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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일본의 근대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긴 작품이라고 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로 시작하는 구절이 유명한데, 국경(國境)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국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한나라 안에서 국경이 있을 수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국경의 긴 터널’은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잇는 조에츠선의 시미즈(淸水) 터널이며, 신호소는 츠치타루역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조에츠선 열차가 시미즈 터널을 왕복했을 터이나, 요즘에는 신 시미즈 터널이 생겨서 시미즈 터널은 니가타에서 군마로 가는 열차가, 신 시미즈 터널은 군마에서 니가타로 가는 열차가 이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설국을 가려면 신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는 국경(國境)이 나라간의 경계를 의미하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에 페번치현(廢藩置縣)하면서 도도부현(都道府県)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도와 국의 중간에 해당하는 쿠니(國)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군마현과 니가타현은 옛날에 각각 코즈케쿠니(上野國)와 에치고쿠니(越後國)였다고 합니다. 두 쿠니의 경계가 조예츠(上越) 국경(國境)이었다는군요.
두 번째 의문은 굴을 경계로 하여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경치가 등장하게 된 연유입니다. 소설 <설국>의 배경인 니가타현은 일본에서 가장 눈이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시베리아 기단에서 발생한 추운 북서풍이 동해를 건너오면서 수분을 많이 가지게 되는데, 에치고 산맥을 넘으면서 눈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품은 동해의 수분은 모두 니가타 현에 눈으로 뿌려지고 산을 넘어 군마현에 이르면 쏟아낼 눈이 없어 건조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군마현과 니가타현의 경관이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니가타현에 있는 유자와(湯沢) 온천에 있는 다카한 료칸에 머물면서 <설국>을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서기 1075년에 개업하여 무려 950년의 역사를 가진 다카한 료칸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소설과 영화 <설국>에 관련된 자료를 비롯하여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실제로 묵었던 방이 보존된 자료관이 있는데 내부수리를 거친 금년부터는 숙박객에게만 공개된다고 합니다. 곧 유자와를 찾아가는 여행길에서 볼 수 없다고 해서 아쉽네요.
<설국>의 내용은 고전무용 비평가이자 프랑스문학을 번역하는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島村)가 글을 쓰기 위하여 니가타로 가는 기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앉은 요코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니가타의 온천장에서 부른 게이샤 고마코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천방지축인 고마코와 관계가 깊어지면서 요코와도 연결이 됩니다. 고마코는 동기(童妓) 시절 몸값을 내준 남편이 죽은 뒤에 온천에 들어왔는데, 춤을 가르쳐주는 스승의 아들인 유키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딱히 정한 바는 없지만 유키오와 짝을 이루었으면 하는 선생님의 암묵적인 암시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코(葉子)는 유키오의 새로운 애인으로 유키오를 돌보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했는데, 유키오가 죽은 뒤에 온천에 정착한 것입니다.
온천장에서 게이샤를 불렀을 때 처음 만난 고마코는 시마무라가 부르지 않아도 그의 숙소에 찾아오곤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리는 무엇을 느끼면서 관계가 깊어집니다. 그렇다고 시마무라가 온천장에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니고 글쓰는 작업을 할 때면 찾아와 고마코를 만나곤 합니다. 고마코와의 만남이 헛되고 보람 없음을 알면서도 그저 마음이 가는 탓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고마코의 집에 갔을 때 처음 온천장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요코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유키오에 대한 지순한 사랑에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시작합니다. 유키오를 돌보는 고마코와 요코의 정성도 유키오가 죽음을 맞으면서 헛되고 말았지만 두 사람의 지극정성이 순수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세 사람 사이의 모호한 관계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마무리되지 않고 오히려 고치창고의 영화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추락한 요코를 고마코가 뛰어들어 안아서 내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목은 물론이고, 세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진전되는 가운데 작가가 묘사하는 온천장의 풍경이야말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기를 쓰고 있다는 고마코에게 헛수고라고 하면서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38-39쪽)”라는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