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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불안의 시대.


1.


  사실 이 책을 처음 받아들 때, 아니 처음 추천할 때만 해도 저는 이 책이 자본주의시대의 불안의 심화, 그리고 미국의 슈퍼파워 약화로 인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다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법 건설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지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저자가 이 격변의 시대를 발로 뛰어다녔던 특파원 출신에 외교문제에 대한 칼럼니스트라는 사실이 그 생각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미국편에 서지도 않을 것이며 적어도 객관적으로 시대를 보려고 노력할거라고도 기대했지요. 하지만 기대는 빗나가고 책에 대한 생각은 정확히 반만 들어맞았습니다. 미국의 슈퍼파워 약화로 현대 시대를 불안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비록 동의를 못하는 의견이 몇 부분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짐작 가능했지만, 그 불안의 시대를 해소하는 방법은 완전히 제 예상을 빗나가버렸지요. 그것도 정말 당혹스러운 내용으로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책의 저자와 책 표지, 그리고 제공되는 일부 내용만으로는 적절하게 책을 추천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원래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한계를 실제로 마주친 느낌이었달까요.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추천한 책에 대해서는 적어도 스스로는 만족해야 되는데 그것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니 더욱더 당황스러웠던 겁니다. 정말 거칠게 몇 문장 적겠습니다.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불안의 시대, 미국의 힘을 다시 키우자.'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전체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꼭 아이언맨을 보는 느낌이었다.' 정도가 될까요.


2.


  미국의 만화계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업체는 바로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 일겁니다. 둘 다 히어로물을 그리고 있는데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잘 아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DC 코믹스에서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있고, 마블 코믹스에는 고스트 라이더부터, 미스터 판타스틱(영화 판타스틱 4의 고무인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이 있습니다. 아, 토르도 들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영화 '토르' 도 개봉했었지요. 왜 이렇게 미국에는 히어로물들이 많을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저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릴 정도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에 미국은 그들의 영웅을 만들어내어야만 했고, 민족이 섞여있기에 그 어느 민족에도 섞이지 않은 형태의 영웅을 만들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입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 백인종의 영웅이 대부분이지만 그 백인종의 영웅이 실제 인물인가, 혹은 가상 인물인가는 그 영웅이 대표할 수 있는 계층의 한계성을 구분지어줄거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실제의 인물을 영웅화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사실 다름을 인정해오는데서 생기는 다툼의 역사로 봐도 될 정도로 인종간의 다툼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흔히 아는 백인 - 흑인의 다툼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등 여러 민족이 섞여서 다툼을 벌여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가상의 영웅은 어느 한 민족의 영웅을 벗어나 미국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미국의 영웅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는 냉전시대로 그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히어로들이 냉전시대에 태어난 경우도 있지요. 마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우위로서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웅들은 계층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배트맨의 경우 모두가 다 아는 갑부입니다. 그리고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서민을 대표하겠지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면 그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뭐, 연재되는 만화에서야 'One above all' 마블세계관의 최고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에게 그나마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의 인생은 눈물로 점철되어있지요. 그리고 미스터 판타스틱은 과학자였습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그 이름에서 오해를 사기가 쉽지만 사실은 정말로 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미국의 '이상' 을 그려낸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여기에 그 이상에 반하여 현실적인 미국의 패권주의를 그려내는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언맨입니다.



3.


  2008년도에 아이언맨이 개봉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이 저 영화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도 남자의 로망을 보여준 영화였었기 때문입니다. 기계로 수트를 만들어 입고 악의 무리를 무찌른다니. 어렸을 때 누구나 로봇 조종사가 되는 꿈을 한 번쯤 가졌었다면 저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아실 겁니다. 또한 영화가 지루하지 않고 볼거리가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호의적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실 조금만 더 잘 들여다보면 특이한 면모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원래 무기상인 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고초를 겪고 나서는 무기산업에서 손을 떼기는 했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아이언맨 수츠는 그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재력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배트맨도 압도적인 재력으로 배트맨 수츠를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그는 배트맨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사실상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아이언맨처럼 외부로 그의 영향력을 뻗어나간다, 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아이언맨을 무기상인이었고, 압도적인 기술력과 재력으로 평화에 기여하는 히어로라고 그려보겠습니다. 무언가 떠오르시나요? 우리가 아는 어느 나라와 거의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네, 미국과 거의 흡사합니다. 거칠게 미국이 패권을 쥐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세계 대전때 무기를 팔아서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지요.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 세계대전의 승리국들도 미국의 채무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뭐, 패전국들이야 배상금 문제로 인해서 나라의 국운이 쇠하게 된 것은 더 말할 필요 없겠지요. 그러다 냉전을 겪게 되고,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무섭게 성장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해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합니다.


4.


  이 책 ‘불안의 시대’ 는 시대를 덩샤오핑의 중국 개혁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 시대로 구분을 합니다. 전환의 시대는 중국 개혁에서부터 걸프전까지를 가리키고, 낙관의 시대는 걸프전 이후에서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를 가리킵니다. 저자에게 있어서 그 이후로부터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구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도 미국적인, 미국 중심적인 냄새가 풀풀 풍깁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외국에 파병을 해서 힘을 행사하는데 주저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걸프전이었습니다. 걸프전에서 주저 없는 무력사용으로 단 3일 만에 이라크 군대를 무찌른 미국은 자신들의 힘에 자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저자가 주장하는 낙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여기서 짚어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게는 분명 낙관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게는 그때 이후로 낙관의 시대가 찾아왔을까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과연 미국이 헤게모니를 잡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시대가 다른 국가들에게도 모두 낙관적인 희망만 심어주었을까요? 저자가 낙관의 근거로 뒷받침하는 자료들은 시대 전체를 낙관의 시대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근거들입니다. 무의식중에 제 3세계를 배제시켜버렸지요. 여기서 배제된 제 3세계는 불안의 시대에 간간히 모습을 비춥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짙은 향수처럼 미국이 패권국가로 남는 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요? 미국은 항상 초법적 존재였으며 제국주의를 넘어선 제국이 되어버렸었습니다. 아무리 국제적으로 결의를 해도 미국은 언제나 그 결의를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을 견제해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런 작업들이 모두 자신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변하면서 마치 저 ‘아이언맨’ 처럼 버텨왔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개별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서술하면서도’ 마치 2인 3각 운동 경기를 하듯이 묶어버림으로써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저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느낌을 받게 만들며, 이윽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라는 말과 자본주의는 발전해야만 한다, 라는 말을 동의어로 만들어버립니다. 현대 시대, 불안의 시대를 서술하는데 있어서도 저자는 똑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많은 사례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결론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나친 대두를 막아야 한다, 로 수렴됩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비판하는 근거는 책에서는 마뜩찮습니다. 사실 중국의 인권문제나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에 대해서 침묵해온 미국 입장에서는 대놓고 뭐라고 비판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를 가져오면서 중국과 미국은 제로섬 게임을 하지 말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는 허구입니다. 예전에 미국이 모든 패권을 쥐고 있을 때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그냥 모노폴리였지요. 이제 중국을 무시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서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끝끝내 패권을 놓을 수 없다는 심정의 발로로 여겨집니다. 절대 그들이 먼저 양보할 수는 없다는 속뜻이 책 전체에 가득 담겨있습니다. 너희가 계속 패권에 도전을 하면 너 죽고 나 죽고 둘 다 죽는다, 그러니깐 좋은 말 할 때 그만 놓아라, 정도의 내용으로밖에는 요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 은근슬쩍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주의로 기울었으며 사실상 독재국가다, 라는 말을 흘림으로써 독재국가나 국가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중국과 러시아에 덮어씌움으로써 자연스레 그 비판이 중국과 러시아로 향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중국이 패권을 쥐면, 혹은 러시아가 패권을 쥐면 독재국가가 패권을 쥐는 것이다, 즉 제로섬 게임에서 독재국가가 승리하는 것이다, 라는 냉전 수준의 논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저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일당독재국가입니다. 개방이 어느 정도 되어서 우리가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중국 국민들 대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벌써 머릿속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수많은 인구들 중 어떻게든지 중산층 이상은 살고 싶다는 열망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공산당은 그 열망을 잘 이루어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상황도 거의 비슷합니다. 블라미디르 푸틴 전 대통령은 반 농담으로 푸짜르, 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짜르가 제정 러시아의 황제를 뜻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푸틴이 러시아 정계에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대통령은 삼선(三選)을 금지하는 러시아 헌법을 비껴가기 위한 징검다리 대통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세간의 평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이 책의 비판 방식을 합리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아예 그냥 솔직하게 러시아와 중국은 정치 체제가 잘못되었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런 정치 체제보다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미국이 낫다, 라고 드러내놓고 주장하는게 훨씬 더 보기가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드러내놓고 주장하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 국민들의 체제에 대한 무자각적인 순응, 순응을 넘어선 체제에 대한 옹호(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대한 대극적 위치로 자신들의 국가를 치켜세우는)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또 사면초가에 빠졌을 테지만 말입니다.


5.


  전체적으로 이 책은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오디세이아입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모험을 겪고 어떻게 흘러나갈것인가, 에 대한 내용이지요. 오디세이아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엔 페넬로페와 그의 아들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사실상 오디세우스에게 있어서는 해피엔딩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의 미국적인 오디세이아는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까요? 저자는 전체적으로 미국의 해피엔딩을 원하는 듯 합니다. 오바마 행정부에게 ‘따뜻한’ 충고(오바마 정부는 국내 문제보다도 더 세계적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며 세계는 집권 첫해부터 오바마 정부에게 정치적 리더십을 기대했다는 내용)를 보내는 부분을 보면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세계를 구원하라’입니다. 누가 세계를 구원할지는 아마 저자에게는 당연하겠지요. 그런 당혹감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의 주장을 잠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면 미국식 해피엔딩이 된다고 합니다. 먼저 평정심을 유지하고, 국제관계가 국가 간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규정된다는 생각을 버리며, 과거에도 미국이 쇠퇴과정을 겪은 적 있지만 그때마다 이겨내었다, 라는 믿음을 가져라는 겁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의 나라, 미국에서는 이 충고들이 정말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EU와 같은 국가공동체를 교묘하게 긍정하는 듯 하면서도 방향을 선회해 국가라는 틀로 방어를 탄탄히 하는 미국을 긍정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빛이 납니다. 일단 첫 번째와 세 번째 가이드라인은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저 가이드라인들이 책의 앞부분에서 세계의 흐름을 살펴본 결과로 도출된 내용으로는 너무나 평이하고 당연한 이야기들이라는 문제를 접어두고서라도, 미국은 도전을 받지만 결국엔 승리할 것이다, 로 일관하는 저 가이드라인은 아무래도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제가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제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이 책은 감히 말하건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는 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국가 내에서는 어쩌면 이런 책들이 잘 팔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꼭 예전 서평을 썼던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비판하였던 퇴락한 리버럴 세력의 책들 - 자신의 국가를 비판하는 듯 하면서도 이윽고 긍정하는 부류의 - 과 흡사한 느낌을 줍니다. 외부의 독자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내부의 독자들에게 일종의 객관성이라는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정당화시키는 그런 책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거나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걱정이 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나라는 미국 등의 강대국에 의존을 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니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우리나라는 감기가 걸려버리지요. 감기가 계속 걸린다면 우리는 면역력을 키워서 감기 바이러스를 막아야겠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자본주의 혹은 America Almighty의 책이 널리 읽히는 형세는 면역력을 키울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재채기를 얼굴 앞에서 하는 형세로 보입니다. 다시금 '아이언맨'이 그의 수트를 정비하고는 '팔라듐 리액터(아이언맨의 원동력)'를 새롭게 개발하여서 우리들 앞에 우뚝 설 것만 같은 기분에 불안해지네요.

 

p. s. 다음부터 책 추천할때는 꼭 서점에 가서 확인하고는 추천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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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2011-07-23 21:57   좋아요 0 | URL
딱 적실한 제목이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가연 2011-07-29 03:17   좋아요 0 | URL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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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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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원래 이런 글을 굳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남기지 않았었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몇 마디 남기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 쉽지 않은 책이었다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저는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련되어서 기초도 별로 없고, 마르크스의 저작물들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가 문맥에서 쓰는 용어의 의미를 모두 제대로 포획했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이 말을 굳이 쓰냐면, 이 책 '인지자본주의'의 저자인 조정환씨는 본질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네그리의 영향을 받아서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꼭 붙여야 된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그의 글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분석은 그가 평소 주장하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괄호 안에 넣고 문맥을 고려해서 그의 생각이 마르크스주의와 유착에 빠지지도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낸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저작물들, 특히 ‘자본론’ 정도는 읽어보아야 그의 분석틀이 정말 옳은가 구분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멍하니 책만 쳐다보았다면 마치 모래알이 알알이 흩어지듯이 그의 텍스트들은 저에 이르러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일부의 의미라도 파악하고자 다른 책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과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그리고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 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네그리의 ‘제국(*)’ 을 완전히 읽고 싶었지만 그 텍스트의 난해함에 이르러 중간 중간 벽에 막혀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이런 저런 요약과 다른 분들의 생각에 의존하여 제국의 큰 모습을 그려보는데 만족해야만 하였습니다.
  제가 저렇게 읽은 책들을 나열하는 것은 나 이런 책들을 읽었어, 많이 읽었지, 라는 생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자본론’ 을 읽지 못했으며 결국 저자가 사용한 경제적 틀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어서 아래의 서평에서 경제적인 담론을 어쩔 수 없이 배제시켰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쩌면 한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를 밝힙니다. 아래에 글을 전개해나가며 위의 책들을 자주 인용할 것 같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용어나 어려운 사유는 문맥 속에서 뜻을 먼저 밝히려 노력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의미가 엇갈리거나 불분명한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는 저 위의 책들에서 가져왔으니 위의 책들을 참조해주시고,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신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1.
  

 

  학문의 분야를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과학 계열과 인문 계열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실 과학 분야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특히나 큰 틀에서 보면 생물학 분야이지요. 그래서 사실 ‘인지자본주의’ 라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과연 ‘인지’ 라는 과학적 개념을 어떻게 인문학에다 접목시켰는가, 이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인문학자들 중에는 과학적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변용시켜서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으로 끼워 맞추는 행위를 하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문학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과학적 개념을 억지로 인문학에다 접목시키려는 과학자, 혹은 정신분석학자들도 적지 않지요. 잠깐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정신과 의사 자크 라캉도 사실 이런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과연 여기에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초미의 관심사였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저의 판단으로는 저자는 인지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과학적 개념들, 자기생성능력이나 조직 등의 개념을 책에 어느 정도 잘 녹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근거로 삼는 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나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주장하는 구성주의 생물학과 그 테제는 저자와 같은 자율주의 이론가들의 구미에 당길만한 이론이라는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말이지요.
  저자가 말하는 인지 개념은 책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바렐라나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일반적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인지 개념과 거의 동일합니다. 말 그대로 생물체가 이해가고 느끼는 등의 정신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인지를 다른 말로 변용하자면 ‘앎’이 되겠습니다. 앎 또한 대상에 대해서 정신적 과정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 앎은 절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인지발달의 최전선을 달리는 과학이라는 필드에서는 오늘의 앎이 내일의 모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굳이 최신 경향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과연 진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위치에 있는가?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이 글이 되겠지요. 과연 이 글을 내가 정말 보고 있을까? 한 쪽 눈을 감았다가 반대 편 눈을 감았다가 반복해보시면 이 글의, 이 화면의 위치는 좌우로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혹은 착시 현상과 그를 이용한 ‘옵티컬 아트’ 들을 예로 들어도 좋겠습니다. 시각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후각도, 우리의 말단 사지도 그런 속임수를 씁니다. 누가 사고로 다쳤습니다. 그런데 다친 부위를 정밀 검사를 해보니깐 어느 정도 운동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다친 부위를 쓰려고 할까요? 아닙니다. 설령 운동능이 남아있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능은 신경이 보존되고 근육도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운동잠재능이 있는 경우에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현상을 ‘Learned disuse' 라고 부릅니다. 예시가 길었네요, 사실 위의 말들을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인식은 절대 확실하지 않으며, 우리의 앎은 제한적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일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지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발화가 일어난 ‘문맥’ 속에서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맥은 환경이라는 말로 대체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해보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지 능력을 가진 개체만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겠지요. 저자가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한 인지 개념을 프란시스코 바렐라나 움베르토 마투라나에게서 가져왔다면 그 의미는 바로 위와 같은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인지에 관해서 시사점들을 밝혀놓습니다. 인지를 가진 개체는 그 자신의 인지적 행위에 의해서 세상을 조각해나가며 그 개체는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해서 서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화해나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2. 
  

   

  지금까지 인지자본주의의 ‘인지’ 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인지와 결합한 이 인지자본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뒤에 저자와의 문답에서 저자가 밝혔듯 인지자본주의나 요즘 많이 들려오는 신자유주의나 모두 사유하는 대상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얻어내려면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지자본주의로 규정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 에서 자기조절시장의 허상을 역사적으로 낱낱이 파헤치고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매겨서 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상품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연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화폐도 허구 상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동과 토지, 화폐 모두가 허구 상품인 셈입니다. 상품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포장시켜서 우겨넣고 시장경제라는 허상에 경제 주체들이 그들을 억지로 맞춰가려니 병이 생기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병폐는 그런 것들에 기인한다고 칼 폴라니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을 상품화하는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주목해봅시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상품화를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거칠게나마 큰 부분으로 둘로 나누면 육체와 정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품화는 육체에 관한 것과 정신에 관한 것으로 분화되겠지요. 먼저 육체를 상품화하는 그런 노동을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껏 이뤄진 자본주의하의 착취는 이 육체의 상품화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에서 중점적으로 따져본 것도 이 육체의 상품화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의 시대에서는 산업자본주의의 여명기였기에 육체의 노동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정신의 노동에 점차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농업이나 공업이 과학 기술과 접목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노동력을 집적해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력들은 남아돌게 됩니다. 이 남아도는 노동력을 가진 개인은 그들 자신의 자아를 찾아나가면 좋을 텐데 자본의 힘은 탐욕스러워서 그런 순진한 생각을 단숨에 부숴버립니다. 이는 비단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유연성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서 해방되기는커녕 이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눈을 부릅뜨고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모든 부문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전에 상업자본주의나 산업자본주의가 상업과 산업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가 아니듯, 지금 저자가 현대의 상으로 규정하는 인지자본주의도 이 인지에 관련된 노동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단순히 몸만 제공하던 노동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이다, 라고 그 위상을 낮춰버린 것입니다. 이는 이해못할만한 변화는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과학 기술의 생산에 더욱 더 무게추가 실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라는 격언이 힘을 얻게 됩니다. 참 돈벌기 쉽지요. 직접 해주는 것은 없으면서 방법을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 그것이 다 아이디어가 되고 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는 인지에 관련된 노동들을 높은 가치를 가진 것처럼 치부하며, 지금도 수많은 부모들은 이 이성적 측면의 인지에 관련된 노동을 자신들의 자녀가 택할 수 있도록 여러 학원을 전전하고 계시겠지요.
  인지의 또 다른 면인 감성적 측면도 부단히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요즘은 무슨 직업에 종사를 해도 서비스가 좋아야 돼, 손님을 잘 맞이해야 돼, 등의 말이 오르내립니다. 조금만 불친절하게 굴면 인터넷에다가 글을 올리지요. 어디어디는 좋지 않더라, 등으로 말입니다. 스튜어디스의 예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항상 그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항상 웃는 얼굴로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더라도 직장을 나서는 순간 항상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그것이 크게 와전되지는 않을까, 이 직장을 얼마나 오래 다닐 수 있을까 등등 말이지요. 이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정동적 측면에까지 침범하여서 긍정적 감정을 수탈해나가고 공황이나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의 독을 퍼뜨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바로 위의 글에서는 인지라는 말과 정신, 혹은 더 거칠게 과학 기술과 같은 이성적 측면과 감정과 같은 정동적 측면의 합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사유를 전개해나가는데 제일 처음 문단에서는 우리는 인지에 관해서 말할 때 그 환경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은 인간에 내재된 것이고, 환경은 인간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연속해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는 상반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야 한다, 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이지요. 저 표현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들은 정말 불가항력적인 괴물들인데, 그 괴물들이 좁은 항해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으르렁 거리는 상황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식론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 각각 재현주의와 유아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환경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내적인 유아주의, 관념론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정말 그 오디세우스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간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처음 문단의 마지막에 이르러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하여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는 말을 한 것입니다. 환경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는 개체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인지가 정신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쓰였지만 그 정신 외부의 환경을 끌어들여야 하겠습니다. 외부의 환경은 작게 보면 그 개체가 속하여 자라면서 그 정신을 형성한 가족이 있을 수 있겠고, 넓게 보면 시대 상황 전반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외부의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정신이 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내가 정신활동을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정신활동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
  이 ‘다중’ 이라는 개념은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적 차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있으면서도 그 이질성이 그들의 진보를 저해하지 않으며 서로 공동으로 소통하고 활동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말이지요. 앞서 해온 말들을 여기다 대입시킨다면 상호작용이 서로 열렬히 일어나는 집단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외부의 사람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마찬가지로 환경과도 끊임없이 구조접속을 통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집단이지요. 우리의 몸으로 보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져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들이 모여서 일종의 계(순환계, 소화기계..)를 만드는 그런 그림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지능력,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까지 노동을 끌고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의 예시는 쉽지요. 스마트폰을 통한 업무 보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착취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속을 더욱 쉽게 만듭니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마치 공장이 파업의 장소로 점거된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이것의 예시도 쉽게 들 수 있겠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언제 어느 때든지 쉽게 접속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접속은 우리에게 정신과 정신이 직접 맞부딪히며 상대와 상호작용을 하도록 합니다. 기존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상호작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현대의 이런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사용자 자신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겠지만 온전히 각 개인의 이질성들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인지자본주의 시대, 혹은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 의 대항마로서의(이 부분은 사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썼지만 엄밀히 말씀드리면 ‘다중’ 의 대항마가 ‘제국’ 이라고 써야 옳습니다.) 주체인 다중이 대두되는 것이지요.

 

4. 
  


  그런데 이 ‘인지자본주의’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과연 이 인지자본주의가 다중의 특이성을 어떻게 원동력으로 삼아서 착취하는가, 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밝혀왔다시피 인지자본주의는 기존의 상업이나 산업자본주의와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여러 시공간의 재구성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예시를 통해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서비스가 있습니다. 원래 이글루스는 성인 인증을 거쳐서 등록 가능하던 그런 서비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창기 시절에는 상당히 뛰어난 자료를 올리던 블로거들도 많이 존재하였습니다. 사진이면 사진, 문학이면 문학, 애니메이션이면 애니메이션 등등.. 각자의 특이성들은 밸리라 규정된 테마에서 서로 존중받으며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인만 이용 가능했다는 점이 어쩌면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커뮤니티, 라는 비난도 동시에 받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이 대기업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 대기업의 이름은 SK 커뮤니케이션즈. 이 대기업은 어느 순간 그 이글루스를 덥석 집어삼키게 됩니다. 저 블로그 서비스 내의 특이성들을 흡수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저 특이성을 흡수하여서 잘 포장 후 외부에 노출시킨다, 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최근에 네이트(SK 커뮤티케이션즈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의 메인에 이글루스의 글들이 종종 링크되는 현상으로 증명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자본주의(SK 커뮤니케이션즈)가 다중(이글루스의 기존 회원들)의 특이성을 흡수하는 사례입니다. 당연히 이런 반론도 있을 법 합니다. 사실 대기업에 의해서 저 회원들이 외부와 더 활발히 소통을 하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저때의 저 이글루스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규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라고 말이지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저때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확실히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그들만의 커뮤니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인수를 함으로써 소통을 더 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애초에 이들은 그런 목적으로 인수를 한 것도 아니며 현재는 각종 규제와 약관 변경을 통하여 회원들을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데 외부와 제대로 소통을 한다는 말이 과연 얼마만큼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그들이 외부에 소통을 하는 것처럼 특이성들을 묶어서 일방적으로 포장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특이성들이 소비되고는(메인 화면의 글 노출이나 주간지에 글을 싣는 등으로) 자본의 품으로 안기며(SK 커뮤니케이션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든다거나 등의 반향을 통해서) 자본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5. 
    

 

  저자가 밝히는 다중의 힘은 경계를 넘고 가로지르는데 있습니다. 하나의 단일 목적으로 통일되었다면 그 집단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집단의 개개인 모두가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 특이성들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아무리 네그리의 제국이 억압하더라도, 아무리 인지자본주의하에서 삶이 수탈당하더라도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정말 새로운 삶을 향하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겠지요. 이를 네그리는 그의 저서 ‘다중’에서 ‘삶정치적 힘’ 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쓴 이 ‘인지자본주의’ 는 수많은 경계를 뛰어넘으며 그 사유를 전개해나갑니다. 베르그송, 스피노자, 네그리, 바렐라, 마르크스 등등.. 이 책이야말로 정말 그가 말하는 ‘다중의 삶정치’ 를 일깨우는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 영역들 중 가장 근본적으로 저자의 사유를 구성하는 부분은 역시나 안토니오 네그리의 사유들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용어들은 삶정치나 삶권력 등 삶- 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중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이는 말로 네그리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미셸 푸코가 먼저 사용하기는 했지만 체계화시키고 이론화시킨 것은 네그리겠지요. 삶권력은 인지적인 사회적 삶 자체에 대한 제국의 직접적 통제력을 뜻하고 삶정치는 앞서도 밝혔다시피 삶권력에 대항하여서 다중들의 삶에 대한 욕망을 조직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자 조정환은 이를 그대로 인지자본주의에 반영하였고 그의 사유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가 아무런 비판 없이 그의 개념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만약에 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의 명백한 증거를 내밀면 그가 세운 탑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그가 너무 삶정치, 삶권력 등의 개념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중의 행동 양식 중 어떤 것은 저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저런 개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들이 전부는 아니리라고 봅니다.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모든 것을 삶정치나 삶권력과 연관지어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다중의 힘을 강조하다시피 서술해놓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세계가 다중의 혁명의 불길로 휩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지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면서 든 예시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입니다. 글에서 몇 번이고 서술하는 바로는 이때 인지자본주의의 위기의 정점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위기의 정점을 이미 예전에 찍었으니 지금은 위기일까요, 아니면 위기가 아닐까요? 혹은 위기는 위기이지만 2008년에 비해서는 완화된 위기일까요? 저자도 이런 반론을 염두에 뒀는지 이를 진자에 비교하면서 마치 진자가 왔다 갔다 하듯이 자본주의가 더 심화되는지, 아니면 완화되는지는 다중의 힘에 달렸다고 책에 서술합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을 자본주의의 병폐에서 붙잡아두는 것은 이 다중의 삶정치적 활동에 달렸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면서 하나의 예를 더 듭니다. 바로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아랍권 혁명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가장 삶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저자는 기대합니다. 저 혁명이 점차 범위를 넓혀서 유럽으로 뻗어나가고 그 다음은 아시아로 뻗어나가며 이윽고 전세계를 장악할 거라고. 그러나 지금 그 혁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리비아에서 발이 묶인 채 몇 달이고 교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리비아 교민들은 급히 귀국을 했었지요. 현지인과 결혼을 했던 한 분은 이집트에 머물며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인터넷이 끊겨도 말을 텍스트로 옮기는 기계를 통해서 고립된 나라의 현재 상황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허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전화기란 인터넷에다 접속하여서 혁명의 기폭제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밤낮을 꼬박세우거나 혹은 겨우 두 시간을 자면서 어쩌다가 연결되는 부인이나 남편의 연락을 기다리게 하는 역할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체된 리비아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느새 혁명에 대한 관심이나 다중의 힘에 대한 생각은 이미 잊어버렸고 저자가 말한 대로 마치 강제로 점거되어 혁명의 장소로 이용된 컨베이어 벨트들은 다시금 본연의 역할로 특이성들을 소비시키고 있습니다. 왜 리비아에서는 다중의 삶정치적인 힘이 꺾이게 되었을까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다시금 다중들이 가십거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전쟁,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폭력 때문입니다. 카다피는 맹렬히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병들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고 혁명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저런 폭력은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듭니다.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력앞에서 삶정치와 같은 개념은 그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흐지부지하게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래 끌게 되며, 어느 순간 관심에서 벗어나버리게 되고 이윽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은 요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의 힘, 자본주의의 힘을 극복하려면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삶정치적인 힘만으로 우리는 다중의 행동양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삶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다중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각각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개인이 여기서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다른 개인은 그래도 어디선가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다중은 게릴라전에는 능하지만 그 삶정치적 힘을 모두 한 곳에 모으는 것이란 힘들 것이라 짐작됩니다. 인지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삶정치적인 힘을 집적시켜야만 하는데 그 힘을 모아서 쓸 수가 없는 형세가 되어 버린 겁니다. 다시 리비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직 속단하기는 이릅니다만 현재의 리비아의 형세를 다중이 돌파해나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먼저 정말 모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일어나 그 삶정치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어렵다는 전망을 도출해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기존의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정말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UN, 혹은 그 제국의 주축을 이루는 나라의 군사력으로 힘을 제압하는 방법을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왜 저런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되었냐면 민주주의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기존 제국들이 경제적 제제나 성명 발표와 같은 방법으로 이미 나서고 있기는 합니다만 리비아가 국제 정세에 나서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경제적 제제 수단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은 폭력을 제압하기 위한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쓴다는 문제 이외에도 제국을 전복하기 위한 다중이 제국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어폐가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빌린 이후에 과연 다중이 다중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외의 다른 개념을 다중을 설명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데 도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앞서의 두 가지 방법 이외의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는 삶정치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 친화적이지 않은 그런 개념이겠지요. 그런 개념을 발견 못한다면 다시금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제국에 대해서 어차피 벗어날 수 없어, 와 같은 냉소주의적 태도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물론 제 예상이 틀려서 다중이 그들의 힘으로 무사히 혁명을 완수해낸다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6.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공저한 그의 저서 ‘앎의 나무’ 의 마지막 장에 대략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존재하며, 그 언어는 항상 나와 다른 너를 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언어가 너를 향하고 있는데 당연히 ‘나’ 또한 ‘너’ 를 향하고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행동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며 모두다 윤리적입니다. 이는 나와 너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그리가 그의 제자 하트와 공저한 저서 ‘다중’ 에서도 그 결론은 ‘사랑’ 으로 귀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저 두 책의 영향을 받은 ‘인지자본주의’ 의 결론도 어디로 수렴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 ‘인지자본주의’ 는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정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그가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굳이 인지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저 신자유주의라던가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사유를 펼쳐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다보니깐 현대 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두 측면을 가집니다. 이성으로서의 인지와 정동으로서의 인지입니다. 비록 낡고 고리타분한 개념 같지만 다시금 정동으로서의 인지, 즉 사랑의 개념을 끌어들여옴으로써 (물론 다중의 물리적 조직화도 같이 일어나야겠지만) 저자는 이 힘든 세상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이성으로서의 인지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우리를 착취해왔고 정동으로서의 인지가 우리에게 지금껏 우울과 공황상태를 주입해왔다면 우리는 그 칼날을 반대로 돌려서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억압이라는 뜻이며 곧 거대한 잠재력으로서의 작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사회가 아무리 너를 괴롭힐지라도 결국에는 극복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찬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솝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로두스 섬에서 멀리 뛰기를 잘했다면서 큰 소리를 치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한 섬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이 로두스였던 겁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꽉 붙잡고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그런데 이 말은 이런 거짓말쟁이를 혼내 줄때만 쓰는 말은 아닙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라, 머뭇거리지 말라, 와 같은 문맥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각 넓어진 인지능력을 통하여 상대방과 구조접속을 할 수 있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특이성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한 우리도 다중입니다. 이 다중은 인지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너무나 힘이 강력해, 어쩔 수 없어 등으로 일관해나갑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도록 합시다. 여기가 로두스니깐, 여기서 뛰어라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필드가 모두 인지적 능력의 로두스이기에 말이지요.

 



(*)서평자 주 : 제국은 초법적 권위를 가진 기구와 다국적 기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전의 제국주의가 그들 나라의 외부를 착취해가며 그들의 영토를 늘려갔다면 이 제국은 그 구성원인 다중을 끊임없이 외부화시키며 착취합니다.
 

 

 

p. s. 아.. 무슨 글을 써도 만족스럽지 못하네요... 제가 담으려했던 내용의 반에 반도 못담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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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7:0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가연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가연 2011-09-03 09:48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아직 그런 곳에 글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쌓이지 않아서ㅎ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국가란 무엇인가


1.



  지금부터 3년 전, 백분토론이 400회 특집을 맞이하였지요. 그때 백분토론 초대 손님으로 많은 분들이 나오셨었습니다. 진보와 보수 쪽을 대표하는 논객들을 모아서 양 쪽에 나란히 앉혀놓았었습니다. 그런데 보신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그 백분토론은 결국 두 명에게 초점이 맞춰지더군요. 그 두 명은 바로 유시민과 진중권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적어도 저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그 둘의 토론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던가요, 유시민의 토스와 진중권의 스파이크라고.

저는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이 책을 보자마자 바로 떠올랐던 생각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저 400회 특집과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었습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그저 제목이 똑같아서 떠오른 것이었고.. 여담입니다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원제는 ‘정의 : 무엇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입니다. 실제로 정의를 정의하지는 않지요. 400회 특집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더 이어가자면, 사실 진중권과 유시민은 서로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하게 광고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면, 좌파라는 점에서 유시민이 그냥 커피라면 진중권은 T.O..... 차마 더 쓰면 간접 광고가 될 것 같으니 여기쯤 해두도록 하지요. 토론 중간에서도 그런 성향이 서로 드러났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공동의 적, 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보수 논객을 앞에 둬서 겨우 뭉친 모습이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담긴 내용은 어쩌면 이미 이때부터 싹을 틔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 적힌 정치적 연합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 저 토론 때 진중권과 유시민이 연합한 것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었고, 법치주의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그 법치주의가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을 제한하는 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저 토론에 이미 언급을 했었더군요.


2.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에 수많은 책들이 OO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를 읽어보면 정작 정의에 관한 명확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어떤 분은 이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살짝 간만 보면서 약을 올리는 것 같다고. 결국은 읽는 독자들에게 정의의 개념을 정의해보라고 떠넘긴다면서. 하지만 저는 저 책의 방식을 이해합니다. 사실 정의란 개념에 대해서는 백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명의 생각이 있듯이 모두다 그 정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정의에 대해서 개념을 정의하였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그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비슷한 개념으로는 자유, 선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국가는 저런 추상적인 개념에 비해서 그 의미가 와 닿기는 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거나 글을 보거나, 혹은 무엇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 주문한다거나 등의 활동이 모두다 국가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상대적으로 와 닿는다는 이야기이지 정말로 그 개념을 쉽게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논의를 진행시켜봅시다. 이 국가란 개념을 규정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생각해본다면 국가가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쉽게 개념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이런 생각을 저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국가에 대해서 그 생각을 진척시킨 사람은 바로 홉스였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에서도 국가를 정의하기 위해서 세 부분의 철학자를 끌어들이는데, 그 중 첫 부분에 해당하는 이가 바로 토마스 홉스입니다.

홉스는 만약에 국가가 없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 가 지속될 것이며 그로 인해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은 비참하고 고독하며 불안하고 가혹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주장이 일견 타당한 것 같습니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 총격 피격사건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는 그 소말리아의 실상을 신문을 통해서든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든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법도 인권도 없는 순수한 폭력만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악의를 가지고 서로를 집어삼키는 곳이었습니다. 국가가 없다면 저런 폭력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며, 그 국가에 속한 사람은 주권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국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그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국가주의 국가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국가의 역할은 저게 전부일까요? 우리 인간을 자연 상태에서 지켜주는 역할이 국가의 전부라면 수많은 독재와 인권 탄압도 어쩌면 정당화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독재에 맞서 싸워왔고, 그때 흘린 피들이 절대 헛된 피가 아니라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주의 국가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국가론을 여기서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국가론입니다.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론을 정의하기 위해서 세 명의 철학자들을 데려옵니다. 존 스튜어트 밀, 애덤 스미스 그리고 존 로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약간씩 상이하지만 그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을 하자면, 권력은 법치주의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되며 그 법치주의는 통치자에 대한 구속이 되어야 하고 국가는 당연히 외부의 위험에 대해서 대항하여야만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의 불의나 불공평을 해소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밀의 경우에는 자유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불의나 불공평을 해소한다는 측면은 국민의 평화와 일맥상통할 것이며 복지에 국가가 힘써야 한다는 말과도 합치합니다. 앞서 백분 토론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때 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한나라당 의원과 논쟁하면서 우리나라는 법치주의로 다스려져야 되고, 이는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정말 죽겠다, 제발 좀 살려 달라, 라고 말을 합니다. 저 말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더라도 저자의 국가론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있습니다. 이 국가론에서는 국가가 무용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오직 계급간 불평등을 심화하고 착취를 위한 그런 도구로 봅니다. 이 국가론을 주장한 철학자로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그 거대한 실험은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끝이 나고 이제는 어쩌면 무용하다고까지 일컬어집니다. 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현실의 일부를 잘 포착하기는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기에는 너무나 먼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이 마르크스주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비극은 쉽게 가시시 않기 때문이겠지요,


3.


  저 국가론들은 사실 코끼리를 장님들이 만져보듯이 각자의 관점에 걸맞은 부분만 손으로 더듬거린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저 세 가지 국가론을 통합하면 대부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 국가론이 국가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어떤 ‘장님’의 경우에는 좀 더 새로운 방향을 더듬거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국가론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그래서 저 세 가지 국가론으로 국가의 모습을 책에서 대략 그려본 저자는 좀 더 실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말이지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을 설하기에 앞서 일종의 격률을 만들었습니다. 그 격률 첫 번째는 자신이 명백한 진실로 판명한 것만 받아들일 것이며, 그 두 번째는 모든 문제를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빠뜨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솔직히 당연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물론 당연한 말입니다. 이 말 뿐만이 아니라 철학의 대부분의 명제들은 당연한 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말을 이렇게 의식의 표면에 이끌어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하고 쉬운 말들은 마치 물이 흐르듯 의식에서 스르르 흘러가버리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저 방법론 4원칙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 원칙은 수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일들, 가령 바로 이런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과연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접근해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국가는 어떤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다스려야 되는지, 애국심이라는 감정은 어떤 감정인지, 혁명은 어떤 것이고 진보정치는 무엇인지, 국가는 어떤 이상을 가져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정치인은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가, 가 바로 책 후반부를 차지하는 내용들입니다. 이 질문들이 국가의 모든 것을 포괄한 것인지 저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당연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일견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것처럼 이런 질문들을 이끌어내는데 저자도 정말 수많은 고민을 했으리라는 점은 두말 할 나위 없겠습니다.


4.


  우리들은 수많은 부조리들로 둘러싸여져 살아갑니다. 정치인들의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고 옛날에 문제시 되었던 일이 아직도 문제시 되는 게 현실입니다. 책의 서두에서 언급되는 용산 철거민 사태에서부터 최근에는 4대강 사업과 등록금 문제 등 거기에 빈부격차는 여전히 심화되고만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가 써지게 된 배경은 분명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 테지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약간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책의 좋은 내용도 그 저자의 가치관, 즉 진보적 성향에 자꾸 연관을 하면서 읽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는 현실 정치에 적용을 시켜서 책 내용을 진행해주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뒷부분을 읽을수록 은근슬쩍 집어넣은 현실 정치와의 대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를 이야기하는데 그 정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그 정부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를 빼놓고 정부의 정책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정부에 논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논객도 자신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같은 정치관이든 다른 정치관이든 말이지요. 저자는 이를 긍정이라도 하듯이 책 내에서 그의 진보에 대한 성향을 드러냅니다. ‘진보란 진화에 따라서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낡은 제도에서 벗어나서 오늘날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을 펼쳐나가는 것’ 이라고 말이지요. 책에서도 물론 언급했다시피 진보와 보수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 쪽으로는 날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가 있다면 그 중 더 나은 것은 진보다,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유주의와 국가주의를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주의가 좋은 국가론이다, 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진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국가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자의 온화함을 겉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와 같은 문장은 저런 생각을 뒷받침해줍니다. 물론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정권을 잡은 보수정당에서는 정말 백분 토론에서 말했듯이 ‘제발 좀 살려달라’ 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을 하기도 하고,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게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그리 옹호하지도 않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도 하며, ‘이것 봐, 이것만 완성이 된다면 언젠가 사람들이 내가 한 공적을 알아줄 거야’ 라는 생각으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저런 일들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라 국민과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정책들 모두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무차별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무의식중에 진보는 옳고 보수는 나쁜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보수 정권이 하는 모든 일들을 국가에 해가 되는 일들로 보게 되고 정권은 당연히 진보가 쥐어야 된다, 라는 비약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국가주의 국가론이나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모두 하나의 국가를 두고 장님이 어루만지듯 만져본 것에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책의 저자는 진보가 옳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자유주의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텍스트 전반에서는 그의 진보와 자유주의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납니다. 게다가 저자가 정치인이었기에 그리고 이번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이기에 그의 성향을 배제하고 책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자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그의 국가에 대한 생각과 정치인에 대한 생각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 저자가 제기한 질문들에 맞춰서 이야기해보면 먼저 ‘자유주의 성향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텍스트를 읽으신 분들마다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애국심은 ‘굳이 기피할 대상은 아니며’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서 그 의지를 ‘정당과 정치인들이 북돋울 책무’가 있으며 전체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점진적 개혁의 길’을 걸어가야 하며 사회혁명은 일단 지양할 것이며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여야’ 하며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특정한 가치 하나만 추구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치라는 것이며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에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런 책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에 따른 보론으로 복지국가의 실현 그리고 연합정치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저렇게 주장을 정리하고 보니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정말 이상적이며 한편으로는 당연한 국가의 모습입니다. 국가가 선을 행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너무나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치조차 현실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글로써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겠지요.


5.


  요즘 이슈가 되는 문제는 반값 등록금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대학교들의 등록금은 거의 항상 인상만 해왔던 것 같습니다. 물가가 상승하기에 등록금도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물가 인상률의 1.5배까지는 법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카이스트의 자살 사건도 이 등록금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3.3학점 이상에 한해서 등록금 면제가 되며 그 이하의 학점에 대해서는 징벌적 등록금 제도를 시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지요. 지금은 조정을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만 애초에 경쟁의 결과로 승자승이 아니라 패자패가 되는 순간 이미 문제가 된 것 이었습니다. 이런 자살은 카이스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대학교들에서 목숨을 버리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추정컨대 200명에서 300명에 달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집권 여당에서 이를 정책으로 삼고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이 선거 때 뿌리는 그런 선심성 정책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정부에서의 반발과 당 내부에서의 방발에 부딪혀 현실화되기가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관련 예산이 없으면 무용지물로 돌아가 버리지요. 그러나 집권 보수 여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저는 이러한 정책을 하나의 큰 발걸음으로 보고 싶습니다. 비록 이런 정책이 거짓 공약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듣게 되더라도 이렇게 집권당에서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서 변화가 약간은 생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집권당의 성향이 보수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사회 문제의 해결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며 더 나아가서 이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그렇게 강조해왔던 사회 정의 실현과 공공선 실현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물론 아직 수백, 수천 미터 떨어져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프로그램을 하나 꼽으라면 슈퍼스타 K2라고 말하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오디션을 통해서 가수가 된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좁은 문을 통과해서 슈퍼스타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외모의 열세를 딛고 기적을 노래했었지요. 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들자면 역시나 ‘내 점수는요’ 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유행어를 빌려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내 국가는요, 시민을 자유롭게 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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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16 20:56   좋아요 0 | URL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해서ㅠㅠ 긴 글을 읽어도 긴 글을 읽은 것 같지 않은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ㅠㅠㅠ 사실 이 리뷰는 약간 짧았던 기억이 나는데 수양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글을 좀 더 쓰다보면 점차 약간씩 분량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이 내용도 넣어야지 저 내용도 넣어야지 이건 흥미를 유발하려고 이건 내용상 꼭 필요한 거라 등 이렇게 넣다보니깐 길어져버리더군요 큭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정말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항상 배우는 입장입니다. 완전 부끄럽네요ㅠ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언어의 감옥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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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언어의 감옥에서' 라는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느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제가 고민해오고, 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지요. 우리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언어를 구사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언어로 구현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있기 전에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을 구현한다는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일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운영체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구체제 DOS가 그랬고, 지금은 윈도우즈, 리눅스 등 수많은 운영체제가 있지요,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있어야 기계덩어리에 불과한 컴퓨터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게임을 한다던가, 이렇게 글을 쓴다던가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일종의 운영체제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런 비유는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약간 잘못되었지만, 언어(인간)가 있고 운영체제(컴퓨터)가 있으니깐, 그러나 적당한 비유가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 논리학자, 언어학자들까지 이런 문제에 매달리고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저번 러셀의 책에서 언급했던 비트겐슈타인부터,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몇 십 년을 바라본다면 역시나 노암 촘스키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그러고 보면 촘스키는 가장 언어의 근본에 다가간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변형생성문법을 제창하고 우리의 언어가 실재로 '존재' 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이라는데 의의를 둡니다. 그는 일단 플라톤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플라톤의 문제는 '우리가 정보가 이렇게 적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아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라는 내용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에게서 가나다, 혹은 알파벳만 배우고 단어들 익히고 그렇게 적은 내용만 배우는데도 전혀 듣지도 못한 문장을 어법에 맞게 사용하게 자라나지요. 촘스키는 이렇게 되는 이유가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LAD :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가 있기 때문이며 유전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종의 언어에 대한 보편적 그리고 선험적 지식이 담겨있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가 이 오랜 가설을 뒤집었다고 합니다. 관련된 뉴스가 하나뿐이라 내용의 신빙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연구에 의하면 네덜란드의 어느 심리언어학 연구소에서 4개 어족, 301개의 언어 문법 발달을 추적 관찰한 결과, 각 언어의 발달은 개별적인 문화의 진화에 따른다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는 동일한 규칙에 따라 기능하는 내재적 언어능력 때문에 언어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촘스키의 주장과는 상반되지요. 지금부터 말씀드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를 조명하는데 있어 저는 바로 저 '문화에 의해서 언어가 발달' 된다는 말에 집중합니다. 저자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그는 책의 첫 부분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유대인 파울 첼란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절규합니다. '자신의 진실은 오직 자신의 모어로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모어는 저자가 책에 직접 주를 달았듯, 모국어와는 다른 개념이고 그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무자각인 채로 자신 에 생겨버리는 언어' 며 '일단 몸에 익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로 사는 삶은 저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리라 집작됩니다. 주변의 차별, 멸시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삶의 환경이 일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쓰게 되고 결국엔 일본어가 모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깐 위의 연구결과를 약간 빌려오자면 서경식 교수 개인의 언어 발달은 그 주변의 일본적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발달된 모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이윽고 자신의 생각마저도, 앞서 이야기한 운영체제마저도 일본어가 되어버리게 되고, 결국엔 그 일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 '언어의 감옥에서' 에는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논해봅니다.


2.


  윤동주는 연세대, 정확히 말하면 그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었다죠. 그래서 연세대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시비를 세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예전에 연세대에 잠시 적을 두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연세대에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는 이야기는 제가 연세대서 떠난 뒤에 들은 터라서 그의 시비는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시는 참 좋아했습니다. 책은 이 서시를 왜곡하는 일본의 번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논란이 되는 문장은 하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입니다. 이를 일본의 번역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오역합니다. 사실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일본의 번역가 말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말로 대체를 해도 상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냉소적 어투로 그런 세세한 것까지 뭐 하러 신경을 쓰냐. 그런 조그만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최소한 서시를 읽지 않느냐. 지금 일본 우경화 세력이 날뛰는데 그런 것을 경계하는 게 훨씬 옳지 않냐. 이렇게 주장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말도 얼핏 맞는 듯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도는 자기네 땅이다, 라는 발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고, 어쩌면 일본 내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선결 과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경계하는데 바쳐져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모든 일본인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야’ 이런 생각을 심어주는 그런 소위 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 책에서는 리버럴 세력으로 소개됩니다만, 그런 자들을 더욱 더 경계해야한다고 밝힙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었던가요, 사람이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잘 아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미지의 것,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두려움을 안겨준다고. 똑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일종의 양지의 ‘칼’입니다. 보이는 칼은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서 제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리버럴 세력의 퇴락은 음지의 ‘무기’입니다. 이게 칼인지조차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 몸을 찌를지도 모릅니다.


3.


  적어도 저와 비슷하거나 나이 어린 또래에게서 일본 문화란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저 개인적으로도 일본 노래를 듣기도 하고 만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본이라는 데가 영 나쁜 데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행도 쉽게 다녀올 수 있고, 먹을거리도 맛이 좋고, 괜히 오차즈케나 스시를 먹으며 웰빙의 기분을 맛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사실 일본의 강점기의 기억이 흐려져만 갑니다. 어쩌면 몇 몇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마저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지! 우리가 발전하려면 무조건 배타적으로 일본인들을 미워해서는 안돼, 라고. 아닐 것 같지만 제가 본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외국에서 공부를 해 본 아이들마저 '아, 일본인이라고 하니깐 괜히 부정적 인식이었는데 같이 공부해보니깐 괜찮더라.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거 아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과거에 묻는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라는 겁니다.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는 그들 일본인의 속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설명합니다. 일본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그나마 ‘양심적’ 이라는 지식인들도 그들의 치부에 논의가 이르면 다 ‘그때는 전쟁 중이라서 명령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침략당한 나라에서는 침략자일 뿐인 병사들을 끌어안은 후 그 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는 말꼬리잡기만 할 뿐 실제로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책임은 진실로 그들 자신들을 위로하는 그런 수사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그들이 책임을 질 마음이 있었다면, 위안부문제가 부결되지는 않았겠지요, 재일조선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시름시름 앓아가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들 자신들은 끊임없이 ‘사과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를 하라는 말이냐’ 라고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말을 하지만 백 번 사과를 한 들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사과(라고 주장하는 것)에 담긴 허구성을 이 책은 치밀한 논리로 낱낱이 파헤칩니다.


어쩌면 이렇게 서경식 교수가 그들의 논리를 파헤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본인들의 말을 모어로 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 집단은 싫으나 좋으나 일종의 의식을 공유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언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오면서 오랜 세월 갈고 닦인 것이기에 그것엔 어쩔 수 없이 그 집단의 문화가 녹여져있게 됩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생각해봐도 ‘말이 안 통하는데’ 당연히 상대의 말을 배우겠지요. 다짜고짜 그들의 문물을 퍼부어가며 이거 봐라, 이건 어떠냐, 이렇게 하지는 않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분별한 문물의 주입들을 일종의 침략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라도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사례를 세계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을 멸망시켰던 스페인 군대가 그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한 집단의 말을 익히는 것은 그 집단의 이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 말을 선천적으로 익힌 상태, 그러니깐 모어로 삼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그 집단의 문화의 영향을 진하게 받을 것도 자명합니다. 서경식 교수는 이런 점에서 일본어의 그 조그만 뉘앙스조차 예민하게 감지해내며 거기에 더하여 재일조선인이라는 그가 처해있는 힘겨운 상황 때문에 리버럴 세력의 사상의 허구를 조목조목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책에서 큰 흐름을 차지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세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프리모 레비에 대해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지만 파울 첼란과 장 아메리는 이 책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세 명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나치에게서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동일합니다.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큰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파울 첼란에 초점을 맞춰서 나아가보겠습니다. 앞서서 파울 첼란의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첼란은 그가 문학상을 탈 때 소감을 이렇게 밝혔지요. ‘갖가지 손실 중에서 언어만이 다른 이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상실되지 않은 것으로 남았다.’ 라고.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는 국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이라고 단언합니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모어로 독일어를 쓰는 입장에서, 독일에게 박해를 받았다고 그 언어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독일어가 꼭 독일인이 쓰는 것이 아니다, 독일어를 모어로 가진 독일인이 아닌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는 저자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비록 조선인이지만(저자가 본인을 남과 북이 통일된 나라로서의 조선인으로 언급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모어로 일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첼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저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록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모어로 쓰고 있지만, 일본어 자체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모어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선어를 선택하겠지만 이미 일본어가 자신의 틀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비록 감옥 같은 언어이지만 떼어낼 수는 없다.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대상은 일본어를 쓰기 때문에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국가다, 라고 말이지요. 물론 이런 성찰을 이끌어내기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였을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다른 조선인이었던 시인 김시종은 일본어에 결코 숙달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모국어를 습득하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이 저자에게 물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첼란의 사례를 받아들이며 극복해내는 중이라 생각됩니다. (근원적인 극복은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엄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비록 첼란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모어로 일본과 대결하고 있지요. 앞서 쓴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이라는 말에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디 여행을 갔을 때 ‘당신 일본인이에요?’ 라고 묻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본어가 모어라는 이야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일본어로 된 저작과 일본어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서 형성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다시금 말하면 일본의 시각이 어쩔 수 없이 정체성 형성과정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실제로는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닌데 어느덧 일본인처럼 사고를 가지도록 주입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폭력이지요. 즉, 식민지의 경험이 여전히 그들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바로 곁에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글을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자마자 바로 쓰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 글들이 자신의 몸속에서 축적되고 축적되다가 결국 분출되듯이 말이죠. 평소에 아무런 일이 없이 평화로울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리고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라는 강한 정신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경우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기서 더 나아가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그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이겨내게 만든 근원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희박하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은 뭉치게 됩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이 자신이 유대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근원을 모르던 사람들도 유대인을 박해하는 나치 정권 앞에서 자신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박해가 있어서 거기에 대응하는 집단이 생겨난 거지요. 여기까지는 장 아메리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으니 그것은 모어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미치지 않게 만들었지만 장 아메리의 경우에는 상황이 나빠서 그가 가졌던 독일 문화가 그를 내부로부터 찌르는 칼이 된 형세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언어경험은 이들만 겪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를 당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겪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아포리아Aporia, 내 정체성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것과 내 모어로서의 일본어를 합치시켜 나갈 수 있을까, 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다문화 공동체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5.


  이 책은 정말 논리적으로 치밀하며 저자의 문체는 정갈합니다. 마치 베틀에서 씨줄과 날줄을 촘촘히 짜내어 이윽고 아름다운 옷감을 만드는 작업을 보는 듯 합니다. 특히 그가 이 책에서 리버럴 세력의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논파하는 부분은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다문화 공동체에 대한 부분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서 서경식 교수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다원주의를 채용하는 그런 공동체로 나아가야 된다고 언급을 합니다. 그러니깐 이왕 문이 열린 김에 가장 열린 나라로 나아가지는 말이지요. 사실 이 부분은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일종의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여 많이 주저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는 너무나 디아스포라적인 시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기에 그들의 상황을 도리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동일 선상에서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소속감이 없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한 국가에 속한 사람은 그렇게 속해있기에 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대로 정말로 열린 국가를 지향하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늘어나는 걸까요? 우리의 문화는 어디까지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미국이 그랬듯 용광로처럼 인종을 다 녹여서 포용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인문학자 호미 바바의 말을 잠깐 빌려오겠습니다. 문화는 아무리 서로 융합되더라도 이윽고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호미 바바는 식민지배를 한 국가와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 사이의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저렇게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용시켜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단일민족이었고, 단일민족이라는 점에 대해서 일종의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과연 다른 문화와 인종을 다 녹여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한 만큼 (통일을 왜 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 첫 번째 답변이 우리는 한민족이니깐요, 라는 말이 많습니다.) 문화의 핵도 클 것이고, 이는 도리어 열린 나라라고 찾아온 다른 민족을 우리의 문화나 역사에 다 녹이는 우를 범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현실적 문제도 산재하겠지요. 국력이 약화될 수도 있겠고, 다른 나라가 우리를 본받아 순순히 문을 열어 지구공동체로 나아갈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도 그것을 알고 공상적인 이야기이다, 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적어도 이 부분은 저자가 생각한 대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인간으로서 범인류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국가 간의 소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의 진보라는데 동의합니다만 아마 그런 일은.. 화성에서 침공해오지 않는 한 생기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5.


  몇 번이고 몇 몇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감옥에서 내가 어떻게 열쇠를 건네줄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열쇠는 아마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책임을 거부하지 않는 진지한 자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저 개인이 어떻게 해낼 수 있는 차원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본 내부에서의 성찰로부터 비롯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쪽은 사과를 요구하고, 다른 쪽은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되는 거냐고 화를 내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물론 일본 내부의 자성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본의 리버럴 세력이 자신들은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사상적으로 퇴락에 빠져버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은 일본은 충분히 사과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쇄신이 필요하다고 옹호하는 우리나라의 몇 몇 지식인들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사과가 끝났다 운운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상적 퇴락의 독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을 중독 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고, 사과를 했으니, 이제 사과를 그만 받아도 된다, 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과를 받을 권리는 있지만, 여기서 받을 권리라는 것은 정말 그 사과가 가서 닿아야 할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요구를 할 권리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만 예로 들자면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정녕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최근에 본 뉴스에 일본의 도서 반환이 연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오래 지속해 온 외교의 결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일본의 다수 계층에서도 자신들의 수탈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자세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저자와 다른 재일조선인들이 이런 글로서 일본에 힘들게 싸움을 해온 성과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아직 이것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인식의 변화를 이루게 된 것은 앞으로는 조금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러면 언젠가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 교수도 더 이상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살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입니다. 서경식 교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재일조선인 모두가. 
  

p. s. 글을 쓰다가 Go라는 일본 영화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재일조선인을 다룬 영화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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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6-11 23:3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그런 생각안했는걸요ㅠㅠ 저도 이제 접속해서ㅠㅠㅠ 사실 덕분에 저도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게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헉, 제가 첫 댓글이었군요ㅎㅎㅎ 요즘 바쁜.. 척 하느라 잘 접속못하고 있는데 종종 들어가서 댓글 남길께요. 근데 여기서 비밀 댓글 클릭하면 님과 저만 볼 수 있는건지 아니면 저만 볼 수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그냥 남길께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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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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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러셀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책 '논리철학논고'에서였습니다. '논리철학논고'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총 명제는 일곱 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곱 개를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에 함수를 끌어와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통에 저는 중간에 읽다가 책을 놓다가 뒷부분으로 훌쩍 넘기는 등 결국엔 완전히 다 읽지 못하고 놓아두게 되었습니다. '논리철학논고'가 무엇을 다루느냐면, 언어와 논리에 대해서 다룹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그림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명확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철학은 이를 명료화하는 과정이다.’ 등을 다룬다고 적어두겠습니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정말 쉽지 않은 책이라 제가 위에 저 책이 저런 것들을 논한다, 라고 언급한 부분이 정말 그러한지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군요. 그런데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의 어디서 러셀이 언급되었을까요? 바로 이 부분입니다.


'러셀의 도움으로', '러셀이 그의 책에서 논증하듯이'


사상이라도 완전 다 언급한 줄 알았네, 라고 기대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러셀의 이름은 거의 저런 식으로밖에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렇게 어려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다니, 그것만으로 정말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사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종류의 논리학에 대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었지요.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것은 사실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들은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라는 말과 함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었지요. 그러면 러셀은 과연 어떤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의 인생은 어디에 바쳐져있었기에 그가 매료되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성과를 비판하기에 이르렀을까요.


2.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책은 원제가 'Bertrand Russell's Best' 라고 합니다. 러셀은 그의 긴 삶과 함께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기에 그의 책을 모두 접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저만 해도 러셀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다른 책들에서 언급된 2차적 저작물들이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와 같은 책정도 밖에는 읽어보지를 못했으니깐요. 그렇기에 그 저작물 중 엑기스라고 평가할 만한 부분을 모아서 이렇게 책을 내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러셀의 베스트, 라고 평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러셀을 정말 대가다, 라고 평할 수 있는 부분은 수학과 논리부분이겠지요. 그 외의 부분이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큰 족적을 남긴 기호논리학부분이라던가, 논리에 대한 그의 공헌을 빼놓고 제목을 베스트, 라고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러셀은 이 책, 그러니깐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 한마디 합니다.


'그러면 책 판매 부수가 줄어들 거야'


그렇겠지요. 논리와 수학에 관한 내용을 싣는다면 분명 일반 대중들로서는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관심이 멀어질 대중들 속에는 저도 물론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제외한 남은 부분, 그러니깐 이 책에서 다루는 결혼과 성이라던가, 윤리, 정치, 심리, 종교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러셀은 그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말들을 아낌없이 내놓아 보입니다. 철학은 어렵다, 철학자들은 항상 딱딱한 말만 한다, 등의 편견이라도 깨듯이 그 자신이 철학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그 자신이 쉬운 말로 대중들을 위해서 그의 생각을 정제시켜나갑니다. 프랑스의 어느 문필가가 했던 말이던가요, 현인은 쉬운 말로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우인은 그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어려운 말을 쓰는 경향이 많다고 하지요. 가벼운 말 속에 곱씹어볼 내용이 있다는 말은 그 말 자체는 하기 쉬울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말을 이끌어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러셀은 이런 점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그의 해학으로 끌어오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각에 ‘생각거리’를 던져줌으로써 그가 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가 작고하기 몇 주 전까지 이 책의 원고를 검토했다는 말은 그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했나를 보여주는 말이겠지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상은 사라지게 되고 대중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굵직굵직한 이슈들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힘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에 대답을 하는 일’ 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 중에는 그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중 생활을 하게 만든 반핵시위도 있지요.


3.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 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책 페이지를 지적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종교 부분의 101페이지에 똑같은 문단이 다시 반복되지요. ‘내가 보기에 자연의 ~ 잊지 말아야 한다’ 부분입니다.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적어두었는지, 책의 원본에도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이 되어있는지, 아니면 편집상의 실수인건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합니다만... 이 부분이 굳이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구성에 대한 단점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각 글에 출처를 바로 밑에 명시한 점도 사실 내키지 않습니다.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그러모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각 부분에 대해서 '여는 말', 그리고 '닫는 말'이 따로 첨부되어있는데, 적어도 닫는 말은 없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닫는 글이 있음으로서 손님이 집에 왔는데 어린애가 난리를 피워서 안방이 엉망이라서, 억지로 문을 밀어붙여놓은 그런 느낌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유를 들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러셀은 어린애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름대로 사색을 한 결과로 빚어낸 문장들인데 그것들을 뭉뚱그려서 닫아버리려고 하니 어색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이제 내용에 관한 단점을 지적하자면 가장 먼저 들 수 있는게 가볍다는 점입니다. 러셀의 풍자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기는 쉽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그들의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는 이 책이 제 몫을 다하겠지요. 웃음 속에 우리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거리가 진지한 사색으로 발전하느냐는 의문에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래서 러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의 저서를 읽어본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는 쉽게 만족하지 못할 글들입니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글 전체의 맥락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단 A, 문단 B, 문단C로 구성된 글이 있다고 합시다. A, B가 서로 상반된 내용을 주장하지만 C까지 읽어보니깐 정말 작가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A였습니다. 그런데 글의 일부분만 발췌하여서 인용한다면 B를 인용한 사람은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러셀의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책들 중 수많은 책들의 ‘일부분’ 이 글 전체 내용과는 상관이 없이 그를 비난하는데 쓰여 왔습니다. 이 책은 그런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 책만 읽고 러셀에 대해서 정반대의 주장을 가지고, 혹은 그의 주장의 일부분을 가지고 버트런드 러셀에 대해서 아는 척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그의 사상을 집약해서 정의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4.  


그러나 저렇게 비판할 부분만 이 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그 단점을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첫 문단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삶은 어디에 바쳐져 있었을까요? 여기서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노암 촘스키는 그의 연구실에 러셀의 좌우명을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의 글입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었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은 이 책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의 표지와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은 사랑에 대한 갈망과 탐구욕, 그리고 인류에 대한 연민에 바쳐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저작활동을 하고 반핵운동에 뛰어들고 굵직굵직한 이슈에 답해온 것이 이해갑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러셀이 대중들 속으로 뛰어들어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교 교수 임용에서 외설 시비로 인하여 떨어졌을 때부터였겠지만, 그 사실이 그가 대중에 대해서 연민이나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대중과 갈수록 멀어지는 언어철학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 글은 이 책이 가지는 의의를 새롭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러셀은 평생을 걸쳐서 스스로의 의견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주장은 세월이 지나가면서 다른 견해를 수용하면서 바꾸어나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것은 결국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이 지나쳐 네 번씩이나 결혼을 했겠습니다만, 아, 이렇게 쓰면 러셀이 저를 인습과 지배적 도덕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려나요, 그러나 이런 결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비판과 풍자가 결국에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이 서로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한 시대에 따뜻한 햇볕을 비춰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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