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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현대 미국인의 삶과 고독, 상실감을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쓸쓸한 분위기와 함께 등장인물 역시 많은 사연을 안고 있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빛 혹은 그림자>는 이런 느낌에서 시작된 책이라고 합니다.
미국 추리작가협회 최우수 작품상을 다섯 차례 수상하고 그랜드 마스터 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받은 로런스 블록은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로런스 블록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18의 작가를 선정하고 각자가 좋아하는 호퍼의 그림을 한 점 고르고, 그림을 소재로 하여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작가들의 성향에 따라 스릴러, 드라마, 범죄, 미스터리, 환상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소설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다만 <케이프코드의 아침>의 경우는 블록의 초대에 응했던 작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최종적으로 작품을 써내지 못하였습니다. 사전에 소장처로부터 사용허가를 받아두었던 터라 <케이프코드의 아침(1950)>은 표제화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두 열여덟 개의 그림 가운데 <호텔방(1931)>, <자동판매기 식당(1927) 등 두 작품은 어느 책에선가 해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 16 개의 작품은 이 책에서 처음 만나보았습니다.
호퍼의 작품들은 삽화로 폄하되곤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호퍼의 관심사는 행체와 색과 빛이었다고 합니다. 즉 작품에 의미나 서술을 담아낸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호퍼는 삽화가도 서사화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사연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림 속에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빛 혹은 그림자>은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이 기획에 참여한 열일곱 명의 작가들의 역량이 탁월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의미를 담아낸 이야기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선로 옆 호텔(1952)>을 소재로 한 제프리 디버의 <11월 10일의 사건>은 그림의 등장인물과 구도를 잘 살려 개연성이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뉴욕의 밤(1932)>을 소재로 한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은 그림의 상황에서 진행되는 끔찍한 범행을 그려냈습니다. 스티븐 킹다운 착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뉴욕 영화(1930>를 소재로 한 조 R. 랜스데일의 <영사기사>는 영화 <시네마천국>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전혀 다른 범죄와 엮여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호텔방(1931)>을 소재로 한 크리스 넬스콧의 <정물화 1931>이나 <자동판매기 식당(1927)을 소재로 한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은 이야기의 흐름을 붙들기가 쉽지 않거나 대단한 반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야기들 가운데 새겨둘만한 대목도 있습니다. <호텔 로비(1943)>을 소재로 한 이야기 <사건의 전말>의 도입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사건에 엮여 관계기관에 출석한 사람이 진술요령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진술을 마치고 나올 때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내 답변은 짧고 간결했다. 나는 상황을 잘 통제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전 누군가 알려준 낡은 수법을 따랐다. 대답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셋을 세라는 것이었다. 이름은? 하나, 둘, 셋, 엘버트 안서니 잭슨. 그 수법이 성급하고 지혜롭지 못한 답변을 차단해준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때문이다.그들을 미치게 만들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93쪽)” 참고할 만한 대목입니다.
<바닷가 방(1951)>를 소재로 한 니컬러스 크리스토퍼의 <바닷가 방>에서는 자신들이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을 가져왔습니다.
앞으로 호퍼의 그림을 만나면 <빛 혹은 그림자>에 실린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