야 할 나쁜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심리상담가로서 '이야기가 곧 인생'이라고 했던 알프레드 아들러에 경도되어 있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