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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노파심에서 쓰는 말.

원래 글을 쓰면서 각주를 잘 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각주를 조금 달아야 될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니 실수가 많을 것 같지만 너그러히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대상이 되는 책이 아닌 다른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듯 하니 읽기 전에 먼저 이 글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95179 을 참조하라.

 

 

 

  SF의 3대 거장을 손꼽아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최근에 출간된 파운데이션의 저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필두로 로버트 A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아서 클라크는 SF작가의 명성 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그의 예견, 다시 말해서 과학 3법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과학 3법칙은 다음과 같다. (의역을 거쳤다.)

 

1. 평생을 연구하는데 바친 노과학자가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고 말한 경우, 그의 말은 거의 분명히 옳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면, 그 말은 높은 확률로 그른 말이다.

 

2. 가능성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 불가능의 영역으로 조금 더 뛰어드는 것이다.

 

3.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법칙은 아마 3번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이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과거로 이동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과거인들의 눈에는 휴대폰이 마치 신의 물건처럼 보일 것이고 -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거나, 소리가 들려온다거나 - 그 신의 물건을 조종하는 우리는 일종의 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혹은 마법사로 몰려 당장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쪽이든, 그만큼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힘은 중간과정을 생략한다면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마법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서 양자전송장치라도 들고 온다면, 우리 또한 마법의 상자로 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3번 법칙은 과학기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약간만 고친다면 말이다.

 

3.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물론 이 말에 대하여 수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과학과 마법의 근연관계에 비하여, 몽상과 이론의 근연관계가 훨씬 더 멀지 않는가, 라는 반론에서부터 몽상을 어떻게 이론과 비교하느냐,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철학 이론들을 몽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인가, 등으로 말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자면, 먼저 나는 모든 인문학적 이론을 몽상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다. 정말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비 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기는 매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 뿐만이 아니라, 몽상에서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뛰어난 철학자 루소의 경우를 보자. 그의 저서 중 하나는 '고독한 몽상자의 산책' 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그에게는 몽상이 - 본인이 책에서 밝히듯 - 창조의 원천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몽상으로 치부된 이론도 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보기에는 (물론 굳이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헤겔의 이론은 무슨 말도 안되는 망상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이 몽상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감히 말하건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적절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신분석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아니다. 적절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세운 네 가지 기본 명제(주1)를 검토해보자. 첫 번째 명제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이다. 무의식에 대한 정의는 프로이트 본인도 확실히 정립하지를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의 경계는 설정해두었다. 바로 무의식은 쾌락 원칙을 따르며, 의식될 수 없는 가장 심층에 숨어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프로이트는 꿈을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임상적 근거에 의하면 꿈은 압축과 전치, 상징화를 통하여 무의식을 표출시키며, 결국 정신적으로 안정화를 찾는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의식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단순히 나한테는 무의식이라는 게 있어, 너도 스스로 알잖아? 라는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자신에 대한 심오하고 '결코 되풀이 된 적은 없는' 통찰(주2)을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개인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절차를 밟아서 재현되어져야만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 당장 이번의 CERN의 광속을 넘는 속도로 측정되었다던 중성미자, 연구를 보라 : 결국 재현되지 않아서 부정되었다 - 그런 재현성을 부정한다면 그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있겠는가. 특히 임상경험으로 정립되었다는 말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두 번째 명제를 보자. 두 번째 명제는 정신현상에는 우연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취하는 어떤 정신적 과정에서는 반드시 무의식적인 동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사례를 우리는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가장 즐겨 사용하였던 사례인데, 당시에 정족수가 충족되었으므로 폐회를 선언한다, 라고 오스트리아 하원 의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프로이트는 이렇게 해석한다. 의장은 당시 안건을 보고, 어차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텐데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 라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말실수를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심지어 단순한 말실수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동기가 존재한다, 라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기본 명제 중 하나다.

 

이 경우를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반론할 수 있다. 위의 사례를 살펴보면, 의장의 동기를 프로이트는 '추측하고 있다.' 정말 의장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만약에 의장이 '아니, 나는 그런 생각이 조금도 없다' 라고 부정한다면 저 명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의장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이 말실수를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경우에서도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본인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 혹은 '깨닫고 있어도 사회적 체면때문에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프로이트의 해석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미셸 옹프레가 우상의 추락, 에서 말한대로,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세 번째 명제는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다, 라는 것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현재 가지고 있는 병증은 어려서 겪은 경험때문에 생긴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례 중 하나를 들면 카타리나의 사례,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카타리나는 종종 가슴이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프로이트는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한다. 카타리나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몸 위로 올라갔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몰랐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는 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외상적 경험이 인식되지도, 표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는 육체이다.'(주3) 그 어릴 적 상처가 현재의 답답함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명제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환자의 병이 정말 심인성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심인성이 아니라면 저런 진단은 위험할 수 있다. 답답하다Dyspnea는 여러가지 기질적 원인으로 생길 수 있다. 단순한 소화불량에서부터 협심증에 이르기까지 답답하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수많은 병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카타리나가 협심증이라도 앓고 있었다면, 저런 치료로 병이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치료되었으니 저 사례가 옳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정말로 치료되었는지, 그 후에 카타리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디에서도 알 수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프로이트 사례 중 유명한 이르마의 꿈, 이라는 사례가 있다. 그 사례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에마 에크슈타인은 과다출혈로 처음 프로이트를 찾았는데, 프로이트는 이 과다출혈이 정신적 요인때문에 생겼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과다출혈은 자궁근종때문에 발생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주4) 또한 이후에 정신적 요인을 바로잡기 위하여 받은 수술 이후에 썩은 냄새를 맡게 되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마저도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술 이후에 거즈가 그대로 수술부위에 남아서 썩었기 때문에 냄새가 난 것이었다.

 

네 번째 명제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모든 노력을 한다, 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먹을 것이 넘치고, 온갖 오감을 충족시키는 그런 곳인데 비하여 다른 한 쪽은 도리어 수많은 방해요인들이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그런데 이 문장은 단순히 이런 식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정신에 걸리는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그 행동원리가 정해진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앞서의 의미보다 좀 더 심화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리학에서는 Fight or Flight라고 한다.(주5) 어떤 장애물을 만난 경우 우리 몸에서는 교감신경이 작동할 것인지를 빠르게 결정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 싸울 것인지, 자리를 뜰 것인지를 결정하여야만 한다. 이 모든게 사실상 정신에 걸리는 부담이다. 부담이라는 말을 정신의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에는 저장된 에너지들이 소모되는 방향으로 우리 몸이 작동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부담이 없는 쪽이라면 우리 정신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이 명제는 가장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예화를 하나 가져와보자. 칸트가 만든 것인데,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남자인데, 그 여성과 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 기회를 소모하고 나면 당신은 바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과연 당신은 그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인가? 칸트는 절대 그럴리 없다고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버리고 쾌락을 선택한다니. 삶과 죽음 중 어떤 것이 쾌락인가? 어떤 것이 고통인가? 삶이 쾌락이고 죽음이 고통이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쾌락과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쾌락 중 어떤 쾌락이 더 클 것인가? 삶이라는 쾌락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누가 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겠는가?

 

여기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라캉의 이야기를 가져와보자. 라캉은 이야기한다. 여성과 보내는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성적인 쾌락이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쾌락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네 번째 명제가 부정될 수도 있고, 유지될 수가 있다. 삶이라는 것이 훨씬 성적인 쾌락에 비하여 더 중요하다면 네 번째 명제는 부정될 수 있다.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적인 에너지, 좁은 리비도 개념만 본다면 이 명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통찰 중 가장 핵심적이자 뛰어난 통찰이라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무의식, 개념의 발견이다. 물론 프로이트만 이런 무의식 개념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기본 전제들 전부가 모두 그 이전세대에서부터 예견되어진 것이다. 니체와 같은 사람은 그것Es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무의식의 준비를 예견하였다. 니체 뿐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자신 안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지칭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무언가 제어가 되지 않는 힘' 이라는 길고 긴 명칭을 읊어야만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준 결과 우리는 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분명 프로이트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의 명제들을 모두 충족하는 무의식은 일종의 완전기억에 가깝다. 무의식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정말 짧은 시간 경험한 것이라도 모조리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어있고, 우리는 다만 그것을 꺼낼 방법을 모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의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볼때는 우리의 기억은 조작되기도 쉽고 잊기도 쉽고, 잘못된 사실을 재구성하기도 쉽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물질의 형태, 현대 의학에서는 기억을 측두엽과 해마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주6), 로 보존되는 한, 기질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반드시 기억에도 혼란이 온다. 작화증confabulation, 이라는 병이 왜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환자가 자유연상으로 떠올린 기억들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걸까?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절대적인 방법이 없는 한, 그 기억들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왜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것들은 모두 성, 폭력 등에 연관된 것일까? 사랑, 과 같은 감정이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일은 없을까? 누가 나에게 너무 사랑을 보였었는데, 예를 들어 할머니가 나에게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었는데, 그 경험이 나에게 신경증을 가져와주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까?

 

큰 틀에서 볼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론은 위와 같이 프로이트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 라는 점과 창시자인 프로이트 본인에 대한 비판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론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평전,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 인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을 구해준 세 책을 언급하면서, 그 중 하나를 이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3가지 에세이' 로 들었다. 그 책이 자신을 미망에서부터 빠져나오게 만들어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호의적인 이야기도 잠시, 이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그 실체를 명확히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판을 시작한다. 이런 태도는 얼핏보면 미셸 옹프레가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니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입장을 선회하여 잘못을 논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상의 추락, 이라는 제목에서 미루어볼때, 분명 미셸 옹프레의 심정 중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었으리라. 어느 누구든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면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잘못으로 뒤덮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두 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첫 번째로는 부정이다. 아니야,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 라고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비판 혹은 비난이다. 자신이 그때동안 옹호해온 것을 모조리 부정해버리고 우상화하던 존재에게 강하게 비난과 비판을 퍼붓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의 이 우상의 추락, 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입장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문체가 거칠고 자료를 지나치게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셸 옹프레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닌 프로이트 개인의 철학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서문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스피노자, 니체, 플라톤, 데카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의 이론등과 같이 개인적인 시각에서 전체를 바라보려고 하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미셸 옹프레의 목적이 결코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없애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지나친 확대 및 프로이트의 우상화, 그리고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논박하는데 집중된다.

 

먼저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저자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분석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셸 옹프레의 관점에서 볼때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실제로 프로이트가 그들을 치료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안나 O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에 의하면(주7) 치료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발표되었으며 도라는 치료를 받은 후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심지어 치료가 실패한 도라마저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해석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상화된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환자들을 끼워맞추는 사람이었고, 그가 일시적으로라도 사람들을 낫게 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최근의 논문에 따르면(주8) 1998년에서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요법Pschotherapy을 단독으로 시행하는 경우는 15.9%에서 10.5%로 줄어들었고, 약물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44.1%에서 57.4%로 늘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정신요법이 정신분석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단기 역동정신치료 등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감안할 경우,(주9) 정신분석 자체는 거의 줄어들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피터 게이는 자신의 프로이트 평전에서 왜 프로이트의 학문만이 그의 개인적 일들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묻는다.(주10) 그가 역설한대로, 어느 누구도 뉴턴이나 다윈, 베토벤 등이 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작업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뉴턴은 사실 연금술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뉴턴의 물품을 구입한 뒤 검토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미적분과 물리학이 마술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왜 프로이트의 학문은 프로이트 개인적 일화를 바탕으로 비난과 비판을 받는가? 학문이라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은가? 피터 게이의 그런 말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뉴턴이나 다윈처럼 과학도 아니고, 베토벤처럼 예술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들을 생리학에서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주11)처럼 평생 자신의 학문이 과학에서 출발하였고 과학으로 인정받기를 바랬었으며, 자신의 저서에서는 마치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남긴 말처럼 언젠가 새로운 화학물질 등이 발견되면 자신의 이론이 완전히 변혁을 거칠 거라는 이야기도 남겼다. 하지만 2013년인 오늘이 될때까지도 아직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고 보기에는 단단한 반석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논문을 검색해보면 예술 비평분야에나 쓰이고 있고, 임상적 치료를 알리는 논문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종교의 기원, 부분에서 토템과 터부, 로 알려진 소논문인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폐기된 학설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가져온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사실 상충되는 면이 있다. 용불용설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옹호하는 이론인데, 실제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즉, 수만년 전에 치른 선사시대의 의식이 그대로 유전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있을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같은 성을 미워하고 다른 성을 따르는 - 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컴플렉스를 실제로 실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그 선사시대에서 토템을 설명할때에는 아들들이 같은 성인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아들들이 죽이려는 마음을 품더라도 실제로 '죽여서는 안된다.' 이는 프로이트 스스로의 말과도 어긋나는 부분이며, 비단 미셸 옹프레 뿐만이 아니라 그의 평전을 쓴 피터 게이도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요소를 가진 과학적 연구방법을 따르는 학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것들은 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을 언급하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에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주12)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적어도 논리학이라는 틀에서는 매우 강력한 도구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쌓아올려져야만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학문에서는 자기 언급은 치명적이다. 논리적인 부분을 모두 빼고 생각해보더라도 이 문제는 표현을 달리하여 그대로 남는다. 자기 언급을 하는 학문이라면 자기 자신의 일화를 그 전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화가 엉망이라면, (인간의 신경증을 다루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이 그 근거를 인간의 신경증에 두고 있다면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 일화들을 전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피터 게이의 질문과 상충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프로이트의 개인적 일화가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을 예술이나 철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예술에 대한 비평에서 정신분석학이 활동할 수는 없을까? 이는 제법 적절한 것 같다. 김서영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모세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평을 언급하면서 비록 브레머의 비판 - 프로이트가 조각이 나타내려고 하는 성경에서의 서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등 - 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분석이 의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머 본인부터가 프로이트의 방법을 차용하였다는 것이다.(주13) 그의 비판을 통하여 도리어 정답이 해체되고, 다시 한계를 넘어갈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볼때, 예술 작품의 비평에 있어서 그 예술 작품에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깊은 무엇인가를 끄집어 낼 때 - 김서영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틀을 전복시키는 해체적 비평' - 정신분석학이라는 도구가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미셸 옹프레 본인도 자신의 저서에서는 브레머의 프로이트 모세상 해석에 대한 비판, 만 소개할 뿐 깊이 다루고 있지 않다. 결국 굳이 정신분석학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예술 비평이나, 더 넓게 보아서 철학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조금 뒤틀면 결국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이론처럼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해석하는가, 에 대한 의의만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애초에 미셸 옹프레에 따르면 이런 관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가 볼때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계보를 잇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근거가 있어보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그저 개인이 세계를 해석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독창적이라는 말도 사실 옳지는 않다. 미셸 옹프레는 이 부분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무의식은 마치 앞서 말했듯 완전 기억을 가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 기억이라면 본인이 읽은 수많은 책들은 모두 무의식 속에 다 저장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주14)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그 수많은 책들이 무의식에서 저장되어있다가 프로이트가 이론을 세울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독창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앞서 무의식에 대한 명제를 설명할 때, 니체 등이 이미 무의식이라는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그런 비슷한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미셸 옹프레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셸 옹프레의 말이 다 맞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저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면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재수없는 것 같지?"

 

왜 이런 말을 내뱉게 만들까? 추측이지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는 미셸 옹프레가 이 책 전반적으로 현상학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무의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애초에 접근 방식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셸 옹프레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실체, 를 확인하려할때는 가장 적절한 연구방법이 현상학적인 연구방법일수도 있다. 의식의 작용을 긍정하고, 의식의 지향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현상학적인 판단중지를 취한다. 이런 현상학적인 방법은 무의식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현상학, 이보다 더 실체를 꿰뚫어보기 좋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평전으로 쓰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 책은 평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에는 소홀해졌으며, 평도 비판에 집중한 나머지 성과에는 눈을 돌렸다. 결국 이런 형식은 현상학적인 방법을 빌려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복수 -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에 대한 - 를 정당화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두 번째는 좀 더 직접적인 이유인데, 미셸 옹프레의 태도는 이런 태도와 비슷하다. 거칠게 예를 들자면 A가 맞춤식 양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B가 그 사람이 입은 옷이 그 사람 본인에게 딱 맞는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맞춤식 양복을 입었으니 당연히 양복이 A의 몸에 딱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비판을 하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A를 프로이트라고 두고 B를 미셸 옹프레라고 두자. 미셸 옹프레는 서문에서부터 책의 끝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학이며, 개인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니체의 말을 변용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어둔다. 진정한 정신분석학자 - 프로이트주의자 - 는 한 명이었고, 지금은 없다고 말이다. (니체의 원문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한 명 - 예수 - 이었고, 지금은 없다, 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개인의 철학이라면, 그 개인에게는 들어맞는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철학을 가지고 개인에게 들어맞으면 들어맞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 비판의 자세일까? 아무리 몽상에 가깝더라도 창시자 본인에게는 타당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창시자 본인이 미셀 옹프레가 말한대로 유일하고 진정한 존재라면 말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부족하고 재수없다, 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앞서 과학 제 3법칙으로 돌아가자. 조금 수정한 3법칙은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이다. 지금까지 살펴보건데, 미셸 옹프레의 비판이 설령 '재수없더라도' 근거가 존재하기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이면 안될까? 우리는 몽상을 망상과 비슷한 부류로 취급하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대문호였던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사색은 정신의 노동이요, 몽상은 정신의 쾌락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몽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하지만 정말 몽상은 무가치한 것일까? 여기서 바슐라르의 이론을 가져올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몽상의 철학자, 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있다. 원래 그는 과학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과학사에서 살펴본 것은 과학의 진화가 아니라 과학의 오류였었다. 왜 사람들은 오류를 저지르고 거짓된 이론에 현혹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상, 몽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과학을 위하여 그런 몽상과 상상을 제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바슐라르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도리어 이런 몽상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라고.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몽상은 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상상력의 원천이자 주관성의 객관성에 대한 승리선언이다.(주15)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활동의 근원에 존재한다. 무의식도 의식도 아닌 몽상의 의식, 이라는 개념을 가져옴으로서 무의식과 의식의 긴장은 해소되고 무의식의 작용이었던 꿈과 몽상의 의식에 바탕을 둔 몽상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이런 몽상이 우리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굳이 존재할까? 도리어 이런 몽상을 통하여 더 깊은 차원의 해석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무의식의 작용인 꿈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이론 전체를 하나의 몽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과 같을 것이다. 꿈과 몽상이 계속 맞물릴테니 말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해석이 정답이 없는 - 주관성의 세계에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 전복적 비평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령 고도로 조직된 몽상이더라도, 결코 뛰어난 이론에 뒤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본인이 원했던 것 처럼 과학으로 알려지기에는 아직도 요원해보이고, 어쩌면 영영 과학이 될 수 없을지라도, 과학이 아니라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철학으로서는 분명 의의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애초에 저 수정된 3법칙을 보라. 고도로 조직된 몽상과 뛰어난 이론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몽상으로 치부하여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가 몽상과 등가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구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프로이트 본인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정말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 비판들에 비하여 미셸 옹프레의 이 책은 본인의 우상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훨씬 개인적이고, 대부분의 비판들을 집대성한다는 점에서 훨씬 종합적이다. 그러나 그 모든 비판은 다른 학문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학 또한 다른 철학들처럼 어떤 새로운 인식과 창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중심에 두었을때 그 존재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정신분석학이 창조성을 발휘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1. 기백석 외, 신경정신의학, 2nd ed., 중앙문화사, 2009, pp. 70-71. 

2. 피터 게이, 프로이트 I, 교양인, 2012, p. 206.

3. 김서영, 프로이트의 환자들, 프로네시스, 2012, p. 335.

4. http://www.answers.com/topic/eckstein-emma , 2013년 11월 17일 검색. 읽어보면 myoma적출술과 동시에 자궁적출술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피터 게이의 평전과 미셸 옹프레의 말이 약간 다르다. 미셸 옹프레는 월경과다증과 위장장애를 보였다고 기술하지만, 피터 게이의 평전은 월경과다, 혹은 하혈이 심하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김서영의 프로이트의 환자들 에서는 더욱 간략하게, 그녀가 코피가 심했다, 라는 내용만 적혀져 있다.) 만약에 전자라면 자궁근종이 애초에 그녀의 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원인일수가 있다. 설령 다른 원인이라고 할지라도 코피 등에 대한 기질적 원인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5. Bruce M. Koeppen et al., 조양혁 외 역, Berne&Levi 생리학, 6th ed., 이퍼블릭, 2009, p. 214.

6. Bruce M. Keoppen et al., 위의 책, p. 210.

7. http://en.wikipedia.org/wiki/Anna_O. , http://www.answers.com/topic/anna-o , http://en.wikipedia.org/wiki/Henri_Ellenberger , 2013년 11월 17일 검색. 미셸 옹프레의 주장이 실제로 옳은 말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검색해본 결과, 적어도 미셸 옹프레가 말한대로 앙리 엘랑베르제가 새롭게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안나 O가 회복되지 못한 것도 사실으로 여겨진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위의 안나 O링크에서 이야기하듯 정신과적인 문제보다는 encephalitis 또는 temporal lobe epilepsy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8. Brandon A. Gaudiano, Ivan W. Miller, The evidence-based practice of psychotherapy: Facing the challenges that lie ahead, Clinical Psychology Review, 2013, p. 814.

9. 기백석 외, 앞의 책, pp. 597-613.

10. 피터 게이, 앞의 책, p. 23.

11. Bettina Bock von Wulfingen, Freud’s “Core of our Being” Between Cytology and Psychoanalysis, Ber.Wissenschaftsgesch., 2013, pp. 226-244.

12. 스스로 면도하는 사람은 면도해주지 않고 스스로 면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는 누구에게 면도를 받아야 하는가?

13. 김서영, 정신분석학 연구방법론 일반의 학문적 의의, 해석학 연구 제23집, p.71.

14. 피터 게이, 앞의 책, p. 110.

15.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pp. 48-5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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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1-18 02:20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군요 이름만 알고 책은 읽어본 적이 없으니(다른 책에 아주 조금 나온 것밖에는)... 프로이트는 자신이 하는 것이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았군요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면'과 같은 말은 예술 비평에 더 많이 쓰인 듯합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해도 그게 뜻이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몽상은 사람한테 필요한 거죠

비판을 했다 해도 아주 싫어서 한 것은 아닌 것 같은 마음도 듭니다 비판하는 마음을 조금만 뒤집으면 다른 마음도 있을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군요^^

바람이 아주 세게 불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11-22 00:42   좋아요 0 | URL
여기도 바람이 아주 셉니다. 어허허.. 사실 이 책을 보면 저자는 정말 프로이트가 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네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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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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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을 받았을때 한국형 범죄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 브라이언 이니스의 프로파일링, 과 같은 책 있지 않은가. 게다가 표창원씨의 전작 중 하나는 한국의 연쇄살인, 이다. 그래서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도 그런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어주었으면, 하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물거품처럼 터져버렸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이 책이 쓰여진 동기를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죄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제안하고 있다' 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범죄를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혹은 사회와 범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에 대한 표창원 박사 나름의 답변이 될 것이다. 표창원 박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파일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어쩌면 사회 자체에 대한 일종의 프로파일링이 아닐까.

 

프로파일링은 범죄사건의 정황이나 단서들을 분석하여 범죄자의 행동패턴이라던가, 경향을 특정짓고는, 그걸 바탕으로 범죄자를 그려내는 것이다. 셜록 홈즈가 늘 하는 일이 바로 프로파일링이다. 정말 미세한 부분만 가지고도 범죄자는 어떠한 사람일테고,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라고 파악하지 않는가. 물론 대상은 범죄자로 국한된다. 그러니 사회 자체를 프로파일링한다, 라는 말은 애초에 대상이 틀렸을 수도 있다. 사회를 범죄자의 위치에 끌어내리기는 힘든 일이니 말이다. 다시 질문하겠다. 사회를 범죄자처럼 취급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막상 저렇게 사회를 범죄자로 취급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보니 의구심이 드는게 사실이다. 정말 사회를 범죄자로 취급할 수 없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사례일테지만, 굳이 우리나라의 사례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들까지 생각해보면, 어느 여자가 거리에서 찔려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데도, 근처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였다는 일화라던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범인인데도 절차를 밟다가 놓쳐버리는 경우라던가, 은폐가능한 조그만 조직에서 일어난 불화로 인한 살인사건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보면, 어쩌면 사회 자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프로파일링의 기초는 라포rapport형성이라고 한다. 이제 사회를 범죄자의 위치에 끌어내려서 표창원 박사가 이끄는 대로 프로파일링을 해보자. 라포는 친밀감, 유대감이다. 범죄자에게 윽박지른다고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자신의 내용을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하면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사회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잠시 제쳐두고 표창원 박사를 살펴보자. 표창원 박사는 원래 경찰대 교수다. 우리나라에서 경찰대라고 한다면 명문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명문대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박차고 나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국정원 여론 조작 의혹, 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정치적 발언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되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전까지는 표창원 박사를 떠올리면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언급만 생각하였으리라.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의 이름을 사건에서나 보았던 것 같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미루어볼때 경찰대에 남아있었다면 그에게는 프로파일러, 그리고 연쇄살인범추적, 이라는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녔겠지. 그러나 그가 과감히 경찰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오면서 사회에 대한 라포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니, 어느 사람은 과연 정의의 사나이 - 이 책에 쓰이는 표현대로라면 - 라고 볼 것이고, 어느 사람은 범죄학이나 연구할 것이지, 처럼 비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반응이든, 긍정적 반응이든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라포를 위해서라면 긍정적 반응이 훨씬 좋겠지만, 도리어 그런 긍정적 반응이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에 부정적 반응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자극이 가해져야만 반응이 온다. 이는 라포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만약에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기다렸다면 사회 자체와 라포의 형성은 영영 불가능하였으리라. 그런 점으로 미루어보았을때, 표창원 박사는 사회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첫 단추 자체를 잘 끼운 것 같다.

 

프로파일링의 절차는 보통 여섯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라포도 형성했겠다, 본격적으로 단계를 밟아보면, 가장 첫 단계는 현장의 증거 수집 단계이다. 시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시체는 어떠한 흉기로 찔렸는가? 그런데 우리가, 그리고 표창원 박사가 이 책에서 프로파일링 하고자 하는 사회, 는 단순히 저런 질문으로는 답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로 인하여 발생한 범죄자들부터 먼저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사회를 범죄자로 둔다면, 그 사회로 인하여 발생한 범죄자들은 사회- 범죄자 - 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형 범죄라는 이름을 들며 존속살해범들을 사회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로 두고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탈주범으로 유명한 신창원도 그런 부류에 들어간다. 500만원을 훔쳤던 지강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어떻게보면 가장 경미한 악을 저지르고 무거운 형벌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를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사회라는 범죄자는 경미한 악은 처벌을 무겁게하고, 정말로 큰 악들은 그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둔다는 이야기이다. 사회가 사용하는 흉기는? 이 책에 따르면 너무나 다양하다. 관료제 하에서의 보신주의라던가, 자본주의의 폐단이라던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너무 깊은 의존이라던가.

 

그 다음 단계는 증거의 조직 및 배열 단계이다. 1단계에서 우리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런 증거는 그 단독으로는 활동하기 어렵고, 그 증거가 발생한 시간적, 공간적 상태 자체와 가능한 요인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라는 범죄자는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 그것은 사회를 분석함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자. 우리 사회는 좌와 우가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다. 그리고 경찰이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어있지도 않다. 당사자주의, 기소 이후에 적용이 되는, 채택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정해져있고 발견된 증거물들을 따로 보관해놓는 그런 곳도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제강점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국민들끼리 합의를 통하여 발전을 할 수 있었을텐데 해방이후의 정국에서는 그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였다. 이런 사례가 바로 사회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던 것 이리라.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그것도 일본 것을 베낀 거예요. 식민 형법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범죄 발생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교육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지적은 실패학, 실패를 한 뒤 그 사례서 배우는 일이 없다. 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불이익과 위험을 피하려 하는 그런 세력들이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신뢰자체가 생기지 않는다고 표창원 박사는 강하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전반적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여기서 김연아의 예를 가져온다. 김연아 자신은 매우 뛰어난 피겨 스케이터이지만, 우리나라의 수준이 매우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냐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라고. 그리고 실질적 예방을 어떻게 하여야 할 지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져있지 않다. 그리고 어떤 범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여 이 책에서 나오는 것 처럼 '연구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연구 용역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 자체를 범죄자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실패학만 동기가 아니다. 전반적 교육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과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예를 들어 공소시효의 경우 몇 년으로 하자, 라는 식으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정하여야 할텐데, 그런 것들이 없다보니 시민들에게는 계속 불안정감만을 주고, 그런 불안정감들은 결국엔 사회적 범죄로 향한다, 라는 말이다. 연쇄살인만 범죄는 아니다. 귀찮게 이런 걸 왜하냐, 라는 조그만 마음가짐들이 사회 전체 시점에서는 범죄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만 하리라. 

 

범죄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대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로 보수적 입장은 범인이 실질적으로 나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반대로 진보적 입장은 사회가 범인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입장보다는 두 입장을 절충할 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범죄자의 입장에 있다면? 그렇다면 국제 사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회들끼리의 입장, 가 범죄자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나라 사회 자체가 나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 쉽게 도출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미국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 탓도 아니다. 현대 일본 사회가 - 강점기가 아닌 - 우리 나라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외국인 범죄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수를 따지면 사회 내에서 일어난 문제들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표창원 박사는 그가 말하는대로 보수주의자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유형을 분류하고 범죄자의 사회 인구학적 배경 정보와 범죄 전후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과연 사회에 대한 프로파일링에서는 어떤 식의 유형을 분석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은폐범죄다. 사회의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개인이 모든 것들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모르게 되었다. 학술적인 지식의 공유는 더 발달하였을지도 모르지만, 역정보에도 그만큼 취약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정보에만 취약해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전의 사회는 각 구성원들에게 직접 발로 뛰어 자료를 찾게 만드는 그런 동기를 부여해주었지만, 지금의 사회는 앉아서 천리를 보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는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한 사회 자체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행정 체계는 갈수록 정치에서보다는 경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효율의 증가를 요구하고, 효율의 증가는 고도의 전문화를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같은 조직에 속하더라도 서로를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 시민이라면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은폐범죄뿐만이 아니다. 체제범죄도 있다. 경직된 사회 체제가 범죄를 만드는 것이다. 앞서 일본의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책에서 주장한다고 하였다. 잠시 해방정국으로 돌아가보자. 급하게 우리는 체계를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것들이 보인다. 급한대로 이것을 쓴 뒤에, 나중에 고쳐나가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정은 일어나지 않았고, 같은 체제에서 자리는 그대로 있을 뿐, 그저 사람만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만 바뀌게 되다보니,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자리를 어떻게해서든 지켜야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집단 전체는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 사람과 자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면 함부로 인사를 발령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사람과 자리가 분리되어있는 이상, 사람의 목숨은 파리목숨에 가깝다. 효율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아래의 사람은 언제든 내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사관계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유연성은 합의를 통하여 발전되어져야 한다. 오늘날처럼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그대로 유지된 유연성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사관계의 유연성은 조직의 유연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아니, 반비례관계에 있다. 갈수록 행정체계는 딱딱해져가는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 연쇄살인범과 같은 범죄를 검거하기는 쉽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런 쉽지 않음, 은 사회의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그 뒤의 결말은 뻔하다. 불안감 조성 자체가 이 사회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이를 범죄 수사에 이용하는 것이다. 범죄의 증거와 유형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날카롭게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 수사 구조의 개혁, 파업 진압에 있어서 경찰과 검찰의 정치적 판단의 문제점 등을 말이다. 이 부분은 저자 표창원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여섯 번째 단계는 프로파일의 타당성 검토인데, 이 책을 프로파일의 결과로 볼 때 아쉬운 점이 눈에 종종 보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지강헌 사건인데, 지강헌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는 이 책에서 그다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잘 알려진 범죄들이야 워낙 신문에 많이 나왔었지만, 김광석, 김성재 변사 사건이 어떤 것인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건들을 언급하는 것은 좋은데,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달아서 어떤 사건들인지는 알려주는게 옳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정도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책에서 예시로 쓰인 사례를 제대로 설명하여야 이 프로파일이 직접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본다. 이 뿐만이 아니다. 표창원 박사는 보수주의자, 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있는데 분명 위에서 언급한 논리대로라면 분명 그는 보수주의자이다. 그러나 사회가 아닌, 사회 내부의 개개인으로 볼때 그가 어떤 보수주의자의 입장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는 위의 프로파일링의 가장 처음 단계, 라포rapport형성에 언젠가는 부메랑처럼 영향을 다시 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몇 번이고 사회계약론을 강조하는데, 사회계약론으로 사회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사회계약론이 아니더라도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많다. 당장 데이비드 흄만 하여도 사회를 경향성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론적 근거 자체도 언젠가는 프로파일링에 영향을 주리라 본다. 그러나 이런 프로파일링을 통하여, 우리가 사회를 어떻게든 바꿔나갈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던 부분 '우리 스스로도 공범이 될 수 있다' 와 같은 것들이 나타날 경우, 성공한 프로파일링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담인데 어제는 빼빼로 데이다. 그래서 빼빼로를 사먹었다..

솔직히 기분나쁘다. 왜 이런 날이 있는거지?

물론 반 농담인데.. 반은 진담이다ㅠㅠㅠㅠㅠㅠㅠ

 

매일이 멘탈붕괴중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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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1-12 22:44   좋아요 0 | URL
쉽고 머리에 잘 들어오는 리뷰입니다. '사회'를 범죄자 또는 범죄혐의자로 놓고, 그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해나간다..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프로파일링을 했으니 이제 그 범죄자를 잡아야하는데, 결국 그 프로파일링이 가리키고 있는 무엇인가가 각각의 우리 자신이라는데 어찌해야할지...(갑자기 아주 쓸데없지만, 자신을 범죄자로 예견하게 되는 프로파일러(미래범죄분석가)의 이야기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게 생각나는군요.)

가연 2013-11-13 08:42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의 댓글을 보니,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확실히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기분인데요. 그러고보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결말은...

쉬운 리뷰라고 말씀하시니 괜스레 기분이 좋은데요. 쉬운 글, 이라는 말만큼 최고의 칭찬은 없는 것 같습니다, 풋. 감사합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11-13 15:20   좋아요 0 | URL
캬~ 가연님은 역쉬 ~~~ 서평 참으로 멋져부립니다 ~ ㅎㅎ
너무 오랜만에 들렸죠 ^^ 간만에 가연님 서평 읽으면서 안구정화도 하고요 ㅎㅎ
저도 이 책 참 잼나게 읽었네요 ㅎㅎ 저도 가연님처럼 책을 프로파일링 하고 싶습니다. (전 수준이 아니되서 ㅋㅋ)
근데요, 빼빼로 사주는 여친을 만드셔야죠, 사먹으면 어떻해요 ㅎ
그러니 기분이 나쁘죠 ㅎㅎ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하게 ~ ^^

가연 2013-11-15 17:3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저도 거의 서재에 잘 안와서 이제 댓글을 보네유ㅠㅠㅠ

...
...
...

맞습니다, 드림모노로그님ㅠㅠㅠ 여친이 생겼으면 좋겠어유.......... 빼빼로데이날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희선 2013-11-15 02:27   좋아요 0 | URL
사회 자체에 대한 프로파일링,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개인이니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기도 하겠군요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의 찌꺼기, 말은 많이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듯합니다 진짜 없애야 하는 것은 없애지 않고 다른 것을 없애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잠깐 드는군요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생각해야겠군요 이렇게 말해도 제가 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하면 공범이 될 수도 있겠군요 우연이라도 공범은 되고 싶지 않아요^^


희선

가연 2013-11-15 17: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날카로운 말씀을 해주셨네요ㅎㅎ

마지막 문장은 참 시적이다, 풋. 그렇게 생각안하시나요ㅎ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괴테가 쓴 책은 많지만, 나는 그다지 그의 저작을 접하지 못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일단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일부분만 읽고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인데, 이 책도 일부만 읽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읽고 싶다, 라는 감정과 읽을 수 있다, 라는 행위 자체에는 상당히 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일지라도 결국은 읽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별다른 그런 감정이 없는데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을 내릴 수 없고,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책이라는 것은 읽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보기에, 나로선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례들 사이에서 읽고 싶은 책이고, 마지막장까지 넘길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 중 나에겐 파우스트, 가 그랬다. 

 

파우스트의 얼개는 일목요연하다. 지상의 모든 지식을 얻은 파우스트는 절망한다. 그 지식을 얻으면 지금껏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파우스트는 여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지식을 얻은 후에도 그는 그 전과 동일하게 파우스트였다. 정령들은 그를 거부하고, 결국 그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여기서 이 악마는 계약을 제시한다. '이 세상 모든 쾌락을 그대가 만족할만큼 안겨주마, 그 대가로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바쳐라.' 파우스트는 코웃음친다. 흥, 너같은 악마가 나의 무한한 갈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하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피의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만족한다면 내 영혼을 멋대로 하여도 좋다.' 그렇게 이 장대한 서사시는 막을 올린다. 이후의 전개에서 인간의 욕구를 대비시켜보면 파우스트의 행적이 명확해지는데, 성욕 - 파우스트는 난봉꾼처럼 순진한 처녀를 유혹하기도 하고, 헬레네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아이를 낳기도 한다. 권력욕 - 황제의 신하가 되어 높은 위치에 오른다. 재물욕 - 해안에 자신의 영지를 가진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가 무한한지 무한하지 않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쉽게 허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오래 쓰면 닳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을 것이다. 더 편해지기를 바라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따스한 것들에 안겨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태함은 우리가 죽을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나태함을 추구할 것이고, 영원히 편하게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쾌락의 역치에 다다른다면 결국 생물학에서의 실무율처럼 모두 반응하거나, 혹은 모두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를 파우스트에 적용시키면, 과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이 공정계약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떤 지고의 쾌락을 주더라도 반복된 쾌락은 결국 허무함을 낳게 될 것이고, 또다른 나태의 길로 접어들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허무함과 나태는 현실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싫증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적어도 파우스트의 입에서 '순간이여, 멈추어라. 그대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물론 신의 개입으로 영혼을 뺏기긴 했지만) 물론 그 수단은 메피스토펠레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목적만 이루면 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저런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어떤 순간에 만족한 감정을 느꼈나?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순간에 만족할 거라고 장담했는가? 그것은 간척지 사업이었다. 그 사업이 끝나면 백성들이 모두 도움을 받고 더이상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즐기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을 꿈꾸며 파우스트는 멈추어라고 외친 것이다. 괴테는 왜 이런 순간을 지고의 행복과 쾌락이라고 설정했을까?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상상속에서도 어렴풋이 저 순간에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 지고의 행복 -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는 순간 - 을 위해서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까지 얼마나 많은 이상이 명멸했던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서도 큰 얼개는 다르지 않다. 바우만이 쓴 이 조그만 소책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누가 모르는가? 낙수 효과가 어떤 의미에서든 제대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현대의 부의 격차는 그 옛날 전태일이 무전유죄를 외치던 때보다 몇 배는 심화되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회에 깔려져 있는 전제들, 생명력을 획득하고는 사회를 똑같는 레일 위를 달리게 하는 그런 전제들을 배격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바우만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은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바우만은 왜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서서 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그가 인용한 이 문장에 집약적으로 정리되어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우만은 예견된 파국을 막기 위하여 비록 모두가 아는 주장이지만, 그 주장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국이 예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수도 있다. 마치 바우만이 우리가 너무 쉽게 사회 구조에 순응한다면서 그 원인으로 내세운 네 가지처럼 말이다. 경제 성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처럼. 바우만은 방금 이야기한 네 가지가 너무나 쉽게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며 분석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파국'은 지식인 스스로들에게는 아무런 증명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다. 바우만은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여기서 데카르트를 다시 가져온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영혼은 좋은 것이고 물질은 나쁜 것이다. 그렇기에 영혼을 가진 사람은 좋은 존재이고 물질로 이뤄진 동물은 나쁜 존재이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주체성을 가지고, 영혼이 없는 동물은 우리의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모든 긍정적인 측면이 고착되게 되고, 주체성이 없는 존재에게는 모든 부정적 측면이 고착이 되버린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오늘날 사회에서 주체성이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오늘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경제관계이다. 경제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과 소비가 주를 이루는 관계라는 이야기이다. 논란이 되었던 갑과 을 관계 모두 이런 경제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절대 왕권이 없는 이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어떤 우위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사실상 동등한 존재이다. 방금전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진다고 말을 하였었는데, 소비자가 더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는소비자와 생산자 대부분 사이좋게 경제 지층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세계이다. 모든 부는 상층부에만 집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위 관계가 생길 수 있는가? 소비자와 물건사이이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오자. '고객과 소비자가 상품과 소비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뿐' 이라고 한다. 바로 이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고객은 실제로 자신도 다른 존재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만 채울 수 있는 도구로 쓰이면서도 판매자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상대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리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생긴다. 먼저 주체성이 생긴다. 방금 언급한 확장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따르면 모든 긍정적 면모가 주체성에 고착이 된다. 그리고 물건에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무의미하게 대할 수 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물건이라면 그런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적 유대가 취약' 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유대에서 더 나아가 '사랑'도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은 가시밭길이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대에게 왕관도 씌우지만 십자가도 안겨주리라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왕관은 원하면서도 십자가는 피하려고한다. 결국 자신의 일방적 감정만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자, 소비재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상대를 물건의 위치로 내려앉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가 약해지고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된다면 이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이 올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사회는 위기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바우만이 진짜 사회학자라면 파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논리학적인 말장난같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가 진짜 사회학자가 되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을 조금씩 따르는 사람들,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그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이 모여서 바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의 원인을 알았으니까 그 해결책도 간단하다. 주체, 객체 관계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일퍼센트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퍼센트는 제외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끼리는 사랑을 배우고 상대를 소비재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를 도구로 격하시키는 본인 스스로도 정작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도구로 격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좋아서 서로를 그렇게 객체화시키는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분명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의 폐단, 특히 팔 수 없는 것을 팔게 된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조탓으로 돌린다면 늦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소리를 높이는 것 처럼 말이다.

 

가끔 나는 경제적으로 일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런 부유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솔직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내가 조금만 더 부유했다면 책을 주문할 때 굳이 오만원씩 끊어서 마일리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그렇게 고심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와 같은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조금만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 와 같은 생각들까지도 한다. 그러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으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수많은 옛날 경전에서 이야기하지 않는가, 재물은 스스로를 얽어맬 뿐이다, 라고.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으리라고 대부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이 돈을 벌고 또 벌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그런 계층을 넘어서 돈이 돈을 벌어다 줄 경제적으로 더 상위층을 보면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마치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늘상 이런 질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파우스트, 에 따르면 그들은 지고의 행복은 맛보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마치 신포도라고 합리화하는 여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곳에 군림하는 그대들이여, 함께 모여 지내면서도 영원히 외로운 당신들이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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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21 01:57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이 슬퍼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일을 할 것이고,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할 거예요 많으면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그러니까 돈은 적당히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움켜쥐려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에 다시 돌려주는 사람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어야겠군요 우리가 서로를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3-10-22 12:49   좋아요 0 | URL
저는 붙이면서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봐요? 하하하하하ㅠㅠㅠ 파우스트를 이번에 다시 읽어가면서 이 구절이 너무 맘에 들어서 써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는 이렇게 써버렸네요.

여담이지만 돈이 아주 많으면 누가 돈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할 것 같네요, 풋.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는 것 같아요

2013-10-2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2 09:06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이 너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리뷰에서 '소책자'란 단어가 보이지 뭐에요. 그래서 검색했더니 100쪽이 조금 더 넘는 책이네요.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져요. 무엇보다 이 얇은책이 가연님에게 이토록 긴 리뷰를, 별 다섯을 불러냈군요.

상위1프로라면, 당연히 마일리지 때문에 5만원씩 끊어서 주문하지 않겠지만, 제가 곰곰 생각해보니, 상위 1프로라면 주문을 직접 할것 같지 않은데요. 비서 3이나 비서 4에게 시켜서 이책과 이 책 사다 서재 내 책상에 올려둬요, 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저로서는 실현 불가한 얘기네요.

저는 감당이 안될것 같아서 상위1프로까지는 쳐다보지를 못하겠어요. 만약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면, 아 이 돈이 그냥 다 내 돈인가보다 하겠지만 없었는데 생긴거라면 제가 그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역시 신포도를 쳐다보는 여우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연 2013-10-22 12:53   좋아요 0 | URL
네, 분량이 얼마 안되는데 빨리 읽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때 딴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그랬었는지도ㅎㅎ 별 다섯개는 좀 많이 고민을 했는데, 네개는 아닌 것 같아서.. ㅋㅋㅋ 제가 또 별 다섯개는 잘 안주는 편이긴 한데ㅎㅎㅎ 네 개는 인플레가 심하지만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오,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옳아요, 비서 3에게 시킬 듯 하네요ㅠㅠㅠ

맥거핀 2013-10-23 00:30   좋아요 0 | URL
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다만 이 다음이 파국일지, 아니면 더 극심한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파국이 가까이 시작되는 때는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생각의 비율을 넘어설 때이겠지요. 오늘 다큐 하나를 봤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고보면 파국이 오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영원히 이렇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위의 1%의 사람들일텐데, 그들은 도리어 이 파국을 앞당기고 있으니..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연 2013-10-31 08:46   좋아요 0 | URL
요즘에 개도국에서의 다국적기업의 현황, 이랄까,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 소식을 들은 적 있는데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다국적기업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그런 생물체 아닌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것인데.. 예견된 파국은 언젠가 오기는 할 테지만.. 개도국들이 거의 전멸할때쯤 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들의 생명이 희생물로 바쳐져 유예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다국적기업도 다국적기업나름대로 희생자의 목숨을 살려두려고는 하겠죠. 그게 더 효율적일테니.. 바로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1퍼센트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때 파국보다 더 심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3-11-0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버트런드 러셀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다는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의 목차를 읽어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게 러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지?' 러셀의 이 책은 정말 수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 철학, 정치, 종교, 억압받는 자, 인류에게 해를 끼친 관념과 이득을 준 관념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러셀과 그다지 관련없을런지도 모른다. 서양철학사, 로 먹고 살만한 수입을 가지게 된 러셀,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던 러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러셀. 결국 러셀이 살고 있는 경계는 그정도이다. 하지만 러셀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니, 그러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입이나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야?' 물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 등에 대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말할 권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러셀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이미 러셀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서부터 오는 후광, 그리고 그 자신의 활동과 업적에서 오는 권위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사람들' 에게 정말 적절한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를 제공해준다. 이런 제대로 된 근거를 제공받은 사람은 탄탄한 이론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이 책에서 지적한다 : 단단한 이론을 제공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이다. 사실 나로서는 헤겔과 라캉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없기에, 정확히 말하면 근거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둘에게 철학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지젝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을 읽으면서 아주 좋은 비판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지만, 몇 몇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헤겔의 저작인 행성궤도론에 대한 러셀의 비야냥거림은 아주 적절하다. 하늘에 행성은 7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헤겔의 행성궤도론에 대하여 러셀은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엮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의 치아의 개수와 남자의 치아 개수에 대하여 이론을 세웠다.) 이야기한다. 직접 눈을 뜨고 관찰했다면 그런 이론을 세우지는 못할텐데, 라고. 하지만 이 비야냥거림이 적절하다고 해서 헤겔 철학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에 대하여 너무나 명징한 문장을 가져와서 '자, 이게 헤겔철학의 정수임에 다름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변증법이 왜 엉터리인가? 러셀은 변증법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헤겔이 설명하지 못했다, 고 이야기하지만 러셀 본인도 왜 그게 마르크스가 얻은 '가장 터무니 없는 부분' 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러셀은 헤겔의 철학을 읽으면서 '뭔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여겼었다가 수학철학에 대하여 엉터리인 내용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헤겔 철학이라는 독' 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한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 일부가 거짓이라고 해서 전체를 두고 다 잘못된 거야, 라고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헤겔의 철학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러셀 처럼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조차도 해본적 없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쩌면 충분히 깊게 헤겔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지 모른다. 내가 시간을 들여 충분히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면, 그리고 그의 모든 저서를 깊게 분석한다면 어쩌면 정말 심오한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만약에 내가 헤겔 철학을 접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여기고 접근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경험론자이자 합리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러셀이 취했어야 하는 태도일런지도 모르겠다.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당혹스러운데, 물론 대학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분명히 공부했기에 나보다 더 많이 러셀이 칸트 등에 대하여 사유를 했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장은 보아넘기기 어렵다.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학적으로 집합을 그려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A집합이라고 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건을 B집합이라고 두자. 그리고 자유의지를 C집합이라고 두면, 위 문장에 따르면 A집합은 B집합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 A집합과 C집합의 관계는? 이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 자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월적 자유에서 칸트는 신 등의 개념을 가져온다. 러셀의 저런 사고과정에서도 신이 결국에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두 신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다르다. 물론 나는 러셀이 칸트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인기작 러셀의 서양철학사, 를 보면 전혀 이해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쓰다보니 쉽게 풀어서 쓰게 되고 결국 오류가 생겼다고 믿고 싶다. 아니, 도리어 이게 러셀의 심정에 관한 더 정확한 문장일지도 모르겠다.'철학자들은 늘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싸운다. 그런 관념을 일반인들에게 적당히 끼워맞춰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무슨 영향이 생기겠는가?' 

 

이런 러셀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이 책애서 러셀은 이야기한다. 거칠게 말하면 먹고 살기도 바쁘고, 우리가 사는 이런 문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을 많이 배출하여야만 하지만, 그런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을 위하여 전반적인 정도의 수준의 교양은 필요하다, 라고 말이다. 원 글은 교사의 중요성(저런 전반적 수준의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교사의 역할이 크다)에 관한 글이었지만, 이렇게 잘라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일반인들은 넓게 어느 정도만 알면 된다. 굳이 깊게 파고들어서 명사와 형용사, 부사의 미묘한 차이에 따른 철학의 변천사 등을 알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런 것을 안다고 하여 그다지 도움되지는 않는다. 굳이 채우는 거라면 지적 허영정도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교환양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은 No man's land,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매우 애매하기도 하다. 러셀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로지 코믹스, 를 보면 러셀이 어떻게 논리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은 라이프니츠를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그런 방법을 고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라이프니츠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한 것 같다. 오죽하면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겠는가 '라이프니츠를 제외하고는 다른 철학자들에 대하여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 라이프니츠를 '제외' 하고는.

 

특히 헤겔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론이 논리적 기반인 변증법을 활용을 하고 있다는 점때문이리라. 논리적 기반을 바탕을 하는 이론은 러셀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마음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사로잡는다.' 그것의 결과는? 광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관념, 역사가 변증법적인 논리를 따라 발전해나간다, 를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야 어떻든) 결국 소련을 낳았다. 그리고 소련이 어떤 국가였지는 굳이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건 러셀이 라이프니츠와 그의 제자 불Bull이 그들이 고안한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계산했었다면 당장에 그르다, 라고 나왔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풍선에 김을 빼는 소식이겠지만,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의 저런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러셀의 공격이 그의 권위를 빌려 '헤겔은 모조리 엉터리야, 칸트도 초등학교때나 배우던 것 (사실 이 부분에 러셀은 유년기의 도덕률, 이라고 표현하는데 러셀의 표현에 동의하기는 한다. 진, 선, 미는 우리가 초등학교때 배우잖는가.) 을 이야기하려고 하네, 우린 초등학교 나왔거든?' 라는 식으로 또다른 광신을 낳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지 않겠는가?

 

다른 분야에 대해서 러셀이 말한 것도 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뭐, 러셀이야 미국이 지금 이런 나라가 되리라고는 몰랐을테니 -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어느 정도 감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미국에 대하여 편향적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국제 정부를 만들자니. 그것도 미국을 중심으로 소련을 밀어내면서.  러셀은 당시에 드러낸 칼날만 날카롭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하는 중독인데도 말이다. 오늘날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면서 러셀은 그때 내가 정말 잘못생각했구나, 라고 여기지 않을까? (뒤에 역자가 친절하게 러셀은 '평생 후회했다' 라고 적어주었지만 말이다.) 핵무기는 정말 잔인한 무기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억지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옛날 개틀링 박사가 개틀링 건을 만들면서 '이 무기를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고 떨거야, 그럼 이제 전쟁은 안녕이겠지?' 라고 여겼던 순진한 꿈을, 이 핵무기가 이뤄준 것이다. 쓰면 모두가 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억지력은 사람들을 이렇게 이끈다. 마치 핵무기가 없는 것 처럼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런 속담이 있지 않은가. 항상 가까이 있지만 모른체 하는 것은? 죽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아가다보면 먹고 사는게 가장 큰 일이 된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먹고 사는 것을 무기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그리고 이는 '자본' 의 이름으로 이를 무기화된다. 이것이 은밀한 독이 되는 것이다.

 

러셀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배울만하다. 어떤 사례에 대하여 의견을 가진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의견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근거가 있는 한 이 의견이 다른 의견에 비하여 더 옳다, 라고 여겨야 된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이런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에 이르면 사실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이런 경험주의적 태도는 양비론과는 다르다. 그래서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명확한 입장이 다른 입장을 논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항상 본인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다른 입장이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이 부분이 더 옳다, 라고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신에 대하여 러셀이 언급하는 부분들을 보자. 수녀들은 목욕을 할 때 옷을 입고 목욕을 한다고 한다. 러셀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본다고. 그러자 수녀들은 대답한다. 아니, 하나님이 보시잖아요? 그리고 러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녀들은 신을 무슨 관음증 환자로 여기는 건가, 라고. 여기서 유추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당연히 신은 관음증 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수녀들은 왜 저렇게 목욕하는가? 이런 식으로 신이라는 관념을 인정하면 걸리는 관습이 너무 많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해볼때, 신은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추해냈지만, 만약에 경험론자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신은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받아들이지못한다, 라는 말은 양날의 칼이다. 증거가 없으니 일축해버릴수도 없다.

 

이렇게 문제점들이 생기는 이유는 러셀 본인의 생각과 태도가 불일치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 책 자체가 오랫동안 써왔던 글들을 묶어서 출판했다는 것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깎여짐' 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어진 일종의 후천적 관념일 경우에 두드러진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신에 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자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그런 의견들은 항상 '깎여질 수 있다' 는 말이다. 러셀의 초기 글에 비하여 이후의 글들은 약간씩 생각이 바뀐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았으니 오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이 생긴 이유가 상업적이니 말이다. 서문에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러셀의 책을 간행하던 출판사는 사실상 러셀이 무슨 주제에 관하여 쓰든 비평과 판매에 성공을 거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직 안 낸 글이 있다면 묶어서 책으로 만들자 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책에서 다른 것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러셀의 핵심 그 자체를 노려야 한다. 그 외에는 모두 결국엔 깎일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핵심은 무엇인가? 러셀이 살아가면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그 신념, 사상, 심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명징하게도 이 책에 적혀있다.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이다. 몇 번이고 재반복되며 이 책에 나타나는 저 주제가 바로 러셀 본인의 신념이자 절대로 깎여나가지 않을 심성이다. 그런데 어째서 러셀은 이런 신념을 품게 된 것일까? 그것은 러셀 본인의 심성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을 하고 싶었던 러셀을 살게 해준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더 알고 싶다, 라는 심정때문이었다. 논리적이고 완전한 세계, 그 세계를 수학은 이루어주었고, 그에 힘입어 그는 수학 원리를 쓰고, 논리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비교적 명확한 모순을 제거해나간다면 결국엔 무엇인가에 도착할거라고. 모든 것이 그와 '상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방향이 되어준 경구다. 생각해보면 러셀의 삶은 저 주제의 실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전쟁이 위험하니 반전운동에 나선 것이다. 공산주의랍시고 사람을 굶겨죽이고 탄압하니까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기억하기 싫은 사람이라면 러셀의 삶이 어떻고, 사상이 어떻고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러셀이 남긴 이 말만은 가슴에 품기를 바란다 :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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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10 00:54   좋아요 0 | URL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이런 말을 붙이다니... 본래 제목에는 없는 말을 붙인 것인 듯해서 찾아보니 책 목록에 나와 있네요 본래 제목은 쉬워서 영어를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생각나는군요 나중을 위해 지금 나쁜 일이 일어나도 눈감는 사람과 지금 바로 앞에 일어나는 나쁜 일을 없애려는 사람, 결국 처음 사람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막아야 한다로 돌아섭니다

러셀은 완전한 세계가 없다고 절망하지 않았군요 절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희선

가연 2013-10-10 20:43   좋아요 0 | URL
ㅎㅎ 러셀이 정말 완전한 세계를 목표로 살아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추측에 지나지 않죠, 풋. 하지만 러셀이 논리학 그리고 수학을 정말 좋아하였던 것은 사실이니깐.. 뭐랄까, 수학의 체계를 완전히 반석 위에 올릴 수 없다, 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눈을 돌려서 수학에서는 실패했지만 세상에서라도 모순을 줄여보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좀 앞뒤가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러셀의 현대적 후계자라고 볼 수 있는 촘스키의 경우엔 러셀과 아인슈타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 반전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써놓고 다시 연구실 안에서 물리학 연구에 뛰어들었고 러셀은 거리로 걸어나갔다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불멸의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던데.. 저야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않지만...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희선 2013-10-11 01:17   좋아요 0 | URL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군요 수학을 왜 좋아하는지를 말한 사람도 더 깊이 공부를 해나간다면 그것을 알게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수학 체계, 이런 것은 잘 모르지만... 러셀 조금 재미있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반전운동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아인슈타인처럼 자기가 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앞에 나서서 무엇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가연 2013-10-16 13:04   좋아요 0 | URL
ㅎㅎ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지만 그 기반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기에... 하하하하하하

마립간 2013-11-02 13:01   좋아요 0 | URL
위 가연님의 글을 처음 게시 때 읽기는 읽었는데, 리뷰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모르는 부분을 언급하셔서, 반론보다는 의문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르네요. (몇 가지는 이미 고민하고 있던 것이구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제 서재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 때 링크하려 해서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가연 2013-11-04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당선작이라고 해서 벌써 이달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나, 했더니.. 신간평가단 당선작이군요. 굳이 양해하실필요 없이 나중에 의문점 생기셨을때 댓글달고 링크하셔도 되는데.. 다만 제가 양해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 요즘 제 서재도 잘 안들어오는 편이기도 하고... 요즘 마음이 좀 심란하기도 하고.. 제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도 않기에 답을 제대로 못해드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3-11-08 08:15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이 글에 직접 먼댓글로 링크하지 않고 본문에 주소로 인용을 표시했습니다. 내용상 반론?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날 때 읽어주시고 내용상 오류가 있으면 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8일 글 말고 다음주에 2편 더 있습니다.)

가연 2013-11-11 19:34   좋아요 0 | URL
답변을 길게 썼습니다.. 졸지에 푸념이 섞여버렸네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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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한 때 난 황우석 박사를 매우 좋아했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황빠, 라는 범주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우석 박사는 서울대 수의대의 교수였었고, 젖소 영롱이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체세포 복제를 통하여 영롱이를 만들어낸 황우석 박사는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에 도전하며 우리나라의 과학계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당시 침체된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나왔다니, 그 당시 나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며. 황우석 박사가 그의 배아줄기세포 관련 논문을 실은 사이언스지는 매우 유명한 학술지이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이언스지 등의 학술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게다가 논문의 내용은 여간한 논문들과는 실용성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으니 (줄기세포의 복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미쳐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한민국이 그에게 모두 미쳐있었다.

 

하지만 보름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황우석 박사는 그의 절정에 있을 때 동시에 몰락을 준비했다. 2005년, PD수첩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난자 채취과정이 비윤리적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었다. 그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최고의 과학자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욕을 매우 많이 먹었고, MBC당국에서조차 PD를 경질시키는 동시에 대국민사과를 방송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당시에는 PD수첩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말도 안 돼, 감히 황우석을 건드려? 그래, 꼭 이런 기분이었달까. 물론 지금 와서 판단해볼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때 일을 떠올려보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굳이 한 가지 다행이라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도 황우석에 대한 옹호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 정도이려나. 황우석 박사의 쇼는 결국 미즈메디 노성일 원장의 폭탄발표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 다음에는 솔직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PD수첩 2차 보도는 보는 둥 마는 둥했었고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는 더 충격이었다. 앞서 말한 영롱이마저도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복제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인지, 아니면 어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정말 눈을 돌리고 싶었고 그리고 정말로 눈을 돌렸다. 다만 내 머릿속에 끝까지 남은 것은 그나마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일부가 처녀생식으로 발생되었다고 추측된다는 것. 그래, 황우석 박사가 완전히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니야, 정말 아깝다, 처녀 생식도 정말 대단한 발견인데, 그걸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부담감에 시달려서 거짓 논문을 썼을까, 라고 나는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북리뷰에 보면 당시에 진중권이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사건에 대해서 (진중권은 황우석 지지자들 때문에 감금당했다)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겠다.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중략)... 왠만한 욕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중권은 하나의 사례를 들며 이런 의문을 던진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오랫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야 겨우 대답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대답이 늦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이상한’ 사람들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에게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 라는 교훈을 전해주었다. 결국 이런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글에 대해서 읽었다고 하자. 그 후에 A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내놓으라고 요청받아서 의견을 내놓았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그 의견, 찬성이든 반대든 그 의견은 정말 그 글로만 판단되어진 의견일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A를 쓴 사람에 대한 편견이 먼저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A를 쓴 사람을 좋아한다면 설령 이상한 내용일지라도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글은 이상한 글이다, 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옳은 것이 아니다. 편견이라는 말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데, 편견은 단순히 그 사람의 첫인상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풍문으로 듣든, 이름으로 판단하든. 거짓말 같은가?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가져다주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더 강화하게 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일컫는다.)

 

자, 이런 것들을 깨달았으니 나는 과연 완전히 저런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제법 객관적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 황우석 사건을 거치며 나는 어떠한 우상이라도 내 손으로 때려부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어떠한 주장도 객관적 근거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도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면서 판단할거라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 자체 또한 일종의 편향, 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를 과신하는 그런 기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도 황우석 사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은 절대치로 비교하자면 황우석 사건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만에 빠졌다, 라는 점에서는 인식에 거의 비슷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는 가수다, 는 MBC에서 여러 가수들, 특히나 재야에 묻혀 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르는 그런 가수들을 초빙해서 경연을 붙여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가수다, 는 정말 사람들의 환상을 꼭 채워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환상인가? 방금 나는 재야에 묻힌, 에 강조점을 두었다. 바로 그 점이다. 재야에 묻혀있지만 실제로는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혹은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에게 은근슬쩍이나마 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혼자서만 갖고 있고 싶다. 나는 가수다, 는 바로 이 환상에 절묘하게 부합되었다. 예를 들어 임재범을 보자. 임재범은 나는 가수다, 출연 전에는 거의 방송출연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 노래방에서 제일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 1위인 고해, 정도로 인구에 회자될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임재범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 는 정말 말이 필요없는 노래였었다. 하지만 방송에 출현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든 전설, 이라는 이름 아래 잊혀져 갈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욕망과 나는 가수다, 의 욕망은 서로 만난다. 나는 임재범이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임을 알고 있고, 그의 노래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전설의 이름으로 더 이상 대중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더라도 그 또한 아주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혹시나 우리나라의 가수들 중 가창력 1위에 대한 잡담을 할 때 남들이 거의 다 잊어버린 임재범의 이름을 당당히 말할 것이다. ‘야, 니들은 모르지? 임재범이 얼마나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는지를.’ 그리고 난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심정을 공중파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이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임재범이 실제로 나는 가수다, 에 나와서 너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 을 열창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임재범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임재범의 갑작스러운 하차 선언으로 인하여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만다. 그리고 임재범의 대타로 들어온 것은 옥주현이었다. 여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옥주현이 과연 나는 가수다, 의 전설들 사이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 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는 큰 음모가 있다, PD와 방송국 전체가 임재범을 몰아내려고 했다, 등의 음모론으로 발전해나갔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옥주현의 관객반응 중 일부를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을때의 관객반응을 가져와 편집한 것이 드러나면서 나는 가수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터져나갔다. 그 게시판만 터져나갔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터넷 게시판이 터져나갔던 것 같다. 나도 생전 들르지 않았던 방송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서 사람들의 댓글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스포일러, 그러니까 후기를 알기 위하여 (나는 가수다, 는 선행 녹화 후 방영이기에 노래를 들으러 갔었던 방청객들이 스포일러를 남길 수 있었다.) 인터넷을 밤새도록 새로고침하면서 뒤졌던 기억이 난다. 옥주현을 비판(혹은 비난)하는 글은 추천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옥주현이 전조(곡의 코드를 변화시키는 것)를 했다는 기사가 뜨면 함께 출연하던 조관우를 언급하면서 옥주현이 한 번 전조를 하면 조관우는 전조를 자유자재로 한다, 고 글을 쓰던 사람도 있었다. 옥주현이 오케스트라를 요구했었다, 라는 말들도 널리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우석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도 글을 올리지 않은 것 정도다.

 

바로 몇 년전에 황우석 사건을 겪었었는데 겨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황우석 사건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지금 와서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옥주현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을 겪고 나는 내 머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논란을 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에 내 마음 속에선 결론이 나있었다. 임재범이 없는데 옥주현이 들어왔네? 감히 임재범의 자리에 옥주현이 들어와? 빨리 임재범 다시 데려와, 라고. 이미 이렇게 결론이 나있는 이상 옥주현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쫓아 글을 읽었을 것이다. 누가 어떠한 증거를 내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사건을 겪으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면 또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분명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갑자기 돌변할 텐데. 결국 내가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과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객관적 관점에서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객관적이기 어렵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 또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논지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전개해나간다. 너를 공격은 안할 테니까, 나도 공격은 하지 말아줘, 라는 생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결국 항상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길이 아닐까? 이런 길은 결국 절망만 남기게 된다. 어차피 이해 못할 거라면 그냥 내 의견과 비슷한 사람들로만 내 주위를 채우면 모두가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기어코 나의 지옥은 상대방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궁리하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이다. 책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저 사례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기만, 편향, 과신. 나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였고, 황우석 지지자들의 집단을 일종의 내집단으로 판단하여, 거기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외집단으로 판단하면서 침묵으로 대응하였던 것 같다. 무슨 증거가 나오더라도 지지쪽으로 의견이 편향되었고, 그 사태가 모두 끝난뒤에는 쓸데없는 과신, 절대로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마저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런 자기기만은 왜 생겼던 것일까? 결국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 책에 따르면 나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나의 인지에서는 부하가 걸리게 되고, 그런 부하를 생물학적으로 겪고 싶지 않아서 환상을 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리라.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특히 생물학적인 연구를 언급한 장인데, 여기에서 나는 이런 기만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인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의식은 도리어 일종의 관찰자에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한 연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 때 fMRI를 통하여 뇌의 부분의 활성화가 되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은 의식적인 부분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겠다, 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부터 이미 운동에 쓰이는 부분이 활성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말이다. 내가 운동해야지, 하기 전부터 이미 몸은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기도 전인데 먼저 몸이 먼저 운동을 준비한다니. 보통 우리는 의식을 가진 뒤에야 운동이 발현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그런 명령이 먼저 내려진 뒤에 의식은 그걸 지켜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을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질 수 없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저런 기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더 선호하는 그런 표상들에게 휩쓸릴 것이다, 영원히.

 

하지만 현대 과학은 그런 부정적인 결론만 우리에게 안겨주지는 않는다. 의식은 비록 관찰자이지만, 우리가 그럴 의식만 있다면 절대적 권리를 가진 관찰자이다. 적어도 어떤 행동이 있기 10초 전부터 무의식적인 단초,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과 행동 자체를 빚어낼 신경 신호가 가 나타난다고 하면, 이 신호는 행동이 시작되기 10분의 1초 전까지 중단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의식이 그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만 있으면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좀 더 크게 확대해보자. 나를 어떤 집단으로 확대하고, 의식을 집단 내에서 중의를 모으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의견을 배척하지 말라,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라. 물론 이런 집단은 인간과 달라서, 설령 집단의 일부가 그런 의견을 중지한다고 마치 의식처럼 닥터스톱, 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않아도 큰 소득이 된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글쎄, 이런게 또 다른 기만의 단초가 되면 어쩌지? 이런 이야기처럼 말이다 :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른 몇 명은 제대로 길을 걷고 있겠지, 뭐 양심은 그 사람들에게 맡겨두자, 나는 일단 다수의 편에 있어보겠다, 잘 안되면 그 사람들 편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여담인데, 이 책은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p. s. 2 프라이머리의 입장정리, 를 들으며..

p. s. 3 사실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질 수도 있었다. 무한도전의 노홍철을 중심으로.. 내가 또 무한도전의 광팬이라서, 아니 글 내용을 좀 구상했었던 아이디어가 아까워 이렇게 몇 자 붙인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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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26 01:27   좋아요 0 | URL
올해 읽은 것 가운데 최고의 책이군요

자기 자신도 믿을 게 못 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또한 가연 님이 한 말처럼 자신은 벌써 결론을 내려놓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한테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한테도 늘 자기 마음을 열어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저도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려고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두 내려놓기... 사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래도 황우석 박사 일이나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에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조금 억지가 있는 걸까요

마음을 진정시키면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이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26 20:10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오늘까지는 최고의 책인 것 같아요. 특히 생리학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는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옛날에 배우던 기억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배울땐 그렇게 지겨웠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하.

마음을 열어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고 내려놓는것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정말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여기 인간세상에 살기 어렵지 않을까..

마립간 2013-09-26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선 가연님을 제가 신뢰하는 그룹의 사람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의지'는 제가 인지과학에서 남겨둔 마지막? 퍼즐입니다.

가연 2013-09-26 20:12   좋아요 0 | URL
아하하.. 신뢰하는 그룹은... 감사합니다만 넷상은 위험하니까 좀더 지켜봐주심이...ㅠㅠㅠ

그렇죠. 사실 궁금한 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의지에 관한 문제는.

드림모노로그 2013-09-30 09:53   좋아요 0 | URL
하하하 ~ 가연님께서 말씀해주신 과거의 일과 묘하게 감정의 교집합이 생기네요 ㅎㅎ
황우석 사태는 정말 , 대단했죠...^^
그리고 임재범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라, 가연님의 생각하셨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가 되네요 ㅎㅎ.....
집단주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부분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지적하는 부분이죠..전 혼자 노는 것을 좋아라 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하하~
비가 와서 처지던 기분에 가연님의 글을 읽으면서 괜시리 즐거워지네요 ^&^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가연 2013-10-03 20:5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오랜만입니다.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곧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비가 또 오겠죠?

2013-10-01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