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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노파심에서 쓰는 말.

원래 글을 쓰면서 각주를 잘 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각주를 조금 달아야 될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니 실수가 많을 것 같지만 너그러히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대상이 되는 책이 아닌 다른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듯 하니 읽기 전에 먼저 이 글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95179 을 참조하라.

 

 

 

  SF의 3대 거장을 손꼽아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최근에 출간된 파운데이션의 저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필두로 로버트 A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아서 클라크는 SF작가의 명성 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그의 예견, 다시 말해서 과학 3법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과학 3법칙은 다음과 같다. (의역을 거쳤다.)

 

1. 평생을 연구하는데 바친 노과학자가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고 말한 경우, 그의 말은 거의 분명히 옳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면, 그 말은 높은 확률로 그른 말이다.

 

2. 가능성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 불가능의 영역으로 조금 더 뛰어드는 것이다.

 

3.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법칙은 아마 3번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이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과거로 이동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과거인들의 눈에는 휴대폰이 마치 신의 물건처럼 보일 것이고 -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거나, 소리가 들려온다거나 - 그 신의 물건을 조종하는 우리는 일종의 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혹은 마법사로 몰려 당장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쪽이든, 그만큼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힘은 중간과정을 생략한다면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마법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서 양자전송장치라도 들고 온다면, 우리 또한 마법의 상자로 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3번 법칙은 과학기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약간만 고친다면 말이다.

 

3.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물론 이 말에 대하여 수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과학과 마법의 근연관계에 비하여, 몽상과 이론의 근연관계가 훨씬 더 멀지 않는가, 라는 반론에서부터 몽상을 어떻게 이론과 비교하느냐,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철학 이론들을 몽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인가, 등으로 말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자면, 먼저 나는 모든 인문학적 이론을 몽상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다. 정말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비 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기는 매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 뿐만이 아니라, 몽상에서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뛰어난 철학자 루소의 경우를 보자. 그의 저서 중 하나는 '고독한 몽상자의 산책' 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그에게는 몽상이 - 본인이 책에서 밝히듯 - 창조의 원천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몽상으로 치부된 이론도 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보기에는 (물론 굳이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헤겔의 이론은 무슨 말도 안되는 망상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이 몽상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감히 말하건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적절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신분석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아니다. 적절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세운 네 가지 기본 명제(주1)를 검토해보자. 첫 번째 명제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이다. 무의식에 대한 정의는 프로이트 본인도 확실히 정립하지를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의 경계는 설정해두었다. 바로 무의식은 쾌락 원칙을 따르며, 의식될 수 없는 가장 심층에 숨어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프로이트는 꿈을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임상적 근거에 의하면 꿈은 압축과 전치, 상징화를 통하여 무의식을 표출시키며, 결국 정신적으로 안정화를 찾는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의식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단순히 나한테는 무의식이라는 게 있어, 너도 스스로 알잖아? 라는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자신에 대한 심오하고 '결코 되풀이 된 적은 없는' 통찰(주2)을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개인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절차를 밟아서 재현되어져야만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 당장 이번의 CERN의 광속을 넘는 속도로 측정되었다던 중성미자, 연구를 보라 : 결국 재현되지 않아서 부정되었다 - 그런 재현성을 부정한다면 그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있겠는가. 특히 임상경험으로 정립되었다는 말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두 번째 명제를 보자. 두 번째 명제는 정신현상에는 우연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취하는 어떤 정신적 과정에서는 반드시 무의식적인 동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사례를 우리는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가장 즐겨 사용하였던 사례인데, 당시에 정족수가 충족되었으므로 폐회를 선언한다, 라고 오스트리아 하원 의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프로이트는 이렇게 해석한다. 의장은 당시 안건을 보고, 어차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텐데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 라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말실수를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심지어 단순한 말실수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동기가 존재한다, 라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기본 명제 중 하나다.

 

이 경우를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반론할 수 있다. 위의 사례를 살펴보면, 의장의 동기를 프로이트는 '추측하고 있다.' 정말 의장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만약에 의장이 '아니, 나는 그런 생각이 조금도 없다' 라고 부정한다면 저 명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의장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이 말실수를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경우에서도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본인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 혹은 '깨닫고 있어도 사회적 체면때문에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프로이트의 해석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미셸 옹프레가 우상의 추락, 에서 말한대로,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세 번째 명제는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다, 라는 것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현재 가지고 있는 병증은 어려서 겪은 경험때문에 생긴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례 중 하나를 들면 카타리나의 사례,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카타리나는 종종 가슴이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프로이트는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한다. 카타리나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몸 위로 올라갔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몰랐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는 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외상적 경험이 인식되지도, 표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는 육체이다.'(주3) 그 어릴 적 상처가 현재의 답답함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명제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환자의 병이 정말 심인성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심인성이 아니라면 저런 진단은 위험할 수 있다. 답답하다Dyspnea는 여러가지 기질적 원인으로 생길 수 있다. 단순한 소화불량에서부터 협심증에 이르기까지 답답하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수많은 병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카타리나가 협심증이라도 앓고 있었다면, 저런 치료로 병이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치료되었으니 저 사례가 옳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정말로 치료되었는지, 그 후에 카타리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디에서도 알 수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프로이트 사례 중 유명한 이르마의 꿈, 이라는 사례가 있다. 그 사례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에마 에크슈타인은 과다출혈로 처음 프로이트를 찾았는데, 프로이트는 이 과다출혈이 정신적 요인때문에 생겼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과다출혈은 자궁근종때문에 발생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주4) 또한 이후에 정신적 요인을 바로잡기 위하여 받은 수술 이후에 썩은 냄새를 맡게 되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마저도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술 이후에 거즈가 그대로 수술부위에 남아서 썩었기 때문에 냄새가 난 것이었다.

 

네 번째 명제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모든 노력을 한다, 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먹을 것이 넘치고, 온갖 오감을 충족시키는 그런 곳인데 비하여 다른 한 쪽은 도리어 수많은 방해요인들이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그런데 이 문장은 단순히 이런 식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정신에 걸리는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그 행동원리가 정해진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앞서의 의미보다 좀 더 심화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리학에서는 Fight or Flight라고 한다.(주5) 어떤 장애물을 만난 경우 우리 몸에서는 교감신경이 작동할 것인지를 빠르게 결정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 싸울 것인지, 자리를 뜰 것인지를 결정하여야만 한다. 이 모든게 사실상 정신에 걸리는 부담이다. 부담이라는 말을 정신의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에는 저장된 에너지들이 소모되는 방향으로 우리 몸이 작동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부담이 없는 쪽이라면 우리 정신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이 명제는 가장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예화를 하나 가져와보자. 칸트가 만든 것인데,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남자인데, 그 여성과 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 기회를 소모하고 나면 당신은 바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과연 당신은 그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인가? 칸트는 절대 그럴리 없다고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버리고 쾌락을 선택한다니. 삶과 죽음 중 어떤 것이 쾌락인가? 어떤 것이 고통인가? 삶이 쾌락이고 죽음이 고통이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쾌락과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쾌락 중 어떤 쾌락이 더 클 것인가? 삶이라는 쾌락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누가 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겠는가?

 

여기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라캉의 이야기를 가져와보자. 라캉은 이야기한다. 여성과 보내는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성적인 쾌락이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쾌락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네 번째 명제가 부정될 수도 있고, 유지될 수가 있다. 삶이라는 것이 훨씬 성적인 쾌락에 비하여 더 중요하다면 네 번째 명제는 부정될 수 있다.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적인 에너지, 좁은 리비도 개념만 본다면 이 명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통찰 중 가장 핵심적이자 뛰어난 통찰이라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무의식, 개념의 발견이다. 물론 프로이트만 이런 무의식 개념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기본 전제들 전부가 모두 그 이전세대에서부터 예견되어진 것이다. 니체와 같은 사람은 그것Es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무의식의 준비를 예견하였다. 니체 뿐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자신 안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지칭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무언가 제어가 되지 않는 힘' 이라는 길고 긴 명칭을 읊어야만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준 결과 우리는 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분명 프로이트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의 명제들을 모두 충족하는 무의식은 일종의 완전기억에 가깝다. 무의식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정말 짧은 시간 경험한 것이라도 모조리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어있고, 우리는 다만 그것을 꺼낼 방법을 모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의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볼때는 우리의 기억은 조작되기도 쉽고 잊기도 쉽고, 잘못된 사실을 재구성하기도 쉽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물질의 형태, 현대 의학에서는 기억을 측두엽과 해마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주6), 로 보존되는 한, 기질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반드시 기억에도 혼란이 온다. 작화증confabulation, 이라는 병이 왜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환자가 자유연상으로 떠올린 기억들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걸까?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절대적인 방법이 없는 한, 그 기억들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왜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것들은 모두 성, 폭력 등에 연관된 것일까? 사랑, 과 같은 감정이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일은 없을까? 누가 나에게 너무 사랑을 보였었는데, 예를 들어 할머니가 나에게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었는데, 그 경험이 나에게 신경증을 가져와주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까?

 

큰 틀에서 볼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론은 위와 같이 프로이트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 라는 점과 창시자인 프로이트 본인에 대한 비판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론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평전,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 인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을 구해준 세 책을 언급하면서, 그 중 하나를 이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3가지 에세이' 로 들었다. 그 책이 자신을 미망에서부터 빠져나오게 만들어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호의적인 이야기도 잠시, 이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그 실체를 명확히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판을 시작한다. 이런 태도는 얼핏보면 미셸 옹프레가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니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입장을 선회하여 잘못을 논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상의 추락, 이라는 제목에서 미루어볼때, 분명 미셸 옹프레의 심정 중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었으리라. 어느 누구든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면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잘못으로 뒤덮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두 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첫 번째로는 부정이다. 아니야,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 라고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비판 혹은 비난이다. 자신이 그때동안 옹호해온 것을 모조리 부정해버리고 우상화하던 존재에게 강하게 비난과 비판을 퍼붓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의 이 우상의 추락, 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입장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문체가 거칠고 자료를 지나치게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셸 옹프레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닌 프로이트 개인의 철학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서문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스피노자, 니체, 플라톤, 데카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의 이론등과 같이 개인적인 시각에서 전체를 바라보려고 하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미셸 옹프레의 목적이 결코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없애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지나친 확대 및 프로이트의 우상화, 그리고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논박하는데 집중된다.

 

먼저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저자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분석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셸 옹프레의 관점에서 볼때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실제로 프로이트가 그들을 치료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안나 O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에 의하면(주7) 치료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발표되었으며 도라는 치료를 받은 후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심지어 치료가 실패한 도라마저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해석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상화된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환자들을 끼워맞추는 사람이었고, 그가 일시적으로라도 사람들을 낫게 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최근의 논문에 따르면(주8) 1998년에서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요법Pschotherapy을 단독으로 시행하는 경우는 15.9%에서 10.5%로 줄어들었고, 약물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44.1%에서 57.4%로 늘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정신요법이 정신분석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단기 역동정신치료 등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감안할 경우,(주9) 정신분석 자체는 거의 줄어들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피터 게이는 자신의 프로이트 평전에서 왜 프로이트의 학문만이 그의 개인적 일들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묻는다.(주10) 그가 역설한대로, 어느 누구도 뉴턴이나 다윈, 베토벤 등이 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작업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뉴턴은 사실 연금술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뉴턴의 물품을 구입한 뒤 검토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미적분과 물리학이 마술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왜 프로이트의 학문은 프로이트 개인적 일화를 바탕으로 비난과 비판을 받는가? 학문이라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은가? 피터 게이의 그런 말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뉴턴이나 다윈처럼 과학도 아니고, 베토벤처럼 예술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들을 생리학에서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주11)처럼 평생 자신의 학문이 과학에서 출발하였고 과학으로 인정받기를 바랬었으며, 자신의 저서에서는 마치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남긴 말처럼 언젠가 새로운 화학물질 등이 발견되면 자신의 이론이 완전히 변혁을 거칠 거라는 이야기도 남겼다. 하지만 2013년인 오늘이 될때까지도 아직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고 보기에는 단단한 반석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논문을 검색해보면 예술 비평분야에나 쓰이고 있고, 임상적 치료를 알리는 논문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종교의 기원, 부분에서 토템과 터부, 로 알려진 소논문인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폐기된 학설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가져온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사실 상충되는 면이 있다. 용불용설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옹호하는 이론인데, 실제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즉, 수만년 전에 치른 선사시대의 의식이 그대로 유전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있을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같은 성을 미워하고 다른 성을 따르는 - 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컴플렉스를 실제로 실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그 선사시대에서 토템을 설명할때에는 아들들이 같은 성인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아들들이 죽이려는 마음을 품더라도 실제로 '죽여서는 안된다.' 이는 프로이트 스스로의 말과도 어긋나는 부분이며, 비단 미셸 옹프레 뿐만이 아니라 그의 평전을 쓴 피터 게이도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요소를 가진 과학적 연구방법을 따르는 학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것들은 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을 언급하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에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주12)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적어도 논리학이라는 틀에서는 매우 강력한 도구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쌓아올려져야만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학문에서는 자기 언급은 치명적이다. 논리적인 부분을 모두 빼고 생각해보더라도 이 문제는 표현을 달리하여 그대로 남는다. 자기 언급을 하는 학문이라면 자기 자신의 일화를 그 전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화가 엉망이라면, (인간의 신경증을 다루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이 그 근거를 인간의 신경증에 두고 있다면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 일화들을 전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피터 게이의 질문과 상충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프로이트의 개인적 일화가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을 예술이나 철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예술에 대한 비평에서 정신분석학이 활동할 수는 없을까? 이는 제법 적절한 것 같다. 김서영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모세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평을 언급하면서 비록 브레머의 비판 - 프로이트가 조각이 나타내려고 하는 성경에서의 서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등 - 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분석이 의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머 본인부터가 프로이트의 방법을 차용하였다는 것이다.(주13) 그의 비판을 통하여 도리어 정답이 해체되고, 다시 한계를 넘어갈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볼때, 예술 작품의 비평에 있어서 그 예술 작품에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깊은 무엇인가를 끄집어 낼 때 - 김서영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틀을 전복시키는 해체적 비평' - 정신분석학이라는 도구가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미셸 옹프레 본인도 자신의 저서에서는 브레머의 프로이트 모세상 해석에 대한 비판, 만 소개할 뿐 깊이 다루고 있지 않다. 결국 굳이 정신분석학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예술 비평이나, 더 넓게 보아서 철학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조금 뒤틀면 결국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이론처럼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해석하는가, 에 대한 의의만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애초에 미셸 옹프레에 따르면 이런 관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가 볼때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계보를 잇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근거가 있어보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그저 개인이 세계를 해석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독창적이라는 말도 사실 옳지는 않다. 미셸 옹프레는 이 부분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무의식은 마치 앞서 말했듯 완전 기억을 가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 기억이라면 본인이 읽은 수많은 책들은 모두 무의식 속에 다 저장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주14)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그 수많은 책들이 무의식에서 저장되어있다가 프로이트가 이론을 세울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독창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앞서 무의식에 대한 명제를 설명할 때, 니체 등이 이미 무의식이라는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그런 비슷한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미셸 옹프레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셸 옹프레의 말이 다 맞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저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면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재수없는 것 같지?"

 

왜 이런 말을 내뱉게 만들까? 추측이지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는 미셸 옹프레가 이 책 전반적으로 현상학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무의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애초에 접근 방식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셸 옹프레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실체, 를 확인하려할때는 가장 적절한 연구방법이 현상학적인 연구방법일수도 있다. 의식의 작용을 긍정하고, 의식의 지향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현상학적인 판단중지를 취한다. 이런 현상학적인 방법은 무의식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현상학, 이보다 더 실체를 꿰뚫어보기 좋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평전으로 쓰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 책은 평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에는 소홀해졌으며, 평도 비판에 집중한 나머지 성과에는 눈을 돌렸다. 결국 이런 형식은 현상학적인 방법을 빌려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복수 -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에 대한 - 를 정당화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두 번째는 좀 더 직접적인 이유인데, 미셸 옹프레의 태도는 이런 태도와 비슷하다. 거칠게 예를 들자면 A가 맞춤식 양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B가 그 사람이 입은 옷이 그 사람 본인에게 딱 맞는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맞춤식 양복을 입었으니 당연히 양복이 A의 몸에 딱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비판을 하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A를 프로이트라고 두고 B를 미셸 옹프레라고 두자. 미셸 옹프레는 서문에서부터 책의 끝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학이며, 개인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니체의 말을 변용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어둔다. 진정한 정신분석학자 - 프로이트주의자 - 는 한 명이었고, 지금은 없다고 말이다. (니체의 원문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한 명 - 예수 - 이었고, 지금은 없다, 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개인의 철학이라면, 그 개인에게는 들어맞는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철학을 가지고 개인에게 들어맞으면 들어맞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 비판의 자세일까? 아무리 몽상에 가깝더라도 창시자 본인에게는 타당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창시자 본인이 미셀 옹프레가 말한대로 유일하고 진정한 존재라면 말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부족하고 재수없다, 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앞서 과학 제 3법칙으로 돌아가자. 조금 수정한 3법칙은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이다. 지금까지 살펴보건데, 미셸 옹프레의 비판이 설령 '재수없더라도' 근거가 존재하기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이면 안될까? 우리는 몽상을 망상과 비슷한 부류로 취급하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대문호였던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사색은 정신의 노동이요, 몽상은 정신의 쾌락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몽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하지만 정말 몽상은 무가치한 것일까? 여기서 바슐라르의 이론을 가져올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몽상의 철학자, 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있다. 원래 그는 과학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과학사에서 살펴본 것은 과학의 진화가 아니라 과학의 오류였었다. 왜 사람들은 오류를 저지르고 거짓된 이론에 현혹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상, 몽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과학을 위하여 그런 몽상과 상상을 제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바슐라르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도리어 이런 몽상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라고.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몽상은 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상상력의 원천이자 주관성의 객관성에 대한 승리선언이다.(주15)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활동의 근원에 존재한다. 무의식도 의식도 아닌 몽상의 의식, 이라는 개념을 가져옴으로서 무의식과 의식의 긴장은 해소되고 무의식의 작용이었던 꿈과 몽상의 의식에 바탕을 둔 몽상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이런 몽상이 우리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굳이 존재할까? 도리어 이런 몽상을 통하여 더 깊은 차원의 해석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무의식의 작용인 꿈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이론 전체를 하나의 몽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과 같을 것이다. 꿈과 몽상이 계속 맞물릴테니 말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해석이 정답이 없는 - 주관성의 세계에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 전복적 비평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령 고도로 조직된 몽상이더라도, 결코 뛰어난 이론에 뒤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본인이 원했던 것 처럼 과학으로 알려지기에는 아직도 요원해보이고, 어쩌면 영영 과학이 될 수 없을지라도, 과학이 아니라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철학으로서는 분명 의의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애초에 저 수정된 3법칙을 보라. 고도로 조직된 몽상과 뛰어난 이론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몽상으로 치부하여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가 몽상과 등가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구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프로이트 본인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정말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 비판들에 비하여 미셸 옹프레의 이 책은 본인의 우상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훨씬 개인적이고, 대부분의 비판들을 집대성한다는 점에서 훨씬 종합적이다. 그러나 그 모든 비판은 다른 학문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학 또한 다른 철학들처럼 어떤 새로운 인식과 창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중심에 두었을때 그 존재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정신분석학이 창조성을 발휘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1. 기백석 외, 신경정신의학, 2nd ed., 중앙문화사, 2009, pp. 70-71. 

2. 피터 게이, 프로이트 I, 교양인, 2012, p. 206.

3. 김서영, 프로이트의 환자들, 프로네시스, 2012, p. 335.

4. http://www.answers.com/topic/eckstein-emma , 2013년 11월 17일 검색. 읽어보면 myoma적출술과 동시에 자궁적출술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피터 게이의 평전과 미셸 옹프레의 말이 약간 다르다. 미셸 옹프레는 월경과다증과 위장장애를 보였다고 기술하지만, 피터 게이의 평전은 월경과다, 혹은 하혈이 심하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김서영의 프로이트의 환자들 에서는 더욱 간략하게, 그녀가 코피가 심했다, 라는 내용만 적혀져 있다.) 만약에 전자라면 자궁근종이 애초에 그녀의 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원인일수가 있다. 설령 다른 원인이라고 할지라도 코피 등에 대한 기질적 원인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5. Bruce M. Koeppen et al., 조양혁 외 역, Berne&Levi 생리학, 6th ed., 이퍼블릭, 2009, p. 214.

6. Bruce M. Keoppen et al., 위의 책, p. 210.

7. http://en.wikipedia.org/wiki/Anna_O. , http://www.answers.com/topic/anna-o , http://en.wikipedia.org/wiki/Henri_Ellenberger , 2013년 11월 17일 검색. 미셸 옹프레의 주장이 실제로 옳은 말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검색해본 결과, 적어도 미셸 옹프레가 말한대로 앙리 엘랑베르제가 새롭게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안나 O가 회복되지 못한 것도 사실으로 여겨진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위의 안나 O링크에서 이야기하듯 정신과적인 문제보다는 encephalitis 또는 temporal lobe epilepsy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8. Brandon A. Gaudiano, Ivan W. Miller, The evidence-based practice of psychotherapy: Facing the challenges that lie ahead, Clinical Psychology Review, 2013, p. 814.

9. 기백석 외, 앞의 책, pp. 597-613.

10. 피터 게이, 앞의 책, p. 23.

11. Bettina Bock von Wulfingen, Freud’s “Core of our Being” Between Cytology and Psychoanalysis, Ber.Wissenschaftsgesch., 2013, pp. 226-244.

12. 스스로 면도하는 사람은 면도해주지 않고 스스로 면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는 누구에게 면도를 받아야 하는가?

13. 김서영, 정신분석학 연구방법론 일반의 학문적 의의, 해석학 연구 제23집, p.71.

14. 피터 게이, 앞의 책, p. 110.

15.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pp. 48-5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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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1-18 02:20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군요 이름만 알고 책은 읽어본 적이 없으니(다른 책에 아주 조금 나온 것밖에는)... 프로이트는 자신이 하는 것이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았군요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면'과 같은 말은 예술 비평에 더 많이 쓰인 듯합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해도 그게 뜻이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몽상은 사람한테 필요한 거죠

비판을 했다 해도 아주 싫어서 한 것은 아닌 것 같은 마음도 듭니다 비판하는 마음을 조금만 뒤집으면 다른 마음도 있을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군요^^

바람이 아주 세게 불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11-22 00:42   좋아요 0 | URL
여기도 바람이 아주 셉니다. 어허허.. 사실 이 책을 보면 저자는 정말 프로이트가 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네요,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