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의 특수이론과 일반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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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학습부진아였다, 라는 말은 새삼스럽게 더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이라고 한다고 해도 약 5, 6년 전에 나온) 출시된 아인슈타인의 평전을 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딱히 학습부진아라고 할 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 학습부진아라고 알려져있고, 그리고 학습부진아라고 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명제가 깨어지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어려서부터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식의 명제에는 그다지 호감을 가지기 어렵다. 어쨌든 어렸을때의 아인슈타인은 어학이나 인문계통의 전반적인 지식은 많이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의 숙부 덕분에(수많은 아동용 아인슈타인 일대기에 숙부가 어떻게 그에게 방정식을 가르쳤는지, 대수학에 흥미를 심어주었는지가 나온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는 잊지 않았고,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가 대학, 그것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인 스위스의 취리히 공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때문이었다. 다른 과목들이 점수가 부족했는데도 학장이 배려할 정도면 우수한 수준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입학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한 발 앙보하자면 이는 리처드 파인만 등 다른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사실 아주 뛰어난 수준은 아니기는 하다.

 

기대나 흥미를 떨어뜨리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리처드 파인만의 경우는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역시나 어려서도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의 기행들, 그리고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지적 능력이 뛰어났었는지는 도리어 과소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파인만의 경우에는 혼자서 무한급수와 적분을 공부했고,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물리학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과에 지원한 다른 학생들을 수학시험에서 압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런 수준에 이른 파인만이나 몇 십자리의 곱셈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한 문제를 풀 때 잠깐 동안 수많은 답을 찾는 경로를 계산해 낸, 그야말로 컴퓨터의 수준에 다다른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도리어 그 컴퓨터의 수준에 인간이 다다르다니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과 같은 경우와 비교한다면 확실히 어렸을때의, 그리고 대학생때의 아인슈타인의 재능은 주변인들이 볼 때 좀 뛰어난 영재에 지나지 않아보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시민이 되고, 대학에 남아 연구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것이 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는 않기에, 가정교사와 같은 직업을 전전하게 되었다. 연인이었던 밀레바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대학 졸업 후의 일이다. 의외로 물리학자들의 지성미에 반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인만의 예를 들어도 그렇고.. 아인슈타인도 연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렇게 결혼을 아무런 안정도 없이,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면서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저때 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특허 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특허사무소에서 어떻게 보면 단순반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남는 시간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특허사무소에서 일했던 것이 아인슈타인의 그의 이론의 기초를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역사학자가 지은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라는 책을 읽으면 거기에 대해 흥미로운 추측을 진행시킨다. 당시의 정확한 시계가 필요한 상황이 아인슈타인의 시간에 대한 고찰에 영향을 미쳤다던가. 푸앵카레는 (그렇다, 그레고리 페렐만이 증명한 푸앵카레의 추측, 의 그 푸앵카레다.) 프랑스에서 경도국이라는, 선박에 필요한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는 그런 기관의 회장이었다고 한다. 이 추측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는 모르나, 확실히 흥미로운 추측이기는 하다. 그러니깐 빅뱅이론(미국드라마)의 쉘든 쿠퍼(주인공이자 이론 물리학자)처럼 아무 단순반복직업이나 택해서는 물리학적인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는 1905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다른 물리학자들이라면 평생을 바쳐서 이룩할 만한 뛰어난 고찰로 가득찬 논문을 3개나 발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광양자 이론(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며, 이것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았다.), 브라운 운동 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물론 아인슈타인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이룩해내지는 않았다. 부연하자면,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아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 근본조차 새로운 무엇인가가 번쩍 하고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양자 이론은 막스 플랑크에게 영향을 받았다. 상대성 이론은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나 로렌츠에게 (특수 상대성 이론의 수식에는 로렌츠 변환,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설령 아인슈타인이 아예 근본부터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라고 할지라도 그의 위대함은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다.

 

어느 책에서는 창의성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창의적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가? 가장 뛰어난 이론을 보고 듣고 공부하라. 거기에서 조금만 비틀면 마치 나비효과처럼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등장할 것이고, 그것을 잡고 끊임없이 궁구한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이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걸맞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처럼 빛을 생각해보지는 못했고, 그 누구도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해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그는 그렇게 기존의 물리학 체계를 보완해내었고, 우리가 더 완전한 진리에 한 걸음 닫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인 수많은 고찰과 이론들, 그리고 뛰어난 직관은 쌓이고 쌓여서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였다. 그런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에서는 그 어느 누구라도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런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과학이라는 것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보면 결국에는 올바른 길(여기서 올바른, 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는 바른, 이라는 의미와 동일하다.)로 발전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에테르를 믿고, 절대 시계, 그러니까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절대 시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다른 이론들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듯,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취급하는 아이디어이다. 물론 시간은 공간과 엄밀하게는 동일하지 않다. 공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시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비가역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고전 역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밝혀보려고 노력했던 갈릴레오나, 뉴턴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좌표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좌표계라는 것은 묘해서, 우리가 어떤 좌표계를 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동을 기술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관찰을 어디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달라지게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공을 하늘에 던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공은 시간에 따른 위치함수로 그 운동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때 죽어라고 배웠던 방정식들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자. 내가 걸어가면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과, 내 친구가 가만히 앉아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앞서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내가 걸어가면서 운동을 보는 것과 친구가 앉아서 보는 것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 상황에서 시간은 어떻게 될까? 과연 그 두 좌표계에서 시간은 똑같이 흐를까?

 

갈릴레오 이래로 많은 고전역학의 연구자들은 당연히 시간이 똑같이 흐를 거라고 믿었다. 두 좌표계상에서 시간에 관한 함수로 위치함수가 주어졌을때, 두 계는 동시에 시간을 공유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별다른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자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의 전자기학을 연구할 때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시간은 보편적인 상수가 아니다. 각 계(엄밀히 말하자면 관성계)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서 이 제멋대로인 시간을 규정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빛이다. 아인슈타인은 대담한 가설을 내세웠다. 빛의 속도는 불변하다고 말이다. 빛의 속도는 어느 계에서든 불변하며, 이는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는 것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무언가 모자란 기분이 든다. 무엇이 모자란 것일까? 그것은 빛이 단순히 어떤 측정 기준의 매체를 넘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다른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인식론적인 이야기를 모두 제외하고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빛이 우리의 망막의 수용체를 자극하여 뇌신경을 통해서 후두엽으로 상을 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빛은 측정 기준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어느 사물이 어느 시간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동시에 규정해주는 매체이다. 우리가 빛이 없다면 어느 정보도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왜 블랙홀 내부에 정보가 있는가, 없는가 를 두고 왈가왈부하는가? 그것은 블랙홀 밖, 사상의 지평선 외부에 빛이 탈출하지 못하기에 그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빛보다 더 빨리 전송될 수 없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빛은 정보의 매개 역할도 하기에 재미있는 현상을 이끌어내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사고 실험으로 도달했던 바로 시간팽창과 길이수축이라는 현상을.

 

시간을 재는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다. (처음에는 대담한 가설이었지만 이윽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실이 된다.)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고 다시 반사되어 돌아오는 거리를 잰다면, 빛이 많이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볼 수 있으니, 최대한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출수록 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는 방법은 물론 우리가 각도를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운동을 할 때 그런 현상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몇 가지 수식을 적절히 이용하면 시간이 팽창한다는 수학적 수식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길이 수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시간이 팽창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길이 수축은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한 일정한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었을때 등장하는 값이다. 이 식에서 시간이 팽창하게 된다면 일정한 속도일 경우 당연히 거리가 수축해야만 유지가 된다. 마침 우리는 일정한 속도에 대응할만한 멋진 매개물도 있다. 바로 빛이다. 광속 불변이라는 가설에서부터 우리는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 모두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운동하는 물체에 자를 매다는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빛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는 매개물이다. 길이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물체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를 측정하는 것인데, 이 양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이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는 오차의 한계가 있겠지만, 마치 이데아의 원형처럼 무언가 절대적인 값이 하나 존재할 것이다. 이를 자신의 좌표계에서는 고유한 길이를 가진다고 하여 고유길이,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으로서는 빛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길이가 얼마인가를 받아들이기에 길이 수축이 일어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 자신의 좌표계가 아닌, 다른 좌표계에서 측정을 했기에 길이가 줄어드는 것 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번 도 꼬아서 생각해본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관측자이다. 관측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빛을 뿜는 물체가 관측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관측자가 빛을 뿜는 물체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파장을 배우면서 물에 몇 번 손가락을 휘저음으로써 파원을 만들고 물결파를 형성하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물결파는 물이라는 매질이 필요하지만 비슷한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빛은 매질이 필요가 없다. 결국 빛은 빛 자신과 그 빛을 보는 사람의 상대적인 운동관계, 상대속도에만 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낭만적인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사실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식,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 정리는 그 이후에 간단한 수학적 장치를 통해서(물론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유도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등가성이 나오게 된 것은 뉴턴 역학을 보완하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기존의 뉴턴 역학은 사실 운동에 대한 세 식에 의하여 체계가 완료된 상태였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거대한 지렛대를 주면 지구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 처럼 뉴턴의 역학은 마치 라플라스의 악마와 같이 작용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 이후에 그의 역학에는 어느 정도 수정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떤 수정이 가해진 것일까?

 

뉴턴의 역학에서는 운동량의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없는 어느 곳에 어떤 물체들이 있다면, 그 물체들의 총 운동량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우리가 완전탄성, 비탄성 하면서 탄성계수를 외웠던 바로 그 부분이다. 운동량은 간단하게 정의된다.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말이다. 이제 상대성 이론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저 물체들이 있는 좌표계를 움직여보면 특이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존의 계에서는 운동량이 보존되었는데, 움직이는 계에서는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론적인 입장에서는 새롭게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는 질량이 특수하고 완전한 값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질량을 다시 재정의해서, 상대론적인 질량을 도입하여 다시금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에너지 보존 법칙과 운동 법칙에서 유도후 도출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공식 E=mc² 다. (물론 여기서부터 설명을 위해서는 수식이 필요하다.)

 

이후 10년에 걸쳐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거듭했다. 보통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보통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장방정식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결론은 (안그래도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더욱 더 충격적이고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적의 해는 1905년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제목 그대로Annus mirabilis 그의 기적의 해의 연구의 편린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다가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두 손을 꽉 붙잡았고, 이윽고 자신의 손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고전역학의 모순점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더라도 아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의 물리학에 대한 심원한 고찰과 존재계에 대한 '신비로운'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런 일들이 다가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나에게도 그런 기적의 해가 언젠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의 해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나또한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그렇게 활짝 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물론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존경을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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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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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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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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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 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기까지 했었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여러 작품을 하나로 묶은 일종의 연작소설입니다. 이 책은 프롤로그인 뫼비우스의 띠, 에서부터 시작해 에필로그, 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얼핏 읽기에는 주인공들도 이 주인공이 나왔다가 저 주인공이 나왔다가, 하는 등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에서 정말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을 살펴보면, 수학 분야에서 이용되는 도형들을 그 상징으로 사용한 경우가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의 제목인 뫼비우스의 띠, 는 저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 그러니깐 하나의 띠를 잘라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게 한 번 꼬아 만든 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물론 정작 저 이야기에서는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이야기는 수학교사만 잠깐 언급하는 선에서 끝이 나지만, 책 전체의 프롤로그 격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들과 주제의식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을 계속 읽어가다보면, 다시금 뫼비우스의 띠, 처럼 비슷한 위상을 가지는 수학적인 상징이 등장합니다. 뫼비우스의 띠, 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의 제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클라인 씨의 병입니다.

 

클라인 씨의 병, 이야기는 근처 교회의 학생들이 나무껍질을 벗겨서 생활하는 한 애꾸눈 노인을 찾아오면서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애꾸눈 노인에게 설문조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변할거라고 생각하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애꾸눈 노인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노인은 말을 덧붙이지요.

 

 

난 곧 죽을 거야.

 

 

애런라이크의 책 노동의 배신, 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 삶에서 무언가 이루겠다는 목표마저도 상실한 채 위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상황이었고, 당시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저자는 누군가가 직접 잠입 취재를 해서 그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 편집장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본인이 직접 그 상황에 뛰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상상만 하던 그녀였지만 직접 본인이 뛰어들어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웨이트리스 일과 요양원 일, 청소 용역 일과 월마트 일을 체험한 그녀는 그 경험들을 살려서 분석을 내립니다. 먼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절약 방법이 않을까,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절약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저 목숨만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요소를 의, 식, 주라고 부르지요. 의복은 회사에서 입도록 지정된 색깔의, 혹은 아예 형식이 제한된 의복을 입게 되고, 그나마도 단벌이라서 그것을 입고 식사를 하다가 그 위에 음식물을 흘리면 세탁비, 거기에 더 나아가 여차하면 새 옷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주거 환경은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이 트레일러에서 잠을 자거나, 장기 모텔 투숙을 하는 현황이었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이서 한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방에서 이 위치는 누구의 것, 이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누구, 등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었지요. 저자인 애런라이크의 눈에 특히 더 불합리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상황이라면 좀 주거환경에 드는 비용이라도 적어야 될 텐데, 주거환경을 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그녀가 직접 집을 여러 곳에서 구해보면서 느낀 것은, 정말 가격과 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격은 지나치게 그 효용에 비해서 높았고, 상대적으로 적절한 곳으로 보이는 곳도 일자리를 구한 곳과의 거리 및 교통비를 생각해보면 또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은 저자에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모텔에서 장기 숙박하는지, 혹은 불합리한 선택을 고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강요'당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이 고를 수 있었던 식사는 다른 의, 주에 비해서 좀 더 상황이 나았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중산층에 이르는 사람들마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뚱뚱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관리를 안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하는 사람들은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음식물들은 그들의 예산 범위 안에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즉석조리식품들, 패스트 푸드 뿐입니다. 요즘 슬로우 푸드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는 슬로우 푸드는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열량의 음식들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느긋하게 먹을 수가 없다보니 자연스레 급하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게 되고, 여유가 있을때 한 번에 음식을 많이 먹는 등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악순환이 절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 클라인 씨의 병, 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쏘공, 의 큰아들 영수가 이 병을 보게 된 것은 그에게 영향을 준 과학자의 공장 내 그의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영수는 ‘긴 대롱에 구멍을 뚫어 한 쪽 끝을 그 대롱에 넣어 만든 이상한’ 병을 보게 됩니다. 이 병이 바로 클라인 씨의 병, 인데, 이 병은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이지요. 처음에는 영수는 이 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클라인 씨의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이라는 것을. 닫힌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의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클라인 씨의 병의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여기에서의 깨달음은 이윽고 영수가 은강 공단의 회장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이 상징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그리고 그런 차이마저도 사라지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 가해자(은강공단의 총수)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은강공단의 노동자)가 가해자가 되는(이후 영수는 은강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가 없는 공간이라면, 왜 이 공간은 이렇게나 부조리가 만연할까요? 그렇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클라인 씨의 병은 닫힌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잡이인 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완전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클라인 씨의 병이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외부와 내부 모두를 아우르는 클라인 씨의 병, 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도대체 이 공간의 어디쯤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렇기에 영수는 벽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키기 위해서 총수를 살해하려고 나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노동의 배신, 은 인상적인 글귀로 마무리 됩니다.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요구할 것이고, 엄청난 분노와 파업과 혼란이 만연할 것이지만, 그 날이 오더라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모두가 더불어 잘 살 거라고 말입니다. 이 노동의 배신, 에 나오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워킹 푸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지금은 ‘곧 죽기에 앞으로 더 좋아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저 영수가 은강 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어떤 혼란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살인은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파업과 분노가 횡행하는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 밖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클라인 씨의 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이 병의 공간의 어느 구석에 각각 서로 모여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부가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지요.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온다면 언젠가 충분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한 말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를 극한까지 몰고 간 철학자로, 그의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지적 영감을 주기도 했었다지요.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단지 이성만으로 결코 어떤 행위를 산출할 수도, 의지를 일으킬 수도 없으므로, 나는 동일한 능력이 의지를 방해할 수도, 감정의 선호를 반대할 수도 없다고 추론한다.’ 복잡한 문장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다른 말, ‘이성은 단지 열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 와 그 의미하는 바가 일맥상통합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성만으로는 우리의 소망을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성은 열정이 그 자신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노예입니다.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기에 그 자신이 한 계에서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는 워킹 푸어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서 최저임금 등을 냉철히 따져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등과 같은 판단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판단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 는 열정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힘든 생활을 하는 워킹 푸어들, 노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병의 벽을 붙잡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있던 위치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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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8-27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 글은 항상 쏙쏙 들어오고, 끝까지 읽게 되네요. 저도 어제 쓰고서는 오늘 조금 더 보충하고 다듬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

가연 2012-08-29 02:0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koopuha님 글도 자주 들러서 읽고 있습니다. 어제 쓰신 글이랑 이번에 보충하신 글도 보았습니다. 벌써 밤이라.. 좋은 밤 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되려나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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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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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1.

 

 

 

  트와일라잇, 언더월드, 블레이드,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흥행에는 모두 차이가 있고, 이 중에는 속편이 제작된 영화도 있지만 속편이 제작되지 않은 영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귀, 뱀파이어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지요. 흡혈귀라는 모티프만 가져온 등장인물이 있는가 하면, 나름의 원칙을 따라서 흡혈을 하는 그런 등장인물들도 있습니다. 위의 영화들 중에서는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컬렌가는 일종의 채식뱀파이어들로 구성되어있는데, 인간의 피를 빨지 않고 동물의 피로 그 욕구를 대신하지요. 블레이드의 주인공은 일종의 데이워커입니다. 이는 대낮을 걸을 수 있는 자, 라는 뜻인데, 원래 전승상에서 뱀파이어는 태양을 두려워하고 밤에 자신의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검을 휘둘러 뱀파이어의 비명을 쏟아내지요.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장르소설들, 판타지소설들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나옵니다.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이라는 소설에서는 결말 부분에서 흡혈귀들의 시조로 설정된 노스페라투를 부활시켜 주인공들과 적대시킵니다. 장르소설로 월야환담, 이라는 소설은 아예 흡혈귀 사냥꾼이 주인공이고,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흡혈귀들입니다. 흡혈귀의 불사성은 이런 소설들에서도 유지되어, 월야환담에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느라 지쳐 자신의 인격을 아예 바꿔서 로맨티스트로 살아가는 흡혈귀도 나오지요. 만화책에서도 우리는 흡혈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헬싱, 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에서 그 모티프를 따왔으며 (주인공 흡혈귀인 아카드Alucard는 드라큘라Dracula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요) 흡혈귀이고, 그것도 매우 강력하면서도 오래된 흡혈귀입니다. 이 만화에서의 아카드는 재로 태워도 부활하고, 심장을 부수어도 부활하며, 햇빛 아래에서도 당당히 걸어나갑니다. 기존의 흡혈귀 전승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지요. 이렇게 영화,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들이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는 기존의 전승을 파괴하기도 하고, 어떤 매체에서는 기존의 전승을 너무 엄격하게 지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들 모두 하나의 공통점은 가집니다. 그것은 바로 피, 기본적으로 피를 마셔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2.

 

 

 

  피가 생명의 근원으로 자리잡은 데에는 그 이면에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깔려있습니다. 기념비적인 저작인 황금가지, 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서의 각종 제전들에서 피의 이미지가 선명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아티스 제의인데, 식물신인 아티스는 매해 죽음을 맞이하고 매해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납니다. 그의 전승에 따르면, 어머니이자 애인인 대지모신 키벨레는 아티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까봐 미쳐버리게 만들고, 그 결과 아티스는 자신의 성기를 자르고 물푸레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후에 다시 부활하는데, 그에 따라 제의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은 매해 그의 제전에서 팔을 그어 피를 내고, 주위의 사제들과 함께 자신의 성기를 잘라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던집니다. 피는 광란을 가져오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해를 하고 성기를 잘라서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며 어느 집에든 그것을 마구 던집니다. 이 제의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피를 바쳤다는 점이고, 전승에 따라서 성기를 잘랐다는 것입니다. 성기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생식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 성기와 피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아티스를 매해 부활시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제의에서 현대 뱀파이어 영화의 특징인 '성적 긴장과 공포' 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기는 그야말로 욕망의 상징이지요. 피로 물든 잘려진 성기 이상으로 욕망과 공포를 잘 드러내는 상징물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요즘도 종종 원시부족을 여행할 때, 인육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으며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고대부족들은 인육을 먹고 상대의 피를 마셨습니다. 그들이 흡혈귀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상대의 피를 마시고 심장을 뜯어먹음으로서 상대의 강력한 힘이 본인들에게 흘러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미지는 북유럽 신화의 지크프리트와 파프니르와 관계에서도 변주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족은 희생 제물로 매년 한 명을 선택하여 제의의 날이 되면 그의 사지를 찢고 목을 벤 다음, 그 피를 짜내어 밭에 뿌리고, 그의 사체를 하나씩 떼어 집으로 가져가는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남은 부분은 갈아서 밭에다가 심기도 하지요. 이런 잔인한 의식은 그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피와 육체는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이 피를 대가로 소모된 힘을 회복하여 (젊음을 회복하여) 다음해에도 우리에게 풍년을 베풀어달라, 라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희생과 생명의 이미지들은 현대 종교에서도 남아있는데, 우리는 크리스트교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요, 축성한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데,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전승으로 볼 때, 일종의 희생제의의 상징이 그 속에 내재되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참조하면 육체의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라는 이미지를 피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3.

 

 

 

  이렇게 피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명력, 영혼원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통하여 젊음을 회복한다는 관념도 오랫동안 유지되어왔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피를 강탈하는 괴물이 나타나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모르는 것들이 정말 많았으며, 잘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인지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인지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고대인들의 사고를 추적해보면, 사람에게서 피가 흘러나가면 죽는다, 라는 사실에서 피가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여기게 되고, 그렇다면 이 피를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겠구나, 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피만 있으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겠구나, 라고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피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는 괴물, 뱀파이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고대인들의 전승에서는 사실 피만 엄밀히 분리되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괴물은 피와 살을 동시에 뜯어먹는 존재들이었고 (그 편이 훨씬 그로테스크하기에 공포감을 많이 주기도 합니다만) 이는 페르시아 전설에서의 시체를 뜯어먹는 괴물인 굴(Ghoul), 그리스의 반인반수인 라미아(Lamia)의 이미지로 드러납니다. 한동안 피와 살을 동시에 뜯어먹으려 무덤에서 부활해온 괴물들은 중세에 이르러 크리스트교의 전래와 함께 십자가를 들이밀면 무덤으로 사라진다, 심장에 말뚝을 박고 시체를 태워 재로 만들어야 된다, 등의 퇴치방법이 연구되어왔으며, 각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의 결합에 의하여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바로 살점을 먹기보다는 피만 빨아먹게 된 것이지요. 이는 중세에 유행한 흑사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흑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악마의 소행이다, 등의 가설을 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체부위가 어디 절단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죽음을 맞이하다니 말이지요. 그렇기에 살과 피를 동시에 물어뜯던 괴물에서부터 피만 흡혈하는 괴물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동시에 뜯어먹든, 피만 빨아먹든 어느 쪽이든 희생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당연했지요. 이는 다른 수많은 괴담들과 연관되어 밤거리를 걷는 사악한 괴물, 뱀파이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그들, 고대의 주민들이 만약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획득했었다면 괴물이 생겨났을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괴물은 결국에는 두려움과 무지의 산물입니다. 만약에 고대인들이 우리와 비슷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라미아나 서큐버스, 굴과 같은 괴물들은 자리를 잡기 어려웠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이들 괴물들은 그 생명력을 거의 잃은 것이지요. 물론 이 말이 현대에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무지는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고대의 괴물들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새로운 괴물들이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괴물들은 (앞서서 존재했던 괴물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다시금 소멸되고, 다시금 생성되는 과정을 반복할 것입니다.  

 

 

 

4.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고대의 괴물들이 인지에서 사라진다면 (현대에 이르러 몽마인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와 같은 괴물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요) 왜 아직까지 흡혈귀는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더 나아가 스크린을 장악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뱀파이어를 낳는데 중심역할을 맡았던,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뱀파이어와 한동안 공존의 길을 걷던 괴물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을 거의 소실합니다. 물론 뱀파이어라고 해서 현대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는 볼 수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뱀파이어는 여러 매체에서 주역을 맡거나 중심 캐릭터를 맡아서 활약해오고 있으며, 대중들의 관심에 호응하듯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장 위의 몽마,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와 비교해도 몽마가 중심되는 영화나 소설은 그리 많지 않고, 대중의 관심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인간형 악마인 몽마가 이러할진데, 인간과는 동떨어진 외모를 가진 키메라, 히드라와 같은 환상종들은 더 나쁜 상황에 놓여있겠지요. 이 책의 저자는 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대에서부터 뱀파이어의 연원을 조사해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바빌로니아의 릴리트와 굴, 라미아, 그리고 하피와 같은 여성형 악령들에서부터 그 기원을 확인하며, 중세를 거쳐서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흡혈귀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수많은 흡혈귀 문학이 있었지만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 괴테와 같은 대문호들도 흡혈귀에 관련된 소재를 바탕으로 흡혈귀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 중 흡혈귀에게 불멸의 생명을 안겨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입니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세세한 설정들, 그리고 당시의 탐정 소설의 영향과 심리, 정신병리학등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7년이라는 산고 끝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아직까지도 뱀파이어 문학의 고전이자 필수 참고서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대 대중문화에서의 흡혈귀들의 대부분의 설정은 이 드라큘라를 따르거나 혹은 이 드라큘라를 뒤집는데서 발전되어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라큘라의 줄거리는 너무 잘 알려져 있겠지만 굳이 조금 언급하자면,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체페슈 3세, 드라큘라가 이제 영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집을 마련하려고 조너선 하커를 불러들이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너선 하커는 그의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겨우 성에서 탈출하고, 자신의 약혼자 미나 하커가 드라큘라에게 물려 흡혈귀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반 헬싱 박사와 힘을 합쳐 결국 그를 물리치지요. 하지만 아무리 잘 쓴 문학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 문학작품의 캐릭터가 독자적인 생생한 생명력을 획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역사적 배경에 편입되고 (블라드 체페슈 3세는 실존인물이지요) 고대로부터의 전설에서 이끌어져나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뱀파이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기술의 발달이 작용합니다.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의 흐름 순서를 보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에 대한 설명 뒤에 이 드라큘라가 어떻게 영화화가 되었는가, 를 설명합니다. 만약에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인 '노스페라투 - 공포의 교향곡' 이 없었다면 뱀파이어가 지금 이렇게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 영화 자체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는 수많은 다른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낡은 전설에서 늙어가던 뱀파이어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합니다.

 

 

 

5.

 

 

  그렇다면 이렇게 깨어난 뱀파이어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사실 능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뱀파이어는 우리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보통 인간이 뱀파이어에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둘 다 동등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설령 아브라함 반 헬싱 박사라도 그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정신력이 있으니 당연한 말이겠지요. 하지만 뱀파이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지만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그 생명을 획득합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국 뱀파이어에 유머를 섞는 결과를 낳게 되고 더 나아가 희화화를 가져옵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설명하는데, 그 중 성숙한 방어기제로 유머와 승화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유머는 본인의 기분과 남의 기분을 동시에 배려하면서 자신이 할 말을 하는 그런 유형의 기제인데, 이를 좀 더 확대시켜서 살펴보면 이 뱀파이어의 경우에도 그런 일종의 정신적 방어 기제로 유머가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반복하자면 인간을 초월했다는 사실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사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결국 뱀파이어를 다루는 이야기에 웃음을 섞게 만들게 되고, 이는 뱀파이어 자체의 희화화를 낳게 되지요. 뱀파이어는 원래 없어, 라는 안도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뱀파이어와 관련된 긴장은 저것뿐만이 아닙니다. 좀 더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긴장이 그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과 공포 사이의 긴장입니다. 뱀파이어를 다룬 매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피를 빠는 것은 일종의 성적인 욕구와 마찬가지이다, 라는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성적욕망과 흡혈욕망을 동일시합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측면에서 볼 때 동일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화면에서 뱀파이어가 흡혈하는 장면을 보면서 화면 구도와 소품들을 통해 에로틱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대부분 흡혈은 중세의 문학작품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성간에 일어나며, 주로 일어나는 장소는 침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에로틱함에 취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조금이라도 더 피가 많이 빨리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될 테니 말입니다. 여기에 현대인들의 불안 심리와 맞물려 더욱더 뱀파이어를 다룬 매체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한동안 뱀파이어의 생명력은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더 매력적이고 다의적인 뱀파이어의 이야기들이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끝맺은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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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8-02 22:25   좋아요 0 | URL
참 이상하죠. 물론 뱀파이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뱀파이어에 대한 흥미를 멈출수가 없으니 말예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정말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하핫. 뱀파이어는 제게 참 흥미로운 존재에요.

가연 2012-08-03 05:22   좋아요 0 | URL
ㅎㅎ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면 없는 것과 큰 차이 없지 않을까요 ㅎㅎ 이렇게 적고 보니 마치 외계인같네요, 풋. 음.. 만약에 이들이 정말 숨어서 살기를 원해서ㅋㅋ 각종 매체에 나온 것 처럼 일반인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중이라면 그걸 존중해서.. 없다고 믿어주는것도.. 푸하하.

드림모노로그 2012-08-06 18:01   좋아요 0 | URL
아 저 이거 읽어야 하는데 뱀파이어라 잼 날 것 같았는데 ㅎㅎㅎ 의외로 안 읽혀지대요 푸하하 ~ 반 쯤 읽고 덮었는데 ㅎㅎ 어서 읽고 리뷰 올려야겠어요 ^^

가연 2012-08-09 22:09   좋아요 0 | URL
ㅎㅎ 방금 리뷰보았어요, 풋.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8-26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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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1994년도에 나온 영화 레옹의 OST로 쓰인 Shape of my heart를 부른 것으로 유명한 스팅은 그 외에도 숱한 히트곡들을 불렀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곡이 바로 Englishman in New York입니다. 뉴욕에 따로 떨어져 입에 맞지 않는 뉴욕음식을 먹고, 눈에 익지 않은 뉴욕풍경을 보며 그 거리를 걸어가는 영국신사의 모습을 서정적인 음률로 잘 그려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만약에 뉴욕이 아니라 다른 도시였다면 그 영국신사가 그만큼이나 헤맸을까요? 뉴욕이 그만큼이나 다양한 사람이 섞이고, 발전이 빠른 도시였기에 더욱 대비효과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책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 스팅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책의 서두는 갓 열여덟이 된 저자, 피터 버거가 오스트리아에서 (스팅의 노래와는 다르게 영국신사는 아니었지만) ‘뉴욕’ 으로 건너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갓 열여덟이 된 피터 버거는 ‘종교적 열정에 불타고’ 있었기에 목사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야간에 학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을 골라야만 했었고, 결국 사회 조사 뉴스쿨, 이라는 곳에 등록하여 강의를 듣게 되지요. 그때부터 그의 좌충우돌 사회탐방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미국 사회학’ 을 배우는 줄 알았다고 푸념하는데, 사실 그의 푸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닌 것이, 뉴욕은 당시에 미국은 미국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세계시민주의’ 를 습득할 수 있는 장소였고 일종의 근대화의 성소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의 초기 지적 여정에서 이 ‘뉴욕’ 과 ‘뉴욕식 교육’ 이 미친 영향은 그의 반생을 걸쳐 지속됩니다.

 

이 뉴욕, 이라는 도시와 함께 피터 버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뉴스쿨에서 배운 강의였습니다. 당시 뉴스쿨에서는 일종의 삼총사, 라고 불릴만한 세 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알베르트 잘로몬, 알프레트 쉬츠, 카를 마이어가 바로 그들이었지요. 그들로부터 그가 영향을 특히 받은 것은 ‘일상생활에서 지식으로 통하는 모든 것을 다루어야 지식사회학이다’ 와 같은 명제와, ‘일상생활이라는 일차적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넘어가는 복수 현실’ 의 개념과 같은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깊게 영향을 받은 것은 ‘막스 베버’ 적 관점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것이었지요. 그가 베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위의 세 교수들 중에서도 특히 카를 마이어였는데, 카를 마이어는 전적으로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며 현재에도 잘 알려진 카리스마의 일상화와 같은 개념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뉴욕과 막스 베버. 자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학자로서의 이력의 궤적을 쫓아가는 이 책의 근원에는 위의 두 존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피터 버거의 지적 이력에 마지막으로 영향을 끼친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 이지요. 앞서 피터 버거는 미국으로 건너올 때 ‘종교적 열정에 불타있었다’ 고 했었지요. 원래 그는 루터교 목사를 하고 싶었고 신학대학원까지 진학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그만두고 사회학자가 되고 말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거나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곳곳에서는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잘 드러납니다. 당장 이 책의 원제에 쓰인 Accidental Sociologist라는 단어만 보아도 그가 사회학자와 목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지요. Accidental, 곧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말은 사회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혹은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밟아나갔다면 자신은 신학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테니 말입니다.

 

 

 

결국 그의 지적 이력은 위의 그림과 같이 세 부분의 교집합들로 표현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알아낸다면, 그 사람이 지금껏 거쳐 온 여정과 앞으로의 행로는 그 기본적인 요소들의 응축이거나 분리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물론 한사람의 삶이 꼭 그렇게 수학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몇 번이고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다’ 혹은 ‘미국이라서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와 같은 언급을 통하여 자신의 생의 불확정요소들을 털어놓지요. 그러나 그런 불확정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삶의 풍랑이 거치더라도 등대의 불빛을 목표로 하는 (나아갈 곳이 있는) 배는 항상 희망을 품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버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위의 세 개의 구성요소들로 인하여 발생한 목표들, 그의 사회학적인 관심이 그의 지적 여로를 이끌게 됩니다. 위의 다이어그램을 봅시다. A에는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종교와 뉴욕의 교집합을 살펴보면, 뉴욕의 다양한 종교들, 오순절파나 루터교 등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과 맞물려 뒤에 피터 버거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그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 때문에) 크리스트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 등 셈족 계통의 종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게 되었지요. 이는 이후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이분법의 폐해를 살피게 된 것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B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카를 마이어, 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그가 다양한 종교를 접할 때 항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비판 준거로 삼는 것은 바로 막스 베버였습니다. 막스 베버 본인도 종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파와 교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지요. 그 뿐만 아니라 ‘종교는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전환시킨다’ 라는 명제 아래에 종교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C에는 뉴욕의 다원성과 막스 베버와의 공통점에 어울릴만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뉴욕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에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그리고 중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 그리고 다시 미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요. 물론 그의 여행에 한계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갈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을 들르는 경우가 많지요. 결국 다녀본 곳만 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정말 내밀한 곳을 들르기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사회학자란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가장 가까운 유곽을 찾아가는 데 백만 달러 기부금이 필요한 사람’ 이기에 (이 말은 곧, 기부금이 있다면 소홀히 넘길만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평소라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 들르지 못했을 유곽까지도 찾아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까지는 훑지 못했더라도 대략적 그림을 잡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런 다원적인 모습을 막스 베버와 통합시켜서 근대화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킵니다. 그는 수많은 나라들의 정치체제와 사회적 구조를 살펴본 결과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나마 적합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모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 세 개의 원이 동시에 만나는 가장 한 가운데의 빈칸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 이라고 말이지요.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에서 가상의 승객들과 잡담을 나누었듯이 말이지요. 거기엔 사람들이 없잖아, 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수많은 문제들과 부조리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고, 함부로 눈감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는 것,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결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책 군데군데 드러난 유머러스한 문체는 이것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읽기를 방해하는 부분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저자 스스로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모두 잘라내고, 자신이 어떤 대학을 다녔고, 어떤 기관에서 연구를 했느냐, 와 같은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부분만을 쫓아갑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만한 사항을 ‘언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생략해버리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것이지요. 특히나, 그가 왜 사회학자를 택했는가, 에 대한 이유는 자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예의 여기에서 언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같은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대화주제가 옮겨지듯,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군데군데 자신의 지적 이력과는 크게 상관없는 부분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고는 다시금 적절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끊어버립니다. 지적 모험담, 이라는 부제가 붙듯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기에 딱딱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부분마저 (그것도 앞서 언급해두고) 생략한다는 것은 몰입에 방해를 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부분뿐만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어 좀 불친절한 면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연구결과를 모두 다 알고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책들을 정말 많이 언급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맛만 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지요. 그러고는 그 내용을 적용한 사회 현상을 언급합니다. 지적 여력을 되돌아보는 책으로는 맛만 보는 수준에서 책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옳지만, 그 바로 뒤에 그 내용을 적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적어도 독자가 그 내용을 따라갈 정도로는 설명을 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저자 피터 버거는 사회학으로의 초대, 성스러운 천개, 신앙의 문제, 자본주의 혁명, 의심에 대한 옹호 등 수많은 책을 썼지만, 그 책들을 다 읽어본 독자는 사회학을 깊이 전공하거나,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드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의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모습을 책 전반적으로 보여주는데, 정작 그 막스 베버의 이론과 개념들, ‘카리스마의 일상화’ 등과 같은 개념이 어떤 의미인지 적절하게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의 이념에의 편향,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에 대한 주장도 문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책 중반부부터 나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옹호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따라 읽어가는 입장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없이 제시되어 갑작스럽지요.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비행기를 타는데 조종사가 아프리카의 시간 개념으로 비행기를 조종한다면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다.’ 이 말은 아프리카의 시간개념과 서구의 시간개념을 비교하면서,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이 훨씬 느슨하고 덜 정밀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도출된 말인데, 책에서는 여기에 대해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는 저런 형태의 주장을 바탕으로 근대화 논리를 이끌어내고, 그 근대화 논리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내지만, 이는 근본 명제가 엄밀하지 않다는 약점을 가집니다. 실제로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편향을 가지게 된 원인은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만으로 볼 때에는 그 이상 다른 원인을 이끌어내기는 힘들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을 제쳐두고라도, 그의 ‘지적’ 편력들에 대하여 한 쪽 눈을 감고 읽는다면, 그의 발자취를 훑어가는 일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인문학의 경계 안에 있는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회과학은 인간을 살피는 학문이라고 무방할 테고, 사회현상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일 테니 말입니다. 조사를 하던 연구를 하던 그 기저에는 이 집단의 이 사람의 삶의 환경과 여정을 살피는 것이 깔려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 항구적이지 않고, 도리어 변덕스러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것들이지요. 저자는 그런 ‘인간 세상에 대한 매혹’을 느꼈고 우리에게 그 매혹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기에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 자체도 저자 자신의 사회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내려진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낯설음을 뒤로 하고 연구에 뛰어든 이래 아직도 ‘팔팔한’ 그의 학문적 여정이,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 시민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디로 향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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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48   좋아요 0 | URL
저 세개의 원이 이 책을 너무나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연 2012-07-24 22:13   좋아요 0 | URL
어이쿠..ㅠ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죠. 일개님의 리뷰도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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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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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야기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비의와 지식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남은 것은 영적인 존재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비참해하며 슬픔에 빠져있는데, 그런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다가온다. 그들은 바로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계약의 조건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음과 같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모든 조력을 아끼지 않는 대신, 파우스트가 세상에 대한 갈구를 멈추게 되면, 단 한 번이라도 현실에 만족하게 된다면 ‘시간아 멈추어라.’ 라고 외치게 되며, 동시에 그의 영혼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으로 다시 나이를 되돌리게 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의 사랑을 거쳐서 헬레네와 결혼을 하는 등 향락에 젖어 살지만, 결국에는 어느 황제의 궁전에서 자신이 할 일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토지를 개척하여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고, 결국 그 계획을 성취시키게 된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하고 만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악마는 계약대로 파우스트가 현실의 삶에 만족했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영혼을 뽑아가려고 하지만, 신은 그가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자신의 행동에 함축하며 그의 영혼을 승천시킨다.

 

 

 

***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어야 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독서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부터 정의를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내어야 할 지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항상 내가 독서를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은 ‘광기’와 ‘죽음’ 에 대한 감정이다. 밤에 어떤 책이든, 그것이 문학이든 인문학 서적이든 그 어떤 서적이든, 펴놓고 읽고 있을 때 나는 과장 같지만 진실로 ‘광기’를 먼저 떠올리게 되고, 책을 다 읽은 순간 나는 ‘죽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하이데거처럼 필멸자로서의 나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고, 책 깊숙한 곳에서 인식의 한계와 무의식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한계 너머는 오직 깜깜할 뿐이고, 인간 존재에 있어서 깜깜함은 오직 죽음뿐이다. 우리가 눈을 영원히 감고 있을 때 그 어떤 색채의 빛도 우리의 뇌에 도달하지 못한다.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광기를 느낄 뿐이다. 어떠한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의 뇌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망막에 투사한다. 당장 어떠한 언어도 입에 품지 말고 자신의 머릿속을 살펴보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들, 혹은 이미지조차도 되지 못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 들이 과연 제대로 된 형상을 안고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형상들은 수많은 감정과, 그 감정을 근원으로 하는 욕망으로 투사되어 광기에 일그러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크든 작든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아무 감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아무런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죽음’ 뿐이다. 독서를 통해서 이런 양 극단, 욕망의 극단인 광기와 그 대척점으로서의 죽음을 항상 느끼는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다시금 책 읽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무래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책을 읽을 때에는 욕망의 극의로서의 광기를 느낄지라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사상가가 쓴 책 치고는 상당히 쉬운 언어로 구성되어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한 점이지만, 그 쉬운 언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히 깊은 생각을 요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은 닷새 동안의 밤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세라자드의 천일야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물론 차이점이 더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한데, 그것은 천일야화든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든 하나의 주제를 몇 번이고 변주한다는 점이다. 천일야화가 알라는 위대하시다, 라는 내용을 기본적으로 모든 이야기에서 그 바탕에 연원으로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혁명을 한다는 것이다.’ 가 그 기원이다. 여기에서부터 수많은 논리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혁명은 쉽게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혁명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밝혔다시피, 그리고 내가 느끼다시피 책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 무의식에 접속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 무의식의 광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 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이루기 전에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책들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나감으로써’ 혁명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예로 루터와 무함마드를 들어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루터는 성서라는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나감으로써 가톨릭에서 벗어나 하나의 종파를 설립하였고 (그 이면에 사회학적인 다른 이해관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문맹이었기에 신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루터와 무함마드는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았다’ 라는 점이리라. 앞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이 이상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이들은 정신 이상의 증후를 보이지 않는다니.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이들이 읽은 책, 그러니깐 성서나 (초기의 신의 언어로서의) 코란은 그 텍스트를 그대로 접해도 광기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 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거나, 이들은 광기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거나 취해졌었다, 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혹은 대담한 이야기이지만 둘 다 사실 광기에 이미 휩싸여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를 세운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고, 이는 니체가 말했다시피 ‘이미 광기에 젖어있는’ 행위이기에 말이다. 꿈에 취해있지 않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현실이 아닌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광기에 잡혀있지 않다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꿈속에서 살아간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행동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어떻게 종교를 만들어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겠는가. 셋 중 어떤 가설이 옳을지는 당장 알 수 없다. 어쩌면 셋 다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수도 있고, 어느 것도 해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루터의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루터가 이야기한 부분을 인용한다. 당시 루터가 살았던 현실은 교회서 배척당하면 수도사로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루터는 당당하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이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결국 현실에서 배척당하고 만 것이다. 현실에서 배척당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꿈으로 향할 뿐이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내가 미친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꿈 속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루터는 이야기한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은 광기의 유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의 광기의 유산이며, 이 독서의 끝남은 광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의 붕괴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깜깜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도중에, 이 책이, 하나의 광기가 얼마나 남았는가, 를 몇 장 남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헤아리며 몇 번이고 앞서 말한 파우스트처럼 되뇌는 것이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라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몇 번이고 중첩되어 생을 붙잡고 있기에 외친 것이지만, 나로서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조력자도 없을뿐더러, 파우스트처럼 모든 학문의 극의에 달하지도 못했고, 그처럼 모든 향락도 누리지 못했기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생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외치는 것이다. 서로 다를 것 같지만 둘 다 생을 붙잡는 의미에서는 나와 파우스트 모두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리라. 그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였다면, 나 또한 책읽기를 통해 추구하는 이상은 그에 뒤지지않는다. 하지만 그 붙잡는 행위는 나에게는 이윽고 덧없이 끝나게 되고 (나에게는 파우스트의 ‘신’ 이 없다.) 결국 깜깜함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은 나에게 하나의 의문점을 던져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여기,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책 안에서 무의식과 욕망을, 그리고 더 나아가 생의 광기를 느낀다면, 책 밖의 현실은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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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야기는 카우보이 비밥으로 마무리된다. 카우보이 비밥, 이라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들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낳은 애니메이션인데, 우리 나라에서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박완규, 그렇다 나가수의 그 박완규, 가 자신의 대표곡이라면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년의 사랑을 부를 때, 그 뮤직비디오로 이 애니메이션을 편집해 사용한 것 때문이다. 정말 오래 전에 나왔지만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간단히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상금 사냥꾼인 스파이크 슈피겔은 비밥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제트나 페이와 같은 동료와 함께 현상범을 사냥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어두웠는데, 원래 어느 조직에 속해 있던 그는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같은 조직원인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원래 도망치기로 했었다. 하지만 조직은 배신하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조직원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부한다. 결국 그들은 엇갈리게 되고 후에 다시금 만나게 되지만, 결국 그들은 달아나지 못하고 여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사는 동안 스파이크는 자신의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다. 꿈이라면 죽어도 좋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목숨을 내던지려고 든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는 것을 보고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게 된다. 이윽고 꿈에서 깨는 것이다. 그때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샌가 깨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당장의 독서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을 때 삶을 느끼는 나는, 그 세계에 침잠하면 침잠할수록 현실에서는 한편으로는 유리되는 기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달리고 있는데 나는, 그렇다,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혼자서 멈춰서 주저앉아있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리어 책읽기를 중단한 현실은 나에게 깜깜한 이미지만을 비추고, 이는 항상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과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그 죽음을 도리어 외면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항상 직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것이며 이윽고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도, 혹은 위험한 행동도 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으로 여겨지니까.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에서는 독서를 일종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꿈을 꾸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꿈은 언제 나타나는가? 잠을 자고 있을 때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꿈만 꿀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꿈에서 깨어야만 하고, 꿈의 단초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진행시키고 싶을 때 책을 읽는다. 잠에서 깨어 책을 읽고 혁명의 단초를 붙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금 잠에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로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꿈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신의 생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회피하고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현실을 꿈처럼 바꾸기 위해서 들고 일어나는 ‘혁명’ 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앞서 루터나 무함마드 정도가 그런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아니, 380만년이나 남았는데 혁명은 그 긴 시간 동안 언제든지 일어나지 않겠느냐’ 라고. 그렇다, 분명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루터나 무함마드, 니체 등 그들과 비등한, 그리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저 말은 동시에 380만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독서는 광기와 함께 이런 것을 깨달을 만큼의 지혜를 동시에 나에게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샌가 깨버렸다, 라고 혼잣말을 할 것이다, 380만년의 영원의 그 언젠가.

 

 

 

 

 

 

 

 

 

p. s. 아주 아방가르드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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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7-15 04: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첫째날, 읽고 잠시 덮어두었는데, 아주 생각할 것들이 많아요. 가연님의 리뷰는 책 다 보고 보려고 일단 서두만 읽고 스킵해뒀는데,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책을 마저 읽어야겠네요.

가연 2012-07-16 15:00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은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 결과물이 이런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읽을때부터 하고 싶었던, 할말은 다 했으니 마음은 편하네요. 사실 엄밀하지 않다고 스스로 여겨지던 부분이 눈에 좀 걸리긴 했지만..ㅎㅎ 특히 넷째날, 풋. 다음에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네요.

꽃도둑 2012-07-21 11:00   좋아요 0 | URL
가연 대장님! 며칠 동안 심하게 아팠습니다.(쿨럭쿨럭~)
아직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요..리뷰를 늦어도 월요일까지는 올릴게요,,,,^^

가연 2012-07-23 17:04   좋아요 0 | URL
지금은 좀 나으세요? 네, 혹시 힘드실 것 같으면 연장 메일이나 댓글 남겨주세요.

꽃도둑 2012-07-25 23:43   좋아요 0 | URL
낮자마자 여름휴가 여행다녀왔어요. 서재도 오늘에서야 들어왔네요.
리뷰가 늦었네요,,,,암튼 짧게라도 써서 올려놨습니다...고맙습니다^^

가연 2012-07-28 06:18   좋아요 0 | URL
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13-08-10 01:41   좋아요 0 | URL
이 책 제목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덧없음을 느낍니다 그게 무엇인가 했더니 '죽음'이었나 보네요 가끔은 그 말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책 속에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되겠구나 한 거죠(어쩌면 꼭 그런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광기는...

혁명은 꿈을 꾸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이 낱말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거의 저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무엇을 바꿔야 한다고 여긴 적이 없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고 할까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군요^^


희선

가연 2013-08-11 20:40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특이합니다. 저도 덧없다, 라는 감정을 정말 많이 느끼는데, 사실 죽음, 이라는 것이 항상 근처에 있다, 라고 책이 알려주는 것 같다, 라는 생각도 가끔씩 해봅니다만.. 그야말로 우스개소리같네요,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