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발굴
웬디 C. 오티즈 지음, 조재경 옮김 / 카라칼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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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화두로 삼아 공부를 이어가고 있는 탓에 읽게 된 책입니다만 읽은 느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열세 살짜리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28살된 젊은 남자 선생의 꼬임에 빠져 이어갔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고백수기라고 합니다. 작가는 이 에세이를 통하여 데뷔했다고 합니다. “한 젊은 여성의 취약한 내면이 가해자 남성의 교활한 욕망에 의해 어떻게 영향 받고 잠식당하는지 생생하게 그려낸 이 책은, 그루밍 성폭력과 피해자다움, 가스라이팅 등의 내밀한 기제를 정교하게 묘사한 사례로도 평가받으며 열성적인 독자층을 확보해왔다.”라는 출판사의 요약에 대해서도 혼란스럽습니다.

우선 작가는 당시 적었던 일기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썼다고 합니다. 즉 기억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밝히는 내용은 모두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술에 의존해야 하는 어머니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성장한 배경도 그렇고, 일찍부터 술과 약물에 노출된 것도 그렇습니다.

저자는 남자 선생님의 꼬임에 빠져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만, 막상 내용을 보면 부적절한 관계를 모호하게 적어 마치 선생님을 보호하려는 느낌, 혹은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느낌, 혹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겨서는 안된다고 했던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선생님과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또래의 남자친구와도 만나는 이중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에필로그를 보면 현재는 여성과 동거하는, 동성애관계에 있으면서 또 유모차를 타는 연령의 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내 딸도 겪게 되길 바라지 않을뿐더러, 그런 일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면서 그 딸만큼은 자신을 방치했던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들이 ‘어떻해야 나를 지켜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랐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 적기도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혹여 제가 나이든, 지극히 한국적 사고를 가진 남자라서 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986년의 미국사회는 열세 살된 소녀가 친구와 동성애적 행위에 빠진다거나 선생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상상하거나 의도하는 그런 분위기였는지도 궁금합니다.

목차를 보면 1986년부터 1991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모두에는 ‘이 책은 저자가 해당 기간에 꼼꼼히 기록해두었던 수기 일기장과 본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기간은 계절이 구분된 정도입니다. 작가의 어릴 적 행태를 보면 겪은 일들을 꼼꼼하게 적을 상황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2002년부터 2004년에 있었던 일들이 삽화처럼 끼워져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확인되지는 않습니다만, 원제목은 ‘Excavation’인 듯 합니다. 땅파기, 발굴, 파인 홈 등의 의미로 읽힙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어 그 시절의 기억을 발굴하기로 했다. 나부터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카피를 새겨보면 작가가 어렸을 적에 적은 일기장을 통하여 기억을 발굴해냈다는 의미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기억은 사실 믿을 수 없는 구석이 적지 않다는 것이 기억을 연구하는 분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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