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밀 이삭처럼 - 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 열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황종민 옮김 / 열림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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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라는 부제가 달린 제목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 고흐가 쓴 편지 가운데 골라낸 글들을 짜깁기 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들을 묶고 있는 제목들, ‘1. 열정과 희망의 밀알을 품다, 2. 미술과 자연의 밀 이삭을 틔우다, 3. 사랑과 죽음의 밀밭에 서다를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된 계기에서부터 실행에 옮기는 과정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감정을 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림그리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림을 어떻게 팔아야 할 것인가 등 현실적인 고민도 다루고 있어서 그와 같은 대목이 주제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흐의 편지들을 묶어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https://blog.naver.com/neuro412/221891524633><반 고흐, 영혼의 편지2;  https://blog.naver.com/neuro412/221893112125>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싱싱한 밀 이삭처럼>에 나오는 글들이 익숙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옮긴이가 <고흐의 편지를 우리말로 옮길 기회를 마련해주어 출판사대표에게 감사하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어떠한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옮긴이가 독일어를 전공했다고 해서입니다. 누리망의 자료를 찾아보면, 반 고흐는 1886년까지 거의 모든 편지를 네덜란드어로 썼고, 그 이후부터는 거의 항상 프랑스어로 썼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비율은 대략 2:1이었습니다.


편지 역시 쓴 이의 주관에 따라 쓰여지기 때문에 편지의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도 편견일 수 있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고흐를 치료한 가셰 박사에 관해서도 고흐 역시 초기에는 가셰 박사는 절대 믿어서는 안될 것 같다. 첫눈에 박사는 나보다 더 아파 보인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준비된 친구이자 새 형제 같은 존재라고 호의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가셰 박사는 고흐이 병을 잘못 진단하고 그림을 선물로 달라고 부탁하여 고흐를 착취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이끈 위선자라는 연구결과도 소개합니다.


옮긴이가 뽑은 대목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꼽아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다행이다.(109)”이라는 글에 이어 화판을 놓고 풍경을 바라보면 자연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자연이 내게 이야기한 내용을 내가 속기로 받아썼음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자연을 보고 느낀 바를 붓가는대로 그려냈다는 설명입니다. 고흐가 기존의 화법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창조해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에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흐른 뒤에 새로운 사조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오랫동안 열심히 관찰한 뒤에야 비로서 확신이 생긴다. 위대한 거장이 더없이 감동적으로 그린 걸작은 삶과 현실 자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신념이다. 삶과 현실을 깊이 파고들어 탐색해야만 영원히 사실로 존재하는 확실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112)”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평온하고 규칙적인 삶이 반드시 필요하다.(126)’라는 대목이 있고, ‘화가는 색뿐만 아니라, 희생과 극기와 비애로 그림을 그린다.(137)’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일본 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 화가들에게서 부러운 점은 이들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선명하다는 것이다. 칙칙하거나 서둘러 그린 듯한 작품이 전혀 없다. 이들의 작업은 호흡처럼 단순하다. 조끼의 단추를 끼우듯 손쉽게 몇 번 쓱쓱 붓을 놀려 인물을 그린다.(178)’라고 했는데, 처음 보는 사조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죽는 것은 사는 것만큼 어렵지 않을 것이다.(254)’라는 대목은 그의 말년에 정신적 혼란 속에서 적은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 느꼈는지 공감이 가면서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네 속담을 기억했어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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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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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도쿄에 있는 하야시 후미코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념관에 가는 길에 로쟈 이현우 선생님이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삶과 작품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방랑기(放浪記)>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소개하였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옮긴이는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문학이라는 제목의 작품해설에서 <방랑기>가 하야시 후미코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했습니다.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이주할 무렵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쓴 공책 6권 분량의 <노래일기(歌日記)>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192810월부터 20회에 걸쳐 <뇨인게이주츠(女人藝術)>에 연재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에는 카이조오샤(改造社)에서 속방랑기(続放浪記), 그리고 1949년에는 루조쇼텐(留女書店)에서 방랑기3부를 출간하였다. 5년간에 걸친 <노래일기(歌日記)>를 기계적으로 3등분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래일기(歌日記)>는 발표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고 후미코 자신이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방랑기(放浪記)>의 내용이 어느 정도 <노래일기(歌日記)>와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방랑기>의 모두에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라는 대목이 나오지만 자신의 고향이 큐슈의 사쿠라지마가 고향이라고 밝혔습니다. 2부에서는 나는 사는 게 힘들어지면 고향을 생각한다.(276)”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기타큐슈의 초등학교에서 배웠다는 <그리운 내 고향>이라는 노래의 일부를 수록했는데, “깊어가는 가을밤 낯선 타향에서 / 외로운 마음에 나 홀로 서러워 / 그립다 고향 산천 보고픈 내 부모님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노래는 미국의 존 오드웨이가 작사 작곡한 노래 <Dreaming of Home and Mother>라는 가곡을 인도규케이(犬童球溪)가 개사한 <료슈(旅愁)>라는 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번안곡을 다시 번안하여 여수(旅愁)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설은 타향에 / 외로운 맘 그지없이 나 홀로 외로워 / 그리워라 나 살던 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 정든 옛 고향이라는 익숙한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하야시 후미코는 <방랑기>에서 외지인과 결혼하여 고향에서 떠나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행상을 하며 성장하다가 도쿄에 올라와서도 소설가의 하녀로 시작하여 목욕탕, 출판사, 재고점 등의 점원을 하거나 노점상을 하다가 식당과 찻집의 종업원을 거치는 등 먹고살기에도 급급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책을 사거나 빌려 열심히 읽으면서 시, 동화, 수필 등 다양한 글을 써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받는 몇 푼의 고료를 벌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후미코는 생전에 자신의 소설은 쌀을 됫박으로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는 소설이다.”라고 했다는데, <방랑기>에 나오는 그녀의 삶은 봉지쌀을 사서 하루를 연명하는 그런 삶이었고 생활비가 부족하여 지인에게 돈을 빌리러 간 적도 있고, 그조차도 여의치 않을 때는 몸을 팔 생각까지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방랑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렇게 바닥을 헤매는 삶을 살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악착같은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하나로 모인 탓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가 조선작의 소설을 영화화한 <영자의 전성시대>가 시골에서 올라와 여급으로 일하다가 윤락녀가 된 영자의 삶을 다루면서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응원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방랑기>를 어렵게 읽은 이유는 이야기가 맥락이 분명치 않게 전개되는 점인데, 아마도 <노래일기(歌日記)>에서 발췌하여 연재하는 과정에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한 삶이 어려우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시기, 동거하는 남성이 있으면서도 헤어진 옛 연인을 찾아가는 등 오락가락 하는 모습 등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졌나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갔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옛말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꽁치 굽는 냄새가 계절을 알리는 신호(100)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곽에서는 기생들에게 매일 꽁치만 먹여 몸에 비늘이 떠다닐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흔히 알기로는 꽁치는 비늘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은 잔비늘이 촘촘하게 덮여있지만 어획과정에서 그물코에 걸린 꽁치가 몸부림치면서 많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로포름 냄새가 식초 같다는 대목도 있는데(139), 평생 포르말린 냄새를 맡으며 일을 해온 제 경험에는 식초 냄새보다는 매큼한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입니다. ‘시클라멘 냄새가 불쾌하다는 대목 역시 공기정화식물인 시클라멘의 꽃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고 하니 그 향이 불쾌하다는 작가의 친구 토끼가 예민한 탓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가들과의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질곡에서 벗어나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가 <방랑기>에서 읽었다고 하는 책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많은데, 일본사람들이 독서열이 대단하여 그 옛날부터 다양한 외국서적들이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랑기>의 여러 곳에서 조선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 조선인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간토 대지진 직후에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탓다는 유언비어를 들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하여 교외에서는 조선인들이 큰일이라고 하던데요.(175)”라는 정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에 대한 아무런 차별의식 없는 평온한 시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출간 당시 굉장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문단에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던 <방랑기>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여성주의(Feminism)에 입각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에 결박되는 를 거부한 채 오로지 예술에 의한 자아실현을 추구해나가는 삶은 한 여성 작가의 선 굵은 자기형성의 여정과 겹쳐진다.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방랑의 삶과 파격적인 감성,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창작이라는 장,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내는 절박하고 튼특한 생활력, 여성은 가족안에 들어앉아 있는 존재라 여겨지던 1920년대의 사회를 향해 던지는 통렬한 자기주장이 <방랑기>.(449)”라는 해석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성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 활동 가운데 설명이 되지 않는 점이 더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발표된 <눈보라(吹雪)>, <()>, <목가(牧歌)> 등은 농촌을 무대로 전쟁의 참상을 다루어 반전이라는 개념이 들어간 작품들입니다. ‘천황폐하는 미치셨다면서 무정부주의를 선언했던 후미코였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각정보부의 펜부대(部隊)의 장교로 참여하였고, 분게이주고운도(文藝銃後運動)의 강연회에도 참여하는 등, 군부의 전쟁 수행에 협력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라 할 것입니다. 상황에 따른 변신이 그녀의 철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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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맡기는 보관가게 2
오야마 준코 지음, 이소담 옮김 / 모모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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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긴 설 연휴에 읽을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띈 책입니다. 일본근대문학기행을 하면서 도쿄의 롯폰기, 진보초 등 도심에서 자유 시간을 즐겼는데, 그때 만난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는 몰랐습니다만, 이 책을 쓴 오야마 준코(大山淳子)남다른 시선과 감각적인 서술로 일상을 어루만지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연속극 각본 작가라고 합니다. 전업주부이다가 43세에 시나리오 학교에 입학하였고, 45, 47살에 각각 각본상을 수상하였지만, 무명에게 작업을 맡길 수 없다고 하여 각본의 바탕이 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50살이 되던 해에 <고양이 변호사>가 원작 대상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2013년에 발표된 <마음을 맡기는 보관가게>는 지금까지 5권의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3권까지 옮겨져 있습니다. 저는 1권도 미처 읽지 않은 상태에서 2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서문은 중학생 시절 국어를 가르친 선생님께 보낸 누군가의 편지에서 시작합니다. 편지를 쓴 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첫 수업에서 하루에 100엔으로 어떤 물건이든 맡아준다는 가게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물건을 맡기고 싶은지 적어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 만난 친구들이니 자기소개를 하라는 뜻이었던 모양입니다.


<마음을 맡기는 보관가게2>에는 모두 4꼭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기소(木曾)라는 곳에서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후주쿠에가 주인공입니다. 좌식책상인데 고물상에 오래 보관되다가 작가가 되겠다는 아쿠류가 찾아와 샀습니다. 아쿠류는 후주쿠에게 아니라 분주쿠에라고 부릅니다. 한 때 피카소를 꿈꾸었던 아쿠류가 이번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꿈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엄마가 찾아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분주쿠에는 보관가게에 맡겨지게 된 것입니다. 엄마로부터 받은 돈 2만엔을 모두 주고 맡겼으니 200일을 맡기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가게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보관료는 하루 100, 2. 정해진 기간 안에 물건을 찾으러 와도 보관료는 돌려주지 않는다, 3, 정해진 기간이 되면 보관물품은 주인의 것이 된다. 4. 맡긴 사람의 이름은 꼭 밝힌다. 등입니다. 결국 아쿠류는 분주쿠에를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좌식책상은 가게의 주인의 소유가 되어 점자책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두 번 째로 등장하는 물건은 푸른 연필입니다. 마사미는 할머니가 사시던 가마쿠라 해변의 바다를 닮은 푸른색 2B연필을 새학기에 친구가 된 유리에를 위하여 새로 전학 온 오다의 필통에서 훔쳤습니다. 동생 나오키가 입에 넣고 깨무는 바람에 상처가 생긴 연필을 돌려주지 못하고 보관가게에 3일간 맡기게 되지만, 결국은 오다에서 연필을 훔쳤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다는 이 연필을 유리에로부터 훔쳤다고 했습니다


오다는 다시 전학을 가면서 마사미에게 프랑스판 <어린왕자>를 맡기고 푸른 연필을 유리에에게 돌려줍니다. 20년이 흐른 뒤에 마사미는 가마쿠라의 할머니 집에 살면서 가맹 식당에서 점장으로 일하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푸른빛이었던 태평양이 초록일 때도 있고 물빛일 때도 있고 회색일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필자가 가마쿠라 해변에 갔을 때는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높았던 탓에 바다 빛을 유념해서 보지 못했습니다만, 회색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물건은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서 제무스라는 장인이 만든 오르골입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얹어 만들었습니다. 오르골은 짧은 곡만 연주한다. 반복만 할 수 있다. 속도가 느려진다.’는 세 가지 결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무스의 아내는 짧은 소절을 반복하는 것과 서서히 느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멈추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 몸에 새겨지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아서 휴대하기에 간편하다는 점도 좋은 점에 더해집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제무스가 만든 오르골은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서 오스트리아의 골동품 가게에 맡겨졌다가 일본에서 여행 온 신혼부부의 손에 넘겨져 일본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이 들어 죽음에 이른 부부는 오르골을 50년 동안 보관가게에 맡기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도오루 기리시마가 보관가게의 주인이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보관가게에 맡겨지는 물건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도오루가 다니던 학교에 전학 온 이시가마와 함께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 해변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보면 가마쿠라는 일본작가들에게는 중요한 소재가 되는 모양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거나 약시인 두 사람이 전철을 타고 해변에 이르는 과정은 가능할까?’ 라고 생각하는 독자의 편견을 버리게 만듭니다. 두 사람은 다리가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지나 파도에 다리를 적시기도 했는데, 저는 파도에 발을 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겨울해변에서는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수습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도에 발을 적신 두 사람이 동반자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쫓아온 아주머니에게 지금 바다는 어떤 색인가요?’라고 묻는 이시가마에게 아주머니는 아름다운 색이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바다가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고, 파도소리가 가슴을 기분 좋게 울린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한동안 바다의 색을 상상하며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도오루는 가마쿠라 해변에서 이노우에 야스시의 <북쪽 바다>를 연상하지만 이 책은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인용한 <시로밤바><이노우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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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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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설연휴에 읽을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띈 책입니다. 어쩌면 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나쓰메 소세키 산방을 방문했을 때 고양이가 산방을 지키는 모습에 기억에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진보초에서는 고서를 파는 서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나쓰카와 소스케(夏川 草介)라는 필명을 쓰고 있는 작가입니다. 나쓰는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카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 소는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풀베개(草枕), 스케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에서 각각 따왔다는데 본명은 밝히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신의 카르테>로 이미 만나본 적이 있는 나쓰카와 소스케는 신슈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현직 의사입니다. 수련의 시절에 신의 카르테으로 등단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3종의 연작(2,3,0)으로 합계 320만 부 판매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옮긴이가 책 말미에 붙인 책을 좋아하는 모든 이에게 묻는 책 이야기 우리는 왜 책을 읽는 걸까?’”에요약해 놓은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합니다. “나쓰키 린타로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서점을 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더구나 학교에 가지 않고 서점에 틀어박힌 채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 외톨이인 그에게 책은 유일한 친구다.(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린타로에게 일생일대의 변화가 찾아온다.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일면식도 없는 고모와 같이 살게 될 처지에 놓인다. 그러던 어느날, 인간의 말을 하는 고양이가 나타나 책을 구하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린타로는 얼룩고양이의 안내에 따라 서점 안쪽에 숨겨져 있는 4개의 미궁을 차례로 방문하여 책에게 닥친 위기를 구해내게 됩니다. 첫 번째 미궁은 빠르게 책을 읽고 읽은 책은 커다란 유리장에 가두어놓는 사람의 세계입니다. 두 번째 미궁은 바쁜 현대인을 위해 속독법을 개발하고 책의 내용을 최대로 요약하는데, 나머지 부분은 가위로 잘라버리는 독서연구소 소장의 세계입니다. 세 번째 미궁은 책을 소모품으로 여기며 책을 팔아서 이익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출판사 사장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미궁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다양한 이유로 큰 상처를 입은 책 자신입니다.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미궁에 갇혀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 엄중한 상황입니다만, 린타로는 평소에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책에 관한 심오한 철학을 떠올리고 자신이 책을 읽어 터득한 생각을 바탕으로 미궁의 주인공들을 설득해나갑니다. 첫 번째 미궁에서는 시대를 초월한 오래된 책에는 큰 힘이 담겨 있단다. 힘이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 넌 마음 든든한 친구를 많이 얻게 될거야(26)”라고 하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해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 미궁에는 린타로네 학급의 반장인 사요가 함께 미궁으로 향합니다. 두 번째 미궁에서는 책을 읽는 것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면서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때로는 한 줄 한 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124)”라는 말씀을 기억해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미궁에서는 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하신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해내곤 당신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당신 뜻대로 되지 않아도 책을 소모품이라고 말해서는 안돼요.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책을 좋아해요!’하고요라고 말해서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 미궁에서 책 자신은 앞선 세 차례의 과정에서 린타로가 책을 구해낸 결과 세 사람이 힘든 사왕에 처했는데 그들이 지금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네가 한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냈지만 책 자신에게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했던 듯 서점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사요는 어떻게 될 것인지 답답해진 린타로는 열심히 생각한 끝에 어쩌면 책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게 아닐까요?”라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책 자신의 마음을 얼마쯤은 채워줄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상황이 행복하게 마무리되었고, 린타로는 할아버지의 서점을 지킬 수 있었고, 학교에도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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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 교육 강좌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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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첫날 찾은 일본근대문학관에서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구경하고서 <금각사>와 함께 읽게 된 책입니다. 제목으로 보아 미시마 유키오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작가가 이런 성격의 책을 쓰려면 적어도 기획 의도를 밝히는 글쯤은 앞에 붙어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지만 없었습니다. 다만 문학평론가 오쿠노 다케오가 말미에 붙인 해설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성품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 “(미시마)는 대단히 웅대하고 진지한 장편에만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곳엔 놀이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부도덕 교육 강좌>에서는 미시마의 소설에 나타나지 않은 기지와 역설, 웃음이 충분히 발현되었다. 연재 무대가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둥적인 주간지였던 만큼, 미시마 유키오는 격식을 버리고 마음껏 장난을 친다.(414쪽)”라고 적었습니다.


‘모르는 남자와도 술집에 갈 수 있다’라는 글로 시작해서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까지 모두 67꼭지의 글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34세이던 1958년에 연재되었고, 이듬해 중앙공론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왔으니 지금으로부터 67년전에 쓰인 글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현대(당시)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예술에 대한 동경이 녹아들어 있다.(415쪽)”라고 다케오는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50년 전의 글인데도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다.(416쪽)’라고 하였습니다. 저처럼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전에 <금각사>를 읽었다는 옮긴이는 “혹시 예언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5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1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온통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다.(419쪽)”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요즈음의 세태와 많이 닮은 점도 있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점은 먼 훗날 현실화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에는 제가 지난 해 읽은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사회심리학과의 로랑 베그 교수가 쓴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와 맥을 같이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https://blog.naver.com/neuro412/223688253461>의 경우는 이미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부도덕 교육 강좌>는 지금까지 도덕적이라고 생각해온 명제를 뒤집어 생각해보라는 권고라는 생각입니다.


몇 가지 의표를 찌르는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기로 합니다. 먼저 ‘청년이여, 나약해져라’에서는 체육이 강조되고 영양이 좋아지면서 10대 남녀의 체격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하는 점은 “정치가는 청년의 사상을 활용하는 시늉만 보이지 실제로 이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청년의 육체뿐이라는 사실이다. (…) 그러므로 정치가의 의표를 찌르려면 청년들이 ‘문약’에 흐르고 ‘유약’에 빠져서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흐늘흐늘한 육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119쪽)”라는 주장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노회한 정치가들이 청년들의 참신한 생각을 정책에 반영하기보다는 구닥다리 정치행태를 지키는 행동대원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속셈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하고, 이들의 속셈에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젊은 세대다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매사에 투덜거려라’라는 글에서는 “인생만사 무슨 일에든 ‘지당하십니다’로 일관하면 손해만 볼 뿐 이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358쪽)”라고 일갈합니다. 어수룩한 삶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나는 몹시 화났어”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즐거움이며 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이다.(362쪽)라고 주장합니다. 생각해보면 불평을 털어놓으려면 스스로도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야 합니다. 책잡힐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주장할 것은 분명하게 주장하도록 해야 스스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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