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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폭력의 자유.

 

  글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경험을 겪을 때가 많지만, 특히 당혹스러울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와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전에 쓴 그 글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글의 객관성을 자신이 어떻게 담보하겠습니까?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자신의 글을 사용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객관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이고, 당연히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글들은 그 글이 내세우는 근거가 객관적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책 ‘폭력의 자유’의 첫 장을 넘겼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사실 많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보고 들은 사실들을 개인적 시각으로 적었다.’ 라고. 그리고 동시에 이를 ‘자전적 에세이’ 로 여겨달라는 부연을 덧붙이지만 이는 책 자체의 관점을 하나로 한정시켜버리며 이런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적은 사례는 내가 직접 발로 뛰면서 겪은 사례들이다. (직접 내 눈으로, 발로 확인한 일들이기에 잘못된 일은 없다.)’

 

물론 직접 겪은 사람의 관점이 하나의 사실을 보는데 가장 좋은 관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해방 전후부터 살아온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에게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말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말하는 것들을 모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뇌는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겪은 일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에 맞춰서 바뀔 수 있고, 바뀌지 않더라도 그 틀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변의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서 검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폭력의 자유, 라는 책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철은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언론의 발전에 있어서 발로 뛰면서 사회 상황에 조금이라도 진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발전시켜서 생생한 그림을 그리며 한국 언론사를 조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생생함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어느 정도는 한국 현대 언론사에 대하여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의 관점, 이라는 것은 저자의 관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저자는 보수 기득권 언론과 맞서서 싸워온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관점은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진보쪽이겠지요. 소위 말하는 보수적 스탠스를 가진 언론들, 조선, 중앙, 동아, 의 왜곡과 그에 대항하면서 자라온 한겨레, 경향과 같은 신문들의 발전사, 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처음부터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아무리 조선, 중앙, 동아의 왜곡에 대하여 이야기하더라도 전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더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책의 구성을 조금 살펴보면 이 책의 저자가 대략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책을 읽지 않더라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례에 보면 1부부터 9부까지 되어있는데, 저자가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부분이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 부분은 바로 3부와 9부인데, 3부는 박정희 시대 언론과 권력,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부의 제목은 이명박 시대 보수 언론 공기인가, 흉기인가, 인데 이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 3부와 9부는 쪽수로만 따져도 100쪽이 넘습니다. 다른 부분은 20쪽에서 50쪽 정도인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는 동시에 저자가 가장 한국 언론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때라고 여기는 시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 라는 말이 됩니다. 할 말이 없고, 사건이 없는데 뭐 하러 쪽수를 많이 배정하겠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쪽수를 배정하고 쓰지는 않았겠지요. 하고 싶은 말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쪽수가 길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각 부의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저자가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각 부는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있고, 해방 이후에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언론사를 적어두었는데, 처음에는 각 장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등장하지 않는가 하면, 처음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9부에 속한 장들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5장 방송 연대파업, 6장 멀고도 험한 방송 민주화, 7장 연합뉴스의 파업, 8장 거대 교회 권력의 싸움, 9장 노조의 투쟁. 얼핏 읽어봐도 싸움, 투쟁, 파업이라는 단어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과 파업은 이전 장들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이전 시대들에서 이 책의 저자가 뽑은 단어들은 재갈 물리다, 쫓겨나다, 등의 단어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처음 해방 전후 공간에서는 일제와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독재 시대에서도 독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언론사 자체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론은 그동안 정말 많은 부침을 겪었었지만,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에 많은 위기를 겪었다. 박정희 시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라는 구체적 외부의 적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외부의 적에 가려졌었던 보수적 언론사 권력, 이 진정한 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싸움, 투쟁, 파업과 같은 수단이 쓰인다. 가 되겠지요. 이에 대하여 저자는 직접 책에서 말합니다. ‘그동안 언론과 정치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단순한 유착을 넘어 밀월 관계에 이르렀다’ 고 말입니다. 박정희 시대에서의 언론을 떠올려보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유착을 넘어 밀월에 이르렀다, 라는 부분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착이면 유착이지, 왜 밀월일까요? 이 책에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독재가 해소된 뒤의 대통령들의 정책들에서 찾습니다. 독재 시대에서부터 유착과 굴종을 통하여 이미 자본과 자산을 축적한 언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가 싫은 법,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 자본을 굴려서 더욱 더 큰 자본을 이루어냅니다. 이런 스노우볼링Snowballing은 때마침 찾아온 정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언론법 개정 등을 통하여 산사태처럼 부풀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소위 말하는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고, 보수에 대한 어떤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언론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모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은 도출해내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해낼 수 있는 그런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자 본인은 뒤에 루퍼트 머독이라던가, 위키리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에 덧붙였지만, 그런 사례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더라도 사실 진정한 해답은 되지 못합니다. 대안언론? 사실 우리나라에는 소위 말하는 대안언론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만큼 발전한 곳도 드물지요. 인터넷의 발달덕분에 수많은 언론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언론 자체의 기능에 순수하게 충족시키는가, 에 대한 물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진보, 보수 틀을 넘어서야만 할까요? 방금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하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극단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중간 쪽으로 데려오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김기협이 쓴 해방일기, 에서 가져오고자 합니다. 해방일기에서 보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으며, 역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좌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실제로 분단이 일어난 것은 외부의 원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틀이 거대 보수화된 언론 권력, 그리고 정치 권력과 이에 대응이 되는 진보적 색채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들의 대결 구도로 나타난다면, 이 틀이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은 변증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론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여 그 속의 한계를 이끌어낸다면, 그리하여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담론을 가져온다면 책에서 드러난 진보, 보수 대결구도에서 언론 자체의 속성과 그 외의 것들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공통의 적이 생기면 뭉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언론의 한계라는 말은 사실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발행되기 위해서는 사업체로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업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어쩔 수 없이 편입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공간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이들 모두 사업체입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달고, 이용자들이 많이 찾아줄수록 수익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조정환이 쓴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그런 공장의 컨테이너를 탈취하여 사용한다’ 는 개념이 나왔었지만 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일방향으로 전파가 되는 신문과 방송에서는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체라면 수입을 내야 되는데, 광고수입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 광고는 기업체들이 싣습니다. 언론으로써는 이를 외면하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사업체라면 혼자 운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계입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와 편집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언론이 대중을 생각한다면 그들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계속 대안언론을 해나가면 그런 한계를 없앨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이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찻잔 속의 태풍’ 이라는 벽에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정말 큰 이슈가 되더라도 그 이슈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인터넷 실제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겁니다. 실제 방송에서도 ‘오늘의 검색어’ 라면서 인터넷 검색어들을 소개하면서 네티즌 의견을 소개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방송이나 신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티즌 의견을 뽑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언론은 분명 가지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한계를 없애기에는 사실 현재 언론 구조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이 책, 폭력의 자유, 의 첫머리, 해방 전후의 언론사에서도 드러나듯이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굽힌 사람은 두 번 굽히기 쉽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이미 언론들은 심한 탄압을 받고 그들의 몸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싹튼 모순들은 지금에 이르러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업, 투쟁, 싸움으로는 뿌리를 뽑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들고 싶습니다. 기존의 진보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보수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그런 언론들 모두를 옆으로 제쳐두고는 새롭게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 보수의 간극은 깊고 넓지만, 서로의 편의 증대, 라는 협동조합의 목적 아래에서는 분명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할 것입니다. 사업체라면, 그래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현재 언론 중 진보적 색채를 가진 매체인 프레시안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협동조합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특별히 언론의 문제점들이 해소되거나 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보며, 인터넷 기반과 진보적 색채 자체 또한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대립에서 벗어나 협동조합으로 이뤄진 언론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겠지요. 지금 언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전망을 해봅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사실 책의 제목에 대해서 갸웃거렸습니다. 폭력의 자유, 라는 제목은 폭력과 자유, 도 아니며 폭력은 자유, 도 아닙니다. 두 명사가 전혀 맥락에 맞지 않게 위치되어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유를 얻는다, 라는 뜻은 아닐 것 같고, 한국 현대 언론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인 폭력, 그리고 자유, 그러나 그 두 개를 합쳐놓으니 저자가 어떤 반어적 효과를 노린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이는 반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엔 진보적 언론과 보수적 세력의 구도가 전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거기에 앞서 언론 자체에 대한 자성이 깔려있습니다.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펜은 무한히 날카롭습니다. 그 펜으로 누구를 사회적으로 말살할 수 있기도 하며, 어떤 후보를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폭력, 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유, 를 언론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펜을 움직일 때 항상 그 점을 유의해야만 할 것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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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24 23:09   좋아요 0 | URL
역시 가연님 글이 좋습니다. 협동조합으로 언론사를 만든다는 건 생각을 못해봤네요. (아..프레시안도 그런 거였군요.) 확실히 언론도 경제구조하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하기는 예전에 누군가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이 나오는 구멍이다,라고 하더군요.)


가연 2013-09-25 09:40   좋아요 0 | URL
ㅠㅠㅠ 부끄럽습니다. 아직 다른 한 권 읽고 있는 중이라 다른 분들의 글은 구경도 못했네요. 맥거핀님께서는 다 읽으셨나요? 협동 조합은 여러 가능성이 있을 듯 하여 이렇게 언론쪽에도 붙여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써놓고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을 자꾸 받는 중입니다.

희선 2013-09-25 00:35   좋아요 0 | URL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고 언론의 한계를 넘어서, 제목이 좋군요 정말 이렇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에 마음이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도 괜찮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마음을 열어둔다면 좋을 텐데요 이것은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사람이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죠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 좋겠군요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달라도 말을 나누다 보면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론인들은 정말 펜을 마음껏 휘두르면 안 됩니다 언론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글을 이용하면 안 돼요


희선

가연 2013-09-25 09:43   좋아요 0 | URL
아하하.. 협동조합의 원리를 보고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쫌 찜찜하달까, 뭔가 부족하달까. 평가단 다른 한 권이 기만에 관한 책인데, 편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리고 편향된 것을 고치기 정말 어렵다, 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 찜찜한 것 같아요. 마지막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만 분명 비판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마립간 2013-09-25 08:29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위 글은 제게 해당되는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요. 객관성을 담보하기 보다, 생각의 일관성 및 현재 생각이 있게 된 근거되는 과거 생각의 서술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가연 2013-09-25 09:38   좋아요 0 | URL
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해명을 합니다. 확실히 마립간님께서 여기 서재에서 댓글을 다실때 예전 글들을 같이 읽어보라고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었었지요. 그런데 그런 예전 글들을 마립간님께서 참고 자료라고 생각하시고 쓰셨던 거라면.. 분명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댓글을 읽으면서 받아들였던 것은 참고자료라기 보다는 (사실 이런 블로그 등의 댓글에서 분명한 참고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생각의 궤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서두에 저 글을 쓴 것은 첫 문단의 아래쪽에도 보듯, 적어도 책으로, 그리고 부제로 현대언론사, 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면 그런 저자 자신의 시각은 어느 정도는 배제하여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 제가 쓴 글에는 빠져있지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쓴 신문기사도 일부분이지만 실려있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 본인이 물론 현대언론사에서 한 역할을 맡았던 분이겠지만, 신문 기사는 사실 그 색채에 따라서 어조가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부분은 언급을 하여야겠다고 여겼습니다. 혹시나 저 글이 본인을 겨냥해서 쓰인게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립간 2013-09-25 14:2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가연님의 글을 타산지석처럼 내게 적용해 볼 것은 없나 생각해 본 것입니다.

가연님이 쓰신 글은 위 책에 대해서 쓰신 것은 맞습니다만, (게다가 제가 책을 읽지 않아, 책의 뉴앙스를 알 수 없지만) 지적하신 바가 일반화가 될 수 있는지, 가연님의 가치판단이 맞는지 생각했는데,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책(공개?), 부제, 언론이란 분야 등 특정화가 있으면 가치 잣대가 달라지나 해서요.

가연 2013-09-25 21:3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넷상에서는 쉽게 오해가 쌓일 수 있는 법이니.. 조심하는게 옳지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가치 판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사실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첫 문단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입니다. 여기에 가치 잣대가 들어갈 부분이 있는지 좀 의아해집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조금 더 부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은 제가 저 명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마립간 2013-09-26 08:48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마지막 댓글을 읽으니, 저와 가연님과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던 부분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 객관적.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제 주장을 강력히 표현하지 않더라고 (통계숫자만을 나열하지 않는 한, 통계 숫자를 표현하더라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에 약간의 주장을 포함하게 되죠. 그리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과학적, 객관적, 타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저의 경우는 생각의 궤적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저의 글을 referece로 제시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리고 자기표절을 피하기 위해 (잘 아시겠지만) 의학논문의 인용에 (특히 연구배경에서) 자신의 연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이란 단어는 제 글과 위 책의 글이 같은 수준의 글로 보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중복게제 논쟁에서 독후감과 논문은 같은 창작글로 본 가치판단과 상품평과 같은 서평과 논문은 다른 수준으로 봐야 한다는 가치판단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 책의 글이 (그리고 내용이)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라면 글쓴이 스스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자신의 글보다는 다른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지만, 과연 그런 글이었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 책을 읽지 않아서) 판단을 유보한 것입니다.

마립간 2013-09-26 08:49   좋아요 0 | URL
댓글을 쓰다보니, 이런 판단이 내려지네요. 위 책은 (가연님의 판단으로는) 내용상, 형식상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었는데, 그 근거를 자신의 글로 삼아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해 ; 결과적으로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가연 2013-09-26 20:07   좋아요 0 | URL
네, 마립간님의 두번째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에는 여전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여기가 마립간님과 저의 의견 차이겠지요.

가치판단은.. 사실 마립간님의 글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궤적, 으로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 더 관련시키지 않아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하긴 만약에 제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제 글에 연관지어서 생각을 했을 것 같지만.. 본의아니게 무신경하게 넘어가버린 것 같네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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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테판 츠바이크의 명성에 비하면 조금 그 빛이 바래는 감이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역사 전기 작가인 막스 갈로의 명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유려하면서도 짧은 호흡으로 쓰여지는 그의 역사 소설들은 쉽게 읽히기도 하고, 동시에 독자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번에 출간된 프랑스 대혁명, 도 바로 이 막스 갈로의 책인데, 여간한 야심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말 거대한 사건을 하나의 줄기를 잡아서 그대로 써내려간 작품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고증이 부족한 것은 또 아니다. 하나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는 정말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그걸 다시 머리속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재구성한 결과물들을 우리 눈에 보여준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리고 그 소설은 우리 마음에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아무리 막스 갈로가 뛰어난 역사가이자 작가라고 할지라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날카로운 인물평에는 한 수 접어주어야 할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평생 수많은 인물들의 전기를 썼는데, 어쩌면 그가 그렇게 전기에 집착한 것은 시대의 광기에서 눈을 돌리려는 시도였을런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히틀러의 시대였고, 수많은 죽음과 두려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난의 시대에서 재능을 가진 인물은 그 고난을 내면화하고, 이윽고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법, 그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수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막스 갈로는 소설가이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인데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가 있을까? 물론 직접적 비교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막스 갈로의 기존 저작들 - 로마 인물 시리즈, 나폴레옹 등 - 을 볼때, 막스 갈로도 인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경향을 참작한다면 주로 전기를 많이 써왔던 슈테판 츠바이크를 인물, 이라는 스펙트럼을 중심으로 함께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두 작가를 비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다음의 두 책을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언급한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 이라는 책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루이 16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루이 16세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막스 갈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특히나 루이 16세에 대한 두 작가의 상반된 태도를 보면 더욱더 그런 확신이 들게 되리라. 그런데 이 루이 16세는 단순히 두 작가의 성향만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프랑스 혁명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려내는 루이 16세는 (비록 책이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인공이라서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상당히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남성으로서의 능력(엄밀히 말하자면 생식능력)의 부족에 기인하여 그는 평생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주권을 빼앗기며,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왠만하면 다 들어주었던 것 처럼 그려지고 있다. 루이 16세가 사냥을 좋아하고, 대장간 일과 같은 남성적 힘이 필요한 취미를 가졌던 것 모두 남성적 능력이 부족하기에, 그 사실에 대한 심리적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라고 보고 있다. 결국 일종의 소시민이자 공처가가 뒤섞인 면모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루이 16세에 대한 평에 쐐기를 박는다. '이들 부부는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 왕과 왕비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에서는 몇 번이고 루이 16세의 실책이 나온다. 유명한 목걸이 사건(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환심을 사려고 추기경이 목걸이를 바치려 했지만 실제로는 사기를 당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을 들지 않았다면 귀족들이 왕을 등지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에 삼부회 소집시 총칼로 민중을 해산시켰다면 적어도 당대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약함과 부인에 대한 애정(이라고 보기에도 미묘한 감정) 때문이었고 이 나약함은 이윽고 자신의 목마저 내어주게 된다. 나중에 억류되어서 도망을 칠 때,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그리고 결국 베르사유 궁전에 쳐들어왔을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면, 역사는 정말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물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 문맥을 통해서 계속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위에 비하여 훨씬 입체적인데, 막스 갈로는 그의 역사소설 프랑스 대혁명, 의 전기 부분에서 루이 16세의 학구적인 면모를 먼저 언급한다. 이는 도리어 그의 학구적인 면모가 루이 16세를 나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싣게 되는 부분인데, 어려서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했었던 루이 16세는 이웃나라의 혁명을 보고 깊이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국의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왕의 목을 자르고 호국공에 올라 공포정치를 펼쳤다. 아마 이 장면을 보고 루이 16세는 자신의 목 또한 저렇게 잘릴 수 있지 않을까,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지는 않았을까? 두려움을 가지게 된 사람은 보통 두 가지로 반응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 두려움의 싹을 잘라내려고 모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에 먹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고,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시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루이 16세의 반응은 후자에 더 가깝다.

 

영국의 혁명들, 그러니까 청교도 혁명이나 명예 혁명 모두는 사실 그 주체가 민중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 16세가 저들의 역사를 보고 민중의 힘에 감명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목이 잘렸다, 라는 것이고, 왕과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는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국가' 자체가 목이 잘려버린 것이다. 여기서 루이 16세는 어떤 세력이든 간에, 자신에게 강하게 나오는 그런 세력들에게 결국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들과 동일시한다면 최소한 목이 잘리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우연찮게 그 세력이 민중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은 세력들에게 최대한 나약하게 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치기는 하지만 기존의 낡은 사고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행동한 결과 멸망해버린 존재로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와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고나 할까.

 

위의 두 작가가 그려내는 루이 16세는, '나약함' 이라는 결과에 이르면 결국 동일한 인물이 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는 사뭇 다른 궤도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루이 16세는 그저 냉담하고 감정 자체가 무딘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을 빌리자면 점액질 성격의)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더라도 그걸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인물이지만,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엔 실패해버렸지만 말이다. 과연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두 작가가 그려내는 루이 16세 중 어떤 루이 16세를 고르는 것이 좋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 책,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을 가져올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짧은 분량의 개괄서에 가까운 이 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알려준다. 그런데 방금 개괄서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 이 책이라고 해서 위의 두 루이 16세 중 어떤 루이를 고르는 것이 옳을지는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이런 갈림길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오늘 만나는 혁명, 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미에 꺼낸다.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을 조절하면서 더 좋은 결론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즉, 이 책이 제공하는 프레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구체제(혁명 이전의 체제)에서는 왕의 의견이 최고였었다. -> 거기에 대항한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의 혁명이다 -> 이 혁명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다양한 의견때문이다 ->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결국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려면 루이 16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를 살아간 민중을 이해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살아간 민중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당시 민중들에게는 세 가지 막연한 두려움 - 굶주림, 질병, 전쟁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그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 두려움 자체에 그대로 삼켜져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민중들의 두려움에 대한 대응방식은 전자였다. 이런 두려움은 그들에게 음모론적인 관념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윽고 귀족들이 자신을 착취하지는 않는가, 에 대한 생각을 계속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닥친 기근은 프랑스 민중들을 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아붙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 이르렀기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만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조각을 온전히 그러모으기는 어렵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문제점이 있는데, 아마 개괄서로서의 한계이리라. 분명 혁명은 군데군데 허점이 있었다. 왕이 조금만 제정신을 차려서 대포라도 발포했다면? 적극적으로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고 용병을 부려 잔혹하게 복수했다면 아무리 계몽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일지라도 분명 숨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가 한 일은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그저 국회에 대한 존중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내가 너희들을 존중해줄테니 너희들도 나를 존중해달라.

 

또한 민중과 왕, 이 두 세력 말고도 혁명의 배후에 존재한 세력이 있다. 바로 귀족이다. 앞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언급한 목걸이 사건, 이후로 수많은 귀족이 왕에게 등을 돌렸고, 왕의 동생과 조카는 이를 통해서 야심을 키워나갔다. 현재 있는 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에게는 이득이 될테니 무르익은 혁명의 분위기에 대해서 그들은 도리어 좋아하였으리라. 결국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은 이후에 루이 18세가 된다. 자, 생각해보라, 수많은 농민들, 그리고 생산자들이 그들의 생업에서 손을 떼고 거리로 나와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닌다. 과연 누가 이들을 먹여살렸겠는가? 이들이 숨겨둔 재산이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지원해준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세력은 아마 귀족이나 지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귀족이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민중들을 지원해줬을까? 그들이 단체로 돌아버린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귀족에 대한 설명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또한 이 책의 허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저 의문, 왜 민중을 귀족이 지원해주었을까, 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제시해준다. 먼저 당시에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에 있다. 이 책에서는 당시의 루소,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사람들의 사상이 퍼지면서 평민이라고 해도 귀족들의 살롱에 들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물론 상당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했겠지만) 이런 사상의 향유는 귀족들의 마음을 실제로 움직였을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의 경우 그저 이런 사상을 악세서리 정도로 생각했고, 이런 교양을 통하여 자신의 품격을 더 높인다, 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이다. 물론 또 다른 해답은 앞서 말한 부분인 적의 적은 친구, 왕에 대한 불만이 나타날수록 이득을 보는 세력이 민중을 지원해주었을 가능성이리라. 

 

하지만 이런 허점에 대한 책임을 모두 이 책에 돌리는 것은 어쩌면 부당할런지도 모른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입문서에 가깝기 때문일테고 - 서문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 무엇보다도 분명 이 책의 의의는 왕에 대비되는 민중의 눈으로 보는 혁명, 이라는 프레임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이 책이 이렇게 민중을 중심에 두고 혁명사를 이야기하려고 할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 또한 혁명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겪었지 않는가. 특히나 대표적인 4. 19 혁명처럼 말이다. 4. 19 혁명은 대표적인 민중의 힘에 의한 혁명이다. 이 4. 19 혁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정신이 완전히 싹을 틔우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 혁명은 어디에 기원하는가? 이 책은 그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뒤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귀가 있다.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 라는 말이다. 물론 책 본문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저 문장 이상의 문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위정자들, 당신만 신성한가? 사실은 우리가 더 신성하다. 라고. 프랑스 혁명은 언제나 위정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줄 것이다. 굳이 프랑스 혁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런 일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옛날에 비하여 훨씬 배움의 수준도 높고, 다양한 의견의 소중함,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소중한 이유를 더욱 깊이 깨치고 있다. 이미 어떤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리라. 이 책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때 흘린 피들을 잊지 않는 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감정이입'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되돌이킨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내면의 힘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p.s. 첫 문단만 세 번 고쳐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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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1 22:26   좋아요 0 | URL
와우~ 역시 가연님! 이 글만 읽어도 두 책의 장단점 및 프랑스혁명의 뒷면이 절로 그려져요!

가연 2013-08-05 00:08   좋아요 0 | URL
사실 이 글은 너무 많이 고쳐서 도리어 문단이 좀 뚝뚝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잘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선 2013-08-03 00:05   좋아요 0 | URL
프랑스 혁명 잘 모르지만, 민중이 일으켰다 해도 다른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귀족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하지만 그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살아야 하니까 왕이 사람들 말을 잘 들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왕이 보통 사람들을 잘 볼 수 없기는 하죠

프랑스 혁명이 있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니... 프랑스 혁명이 우리와 아주 먼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세계는 하나, 죠^^


희선

가연 2013-08-05 00:11   좋아요 0 | URL
프랑스 혁명때문에 4.19가 생긴 것은 아닌 것 같구.. 다만 4.19혁명의 민주정신은 프랑스 혁명에 빚지고 있다, 라는 의도로 글을 썼는데 잘 전달이 안된 것 같군요. 다 제 글 솜씨가 아직은 모자라서 그런 것 같네요.

왕은 보통 사람을 보기가 쉽지는 않죠. 글쎄, 요즘 역사를 보다가 느끼는 것은 정말, 약간만 방향이 바뀌더라도 정말 나중에 크게 바뀔 것 같다는 그런 생각들... 그러나 언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겠죠?

희선 2013-08-05 00:51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정신이군요 제가 앞에 있는 말보다 뒤에 있는 말을 더 본 것은 아닌가 싶군요 그리고 다른 생각을 했는데, 때가 다르군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그것은 거의 100년 뒤였네요 왜 그게 생각났는지... 아마 백성들이 한 일이기 때문이겠죠


희선

가연 2013-08-05 13:17   좋아요 0 | URL
4.19혁명은 1960년이구.. 프랑스 혁명은 1789년이니 굳이 따진다면 200년이 더 가깝겠네요, 풋. 저는 개인적으로 4.19를 더 높게 평가하는 편이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네요. 하지만 어떤 혁명이든지... 프랑스 혁명에 그 정신의 빚은 어느정도는 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2013-09-0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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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문학사상사 출판사에서 나온 '상실의 시대' 책을 보면, 제일 뒤에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출판사로 보내달라, 그러면 다 모아서 한꺼번에 보내주겠다' 라는 말이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당시 어렸던 저는 몇 번이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다가 다시 관뒀습니다. 첫 문장을 안녕하세요, 로 시작하면 그 뒤는 어떻게 적어야 할지,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거든요. 사실은 그다지 힘주어 쓸 편지도 아니었거늘, 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때는 이 편지를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여길지 상상을, 그것도 나쁜쪽으로만 상상을 하게 되더군요. 어리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저는 무의식중에 당신의 소설에 의지를 하려고 들었나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내서점에서 웅크려 읽던 책도 당신의 책이었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으면 바로 붙어있는 교내서점으로 내려가 정면에 보이는 부분이 일본소설들을 모아둔 곳이었는데 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당신의 단편집들을 구매해 읽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은 익숙한 것을 (주위가 모두 새로운 환경뿐이라면) 처음엔 따르기 마련이고, 당신의 이름은 내가 아는 일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뇌리에 깊게 새겨진 이름이었으니깐요. 그때 같이 산 소설이 티티새,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당신의 소설을 더 많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 요시모토 바나나도 제가 좋아하던 작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당신을 더 좋아했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무슨 열병에 걸린 것 처럼 잔디 바닥에 눕기도 했고, 계단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던 저는,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저에게 더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습니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은 (당신의 소설이니까 더 잘 기억하시겠지만)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하다가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라고 독백하면서 끝이 납니다. 다만 미도리보고 데려와달라, 너를 만나고 싶다, 라고만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 장면만큼 당시의 저에게 잘 들어맞았던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저도 어디로 가야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고, 어디에 내가 있는지조차 알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지나면서 계속 그렇게 도서관 계단에 걸터앉을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유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겠지요, 아니 할 수는 있어도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탈적, (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웠던) 행동을 하려면 억지로 꾸민 가면을 쓰지 않으면 못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펴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는 상실의 시대를 뒤집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지만요. 주인공의 주변에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여자아이가 있는 것도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의 변주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다자키 쓰쿠루는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과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찾아가지요. 그래서 이 책은 광고에서도 그렇듯 '당신은 어느 역에 있습니까?' 를 계속 물어옵니다. 역은 열린장소이자 동시에 어디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전작의 와타나베가 공중전화박스에 갇혀버렸다면 이번의 쓰쿠루는 사방으로 뚫린 곳에서 스스로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를 한발짝 더 진보했다, 주인공의 마음이 진보하거다, 라고 본다면,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늘 '회피' 로 끝나던 성격이 '다가감' 으로 기울어졌으니까.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위의 '도서관 계단에 걸터앉지를 못하는 것' 을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엔 외로웠던 거니까, 외로움을 해소하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테니까. 고고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던 행동들)이 무슨 소용일까, 사람 사이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러니 나도 다가가자, 라고 마지막장을 덮으며 그런 느낌을 다시금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미궁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냐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께요.

 

상실의 시대, 의 향기만 이 책에서 느낀 것은 아닙니다. 꿈속에서의 성적인 행위를 그려낸 부분은 해변의 카프카, 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어울리던 친한 친구들 중 두명의 여자아이들의 이름은 시로(흰색)와 구로(검은색)인데, 이는 1973년의 핀볼, 의 두명의 쌍둥이 여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주인공과 성교를 가지는 것조차도 비슷한 상황이지요. (비록 이 책에서는 꿈속이었지만요) 결국 떠나버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 외에도 동경기담집, 의 서사와 닮은 부분도 있습니다. 정말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다시금 생명을 갖고 반복됩니다.

 

 저는1Q84를 읽고 당신의 일생의 대작이 나왔다, 라고 여겼습니다. 아마 이 이상 더 훌륭한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다, 라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Q84를 읽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비난을 할때도 저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여겼습니다. (1Q84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소설인 듯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책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부풀었었습니다. 1Q84만큼은 못쓰더라도 이번 소설 또한 아주 뛰어난 작품이겠지, 라고. 하지만 뭐랄까, 네, 저는 이번 책이 마치 당신의 모든 작품들의 총집편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힘이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요.  

 

아까,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자, 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생각이 미궁속으로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했지요? 이제 그 이유를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은 그대로인가요? 당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그대로입니다. 주인공들한테 느껴지는 '시크함' 은 여전한데, 당신의 소설을 읽는 나는 더이상 그렇게 시크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그나마 '다가간다' 고 이야기하지만 그걸 언급하는 부분은 결국 마지막 몇 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몇 장을 제외하고는 당신의 소설의 분위기는 그 옛날의 상실의 시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서른을 훌쩍 넘는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질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질문에 지나지 않으며, 진짜 요지는 이것입니다 : 이렇게 그대로인 '그- 당신 소설의 그들' 가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러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궁에 빠져버렸습니다.

 

요즘 저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밤에 넓은 곳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자리에 나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다보니 술게임들도 제법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전의 저는 이런 것들은 모조리 질색이었고 이런데 시간을 쏟느니..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얻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이렇게 어울려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게 귀찮습니다. 혼자서는 못사는 세상, 그리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는 지혜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는 어울리기는 합니다만, 저는 도저히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지는 못할 것 같네요. 늘 그런 자리에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책이나 한 자 더 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까.

 

결국 사람은 자, 이제 나가자, 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못한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다자키 쓰쿠루는 너무나 쉽게 해냅니다. 상대 여성을 '이번에 잃으면 다시는 이런 사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너무나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 저는 솔직히 아연했습니다. 너무나 그대로였던 주인공이 너무나 극적으로 바뀌어버렸으니. 그의 한계는 여자주인공의 손을 잡고 '당신을 잃기가 싫어' 라고 말하는 것 까지일텐데. 다가와야 할 사람은 여자주인공일텐데. 사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쉽겠지만,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리고 내가 상대를 사랑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이라고 확신할까요. 여기서 여주인공은 주인공에게 순례를 떠나서 그를 버렸던 친구를 만나라, 라는 이야기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에서는 다자키 쓰쿠루의 행동 변화를 제대로 설명해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결국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것은 '개인적 판단' 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저 여주인공의 손을 붙잡고 외롭다, 라고만 말하기를 바랬습니다.

 

난 여전히 당신의 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팬일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소설의 별점을 3개를 주려다가 결국엔 별 한개를 더 추가를 하고 맙니다. 당신의 소설에 별점을 3개 이하로 주는 건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어렸던 나, 돈이 없어 밥먹을 돈을 아껴가면서 당신의 책을 구입하고,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당신의 소설 한 구절을 외우려 읽고 있었던 나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경제력을 어느 정도는 갖춘 -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 나는 당신의 소설을 덜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 당신의 소설을 보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 없나봅니다. 당신을 좋아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에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는 - 비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정말 외로웠던, 그래서 도서관 계단 한중턱에 앉아서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저의 치기를 그리워할때도 종종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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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15 18:49   좋아요 0 | URL
으앗. 저는 이 책이 제게 배송중인데 가연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상실의 시대]가 가연님에게 아주 의미 있는 책이었군요. 어느 한 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한 책이요. 저는 [상실의 시대]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제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을것 같아요. 다만 언급하신 마지막 부분만큼은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나네요. 저는 자신이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수화기를 통해 대답하는 와타나베를 보면서, 바로 이래서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가연님이 느끼는 이 책에 대한 서운함이 대체 어떤것인지, 저도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죠. 리뷰의 제목을 보니 실망한 것 같은데 별은 네개구나, 라고 생각하며 읽어내려갔더니, 역시, 하루키라서, 하나 더 준 거네요.

가연 2013-07-16 00:43   좋아요 0 | URL
ㅎㅎ 기대는 많이 했는데.. 뭔가 기대만큼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끄적거렸네요, 풋. 상실의 시대를 제가 너무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 덕분에 ttb들어왔는데.. 10원이 들어왔..ㅎㅎㅎㅎㅎ 어쨌든 감사합니다. 10원이라도 들어왔기에 다행스럽네요. 요즘 제가 서재활동을 거의 잘 안해서.. 그래도 글은 잘 읽고 있어요

희선 2013-07-16 00:40   좋아요 0 | URL

새 작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해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때는 순수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 한번 써두지 않으면 한단계 위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는 실험적으로 쓴 것이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기뻤지만 어떤 압박이 되었다.

지난번 작품 《1Q84》의 큰 뜻은 모두 3인칭으로 쓴 것. 3인칭은 어디에도 갈 수 있고,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악령》같은 종합소설을 쓰고 싶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내 감상으로도 머리와 의식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이야기. 이번에는 《1Q84》와 견주어 문학의 후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새로운 시험이다.

사건을 쫓는 것이 아니고 의식이 흘러가는 가운데 사건은 두고 간다. (다자키의 애인) 사라 씨가 쓰쿠루 군(지난날과 마주보기 위해)한테 나고야에 가라고 말하지만, 같은 식으로 나한테 쓰라고 말한다. 사라가 나를 이끌어간다. 이끌려가 무언인가를 경험하는 것으로 더욱 자신이 단단하고 크게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읽는 사람 가운데도 그런 느낌이 들면 좋겠다.

이번에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가서 자꾸 생각하다보니(등장인물들이) 멋대로 움직였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큰 관심과 공감을 갖게 되었다.

(다자키는 친구 넷과 이룬 공동체에서 잘려 버림받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고, 무엇이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는지는 거의 안다. 사람은 그렇게 다치면서 마음을 닫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조금 열어서 한단계 위로 가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자란다. 성장 이야기의 하나다.

나는 내 소설을 다시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는 일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소설은 아니지만(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나 유족을 취재한) 《언더그라운드》. 죽임 당한 20대 부인 이야기를 듣고 집을 나와 전철을 타고 있을 때 눈물이 나왔다. 한시간 정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을 때 되살아났다. 그 책을 쓴 일은 나한테 큰 경험이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29, 30살쯤에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쓸 수 있는 것을 조금씩 늘려서 쓰고 싶은 것을 거의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2000년쯤. (이번 작품도) 그냥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가운데서)



얼마전에 뭔가 없을까 찾아보니 하나 나오더군요 그런데 이것은 한부분입니다 이번 책에 대해 한 말만 옮긴 겁니다 많은 말은 없지만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다른 것은 아직... 이것저것 찾아두기만 하고 게을러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어떤 것은 읽다 말기도 하고... 핑계를 댄다면 네이버 사전을 쓰기가 조금 어렵게 되어서(낱말을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 때문인 듯합니다 사실 다른 것보다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랑 때문에 바뀌기도 하죠 처음에는 그렇더라도 나중에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겠죠 그러니까 쓰쿠루는 자신의 뜻으로 그렇게 지난날 일어난 일을 알아보려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그런 말을 하셨군요) 다른 사람 이름에는 색깔을 넣어주었지만 쓰쿠루한테는 넣어주지 않았죠 그게 쓰쿠루한테는 남들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본래 사람은 같기를 바라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쓰쿠루(作る) 이름(책 제목에는 히라가나'つくる'로 썼지만)에는 만들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만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저만의 생각입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하다니... 그냥 색이라는 것만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진 색을 하나로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한테나 그 사람만의 색은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자신의 어느 때를 떠오르게 하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희선

가연 2013-07-16 00:58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저도 읽었던 것 같네요. 아닌가? 제가 읽은 것은 다른 인터뷰인가 헷갈리네요. 사실은 작품 중에도 쓰쿠루의 의미가 나옵니다. 작가가 상당히 노리고 쓴 이름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받아서, 그 이름의 의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요. 특히나 소설이라면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실 쓰쿠루의 이름을 작중에서 풀이했을때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주위의 네 명의 친구는 각각 아카, 아오, 시로, 구로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시로와 구로, 그러니까 백색과 흑색을 색깔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흑백은 무채색이지요. 뭐, 무채색도 색채라 부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보면 - 두 색깔이 무채색이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흥미로운게, 결국엔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색채가 있든 없든 그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 처럼. 이는 핀란드에서 구로가 말하는 부분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또한 희선님께서 적으신 '그 사람만의 색' 과도 비슷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부여할 수 있냐면 - 그 사람만의 색은 사실 그냥 그 사람의 개성입니다. 굳이 색채로 표현될만한 성질의 것은 또 아닌거지요. 그래서 저는 이 색채, 라는 것이 어쩌면 그저 소설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더 실망감이 커졌었달까, 라는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푸념해두었답니다.

2013-07-17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0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shes Of Time (동사서독) O.S.T
록레코드 (Rock Records)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동사서독 -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 에 대한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동사東邪 황약사.

 

동사東邪는 동쪽의 사악한 사람이다. 동사 황약사는 사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음껏 친절을 베풀지만 설령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조금만 자신의 마음 밖으로 걸어나가면 주저없이 살수殺手를 쓴다. 동사 황약사의 제자였었던 매초풍과 진현풍이 서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날 때 황약사는 자신의 딸 황용때문에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좌절감에 사로잡힌 황약사는 애꿎은 자신의 다른 제자들의 다리를 모두 부수고 자신의 도화도에서 쫓아내버린다. 말하자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셈이다. 그에게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 허례는 헛된 것이었고, 그리하여 그런 것들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의도적으로 그런 것들을 모조리 무시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면 사람들이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고, 일파의 대종사, 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황약사는 그 이상한 성격에 비례하여 거의 대부분의 잡다한 지식을 그 몸에 지니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황약사는 자신의 섬, 도화도에서 은거할 뿐 나올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의 제자가 구음진경을 가지고 달아나지를 않았었다면, 그리고 그의 딸이 섬을 나오지 않았었다면 분명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때까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조금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섬에는 모든 곳에서 복숭아꽃, 그러니까 복사꽃을 볼 수 있었다. 왜 섬에 그렇게 복사꽃을 많이 심었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동사서독에서 친구로 등장하는 구양봉은 말한다.

 

그는 매번 이상하게도 동쪽에서 왔다. 몇 년 동안 계속 그랬다.

 

영화가 시작하면 황약사는 술을 한 동이 들고 친구 구양봉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구양봉에게 자신이 어떤 여자에게 술을 한 동이 받았는데, 이 술의 이름은 취생몽사醉生夢死이니, 이 술을 같이 마시며 취하자,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구양봉은 거절한다. 마지면 지난 일을 모두 잊을 수 있는 술, 취생몽사, 는 결국 황약사 혼자 마시게 되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한다.

 

구양봉은 술에 가득 취해 벽에 기대 앉아 있는 황약사에게 묻는다. 나를 기억하는가? 황약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구양봉에게 묻는다. 우리가 무슨 관계였지? 그런 황약사에게 구양봉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때 정말 친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2. 서독西毒 구양봉. 

 

서독西毒은 서쪽의 독랄한 인물이라는 단어다. 서독 구양봉은 백타산에 기거하며 수많은 독초와 독물을 다룬다. 독을 다루는 솜씨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기기묘묘한 독들 앞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물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전진파의 천하오절의 중신통, 왕중양은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남제 단지흥에게 찾아가 말한다. 내가 죽고 나면 분명 구양봉이 발호할 것이니 당신의 일양지와 나의 선천공을 합쳐 대항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단지흥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선천공을 전수받는다. 한 명의 오절을 상대하기 위하여 두 명의 오절이 그들의 절기를 합쳐야 할 정도였으니 구양봉의 무공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구양봉의 합마공의 일부를 배웠던 신조협려의 양과는 소용녀에게 무공을 배우기 전에는 그 합마공 만으로 정식제자로 무공을 배웠던 전진교 도사를 상대하였다.

 

하지만 구양봉이 정말로 무서운 점은 무공이라던가 독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독랄한 심성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공을 가지더라도 그 무공을 다루는 사람이 심성이 연약하다면 그 심성을 노려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 서독은 그 무공과 그 무공을 다루는 심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매우 달랐다. 대종사의 체면 같은 것은 그에게 없었다. 앞서 본 동사 황약사의 경우에는 그나마 대종사로서의 품격이 있었었지만 동사는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든 그런 품격따위를 버릴 수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말을 바꾸고, 이전의 말을 사과하지만 다시 상황이 좋아진다면 언제든 상대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동사가 세상의 법도를 무시한다면 서독은 세상의 법도를 깨부수려고 돌아다니던 사람이었다.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구양봉과 황약사, 그리고 홍칠공의 젊은 시절을 다룬 동사서독, 에서는 저만큼 독랄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무공에 미쳐 밖으로 떠돌던 구양봉. 결국 그 여자는 기다림에 지쳐 그의 형과 결혼한다. 그의 형과 그녀가 결혼하던 날, 구양봉은 그녀를 억지로 범하고 자신과 같이 떠나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거부하자 쓸쓸히 홀로 백타산을 떠난다. 물론 그녀도 구양봉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녀와 맺어진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왜 그녀는 그를 떠나버렸을까?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떤 감정과 기분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그때 그녀가 이런 말을 하려고 했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때 이 말을 삼키고 있었구나. 사랑에 빠진 연인은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듣고 싶은 법이다, 적어도 서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는 그 시간동안은.

 

하지만 그는 자존심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 말이 듣고 싶었는데도.

 

결국 구양봉은 그녀를 등지고,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한채 사막에 가서 청부업자로 활동하게 된다.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거절당하느니 거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게 된 시점은. 동사서독에서 나타난 그는 냉정하고 잔혹한 살수인 척 하지만, 끝내 입꼬리가 떨리는 것만은 감추지 못한다.

 

 

 

3. 독고구패獨孤求敗.

 

독고구패獨孤求敗는 홀로 패배를 구한다, 라는 의미다. 이름부터가 매우 광오한 느낌을 준다. 독고구패는 끝끝내 한 번도 패배를 당해본 적 없는 무사다. 결국 상대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김용이 쓴 작품중에서 가장 강한 무사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에 단골로 나온다. 물론 천룡팔부의 무명승 편을 드는 사람도 많다. 여하튼 독고구패와 무명승이 김용의 전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다, 라고 말을 한다고 하여도 절대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독고구패가 펼치는 검술은 독고구검이다. 총 9가지의 초식으로 등장하며, 김용 작품 중 소오강호에서 그 위력을 선보인다. 신조협려에서도 독고구패의 심득이 나타나는데, 양과는 독고구패의 심득 중 중검을 익히고 무림에 나가 서역의 무사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었다. 독고구패에 대한 언급은 그 후에는 거의 등장하지가 않는다.

 

동사서독에서는 독고구패에 대해서 창의적인 해석을 내렸다. 황약사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인이 수련하여서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바로 독고구패다, 라고. 영화에서는 황약사와 얽히는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용언과 모용연이 바로 그들이다. 우연히 황약사를 만난 모용언은 황약사에게 약속을 하게 만든다. 너에게 누이동생이 있다면, 약속하지, 내 그녀와 결혼할테니. 하지만 황약사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말은 먼지처럼 흩어져 메아리처럼 멀리서 간간히 울릴 뿐이었으니. 이에 모용언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황약사가 버린 것이라고 느끼고 구양봉에게 의뢰를 하게 된다.

 

황약사를 죽여주시오

 

왜 그를 죽이려고 하시오?

 

다른 여자때문에 내 여동생을 버렸으니까.

 

하지만 모용연의 생각은 달랐다. 모용연은 자신의 오빠인 모용언이 자신과 황약사의 사이를 가로막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구양봉에게 별개의 의뢰를 하게 된다. 자신의 오빠를 죽여달라고. 그러나 이상함을 느낀 구양봉에게 모용언과 모용연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결국 모용언과 모용연은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몸에 두 명의 인격이 깃들고, 각각의 인격은 남과 여로 나뉜다. 모용언은 남자의 인격이고 모용연은 그 누이동생으로서의 인격이다. 이를 알게 된 상태에서 다시 그들의 대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용연은 남자로서의 자신, 모용언이 죽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황약사를 자신과 더 가깝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모용언은 사랑의 대상인 황약사 본인이 죽기를 바랐다. 그를 사랑한 만큼 증오하였기에. 사랑에 빠졌었지만 이윽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둘 중 하나때문이라고 인간은 믿는다. 그들의 사랑에 장애물들이 있거나, 혹은 사랑의 대상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모용언과 모용연, 이들의 의뢰 내용은 저런 사랑이 깨진 후, 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준다. 장애물로서의 오빠, 혹은 잘못된 대상으로서의 황약사. 어떻게 보면 이 두가지 이유를 만들기 위하여 모용언은 모용연과 분리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알 수 있듯이 사랑의 실패에 명확한 이유는 없다. 어쩌면 가장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일런지도 모른다. 황약사가 사랑한다는 여인을 만나 죽이려고 했었지만, 끝끝내 검을 거둔 까닭은 죽이게 되면 황약사의 말을 자신이 긍정한다는 맥락이 되어버리게 때문이었다. 그녀를 정말로 황약사가 사랑하니까 자신이 죽이게 된 것이다, 가 되어버릴테니까. 그녀를 황약사가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기에. 

 

세상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케 하는가?

 

신조협려의 이막수는 원호문을 외워 자신의 실패한 사랑에 대하여 노래한다. 구양봉에게 자신의 속마음들을 토로한 모용언은 그날로 강호를 떠나 그 정을 가지고 무공만 연마를 계속 하면서 생활을 보낸다.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가 부디 거짓말이라도 하기를 바란다, 라고 호소하면서. 그녀의 무공은 은거 전에도 황약사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였으니, 은거 후 그녀의 무공수위가 어느정도나 강력해졌을지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녀를 진실로 강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저 이막수의 말 처럼 정情때문이리라.

 

 

 

4. 북개北丐 홍칠공.

 

개방의 방주 홍칠공은 인의와 협을 중시하면서 약자를 돕는 대종사이다. 그의 이명으로는 구지신개가 있는데, 9개의 손가락이라는 말 그대로 그의 손가락은 식지가 하나 없다. 북개의 유일한 단점이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크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 탐욕 때문에 의인을 죽게 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그것을 단죄하였다. 하지만 식지를 자른 뒤에도 여전히 식탐은 강하여, 그 약점을 노려 황용이 자신의 정인情人인 곽정에 그의 무공을 전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물론 아래에 소개할 동사서독에서는 다르게 전개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하다는 말이 있듯, 인의와 협을 중시하려면 그에 상응할 정도의 힘은 갖춰야 한다. 홍칠공에게는 두 가지 무서운 무공이 있는데 하나는 타구봉법이고 다른 하나는 항룡십팔장이다. 타구봉법은 말 그대로 미친 개를 때려잡는데 쓰는 봉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방방주의 진산절기이다. 그리고 아마도 개방방주로 취임할때에 반드시 익혀야 할 무공일 것이다. (황용이 후에 개방방주에 취임하는데, 그녀는 항룡십팔장은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타구봉법보다 더 위상이 높은 절기가 바로 항룡십팔장이다.

 

신조협려와 사조영웅전의 시대 보다 몇 백년 전, 송대에 소봉이라는 개방 방주가 있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걸쳐 한 번의 패배도 당하지 않았고, 오직 이 항룡십팔장 하나만으로 전 무림을 제패하였다. 당시 소봉이 무림을 종횡할때에는 항룡십팔장은 18개의 초식이 아닌 28개의 초식이었고, 따라서 항룡이십팔장이라고 불렸다. 소봉은 자신의 의제인 허죽과 함께 이를 정리하고는 18개로 간추려 이후 개방에 전해내려지게 하였다. 이것이 천룡팔부 개정판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봉이 작품 내에서 쓴 초식은 저 28개의 초식 중 일부 뿐인데, 특히 항룡유회, 라는 초식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는 주역의 건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봉이 주역에 통달하였다는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 통달하였다면 의제인 단예가 그랬을 것이다 - 굳이 초식의 힘을 발휘하는데에는 주역의 도움이 필요없었는지 그의 초식을 받아낼 수 있었던 인물은 없었다.

 

이런 항룡십팔장을 익혔었으니 홍칠공의 무공의 수위 또한 앞서 말한 동사서독에 가히 비견할 만하리라. 동사서독, 에서의 홍칠공의 무공은 젊을 때부터 서독과 비견할 만한 정도로 나타나 보인다. 앞으로 어차피 앞으로 거지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젊은 시절엔 거지가 아니었었던 북개는 천하제일의 검수가 되기 위하여 무림천하를 종횡하면서 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구양봉이 있는 사막에 도착하고는 함께 일을 시작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구양봉은 홍칠공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었지만 그의 무공이 탐나 함께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게 홍칠공은 앞서 의뢰를 받았던 사람이 해결못하였었던 사막의 도적들을 한 칼에 모조리 제압하였으니 인정안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칠공에게 아내가 찾아오면서 그의 생활은 바뀌기 시작한다.

 

벌써 며칠째 기다리는군.

 

쫓아도 안가는데 어쩌겠소?

 

누가 안된다고 했었나? 다 하기 나름이라네. 나도 예전엔 자네 같았지.

 

천하를 얻기 위해선 여자를 버려야 되는줄 알았던 구양봉은 자신의 모습과 홍칠공을 겹쳐보면서 후회를 내뱉는다. 하지만 여전히 홍칠공에게는 그의 아내가 버겁기만 하였다. 하지만 쫓아보내도 떠나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홍칠공은 점차 조급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홍칠공과 구양봉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양봉이었다면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죽임으로써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몇 번이고 후회를 하며 회한을 곱씹을 것이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하지만 물론 돌아간 뒤에는 구양봉이라면 몇 번이고 똑같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홍칠은 그와는 달랐다.

 

난 당신처럼 되기 싫소.

 

벌써 몇 번이고 구양봉에게 퇴짜를 맡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구양봉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인 원수들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거절당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돈이 없으면 몸이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기는 싫다', 고 말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는데 몸을 팔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니 그녀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홍칠공에게 의뢰를 하였다. 제발, 제발 남편을 죽인 저 무사들을 죽여주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대가는 이 달걀 하나 뿐입니다. 하지만 제발 제 의뢰를 받아주세요. 몇날을 고민하던 홍칠공은 검을 집어들고 뛰쳐나간다. 끝내 그는 자신의 아내 - 로 상징되는 그 무엇 - 를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격렬한 싸움끝에 무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돌아온 홍칠공의 손가락은 아홉 개였다.

 

난 당신처럼 되기 싫소.

당신은 달걀 하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테니

 

몇 번이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죽이고 후회할 수 있는 구양봉과는 달리 홍칠공은 후회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여자의 의뢰를 받아들였던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구양봉은 앞으로도 미래를 걷더라도 과거를 후회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홍칠공은 미래에는 미래의 일만을 바라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구양봉은 홍칠공에게 질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이 자는 자신이 걷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자신과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되리라. 가난한 여자는 자신의 의뢰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홍칠공을 보고는 구양봉에게 제발 치료해달라고 매달리지만 구양봉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다시금 가난한 여자에게 윽박지른다. 네가 뭔가를 의뢰하고 싶다면 몸이라도 팔아라, 라고. 구양봉은 홍칠공에게 질투를 느꼈지만, 이 질투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으니, 자신은 도저히 가지 못하는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질투였다. 애초부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고, 그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질투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기에, 그리고 구양봉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좌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그런 질투와 화를 마주한 가난한 여자는 죄책감에 자신의 몸이라도 팔아서 구양봉에게 치료를 부탁하려고 하지만 그런 그녀를 홍칠공은 꼭 붙든다.

 

기억하시오, 항상 당신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5. 그리고 다시, 동사東邪 황약사.

 

난 그녀에게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맛보지 않은 과일이야말로 가장 달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년 황약사는 구양봉의 형수를 찾아간다. 구양봉의 형수는 황약사에게 자신의 아들이야기와 함께 구양봉의 이야기를 매번 꺼낸다. 구양봉의 친구로 남아있는한 황약사는 계속 그녀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구양봉을 떠올리고, 그런 구양봉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를 그린다. 구양봉때문에 구양봉의 형수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그런 그녀는 그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멀다. 그녀들 사이에 황약사는 마치 전령처럼 오간다. 그래서 황약사는 항상 동쪽에서 구양봉을 찾아간다. 사실은 황약사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녀를 잊기 위하여 다른 친구의 아내와 불륜도 저지르고, 술김에 모용연에게 추파를 던지기까지 했었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그의 마음 속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황약사는 조용히 읊조린다. 구양봉의 형수가, 그녀가 사랑이라는 경연에서 우승하지는 못하였으리라. 차마 그녀를 사랑의 승리자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라고. 그녀는 사랑하는 구양봉을 버리고 그의 형과 결혼하였으며, 그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자신에게 비교하면서 나지막히 탄식한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졌다.

 

자신에게 복사꽃을 좋아하는 법을 가르쳐 준 그녀. 황약사에게는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항상 구양봉을 매개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약사는 그녀한테는 주변인이었을 뿐이니.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구양봉에 대하여 피를 토하듯 오열하면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다면서, 만약에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돌아가겠노라고. 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사랑을 하고,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로 끝을 맺는다. 왜 그럴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게 아닐까? 그게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사랑만 있더라도 그 사랑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왜 그와 결혼하지 않았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때로는 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오.

 

결혼 전야에 그녀는 구양봉을 만났다. 구양봉은 그녀보고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지만 그 말로는 움직이기에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구양봉은 억지로 범하고 사막으로 떠나고 만다. 구양봉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으며,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평생 구양봉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황약사는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때로는 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다고,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를 거라고 여기고 낮게 읊조렸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알지만 받아들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그대로 떠나갈 것이리라고.  그가 나를 붙잡으려고 내미는 손을 뿌리친다면 그는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게 거절당하기 전에 먼저 거절하는 구양봉이라는 것을. 끝없는 확인은 사랑의 속성이다. 여기서 그 둘의 사랑은 서로의 성격과 엇갈려 이윽고 파국을 맞게 되니, 이것이 바로 사랑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인 것이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구양봉이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구양봉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당하기 싫어서 먼저 거절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위하여 그녀는 마지막으로 취생몽사를 남긴다. 그녀는 이제 죽음으로 사랑을 완전히 떠나겠지만 홀로 살아갈 구양봉이 걱정된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미래에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며, 거절당하기 싫어서 먼저 거절하기에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고 과거만 그릴 사람이기에. 하지만 정작 구양봉은 마시지 않고 마지막, 아니 가장 처음에 황약사가 구양봉에게 권한 취생몽사를 마시고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다. 더이상 구양봉의 친구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자신이 사랑한 여자한테로 다가갈 수 없으며, 다가갈 수 없을 바에야 영영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지어니 - 동시에 그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때문이라 한다.

그해 부터 난 많은 걸 잊고 오직 복사꽃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황약사는 도화도, 복사꽃 핀 섬의 주인이 된다.

 

 

 

6. 마지막, 서독西毒 구양봉.

 

구양봉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그는 황약사가 남기고 간 취생몽사를 살짝 들이켜보지만 다시 내던져버린다. 그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그는 사막을 내려다보면서 독백한다.

 

잊으려 할수록 더 기억에 또렷히 남는다.

 

그녀는 그 술을 마시고 구양봉이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기를 바랐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영영 잊지 않기를 바랐다. 취생몽사는 술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와 구양봉이 서로를 마주볼 때 그녀가 말한 농담이기도 하였다. 농담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싶다면 그걸 간직한다면 언젠가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무엇인가를 간직하려고 한다면 그걸 잃어버리려고 한다면 어떨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슬퍼할바에야, 차라리 완전히 잊는 게 어떻겠는가? 하지만 잊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사랑을 그리며 살아가달라.

 

그리고 구양봉은 후에 설산에서 홍칠공과 겨룬 후 함께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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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5-31 02:39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채운국 이야기>가 조금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글 속에 나온 사람들 사랑이 엇갈리다니... 여기에는 없다 해도 잘된 사람도 있나요
홍칠공을 질투한 구양봉은 홍칠공과 싸우다 죽는군요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사랑도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잘되는 사람은 사랑도 한 사람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는 거겠죠^^


희선

가연 2013-06-04 01:00   좋아요 1 | URL
와, 채운국 이야기 아세요? ㅎㅎ 왠지 반갑습니다, 풋.

잘된 사람은 음.. 없네요, 천하오절중에는... 그나마 동사가 현상유지를ㅎ
ㅋㅋㅋ 동감합니다. 마지막에 잘되는 사람은 사랑도 한 사람이더군요.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전미옥.김윤희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자이 오사무, 의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늘 하던대로 서점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책을 한 권 집어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바로 이 인간실격, 이라는 책이었지요. 더군다나 한 번은 접해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라니. 바로 챙겨서 서점을 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느긋히 즐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이런 저런 일들 중간에 틈틈히 읽어나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한 번에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것을 선호하던 저로서는 고역이었지요. 하지만 틈틈히 읽어나가는 것에 장점은 있었습니다. 그 장점이란 중간에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이 장면은 왜 주인공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을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글은 그런 고민들을 일부나마 풀어놓는 그런 장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키워드를 잡아보겠습니다. 저는 감히 세 개의 키워드를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익살, 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 는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의 생애를 그대로 그린듯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 요조가 택하는 사회적 생존방식이 바로 익살, 입니다. 좀 더 부연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요조는 작중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사람이 두렵다고, 도대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른다고. 그렇기에 스스로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하지만 사회에 속해진 이상 (우리는 사회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연관이 어떠한 방식일지라도.)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어떻게든지 교류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약간 말을 바꾸자면,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든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 샤르트르의 말을 조금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샤르트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을 했는데, 그 첫째는 가학적인 관계, 그 둘째는 피학적인 관계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은 무관심이라고 나누어 놓았지요. 그러나 샤르트르는 여기에 덧붙이기를 이 세 가지 관계 중 그 어느 것도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할 것이다, 고 이야기합니다. 즉, 어떤 관계든 그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 중 하나라면, 그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이지요.

 

 저 말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맺은 모든 관계는 이윽고 실패할 것이고, 그 관계를 맺고자 발버둥치는 몸부림조차 모두 헛된 짓이 될테니깐요. 그렇기에 실제로는 다르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관계, 는 상대방과 나와의 피상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과 나의 진정한 상호이해를 통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샤르트르가 저렇게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것도 알만합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는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결국 대개는 원활한 관계를 위해 서로가 일정 부분 양보해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혹자는 자신을 희생해가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위의 샤르트르의 말을 따른다면 이 인간실격, 의 주인공 자신의 경우도 그 결말은 실패로 끝이 날 것입니다. 주인공인 요조, 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때 쓰는 기본 전략은 익살, 입니다. 그러니깐 자신이 광대가 되어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것입니다. 요조, 는 자신을 이상하게 꾸미거나, 잘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잘 못한다던가, 혹은 장난을 치는 등의 전략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요조, 를 보면서 웃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요조, 가 생각하기에는) 요조, 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아, 요조, 라는 인물은 무해한 인물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결국 피학적인 인간관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결국 실패가 예견됩니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예견은 그대로 맞아떨어지지요.

 

둘째로 제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여성입니다. 어떤 상징 체계에서의 여성을 살펴볼 경우 여성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대지, 생산력, 재생 등 같은 역할들 말입니다. 보통 대지, 의 상징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스 신화의 지옥의 여왕 (하데스의 아내가 된) 페르세포네와 대지의 신 데메테르 숭배 신앙과 거기에 따르는 엘레우시스 비의가 그랬고, 그 이전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의 지옥의 여왕이었던 에레쉬키갈이 그러했었던 것 처럼 (물론 특이하게도 이집트 신화에서는 천공을 다스리는 신이 여신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지라는 이미지는 방금 전 예로 든 여신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든 죽음과 자애,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인간 실격, 에 나오는 여성들과도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주인공이 처음 겪게 된 여자들은 일종의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창녀들에게 안기면서 다음과 같이 독백합니다. 그녀들에게 안길 때 만큼 포근했었던 적은 없었다고. 주인공은 정말 많은 여성들의 호의를 얻습니다. 하숙집 딸들이라던가 같은 서클서 활동을 하던 선배 그리고 여러 술집의 마담 등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익살, 을 떨었고 결국 그 익살로 맺어진 관계는 실패하리라, 라고 앞서 언급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패한 관계는 무엇으로 보상받아야만 할까요? 바로 여기서 여성이 그 해답이 됩니다. 자애로서의, 무한히 끌어안아주는 그런 상대로서의 여성. 주인공 본인은 여성들에게 호의를 받는 자신에 대하여 이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저주마저도 없었다면 주인공 자신은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 중에서 특히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여급이었던 쓰네코, 라고 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뒤에 다룰 요시코, 라는 인물입니다. 쓰네코는 주인공 요조, 보다는 연상이었는데 카페에서 여급으로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마치 온 몸에 쓸쓸함, 이라는 기류를 감고 있는 듯했던 그녀는 그 기류에 끌려온 주인공과 마음이 맞게 되고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피학적이었고, 그렇기에 결국 실패해왔던 주인공은 무서워져서 도망치게 됩니다. 우연스럽게 서로는 다시 재회하고 이윽고 현실에 지친 나머지 둘 다 죽음을 결심하게 되지요. 결국 쓰네코는 죽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끝내 살아남고 맙니다. 이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만한 장면이라고 여겨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쓸쓸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 마지막으로 사랑 (쓰네코가 죽은 뒤 주인공은 쓰네코에 대하여 내가 그녀를 사랑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으로 변주되는 장면이기에 더욱 그렇지요. 여기서 이 이미지는 앞서 여성에게 주어진 두 상징성들과 합치됩니다.

 

셋째로 신뢰입니다. 이 신뢰라는 개념은 인간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모든 기대를 걸었던 개념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익살을 부리다 결국 도망만 쳤던 주인공은 결국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때 다가온 사람이 앞서 언급한 요시코, 입니다. 요시코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인공에게 베풀며 주인공이 새 지평을 바라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부연하자면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했었던 겁니다.

 

우리는 종교를 언제 진심으로 믿게 될까요? 저는 모든 절망을 다 겪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종교를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이성의 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내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 내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일인가? 왜 이 세상에는 부조리가 존재하는가, 등등의 담론들 말입니다. 이성은 이러한 영역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답을 내리기에는 부족합니다. 결국 왜? 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렇게 잘 모르는 것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바로 이럴때 사람은 이성을 잠깐 제쳐두고 믿음, 에 귀의합니다. 대개의 경우 여기서 자신을 이끌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낳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이야기를 잠깐 빌리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스콜라 철학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세 가지 교의인 믿음, 소망, 사랑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뿌리를 가지며 각각에서 서로가 나온다, 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후대에 단테의 신곡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었었지요. 신곡의 천국편에서 단테는 '믿음에서부터 소망이 나오고, 거기서 사랑이 나온다.' 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믿음' 이지요. 그리스도는 어떨 때 올까요? 인간이 절망에 빠져서 구원을 요청할 때에 바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등장합니다. 결국 어떠한 어려움에 빠져도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닌 요시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을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시코는 그런 그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를 향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 믿음은 소망, 요시코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을 낳게 되고 결국 주인공과 요시코들은 사랑을 가지고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요시코는 (이중적인 의미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요시코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 신뢰자체가 독이 되어 주인공을 파국으로 몰아넣어버리지요.

 

어느날 잠깐 밖에 나갔다온 주인공 요조, 의 눈에 비친 광경은 요시코가 어느 장사꾼에게 능욕당하는 광경이었습니다. 요시코는 그런 일을 당한 뒤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아무 짓도 안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신뢰는 그런 식으로 배반당합니다. 요시코는 현실에 고정된, 피와 살을 가진 여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정신적인 존재가 되어 만인의 구원을 보장하는 그리스도와 달랐습니다. 그녀가 줄 수 있는 구원은 얇은 유리막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았던 것이지요. 그녀의 의심할 줄 모르는 마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찌만, 그것은 주인공 뿐이었고, 그런 무조건적인 신뢰가 다른 인간들마저 구원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절대자에게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이제 제목인 인간실격, 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인간실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일종의 반항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의미를 살피면 주인공 요조, 는 소설 초반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두렵다.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아버지의 연설을 들으며 뒤에서 욕하고 앞에서 칭찬을 하는 그런 위선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어서 마구 화를 내는 그런 무서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무시무시한 분노와 악의로 가득찬 그런 괴물들입니다. 주인공으로써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면 나는 차라리 인간이 되지 않겠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간실격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주인공의 속마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둘째 의미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체념적 의미로서의 인간실격말입니다. 설명하자면, 인간은 어떨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스페인의 민담을 보면 인간은 수치심을 가지기에 인간이리라, 라는 말을 합니다. 맹자는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 이 인간이 본래 가지는 성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단순히 접근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는,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하여 이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때 나는 스스로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별 수 없이 그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랑과 신뢰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가진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 - 쓰네코, 신뢰 - 요시코, 모두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신뢰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죄인가? 라는 물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닙니다. 감히 말하건데 신뢰는 죄가 아닙니다. 신뢰를 신뢰답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에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와 그 환경은 너무나 크기에 죄를 제대로 묻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체념에 빠지게 되고, 본인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사랑, 신뢰 모두를 잃었기에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고 그렇기에 인간실격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해석들보다도 오늘날 더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마 저 위에 잠깐 언급한 주인공의 독백부분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와 같은 부분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이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기도 합니다. 사회 환경은 복잡해져가면서 다양한 생활방식을 낳으며 사람들은 그 환경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옛날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현재는 더욱 더 그런 경향이 심화되어가기만 합니다. SNS와 같은 새로운 의사소통수단이 생기면서 개인과 개인의 거리는 가까워진듯하면서도 더 멀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사람일거야, 라고 생각해보지만 실제로 만났을 경우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여기 있는 내가 인터넷의 군집지성으로서의 나인지, 아니면 개별적 의미로서의 나인지 아리송해져만 갑니다.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혼잣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무다, 어쩌면 고독이다, 라고.

 

하지만 소설에서는 - 비록 소설에서는 실패했지만 조금이나마 해결책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결국 신뢰와 사랑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 해결책은 이상적이기에 분명 몇 번이고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그만두는 순간 무에 사로잡힐테니깐요.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두렵지 않은 것은 또 아니겠지요. 실패하게된다면 우리는 자조적으로 인간이 아니다, 와 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깐요. 끝없는 고독과 무에 사로잡힐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지 저런 해결책을 발전시켜나갈 것인지, 이 딜레마는 계속될 것 입니다.

 

 

 

 

 

p.s.  오랜만입니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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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8 12:16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가연님!

가연 2013-04-12 10:39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ㅎㅎ 방금 다락방님 서재에 들렀었는데 (물론 폰으로 접속을 하기는 하지만 덧글은 언제나 컴퓨터 접속시에만 남긴답니다) ㅎㅎㅎ

테레사 2013-04-08 12:20   좋아요 0 | URL
와우, 가연님은 남자셨군요!!

가연 2013-04-12 10:41   좋아요 0 | URL
아하하.. 음... 네, 전 남자랍니다.. 랄까, 이 글에서 제가 남자라는 것이 드러나나요?? 좀 궁금하네요, 쿡.

물론 다른 글 몇 개만 읽어보시면 제가 남자라는것이 아주 잘 드러나겠지만.. (이봐)

여하튼 테레사님께서 이렇게 댓글 남겨주신건 오랜만인것 같아요, 풋.

희선 2013-04-09 23:44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에 나온 요조가 익살스러운가요
이것을 읽었는지 다른 것을 읽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래도 다른 데서 보기는 했는데, 요조가 익살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거기에서는 어두웠던 것 같은데... 제대로 못 봤던 것인지도 모르죠
여자하고 죽으려고 했던 것은 생각나기도 하네요

요조가 사람을 잘 몰라서 괴로워했군요 이것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정말 요즘은 더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잘 몰랐지만...
신뢰와 사랑이라, 좋은 말이군요 그것을 믿어야 하겠네요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어깨를 다치시다니, 아주 심한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3-04-12 10:46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로는 말씀그대로 요조가 어둡고 음울히 그려집니다. 요조가 소설 내부에서 취하는 삶의 방식을 요조 스스로 말하길 '익살' 을 부린다, 라고 언급하지요. 그 부분에 대한 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네요, 하하.

신뢰와 사랑이라고 저도 저렇게 써놓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믿는 것, 과 신뢰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막상 저 스스로도 이런 말을 내가 믿을 수 있나? 싶은 생각도 들고, 풋.

어깨는 거의 다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뵙죠? 저도 반갑습니다, 풋.